宋, 서긍의 '고려도경'으로 보는 고려의 강역에 관한 고찰 / 명지대 신완순 교수 外

2017. 5. 1. 12:25우리 역사 바로알기

 



       宋, 서긍의 '고려도경'으로 보는 고려의 강역에 관한 고찰 / 명지대 신완순 교수               

데빌달     2008.12.25. 23:43

  

   송나라 서긍의 '고려도경'은   1103년 송의 손목이 고려의 언어를 차자표기법으로 기록해 놓은 계림유사와 더불어 고려의 인문과 지리를 서술해 놓은 귀중한 역사적 사료이다.

 

   계림유사의 유명한 고려어의 한자 차음표기의 예로는 '귀왈기심'(鬼曰幾心='귀는 귀신이다'라는 말을 지나음으로 고려어 '신'에 유사한 心(xin)을 차자함)· '두왈말'(斗曰抹=두는 말(한말 두말))· '궁왈활'(弓曰活=뭐 이건 쉽지요 궁은 활이다)· '백왈온'(百曰溫=백은 '온'이다='온'은 순수한 우리말로 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산왈매'(山曰每=산은 '메'이다 한자 每의 음가를 빌어 우리말 '메'를 표현함)

 

   그런데 이 손목의 계림유사에 불과 20년 밖에 시차가 나지 않는 1123년 고려에 사신으로 왔던 송의 문신 서긍이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권3 봉경(封境) 편에 고려의 강역에 대해 기술해놓은 대목이 있는데, 이 기술은 우리의 고려에 대한 강역에 대한 선입견을 무너뜨리고 가히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우리 역사는 안팎으로 내우와 외환에 처해있다. 더구나 친일파 이명박의 집권으로 근대사는 철저히 유린되고 있으며 전통적으로 우리역사를 강탈한 지나는 비대해진 국력으로 허구를 실사로 왜곡하며 우리민족을 압박하고 있다.

 

또한 내부에서는 친일식민사관에 젖은 강단사학자나 식민지를 지배하기 위해 태동된 랑케류의 실증사관이라는 과도한 자기검열의 덫에 걸려 우리 역사는 실존의 거처를 위협 당하는 질곡에 처해있다. 하지만  이러한 민족사적 위기의 시점에서도 우리역사는 우리의 자부심이며 우리가 존재할 근거를 주는 당위의 기록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완순 교수의 고려강역에 관한 고찰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할 수 있다. 이하 역사학자 신완순교수의 '고려도경으로 본 고려의 강역'을 전재한다.

 

◎데빌달



'서북피아양계만리지도', 보물 제1537호, 소재지 국립중앙도서관, 제작시기 조선 시대(서기1471년), 붉은 화살표 위치가 고려시대 윤관장군이 북방여진족을 축출하고 비석을 세운 공험진이다. 두만강 넘어 700백리라고 되어 있다. 이는 우리가 현재 국사책에서 배우고 있는 신의주-원산만 선 이남의 고려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이는 고려의 강역을 가늠할 수 있는 하나의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서긍의 고려도경으로 본 고려의 강역

 

명지대 교수- 신완순


   려는 남쪽으로 요해(遼海)에 막혀있고 서쪽은 요수(遼水)에 이르고 북쪽은 거란의 옛 땅과 접하고 있으며 동쪽은 금(金) 나라에 이른다. 고려의 강역을 기술한 이 대목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권3 봉경(封境) 에 기술된 내용이다.

흔히 <고려도경(高麗圖經)>이라 불리는 <선화봉사고려도경>은 송나라의 문신이었던 서긍(徐兢, 1091~1153)이 고려 인종 1년(1123년)때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송나라에 돌아가 고려의 인문과 지리 등을 담아 저술한 40권으로 된 책이다.

자(字)가 명숙(明叔)이며 호(號)가 자신거사(自信居士)인 서긍이 저술한 <고려도경>은 원래 글과 그림이 같이 있어 도경(圖經)이라 한 것이나 그림은 없어지고 글만 전한다. 고려 시대의 정치, 사회, 문화, 경제, 군사, 예술, 기술, 복식, 풍속 등의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고려의 강역을 고찰하기 위하여 위의 권3 봉경(封境) 편을 이어서 보자.

   “고려는 또한 일본ㆍ유구ㆍ탐라ㆍ흑수(黑水)ㆍ모인(毛人) 등의 나라와 개의 어금니처럼 들쭉날쭉하게 얽혀있다. 신라와 백제가 스스로 그 나라를 곧게 지키지 못하여 고려에 병합이 되니 지금의 나주도(羅州道)와 광주도(廣州道)가 이것이다.

그 나라는 경사(京師, 남송의 서울 변경)의 동북쪽에 있는데, 연산도(燕山道)로부터 육로(陸路)로 가서 요수(遼水)를 건너 동쪽으로 그 강역은 무릇 3790 리이다.

해도(海道)로 가면 하북(河北)ㆍ경동(京東)ㆍ회남(淮南)ㆍ양절(兩浙)ㆍ광남(廣南)ㆍ복건(福建)에서 모두 갈 수 있으며 오늘날 건국된 나라는 바로 등주(登州)ㆍ내주(萊州)ㆍ빈주(濱州)ㆍ체주(棣州)와 서로 바라보고 있다.


   옛적의 봉경(封境)은 동서는 2000여 리, 남북은 1500여 리이었는데 지금은 이미 신라와 백제를 합병하여 동북쪽은 조금 넓어졌지만 그 서북쪽은 거란과 접하였다.”


거란지리도 중의 발해인근 지도 - 고려는 남쪽으로 요해에 막혀있고 등주, 래주, 빈주, 체주와 서로 마주보고 있다는 것은 고려의 강역이 하북성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고려도경>, 고려 강역은 3,790리

   기존의 역사인식으로는 한반도를 벗어나서 고려의 강역을 생각할 수 없다.

후백제와 신라를 통합한 고려의 강역이 압록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고려에 사신으로 와서 직접 체험을 하고 저술한 서긍의 <고려도경>을 보면 마치 다른 나라의 역사를 대하고 있는 것 같다.

압록강과 원산만 이남의 어디에 동서가 2천리가 넘는 곳이 있는가? 한 예로 현재의 휴전선은 155마일이다. 사실 155마일도 직선거리도 아니지만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250km정도이며 우리 고유의 리(里)로 환산하면 고작 600여 리 남짓 밖에 되질 않는다.

그렇다면 위의 <고려도경>에서 이야기하는 고려의 옛 강역 동서 2000여 리와 남북 1500여 리는 어디에 존재하여야 하며 후백제와 신라를 통합하여 3790리가 되었다는 것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또한 고려의 동쪽은 백두대간과 그 너머가 바다인데 어디에 금나라가 있었다는 것인가?



중국 하북성에서 고려 강역 시작.... '서경'은 현 요동지역

   <고려도경>에 적혀있는 고려의 강역을 추론해보자.

먼저 고려는 등주(登州)ㆍ래주(萊州)ㆍ빈주(濱州)ㆍ체주(棣州)와 서로 바라보고 있다는 기록에서 이 지역이 어디인가를 살펴보면 이 네 곳은 현 중국의 산동성의 현 발해 연안을 따라 북쪽과 서북쪽에 늘어선 지명들이다.

