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鼎千秋——西周《大盂鼎》铭文拓片(高清合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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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鼎千秋——西周《大盂鼎》铭文拓片(高清合集)
2016-07-17  率我真  + 关注献花(0)




     大盂鼎(Great Yu Tripod),中国首批禁止出国(境)展览文物,又称廿三祀盂鼎,西周炊器。1849年出土于陕西郿县礼村(今宝鸡市眉县常兴镇杨家村一组,即李家村)。1952年藏于上海博物馆,1959年转至中国历史博物馆(现中国国家博物馆)。
鼎高101.9厘米,口径77.8厘米,重153.5千克。铭文291字,记载了周康王在宗周训诰盂之事。器厚立耳,折沿,敛口,腹部横向宽大,壁斜外张、下垂,近足外底处曲率较小,下承三蹄足。器以云雷纹为地,颈部饰带状饕餮纹,足上部饰浮雕式饕餮纹,下部饰两周凸弦纹,是西周早期大型、中型鼎的典型式样,雄伟凝重。大盂鼎真实地反映了当时的社会状况,具有极高的史料价值。


  《大盂鼎》又称盂鼎,之所以冠以“大“是为了区别于小盂鼎。这两个鼎同出,但小盂鼎原器已失,仅存铭文拓本。其书法体势严谨,字形,布局都十分质朴平实,用笔方圆兼备,具有端严凝重的艺术效果,是西周早期金文书法的代表作。
铭文记载康王向盂叙述周文王、周武王的立国经验。认为文王、武王得以卓越的业绩立国,主要是由于其臣属从不酗酒,每逢祭祀,认真、恭敬,而商王的亡国教训就在于沉迷于酒。由此告诫盂要效法祖先,忠心辅佐王室,并赐盂命服、车马、酒与邦司、人鬲等。盂在铭文中说明作此鼎也是为了祭祀其祖父南公。大盂鼎铭文是史家研究周代分封制和周王与臣属关系的重要史料,一向为史学家所重视。
大盂鼎是西周早期青铜礼器中的重器,因作器者是康王时大臣名盂者而得名,与之同出的小盂鼎已佚。西周周康王时期著名青铜器。鼎高一百.八厘米,口径七十八.三厘米,重一百五十三.三公斤,鼎身为立耳、圆腹、三柱足、腹下略鼓,口沿下饰以饕餮纹带,三足上饰以兽面纹,并饰以扉棱,下加两道弦纹,使整个造型显得雄伟凝重,威仪万端,内壁有铭文二百九十一字,内容为周王告盂,殷代因酗酒而亡国,周代忌酒面与,要盂一定要很好地辅助他,敬承文王武王的德政。同时记载给盂的赏赐。清代道光年间出土于陕西眉县礼村,一说出土于岐山。为该地郭氏所得,后归周雨樵。。这件周康王时的大盂鼎,是现存西周青铜器中的大型器。造型端庄稳重,浑厚雄伟,典丽堂皇,为世间瑰宝。西周早期的金文有瑰异凝重、雄奇恣放质朴平宝等数类。大盂鼎属于瑰凝重这一类,铭文大字,字体庄严凝重而美观,故在成、康时代金文中,以书法的成就而言,当以大盂鼎居首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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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关于大盂鼎的发现地址有两种说法,一说出土于陕西省岐山县礼村,另一说出土于陕西省眉县李村。由于年代久远,大盂鼎又经过了无数次的转手买卖,到底它是在哪里被发现的,已经没有人说的清楚了。这两个地方都有可能,也都没有绝对的证据。
陕西岐山有一处赫赫有名的周原,是周室的发源地。相传周室先祖为后稷,周室世居于豳地,到了古公亶父一代时,由于受到戎狄的威胁,举族迁至岐山脚下的周原,见这里水源丰足土地肥沃,便就此扎根,筑城开荒,繁衍后代,发展农业,使周族渐渐昌盛起来。直至文王武王父子联合周围小国伐商定鼎天下,这才离开了岐山周原这块宝地,建都丰镐,开创两周八百年江山。
岐山礼村就坐落在周原上,这里从西汉时代就陆续有周青铜器被发掘出土,历来就是公认的周器之乡。大盂鼎在这里被发现完全是合乎情理的。但另一方面,出土于礼村的文物相较于同属周原的凤翔村来说数量上要少的多。而且作为周室发端之地,这里发掘出来的青铜器或者是西周之前到早期的,或者是西周晚期的,与大盂鼎同时代的文物并不多。礼村出土的毛公聃季簋也许算一件,但就楼主个人的观点,铭文风格相差还是比较大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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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另一方面,眉县李村也是西周青铜器出土的重地,在这里出土的盝驹尊也是西周青铜器中的精品。
因此不论岐山还是眉县都有出土大盂鼎的环境。但根据目前所流传的关于大盂鼎的经历来看,大家普遍还是偏向岐山多一点。可惜的是和大盂鼎同时出土的百十件青铜器,包括小盂鼎都已经失落,我们无从得知更多出土地的信息了。
大盂鼎制作于周康王时期。根据鼎中铭文我们可以知道这个鼎是康王二十三年九月册封一个叫做盂大臣时所使用的礼器。在铭文中,康王对盂进行了苦口婆心义正词严的训示,大致内容下面会八到,总体来说分为三部分,首先是官话文章忆苦思甜,警示盂要对商王朝的灭亡警惕以史为鉴。然后又表示自己对盂所倾注的希望以及从小看着他长大的交情,最后是赏赐给盂的各种恩赐,配备的官员,以及分给他的奴隶之类的礼物清单。
整篇铭文291字,字迹圆润雄壮,结构端谨,气韵生动,历来被视为青铜器铭文中不可多得的书法上品。直到今天,还被看作是成康时代金文最高成就。

