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의궤 제1책 / 현재 사용하는 보태평무(保太平舞) / 정대업무(定大業舞) 도설 外

2017. 4. 13. 06:01차 이야기



 종묘의궤 제1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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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사용하는 보태평무(保太平舞) 도설

영녕전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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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인은 모두 진현관(進賢冠), 남주의(藍紬衣), 검은색 가선을 두른 적상(赤裳), 적말대(赤抹帶), 백포말(白布襪), 오피리(烏皮履) 차림을 한다. - 왼손에 약(籥)을 들고, 오른손에 적(翟 꿩 깃)을 든다. -


[주D-001]남주의(藍紬衣) : 남색 명주로 만든 상의이다.
[주D-002]적상(赤裳) : 적색 하의(下衣)이다.
[주D-003]적말대(赤抹帶) : 적색 띠로, 당나라 때에는 혁대(革帶)를 사용했고, 송나라 때에는 말대를 사용했다.
[주D-004]백포말(白布襪) : 흰색 베로 만든 버선이다.
[주D-005]오피리(烏皮履) : 흑색 피혁으로 만든 신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선종순 (역) ┃ 2008




종묘의궤 제1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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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사용하는 정대업무(定大業舞) 도설

영녕전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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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변(皮弁)을 착용한다. 복색(服色)은 문무(文舞)와 같다. - 앞의 두 줄은 검(劍)을 들고, 다음 두 줄은 창(槍)을 들고, 다음 두 줄은 활과 화살을 든다. -

ⓒ 한국고전번역원 ┃ 선종순 (역) ┃ 2008





종묘의궤 제1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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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의 문무(文舞) 도설 《오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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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일(六佾)이다. 헌가의 북쪽에 있다. 일(佾)마다 6인이니, - 왼손에 약(籥)을 들고, 오른손에 우(羽)를 든다. - 모두 북쪽을 상위로 한다. 둑(纛) 2개는 육일의 북쪽에 있어 춤을 인도한다. - 공인은 모두 진현관, 남의(藍衣), 검은색 가선을 두른 적상, 적말대, 백포말, 오피리 차림을 한다. -


[주D-001]육일(六佾) : 일(佾)은 악무(樂舞)의 줄을 말한다. 한 줄에 6명씩 6줄을 이루는 것이 육일인데, 제후가 사용하는 악무이다. 천자는 팔일(八佾), 대부는 사일(四佾), 사(士)는 이일(二佾)을 사용한다.
[주D-002]남의(藍衣) : 남색의 상의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선종순 (역) ┃ 2008





종묘의궤 제1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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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의 무무(武舞) 도설 《오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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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일이다. 헌가의 북쪽에 있다. 일마다 6인이다. - 앞의 두 줄은 검을 들고, 다음 두 줄은 창을 들고, 다음 두 줄은 활과 화살을 든다. - 각(角), 둑(纛), 북〔鼓〕, 금(金), 백기(白旗) - 서쪽은 적기(赤旗)이다. - 를 각각 1개씩 무일(舞佾)의 동쪽과 서쪽에 둔다. 모두 북쪽을 상위로 한다. 나각〔螺〕 1개는 무일의 뒤쪽 한가운데에 두고, 다음에 대각(大角), 다음에 대둑(大纛), 다음에 황룡대기(黃龍大旗), 다음에 황기(黃旗)를 둔다. 또 대금(大金)과 큰북〔大鼓〕을 각각 1개씩 대둑의 동쪽과 서쪽에 - 금을 동쪽에, 북을 서쪽에 둔다. - 둔다. 백호기(白虎旗) 1개는 황룡대기 동쪽에, 현무기(玄武旗) 1개는 또 그 동쪽에 두고, 주작기(朱雀旗) 1개는 황룡대기 서쪽에, 청룡기(靑龍旗) 1개는 또 그 서쪽에 둔다. 둑 1개는 황기 동쪽에, 금 1개는 또 그 동쪽에 두고, 각 1개는 황기 서쪽에, 북 1개는 또 그 서쪽에 둔다. 각, 둑, 북, 금, 흑기(黑旗) - 서쪽은 청기(靑旗)이다. - 를 각각 1개씩 나각, 대각, 대둑, 황룡대기, 황기의 동쪽과 서쪽에 두되, 백기 - 서쪽은 적기이다. - 의 뒤쪽에 둔다. 모두 북쪽을 상위로 한다. - 공인은 모두 피변, 남의, 검은색 가선을 두른 적상, 적말대, 백포말, 오피리 차림을 한다. -


ⓒ 한국고전번역원 ┃ 선종순 (역) ┃ 2008





국립국악원 추천 음악 - 제사에서 춤을 추다. 일무(佾舞)




게시일: 2015. 10. 28.


제사에서 춤을 추다. 일무佾舞 ▼더보기 클릭!

가을도 점점 깊어져 이제는 제법 바람이 싸늘해지고, 벌써 한해를 마무리해 가는 11월이 되었습니다.

가을 추수가 모두 마친 이 시기에 우리 선조들은 한 해의 수확을 감사하고

내년의 평안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를 올렸습니다.


이렇게 지내오던 제사의식은 여러 시대를 거쳐 지금의 종묘제례나 문묘제례로 그 명맥을 잇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제사의식인 종묘제례는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신위가 있는 종묘에서 지내는 제사로

5월 첫째 일요일에 거행됩니다.


또 고려시대에 들어와 현재까지 전하는 문묘제례는 공자를 비롯한 유교 학자를 기리는 제사의식으로

봄과 가을에 성균관에서 개최하고 있습니다.

이 두 제사의식은 현재 우리나라 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와 제85호로 각각 지정되어 보존·전승하고 있습니다.

또한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은 2001년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선정되어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제사의식이 우리나라의 무형문화재, 더 나아가 세계의 무형유산으로 인정받은 이유는

그 의식 안에 예술성 있는 음악과 노래, 그리고 춤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사에 춤이 편성된다고 하면 생소하겠지만,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악, 가, 무의 세 가지를 모두 편성하여
연행하는 종합예술형태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나라의 큰 제사의식에도 당연히 음악, 노래, 춤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이번에 소개해 드리고 싶은 주제는 바로 우리나라 제사의식에서 추는 춤, 일무입니다.

일무는 줄을 지어 추는 춤이라는 뜻으로 실제 제사 때는 팔일무라하여 8명이 8줄로 서서 총 64명이 같은 동작으로 춤을 춥니다.

일무는 고려시대 대성아악과 함께 우리나라에 들어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지만

중국에는 일무가 남아있지 않아 그 의미가 더 큽니다.


일무는 나라의 큰 제사의식에서의 춤이니만큼 많은 사람이 같은 동작을 정적으로 추는 춤으로

경건하면서도 웅장함을 보여줍니다. 평소 국악원 공연에서도 종묘제례악을 들을 기회는 종종 있었지만

그 음악에 맞춰 추는 일무를 볼 기회는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일무를 함께 무대 위에 올린 2014년 국립국악원 정악단의 정기공연을 오늘 추천하고자 합니다.

조선시대 선왕의 문덕과 무공을 기리는 일무의 동작을 의미있게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 국립국악원은 매주 토요일 오후3시 토요명품공연을 개최합니다.

2015년 11월 7일 공연에서 종묘제례악과 일무를 만나 보실수 있습니다.

- 글. 국립국악원 김소리 학예연구사





종묘제례악 보태평 중 희문, 기명, 귀인 - 국악방송


                                             


게시일: 2012. 5. 29.

이 프로그램은 방송통신발전기금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위대한 유산, 세계를 만나다 - 종묘제례악 보태평 중 희문, 기명, 귀인]

종묘제례는 국왕의 효심이 하늘과 땅의 도움을 받아 나라와 백성이 평화롭기를 기원하는 축제적인 성격의 의례이며,

종묘제례악은 종묘제례 의식을 장엄하게 치르기 위하여 연주하는 기악과 노래, 춤을 말한다.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은 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와 제1호로 지정되어 보존 전승되고 있으며,

2001년 5월 18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일시 : 2012년 4월 25일 (수)
19:30
장소 : 국립국악원 예악당
공연명 : 위대한 유산, 세계를 만나다






HOME > 제례악/팔일무 > 일무




   춘추좌전에 의하면 주인공의 신분에 따라 8일무, 6일무, 4일무, 2일무 등이 추어지는데 인원수에 대해서는 2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진나라 두예(杜預)의 이론으로 각 열과 행의 인원수가 같아 팔일무는 64명(8열8행), 육일무는 36명(6열6행),사일무는 16명(4열4행), 이일무는 4명(2열2행)이라는 주장이고, 반면에 후한의 복건(服虔)은 각 열이 8행씩으로 구성되는 것으로 팔일무는 64명, 육일무는 48명(6열8행), 사일무는 32명(4열8행), 이일무는 16명(2열8행)을 주장하는 이론이다.
   우리나라는 전자의 학설을 따르고 있는데 고려 예종11년(1116) 6월 중국으로부터 아악이 들어올 때 문무와 무무에 필요한 옷과 장식을 각 36건씩 일습을 들여와 제사에 사용하였다. 조선시대의 일무는 세종 때 회례악무로 창작되었고 세조 때 종묘에 사용하기 시작하였는데 문무인 보태평지무와 무무인 정대업지무가 있다.