이곳에서 마주보고 있는 곳은 현 중국의 하북성과 요녕성이다. 그렇다면 하북성과 요녕성 중의 하나가 고려의 강역이 시작되는 곳인데 어디일까? 당연히 하북성에서 출발한다. 그 이유는 <거란지리도>에 표시된 요수의 위치와 갈석산에 대한 <통전>의 기록을 들 수 있다.

   <거란지리도>에 그려진 요수는 현 요녕성이 아닌 하북성에 그 위치를 표시하고 있다. 또한 <고려도경>에서
“압록강 서쪽에 또한 백랑(白浪)ㆍ황암(黃嵓) 두 강이 있는데, 파리성(頗利城)에서 2리쯤 가다가 합류하여 남쪽으로 흐른다.
이것이 요수(遼水)이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거란지리도>에 표시된 요수는 현 하북성 천진을 거쳐 발해로 흘러들어가는 영정하일 가능성이 높다. 고려시대에 압록강의 서쪽의 백랑ㆍ황암 두 강이 합류된 요수는 영정하였으며 압록강은 현재의 요하였다.

또한 <요사(遼史)> 권115 고려 편에서 “요 성종 3년(985년) 가을 7월 모든 도(道)에 명을 내려 각각 병장기를 갖추도록 하고 동쪽으로 고려를 쳤다. 8월 요택(遼澤)이 물에 잠기어 출병을 그만두었다.”라고 하여 요수가 거란과 고려의 중요한 거점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약용은 <여유당전서>에서 “<삼국유사>에 이르기를 요수는 일명 압록이라 하였다. 대개 예전에는 동북의 모든 물을 일컬어서 모두 압록이라고 칭하였다.”라고 하여 압록이란 말은 고정된 강의 이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압록강이란 지명은 지난 2008년 10월 칼럼에서 수계의식을 갖던 특별한 강을 지칭하였으며 나라가 옮겨질 때마다 이동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원, 고려 말기 임금 '심양왕'으로 불러

   갈석산의 기록은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데 당나라 때 두우(杜佑, 735 ~ 812)가 편찬한 <통전(通典)> 권186 변방 고구려 편에서

“갈석산은 한(漢) 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었으며  장성이 이 산에서 시작된다. 오늘날 그 증거로 장성이 동쪽으로 요수(遼水)를 끊고 고려에 들어가는데 유적지가 아직도 남아 있다.”라고 하였다.

이때의 고려는 물론 고구려이다. 그런데 위 기록의 주(注)에서 “갈석산은 오늘날 하북성 북평군 남쪽 20 리에 있으며
고려에 있는 것은 좌갈석(左碣石)이라 한다.”라고 하여 갈석산은 하나가 아니며 여러 곳에 존재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갈석(碣石)이란 경계를 나타내는 표지석과 같은 것이다. 진시황이 몽념을 시켜 현 하북성 산해관까지 장성을 쌓았다고 하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산해관까지 장성이 연결된 것은 근대의 명나라 때이다. 갈석산을 현재의 산해관 근처에서 찾거나 심지어는 이병도처럼 증고도 없이 황해도 수안을 한 낙랑군 수성현이라 하여 갈석산이라 우기는 것은 명백한 역사왜곡이며 역사와 영토를 중국에게 통째로 내주는 꼴이다.

<통전>에서 말하는 고구려의 갈석은 현 산서성 상산(常山) 즉 항산(恒山) 주변에 있었던 갈석이었으며 고려경내에 있었던 것은 하북성의 갈석 으로 보아야 한다. 산서성 지역의 갈석산은 <상서(尙書)>와 <사기(史記)>에서 말하는 “협우갈석입우하(夾右碣石入于河)” 즉 “갈석을 오른쪽(서쪽)으로 끼고 황하에 흘러들어간다.”고 한 갈석으로서 고구려와의 경계인 갈석이며 하북성 북평군 노룡현에 있었다는 갈석산은 후대에 옮겨진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로 보았을 때 <고려도경>의 고려 강역에 대한 기술은 올바른 것이며 하북성에서 두만강 너머까지가 고려의 강역이었다. 결국 <고려도경>에서 요수에서 3790 리의 출발점이 하북성이 되어야만 서두에 말한 강역과 합치되게 된다.

또한 현재 한반도 남해를 요해(遼海)라고 부른 적이 없고 요(遼)지역에 있던 바다를 요해라 한 것으로 현 발해가 요해였다. 따라서 이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고려의 강역과 남쪽으로 요해(遼海)에 막혀있다는 <고려도경>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현 요녕성의 요하가 고려시대에 압록강이었다면 새롭게 조명을 해야 할 것들이 많다. 서희 장군이 거란의 침략에 맞서 거란 장수 소손녕과 담판을 벌여 강동 6주를 차지하게 된 지역과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의 지역이 현 압록강 이남의 평안도 일대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지명의 비정이다. 이는 압록강의 개념과 이동을 고려하지 않은 고착화된 개념에 기인된 것이며 마땅히 현 요하 동쪽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고려의 서경이었던 평양이 <원사>에서는 동녕부라 하고 현재의 요동 지역이라 하였으며 원나라에서 고려 말기의 임금들을 심양왕이라 한 것 역시 고려의 강역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윤관 장관이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았다는 곳도 지금의 함경남도 지역으로 비정을 하고 있다.

그러나 윤관의 동북 9성은 함경도 지역이 아니라 두만강 이북 700 리에 있는 선춘령(先春嶺) 일대였다.



<국사 교과서에 실린 고려의 장성과 압록강 이남에 표시된 강동6주와 함경도 지역으로 비정한 여진의 위치도.
강동6주와 동북 9성의 위치는 재고되어야 한다.>



   조선시대 실학자 이익(1681~1763)은 <성호사설>에서 “윤관의 비는 선춘령에 있으니 두만강 북쪽으로 7백 리가 되는 곳이다.
그 비에 새긴 글은 비록 호인(胡人)이 긁어버리기는 했으나 옛날 흔적이 아직도 다 없어지지는 않았다.

윤관이 6성을 설치하고 공험진(公嶮鎭)을 개설하였는데, 두만강을 건너 소하강(蘇下江) 가에 이르면 옛 터전이 그대로 있으니
곧 선춘령의 동남쪽이요 백두산의 동북쪽이다.

그는 이만큼 국경을 멀리 개척해 놓았는데, 지금 두만강으로 경계를 정한 것은 김종서(金宗瑞)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적고 있다.

   또한 신채호(申采浩)는 “고려사지리지에 두만강 건너 7백 리 선춘령 밑에 윤관이 세운 정계비(定界碑)가 있는데 9성의 위치가 왜 함흥평야로 내려오는가?”라고 하여 선춘령이 고려의 동북쪽 경계가 되는 지역임을 말하고 함흥평야 일대로 비정한 역사의 강역을 깎아내린 역사학자들을 질타하고 있다.