  西周 大盂鼎 铭文图片

释文:隹(唯)九月王才玟王受天有厥匿匍有四宗周令盂王大令在珷王方畯正厥民若曰盂不显嗣玟乍邦辟在{雨于}御事虘又酉无敢酉舌有子灋保先王殷边侯田{雨于} {此须}□(烝)祀无敢□有四方我殷正百辟率酉夔古天异临耳昏殷述令隹肄于酉古丧巠敏朝夕入令女盂井乃谰享奔走畏嗣且南公王曰盂廴西召夹我一人{米豆}四方疆土易女鬯死□戎敏谏{雨于}我其遹省一卤冖衣巿罚讼夙夕召先王受民受舃车马易女且南公旂用□(驭)至于庶人臣十又三白辶兽易女邦□六百又五十又九人鬲千又五十四白人鬲自夫易尸□王夫<辶亟>□迁(遷)自厥土王曰盂对王休用乍若□(敬)乃正勿且南公宝鼎灋朕令盂用隹(唯)王廿又三祀
译文:
  九月王在宗周册命盂。王这样说:“伟大英明的文王承受了上天佑助的重大使命。到了武王,继承文王建立了周国。排除了那个奸恶,普遍地保有了四方土地,长久地治理着百姓。办事的人在举行饮酒礼的仪式上,没人敢喝醉,在举行柴、烝一类的祭祀上也不敢醉酒。所以天帝以慈爱之心给以庇护,大力保佑先王,广有天下。我听说殷朝丧失了上天所赐予的大命,是因为殷朝从远方诸侯到朝廷内的大小官员,都经常酗酒,所以丧失了天下。你年幼时就继承了先辈的显要职位,我曾让你就读于我的贵胄小学,你不能背离我,而要辅佐我。现在我要效法文王的政令和德行,犹如文王一样任命两三个执政大臣来任命你,你要恭敬地协调纲纪,勤勉地早晚入谏,进行祭祀,奔走于王事,敬畏上天的威严。”王说:“命你盂,一定要效法你的先祖南公,”王说:“盂,你要辅助我主管军队,勤勉而及时地处理赏罚狱讼案件,从早到晚都应辅佐我治理四方,协助我遵行先王的制度治民治疆土。赏赐给你一卣香酒、头巾、蔽膝、木底鞋、车、马;赐给你先祖南公的旗帜,用以巡狩,赐给你邦国的官员四名,人众自驭手至庶人六百五十九人;赐给你异族的王臣十三名,夷众一千零五十人,要尽量让这些人在他们所耕作的土地上努力劳动。”王说:“盂,你要恭谨地对待你的职事,不得违抗我的命令。”盂颂扬王的美德,制作了纪念先祖南公的宝鼎,时在康王在位第二十三年。