   역대 선왕들의 문덕을 기리는 춤으로서 보태평지악에 맞춰 왼손은 구멍이 세 개 뚫린 관악기인 약을, 오른손에는 긴 막대기에 꿩 깃털로 장식한 적(翟)을 들고 추는 춤이다. “악학궤범”에 보면 악공 38인 중 춤 36인, 둑 2인 모두 진현관을 쓰고 남빛 명주옷에 검은 선을 두른 치마를 입으며 붉은 띠를 두르고 희 베버선에 검은 가죽신을 신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춤사위는 양(陽)의 순리를 본떠 왼쪽 손발을 들어 왼쪽으로 도는 좌선(左旋)이고 몸을 구부리는 동작부터 하는데 정적이며 “구름에 달 가듯이”흘러가는 부드러운 동작을 취한다. 이 춤은 영신 · 전폐 · 초헌례 때 추게 된다.




   선왕들의 무공을 칭송하는 춤으로 일정한 형식이 없으며 정대업지악에 맞춰 나무로 만든 칼과 창, 활과 화살을 손에 쥐는데 아헌례와 종헌례 때 추게 된다. 악공은 모두 71명으로 가죽 변(辨)을 쓰며 의상은 보태평의 복장과 같다. 36명의 무원을 제외한 나머지 35명은 각(角), 둑, 북, 징, 소라, 오방색의 깃발 등 여러 의식용 기물을 들고 춤에 맞춰 움직이므로로서 의장대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춤사위는 음의 반을 본떠 오른쪽 손발을 들어 오른쪽으로 먼저 도는 우전이고 몸을 펴는 동작을 우선한다. 전체적으로 간결하여 “은어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듯” 강한 동작으로 검술을 하듯 추는 춤이다. 조선전기에는 6명씩 6줄을 맞춘 36명의 일무원이 춤사위를 짓는 육일무였으나 황제국 임을 선포한 대한제국시대부터는 8명씩 8줄에 64명의 일무원이 춤을 추는 팔일무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보태평과 정대업의 춤은 위와 같이 종묘제례 때 추는 춤과 향악정재(鄕樂呈才)로서 연향에서 기녀가 추천 춤의 두 종루가 있다. 또한 반주음악이 보태평과 정대업으로 나뉘듯, 양의 속성을 지닌 문무와 음의 속성을 지닌 무무로 나뉘고 이들은 각각 손에 드는 의장물이나 춤의 동작이 바뀌고 상징적인 의미도 달라지게 된다.
현재 일무원들의 복장은 문무와 무무 모두 복두와 홍주의(紅紬衣) · 남사대(藍絲帶) · 목화(木靴)의 차림이다.








 

종묘대제

종묘제례, 어가행렬, 절차, 일무, 제례악 정보 제공.





종묘제례 & 종묘제례악 2부 세종이 만들고 세조가 완성한 종묘제례악


게시일: 2014. 7. 21.





명륜당서 펼치는 팔일무


업로드된 날짜: 2011. 11. 24.

14일 오후 서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 명륜당 앞마당에서 석전대제 악무 공연이 열린 가운데
성균관대 무용학과 학생들이 '팔일무' 공연을 펼치고 있다.

석전대제 악무 공연은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로 지난 10월 13일 시작해 오는 12월 19일까지
매주 월요일 오후 2시에 공개되며 1부에는 석전대제, 2부에는 유교문화를 배경으로 한 악무공연으로 구성된다.



팔일무(대만 타이페이 공자묘)


게시일: 2013. 9. 2.

YouTube 동영상 편집기(http://www.youtube.com/editor)를 이용하여 동영상을 만들었습니다.




평창동계올림픽 G-1년 페스티벌 국악한마당 - 팔일무 (크라운해태 임직원) (15분9초)




게시일: 2017. 3. 6.
2017년 2월 11일(토) PM 2:00
강릉종합운동장 특설무대



문화예술백과

보태평(保太平)

작품/자료명
보태평(保太平)
구분
정재      
개요

   보태평(保太平)은 정재로서의 보태평과 종묘제례의식에서 사용되는 일무(佾舞)의 보태평 두 가지가 있으며, 내용이 조금 다르다. 보태평이 일무에 쓰인 시기는 세조 9년부터이다. 보태평이란 악곡 명이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시기는 세종 29년(1447) 6월 4일이다. 뒤에 또 문·무(文武) 두 가지 춤곡조를 제작하였는데, 문(文)은 ‘보태평(保太平)’이라 하고 무(武)는 ‘정대업(定大業)’이라 하여 악보가 각각 1권씩이다. 여기서 보태평(保太平) 춤곡조는 문덕(文德)을 밝힌 것이고, 정대업(定大業) 춤곡조는 무덕(武德)을 밝힌 것이다. <세종실록> 악보에는 정대업지무악(定大業之舞樂)과 보태평지무악(保太平之舞樂), 발상지무악(發祥之舞樂)이 권 138~139까지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고취악(鼓吹樂)을 일러 수보록·몽금척·근천정·수명명이라 한다. 이들은 각각 임금의 일로 조종의 공덕을 성대하게 형용하는데 미흡하여 어려움이 있었다. 때문에 세종이 고취악과 향악으로서 새로운 악을 창제하였으니, 정대업·보태평·발상·봉래의라 한다.”라고 하여 세종이 정대업과 보태평을 만든 이유가 드러나고 있다. 수보록·근천정·하황은·수명명은 각각 조상의 사적(事跡)만을 노래했을 뿐이므로, 여러 조종의 공덕을 골고루 배려하지 못했다는 반성 하에 향악(鄕樂)과 고취(鼓吹)에 근거를 두어 창제하였던 것이다.

내용

   <악학궤범(樂學軌範) 권5>의 '시용향악정재도의(時用鄕樂呈才圖儀)'에 기록된 보태평 정재의 진행순서는 아래와 같다. 여기[妓] 서른 여섯 사람은 모두 단장(丹粧)에 잡식(雜飾)을 하고 약과 적(翟)을 들고 손을 여미고 선다. 악관이 희문(熙文)(인입(引入))을 연주한다. 박을 치면 족도하고, 기명(基命)을 연주할 때에 춤을 시작하고, 귀인(歸仁)을 연주할 때에 춤을 시작하고, 형가(亨嘉)를 연주할 때 춤을 시작하고, 집녕(輯寧)을 연주할 때 춤을 시작하고, 융화(隆化)를 연주할 때에 춤을 시작하고, 정명(貞明)을 연주할 때에 춤을 시작하고, 대유(大猷)를 연주할 때에 춤을 시작하고, 역성(繹成)(인출(引出))을 연주할 때에 춤을 추면서 물러가고 음악이 그친다. 절차가 다 그치지 않았으면 계속해서 역성을 연주하고 춤을 춘다. 


 보태평(保太平)

                                       
연계정보     관련도서< 신역 악학궤범>, 이혜구 역주, 국립국악원, 2000< 한국전통무용연구>, 장사훈, 일지사 1977

        art.culture.go.kr/knowledge/encyclopediaView.do?code_value=C&vv.. 





[캠퍼스 이모저모] 한국의 문화유산 성균관대 ‘고유례’

파이낸셜뉴스   입력 : 2012.02.28 10:40 | 수정 : 2014.11.06 19:06

 

   성균관대학교(총장 김준영)는 지난 24일(금) 2011학년도 전기학위수여식을 거행하였다. 

이날 학위수여식에는 학사 3146명, 석사 1464명, 박사 202명 등 총 4812명이 학위를 받았다. 학위수여식에 앞서 김준영 총장을 비롯한 교무위원 33명은 성균관 대성전을 찾아 4812명의 졸업을 알리는 고유례를 지냈다.
‘고유례’란 학교의 입학·졸업·건물 신축 등 큰 행사가 있을 때 공자사당을 찾아 이를 고하는 성균관대만의 고유의식이며, 춘계·추계 석전(釋奠)때처럼 성균관대 무용학과 학생 64명이 팔일무(八佾舞)를 추었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졸업생 김제훈(성균관대 고분자시스템공학과)씨는 “다른 학교의 일반적인 졸업식과 달리 성균관대만의 전통 학위수여식으로 인해 학교의 자부심을 느끼게 되는 하루였다” 라고 말했다.