윤관 장군의 동북 9성, 두만강 이북 700리 선춘령 일대

   서긍이 <고려도경>을 편찬하면서 고려의 전반적인 부분을 서술하고 그림과 지도를 남겼지만 그림과 지도가 사라진 것은 너무나 아쉽다. 남송이 전란에 휩싸인 기간에 <고려도경>의 그림은 분실되었다고 하는데 강역을 고찰함에 있어서도 지도가 남아 있었다면 많은 부분이 쉽게 설명이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고려의 역사가 밝혀지는 것이 두려워 누군가 일부러 그림을 없앴으며 또한 글로 서술된 부분도 첨삭을 가하여 왜곡을 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서긍이 남겨 놓은 책에서 이렇게나마 고려의 역사를 추론할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 할 수 있다.

   <고려도경>을 보면 고려가 결코 나약하고 작은 나라가 아니었음을 느낄 수 있다. 고려의 강역은 현 중국 하북성에서 두만강 이북까지 이어진 나라였으며 동북아의 중심국가로 손색이 없는 나라로 475년간 존속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여 현 국사 교과서의 고려부분은 새롭게 고쳐져야 한다.  

 



cafe.daum.net/hanryulove/IwYk/301137   








서긍의 고려도경(한글판)| 사서의 보고

러브 선 | 조회 224 |추천 0 | 2009.06.26. 01:01




서긍의 고려도경(한글판)

 

[자료의  근거]

http://cafe.daum.net/dobulwonin/HOio/46

 

 


解 題



   徐 兢(1091~1153)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이하<고려도경>이라 약칭함.) 40권은 그가 宋 徽宗이 파견한 고려에의 국신사(國信使) 일행에 제할인선예물관(提轄人船禮物官)으로 송도에 다녀간 경과와 견문을 그림을 곁들여서 엮어 낸 사행보고서다. 서 긍이 송도를 다녀간 것은 선화 5년(고려 인종 1,123)으로 북송이 금(金)에 멸망되기 4년 전이고 고려 예종(睿宗)이 훙거하고 인종(仁宗)이 즉위한 이듬해다. 서 긍의 평생은 본서에 부록된 장효백(張孝伯)이 작성한 그의 행장에 극히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되풀이하지 않기로 하겠다. 다만 서 긍은 가학(家學)의 연원(淵源)도 있고 해서, 서화(書畵)에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던 점은 간단하게나마 보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송대 초기에 중국에서 전자(篆字)를 잘 쓰기로 이름을 떨치고 그림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던 徐 鉉(916~991)이 바로 긍의 조상이다. 서 긍은 어릴 때부터 집안에서 鉉의 후신으로 인정을 받기도 하였고, 그 자신 서화에 취미가 있기도 해서 그 방면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마침내는 휘종 앞에서 ‘진덕수업’(進德修業) 네 글자를 기세 좋게 휘호하여 탄상을 받고, 동진사출신(同進士出身)이 내려져 지대종정승사(知大宗正丞事)로 발탁되어 장서학(掌書學)까지 겸임하게 되었다.

 

   이러한 탁월한 서예의 소지자로 그림에도 비범하여, 그의 그림은 신품(神品)의 경지에 들어간 것으로 칭송되었고 특히 산수와 인물 두 가지에 있어서는 당대에 으뜸갔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렇듯 서화에 있어 거장의 경지에 육박해 있던 서 긍이었으므로, 단시일의 사행 기간 중에 <고려도경> 같은 내용이 풍부하고 관찰이 예리한 보고서를 그림과 글씨로 편성해 낼 수 있었던 것이라 하겠다. 어부(御府)에 바친 것으로 전해지는 <고려도경>의 원본은 그 내용을 차치하고서라도 하나의 드문 예술품이었을 것이다. <고려도경>의 원본은 1126년 이른바 정강(靖康)의 난리로 금군(金軍)에게 북송의 수도가 유린되는 분란 속에서 가석하게도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한편 서 긍은 중국 고전의 학술적인 연구에는 취미가 없었으나 독서를 좋아하여, 고금의 전적을 거의 유루 없이 섭렵한 나머지 대단히 박식하여져서, 역사와 장고(掌故)에 밝아 매사를 보는 눈이 남달리 예리하였다. 그래서 그는 송도에서 1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을 체류하면서 공식적인 행사에 몰리고 행동에 제약을 받는 가운데서, <고려도경>을 엮어 낼 만한 자료를 면밀 주도하게 수집할 수 있었던 것이라 여겨진다.

 

   그는 사절단에 수행하는 동안 일기의 형태로 소묘(素描)와 비망기를 적어 두었으리라 짐작된다. 당시 중국 북방의 대부분의 지역은 금제국(金帝國) 치하에 있었으므로, 북송에서 고려에 사절단을 파견할 경우에 육로는 이용할 수 없고 해로로 황해를 건너가야 했었다. 그것도 산동 방면의 항구에서 떠나는 짧고 안전한 항로가 아니라, 지금의 절강성 연안의 항구에서 떠나 황해의 폭이 넓은 부분을 건너 전라남도 근해에 와서 다시 예성항까지 북상하는 우회 노선을 취할 수 밖에 없었다. 송 휘종은 본래 선화 4년(고려 인종 즉위년,1122) 3 월에 노윤적(路允迪)과 부묵경(傅墨卿)을 국신소의 정․부사로하여 사절단을 고려에 파견하기로 하였으나, 고려 예종의 훙거를 알게 되어 동년 9월에 제전(祭奠),조위(弔慰)의 임무까지 그들에게 겸임시켰다.


   노윤적을 정사로 하는 고려행 사절단 일행은 그 이듬해 2월부터 사행 준비에 착수하여 3월 14일에 배편으로 수도 변경(변경 지금의 개봉(開封))을 떠나 5월 4일에 지금의 절강성 근현(근縣) 땅인 명주(明州)에 도착하였다. 거기서 사절단을 위해 특별히 건조한 관선(官船)인 신주(神舟) 2 척과 민간 소유 선박인 객주(客舟) 6 척, 도합 8 척으로 선단을 짜고 인마와 예물을 비롯하여 각종 장비와 물품을 적재하여 출항 준비를 했다. 이 사절단은 정․부사를 정점으로 하여 상․중․하 3절(節)로 구성되었고, 실지의 사무는 도제할관(都提轄官)이 관장하여 처리하였는데, 뱃사람들까지 합하면 2 백인을 돌파하는 큰 규모의 것이었다.


 

   이 사절단을 실은 선단이 명주를 떠난 것은 5월 16일이었고, 동 24일에 정식으로 바닷길로 나서서 28일에 큰 바다로 들어가, 7 일간의 거센 항해를 하여 6 월 6 일에 군산도(群山島)에 당도하였다. 다시 6 일간의 항행 끝에 예성항에 입항하여 6 월 12 일에 송도로 들어가 순천관(順天館)에 입주하였다. 그 후 약 1개월 동안 공식 행사를 끝내고 사절단은 7 월 13 일에 송도를 떠나 다시 배에 올랐는데, 풍세가 좋지 않아 42일 만에 명주로 돌아갔다. 명주를 떠났다가 명주로 돌아오는데 대략 3개월이 걸렸다.

 

   다소의 과장이 없지는 않겠지만, 서 긍의 서술에 따르면 사절단 일행은 황해를 횡단 내왕하는 항해 중에 극심한 고생과 많은 위험을 겪어야 했다. 제 24권부터 29권까지의 5권은 ‘해도’(海道)라는 대제 하에 사절단 일행의 항해를 일지의 성격을 띠어 서술한 것이다.