  陈介祺旧藏大盂鼎拓本 西泠印社2014秋拍

   这篇铭文是一篇非常标准的叙述文,开宗明义的点名时间:九月;地点:宗周:事件:王册命盂。先科普一下,西周文王武王父子相继在丰水镐水之间建立了丰京镐京,武王所建立的镐京又称宗周(即西安),与文王所建丰京合成丰镐。到成王时又在洛水附近建立了成周(即洛阳)。成周的建立主要是为了对东部进行控制,但周天子的主要活动还是在宗周。
建立成周的周成王,就是这篇铭文里的第一男主角周康王的父亲。康王名钊,在位二十六年,在成王和他的统治期间,国力强盛,经济文化繁荣,社会治安良好,因此这段时期被称作成康之治。“成康之际,天下安宁,刑错四十余年不用”便是说的这段时期。

大盂鼎铭文高清图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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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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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중국 진대(秦代) 이전에 있었던 노예제 사회의 미술.

목차       

  1. 청동기
    1. 조소
      1. 회화

                     

           청동기

           문헌기록에 의하면 노예제 사회의 형성시기인 하대(夏代 : BC 23~18세기)에 "구리로 무기를 만들고, 정(鼎 : 세발솥)을 주조하여 사물을 본떴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하대의 물질문화는 이미 청동기시대에 접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발견된 청동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허난 성[河南省] 옌스[偃師] 얼리터우[二里頭]에서 출토된 것으로, 꺾창(戈)·척(戚)·작(爵)이 대표적이다. 이들 청동기는 종류가 많지 않고 비교적 작으며, 무늬도 아직 발달하지 않은 것들이다.


           은대(殷代 : BC 18~12세기)는 중국 노예제 사회의 중요한 발전단계였다. 이 시기에는 청동의 주조기술도 매우 발달하여, 도구와 무기뿐만 아니라 청동제 예기(禮器)도 많이 만들어졌다. 은대 전기의 청동기는 허난 성 정저우[鄭州] 얼리강[二里岡]과 두링[杜嶺], 후베이 성[湖北省] 황피 현[黃陂縣] 판룽청[盤龍城] 등지에서 출토된 정·가(斝)·유(卣) 등이 대표적인 것이다.

           이들은 모양새에 짜임새가 있고 몸체도 얄팍하면서 고르며, 무늬는 간결한 것이 특징이다. 은대 후기의 청동기 주조기술은 더욱 정교해졌으며, 청동기의 종류도 많아지고 모양도 품위있고 견고해졌으며, 복잡하고도 웅장한 무늬가 매우 특이해졌다. 자주 보이는 무늬의 도안으로는 도철문·운뢰문(雲雷紋)·기문(夔紋)과 사람얼굴·용·호·코끼리·봉황·매미 등의 무늬가 있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허난 성 안양[安陽]의 은허(殷墟)에서 출토된 사모무방정(司母戊方鼎 : 높이 133㎝, 무게 약 875㎏)·녹면방정(鹿面方鼎)·우방이(偶方彛), 안후이 성[安徽省] 푸난[阜南]의 용호문준(龍虎紋尊), 후난 성[湖南省] 닝샹[寧鄕]의 사양방준(四羊方尊)·봉문과유(鳳紋戈卣)·인면방정(人面方鼎) 등이 있다.


           서주(西周 : BC 12~8세기) 초기는 노예제 사회의 최고 번영기로서, 이 시기의 청동기도 은대 후기의 것을 본떠서 품위있고도 전아한 풍격을 지녔다.

           그러나 주기(酒器)는 줄어들고 식기(食器)는 늘어났으며, 그릇 표면에 긴 명문(銘文)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청동기 가운데, 산시 성[陝西省] 춘화 현[淳化縣]에서 출토된 수수세대정(獸首銴大鼎 : 높이 117㎝, 무게 226㎏)은 모양이 장중하고 무늬가 깔끔하며 새롭다. 또한 메이 현[郿縣 : 또는 縣 : 치산(岐山)]에서 출토된 대우정(大盂鼎), 시안[西安] 신왕[新旺]의 수면구련문정(獸面勾連紋鼎), 랴오닝 성[遼寧省] 커쭤[喀左]의 반룡수면문뢰(蟠龍壽面紋罍) 및 언후우, 베이징[北京] 팡산[房山]의 우두문백구역(牛頭紋伯矩鬲), 상하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덕정(德鼎) 등도 서주 초기의 전형적인 청동기이다.


