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恭愍王)의 양 그림 잔결 外

2017. 4. 17. 22:49美學 이야기


 공민왕의 양그림| 참고자료

시튼의숲 | 조회 22 |추천 0 | 2012.07.17. 11:08
  

20. 공민왕(恭愍王)의 양 그림 잔결


   현존하는 우리나라 옛 동물 그림을 소재별로 살필 때 12지에 속한 것 중 양(羊)은 말 · 소 · 호랑이 · 개 등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드문 편이다. 양 사육에 적합한 초지(草地)가 없어서인지, 양을 기르는데 실패한 기록과 고려왕조에선 국가에서 제사에 쓸 양을 여진족이 세운 금(金)에서 수입한 기록도 보인다. 우리 강토에 없는 코끼리와 사자 그리고 원숭이 같은 동물들은 불교의 수용과 더불어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양 그림이 드문 이유는 가축이 되지 못했기에 그 형태를 제대로 살필 수 없는 데서 그 이유를 찾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양 그림은 중국에서 유입된 화본(畵本)에 의존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를 증명하듯 몇 안 되는 조선시대 양 그림은 화본풍이 짙다. 살필 수 있는 우리나라 양 그림은 고려 말까지 올라간다. 다름 아닌 서화에 능했던 고려 말 공민왕의 그림으로 전하는 <두 양(二羊)>이다.


과 고려의 교류
- 조맹부와 공민왕



<두 양 二羊>, 비단에 채색 15.7x22.0cm, 간송미술관



   화면 바탕인 비단은 균열이 많으며 떨어져 나간 부분과 오염으로 얼룩도 보인다. 한 마리는 고개를 지면으로 향해 숙였고 다른 한 마리는 지면과 수평으로 앞을 향한 두 마리의 양이 등장한다. 얼굴은 둘 다 측면으로 향하고 있다. 세필(細筆)로 윤곽을 그리고 터럭 하나하나를 빠트리지 않고 반복해서 그렸다. 한 마리는 흰 바탕에 갈색 털이 얼굴과 몸의 일정 범위 무늬처럼 있고, 또 다른 한 마리는 턱을 제외한 얼굴에 검은 털이 섞인 모습이다.


   이 그림은 소장처인 간송미술관에서 1979년 개최한 17회 기획전 ‘조선영모화’를 통해 일반에게 공개했다. 고려는 황제국가로 출발했으나 세계를 제패한 몽골이 세운 원(元)의 지배하에 들어가 사위국가가 되었다. 고려의 왕자들은 부마도위(駙馬都尉)로 어린 시절을 원의 수도인 연경(燕京)에서 보내야 했다. 공민왕은 연경에 머무를 때 원나라 양 그림을 접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송(宋) 종실출신(宗室出身)으로 원 조정에 출사한 조맹부의 유작 가운데 말뿐 아니라 양 그림도 남기고 있어 상관관계를 헤아리게 한다.




<두 양 二羊>, 조맹부(원, 1254-1322), 종이에 수묵 25.2x48.4cm, 미국 프리어 갤러리


   조맹부는 그림과 글씨에 두루 능했는데 송설체(松雪體)로 우리나라 고려 말 조선 초 서단(書壇)에 큰 영향을 끼친 서화가이다. 그의 걸작으로 ‘중국 역대 3대 명화’에 포함되는 타이베이 고궁박물원 소장 <작화추색鵲華秋色>의 세부를 살필 때 소나 양으로도 보이는 무리를 이룬 누런색 동물이 등장한다. 미국 프리어갤러리 소장인 <두 양>에는 조맹부가 화면 내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를 밝힌 제사가 있다.


   배경에 대한 묘사 없이 종이에 수묵만으로 양과 산양(山羊)인 염소를 함께 그리고 좌측에 화가 자신이 쓴 3행의 제사에선 사생寫生한 사실도 언급하고 있다. 산수와 달리 동물 소재에서 문인화의 멋과 어엿함을 드러내나 다소 복고적인 성향의 그림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매우 섬세한 세필로 그렸으되 양은 먹 번짐인 선염(渲染)이, 염소는 선묘(線描)가 두드러진다.



공민왕의 양 그림
- 잔결殘缺 6점



<네 염소山羊>, 비단에 채색 33.5x23.5cm, 국립중앙박물관




<두 염소>, 비단에 채색 18.0x20.5cm, 국립중앙박물관


   흥미로운 사실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크기가 각기 다른 일괄 5점 중 2점은 양이며 둘은 염소이다. 특히 양 그림은 간송미술관 소장의 <두 양>과 동일인의 필치로 사료되는 점이다(德 2714). 5점 중 <네 염소(山羊)>와 <두 염소>는 1977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한 ‘국립중앙박물관소장 미공개회화’ 특별전과 2006년 국립광주박물관에서 연 기획전 ‘광채’를 통해 필자미상(15-16세기)으로 각기 공개되었다.




<한 마리 양>, 비단에 채색 10.0x29.3cm, 국립중앙박물관




<물가 양>, 비단에 채색 10.0x29.3cm, 국립중앙박물관




<물가 풍경>, 비단에 채색 4.7x15.0cm, 국립중앙박물관



   나머지 3점 가운데 2점이 양 그림인 <한 마리 양>과 <물가 양>이며 한 점은 나무로 된 다리가 보이는 <물가 풍경>으로 이왕가박물관에서 1910년 스즈끼(鈴木銈次郞)에게서 구입했다. 이들은 친연성이 커 한 화첩에 속했던 것들이거나, 한 화폭에서 나뉜 잔결(殘缺)들로 사료된다. 모두 낱폭이나 이를 싼 두터운 종이 표지엔 세로로 쓴 유물번호 등 묵서(二七一四 筆者未詳 羊之圖 五)가 있다. 길고 곧은 직모로 나타낸 염소와 달리 특히 구불구불한 짧은 철사 줄처럼 털을 묘사한 양은 간송미술관 것과 매우 유사하며, 3점에 보이는 둔덕 등 산수표현의 기법상의 공통점, 화면 바탕에 보이는 갈색의 오염마저 닮아 이 같은 생각을 뒷받침한다.