특히, 이번 행사는 학생들이 참여하는 첫 ‘고유례’로서 더욱 뜻깊은 시간이 되었다.

파이낸셜뉴스 fncast 채진근, 박동신PD



디지털 악학궤범 : 보태평

          

   보태평(保太平)은 세종대왕이 고취악(鼓吹樂)1)과 향악2)에 바탕을 두고 창제한 신악(新樂))의 하나이다. 정대업이 조상의 무공을 칭송한 정대업3)에 반하여 보태평은 문덕을 찬양한 내용이며, 그 춤을 보태평지무(保太平之舞), 음악을 보태평지악(保太平之樂)이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모두 보태평이라고 한다. 보태평은 희문ㆍ기명ㆍ귀인ㆍ형가ㆍ집녕ㆍ융화ㆍ현미ㆍ용광정명ㆍ중광ㆍ대유ㆍ역성의 11곡으로 구성되었다. 


   1626년(인조 4) 선조의 광국중흥의 공을 칭송하기 위하여 선조의 악장으로 중광을 정명과 대유의 사이에 두었고, 1765년(영조 41)에는 용광과 정명을 하나로 합쳤다. 따라서 성종조 향악정재 보태평과 현재 보태평은 각각 11곡으로 곡수는 동일하지만, 구성은 다르다. 그리고 위 『악학궤범』의 기록과 같이 현재 종묘제례악 보태평 연주에서도 절차가 그치지 않으면 마지막 역성을 계속 연주한다. 

보태평 11곡 중에 희문은 인입장이고, 기명ㆍ귀인ㆍ형가ㆍ집녕은 목조(穆祖)ㆍ익조(翼祖)ㆍ도조(度祖)ㆍ환조(桓祖), 즉 태조 이전 4조(四祖)의 악장이고, 융화는 오랑캐를 회유한 태조의 덕을 노래한 것이고 나머지는 두루 통용된다. 


   보태평은 정대업과 함께 회례연(會禮宴)4)에 사용되었는데, 1463년(세조 9) 세종이 지은 보태평과 정대업을 고치도록 하고, 1464년(세조 10) 새로 지은 정대업과 보태평을 종묘에서 사용하였다. 그러나 보태평과 정대업은 종묘제례악으로 사용되는 동시에 상당 기간을 회례연 등 연향에서도 사용되었다. 성종조에도 이 곡들은 회례연 등 연향과 종묘제향에 모두 사용되었다. 
   연향에서 추는 향악정재5)로서의 보태평 춤의 배열은 악생이 추는 종묘제향의 보태평 춤의 배열과 다르다. 그런데, 지금은 연향에서 사용된 보태평 정재는 전하지 않는다. 


 『악학궤범』 성종조 향악정재의 보태평에는 향당교주라고 되어 있는데, 향당교주는 향악기와 당악기의 합주를 말한다. 지금 종묘제례악의 보태평도 아악기와 당악기, 향악기의 합주로 연주된다. 음악적 내용에 있어서는 연향의 보태평 음악과 제례악 보태평이 동일하다고 생각된다. 춤의 배열은 6명씩 6줄, 즉 36인으로 구성된 육일무(六佾舞)이다. 


   향악정재 보태평은 여기(女妓)가 춘다. 여기 서른 여섯 사람은 모두 단장에 잠식을 하고 약과 적을 들고 손을 여미고 선다. 악관이 희문(熙文) 인입(引入)을 연주한다. 박을 치면 족도하고, 기명(基命)을 연주할 때 춤을 시작하고, 귀인(歸仁)을 연주할 때에 춤을 시작하고, 형가(亨嘉)를 연주할 때 춤을 시작하고, 집녕(輯寧)을 연주할 때 춤을 시작하고, 융화(隆化)를 연주할 때에 춤을 시작하고, 현미(顯美)를 연주할 때에 춤을 시작하고, 용광(龍光)을 연주할 때에 춤을 시작하고, 정명(貞明)을 연주할 때에 춤을 시작하고, 대유(大猶)를 연주할 때에 춤을 시작하고, 역성(繹成) 인출(引出)을 연주할 때에 춤을 추면서 물러가고 음악이 그친다. 절차가 다 그치지 않으면 계속해서 역성을 연주하고 춤을 춘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보태평이 현재와 달리 연향에 사용된 예가 특히 세조조에 많이 보인다. 예를 들면, 세조 10년 9월 3일(계축)에 세조가 근정전(勤政殿)에 나아가서 양로연(養老宴)을 의식(儀式)과 같이 베풀었을 때 기생(妓生)과 공인(工人)이 정대업(定大業)ㆍ보태평(保太平)의 악(樂)을 연주하니, 왕세자(王世子)와 재추(宰樞)ㆍ노인(老人)들이 차례대로 술을 올리었다. 또한, 세조 11년 1월 1일(기유) 임금이 근정전(勤政殿)에 나아가 회례연(會禮宴)을 베풀었는데, 같은 해 6월 2일(무인) 임금이 근정전(勤政殿)에서 문소전 삭제(文昭殿朔祭)의 음복연(飮福宴)2)을 베풀었을 때, 보태평지무(保太平之舞)와 정대업지무(定大業之舞)의 악(樂)을 연주하였다. 세조 12년 11월 25일(계사)에 등준시(登俊試)에 합격한 최적(崔適) 등이 전문(箋文)을 받들어 은혜를 사례하고 규모가 큰 궁중 잔치인 풍정(豊呈)을 바치니, 임금이 근정전(勤政殿)에 나아가서 이를 받고, 정대업(定大業)ㆍ보태평(保太平)의 음악을 연주(演奏)하게 하였다.



한민족정보마당




종묘의궤 제1책
                   
정대업무(定大業舞)의 의물(儀物)에 대한 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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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劍) 현재 사용한다.




검은 나무로 만든다. 칼날에 은(銀)을 붙이고, 칼자루는 어피(魚皮)로 싼다. 날밑〔陽亇〕과 칼자루 끝의 운두(雲頭)에 금을 붙이고, 끈〔纓子〕은 홍색의 띠〔絛兒〕와 녹색의 술〔垂兒〕을 사용한다.
제향 때 사용하는 것은 금은과 아울러 채색한 것을 사용하지 않는다.



창(槍) 현재 사용한다.




창은 나무로 만든다. 붉은 자루의 하단은 녹각(鹿角)으로 장식한다. 창날에 은을 붙이고, 창날 아래에 작은 둑(纛) 같은 홍색 상모(象毛)를 드리운다.
제향 때 사용하는 것은 은을 붙이지 않고 분칠(粉漆)한 것을 사용하며, 자루 끝은 철로 장식한다.

활〔弓〕 현재 사용한다.




활은 보통 활의 제도와 같다. 다만 뿔〔角〕을 쓰지 않고 화피(樺皮)를 입힌 죽삭(竹槊)을 쓴다. 활고자〔高佐〕는 붉은 칠을 하고 금색 줄을 감는다.
제향 때 사용하는 것은 금색 줄 감은 것을 사용하지 않는다.



화살〔矢〕 현재 사용한다.




화살은 보통 화살의 제도와 같다. ‘꿩 깃〔雉羽〕’ 사이에 붉은 칠을 한다. 화살촉은 나무로 만들고 은을 붙인다.
제향 때 사용하는 것은 은을 붙이지 않고 분칠한 것을 사용한다.



소고(小鼓)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해설은 위에 보인다.



대금(大金) 현재 사용한다.




대금은 놋쇠〔鍮鐵〕로 만든다. 끈은 홍사(紅絲)를 사용하고, 퇴(槌)는 녹비(鹿皮)를 말아서 만든다.
소금(小金)은 별도로 채색을 한 용머리와 붉은 칠을 한 자루를 사용한다. 퇴는 나무로 만든다.
제향 때 사용하는 것도 같다.



소금(小金) 현재 사용한다.




해설은 위에 보인다.



백기(白旗) 청기(靑旗), 황기(黃旗), 적기(赤旗), 흑기(黑旗)의 제도도 같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윗변의 길이는 1자 7치 5푼이고, 아랫변의 길이는 9치 5푼이며, 폭은 9치이다. 금갑(襟甲)은 2치이다. 깃대의 길이는 10자 2치이다.



대각(大角)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대각은 은을 두드려서 만든다. 큰 아가리에 각각의 색실로 만든 매듭〔結子〕을 달고, 또 작은 방경(方鏡) 1개와 원경(圓鏡) 2개를 만들어 모두 매듭 중간에 넣어 둔다.
제향 때 사용하는 것은 나무로 만들고 붉은 칠을 한다.