           서주 중·후기에는 노예제가 쇠락기에 접어들었다. 청동기로는 보(簠)·수(盨)·이(匜)·종(鐘)·박(鎛) 등의 새로운 종류가 나왔고, 모양과 무늬도 날로 간단해져갔다. 도철문은 이미 많이 쓰이지 않게 되었고, 환대문(環帶紋)·절곡문(竊曲紋)·중환문(重環紋)이 널리 유행했으며, 긴 명문이 많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전형적인 청동기는 푸펑[扶風]에서 출토된 대극정(大克鼎)·장반(牆盤)·중의부령(仲義父이미지), 메이 현의 녹방이, 구궁[故宮]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추궤(追簋), 상하이 박물관에 있는 사호박(四虎鎛) 등이다.


           춘추시대(BC 770~476)에는 제후들이 패권을 다투면서 노예제도는 점차 무너졌다.

        이 시기에 제후국에서는 청동기 주조가 늘어나 각 지역에 따라 다른 풍격을 이루었다. 춘추시대 중기 이후에는 모인법(模引法)과 실랍법(失蠟法)을 받아들여 채색이 화려한 반훼문(蟠虺紋)과 반리문(蟠螭紋)이 유행했다. 연(燕)·조(趙)·채(蔡) 등의 제후국에서는 청동기에 홍동(紅銅)을 끼워넣거나 금을 섞어넣는 새로운 기술이 나타났다. 그리고 오(吳)·월(越)·초(楚) 등의 제후국에서는 화려한 전자체(篆字體)의 명문이 나왔다.


           허난 성 신정[新鄭]에서 출토된 춘추시대 후기의 연학방호(蓮學方壺)는 구상이 참신하고 모양이 정교하며 무늬가 생동감이 있어서, 거대한 변혁기의 사회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전국시대(BC 475~221)의 청동기는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정교한 그릇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도금·상감·조각 및 금이나 은의 혼합 등의 장식기법도 광범위하게 활용되었다. 또한 살아 움직이는 듯한 모습의 수렵, 활쏘기, 뽕나무 따기, 연회, 전쟁 및 누각·정자 등의 도안이 유행했다.

        조소

          선진시대의 조소(彫塑)는 옌스 현 얼리터우에서 출토된 양·호랑이·거북·두꺼비 모양으로 만든 토기에서 그 초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은대 전기의 작품으로는 정저우 얼리강에서 출토된 돼지 모양의 토기, 허베이 성[河北省] 가오청 현[蒿城縣] 타이시[臺西]에서 출토된 사람얼굴 모습의 토기인 개가 있다. 은대 후기의 조소는 종류가 다양한데 은허에서는 칼이 씌워진 노예 토우(土偶), 돌로 만든 올빼미·소·호랑이가 출토되었다. 이들의 형상은 예스러우면서도 질박하고 장식미가 농후하다.


           옥으로 조각한 인물상 및 두상(頭像)은 사실적이며 생기가 있다. 또 옥으로 만든 코끼리·봉황·용·호랑이 등의 작품은 색깔과 광택이 아름다워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은허에서 출토된 효준과 후난 성 리링[醴陵]에서 출토된 상준(象尊)은 은대 후기의 청동제 조소작품 가운데 걸작으로 꼽힌다. 서주에서 춘추시대에 이르는 동안의 조소작품 가운데 중요한 유물로는 뤄양[洛陽]에서 출토된 서주시대의 옥인(玉人), 바오지[寶鷄]의 서주시대 무덤에서 출토된 사슴·말·물고기 모양의 옥패(玉佩), 코끼리·새·호랑이 모양의 청동제 준(尊), 산둥 성[山東省] 린쯔[臨淄]에 있는 춘추시대 말기 무덤에서 출토된 소형토기 무녀용(舞女俑) 등이 있다.


           전국시대에는 사람을 죽여서 무덤에 함께 묻는 순장(殉葬) 대신에 인형을 묻었기 때문에 사람 모양의 조각작품이 빨리 발전했다. 이들 중에는 산시 성[山西省] 창즈[長治] 분수령(分水嶺)에 있는 전국시대 무덤에서 출토된 소형 토기 시녀용(侍女俑)·무녀용이 있다.