<개태도開泰圖>(부분), 고종(청, 1712-1799), 종이에 채색 127.7x63.0cm, 타이베이 고궁박물원



   이 그림 속 양이 취한 자세가 조맹부를 비롯해 청(淸) 고종의 <개태도> 등 일련의 중국의 양 그림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린 화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양과 사슴 두 종류로 동물로 구성된 한 화첩에서 나뉜 것으로도 생각되나 한편 간송미술관 것을 포함해 이들 6점은 양과 염소가 어우러진 한 큰 화폭이었을 가능성도 보인다. 이에 이들 모두는 공민왕의 전칭작으로 고려 말 14세기까지 소급되며 이들은 공민왕 전칭작으로 비정됨직 하다.




















































































































































































































평생 여자 멀리하며 예술가적 삶 추구했던 고려 공민왕| 고려
시리게푸른하늘 | 조회 32 |추천 0 | 2017.01.06. 14:29

  
   고려 제31대 왕인 공민왕(1330~1374, 재위 23년)은 14세기 원의 간섭을 뿌리치고 자주국 고려의 위상을 회복한 왕이다. 우리는 그를 ‘자주군주’, ‘개혁군주’로 부른다.

   즉위와 동시에 주권 회복 정책을 강력히 추진해 친원파인 기씨(奇氏) 일족을 몰살하고 몽골이 함경도 영흥 이북을 직접 통치하기 위해 설치했던 쌍성총관부를 철폐했으며 빼앗긴 고토를 회복했다. 내부적으로는 권신들 통치기구인 정방(政房)을 폐지하고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해 귀족들이 뺏은 토지를 원소유자에게 되돌려주고 불법으로 노비가 된 사람들도 해방시켰다.

   ‘무인’ 기질이 넘쳤을 것 같지만 사실 공민왕은 예술가적 감성이 풍부해 거칠고 호방한 것을 싫어했다. 고려 왕들 중 유일하게 사냥을 하지 않았으며 말조차 타지 않았다고 한다. 고려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서예가였던 공민왕은 그림, 글씨 등 여러 분야에서 걸작을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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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이 그린 것으로 알려진 염재신 초상화. 보물1097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기마인물 모습이 가늘고 섬세하면서도 활기에 찬 선으로 생동감 있게 묘사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천산대렵도’가 대표작이다. 공민왕은 산수, 동물, 인물 등 영모화(翎毛畵)에 두루 능했다. 인물화 솜씨도 뛰어났는데 아내인 노국대장공주 초상화를 직접 그렸으며 심지어 자신이 아끼는 신하들에게도 초상화를 제작해 나눠주기까지 했다. 석가모니가 고행림을 나서는 모습을 그린 석가출산상(釋迦出山像) 등 다수의 불화를 남겼으며 글씨에서도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불행히도 이런 작품은 대부분 전하지 않는다.

   예술가 삶을 동경했던 공민왕은 평생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노국대장공주와 후궁 6명을 뒀지만 자식은 후궁 반야 소생인 우왕뿐이다. 반야는 신돈의 시비(侍婢) 출신이어서 우왕이 신돈 자식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강력한 정치적 후원자였던 노국대장공주가 사망하고 개혁정책을 전두지휘하던 신돈이 숙청된 후 정치를 멀리하고 술과 남색에 빠져 방황했으며 결국 자신 주변 미소년들에게 살해된다.

   조선 중기 문신 김안로는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에서 “아방궁도(阿房宮圖)를 그렸는데 사람이 파리 대가리만 하지만 의관과 신발처럼 털끝 같은 것도 다 그려 넣어서 그 정밀하고 세세하기가 겨룰 자가 없었다. 다만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만 능하지 못했다”고 논평했다.

   공민왕 초상화는 조선시대에도 다수 존재했다. 왕조가 바뀌면 전 왕조 어진은 모두 불태우기 마련이다. 그러나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고려 역사가 공민왕대에서 끊겼다면서 그 스스로 공민왕 계승자임을 대외에 적극적으로 알렸고 이런 분위기로 인해 공민왕 초상화는 조선시대에도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 전까지만 해도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대원리(현 황해북도 개성시 용흥동) 소재 화장사(華藏寺)에 공민왕 어진이 봉안돼 있었다. 이 사찰은 고려시대 인도 승려 지공(指空)이 머물던 절이다. 화장사 소장 공민왕 진영은 조선시대 시인묵객들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의 존재는 이르게는 중종대 기록에서 나타나며 17~18세기 성행했던 문인들의 송도유람기에 자주 등장한다.


화장산에 봉안됐던 공민왕 진영 얼굴부분. 1916년 유리건판 촬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중종실록에는 1540년 화장사에 전해지고 있던 공민왕 영정에 대한 진품 논란이 있었으며 이에 따라 기존에 도화서에 보관되던 공민왕 영정 3척(隻)을 화장사로 돌려보냈다고 쓰여 있다. 또 1607년 송경(松京) 유랑기에는 화장사에 가면 꼭 봐야 하는 보물로 공민왕 화상, 지공의 등신대상, 패엽경과 전단향을 지목했다. 

   화장사는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불탔고 안타깝게도 이 진영 역시 함께 소실된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 진영의 실체를 알 수 있는 기록과 유물이 일부 남아 있다. 1917년 편찬된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이라는 책은 화장사기를 인용해 공민왕상 한 폭은 길이가 208.2㎝, 폭 154.8㎝라고 기술하고 있다.

   1916년 발간된 ‘조선고적도보’에는 당시 화장사 진영이 실려 있다. 조선고적도보는 조선총독부 지원 아래 일본인 학자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등이 1915년부터 1935년까지 20년에 걸쳐 낙랑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고적과 유물들 도판을 모아 간행한 책이다.




화장산 봉안 공민왕 영정 전체. 1916년 유리건판 촬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고적도보 속 공민왕 진영은 너무 희미해 구체적인 인상을 확인하기 힘들다. 우측에 고려성군공민대왕진(高麗聖君恭愍大王眞)이라고 쓰여져 있다. 그림 주인공은 병풍이 놓인 공간에서 정면을 바라보며 두 손은 복부 앞에 모아 소맷자락에 넣었다. 머리에는 원유관(遠遊冠·임금이 조하(朝賀)에 나갈 때 쓰던 관)을 착용하고 포(袍)를 입고 있다. 어깨에 수놓은 원형 무늬는 곤룡포를 연상케 하고 가슴 부분엔 관복에 부착하는 흉배가 표현돼 있다. 조선고적도보는 진영을 설명하면서 공민왕이 직접 그렸다는 설을 소개하며 이 같은 주장은 회의적이나 고려말 그림으로 볼 수 있는 우수한 작품이라고 강조한다.