<고려도경>을 어부(御府)에 바친 일이 언급된 서 긍의 자서(自序)는 선화 6년 8월 6일로 되어 있다. 그가 고려를 다녀간 후 약 1년만에 <고려도경>의 저술을 완결시켰다고 볼 수 있다. 그림과 글씨를 다 서 긍 자신이 직접 그리고 쓰고 한 것이어서, 장 효백의 행장에 따르면, 그것을 열람한 휘종을 대단히 기쁘게 만들 수 있었고 또 그 일로 인해 서 긍의 지위와 관직이 다 올라가게 되었다 한다.


   <고려도경>40권은 29류로 나누어져 있고, 그 아래에 3백여 목으로 세분되어 있다. 그리고 29류의 제하에는 그 내용을 해설하는 서문 형식의 글이 있고, 세목에 가서 역시 분제(分題)를 제시하고 설명을 달았다. 29류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1. 건국(建國) 2. 세차(世次) 3. 성읍(城邑) 4. 문궐(門闕) 5. 궁전(宮殿,2권) 6. 관복(冠服) 7. 인물(人物) 8. 의물(儀物,2권) 9. 장위(仗衛,2권) 10. 병기(兵器) 11. 기치(旗幟) 12. 거마(車馬) 13. 관부(官府) 14. 사우(祠宇) 15. 도교(道敎) 16. 석씨(釋氏, 도교․ 석씨는 1권) 17. 민서(民庶) 18. 부인(婦人) 19. 조례(早隷) 20. 잡속(雜俗,2권) 21. 절장(節仗) 22. 수조(受詔) 23. 연례(燕禮) 24. 관사(館舍) 25. 공장(供張,2권) 26. 기명(器皿,3권) 27. 주즙(舟楫) 28. 해도(海道,6권) 29. 동문(同文)


 

   3백여 종에 달하는 세목에는 대체로 그림이 그려져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나, 그렇다고 그 전부에 그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가 분명하게 그림은 생략한다고 말한 데가 몇 군데 있다. 이를테면 제 40권 ‘동문’(同文)의 서문 말미에 ‘그 그림은 생략한다.’[省其繪畵] 한 것이라든지, 제 17권 ‘사우’(祠宇)의 제 6목인 왕성내외제사(王城內外諸寺)의 설명문 끝에 ‘그 그림은 생략하고 그 이름들을 여기에 싣는다.’[略其圖而載其名焉] 한 것은 그 뚜렷한 예들이다. 그 밖에도 확실하지는 않으나 제 1권 ‘건국’(建國)의 시봉(始封), 제 2권 ‘세차’(世次)의 왕씨(王氏) 등 그 내용으로 보아 본래부터 그림이 없었던 곳도 없지 않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서 긍은 <고려도경>의 부본을 한 부 만들어 자기집에 보관하고 있었으나, 한마을 사람 서주빈(徐周賓)이라는 자가 그것을 1127년 초 정강의 난리 직전에 빌어 가서 반환하지 않은 채로 난리를 당해, 그 부본마저 소재불명이 되고 말았다. 그 후 10년째 되던 해에 지금의 강서성(江西省) 남창현(南昌縣)의 땅인 홍주(洪州)에서 그 부본이 발견되었으나, 낙결(落缺)없이 그림과 글씨가 완전한 것은 단지 해도(海道) 부분의 2권뿐이었다. 그러나 그 때에도 어떤 경로로였는지는 몰라도 <고려도경>의 문자 부분은 전사(傳寫)되어 세상에 유통하였던 것 같아서, 서 긍이 그의 장질(長姪)인 천(천)에게 ‘세상에 전해지는 내 책은 왕왕 그림은 없어지고 경문이 남아있다. 내가 후에 그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한 말이 건도본(乾道本) 발문에 보인다.

 

   그러나 서 긍은 그림 그릴 비단을 펼쳐 놓고도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한 해가 지나가도 화필을 잡지 않는 성벽의 소유자여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마음이 안내켜서였던지 그는 <고려도경>의 그림을 다시 그려 놓지 않고 말았다. 그래서 결국 <고려도경>은 서명에만 ‘도’(圖)자가 남아 있고 본제의 그림은 전연 전해지지 않게 되어 버렸다. 서 천은 그의 중부 긍(兢)이 세상을 떠난 지 13년 후인 건도(乾道) 3년(고려 의종 21,1167)에, <고려도경>을 그 문자 부분이라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지금의 운남성(雲南省) 징강현(징江縣)의 땅인 징강군의 군재(郡齋)의 인화조씨소산당(仁和趙氏小山堂)에서 서 긍의 자서(自序)와 장효백의 서긍행장 및 서천의 발문을 붙인 40권본의 <고려도경>을 판각해 냈다.

 

   이것이 <고려도경>의 송본(宋本)으로, 건도본이라고도 부른다. 이 건도본이 지금 전해지는 <고려도경>으로서는 가장 오래되고 의거할 만한 판본이다. 그러나 이 건도본은 오랫동안 세상에 통행되지 않아, 청대 중기의 대장서가인 포정박(鮑廷博,1728~1814)조차도 그 원본의 소재를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요행 건도본의 완질 하나가 청 고종,즉 건륭제(乾隆帝,재위 1735~1795) 때 궁중 송․원․명 선본의 장서처인 천록임랑전(天祿임瑯殿)에 보존되어 내려왔다.

 

   청실의 서화골동과 고완진보(古玩珍寶)를 인계, 관리하게 된 고궁박물원(古宮博物院)에서 천록임랑총서의 하나로 민국 20년(1931)에 이 송 건도본 <고려도경>의 영인본을 발간하였다. 그 후 이 영인본도 희귀해져서 대만으로 옮겨간 고궁박물원에서 민국 63년(1974)에, 다시 원장 장복총(蔣復총) 박사의 서문과 서지학자 창피득(昌彼得) 교수의 발문을 추가하여 원본에서 새로 찍은 선명한 영인본을 발간하였다. 이 3책으로 된 <영인건도본 고려도경>에는 ‘건륭어람지보’(乾隆御覽之寶)를 비롯한 7종의 홍색장서인이 각책마다 찍혀 있다.

    고려본의 <고려도경>의 하나로 <고려도경>을 간행하였다. 이 지부족재본은 포정박의 가장본(家藏本)을 저본으로하여 명말에 해염(海鹽) 사람 정휴중(鄭休中)이 낸 중간본과 참합(參合)한 것으로, 정의 중간본은 초록송본(초록宋本)과도 대교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근세에는 이 지부족재본의 <고려도경>이 널리 통행되었다. 이밖에 금세기 초엽에 일본에서 지부족재본을 저본으로하여 건도본을 참교한 근대식 활자본 <고려도경>이 나와 광범하게 유통되었다. 그러나 이 활자본은 건도본과의 대교가 철저하지 않고 베풀어진 구두점에 착오가 적지 않다.