           이외에도 허난 성 뤄양과 신양[信陽], 후베이 성 장링[江陵], 후난 성 창사[長沙] 등지에서 출토된 납·청동·나무로 만든 인형이 있다. 이 가운데 특히 중요한 것은 후베이 성 쑤이 현[隨縣]의 증후묘(曾侯墓)에서 출토된 편종(編鐘)의 틀 위에 있는 '종거동인'(鐘鐻銅人)으로, 가장 큰 것은 75㎝ 정도이다. 비례가 정확하고 모양이 사실적인 이 조각품을 통해 인상(人像)의 조각기법이 점차 성숙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국시대 동물조각의 탁월한 성과를 보여주는 유물들도 각지에서 출토되었다.

        회화

           선진시대의 회화는 초상화가 주류를 이룬다.

        서주의 명당(明堂) 벽화에는 요(堯)·순(舜)·걸(桀)·주(紂) 등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어, 군주의 선악에 따른 흥망의 교훈을 나타냈다. 전국시대 초나라의 묘당(廟堂) 벽화에는 천지신령의 진기하고도 신비스러운 모습과 옛 성현들의 기이한 행적을 그렸다. 남아 있는 선진시대의 그림 유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창사의 초묘에서 계속해서 출토된 2폭의 백화(綿畵)이다. 이는 각각의 무덤 주인인 남녀가 용을 부리거나 용과 봉황의 인도를 받으면서 천국으로 날아오르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밖에 증후묘의 옻칠한 널[棺]·상자, 신양의 초묘에서 출토된 금슬(錦瑟), 창사 초묘의 사방 벽 등에 그려진 신비한 그림 등이 있다. 이것들은 모두 전국시대의 진기하고도 신비한 그림의 면모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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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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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약 한위 이전에 쓰이던 글자체이다. 협의로는 주문과 소전을 가리키고 광의로는 갑골문, 금문, 주문, 춘추전국시대에 통용되던 문자와 진대에 창시된 소전을 말한다. 갑골문은 전기에는 큰 글자가 많고 글자가 웅장하고 기이하며, 후기에는 작은 글자가 많고 아주 정밀하다. 금문은 은대에서 서주 초기까지는 방필용절이었고, 서주 중엽 이후 동주 초기에는 원필용전으로 바뀌었다. 춘추시대에는 글자체가 점차로 가늘면서도 힘이 있었으며, 전국시대의 글자체는 혼란스럽고 기이하게 변했다. 주문은 주서 또는 대전이라고도 하는데, 현존하는 석고문이 대표적인 것이다. 대전은 협의로는 주문만을 가리키고, 광의로는 갑골문·금문·주문과 춘추전국시대에 통용되던 문자를 두루 가리킨다. 주문의 기초 위에서 발전한 소전의 글자체는 둥글고 가지런하다.


        전서

        전서

           한자 서체의 종류 중 하나, 대전과 소전의 2종류가 있다.

        한위(漢魏) 이전에 쓰이던 글자체이다.


           협의로는 주문과 소전을 가리키고 광의로는 갑골문, 금문(金文), 주문, 춘추전국시대 각국에서 통용되던 문자와 진대(秦代)에 창시된 소전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광의의 전서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갑골문은 청대(淸代)말인 1899년부터 지금까지 10여 만 편(片), 총 4,600개 정도의 다른 글자가 출토되었고, 현재 식별된 것만도 2,000여 개쯤 된다. 이는 은대(殷代) 후기 270여 년 간의 정치·경제·문화 상황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갑골문은 오늘날 볼 수 있는 한자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문자구조는 단순한 것에서 합성된 복잡한 것으로 변화를 보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형성자가 많이 나타나고 부호화의 정도가 높다. 이것은 장기간에 걸쳐 발전해온 것으로 오래 전에 이미 문자가 생겨났음을 설명해준다.


           갑골문 계열은 칼을 이용하여 글자를 새겼으며, 붓으로 쓴 것도 있다.

        글자의 풍격은 전후 2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의 문자는 큰 글자가 많고 글자가 웅장하고 기이하다. 후기에는 작은 글자가 많고 글자의 풍격이 아주 정밀하다. 지금도 그것을 모방하여 배우는 사람들이 있다. 예전에는 금문을 '종정문'(鐘鼎文)이라 불렀는데, 실제로 은·주(周)·춘추전국시대의 종(鐘)·정(鼎)·준(尊)·작(爵)·병기·전폐 등의 청동기 위에 새긴 모든 글자를 포함한다. 그 서법의 풍격은 은대에서 서주 초기까지는 갑골문과 비슷하여 붓을 각지게 하여 꺾어쓰는 필체인 방필용절(方筆用折)이었으며, 대우정(大盂鼎)이 대표적이다.