   남인의 영수 미수 허목도 화장사 공민왕 진영을 언급했다. 그가 기술한 기언(記言)에는 1667년에서 1672년에 걸쳐 이 화상이 세 차례 언급돼 있다. 그중 눈길이 가는 대목은 공민왕 영정이 남아 있게 된 연유를 설명한 부분인데 허목은 “고려 유민이 비용을 모아 진전(眞殿)에 제사하는 관습이 조선 후기까지 이어졌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그림은 오랜 시간 임모(臨摹·베껴서 그림)돼 전해지면서 불화의 요소가 지속적으로 반영된 것으로 판단된다. 홀수 폭으로 병풍이나 신발코를 아래에서 위로 향하게 그린 점 등은 불화성 그림에서 즐겨 사용되는 형식이다. 원유관을 쓰고 왕의 복식을 착용한 제왕의 형상도 왕을 소재로 한 불화와 연관이 깊다고 한다.

   조선고적도보 속 초상화는 불분명하지만 유리건판(초기 필름의 일종)이 존재해 좀 더 선명한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2014년 ‘유리건판으로 보는 북한의 불교미술’이라는 제목의 사진집을 펴내면서 이 초상화의 이미지를 보다 정밀하게 살린 도판을 공개했다. 초상화는 눈썹 끝은 길게, 수염은 다소 조밀하게 그렸으며 정형화됐다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인상이 부각돼 있다. 눈매가 처져 있으며 전체적으로 둥글넓적한 느낌의 얼굴 형상을 하고 있다. 

                                                                                            <출처: 매일경제   배한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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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산대렵도

다른 표기 언어 天山大獵圖

요약 테이블
저작자 공민왕
창작/발표시기 고려 후기
성격 산수화
유형 작품
재질 비단
대표자 국립중앙박물관
분야 예술·체육/회화
소장/전승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 6가 168-6

요약 고려 공민왕이 그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산수화.


천산대렵도 / 전 공민왕

전 공민왕, 〈천산대렵도〉, 비단에 채색, 24.5×21.8㎝,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백산 또는 설산이라 불리는 천산에서의 수렵 장면을 묘사한 작품이다.

내용

   비단바탕에 채색.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백산(白山) 또는 설산(雪山)이라고도 불리는 천산(天山)에서의 수렵장면을 묘사한 작품이다.

   곤륜산(崑崙山)의 북쪽 자락인 음산(陰山)에서의 사냥모습을 표현하였다는 뜻에서 ‘음산대렵도(陰山大獵圖)’라고도 지칭된다. 본래는 옆으로 길다란 두루마리 그림이었던 것이 조각난 것으로 믿어지는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3쪽이 전해지고 있다.

   서울대학교의 규장각에도 「수렵도」 잔편 소폭 1점이 공민왕의 작품으로 전칭되는 것이 전해지고 있으나, 국립중앙박물관의 것들과는 솜씨가 달라 동일인의 것으로 보기 어렵다.


   18세기 학자인 이하곤(李夏坤)의 기록에 의하면, 이 수렵도는 본래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의 소장품이었으나 그의 사후에 애호가들에 의하여 조각이 난 것으로 전해진다. 힘차게 말을 달리는 기마인물의 모습이 가늘고 섬세하면서도 활기에 찬 선으로 기운생동하게 묘사되어 있다.

   인물들의 옷과 말장식들에 가해진 채색도 훌륭하다. 본래 수렵도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시작하여 우리나라 미술에서 종종 묘사되던 것인데 고려시대에는 고구려의 전통과 몽고의 영향을 받아 활발하게 제작되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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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헌

  • 『한국회화사』(안휘준, 일지사, 1980)
  • 「고려시대의 인물화」(안휘준,『고고미술』180, 1988)



청장관전서 제5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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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엽기 1(盎葉記一)
공민왕(恭愍王)의 그림
[DCI]ITKC_mk_j002_009_2000_11410_XML DCI복사 URL복사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이 손수 파평군(坡平君) 윤준(尹俊)의 상(像)과 율정(栗亭) 윤택(尹澤)ㆍ행촌(杏村) 이암(李嵒)의 상을 그려서 내려주고 또 추산도(秋山圖)를 그려 밀직(密直) 윤호(尹虎)에게 내려주었으며, 달마절로도해도(達磨折蘆渡海圖)ㆍ동자보현육아백상도(童子普賢六牙白象圖)와 각운귀곡(覺雲龜谷)이란 큰 글씨를 써서 조계종사(曹溪宗師) 운공(雲公)에게 주었다. 내가 일찍이 이낙서[(李洛瑞) 이서구(李書九)의 자이다.] 의 집에 보관되어 있는 공민왕의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를 보았다. 찢어진 깁이 다 해진 나비의 날개 같은데, 거기에 다만 경가(麖麚 사슴의 일종) 두세 무리만 남았을 뿐이나 우사(藕絲 연꽃 줄기 속에 있는 가느다란 실)와 같이 섬세한 그림이 참으로 천인(天人)의 필치(筆致)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승창 (역) ┃ 1981





공민왕 -천산대렵도| 자작시 명상시    
설촌(雪村) | 조회 387 |추천 0 | 2009.02.05. 00:57

 


천산대렵도      

고려 제31대 공민왕(:1330~1374)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천산대렵도 -부분>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작가 : 공민왕
종류 : 회화
크기 : 24.5cm×21.8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견본채색(). 24.5cm×21.8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수렵도()라고도 한다. 현재 3장의 단편()으로 나누어져 전하는데 원래는 이보다 훨씬 큰 그림으로 이것은 오려져 나온 것으로 추측된다. 그림이 너무 낡았고 몹시 훼손되어 필법을 자세히 파악하기는 곤란하나 호복()을 입고 말을 모는 무사의 모습과 북종화()적인 풀의 묘사가 눈에 띈다.

 






         
공민왕 '바둑 그림'을 그리다
2014-10-05 
▲ 일본에 전해오는 공민왕의 바둑 그림.

                                     

   주역에 밀운불우(密雲不雨)라는 말이 있다. 구름이 몰려드나 비는 오지 않는다는 말로 이 문장은 놀랍게도 은허문자에도 비슷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한마디로 준비는 어느 정도 되어 있으나 정리정돈이 안된 상태를 뜻하는 말로 고려 바둑사를 평하는데 가장 적합한 제목이다.

고려의 바둑 기록은 삼국시대와는 달리 차고 넘칠 정도로 많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원사, 송사, 금사 등의 정사와 수많은 여타 문집 금석문 등에서 족히 수십 편의 자료가 산재하고 있다.

그러나 고려바둑의 기록들이 여러 잡문 등의 한담 속에 기능할 뿐 체계적이고 이론적으로 모아지는 노력이 전무하여 역사학계의 사각지대란 핑계와 바둑계의 관심 부족 탓으로 돌리기에는 아쉬운 점이 많았다.