홍색 대둑(大纛)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둑은 홍색 상모(象毛)를 사용한다. 나무 자루는 붉은 칠을 하고, 하단은 철로 장식한다. 상모 위에는 금을 입힌 구리 규화(葵花) 뚜껑〔蓋兒〕을 씌우고, 날에는 은을 붙인다. 흑색 둑은 흑색 상모를 사용한다.
제향 때 사용하는 것은 금을 입히지 않고 은을 붙이지 않으며, 분칠한 것을 사용한다.



나각〔螺〕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나각은 진짜 소라를 사용한다. 아래로 술〔垂兒〕 달린 홍색 상모를 매단다.
제향 때 사용하는 것도 같다.



큰북〔大鼓〕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북은 소가죽〔牛皮〕을 사용한다. 나무로 통을 만들고 칠포(漆布)로 싼 다음에 붉은 칠로 모란을 그린다. 대갈못〔頭釘〕과 둥근 고리〔圓環〕는 모두 도금한다. 붉은 명주실〔眞絲〕로 된 끈을 단다.
제향 때 사용하는 것은 도금한 것을 사용하지 않는다.



황룡대기(黃龍大旗)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윗변의 길이는 2자 7치 5푼이고, 아랫변의 길이는 1자 8치이며, 폭은 1자 3치 5푼이다. 금갑(襟甲)은 2치이다. 깃대의 길이는 10자 5치이다.



청룡대기(靑龍大旗)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윗변의 길이는 2자 3치 5푼이고, 아랫변의 길이는 1자 5치 4푼이며, 폭은 1자 2치이다. 금갑은 1치 5푼이다. 주작기(朱雀旗), 백호기(白虎旗), 현무기(玄武旗)의 길이와 폭 및 깃대의 길이는 이것과 같다. 깃대의 길이는 10자 3치이다.



주작기(朱雀旗)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해설은 청룡대기 해설 부문에 보인다.



백호기(白虎旗)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해설은 청룡대기 해설 부문에 보인다.



현무기(玄武旗)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기의 깃대는 나무로 만든다. 상단에 둥근 머리를 얹고 칠포로 싼 다음 붉은 칠을 한다. 하단은 철로 장식한다. 황룡대기 및 청룡기, 백호기, 주작기, 현무기는 모두 해당하는 방위의 색을 따라 황색, 청색, 적색, 백색, 흑색의 생초(生綃)를 사용하여 만든다. 화염(火焰)과 금(襟)과 끈도 같다. 황룡, 청룡, 백호, 주작, 귀사(龜蛇)를 그린다. 금(襟)은 두 겹의 생초를 꿰매어 만든다. 오색의 소기(小旗)도 오색의 생초로 만든다.
제향 때 사용하는 것은, 깃대를 대나무로 쓰고 주토(朱土)로 칠을 한다.


[주D-001]날밑〔陽亇〕 : 칼날과 칼자루 사이를 막는 것으로 칼자루를 쥐는 한계를 삼아 손을 보호한다.
[주D-002]상모(象毛) : 삭모(槊毛)에서 변형된 말로, 깃대나 마래기 같은 모자 끝에 이삭처럼 만들어 꽂는 것을 말한다. 《성호사설(星湖僿說)》 권5 〈만물문(萬物門)〉의 삭모〔毦〕에 대한 설명에서 “이(毦)라는 것은 말안장의 장식이다. 지금 깃털에 여러 가지 빛깔로 물을 들여서 전립(戰笠) 위에 달기도 하고 말의 재갈을 꾸미기도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인데, 속칭 상모(象毛)라고 한다.”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선종순 (역) ┃ 2008






종묘의궤 제1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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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복(祭服) 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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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殿下)의 면복(冕服)
구장복(九章服)이다. 영락(永樂) 원년에 삼가 하사받은 제도이다.

규(圭)



규는 청옥(靑玉)으로 만든다. 길이는 9치이다.

면(冕)



면의 판(版)은 폭이 8치, 길이가 1자 6치이다. 앞은 둥글고 뒤는 모나며, 검붉은 색으로 덮고 분홍색으로 속을 댔다. 증(繒)으로 만든다. 앞은 높이가 8치 5푼이고, 뒤는 높이가 9치 5푼이다. 금으로 수식한다. 유(旒)는 9줄이고, 유마다 9개의 옥을 꿰며, 채색은 다섯 가지로 먼저 붉은색, 다음은 백색, 다음은 푸른색, 다음은 황색, 다음은 흑색 순으로 한다. 유의 길이는 9치이다. 앞뒤로 18줄의 유에 금잠(金簪)이다. 면의 옆에 검은 비단실〔紌〕을 붙이고 옥진(玉瑱)을 늘어뜨려 충이(充耳)로 쓴다. 자주색 끈 두 가닥을 양쪽 옆에 붙여서 턱 아래에서 매고 나머지는 늘어뜨린다. 또 붉은색 끈 한 가닥을 왼쪽 비녀에 매어 턱 아래로 돌려서 오른쪽에서 위로 올려 비녀에 붙인 다음 구부려서 매고, 나머지는 늘어뜨려 장식으로 삼는다.

상의〔衣〕의 앞면



상의는 증으로 만든다. 검붉은 색〔玄〕이다. - 청흑색이면서 약간 적색이 도는 것을 현(玄)이라고 한다. - 오장(五章)인 용(龍), 산(山), 화(火), 화충(華蟲), 종이(宗彝)를 그 위에 그린다. - 그리는 것은 양(陽)에 해당하는 일이므로 상의에 하고, 수를 놓는 것은 음(陰)에 해당하는 일이므로 하의〔裳〕에 한다. -

상의의 뒷면



해설은 위에 보인다.

하의〔裳〕



하의는 증으로 만든다. 분홍색〔纁〕이다. - 세 번 진홍색〔絳色〕을 들여서 분홍색이 된다. - 7폭으로 만드는데, 앞뒤가 달라 앞은 3폭이고 뒤는 4폭이다. 폭마다 양 옆을 각각 1치씩 꿰매니, 이것을 삭폭(削幅)이라고 한다. 허리 사이에는 벽적(辟積)을 무수히 넣는다. - 벽적은 주름〔褶〕을 말한다. - 하의의 옆에 댄 가선〔純〕을 벽(辟)이라고 하고, 하의의 아래에 댄 가선을 석(緆)이라고 한다. 벽과 석의 폭은 각각 1치 반이니, 겉과 속을 합하여 3치가 된다. 사장(四章)인 조(藻), 분미(粉米), 보(黼), 불(黻)을 그 위에 수놓는다.

대대(大帶)



대대는 비(緋)와 백증(白繒)을 합하여 꿰맨다.

중단(中單)의 앞면



중단은 백증으로 만든다. 옷깃〔領〕, 소맷부리〔褾〕, 가선〔襈〕, 옷자락〔裾〕을 청색으로 하고, 옷깃에는 불(黻) 11개를 그린다.

중단의 뒷면



해설은 위에 보인다.

패(佩)



패는 2개이다. 위에 쇠갈고리〔金鉤〕로 형(衡)을 설치하고, 다음에 중형(重衡)을, 중간에 거(琚)와 우(瑀)를 설치한다. 아래에 한 쌍의 황(璜)이 있고, 형아(衡牙)는 한 쌍의 황 사이에 있으며, 또 한 쌍의 적자(滴子)를 형아와 두 개의 황 사이에 설치하여 약옥주(藥玉珠)로 꿰뚫는다. 형, 우, 거, 한 쌍의 황, 형아, 적자는 모두 민옥(珉玉)으로 한다.

수(綬)



수는 홍화금(紅花錦)으로 만들고, 한 쌍의 금고리〔金環〕를 단다.

방심곡령(方心曲領)



방심곡령은 백라(白羅)로 만든다. 옆에 두 개의 끈이 있다. - 왼쪽은 녹색이고 오른쪽은 홍색이다. -

폐슬(蔽膝)



폐슬은 증(繒)으로 만든다. 분홍색〔纁〕이다. 위에 가선〔紕〕을 대고 아래에 가선〔純〕을 댄다. 위에서 5치 띄워 조(藻), 분미(粉米), 보(黼), 불(黻)을 수놓는다.

버선〔襪〕



버선은 비단(緋段)으로 겉을 만들고, 비초(緋綃)로 속을 만든다.

신〔舃〕



신은 비단으로 겉을 만들고, 백증(白繒)으로 속을 만든다.



왕세자의 면복
칠장복(七章服)이다. 경태(景泰) 원년에 삼가 하사받은 제도이다.





