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2. 2. 02:01ㆍ경전 이야기
윤회에 대한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
무아와 윤회에 대한 이야기는 늘 논쟁거리입니다. 그러나 초기경전에 근거하면 논쟁이 일어 날 수 없습니다. 가르침을 이해 하지 못해서, 가르침을 알지 못해서 발생된 ‘무지’라 봅니다. 윤회를 부정하거나, 윤회에 대하여 반신반의 하는 자들은 자신의 생각과 경험의 한계 내에서 말합니다. 그것이 그 사람들의 한계일 것입니다.
강병균교수의 독특한 유전자연기론에 따른 유전자윤회론에 대하여 비판 했습니다. 이를 블로그에도 올렸고 불교닷컴에도 기고했습니다. 예상대로 반응은 뜨겁습니다. 윤회부정론자 또는 윤회회의론자들의 주장을 보면 단멸론사이트에서 주장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보지 않은 것, 경험하지 않은 것,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것은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강병균교수의 윤회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초기경전을 믿을 수 없다고
회의론자들이 주장하는 공통적 내용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의 하나가 경전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초기경전을 근거로 논리를 전개해 나갔음에도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경전이라는 것이 덧붙여지거나 조작된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불교닷컴 댓글을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초기경전이라고 해서 그대로 믿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의 언설과 이론이라도 과학적 지식이 없을 때 쓰여진 책들의 문구를 글자 그대로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ㅎ법우님)
경전을 다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선별해서 믿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믿고 싶은 것만 믿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초월적인 이야기나 신비적인 이야기 등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은 믿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또한 미개한 시대에 편집된 초기경전을 과학의 시대에 곧이 곧대로 믿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이라 합니다.
과학자의 오만
강병균교수의 글은 철저하게 과학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과학이란 무엇일까요? 철저하게 물질을 기반으로 하는 것입니다. 물리학, 생물학, 지구과학 등 모든 과학은 물질을 분석하고 연구 하는 등 물질을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요즘시대를 물질문명시대라 하는데 이는 물질을 기반으로 한 과학적 성과에 따른 것입니다. 물질을 기반으로 했을 때 모든 것을 물질위주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물질문명이 발달했다고 해서 정신문명도 따라서 발전했을까요?
불과 삼십년 전까지만 스마트폰은 없었습니다. 그때 당시와 지금의 인류의 정신문명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물질문명의 발달과 함께 정신적 능력도 비약적으로 상승했을까요? 스마트폰시대인 지금이나 삼십년전이나 정신적 능력은 크게 차이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부처님 당시 정신세계나 지금의 정신세계나 크게 차이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부처님 당시 과학적 지식이 없다고 해서 미개한 정신능력을 가졌다고 볼 수 있을까요? 이는 과학적 지식을 가진자들의 ‘오만’입니다.
과학은 철저하게 물질에 기반합니다. 그런데 과학은 정신능력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습니다. 물질을 분석하고 환원하여 과학적 원리를 밝혀 내거나 실생활에 유용한 물건을 만들어 낼 수 있어도 정신영역까지 넘보지 않습니다. 아니 넘볼 수 없습니다. 물질의 영역과 정신의 영역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과학적 지식이 없을 때 쓰여진 책들의 문구를 글자 그대로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라고 한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과 다를 바 없다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면 접할수록 윤회에 대하여 확신하게 됩니다. 반신반의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로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윤회에 대하여 반신반의하거나 부정하는 자들에게는 어떤 가르침이 필요할까요? 매우 탁월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맛지마니까야에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에 대한 경(M60)’입니다. 어떤 논리로도 이 가르침을 논파 할 수 없습니다.
경에서는 사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윤회부정론자에게 있어서 사후에 윤회가 없다면 환호 할 것입니다. 그러나 윤회하게 되었을 때 낭패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올린 글에서 “윤회를 믿어서 나쁠 것이 없다. 윤회를 믿지 않는 단멸론자들은 이 세상에서도 비난받고 저 세상에서는 악처로 떨어져 양쪽 세상에서 괴로움을 겪게 된다. 그러나 윤회를 믿는 자는 이 세상에서도 칭찬받고 저 세상에서는 선처에 나게 되어 있어서 양쪽 세상에서 즐거움을 누린다. 불자들은 유전자 윤회론자의 개인적 견해를 믿을 것인가 아니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을 것인가?”라고 표현 한 바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예수천국, 불신지옥”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비난합니다. 또 어떤 법우님은 블로그에 이런 댓글을 달았습니다.