고려는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한 나라다. 고려와 동 시대를 영위했던 금사, 원사, 송사는 고려를 본래 이름이 고구려이고 부여의 별종이라 기록하고 있다. 고려는 분열하던 신라시대를 재통합한 나라로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의 문화와 풍속을 고스란히 계승한 나라다. 25사에 전하는 마한 백제가 음양오행에 밝았다는 기록이, 송사에는 고려가 음양과 귀신을 믿어 귀신제를 연다고 기록한다.

25사는 고구려 백제 신라에 바둑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중 특히 백제에 바둑이 유행을 했다고 적는다. 고려는 이 삼국의 역사를 기반으로 건국한 나라인 만큼 고려에 바둑기록이 차고 넘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고려의 바둑 기록은 정사와 문집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정사는 고려와 중국의 역사서이고 문집은 이규보, 이인로, 최자, 이색, 김부의 등 고려문인들의 개인 저술이다.

고려의 정사인 고려사는 중요한 바둑 기록을 몇 건 전한다. 그 중에서 가장 극적인 기록이 충렬왕 1년의 기록이다.


- 무진일 리부(吏部) 원외랑(員外郞) 곽희분과 랑장(郞將) 조정통이 바둑을 잘 둔다 하여 황제의 소환을 받고 원으로 갔다.
(善碁被帝召如元).

충렬왕은 세자 때 원나라에 볼모로 있다가 왕이 된 사람이다. 충렬왕이 왕위에 오른 직후 원나라는 고려에서 바둑 잘 두는 두 사람을 발탁해 간 것이다. 명령을 내린 사람은 세조 쿠빌라이(忽必烈)다. 이때가 원 세조 지원(至元) 11년으로 고려 충렬왕 1년에 해당한다. 원사(元史)의 1274년의 기록에서 간추린 대 고려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1월. 궁궐을 완성하다.

2월. 고려왕이 이익손을 보내와 하례하다.

3월. 장군 철목합을 보내어 일본 정벌에 합류케 하다.

5월. 공주를 세자(충렬왕)에게 시집보내다.

7월. 고려왕이 죽다. 사신이 오다.

8월. 세자 심이 고려의 왕이 되다.

9월. 고려왕이 왕숙을 사은사로 보내다.

11월. 이사손을 고려에 보내어 답례하다.

   고려사와 원사의 기록은 거의 대동소이하다. 원사에 곽희분, 조정통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 해에 고려는 원에 사신을 두 번 보냈는데 사신단 속에 곽희분, 조정통이 편입되어 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원의 세조가 고려의 관원 중에서 바둑을 잘 두는 고수만을 특정하여 소환을 해 간 것이다.

   충렬왕 때 고려에는 바둑과 의술 등이 극성을 떨치고 있었다. 세조는 병이 나자 고려에서 의술과 바둑에 조예가 있던 관원 설성경을 다시 불러간다. 설성경의 기록은 고려사 열전 방기 편에 전한다.


- 入至使圍碁於前親臨觀之留二年告歸也祖賞賜甚厚-


   원의 세조는 설성경의 치료를 받고 병이 나은 후 수시로 그를 불러 바둑을 두게 하고 곁에서 지켜보았다는 것이다. 2년 후 설성경이 돌아가겠다고 하자 후한 상을 내렸다고 적고 있다. 이 기록은 원 세조의 호화스런 생활의 모습이라 할 수 있으나 이 기록은 고려시대 바둑의 융성을 말해 주는 것이다.

동양의 수많은 나라 중에 고려바둑의 수준이 당 시대 세상의 중심이라는 원 황제의 주목을 끈 이유일 것이다.

   고려사 충렬왕 세보에는 수강궁에 있을 때 재추(宰樞), 장군방, 홀적(忽赤), 내방고(內房庫) 내료(內僚)에서 매일 윤번으로 왕을 위해 연회를 베풀고 이것이 상례가 되었다고 기록한다. 재추는 원래 야간에 급한 국사가 있을 때 왕을 보필하기 위하여 궁 안에 대신들이 숙직을 하던 곳인데 시간이 지나며 변질이 되어 바둑이나 마술 등의 여흥 지원으로 변질된 모습이다.

조선 세조실록에 보이는 '재추'에 바둑 잘 두는 사람과 활 잘 쏘는 사람을 숙직케 했다는 기록이 있고, 서거정이 지은 필원잡기에 '재추에 말 잘 타고 바둑 잘 두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기록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고려의 왕실은 문란(?)했다. 고려사는 고려 5대왕 경종을 기록하며 음악 여흥 바둑으로 시간을 보내며 국정을 잘 돌보지 않았다고 기록한다. 고려의 예종은 친구 곽여를 금문우객(金門羽客)이라 부르며 궁에 들이고 거문고와 바둑으로 세월을 보냈다고 기록한다.

   왕실뿐이 아니다. 이규보의 문집에 전하는 금의(禁儀)의 행장에는 금의가 말년에 가족들을 모아놓고 자식들이 두는 바둑을 보다가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공민왕의 바둑 기록도 여러 건 보인다. 영민했던 왕답게 그림에도 조예가 있었던 모양이다. 천산수렵도와 일본에 전하는 바둑 그림이 남아있어 조금은 흔적을 살필 수 있다.


  고려의 바둑은 왕실에서부터 시장 상인들까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고려사절요에 전하는 고려 상인과 중국 상인의 에피소드가 그렇다.  고려의 초동은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바둑을 두고 어떤 기생은 간만에 만난 낭군과 함께 바둑으로 회포를 푼다.

오래된 친구 오래된 바둑 오래된 문화...오늘은 이런 생각을 해본다.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공민왕(恭愍王, 재위 1351~1374) | 서화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공민왕(恭愍王, 재위 1351~1374)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는 비단에 채색된 산수화(21.8X4.5cm)로 고려시대 공민왕(恭愍王, 재위 1351~1374)이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산(白山) 또는 설산(雪山)이라고도 불리는 천산(天山)에서의 수렵장면을 묘사한 작품이다. 곤륜산(崑崙山)의 북쪽 자락인 음산(陰山)에서의 사냥모습을 표현하였다는 뜻에서 ‘음산대렵도(陰山大獵圖)’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3조각이 전해지고 있으며, 원래 긴 두루마리형태의 그림으로 추정된다. 본래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 1637~1693)의 소장품이었으나, 그의 사후에 애호가들에 의하여 조각이 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말을 타고 힘차게 달리는 기마인물의 모습을 가늘고 섬세한 필치로 그리고 있으며, 인물들의 옷과 말장식에 채색이 되어있다. 특히 기마인물은 변발(辮髮)이며, 호복(胡服)을 입은 몽고풍의 인물로 표현하였다. 고려는 1231년부터 몽고의 침입을 받아 1270년에 완전히 복속(服屬)되었다. 이후 14세기 후반 공민왕의 반원정책이 실시되기 이전까지 약 100년간 원의 정치적 간섭을 받게 되었으며, 원 왕실과의 혼인을 비롯한 많은 교류가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원의 풍속이 고려에 영향을 주게 되었으며, 특히 상류계층을 중심으로 원의 풍습이 유행을 하게 된다. 천산대렵도에서 표현된 변발(辮髮)과 호복(胡服) 역시 당시의 대표적인 몽고 풍속이었다.