           서주 중엽 이후 동주 초기에는 붓을 둥글게 하여 돌려쓰는 필체인 원필용전(圓筆用轉)으로 바뀌었으며, 산씨반(散氏盤)과 모공정(毛公鼎)이 대표적이다. 그 후 춘추시대에 이르러서는 붓을 사용하게 되어 글자체가 점차로 가늘면서도 힘이 있었다. 제(齊)나라의 중강박(仲姜鎛)이 대표적이다. 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시대가 혼란하여 금문(金文) 자체(字體)도 혼란스럽고 기이하게 변하여 알아볼 수 없는 것도 있다. 고대문자는 이때에 이르러 분열현상을 보인다.


           은·주 시대의 금문서법은 청대 중엽 이래로 모사하는 사람이 차츰 늘어났다. 저명한 사람으로는 장정제(張廷濟)·오대징(吳大澂)·이서청(李瑞淸) 등이 있다. 이서청은 "석고문에서 팔분체를 습득하고, 금문에서 전서를 습득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거친 붓을 사용하여 힘차면서도 변화가 있어 독특한 풍격을 이루었다.


           주문은 '주서' 또는 '대전'이라고도 하는데, 〈사주편 史籒篇〉에 기록된 데서 생겨난 이름이다.

        주나라 선왕(宣王) 때 태사(太史) 주(籒)가 편찬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주 왕실이 동쪽으로 천도한 후 진이 주 땅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춘추전국시대에 진나라에서 통용되었다. 현존하는 석고문이 바로 이 글자체의 대표적인 것이다. 최초의 석고는 현재 베이징 구궁 박물관[北京故宮博物館]에 보관되어 있는데, 이것은 중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석각문자이며, 역대로 그 서법의 예술성이 높이 평가되어왔다.


           근대의 서화가 우창숴[吳昌碩]가 이 글자체에 가장 정통했는데, 웅건·소박하면서도 다채롭고 기백이 웅대한 풍격을 이루었다. 대전 역시 광의와 협의의 2가지 뜻이 있다. 협의로는 단지 주문만을 가리키고, 광의로는 앞서 말한 갑골문·금문·주문과 춘추전국시대에 각국에서 통용되던 문자를 두루 가리킨다.


           소전은 대전에 대립되는 호칭으로 진전(秦篆)이라고도 한다. 이는 주문의 기초 위에서 발전하여 형성된 것이다. 진의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 후, 승상 이사(李斯) 등이 진나라 문자를 기초로 하여 표준글자체로 전국문자를 통일했는데, 이것이 바로 소전이었다. 이사는 각 지역의 이체자를 모두 추려내어 한자의 규범화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소전의 형체는 둥글고 가지런하다. 이사가 쓴 것으로 전해지는 〈낭아대각석 琅玡臺刻石〉·〈태산각석 泰山刻石〉이 남아 전해지고 있는데, 역대로 소전서법 예술의 최고 본보기로 여겨진다.


          한·위 이후 예서·팔분체가 성행한 이래 예서와 팔분체의 서법으로 소전을 쓴 것이 많은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삼국시대 오(吳)의 〈천발신참비 天發神讖碑〉이다. 북조와 초당(初唐)의 비석머리에도 역시 소전을 팔분체와 같은 체제로 많이 썼다. 성당(盛唐)에 이르러 이양빙(李陽氷)이 나와 팔분체의 기세를 모두 없애고, 이사를 종(宗)으로 삼았다.


           이후 1,000여 년 간 소전서법의 명가로 대개 이들 두 이가(李家:이사와 이양빙)를 꼽는다. 청대 중·말기 등석여(鄧石如)·윤병수(尹秉綬)·조지겸(趙之謙) 등이 측필로봉(側筆露鋒)을 사용함으로써 비로소 새로운 풍격이 출현하게 되었다.

        한국의 전서체 예로는 단군시대의 옛 비로 전하는 구월산의 고전비(古篆碑), 최치원이 쓴 진감선사비의 전액(篆額)인 당해동진감선사지비(唐海東眞鑑禪師之碑)의 9자 등이 있다. 또 조선 중기의 허목(許穆)은 초전의 특색을 살린 독특한 전서를 쓴 것으로 유명하다.→ 서예



        허목

        조선시대의 남인, 후반 2차례의 예송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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