김 동 곤 (쌍계제다 대표)
♠ 虎溪의 웃음소리
중국 노산 백련사(盧山 白蓮寺)의 고승 혜원(慧遠)이 베푸는 ‘백련사(白蓮社)’는 당대 최고의 사교모임으로 유명했다. 대시인인 사영운(謝靈運) 같은 이도 가입하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한 번도 초대받지 못했다.
하루는 ‘귀거래사(歸去來辭)’로 유명한 도연명(陶淵明)과 친교를 맺고자 초청했다. 연명은 술을 마셔도 좋다면 가겠다고 하였고, 혜원은 불교의 금주계(禁酒戒)까지 깨면서 초대했으나 연명은 모든 호의를 뿌리치고 백련사 멤버가입을 거부한 채 떠나버렸다고 한다.
혜원은 어느 날 또 한사람의 노장파 친구 육수정(陸修靜)과 함께 술좌석을 마련하고 도연명을 초청했다. 혜원은 불교를, 도연명은 유교를, 육수정은 도교를 대표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날 혜원과 육수정이 연명을 배웅하는 길에 너무나도 재미있는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호계교(虎溪橋)를 지나쳐 버렸다.
혜원은 매일 산보를 하는데 호계교를 절대 넘지 않는 것을 엄수하고 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세 노인은 파안대소했다고 한다. 이 세 현자들이 웃는 ‘호계지소도(虎溪之笑圖)’는 두고두고 중국의 유명한 화제(畵題)가 되고 있다.
우연이지만 200여년 전 조선의 강진 만덕산 기슭의 백련사(白蓮寺)부근에서 차를 매개로 호계지소를 생각케하는 청교(淸交)가 있었다. 우리나라의 세 분은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그리고 초의선사이다. 이 분들은 출신성분이나 성장환경, 종교, 나이, 성취하고자 하는 학문이 모두 달랐다.
다산은 추사와 초의보다 24세나 연상이었고, 실학자로서 세례명이 요한인 천주교인이었다. 그의 형 약종과 조카 정혜, 최초의 세례신도인 매부 이승훈 등은 신유사옥(辛酉邪獄) 때 모두 큰 화를 당하였고 본인도 백련사 부근에서 18년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추사는 초의와 동갑으로 신분을 초월한 평생 수어지교(水魚之交)를 나누었고 다산의 자제들과도 교우를 나누었다. 추사는 문과에 급제한 세도가 훈척으로 금석문에 뛰어난 학자이자 유명한 추사체를 완성한 서예가로 문화계의 천재였다.
초의는 호남의 승려로 ‘동다송(東茶頌)’, ‘다신전(茶神傳)’을 집필한 우리 차의 중흥조로 추앙받는 분이다. 이 세분은 차를 좋아했고 차 때문에 호남의 궁벽한 곳에서 나이와 신분을 초월한 아름다운 다담(茶談)을 나누었고 우리 차문화 부흥의 새로운 바람이 되었다.
♠ 茶山 선생의 ‘걸명소(乞茗疏)’
선생이 유배생활 중 적소를 백련사 인근 귤동으로 옮기고, 그 곳 승려 혜장(惠藏)과 초의를 자주 만나 차를 나누게 된다. 선생은 이때부터 여유당 등의 호 대신에 다산(茶山)이란 아호를 사용했다. 오랜 유배생활 중에서도 왕성한 저작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차가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내가 몹시 차를 탐하는 것은 약으로 충당하기 때문입니다. 독서의 묘한 버릇은 육우의 ‘다경(茶經)’ 세편을 모두 통달했고, 몸에 병이 깊어도 식욕 좋은 누에처럼 노동의 차 7잔을 다 마셨습니다. 하오니 제발 차 좀 보내 주십시오. 목마르게 바라는 것을 생각해서 은혜 베풀기를 아끼지 마십시오.”
이는 외로운 유배지에서 병든 마음을 달래려 혜장스님께 차를 구하는 애절한 편지이다. 선생이 귀양에서 풀렸을 때 유배지에서 학문을 가르치던 제자들과 우리나라 최초의 다회(茶會)를 조직하였다. 다회는 ‘다신계(茶信契)’로 다신계 절목 ‘약조’의 세 번째 항은 이렇다.
“곡우 날 어린 찻잎을 따서 덖음차 한 근을 만들고, 입하 전에 늦차를 따서 떡차 두 근을 만든다. 이 잎차 한근과 떡차 두근을 시찰(詩札)과 함께 부친다.”
♠ 秋史 선생 - 항상 차가 고픈 천재
당당한 세도가의 천재도 아버지가 윤상도의 옥사에 연류되어 유배 후 사약을 받자, 제주도와 함경도 북청에서 11년여를 귀양살이를 해야만 했다. 선생은 68세에 유배에서 풀려나자 불경과 참선에 몰입하며 봉은사에서 구족계를 받기도 했다.
졸박청고(拙樸淸高)하다는 서체인 추사체를 완성하였고, 서권기(書卷氣)와 문자향(文字香)이 풍긴다는 ‘歲寒圖’(국보 180호)를 남긴 천재도 항상 차를 탐하였다. 동갑내기 초의선사와는 평생을 문우(文友)이며 차 벗으로 초의에게 차를 빨리 보내라는 애교어린 편지가 전한다.
“내가 과천정과 열수장에 있을 때는 때를 잃지 않고 차를 보내 주었는데 금년에는 벌써 곡우가 지나고 단오가 되었는데도 두륜일납(초의선사)은 병이 났음인지, 혹은 차를 역마 꼬리에 메어 보냈는지, 유마병에 걸렸음인지. 이런 병들은 중병은 아니거늘 차는 왜 이다지도 더딘고. 이 이상 지체하면 마조의 활과 덕산의 방으로 몹쓸 버릇과 늑장의 근원을 응징할 터이니, 깊이깊이 경계하시오. 유하(5월)에 거듭거듭 이르는 바이오.”
‘완당이초의촉다서(阮堂貽草衣促茶書)’의 전문이다. 선생은 지리산 쌍계차를 중국 최고의 명차-용정의 첫물차보다 높이 평가했다. 향기로운 차를 구하기 위해서는 서화나 저서, 다구 등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 草衣선사 - 우리차의 중흥조
우리나라에서 차만 전문적으로 기술한 서적으로 지금까지 남아있는 책은 ‘다신전(茶神傳)’과 ‘동다송(東茶頌)’이 전부다. 공교롭게도 이 두 책은 초의선사의 저작이다. 지금 전하는 두 책은 모두 필사본으로, 순수하게 초의의 저술이냐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다.
특히 ‘다신전’은 중국의 ‘만보전서’에서 초출(抄出)하였다고 밝히고 있고, 화개동의 칠불사에서 무자년(1828년, 41세 때)에 등초했다고 적고 있다. 그는 ‘동다송’에서 다음과 갈이 차를 찬양하고 있다.
“차는 총명하여 막힌 것이 없네 싱그러운 영근을 신령스런 지리산에 의탁하였네. 신선 같은 풍모와 고결한 용채 종자부터 다르다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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