제도는 구장복과 같다.





제도는 구장복과 같다. 다만 유(旒)가 8줄이고, 유마다 8개의 옥을 꿰며, 채색은 세 가지로 먼저 붉은색, 다음은 백색, 다음은 푸른색 순으로 한다.

상의의 앞면



제도는 구장복과 같다. 다만 삼장(三章)인 화(火), 화충(華蟲), 종이(宗彝)를 그 위에 그린다.

상의의 뒷면



해설은 위에 보인다.

하의



제도는 구장복과 같다.

대대



제도는 구장복과 같다.

중단의 앞면



제도는 구장복과 같다.

중단의 뒷면



해설은 위에 보인다.





제도는 구장복과 같다.





제도는 구장복과 같다.

방심곡령



제도는 구장복과 같다.

폐슬



제도는 구장복과 같다.

버선



제도는 구장복과 같다.





제도는 구장복과 같다.



문무 관원의 관복(冠服)





홀은, 4품 이상은 상아(象牙)를 사용하고, 5품 이하는 나무를 사용하여 만든다.
지금은 품계의 고하를 막론하고 오로지 나무 홀을 쓴다.

관(冠)



관은, 1품은 5량(梁), 2품은 4량, 3품은 3량, 4품에서 6품까지는 2량, 7품 이하는 1량으로, 모두 각잠(角簪)을 쓴다.
지금 제집사(諸執事)가 착용하는 것은, 제도가 양관(梁冠)과 같은데, 흑초(黑綃)로 싸고 자황(雌黃)으로 그림을 그리며, 양의 전후 상하에도 자황으로 그림을 그린다. 나무로 잠(簪)을 만들고 잠의 머리에 그림을 그린다.

상의의 앞면



상의는 청라(靑羅)로 만든다.
지금은 흑주(黑紬)를 쓴다.

상의의 뒷면



해설은 위에 보인다.

하의



하의는 적라(赤羅)로 만든다.
지금은 홍주(紅紬)를 쓴다.

대대



대대는 적라와 백라(白羅)를 합쳐서 꿰맨다. - 양관(梁冠)과 패옥을 착용한 자가 이 띠를 찬다. -

중단의 앞면



중단은 백사(白紗)로 만들고, 옷깃과 가선을 검은색으로 한다.
지금은 백주(白紬)를 쓴다.

중단의 뒷면



해설은 위에 보인다.





패는 2개이다. 위에 구리갈고리〔銅鉤〕로 형(衡)을 설치하고, 다음에 중형(重衡)을, 중간에 거(琚)와 우(瑀)를 설치한다. 아래에 충아(衝牙)가 있고, 한 쌍의 황(璜)이 중형의 양쪽 옆에 있으며, 또 한 쌍의 동(同)이 충아의 양쪽 옆에 있어 약옥주(藥玉珠)로 꿰뚫는다. 형, 거, 우, 한 쌍의 황, 충아, 적자(適子)는 모두 민옥(珉玉)으로 한다.
지금은 정1품 헌관(獻官)과 천조관(薦俎官)은 해사(該司)에 준비된 것을 갖추어 차고 다른 집사는 없다.





수는, 2품 이상은 황, 녹, 적, 자 4색의 실로 - 3품은 같고, 4품에서 6품까지는 황, 녹, 적 3색의 실이고, 7품 이하는 황, 녹 2색의 실이다. - 운학(雲鶴) 무늬 - 3품은 반조(盤鵰) 무늬, 4품에서 6품까지는 연작(練鵲) 무늬, 7품 이하는 계칙(鸂鷘) 무늬이다. - 의 화금(花錦)을 짜서 이루고, 아래에 청사(靑絲)로 된 망(網)을 연결하여 붙인 다음 한 쌍의 금고리를 단다. - 3품에서 4품까지는 은고리〔銀環〕를 사용하고, 5품 이하는 동고리〔銅環〕를 사용한다. -
지금은 정1품 헌관과 천조관을 제외한 다른 나머지 헌관과 제집사가 착용하는 것은 홍주(紅紬)를 사용하고 품계에 따라 그림으로 그린다.

방심곡령



방심곡령은 백초(白綃)로 만든다.
지금은 백주(白紬)를 사용한다.

폐슬



폐슬은 적라(赤羅)로 만든다.
지금은 홍주(紅紬)를 사용한다.

혁대(革帶)



혁대는, 2품 이상은 금을 사용하고, 3품에서 4품까지는 은을 사용하고, 5품 이하는 동을 사용한다.

버선



버선은 백포(白布)로 만든다.

신〔履〕



신은 흑피(黑皮)로 만든다.


공인(工人)의 관복 도설 《악학궤범》

복두(幞頭) 악사(樂師)가 착용하는 것이다. 현재 사용한다.



복두는 종이를 배접하여 만든다. 안은 가는 베를 바르고 흑색 칠을 한다. 뿔이 있다. 악공(樂工)이 착용하는 것은 앞뒤와 양쪽 모서리에 채색 꽃을 그린다.

개책(介幘) 헌가(軒架)의 공인이 착용하는 것이다. 현재 사용한다.



개책은, 송나라의 제도에서는 가죽〔皮〕으로 만들고, 장식에 흑색 칠을 하였다. 지금의 제도는 종이를 배접하여 만들고, 변두리〔邊兒〕는 철사(鐵絲)를 사용한다. 안은 가는 베를 바르고 흑색 칠을 한 다음 자황(雌黃)으로 가늘게 그림을 그리고 청주(靑紬)로 만든 갓끈을 단다.

진현관(進賢冠) 문무(文舞) 공인이 착용하는 것이다. 현재 사용한다.



진현관을 만드는 방식은 개책관과 같으나 다만 체제(體制)가 다를 뿐이다.

피변(皮弁) 무무(武舞) 공인이 착용하는 것이다. 현재 사용한다.



피변은, 옛날 제도에서는 옻칠한 베로 껍데기를 만들었는데, 지금의 제도에서는 종이를 배접하여 만든다. 안은 가는 베를 바르고 흑색 칠을 하며, 겉에는 모피(毛皮) 형상을 그려 얼룩무늬가 있는 노루 가죽과 같게 한다. 좌우에 구리로 만든 운월아(雲月兒)를 붙이고, 청주로 만든 갓끈을 단다.


녹초삼(綠綃衫) 등가(登歌)의 악사가 입는 것이다. 현재 사용한다.



그림 내부의 내용
소매는 전폭(全幅) 반이다.
1자 4치이다.
전체의 길이는 3자 1치이다.
허리의 폭은 1자 5치이다.

적삼〔衫〕은 녹초로 꿰매서 만든다. - 홍초 적삼의 제도도 같다. 홍초 적삼은 바로 진홍색 공복(公服)이다. -


비난삼(緋鸞衫) 헌가의 공인이 입는 것이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난삼은 홍주로 꿰매서 만든다. 난봉(鸞鳳)을 앞뒤와 좌우의 어깨에 그려 흉배(胸背)의 형태와 같게 한다.


백주중단(白紬中單) 헌가의 공인이 입는 것이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중단은 다듬이질〔擣鍊〕을 한 백주로 꿰매서 만들고, 흑주(黑紬)로 가선을 만든다.


남주의(藍紬衣) 홍주의(紅紬衣)의 제도도 같다. 문무와 무무의 공인이 입는 것이다. 현재 사용한다.



상의는 남주(藍紬)로 꿰매서 만든다.


적상(赤裳) 문무와 무무의 공인이 입는 것이다. 현재 사용한다.



하의는 홍주(紅紬)로 꿰매서 만들고, 조주(皁紬)로 가선을 만든다.


적말대(赤抹帶) 백초대(白綃帶)의 제도도 같다. 문무와 무무의 공인이 착용하는 것이다. 현재 사용한다.



말대는 다듬이질한 홍주로 꿰매서 만든다.


오정대(烏鞓帶) 악사가 착용하는 것이다. 현재 사용한다.



오정대는 나무로 갈고리를 만들고, 흑색 칠을 한다.


백포(白布) 버선 등가와 헌가의 문무와 무무 공인이 신는 것이다. 현재 사용한다.



버선은 백포로 꿰매서 만들고, 안은 생포(生布)를 사용한다.


흑피화(黑皮靴) 악사가 신는 것이다. 현재 사용한다.



신〔靴〕은 흑색 가죽으로 만든다.


오피리(烏皮履) 등가와 헌가의 문무와 무무 공인이 신는 것이다. 현재 사용한다.



신〔履〕은 흑색 가죽으로 만든다. 끈이 있다.