수렵도는 고구려의 고분벽화에서 자주 등장하는데, 고려시대에도 고구려의 전통이 이어지고 몽고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산(白山) 또는 설산(雪山)이라고도 불리는 천산(天山)에서의 수렵장면을 묘사한 작품이다. 



공민왕 천산대렵도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공민왕 천산대렵도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공민왕 천산대렵도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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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恭愍王, 1330년 5월 23일 (음력 5월 6일)[1] ~ 1374년 10월 27일 (음력 9월 22일), 재위: 1351년 ~ 1374년)은 고려의 제31대 국왕이다. 초명은 기(祺), 휘는 전(顓), 는 이재(怡齋)와 익당(益堂), 우왕 2년에 조정에서 올린 시호는 인문의무용지명열경효대왕(仁文義武勇智明烈敬孝大王)이며, 같은 왕 11년에 명에서 받은 시호는 공민왕(恭愍王)이다. 충숙왕의 차남이며, 몽골식 이름은 바얀 테무르(몽골어: ᠪᠠᠢᠠᠨᠲᠥᠮᠥᠷ Bayan Temür한국 한자伯顔帖木兒 백안첩목아)이다

   즉위 초반에는 무신 정권의 세력 기반을 혁파하고 원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주국을 선언하였으며 승려 신돈을 등용하여 개혁정책을 펼쳤으나 노국대장공주의 사후 개혁의지를 상실하였다. 한때 신돈 등을 등용하여 권문세족과 부패 관료와 외척을 정리하고 신진사대부를 중용하는 등의 개혁정책을 폈으나, 신돈과 의사 충돌로 제거하였다.

   이후 남색과 술, 향락에 탐닉하던 중 1374년 홍륜, 최만생의 쿠데타로 의하여 시해당했다. 영특하고 다재다능했으며, 특히 그림과 서예는 당대 최고의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는 아들모니노(우왕)가 신돈의 시비인 반야의 소생이라는 점 때문에 정통성 논란이 나타난다.

   1351년부터 1374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1351년부터 1365년까지 친정을 하였고 한때 1364년 숙부 덕흥군(德興君)이 실권 탈취 기도를 했다가 실패한 바 있으며 1365년부터 1371년까지 신돈(辛旽)이 실권을 맡았고 신돈을 축출한 1371년부터 1374년 붕어할 때까지 다시 친정을 하였다.

생애[편집]

즉위 이전[편집]

출생[편집]

공민왕 왕전은 1330년 고려 충숙왕과 고려 출신 공원왕후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원나라 황실 출신은 아니었지만 그는 곧 원나라 조정의 압력에 의해서 몽골에 입조하게 된다. 1341년(충혜왕 2)원나라에 건너갔다.

1344년(충목왕 원년)에 강릉부원대군(江陵府院大君)에 봉해졌고, 1349년(충정왕 1년)에 원나라의 황족인 위왕(魏王)의 딸 노국대장공주를 아내로 맞았다.

원나라 입조와 귀국[편집]

당시 형 충혜왕에게는 아들 충목왕과 충정왕 그리고 천민 출신 은천옹주 소생 석기 왕자가 있었다. 석기는 충혜왕 사후 은천옹주가 폐출되면서 처형되었고, 충목왕은 서자 1명이 있었고, 충정왕은 후사가 없어 그는 야심을 품게 된다.

그러나 충정왕의 어머니 희비 윤씨가 국정을 농단하자, 이 사실을 고려의 관료들이 원나라에 알려왔다. 1351년 원나라 황제는 칙서를 내려 충정왕을 폐위시키고, 강릉부원대군은 노국대장공주와 함께 귀국(1351년 12월)하여 국왕이 되었다(1352년). 공민왕은 즉위 초 전왕 충정왕을 유배하였다가 사사하였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면서 고려에서는 원나라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서서히 일기 시작했다.[2] 그의 이러한 정책을 부인 노국대장공주는 전폭 지지함으로써 그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재위기간 중[편집]

개혁[편집]

공민왕의 개혁(恭愍王-改革)은 고려 제31대 왕 공민왕이 단행한 국정의 개혁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개혁이 우왕 이후에까지 이어진다. 공민왕은 충혜왕 복위 2년(1341) 원나라의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를 비로 맞고 충정왕 3년(1351) 원나라의 지원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즉위 후에는 주권 회복 정책을 강력히 기도하였다. 공민왕은 대륙의 정세가 동요하자 이를 이용하여 몽골의 기반을 끊고 완전한 독립을 회복하기 위하여 과감한 혁신정치를 단행하였다. 즉 공민왕은 몽골의 풍습·연호·관제를 폐지하고 문종 때의 옛날 제도로 복구시켰으며, 정동행성·쌍성총관부를 철폐했다. 또 기철(奇轍)을 위시한 친원파를 일소하고, (明)과 협력하여 요동(遼東)의 을 공략했다.

동왕 18년(1369) 이인임(李仁任), 이성계(李成桂)로 하여금 동녕부를 정벌케 하는 한편 정방(政房)을 폐지하여 권문세가의 세력을 억압했다.

그는 또 신돈(辛旽)을 등용하여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 귀족들이 겸병한 토지를 소유자에게 반환시키고 불법으로 노비가 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등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그 후 홍건적(紅巾賊)과 왜구(倭寇)의 침입을 받아 국력이 소모되었다.

고려의 대표적 화가이며 글씨에도 능했던 공민왕의 개혁은 권문세가의 반대에 부딪혀 신돈이 죽임을 당하고 그마저 죽임을 당하여 만족할 만한 결실을 보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났다.

무신 독재 혁파[편집]

즉위한 지 두 달 뒤인 이듬해 2월부터 그는 전격적으로 개혁작업에 돌입해 2월 초하루에는 무신정권의 최우가 설치하여 인사행정을 맡아오던 정방을 폐지하였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개혁조서를 선포하여 토지와 노비에 관한 제반 문제를 해결할 것을 명령하였다.