 

고려시대를 연구하는 데 있어 자료가 풍부하지 못한 상황에 놓여 있는 우리에게는, 북송 때의 중국인에 의해 저술된 것이라고는 하지만, 이 <고려도경>이 오늘날까지 보존되었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로서든 다행한 일이다. 당시 북송은 북쪽으로는 요(遼)와 금(金)의 무서운 압박을 받고 있었고 서남쪽으로는 서하(西夏)가 독립국으로 버티고 있어, 한족(漢族)의 국가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중국을 지배하는 입장에는 놓여 있지 않았다. 그러하였기 때문에 휘종 치하의 북송에서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고려의 지지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휘종은 정화(政和) 연간(1111~1117)에 고려와의 교빙을 요와 대등한 국신(國信)의 수준으로 제고시켜, 그 업무를 국신소로 이관했던 것이다. 그리고 고려의 유학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과명(科名)을 주어 돌려보내기도 하였다.


   한편, 서 긍이 보고 간 고려는 인종 치하에 있었기는 하나, 예종이 16년 동안 경영하여 안정시켜 놓은 데서 크게 변화하지 않은 상황을 유지하고 있었다. 예종은 육지로 연접해 있는 요와 금을 적절하게 조종해서 국내의 안정을 기하기를 꾀하고, 북송과 교빙하여 문치의 터전을 닦기에 힘써 볼만한 치적을 올렸다. 예종은 강성해지는 여진족을 초기에는 무력으로 제압하는 정책을 써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고, 완안 아골타(完顔阿骨打)가 칭제하여 금제국을 세우고부터는 그 세력이 강성하여지지 못하게 하는 방도를 강구하기에 부심하였다. 예종은 거란의 요와 여진의 금이 힘의 형평을 이뤄서 북송을 포함한 네 나라가 균형을 유지하면서 공존하게 되기를 바랐었다. 그런데 북송의 휘종은 요에 대한 굴욕을 씻기 위해 신흥 세력인 금과 합력하여 요를 타도하려고 했다. 예종은 그 일을 알아차리고 그의 재위 말년(1122)에 중국의 의관(醫官)을 통해 휘종에게 요를 타도하려는 계획을 포기하도록 종용하기도 하였다. 휘종은 그 후 고려 예종의 종용을 무시하고 금과 함께 협공하여 요를 멸망시켰고, 또 그렇게 해서 강성해진 금에 의해 북송도 망국의 화를 입고, 휘종 부자는 북으로 잡혀가 버리는 참변을 당했다.


   예종 11년(1116)부터는 고려에서는 요의 연호 사용을 중지하고 간지기년(干支紀年)을 실시하면서 송․요․금과는 그야말로 등거리 외교를 시도하였다. 이러한 상황하의 고려의 실정을 보고한 서 긍은, <고려도경>에서 고려를 마치 북송의 복속국가를 다루는 듯한 어투로 설명을 시도하였다. 국력이 대단치 않고 점유한 영토도 퍽 작았던 북송은 당시 말로라도 허세를 부리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놓여 있었다. 이것은 북송의 학자나 정치가들이 이른바 정통론(正統論)을 전개하는 데 있어서 짙은 낭만적 색채를 나타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과 비슷한 심리가 작용한 소치라고 이해된다. 고려는 당시 15세의 소년 국왕인 인종 치하에 있었으나, 북송의 사절단을 맞이하는 규모와 방법이 극히 엄연하였고, 사절단을 극력 환대하면서도 사절 인원이 방자하게 굴지 못하도록 절도 있게 조종하였다.


   서 긍은 고려에 와서 주로 송도에 머물러 있었고 또 송도는 고려의 수도였으므로, <고려도경>에는 자연 송도를 중심으로 한 기사가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고려도경> 첫머리에 ‘건국’과 ‘세차’ 두 권을 두어, 고려족의 건국전세(建國傳世)의 개략과 상고 이래 중국과의 접촉 상황을 간단하게 적어서 전체의 실마리로 삼았다. 건국에 관한 기사는 제사(諸史)를 참고해서 작성하였다고는 하였으나 오늘날에 와서 본다면, 그 중에 참고되는 부분이 전무하지는 않지만, 사실(史實)을 왜곡하였거나 사실과 맞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다. 고려를 고구려와 연결시켜 이해하려고 하여 혼동을 일으켰고, 삼국의 정립과 통일신라 내지는 후삼국 등에 관해서는 극히 무식하였음을 나타냈다. 다만 발해를 고구려의 후예로 보고 고려와의 동족성 내지는 연계성을 의식하는 듯한 서술은, <오대사(五代史)> 사이전(四夷傳)의 발해 부분을 적기한 것이기는 하나 다소간 시사를 던져 주는 점이 없지 않을 것 같다. 소년 국왕 인종을 성인(成人)의 풍도가 있어 동이(東夷)의 현왕(賢王)이 될 것이라고 말한 것이 주목을 끌기도 한다.


   서 긍은 제 3권 ‘성읍’의 서문에서, ‘그 땅에 들어가면 성곽이 우뚝하여 사실 깔보기 어렵다.’ 라고 송도에 들어오면서 다소간 위압을 느낀 듯한 말을 했다. 그는 고려의 강토와 군읍(郡邑)에 언급하였으나 상세하지는 않고, 송도의 형세와 도성 및 황성의 성문․문궐(門闕)․궁전 등에 걸쳐 중점적으로 설명을 시도하였다. <고려사> 지리지 등 우리의 자료에서 볼 수 있는 규모가 완전히 파악되어 있지는 않으나, 직접 관찰한 기록이어서 우리 자료에서 볼 수 없는 사실을 보존한 의의가 크다. 일례를 들면, 장령전(長齡殿)은 건덕전(乾德殿)의 동자문(東紫門) 안에 있는, 규모가 건덕전을 능가하는 전각인데, 거기서 중국 사신의 도착 통지의 서한을 받고 중국 상인들이 오면 역시 거기서 그들의 물품을 헌납 형식으로 받고, 그 가치를 따져서 방물(方物)로 그 가치의 수배에 상당하게 그들에게 보상해 준다는 것이다.


   관부(官府)는 서 긍이 가 본 곳이 적어서였던지 창고․약국․감옥 등을 포함한 6종만을 기술했다. 다만 그 기사를 통해 관록(官祿)․의약․형벌 등에 관한 당시의 실제 상황을 추측할 수 있게 하여 준다.

서 긍은 고려의 인물을 소개하는 데 있어, 서문에서 지전주(知全州) 오준화(吳俊和)를 위시한 관원 57인을 직함과 함께 나열하고서, 이자겸(李資謙)․윤언식(尹彦植)․김부식(金富軾)․김인규(金仁揆)․이지미(李之美) 5인을 개별적으로 소개하였다. 이 5인은 당시 권문세가의 인물로, 이자겸․지미 부자(父子)가 끼어 있는 것이 주목된다. 이자겸을 현신(賢臣)이라고 말해 넣고 그의 탐욕 치부하는 상황에 언급하여 가석하다고 맺었다. 그리고 김부식을 당시의 고려에서 으뜸가는 문장으로 소개하였다. 서 긍에게 비친 당시 고려 인물의 면모라고 하겠다.