[주D-001]영락(永樂) 원년 : 영락은 명(明)나라 성조(成祖)의 연호로, 원년은 1403년(태종3)이다. 1402년(태종2) 2월에 친왕(親王)의 구장복(九章服)을 내린다는 명나라 성조의 칙서가 왔고, 1403년 10월에 명나라 사신이 면복(冕服), 태상왕(太上王)의 표리(表裏), 중궁(中宮)의 관복(冠服), 원자(元子)의 서책(書冊)을 가지고 왔다는 기록이 《태종실록(太宗實錄)》에 보인다.
[주D-002]경태(景泰) 원년 : 경태는 명나라 경제(景帝)의 연호로, 원년은 1450년(세종32)이다. 《세종실록》 32년 윤1월 기사에 세자의 칠장 면복(七章冕服)을 청하는 표문이 실려 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선종순 (역) ┃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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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류관은 황제의 대례복에 갖추는 면관(冕冠)으로 원광오사모(圓匡烏紗帽) 위에 길이가 2척 4촌, 너비가 2척 2촌의 장방형 복판(覆版)을 얹고, 겉 은 현색(玄色)이고 안은 주색(朱色)이며, 앞면은 천원(天圓)의 원리에 따라 둥글고, 뒷면은 지방(地方)의 의미로 모가 진다. 앞면과 뒷면에 각각 12류(旒 : 줄)의 7색 옥구슬을 황(黃), 적(赤), 청(靑), 백(白), 흑(黑), 홍(紅), 록(綠)의 순서로 느렸는데, 유(旒)의 길이는 9촌(九 寸)이다. 금잠(金簪 : 관을 머리 상투에 고정하는 금비녀)을 쓰고, 면(冕)의 양 옆에 검은 끈을 달고 끝에 옥진(玉瑱)을 달아 충이 (充耳 : 귀막이)로 하며, 자주빛 끈을 양쪽에 달아 턱 아래에 매도록 하고, 한 가닥씩 좌우측으로 비녀를 고정시킨 후 아래로 늘어뜨린다. 이 유(旒)의 수가 지위(地位)를 나타내는데 황제는 12류, 왕(제후)은 9류, 왕세자는 8류이다.




황제(皇帝)의 대례복(大禮服)으로 열두 가지의 문채가 새겨져 십이장이라 하며 면(冕)은 12류(十二旒 : 열두 줄)요, 상의(上衣)에 6장(六章)으로 양 어깨에 해와 달(日月), 뒤쪽(背)에 오성(五星), 조금 아래 칠악(七岳 : 일곱 개의 산봉우리), 옷소매의 위쪽에 용(龍- 변화), 아래에 화충(華虫 : 꿩-孝) 의 그림을 그렸으며, 상(裳 : 치마)에는 이(彛 :술통- 불변), 조(藻 : 마름- 깨 끗함), 화(火 : 불-밝음), 미(米 : 쌀- 백성의 養育), 보(黼 : 도끼-公私를 가려 斷을 내림), 불(黻 : 兩亞자모양-분별함)의 6장(六章)을 수놓았다. 이는 광무(光武) 원년(元年-1897년)에 황제국(皇帝國)으로 선포되면서 내 려진 제도로 대한예전(大韓禮典)에 자세한 기록이 있다.


증(繒 : 비단)으로 만드는데 빛은 현(玄 : 검푸르면서 약간 붉은 빛이 나는 색)이며 안은 남색이다. 6장(六章 : 日月, 龍, 五嶽, 火, 華虫, 宗彛)이 그려 져 있는데 양쪽 어깨에는 직경 5촌의 둥근 해 안에 삼족오(三足烏), 둥근달 안에 토끼 또는 두꺼비를 수놓았고, 등에는 별과 산을 수놓았고, 양쪽 소매에 는 용과 화충을 수놓았으며, 상의에 길이는 치마의 6장(六章)을 가리지는 않 는 정도로 한다. 해와 별과 달은 하늘을 뜻하고, 산은 땅을 뜻하는 것이며, 용과 화충은 비와 구름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제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다. 




   증(繒)으로 만드는데 빛은 훈(纁 : 분홍빛)으로 일곱 폭인데 앞쪽이 세 폭 이고, 뒤가 네 폭으로 폭마다 삭폭(削幅 : 양쪽 가에 한 치씩 꿰매는 것)을 두르고, 허리는 수(繡)없이 벽적(襞積 : 주름을 잡는 것)이 있고, 치마 끝에 벽(綼)과 석(緆)이 있는데 너비가 각 1촌 5푼(一寸五分)이며, 앞 양쪽에 화(火), 종이(宗彛), 조(藻)와 분미(粉米), 보(黼), 불(黻)의 육장(六章)을 두 줄로 수놓는다. 이 육장에서 종이(宗彛)는 종묘의 제기(祭器)로서 효(孝)를, 조(藻)는 바다의 풀로 청결 또는 결백, 화(火)는 덕(德) 또는 정의, 분미는 목민(牧民)을, 보(黼)는 왕의 결단을, 불(黻)은 선향배악(善向排惡)을 뜻하는 것이다.


   제복의 안쪽에 받쳐입는 속옷으로 백증(白繒 : 흰비단-백색 雲紋緞)으로 만들며 청령(靑領 : 푸른 깃)을 소매끝과 옷자락 끝에 두르고, 목 깃에는 불문(黻紋) 12개를 새긴다.




   비(緋 : 붉은빛)와 흰색의 비단을 합하여 꿰맨다. 이는 허리에 두르는 각이진 띠로 각띠라고도 한다.



앞부분은 옥으로 장식하고, 뒤는 옥을 쓰지 않으며, 여기에 패(佩)와 소수 (小綏)를 맨다.




   패(佩) 또는 패옥(佩玉)은 혁대(革帶) 좌우에 걸도록 金갈고리로 형(衡)을 만들고, 다음에 중형(重衡)이 이어지며, 중앙에 거우(琚瑀 : 옥돌로 만든 노리개)가 연결되어 있고, 그 아래에 쌍황(雙璜 : 쌍으로 반쪽 둥근 패옥) 이 있으며, 밑에 옥화가 있다. 옥화 밑에 옥적(玉適)을 둘 드리웠는데 운용 문(雲龍紋)을 새겨서 꾸미고 묘금(描金)한다. 형에서 끈 다섯을 내려뜨려 매고 옥주(玉珠)를 꿰었는데, 걸을 때면 형아(衡牙)와 두 옥적이 황과 더불어 부딪쳐서 소리를 낸다. 형(衡), 거우(琚瑀), 쌍황(雙璜), 형아(衡牙), 적자(滴 子)는 모두 민옥(珉玉)으로 만든다.


   대수(大綏)는 치마 뒤에 다는 것인데 홍화금(紅花錦 : 붉은 빛깔의 꽃이 수놓인 비단)으로 만들며 위에는 쌍으로 금환(金環)을 달았다. 훈색 바탕에 황(黃), 백(白), 적(赤), 현(玄), 표(縹), 녹(綠)의 6채색으로 되 었고, 이 여섯 가지 색깔은 동서남북 및 중앙을 뜻하며 춘하추동 등도 뜻한다.





백라(白羅 : 엷은 흰 비단)로 동정같이 둥글게 만들어 목에 두르고, 가운 데에서 아래로 이어 네모의 모양이 있고, 중앙은 뚫려 있다. 왼쪽에는 푸 른 끈, 오른 쪽에는 붉은 끈이 달려 있다. 이는 몸과 마음을 단정하게 하라는 뜻이다.



   붉은 색의 비단에 위에는 비(紕 : 가에 선을 돌려 누빈 것)가 있고, 아 래는 선이 있으며, 위로부터 조(藻), 분미(粉米), 보(黼), 불(黻)을 두 줄로 수놓는다. 이는 꿇어앉을 때 무릎을 가리는 것으로 혁대에 다는 것이었으나 지금은 치마에 꿰맸다.



   비초(緋綃 : 붉은색 비단)로 거죽을 하여 만든다. 이는 대례(大禮)를 행할 때 신는 버선이다.


   붉은 비단으로 거죽을 하고, 안은 백증(白繒)으로 하며, 황색 띠를 두르고 현색(玄色) 끈으로 맨다.


   백옥으로 하며 길이는 1척 2촌(一尺二寸)이다.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원리에 따라 위는 둥글고, 아래쪽은 모가 졌다. 손잡이는 황색 비단으로 싸맨다. 왕과 왕세자 홀은 청옥으로 만들며 길이가 9촌(九寸)이다.








 



   삼품관(三品官) 이상은 상아(象牙)홀이고, 당하관(堂下官)은 목홀(木笏을 잡으며, 길이는 1척 2촌(一尺二寸)이다. 위는 둥글고, 아래쪽은 모가 지며, 손잡이는 황색 비단으로 싸맨다. 이는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잡념이 없이 앞만 바라보도록 함이었다. 