“죄송하지만 연꽃님의 논리는
과격한 기독교인들의 논리와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윤회를 믿어서 나쁠 것이 없다...
강병균교수가 지적했듯이 그냥 선언일 뿐입니다.
기독교인들이 하늘나라를 믿어서 나쁠 것이 없듯이요.
윤회를 사실로 말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것을
정확하게 설명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설명에 불과할 뿐입니다.
저는 윤회를 말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물어봅니다.
그게 어떤 윤회냐고요
100만 불자가 있는데 100만 불자가 생각하는 윤회관이 다
다르다면 100만 개의 불교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윤회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윤회를 어떤 실체로
만드려는 모든 시도에서 부정적인 의도를 느낍니다.” (ㅇ님)
댓글을 주신 법우님은 과격한 기독교인들의 논리와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고 했습니다. 아마 맛지마니까야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에 대한 경(M60)’을 읽어 보지 않고 자의적 판단하여 이런 말을 한 것 같습니다.
경을 읽어 보면 부처님은 매우 합리적으로 윤회가 있음을 설명했습니다. 그 방식은 일명 ‘파스칼의 내기’라는 방식입니다. 이런 방식은 기독교에서도 종종 활용됩니다. 목사들이 천국에 대해 이야기할 때 파스칼의 내기 방식을 들어 설명합니다. 신을 믿을 경우 천국에 가지만, 신을 믿지 않을 경우 지옥에 간다는 식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파스칼의 내기는 한계가 있습니다.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것 등 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현세열반론(ditthadhamma)과 단멸론자들의 낭패(2013-03-03)”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습니다.
파스칼이 살았던 시기와 부처님이 살았던 시기는 다릅니다. 파스칼의 내기와 유사한 가르침이 맛지마니까야에 있습니다. 이로 본다면 파스칼의 내기에 대한 오리지널 버전은 니까야에 있는 셈이 됩니다.
확률이 반반이라면
부처님이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설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단멸론을 경계하기 위해서입니다. 부처님 당시 외도사상중에는 물질을 기반으로 한 단멸론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철저하게 업과 업의 과보를 부정합니다.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다고 합니다. 내세와 윤회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죽어 보지 않아서 죽음이후를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천국을 말하고 지옥을 말하는지 모릅니다. 또한 몸이 무너져 죽으면 정신도 소멸 되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지 알 수 없습니다. 아무도 죽어서 살아 온 자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내세가 있느냐 내세가 없느냐에 대한 것입니다. 내세가 없다면 단멸론자의 주장은 타당합니다. 아무리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를 해도 그에 대한 과보는 받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내세가 있다면 단멸론자들은 악처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내세가 없다고 하여 오욕락으로 살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욕락의 삶은 악하고 불건전한 것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착하게 살며 남에게 피해끼치지 않고 살면 되지 뭐”라 합니다. 하지만 지혜 없는 삶을 살았을 때 선행보다 악행을 더 많이 저지르게 됩니다. 오욕락의 삶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악처에 가기 쉬운 것입니다.