   국왕의 관속과 의장 물건을 비롯하여, 황성을 중심으로 한 송도의 경비를 담당하는 근위부대의 규모와 무기 및 거마에 이르는 제반사항을 비교적 주도하게 기술하고 있다. <고려사>의 여복지(輿服志)에 따르면 요․금․송에서 각기 국왕의 관복을 보내 주었다. 그러한 연유로 국왕의 관복은 자연 중국풍이 짙어졌던 것으로서, 긍의 기술에도 그 점이 지적되어 있다. 평시에는 국왕도 서민과 다름없이 조건백저포(早巾白紵袍), 즉 검은 두건에 흰 모시 웃옷을 입는다고 하였는데, 서 긍이 그 것을 목격하지는 못하고 전문을 기록한 데 불과하였을 것이다. 국왕의 의장물건 12종, 의장대 18종, 병기 8종, 기치 7종, 거마 7종이 각각 소개되어 있는데, <고려사> 여복지의 의위(儀衛)에 열거되어 있는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만 각종 의장 물건의 형제(形制)와 용도가 설명되어 있어 참고가 된다. 당시 도성을 수비하는 근위부대의 병력이 상시 3만을 유지한다고 하였다. 당시의 인구나 국력으로 보아 규모가 큰 편에 속한다.


   고려에서는 국가의 종교로 불교와 도교가 신봉되었었으나, 도교의 규모는 불교의 그것에 미치지 못했다. 송도에는 불교사원이 많았는데, 서 긍은 사원에 관심이 컸던 것 같아서 짧은 체류 기간 중에 28개소에 달하는 사원을 답사하였다. 그 중에서 정국 안화사(靖國安和寺)를 가장 상세하게 소개하였다. 안화사는 예종이 창건한 사원으로, 당시 고려에서 가장 웅장․미려한 것으로 알려졌고, 송 휘종도 이 절의 건립 소식을 듣고 사신을 시켜 건축비․불상․어서전액(御書殿額)․채경(蔡京)의 사명문액(寺名門額) 등을 보내 주기까지 하였다. 사절단은 이러한 송 휘종과의 인연도 있고 하여, 일행은 안화사를 찾아가 휘종의 글씨가 수장되어 있는 어서전(御書殿) 아래서 배례하고서 불승들을 공양하고 복을 빌고 돌아갔다. 서 긍은 불승의 의복제도에 관해서도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했다.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은, 법안종(法眼宗) 일파가 중국에서 동래하여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 것으로 말한 점이다. 법안종은 중국의 건업 청량사(建業淸凉寺)의 법안 문익(法眼文益)에 의해 전해진 선종(禪宗)의 일파로, 화엄초지(華嚴初地)중의 육상의(六相義)를 들어 삼계유심(三界唯心)과 만법유식(萬法唯識)을 종지로 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법안종의 전래에 대한 역사적 구명은 한 가지 흥미 있는 과제라고 하겠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당시의 불승 중에 중국음으로 독경할 수 있는 자가 있어 서 긍이 그것을 똑똑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범패(梵唄)는 우리말이어서 그가 전연 알아듣지 못했다. 다만 지금도 불가의 독경은 현토하지 않고 한자음만을 절주에 맞춰 낭송하는 것으로 미루어서, 긍이 들은 중국음의 독경뿐만 아니라 당시 고려의 한자음으로 읽는 독경도 절주가 중국 독경의 그것과 별차이가 없어서, 중국인도 대체로 알아들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도 생각하여 볼 수 있다. 승려의 계급으로는 왕사(王師)를 정상으로 하여, 국사(國師)․삼중화상대사(三重和尙大師)․아사리대덕(阿사리大德)․사미비구(沙彌比丘)․재가화상(在家和尙) 여섯을 들었는데, 그 중 재가화상이 가장 주목을 끈다. 서 긍의 설명으로는 이들은 결코 승려가 아니고 머리털과 수염을 깎인 형여지역인(刑餘之役人)으로, 관가의 각종 노역에 복무하고 전시에도 출정하여 전투에 참여하는 자들이다. 품종(品從)이나 백정(白丁)을 두고 하는 말인지 분명하지 않다.


   도교에 관해서는 복원관(福源觀)과 도사의 복장에 관한 기술 뿐이다. 서 긍은 서문에서 예종이 도록(道록)을 받아 도교에 정식으로 귀의해서 불교 대신 도교를 국가의 종교로 올려놓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는 말을 했다. 이것은 고구려 말년의 연개소문의 종교 정책을 연상하게 한다. 예종이 도교에 대해 관심이 컸던 것에 비추어 볼 때 당시 고려 상하에 그런 말이 나돌고 있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한편 또 서 긍의 이러한 말은, 도교 황제인 송 휘종에 대한 일종의 아유적인 언사로 풀이될 수도 있다. 그런데 예종이 훙거하자 그의 장자인 인종이 이자겸의 힘으로 곧 즉위하였는데, 그해 12월에 예종의 도교정책과 관련이 깊었던 한안인(韓安仁)과 이중약(李仲若)은 왕권을 위요한 갈등에 말려들어 피살되었다. 이러한 일 등을 가지고 본다면, 또 예종 생전의 도교로의 경도(傾倒)가 어떠한 의의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고도 여겨진다. 도불 이외에 각종 신사(神祠)에 관해서도 기술되어 있다.


   서 긍은 서민과 그 생활 전반에 관해서도 널리 관찰하였고, 그것을 5권의 편목을 써서 상세하게 기술하였다. 당시는 8세기의 여의 과거였으나 오늘날과 유사한 성향 내지 풍습을 보여주는 예가 적지 않았다. 민간에 팽배한 교육열을 그 한가지 예로 들 수 있다. 제19권 ‘민서’(民庶)의 서문에서 ‘사민(四民)의 업 중에서 선비[儒]를 귀하게 여긴다. 그래서 그 나라에서는 글을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한다.’하였고, 제40권 ‘동문’(同文)의 유학(儒學)에서는 국자감 같은 국립 교육기관 이외에도 민간의 교육열의 대단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간 마을에 경관(經館)과 서사(書舍)가 두셋씩 늘어서 있어, 그 백성들의 자제로 결혼하지 않은 자들은 무리 지어 살면서 스승으로부터 경서를 배운다. 좀 장성하여서는 벗을 택해 각각 그 부류에 따라 절간에서 강습하고, 아래로 졸병과 어린아이들에 이르기까지도 향선생(鄕先生)한테서 글을 배우니, 아아, 훌륭하기도 하다.”


   이러한 교육열은 과거에 급제해서 벼슬을 살아야겠다는 의욕의 표현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일반적으로 글을 모르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는 정도였으므로 당시의 교육열은 대체적으로 볼 때, 우리 겨레가 문화를 애중하는 성향을 나타낸 것이 극히 오래 전부터임을 말해 주는 사례로 이해되어야 마땅할 것 같다. 여자가 아기를 등에 업고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다니는 풍경을 당시에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고려인들은 깨끗해서 목욕을 자주 하고 중국인이 때가 많은 것을 웃곤 했다고 말하고 있다.


   한편 오늘날과 조금 다른 점도 없지 않았다. 황성의 긴 행랑에는 10칸마다 장막을 치고 불상을 설치하고서는, 큰 독에 숭늉을 채워 놓고 국자 따위를 마련하여 두어 오가는 사람이 귀천 없이 아무나 마시게 하고, 중이 그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철저한 급수공덕의 실천이다. 물론 지금도 공원이나 유원지 같은 데에 수도가 마련되어 물을 마시게 해주고 있지만 그 작풍이 판이하다.