  

   제관(祭冠)이라고도 하며, 모양은 금관(金冠)과 같은데 검은 바탕에 금색량(金色梁)을 하였으며, 이 양(梁 : 줄)은 품계별로 차이가 있는데 一品은 7량(七梁), 二品은 6량, 三品은 5량이고 참상(參上)은 4량이며, 5품은 3량,6·7품은 2량, 8·9품은 1량이다. 이는 황제국의 품직에 따른 것이며 , 왕국에서는 이등체강원칙(二等遞降原則)으로, 1품 5량관, 2품 4량관, 3품 3량관, 4-6품 2량관,7-9품 1량관으로 하였다. 양관 뒤에는 비녀를 뿔로 만들어 꽂는데, 비녀의 머리가 오른편으로 가도록 하고, 끈으로 고정하여 매고, 양쪽의 줄 끝에 술을 달아 늘여서 충이(充耳)로 한다.



   청라(靑羅)로 만들며 모양과 길이는 제왕복과 같으나 다만 그림이 없다.






   증(繒)으로 만드는데 빛은 훈(纁 : 분홍빛)으로 일곱 폭인데 앞쪽이 세 폭이고, 뒤가 네 폭으로 폭마다 삭폭(削幅 : 양쪽 가에 한 치씩 꿰매는 것)을 두르고, 허리는 수(繡)없이 벽적(襞積 : 주름을 잡는 것)이 있고, 치마 끝에 벽(綼)과 석(緆)이 있는데 너비가 각 1寸 5分이다.




  제복 안에 받쳐 입는 속옷이며, 백사(白紗)로 만들고, 검은빛의 깃으로 선을 두른다. 그림은 없다. 

적라(赤羅 : 붉고 엷은 비단)와 백라(白羅)를 합쳐서 꿰맨다.

   혁대는 금관조복에 쓰는 것으로, 1품관은 서대(犀帶 : 물소 뿔), 2품관은 금대(金帶), 3.4품관은 은대(銀帶), 5품관 이하는 흑각대(黑角帶)를 두른다. 지금은 당상관은 서대(犀帶), 당하관은 은대(銀帶)로 통일하였다.

   모두 위의 9와 같으나 고리를 銅으로 한다. 당상관은 푸른색 번옥(燔玉 : 인공옥), 당하관은 백색 번옥을 찬다.

   후수는 치마 뒤에 두르는 것이며, 堂上 이상은 황(黃), 록(綠), 적(赤), 자 (紫)의 4색으로 바탕을 하고, 운(雲 : 구름무늬)과 학(鶴 : 네 쌍의 학)을 수 놓았으며, 화금(花錦) 밑에 푸른 실로 짠 망(網)을 달고, 한 쌍의 금환(金 環)을 달았으며, 堂下는 黃, 綠, 赤의 삼색이고, 세쌍의 연작(練鵲 : 까치)이며, 역시 한 쌍의 은환(銀環)을 달고, 참하(參下) 이하는 계목(鷄鶩 : 뜸부기와 따오기)을 수놓아 만들며, 한 쌍의 동환(銅環)을 달았다. 지금은 당상과 당하로만 구분하였다.




    백라(白羅 : 엷은 흰 비단)로 동정같이 둥글게 만들어 목에 두르고, 가운 데에서 아래로 이어 네모의 모양이 있는데 중앙은 뚫려 있다. 이는 몸과 마음을 단정하게 하라는 뜻이다.

   붉은 색의 비단으로 만들며 제복의 앞에 달아 꿇어앉을 때 무릎을 가리는 것이다. 

   백포(白布)로 만든다. 지금은 양말에 행전을 같이 쓰고 있다.

   예화(禮靴) 또는 제화(祭靴)라고 하며, 흑피(黑皮 : 검은 색 가죽)으로 만든다. 신코에 흰줄로 당상관은 여러 줄 와선(渦旋)무늬이고, 당하관는 외줄로 직선(直線)무늬이다.




종묘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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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
화대백과사

궁중정재

다른 표기 언어 宮中呈才

요약 테이블
시대 조선
유형 개념용어
분야 예술·체육/국악

연원 및 변천

   정재(呈才)는 ‘재예(才藝)를 바친다’는 뜻으로, 악기연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공연물이다. 정재의 형식에는 당악정재(唐樂呈才)와 향악정재(鄕樂呈才)가 있으며, 고려시대는 그 구별이 뚜렷하였다. 즉, 당악정재는 죽간자(竹竿子) 2인의 인도 아래 무용수가 등ㆍ퇴장하고, 공경의 표시로 죽간자가 진구호(進口號)ㆍ퇴구호(退口號)를 하며, 당악곡으로 반주하고 한문으로 된 창사(唱詞)를 노래한다. 향악정재는 죽간자 없이 무용수가 곧바로 등ㆍ퇴장하고, 공경의 표시로 고개를 숙여 엎드리며, 향악곡으로 반주하고 우리말 창사를 노래한다.


   그러나 조선에 들어와 당악정재와 향악정재의 구분도 차츰차츰 경계가 모호해져갔다. 예를 들면, 『악학궤범(樂學軌範)』(1493년)에 향악정재로 소개된 향발에서 당악인「보허자령(步虛子令)」이 연주되고, 한문 창사가 불리웠으며, 학무(鶴舞)와 문덕곡(文德曲)에서는 각각 당악인「보허자령」과「소포구락령(小抛毬樂令)」이 연주되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당악정재와 향악정재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이 별 의미가 없을 정도로 서로 영향을 끼치며 변모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당악정재 헌선도(獻仙桃)ㆍ수연장(壽延長)ㆍ오양선(五羊仙)ㆍ포구락(抛毬樂)에서 당악만 연주되었지만, 조선후기에는 당악「보허자령」과 함께「향당교주(鄕唐交奏)」ㆍ「여민락령(與民樂令)」등이 연주되었다. 「향당교주」는 향악「영산회상(靈山會相)」과 관련된 악곡이고, 「여민락령」은 세종 후기에 창제된 신악(新樂)이다.


   당악정재 육화대(六花隊)가 만들어진 조선초기에는 당악 「천년만세인자(千年萬歲引子)」「최자령(嗺子令)」「중강령(中腔令)」등이 연주되었지만, 『갑오외진연시무동각정재무도홀기(甲午外進宴時舞童各呈才舞圖笏記)』(1894년) 편찬당시에는 「보허자령」「향당교주」가 연주되고, 가곡 「농(弄)」「계락(界樂)」「편(編)」에 맞추어 우리말 창사가 노래 불리웠다. 따라서 조선후기의 당악정재는 죽간자가 무용수를 인도한다는 특징 외에는 음악상으로 향악정재와의 구별이 어렵다.

한편 고려시대 이래 향악정재 아박(牙拍: 일명 도동(動動)ㆍ무고(舞鼓)에서 ‘德으란 곰 에 받고’ ‘하 노피곰 도샤’로 시작되던 우리말 창사가 불리웠는데, 1829년(순조 29) 이후로는 효명세자(孝明世子 1809∼1830)가 지은 한문 창사가 불리웠다.

             

내용

   1073년(고려 문종 27)에 송(宋)에서 전래된 당악정재 답사행가무(踏沙行歌舞)가 처음 공연된 이후 포구락ㆍ구장기별기(九張機別伎)ㆍ왕모대가무(王母隊歌舞) 등을 비롯한 여러 당악정재가 전래되어 공연되었는데, 이중 헌선도ㆍ수연장ㆍ오양선ㆍ포구락ㆍ연화대(蓮花臺)만이 조선으로 전승되었다. 향악정재로는 아박ㆍ무고ㆍ무애(舞㝵)ㆍ처용무(處容舞) 등이 고려에서 조선으로 전승되었다.


   조선초기에 당악정재 곡파(曲破)가 복원되었고, 몽금척(夢金尺)ㆍ수보록(受寶籙)ㆍ근천정(覲天庭)ㆍ수명명(受明命)ㆍ하황은(荷皇恩)ㆍ하성명(賀聖明)ㆍ성택(聖澤)ㆍ육화대와 같은 당악정재가 새로 만들어졌다. 조선에서 새로 만들었지만 당악정재로 불리는 이유는 죽간자의 인도로 무용수가 등ㆍ퇴장하고, 당악을 연주하며 한문 창사를 노래하기 때문이다.