1352년 8월 공민왕은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옛날의 임금들이 일심전력으로 나라를 다스릴 때, 친히 국정을 담당함으로써 견문을 넓혔고 하부의 실정 또한 살필 수 있었다. 지금이야말로 임금이 친히 나라를 맡기에 걸맞은 시기이다. 첨의사, 감찰사, 전법사, 개성부, 선군도관은 판결송사에 관하여 5일에 한 번씩 반드시 계를 올리도록 하라.

공민왕의 이 명령은 곧 왕의 친정체제 구축을 위한 획기적인 조치였다. 무신정권 이후 왕은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원나라의 복속체제 아래에서 겨우 서무를 결재하는 권리만 되찾은 입장이었다. 하지만 공민왕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각 부서의 중요 안건을 직접 챙기며 관계와 민생 전반에 대한 통치기반을 확립하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공민왕의 친정체제 구축작업은, 무신정권 이후 거의 이뤄지지 않았던 정치토론장인 서연을 재개함으로써 더욱 구체화되었다.

공민왕은 8월의 서연에서 원로와 사대부들이 교대로 경서와 사기, 예법 등을 강의할 것과 전답 및 가옥, 노비와 억울한 죄수 문제를 시급히 해결할 것을 촉구하였다. 또한 첨의사와 감찰사를 자신의 눈과 귀로 규정하고, 정치의 옳고 그름을 위해 백성들의 이해관계에 대한 기탄 없는 보고를 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그동안 권력에 기생하던 성사달 등 부패한 고급관리들이 대거 하옥되었다. 또한 상장군 진보문의 아내 송씨의 간통사건을 적발하는 등, 부정을 일으킨 자들을 색출하여 하옥함으로써 관리들의 기강을 바로잡고 풍기를 단속하였다.

권문세족 숙청과 친위세력 강화[편집]

고려 공민왕 영정 (조선후기작, 작자미상)

원나라의 지배력이 대폭 약해진 틈을 타서 공민왕은 본격적인 반원 자주화 개혁정치를 폈다.[3] 우선 친원 세력의 우두머리인 기씨 일족을 제거했다. 기씨는 기자오의 딸이 원 순제의 황후가 된 것에 힘입어 횡포를 부리던 인물들이다. 그리고 쌍성총관부를 공격, 원나라가 지배했던 철령 이북의 땅을 되찾았다. 또한 원나라의 연호 대신 독자적인 연호를 쓰고, 관직 명칭도 원래대로 되돌려놓았다.[3]

그러나 1352년 9월 공민왕의 과감한 개혁정치에 위기를 느낀 판삼사사(判三司事) 조일신(趙日新)이 정천기(鄭天起), 최화상(崔和尙), 장승량(張升亮) 등과 힘을 합쳐 대신 기원과 최덕림 등을 죽이고 정변을 일으켰다. 정변에 성공한 조일신은 곧 공민왕을 협박하여 자신을 우정승에 임명케 하고, 자신의 측근들을 요직에 배치하였다.

한달 뒤 조일신은 다시 자신과 함께 거사를 감행했던 최화상과 장승량 등을 죽였다. 이로써 조일신은 정권을 독차지하게 된다. 이때 조일신은 좌정승으로 승진하였으며, 판군부 감찰을 겸하며 공신 칭호까지 받아내기에 이른다. 그러나 공민왕은 그를 제거할 마음을 품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 정동행성에서 대신들과 의논한 뒤 김첨수(金添壽)를 시켜 조일신을 연행하는 데 성공했다.

조일신을 제거한 공민왕은 그 측근인 정을보, 이권, 나영걸, 고충절, 이군상 등 28명을 하옥하였다. 이어 이제현을 우정승, 조익청을 좌정승으로 임명하여 개혁적 정권 수립을 공고히 하게 되었다.

반원 개혁[편집]

한편 당시 원나라는 피지배층 한족의 반란인 홍건적의 난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1354년 음력 7월부터 1356년까지 원나라의 지원 요청으로 최영이방실안우김용정세운, 유탁(柳濯) 등은 병력 2천을 이끌고 원나라에 파병되었다. 파병군은 고려종정군(高麗從征軍)이라 불렸다. 파병 후 귀국한 장군들이 원나라의 몰락을 상세히 보고하여, 공민왕의 반원개혁에 힘을 실어주었다.

1356년(공민왕 5) 음력 4월 공민왕은 당시 원나라의 기황후(奇皇后)를 등에 업고 권세를 부리던 기철(奇轍) 등과 권겸노정 등의 부원 세력을 역모죄로 숙청하였는데, 이를 병신정변(丙申政變)이라 한다. 또한 몽골의 연호와 관제를 폐지하고 문종 당시의 칭제(稱制)로 환원하였으며, 원나라의 정동행중서성이문소도 폐지하였다.

1356년 음력 4월, 공민왕은 유인우(柳仁雨)에게 몽골이 빼앗아 백 년 넘게 장악하고 있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의 공격을 명령했다. 쌍성총관부 공격은 공민왕 반원 개혁의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때 고려인의 후손으로 총관부에서 대대로 몽골의 작위를 세습하던 이성계와 그의 부친 이자춘은 몽골을 배신하고 성문을 열어, 유인우에게 성을 바쳤다. 이를 계기로 이자춘 부자(父子)와, 고려 조정에 협력한 조돈 등이 고려 정계에 등장했다.

같은 해 공민왕은 인당, 최영을 파견하여 압록강 너머 원나라의 8참(站)을 공격하여 격파하였으며, 파사부 등 3참을 점령하였다. 이 사건은 고려 최초의 요동 정벌로 평가된다.

왜구, 홍건적의 침입[편집]

1358년(공민왕 7) 최영이 이끄는 고려군이 4백 척 규모의 함대로 오예포(吾乂浦)에 침략한 왜구를 물리쳤다.

1359년(공민왕 8) 음력 12월부터 1360년(공민왕 9) 음력 2월까지, 홍건적 장수 모거경이 4만 명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였다. 모거경은 서경까지 함락시켰으나 안우, 이방실, 최영이 지휘하는 고려군에게 패해 물러갔다.

1361년(공민왕 10) 음력 11월부터 1362년 음력 1월까지 반성관선생사류파두반이 이끄는 홍건적 20만 명이 다시 고려를 침공하여, 수도 개경까지 함락시켰다. 그러나 곧 고려군의 대대적인 반격을 받고 압록강 너머로 패주하였다.

홍건적은 몽골에 반대하는 한족으로 구성되었다. 이 때문에 홍건적 침입의 영향으로 고려의 반원 개혁은 부분 차질을 빚었으며, 고려 조정은 원나라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한때 관제를 개혁 이전으로 되돌리기도 하였다.