   당시의 고려에서는 공예를 숭상해서 그 기술자 중에 뛰어난 자들은 복두소(幞頭所)와 장작감(將作監)에서 일하게 하였고, 그들의 수입과 사회적 지위는 농민들이 따라가지 못했다. 공예품에 관해서는 제 28권부터 5권에 걸쳐 ‘공장’(工匠)․‘기명’(器皿)이라는 두 가지 제목 하에 수십 가지 종류를 소개하고 있다. 서 긍은 고려에서 청도기(靑陶器)를 소중히 여긴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곧 우리가 말하는 고려청자다. 그는 도기의 빛깔이 푸른 것을 고려인은 비취색이라 한다 하였는데, 그 만듦새는 솜씨가 좋고 빛깔이 더욱 좋아졌다고 말했다. 고려청자로 된 기물은 대부분 중국의 것들과 형태가 같아 생략하고, 술준[樽]만은 같지 않아서 소개하였다. 그 술준의 형상은 오이 같은데 위에 작은 뚜껑이 있는 것이 연꽃에 엎딘 오리의 형태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에도 볼 수 있는 청자 술준이다. 서 긍을 가장 감탄케 한 것은 청자 향로다. 그것은 산예출향(狻猊出香)이라 하여 사자꼴로 된 청자 향로다. 그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위에 쭈그리고 있는 짐승이 있고 아래에는 맞이하는 연꽃이 있어서 그것을 받치고 있다. 여러 기물들 가운데 오직 이 물건이 가장 정절(精絶)하고, 그 나머지는 월주(越州)의 고비색(古秘色)과 여주(汝州)의 신요기(新窯器)와 대체로 유사하다.”

이 산예출향으로 불리는 청자 향로도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다. 당시의 청자공예는 이미 중국을 능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려도경>에는 북송과 고려의 선박 구조가 소개되어 있다. 신주(神舟)로 부르는 중국의 관선(官船)은 그 구조에 관한 설명이 없으나, 민간 선박인 객주(客舟)의 구조는 비교적 상밀하게 되어 있어 참고가 된다. 이 객주는 목선으로, 길이 약 30m, 깊이 약 9m, 위폭 약 8m로 선창이 3분되어 위아래로 각종 시설이 베풀어져 있다. 신주는 물에 뜨면 산악같이 우뚝하다고 형용하고 고금에 그 유례가 없다고까지 하여, 객주보다 훨씬 거대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고려의 선박은 4종이 소개되어 있는데 다 구조가 간략하다. 서 긍이 소개한 고려의 선박들은 그가 목격한 연안을 항해하는 것들에 그치고 고려의 외항선은 볼 기회가 없어서 소개되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사절단의 숙소는 순천관(順天館)으로 웅장하기가 왕궁을 능가하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본래는 요의 사신을 유숙시키기 위해 건조하였던 것이다. 수백 명의 사절단 일행이 불편없이 살 수 있을 정도였으니 그 규모를 상상할 수 있다. 서 긍은 순천관을 극히 면밀하게 구석구석까지 설명을 시도하였다. 순천관에서 사절단 일행에게 매일 3식을 계급에 따라 차 등을 두어 제공하고 차도 역시 매일 세 차례씩 끓여서 대접한다. 그리고 사절단이 순천관에 도착한 날에 베푸는 불진회(佛塵會)를 첫번으로 하여 5일에 한 차례씩 사절단 전원에게 주연을 베푼다. 물론 사절단도 자체의 숙수들이 있어 가지고 온 식료품과 기명을 써서 주연을 마련하기도 한다. 이러한 순천관에서의 일상생활 이외에 국왕과의 사적(私적, 사적인 상면)․연음(燕飮)․헌수(獻酬) 등 연례(燕禮)가 있으나 다 극히 형식적이었다.


   사절단의 공식 임무인 송 휘종의 조서를 전달하는 의식은 번잡한 절차를 취해 가며 절도 있게 거행되었다. 조서는 인종의 즉위에 붙여 송에의 협력을 당부하는 내용의 것이 주요한 것이고, 인종에게 문상(問喪)하는 내용의 조위조서(弔慰詔書)는 부수적인 것이다. 예종에의 제전(祭典)에 쓰는 송 휘종의 어제 제문이 있다. 먼저 회경전(會慶殿)에서 조서를 받고, 수일 후에 장경궁(長慶宮)의 제실(祭室)에서 제전 예물을 진열해 놓고 휘종의 제문을 정사가 낭독하게 하여 제전 의식을 끝내고, 잠시 후에 다시 인종의 조위 조서를 정사로부터 받는다. 이렇게 해서 공식절차를 끝낸다. 이러한 조서를 받는 의식절차는 송 황제와 고려 국왕 및 주인과 빈객을 따지는 예법 상의 논리가 엄연하다.


   이러한 서 긍의 <고려도경>은 고려시대를 연구하고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당시의 국제 사정을 이해하는 데에도 적이 보탬이 될 것이다.


 -  차 주 환(車柱環) 씀




일 러 두 기


   이 책은 아래와 같은 요령으로 엮었다.

1. 이 책의 국역 대본은 송징강본(宋澂江本)이다.

2. 번역은 원의(原義)에 충실을 기하였다. 단, 원문의 "臣聞" 두 자글 번역 문에서는 생략하고 평서체로 번역하였다.

3. 원문은 구두(句讀)를 찍어 영인하여 붙였다.

4. 번역문의 체재는 대본을 따랐다.

5. 주석(註釋)은, 간단한 것은 ( ) 나 〔 〕 안에 간주(間註)하고 그 밖의 것은 각주(脚註)하였다.

6. 맞춤법과 띄어쓰기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7. 한자(漢字)는 이해를 돕기 위하여 넣었으며, 시(詩)에서는 원문을 병기 하였다.

8. 이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부호를 사용하였다.

1) ( ) : 음과 뜻이 같은 한자를 묶는다.

2) [ ] : 음은 다르나 뜻이 같은 한자를 묶는다.

3)〈 〉: 보충역을 묶는다.

4)  " ": 대화 등의 인용문을 묶는다.

5) '  ': 재인용이나 강조 부분을 묶는다.

6)「 」: '   '안의 재인용, 또는 책명을 묶는다.

7)《 》: 각주에서 출전을 밝힌다.

8) *) : 제목에서 각주를 표시한다.

9) ※) : 미상의 주석을 표시한다.




