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총의 재구성 - 국립중앙박물관 <금관총과 이사지왕>

2017. 3. 26. 07:20우리 역사 바로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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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관총의 재구성 - 국립중앙박물관 <금관총과 이사지왕>

                                                                               주수완(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 고고미술사학과 조교수)



   전시의 묘미란 하나의 작품이 어떤 작품과 함께 배열되고 전시되느냐에 따라 문맥이 달라지면서 항상 그 작품을 새롭게 보게끔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번 <금관총과 이사지왕> 특별전은 1921년에 발굴된 이래 뿔뿔이 흩어져 있었던 유물들이 정말로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으며, 이를 통해 각 유물들이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금관총에서 나온 각각의 유물들은 매우 중요한 것이어서, 신라 금관을 대표한다고도 할 수 있는 금관은 다른 고분에서 출토된 금관들과 함께, 유리는 유리끼리, 귀걸이는 귀걸이끼리 서로 모여서 각각이 빛을 발할 수 있는 높은 수준이었던 것이 어쩌면 이들을 한 자리에 모으기 어렵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번에 어렵게 한 자리에 모일 수 있었던 촉매는 물론 큰고리칼이라고 불리는 “환두대도”이다. 이 칼집에 들어간 채 매장된 신라인의 칼을 보존처리하는 가운데 칼집 맨 끝에서 “이사지왕(尒斯智王)”이라는 명문이 작년에 발견되었던 것이다.



금관총에서 발굴된 명문이 새겨진 칼. 아래가 ‘이사지왕’명 환두대도



   경주에는 많은 고분들이 분포하고 있고, 그 중에서 특별히 큰 고분들은 왕들의 무덤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지금까지 발굴에서 왕의 이름이 나온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 처음으로 왕의 이름이 출토됨으로써 학계는 비상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이사지왕”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마치 백제 무녕왕을 한편으로는 ‘사마왕’이라고 불렀던 것처럼, 이 이사지왕 역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신라 왕 중 한명의 또다른 이름으로 보는 견해와 함께 냉수리비의 비문에 기록되어 있는 ‘일곱 왕(七王)’을 통해 역사 속의 왕 이외에 제후급의 다른 왕들이 더 존재했을 것이라는 해석과 연관하여 그런 제후급 왕 중의 하나일 것으로 보는 견해까지 다양한 접근이 이루어졌다. 최근에는 이 칼이 피장자의 허리춤에서 발견된 것이 아니라, 머리맡에서 부장품들과 함께 발견되었고, 특히 피장자가 여성들이 주로 하는 것으로 알려진 큰고리귀걸이(이에 반해 남성은 가는고리귀걸이)를 착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아마도 이사지왕의 부인이거나 그에 준하는 여인이 금관총의 주인공일 것으로 추정되기도 했다.

   여하간 금관총이 이사지왕의 무덤이든, 아니면 그와 관련된 무덤이든 간에 신라 고분에서 나온 최초의 왕의 이름이라는 점에서, 이 왕이 누구인지만 밝혀진다면 신라고분의 절대연대가 확정될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황남대총 남분이 대체로 내물왕의 무덤으로 비정(이 경우 402년. 그러나 눌지왕릉설, 실성왕릉설도 제기되고 있다)되고 있는 정도이다. 금관총은 그 규모로 보아 왕릉급은 아니고, 그 옆에 위치한 봉황대의 배총(陪冢) 성격이 강하며, 따라서 봉황대의 피장자로 생각되는 자비왕이나 소지왕이 바로 칼에 새겨진 이사지왕일 것이라는 견해가 제기되어 있다.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두고 마치 금관총 안으로 들어가 듯이 전시실에 들어가 보자. 가운데에는 출토 상황을 재구성한 그림이 바닥에 누워있고, 지금까지 이 무덤을 대표하던 금관총보다 더 유명해져버린 “이사지왕명” 환두대도는 피장자의 머리 위쪽 부장품을 매납한 위치 옆에 또다른 칼과 함께 전시되고 있었다. 부장품으로는 무쇠솥, 초두(鐎斗), 네 귀 달린 청동항아리 등이 발견되었다.




이사지왕(尒斯智王) 명문. 