내세가 있는지 윤회가 있는지 범부들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처럼 삼명으로 깨달은 현자들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단멸론자들에게 “저 세상이 있다면, 이 사람은 양쪽에서 불운에 떨어진다.”(M60) 라 했습니다. 단멸론자에게 있어서 죽으면 저 세상이 없어야 하는데 저 세상이 있을 때 낭패 보기 쉽상이라는 것입니다. 저 세상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확률은 반반 입니다. 확률이 반반이라면 저 세상이 있는 것에 내기를 걸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현명한 자에게는 저 세상이 없어도 안심이고 있어도 안심입니다. 저 세상이 없다면 “만약 저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인간은 몸이 파괴된 뒤의 자신을 안전하게 만들 것이다.” (M60) 라 했습니다. 이는 무슨 뜻일까요? 주석에 따르면 “그가 내세에는 내세가 없으므로 현세에서처럼 고통을 겪지 않는다.”라는 뜻이라 합니다. 반면 현명한 자에게 저 세상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는 “만약 저 세상이 존재한다면, 이 인간은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날 것이다.”(M60) 라 했습니다. 이는 당연한 것입니다. 착하고 건전하게 사는 사람에게 죽음은 두려움이 아닙니다. 오히려 축복입니다. 천상과 같은 선처에 태어날 것이 때문입니다.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
‘착하고 건전한 삶(kusala)’을 살아 가는 사람에게 있어서 내세는 없어도 좋고 있어도 좋은 것입니다. 현세에서 칭찬받고 내세에서는 선처에 태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세가 있는지 없는지 반반의 확률이라면 있는 것에 내기를 거는 것이 훨씬 나음을 말합니다. 반면에 내세가 없다고 여겨 악하고 불건전하게 사는 사람들은 내세가 없으면 다행일지 모르지만 내세가 있다면 그야말로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고 말 것입니다. 악하고 불건전한 삶으로 인하여 현세에서 비난받고 내세에서 고통받을 것이기 때문에 양쪽으로 괴로운 것입니다.
내세가 있는지 없는지 반반의 확률이라면 있는 쪽에 내기를 걸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논리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을 믿으면 천국, 신을 믿지 않으면 지옥”과 같은 파스칼의 논리와는 다른 것입니다. 파스칼의 내기는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나 확률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파스칼의 내기와 비슷하지만 신의 존재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대신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해 말씀 했습니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행위에 따라 과보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 세상이 있을 때에 ‘저 세상은 있다.’고 견해를 갖는다면, 그는 올바른 견해를 갖는 것입니다.” (M60) 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정견입니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업에 대한 가르침은 어느 누구도 깰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장자들이여,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이란 어떠한 것입니까?”라며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설한 것입니다.
현자들에게 윤회는 사실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근거로 하여 글쓰기 하고 있습니다. 내세와 윤회에 대한 것도 경전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를 기독교의 “예수천국불신지옥”과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여 폄하 한다면 초기경전을 접하지 않은 무지로 봅니다. 스스로 무식을 폭로한 꼴이 될 것입니다. 아마 그사람의 한계일 것입니다.
수 많은 댓글을 접하면 집단지성의 힘을 느낍니다. 올려 주신 댓글을 음미해 가며 읽으면 몰랐던 것도 알게 됩니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재가불자에게 윤회의 교설은 당연히 ‘믿음’이죠. 본인들 입장에서야 아직 증명을 못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신앙이라 하고요.” (M법우님) 라는 말에 공감합니다.
보통불자들은 윤회를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회의론자들은 윤회가 있음을 증명해야 믿을 수 있음을 말합니다. 증명하기 전에는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설령 믿는다고 해도 반신반의 하는 것입니다.
현자들에게 있어서 윤회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범부들에게 있어서는 윤회는 믿음이라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에 대하여 매우 심오 하여 현자들’만이 알 수 있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럼에도 범부들이 자신의 육감에 따른 ‘깜냥으로 또는 과학적 사실을 들어 윤회에 대하여 부정하거나 반신반의 하는 것은 그 사람들의 한계일 것입니다. 가르침을 따르는 보통불자들에게 있어서 윤회는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은 맹목적 믿음이 아니라 합리에 바탕을 둔 확신입니다.
경전을 스승으로
저 세상이 있다고 믿는 것이 저 세상이 없다고 불신하거나 반신반의 하는 것 보다 훨씬 더 이득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이 그것입니다. 또 부처님은 다른 것에 의지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가르침 외에 다른 것에 의지 한다면 불자라고 볼 수 없습니다. 믿을 만한 사람이나 스승이 없거든 차라리 경전을 스승으로 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장자들이여, 그대들이 신뢰하는, 마음에 드는 스승이 없다면, 이러한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가지고 실천하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그대들이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가지고 실천하면, 그것은 그대들에게 오랜 세월 이익이 되고 행복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M60)
2016-10-06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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