1362년 김용의 음모로 정세운안우이방실김득배가 주살되고 만다. 같은 해 2월부터 7월까지 요동의 몽골 군벌 나하추는 쌍성총관부의 잔당인 조소생과 함께 고려의 동북면에 침공하였다. 그러나 나하추는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에게 대패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쌍성총관부의 잔당 조소생, 탁도경 세력은 완전히 몰락하였다.

암살 기도와 여진족 정벌[편집]

이후 원나라에서는 고분고분하지 않는 그를 폐출하고 덕흥군(德興君) 등을 추대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1363년초 그는 왜구 토벌을 계획하였으나 일시 중단하였다.

1363년 음력 3월, 김용이 원나라의 지원을 받던 덕흥군과 내응하여 흥왕사에서 공민왕의 시해를 기도했으나 최영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러자 덕흥군은 1364년 음력 1월 원나라의 지원을 받아 최유와 함께 원나라군 1만 명을 이끌고 고려의 서북면에 침입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최영과 이성계에 의해 섬멸되었다. 고려 출신으로 원나라의 장군이 되었던 최유는 고려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1364년 음력 1월, 여진의 대추장 김삼선(金三善), 김삼개(金三介) 형제가 고려의 동북면에 침입하였으나 이성계 휘하의 고려군에게 대패하였다. 또한 같은 달 원의 동녕로 만호 박백야대(朴伯也大)가 고려의 서북면 연주(평안북도 영변)을 침입하였다. 이는 원나라가 고려에 행한 최후의 공격이었다. 그러나 이 공격은 최영이 지휘하는 고려군에 의해 참패로 끝났다. 같은 해 음력 5월에는 김속명이 이끄는 고려군이 진해에 침입했던 3천 명의 왜구를 격파하였다.

생애 후반[편집]

개혁의 실패[편집]

조선 종묘 내에 있었던 고려 공민왕 내외 영정. 조선 건국후 이성계는 조선건국을 정당화시킬 목적으로 고려 공민왕 내외의 영정을 그려 조선의 종묘에 봉안하였다. 이는 고려는 공민왕에서 끝났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홍건적과 왜구의 계속적인 침범은 고려의 국력을 소모시켰다. 1365년(공민왕 14),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했던 노국대장공주가 드디어 회임을 하였다. 그러나 노국대장공주는 난산 끝에 사망하고 말았다.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은 공민왕에게 극심한 충격을 주었다. 그는 노국대장공주의 초상화를 바라보며 통곡했고,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노국대장공주는 인덕왕후(仁德王后)로 추존되었으며, 공민왕은 서거한 왕후를 추모하는 불사(佛事)에 전력을 기울였다. 왕비의 사후 그는 술과 색으로 시름을 달랬고,예쁜 여자들을 왕궁으로 출입시키기도 했다.

끝없는 상심에 빠졌던 공민왕은 1365년 음력 5월 을사환국(乙巳換局)을 통해 신돈(辛旽)을 등용하였다. 영산 출신 승려였던 신돈은 당시 살아있는 부처라는 소문이 있었고 그 소문을 들은 공민왕은 직접 영산까지 내려가 신돈과 만나 대담하였으며, 신돈을 개경으로 불러들여 시국을 논하였는데 그의 달변이 왕의 마음에 들게 된다. 왕은 신돈을 환속시킨 뒤 수정리순론도섭리보세공신(守正履順論道燮理保世功臣)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에 책록하고 영도첨의사사(領都僉議使司) 판감찰사사(判監察司事)제조승록사사(提調僧錄司事) 겸 판서운관사(判書雲觀使) 취성부원군(鷲城府院君)에 임명했다.

공민왕은 개혁추진을 위해 신돈을 기용했다. 그는 어머니가 절의 노비였고, 자신은 중으로서 아버지는 권문세족이었지만 본인은 노비의 몸에서 난 서자였으므로 권문세족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신돈의 등용과 제거[편집]

1366년 신돈의 건의로 전민변정도감이 설치되었다.[3] 수상직과 감찰서와 서운관의 수장직을 겸한 신돈은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1366년)하여 권문세족들이 불법으로 겸병한 토지를 원소유자에게 환원시키는 한편 억울하게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을 해방시켰고, 또한 성균관을 다시 설치하였다. 신돈은 민중들에게 '성인' 칭송을 받았다.[3] 결국 신돈의 개혁으로 권문세족과 신흥 무인세력은 힘을 잃게 되었고, 이들은 곧 신돈의 정책에 대해 거세게 반발하였다.

1366년 음력 10월 김유(金庾)가 1백 척의 규모의 토벌군을 이끌고 제주도를 공격했으나 패전했다. 당시 제주도는 삼별초의 항쟁에 진압된 뒤 몽골의 목마장(牧馬場)이 설치되었으며, 다수의 몽골인들이 주둔하여 친원노선을 걷고 있었다. 이후 약 10여 년 넘게 제주도는 고려 조정에 반발하였다.

1368년(공민왕 17) 명나라가 건국하자 이인임(李仁任)을 보내어, 명나라와 협력하여 요동에 남은 원나라 세력을 공략하였다. 1370년(공민왕 19) 1월과 11월, 이성계와 지용수로 하여금 동녕부(東寧府)를 공격하여 오로산성(五老山城)을 점령하였고, 요동의 고려인을 본국으로 송환시켰다. 그러나 이것이 영토 확장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1371년 음력 7월 신해환국(辛亥換局)으로 신돈이 유배된 후 처형되었다. 이로써 공민왕의 개혁은 사실상 마감되었다. 신돈을 잃은 공민왕도 더 이상 개혁의지를 갖지 못하고 방황[3] 하고 만다. 그해 음력 9월 동녕부를 다시 공격하는 명을 내렸다. 노국대장공주의 죽음과 신돈의 제거 이후 개혁정책에 염증을 느낀 그는 술과 남색에 빠져 방황하게 된다.

죽음[편집]

노국대장공주를 잃은 공민왕은 1372년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하여 젊고 외모가 잘생긴 청년을 뽑아 이 곳에 두고, 좌우에서 시중을 들게 하였다.

1374년 음력 7월부터 8월, 제주도에서 목호의 난이 일어났다. 이에 최영이 314척의 함대와 병력 25,600여 명을 이끌고 난을 진압하고, 제주도를 완전히 수복하였다.

같은 해 9월에 공민왕이 홍윤(洪倫), 최만생(崔萬生) 등 자제위(子弟衛) 소속의 미소년들을 궁중에 출입하게 하여, 그들과 동성애를 즐겼다는 주장이 있다.