   역사학자에게는 “이사지왕”이라는 이름 자체가 중요하겠지만, 유물 자체를 분석하는 필자와 같은 연구자의 입장에서는 왕의 칼임에도 불구하고 글씨체나 그것을 새긴 방법이 그리 고급스럽지는 않다는 느낌이 든다. 그것은 이 칼이 왕이 직접 차는 칼이 아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청와대” 마크가 찍힌 시계를 증정용으로 돌리지만, 그렇다고 그 시계를 대통령이 차는 것은 아닌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그런데 이상한 것은 왜 글씨를 아래쪽에서 위쪽 손잡이 방향으로 새겼을까 하는 것이었다. 칼을 차면 대부분 칼집 끝이 아래로 향하게 되어 있는데, 그렇게 되면 왕의 이름을 실제로는 거꾸로 달고 다니게 되는 것이다. 보통 칼날에 글씨가 새겨지는 경우는 이사지왕 칼처럼 칼끝 쪽에서 손잡이 방향으로 새겨지기도 하고(대표적으로는 이순신 장군의 장검이나 중국 오월 부차의 검), 반대로 손잡이 방향에서 칼끝 방향으로 새겨지기도 한다(예를 들어 고려대 박물관 소장의 사인검·삼인검). 그런데 칼날의 글씨는 손잡이를 잡고 보기 때문에 칼 끝을 위로 하여 글씨를 읽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칼집은 들거나 차고 있는 경우가 많으므로 글씨가 거꾸로 놓이게 되는 것이다. 명문있는 고대 도검의 사례가 많지 않아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칼에 글씨를 새길 때의 방향성 문제도 한번 연구해보면 어떨까 생각이 들었다. 그에 따라 이 칼을 실제로는 어떻게 착용했을지, 혹은 부장용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닐지, 아니면 사용하던 칼을 부장하기 위해 급히 이름을 새긴 것은 아닌지 등의 성격도 밝혀질 수 있지 않을까.




    
금관총 출토 초두(鐎斗액체를 데우는 그릇). 



   이번 전시의 주인공은 아무래도 이사지왕의 칼이겠지만, 함께 출토된 다른 유물들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특히 청동 초두를 유심히 보자. 뚜껑에 새겨진 연꽃은 마치 백제 불상의 광배나 수막새기와에서나 볼 수 있는 양감이 풍부한 연판문을 닮아있다. 그 주변의 넝쿨문양 역시 무령왕릉 출토의 동탁은잔 뚜껑에 새겨진 산악문의 유려한 선을 보는 듯하다. 또한 초두의 주구와 손잡이 양 끝에는 용의 머리가 장식되어 있는데, 왠지 부여 능산리사지 출토의 <금동용봉대향로>의 받침에 있는 용두와 닮은 인상이다. 용봉향로만큼 장식적이지는 않지만, 조각 수준은 그에 비견되는 뛰어난 장인의 솜씨가 아닌가 한다. 이 초두는 현재 고구려에서 신라로 보낸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남아있는 사례가 극히 드문 고구려 금속공예의 수준이 백제 금동향로와 비견될 수 있음을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유물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금동 신발편(바닥)



   피장자의 발 인근에서 발견된 금동신발도 빠뜨릴 수 없다. 신발의 바닥면이 비교적 온전히 남아있어 전체 도안을 엿볼 수 있는데, 외곽으로는 마치 불상의 광배와도 같은 화염문이 둘러새겨졌다. 이러한 화염문과 비교적 유사한 표현은 아마도 <신묘명 금동일광삼존불>, 혹은 일본 호류지 소장의 <갑인년명 금동불광배>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금관총의 대략적 편년인 5세기말~6세기초와는 수십년 차이를 두고 편년되고 있는 불상이어서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 것인가도 앞으로 고민해야할 것 같다. 화염문 안으로는 마치 짚신의 새끼줄을 두른 듯 윤곽선을 만들고 그 안에 육각형 블록을 배열하여 도깨비와 머리 둘 달린 새를 번갈아 배치하였다. 새끼줄 중간중간 배치한 연판문은 조금 전 살펴본 초두 뚜껑의 연판문과도 상통한다. 과연 신발 바닥의 이러한 환상세계는 무슨 의미를 지녔던 것일까? 망자가 저승으로 걸어가는데 이런 도상은 어떤 도움이 되는 것이었을까?



유리잔
 


‘이모가이芋貝’ 마구장식 



   그 밖에 마치 와인잔처럼 다리가 달린 유리잔, 오키나와에서만 서식하는 소라고둥의 일종인 ‘이모가이’로 만든 사탕처럼 생긴 마구장식, 고구려의 장중한 기운이 느껴지는 청동 네 귀 항아리, 그리고 역시 금관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금관, 더불어 비록 부족하나마 발굴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유일한 기록인 1932년 간행의 발굴보고서 등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이제 이들 자료들을 기초로 금관총의 씨줄과 날줄을 다시 엮어야 할 때가 찾아온 것이다. 이번 전시는 상설전시관 1층 특별전시실에서 9월 28일까지 이어진다.




금관총 출토 금관  




글 주수완(고려대학교) 관리자
업데이트 2017.03.26 01: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