   고려에서 조선에 전승된 향악정재 중 무애는 1434년(세종 16)에 불가(佛家)와 관계된 정재라 하여 오랫동안 금지되었다가 1829년(순조 29) 6월 순조 40세 경축 진찬(進饌)에서부터 왕의 장수(長壽)를 비는 악장으로 바뀌어 다시 궁중에서 공연되었고, 그 나머지 아박ㆍ무고ㆍ처용무는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공연되었다. 조선초기에 보태평(保太平)ㆍ정대업(定大業)ㆍ봉래의(鳳來儀)ㆍ향발(響鈸)ㆍ학무(鶴舞)ㆍ학연화대처용무합설(鶴蓮花臺處容舞合設)ㆍ문덕곡(文德曲)과 같은 향악정재가 새로 만들어졌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수보록ㆍ근천정ㆍ수명명ㆍ하성명ㆍ성택ㆍ문덕곡ㆍ보태평ㆍ정대업 및 곡파가 더 이상 연향에서 공연되지 않았는데, 수보록은 도참(圖讖)과 관계되고, 근천정ㆍ수명명ㆍ하성명ㆍ성택은 명(明 1368∼1644)과 관계되는 내용이기 때문이며, 보태평ㆍ정대업은 선조대(宣祖代 1567-1608) 이후 제향에서만 공연되었기 때문이다. 하황은 또한 명과 관계된 내용이지만, 1743년(영조 19)에 영조가 시대에 맞게 새로 창사를 지었으므로 조선후기에 여전히 공연될 수 있었다.


   조선후기에 첨수무(尖袖舞)ㆍ검기무(劒器舞)ㆍ선유락(船遊樂)ㆍ관동무(關東舞)ㆍ사자무(獅子舞)ㆍ항장무(項莊舞) 등이 새로운 궁중정재종목으로 추가되었고, 1828년(순조 28) 순원왕후(純元王后) 40세 경축 진작(進爵)과 1829년(순조 29) 순조(純祖) 40세와 즉위 30주년 경축 진찬(進饌)을 계기로 효명세자의 주도 아래 많은 정재가 창제되었다.


   1828년에 창제된 정재로는 망선문(望仙門)ㆍ경풍도(慶豊圖)ㆍ만수무(萬壽舞)ㆍ헌천화(獻天花)ㆍ춘대옥촉(春臺玉燭)ㆍ보상무(寶相舞)ㆍ영지무(影池舞)ㆍ박접무(撲蝶舞)ㆍ춘앵전(春鶯囀)ㆍ첩승무(疊勝舞)ㆍ무산향(舞山香)ㆍ침향춘(沈香春)ㆍ연화무(蓮花舞)ㆍ춘광호(春光好)ㆍ최화무(催花舞)ㆍ가인전목단(佳人剪牧丹)ㆍ고구려무(高句麗舞)ㆍ향령(響鈴) 등이 있는데, 이중 앞의 11개 정재의 악장은 효명세자가 지었다. 1829년에 창제된 정재로 장생보연지무(長生寶宴之舞)ㆍ연백복지무(演百福之舞)ㆍ제수창지무(帝壽昌之舞)ㆍ사선무(四仙舞)가 있으며, 모두 효명세자가 악장을 지었다. 최화무와 가인전목단은 1828년에 만들어졌지만, 1829년에 효명세자가 새로 악장을 지어 재구성되어 공연되었으며, 고려에서 전승된 아박ㆍ무고ㆍ무애 또한 1829년부터는 효명세자가 새로 지은 악장이 불리웠다. 한편 향령은 1828년 창제 당시에는 춤만 추어졌는데, 1848년(헌종 14)부터 헌종이 지은 한문창사가 불리웠다.

검기무ㆍ선유락ㆍ관동무ㆍ항장무ㆍ사자무 등은 이전부터 지방관아에서 공연되던 것인데 궁중에 걸맞게 재구성되어 궁중연향에 편입된 것이다. 궁중연향 관련 의궤를 살펴보면, 검기무와 선유락은 1795년의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 관동무는 1848년(헌종 14)의 『무신진찬의궤(戊申進饌儀軌)』에, 항장무는 1873년(고종 10)의 『계유진작의궤(癸酉進爵儀軌)』에, 사자무는 1887년(고종 24)의 『정해진찬의궤(丁亥進饌儀軌)』에 처음 기록되었다.


   이렇듯 지방 관아에서 공연되던 정재가 궁중에서 공연되기도 했지만, 궁중정재가 지방 관아로 퍼져나가기도 했다. 이는 인조반정(1623) 이후 서울에 일정기간 상주하며 활동하는 장악원소속 여기(女妓)가 폐지되었으므로, 궁중연향을 베풀 때마다 지방에서 여기를 뽑아 올려 공연하게 하고, 연향을 마친 뒤에는 다시 지방으로 내려 보냈던 선상기(選上妓) 제도 덕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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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악학궤범(樂學軌範)』
  •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 『무자진작의궤(戊子進爵儀軌)』
  • 『기축진찬의궤(己丑進饌儀軌)』
  • 『무신진찬의궤(戊申進饌儀軌)』
  • 『계유진작의궤(癸酉進爵儀軌)』
  • 『정해진찬의궤(丁亥進饌儀軌)』
  • 『갑오외진연시 무동각정재무도홀기(甲午外進宴時舞童各呈才舞圖笏記)』
  • 『조선시대 궁중연향과 여악연구』(김종수, 민속원, 2003)
  • 『증보한국음악사(增補韓國音樂史)』(장사훈, 세광음악출판사, 1986)
  • 「조선시대 궁중 정재와 민간 연희의 교섭 양상」(정은경, 2003년 6월 고려대 석사학위논문)
  • 「세종조 신악(新樂)의 전승 연구」(김종수, 『온지논총(溫知論叢)』, 1997)





효명세자가 만들었다는 궁중정재 보태평지부 태평무


                                            


2016. 10. 9.
경기도 여주 세종대왕릉 한글날 경축식 행사
경기도립국악단 & 경기도립무용단





세종의 꿈 봉황의 춤사위 타고 하늘로 오르다 [봉래의]


                                           


게시일: 2014. 10. 13.






궁중정재 처용무



                                               


게시일: 2012. 10. 28.

창경궁 연경당 풍류음악을 그리다. 중






국악사전

                                                                                

향악정재

  • 작성일2014-11-16

【정의】향악 반주곡에 맞추어 공연되는 우리나라 고유의 궁중무용.


【유래 및 역사】삼국시대 이래로 전승되어온 춤과 조선 초기 또는 조선 말기에 창작된 전통춤들이 모두 향악정재에 속한다. 《고려사》<악지> 에 향악정재로 <무고>ㆍ<동동>ㆍ<무애>의 세 가지가 전하고, 《악학궤범》에는 <보태평>ㆍ<정대업>ㆍ<아박>ㆍ<향발>ㆍ<학무>ㆍ<학ㆍ연화대ㆍ처용무합설>등이 전한다.


【내용】계통상으로 중국에서 들어온 당악정재(唐樂呈才)와 구별하여 우리나라 전통 궁중무용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명칭이다. 당악정재와 비교할 때, 향악정재의 특징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로 교방 기녀를 무대로 인도하는 죽간자(竹竿子)가 없다. 둘째로 정재 공연의 시작과 끝에서 노래 부르는 한문 가사의 치어와 구호가 없다. 셋째로 공연 도중에 기녀들이 부르는 창사(唱詞)가 한문이 아닌 국문이다.


  향악정재 처용무

<향악정재 처용무>


【필자】임미선


gugak.go.kr/site/program/board/basicboard/view?b..   국립국악원


국립국악원 NATIONAL GUGAK CENTER






팔일무 승무 - 김윤미



                                              


게시일: 2016. 1. 25.



향악정재
장르
음악/음악사/한국음악

요약설명
한국 전통적인 궁중무용. 형식과 절차를 중시하던 당악정재에 비해 자연스럽고 그 형식이 간단함.

상세설명

한국 전통적인 궁중무용. 고려사악지/무용에는 무고/무용(舞鼓). 동동/무용(動動). 무애/무용(無 )의 3가지가 전하고, 악학궤범/무용에는 보태평/무용(保太平).정대업/무용(定大業).봉래의/무용(鳳來儀).향발/무용.학무/무용.학연화대처용무합설/무용. 교방가/무용.문덕곡/무용의 8가지가 전한다. 향악정재/무용의 특징은 당악정재/무용와 같은 형식을 갖추지 않고 꾸부려 엎드렸다 일어나서(拜傘伏興)춤추다가 우리말로 된 노래를 부른 다음, 다시 춤추다가 꾸부려 엎드려 절하고 일어나서 퇴장하는(傘伏興退)하는 자유로운 형식을 갖는다는 점이다.


관련서적/논문
<<국악대사전>> 세광음악출판사 1987년



art.culture.go.kr/knowledge/encyclopediaDictio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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