홍윤은 공민왕의 후궁이었던 익비(益妃)와 간통하였는데, 이를 최만생이 은밀히 공민왕에게 보고하였다. 공민왕은 "이 사실을 아는 자를 모두 죽여야겠다"고 말했다. 최만생은 자신까지 죽게될까 두려워 홍윤에게 사실을 고해바쳤고 며칠 후 그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신하들과 궁녀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방화를 일삼았다.

결국 공민왕은 도망가려다가 홍윤, 권진홍관한안최선, 최만생에 의해 붙잡혀 1374년(공민왕 23년) 9월 21일에 시해당했다. 향년 44세였다.

시해 이후[편집]

홍윤과 최만생 등은 공민왕을 칼로 수차례 난자하였고 목과 사지를 베고 저자거리에 매달았다. 그 후, 칼질을 한 자들이 “밖에서 적이 들어왔다.” 라고 부르짖었는데, 가까이서 호위하던 위사들은 겁을 먹고 움직이지 않았고 오히려 홍윤 편에 가담하였다. 이들은 한결같이 입을 다물었고, 재상을 비롯한 신하들 또한 변고를 들었음에도 궁으로 들어오는 자가 없었다. 오직 내시 이강달만이 진실을 알았는데, 그 또한 이를 비밀에 부쳤다.

다음날, 정권을 잡은 쿠데타 세력은 임금의 명령을 이용하여 이인임경복흥안사기 등을 소집해 사태 수습을 논의했다. 이인임은 처음에는 승려인 신조를 의심해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그러던 도중 병풍과 최만생의 옷에 묻은 피를 보고 사건의 진상을 알았으며, 홍윤 등 일파는 체포되어 사지가 찢기는 거열형을 당하고 삼족을 멸하는 극형을 받았다.

이 사건 이후 이인임에 의해 어린 우왕이 즉위하면서 이인임의 섭정이 전개되었다. 우왕은 공식적으로 궁녀 한씨의 소생이었으나 실은 신돈의 여종인 반야의 소생으로 신돈의 자식이라는 소문에 시달렸으며, 이성계 일파는 이를 사실로 내세워 우왕과 창왕이 왕씨가 아닌데도 고려의 왕권을 찬탈하여 고려 왕조의 맥이 끊긴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새로운 왕조인 조선의 개국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하였다.

능묘[편집]

공민왕의 능은 현릉(玄陵)이며, 노국대장공주(인덕왕후)의 능인 정릉(正陵)은 그 옆에 나란히 있다.

미술과 서예[편집]

공민왕이 직접 그린 《염제신 상》
공민왕이 그린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

공민왕은 그림에 뛰어나 고려의 대표적 화가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글씨에도 능하였으며, 특히 대자(大字)에 뛰어났다.

작품성은 뛰어났고 실물을 거의 완벽하게 묘사하여 당대에도 화제가 되었는데, 인물 묘사도는 섬세하였다는 평이 있다. 작품에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국립현대미술관), 《이양도(二羊圖)》, 《노국대장공주진(眞)》, 《염제신상(象[4])》, 《손홍량(孫洪亮)상(象) 》《석가출산상(釋迦出山像)》, 《아방궁도(阿房宮圖)》, 《현릉산수도(玄陵山水圖)》, 《달마절로도강도》, 《동자보현육아백상도(童子普賢六牙白象圖)》 등이 있다.

서예작으로는 경북 봉화군에 있는 부석사 무량수전의 현판과 청량사 유리보전의 현판, 안동 영호루 현판 등이 있다. 이는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으로 피난중일 때 직접 써주었다고 한다. 공민왕 15년(1366년)이래 강릉 임영관의 현판은 현재 국보로 지정된 강릉객사문에 남아있다.

사상과 치적[편집]

개혁 정책의 성과[편집]

공민왕은 밖으로 반원 자주화, 안으로는 권문세족 일소를 목표삼아 개혁정치를 펴면서 그 일환으로 성균관을 재건, 유학을 장려하고 때묻지 않은 유능한 인물들을 대거 등용하였다.[5] 그 결과 비록 공민왕의 개혁정치는 권문세족의 반격으로 실패했지만 신진사대부라는 새로운 개혁 세력이 중앙 정치무대에 자리잡게 되었다.[5]

우왕에 대한 관점[편집]

그는 신돈이 소개한 신돈의 시비 반야의 소생 우(모니노)를 자신의 친자로 인지하였다. 반야의 임신을 알게 된 그는 신돈에게 명하여 반야를 신돈의 집에서 속량시키고 신돈의 친구인 승려 능우의 어머니에게 반야를 보내어 순산하게 했다.

그러나 모니노(후의 우왕)의 출산 이후 신돈의 자식이라고 왜곡할 것을 우려했던 공민왕은 반야를 별궁에 감금하고, 우(모니노)는 그해 사망한 궁인 한씨가 낳은 자신의 친자라 하여 대내외에 발표하고 강령부원대군에 봉하였다. 그의 예상과 염려대로 후일 정도전 등은 우왕이 신돈의 자식이라는 우창 신씨설을 주장하였다.

가계[편집]

  1. 이동 * 원 위왕의 딸.
  2. 이동 * 경주 이제현의 딸. 공민왕 사후 여승이 되었다.
  3. 이동 * 덕풍군 의(德豊君 義)의 딸.
  4. 이동 * 서흥 염제신의 딸. 혜비와 같이 공민왕 사후 여승이 되었다.
  5. 이동 * 죽성 안극인의 딸. 우왕의 비인 현비(賢妃)의 고모이다. 공민왕의 사후 왕실의 어른이 되었다.
  6. 이동 * 공민왕보다 앞서 사망하였으며 로 추존.
  7. 이동 * 공민왕 피살후, 우왕 2년(1376) 음력 3월 모후 공원왕후와 친원파 이인임에게 살해됨

공민왕이 등장한 작품[편집]

영화[편집]

평가와 비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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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최후의 개혁군주로 평가된다. 그러나 재위 후반의 엽색 행각에 대한 비판이 존재한다.

기타[편집]

1357년(공민왕 6) 문무백관에게 최초로 갓을 쓰도록 명하였다.[6]

신돈의 개혁정책에 염증을 느껴 신돈 일파를 제거하면서 아들 모니노의 생모가 신돈의 시비 반야(般若)라는 점 때문에 혈통문제가 발생할 것을 예상, 1374년 9월에 아들 아들 모니노의 존재를 알리고, 아들 모니노의 생모는 궁인 한씨라고 공표하고, 한씨의 3대 조상과 그녀의 외조에게 벼슬을 추증한다.[7]

그러나 뒤에 시비 반야는 자신이 우왕의 생모라고 주장했다가 이인임에게 살해당하게 된다.

같이 보기[편집]

참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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