차 례


일러두기

해 제 解題 ………………………………………………… 차 주 환(車柱環) … 1

선화봉사고려도경 서 宣和奉使高麗圖經序 ………………………………………………… 15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一 卷

건 국 建國 …………… 19 시 봉 始封…………………… 19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二 卷

세 차 世次 …………… 22 세 계 世系 ………………… 24

왕 씨 王氏 …………… 22 고려국왕 왕 해 高麗國王王楷 … 24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三 卷

성 읍 城邑 ……………… 25 민 거 民居 …………… 28

봉 경 封境 ……………… 25 방 시 坊市 …………… 28

형 세 形勢 ……………… 26 무 역 貿易 …………… 28

국 성 國城 ……………… 27 군 읍 郡邑 …………… 29

누 관 樓觀 ……………… 27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4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四 卷

문 궐 門闕 ……………… 30 승 평 문 昇平門 …………… 31

선 의 문 宣義門 ………… 30 동 덕 문 同德門 …………… 31

외 문 外門 …………… 30 전 문 殿門 …………… 32

광 화 문 廣化門 ………… 31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5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五 卷

궁 전 1 宮殿一 ………… 33 왕 부 王府 ………… 33

회 경 전 會慶殿 ………… 33 원 덕 전 元德殿 …………… 34

건 덕 전 乾德殿 ………… 34 만 령 전 萬齡殿 …………‥ 34

장 화 전 長化殿 ………… 34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6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六 卷

궁 전 2 宮殿二 ………… 36 임 천 각 臨川閣 …………… 39

장 령 전 長齡殿 ………… 36 장 경 궁 長慶宮 …………… 39

장 경 전 長慶殿 ………… 36 좌 춘 궁 左春宮 …………… 39

연영전각 延英殿閣 ……‥ 36 별 궁 別宮 …………… 40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7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七 卷

관 복 冠服 ………… 41 종 관 복 從官服 …………… 43

왕 복 王服 ………… 41 경 감 복 卿監服 …………… 43

영 관 복 令官服 ………… 41 조 관 복 朝官服 …………… 43

국 상 복 國相服 ………… 42 서 관 복 庶官服 …………… 43

근 시 복 近侍服 ………… 42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8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八 卷

인 물 人物 ………… 45 書禮部侍郞上護軍賜紫金魚袋富軾…47

수태사상서령 이 자겸 守太師尙書令 관반 금자광록대부 수사공동지추밀원

李資謙 ……………………… 46 사 상주국 김 인규 館伴金紫光祿大夫守

접반 정 봉대부 형부상서 주국 사자금 司空同知樞密院事上柱國金仁揆 ………47

어대 윤 언식 接伴正奉大夫刑部尙書柱 동관반 정의대부 수상서 병부시랑 상

國賜紫金魚袋尹彦植 ………… 46 호군 사자금어대 이 지미 同館伴正義

동접반 통봉대부 상서예부시항 상호군 大夫守尙書兵部侍郞上護軍賜紫金魚袋

사자금어대 김 부식 同接伴通奉大夫尙 李之美 ……………………………………47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9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九 卷

의 물1 儀物一 ……… 49 우 선 羽扇 …………… 50

반 리 선 盤縭扇 ………… 49 곡 개 曲蓋 …………… 50

쌍 리 선 雙縭扇 ………… 49 청 개 靑蓋 …………… 50

수 화 선 繡花扇 ………… 49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0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十 卷

의 물2 儀物二 ……… 51 금 월 金鉞 …………… 51

화 개 華蓋 ………… 51 구 장 毬杖 …………… 51

황 번 黃幡 ………… 51 기 패 旂旆 …………… 52

표 미 豹尾 ………… 51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1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十一 卷

장 위1 仗衛一 ……… 53 상육군좌우위장군上六軍左右衛將軍… 55

용호좌우친위기두龍虎左右親衛旗頭 53 상육군위중검랑장上六軍衛中檢郞將… 55

용호좌우친위군장龍虎左右親衛軍將 54 용호중맹군 龍虎中猛軍 ………… 55

신호좌우친위군 神虎左右親衛軍 54 금오장위군 金吾仗衛軍 ………… 55

흥위좌우친위군 興威左右親衛軍… 54 공 학 군 控鶴軍 …………………… 56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2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十二 卷

장 위2 仗衛二 ……… 57 관부문위교위 官府門衛校尉 …… 58

천우좌우장위군 千牛左右仗衛軍 ‥ 57 육군산원기두 六軍散員旗頭 …… 58

신 기 군 神旗軍 ………………… 57 좌우위견롱군 左右衛牽攏軍 …… 58

용호상초군 龍虎上超軍 ………… 57 영군낭장기병領軍郎將騎兵 ………… 58

용호하해군 龍虎下海軍 ………… 57 영병상기장군 領兵上騎將軍 ……… 59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3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十三 卷

병 기 兵器 ……… 60 의 극 儀戟 …………… 61

행 고 行鼓 ………… 60 호 가 胡茄 …………… 61

궁 시 弓矢 ………… 60 수 패 獸牌 …………… 61

관 혁 貫革 ………… 60 패 검 佩劍 …………… 61

등 장 鐙杖 ………… 60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4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十四 卷

기 치 旗幟 ………… 62 상 기 象旗 …………… 62

응 준 기 鷹雋旗 ………… 62 태 백 기 太白旗 …………… 63

해 마 기 海馬旗 ………… 63 오 방 기 五方旗 …………… 63

봉 기 鳳旗 ………… 63 소 기 小旗 …………… 64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5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十五 卷

거 마 車馬 ………… 65 왕 마 王馬 …………… 65

채 여 采與 ………… 65 사 절 마 使節馬 …………… 65

견 여 肩與 ………… 65 기 병 마 騎兵馬 …………… 65

우 거 牛車 ………… 65 잡 재 雜載 …………… 65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6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十六 卷

관 부 官府 ………… 67 부 고 府庫 …………… 69

대 성 臺省 ………… 67 약 국 藥局 …………… 69

국 자 감 國子監 ………… 68 영 어 囹圄 …………… 69

창 름 倉廩 ………… 68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7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十七 卷

사 우 祠宇 ………… 71 왕성내외제사 王城內外諸寺 … 74

복 원 관 福源觀 ………… 71 숭 산 묘 崇山廟 …………… 75

정국안화사 靖國安和寺 …… 72 동 신 사 東神祠 …………… 76

광통보제사 廣通普濟寺 …… 73 합굴룡사 蛤窟龍祠 ………… 76

흥 국 사 興國寺 ………… 74 오 룡 묘 五龍廟 …………… 76

국 청 사 國靑寺 ………… 74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8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十八 卷

도 교 道敎 ……… 78 삼중화상대사 三重和尙大師 … 81

도 사 道士 ……… 79 아사리대덕 阿奢梨大德 …… 81

석 씨 釋氏 ……… 79 사미비구 沙彌比丘 ………… 81

국 사 國師 ……… 80 재가화상 在家和尙 ………… 82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9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十九 卷

민 서 民庶 ………… 83 공 기 工技 …………… 84

진 사 進士 ………… 83 민 장 民長 …………… 84

농 상 農商 ………… 83 주 인 舟人 …………… 84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0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二十 卷

부 인 婦人 ………… 85 귀 녀 貴女 …………… 87

귀 부 貴婦 ………… 85 여 자 女子 …………… 87

비 첩 婢妾 ………… 86 부 負 …………… 87

천 사 賤使 ………… 86 대 戴 …………… 87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1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二十一 卷

조 례 早隷 ………… 88 정 리 丁吏 …………… 89

이 직 吏職 ………… 88 방 자 房子 …………… 89

산 원 散員 ………… 88 소 친 시 小親侍 …………… 89

인 리 人吏 ………… 89 구 사 驅使 …………… 90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2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二十二 卷

잡 속1 雜俗一 ……… 91 치 사 治事 …………… 92

정 료 庭燎 ………… 92 답 례 答禮 …………… 93

병 촉 秉燭 ………… 92 급 사 給使 …………… 93

설 호 挈壺 ………… 92 여 기 女騎 …………… 93

향 음 鄕飮 ………… 92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3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二十三 卷

잡 속2 雜俗二 ……… 95 각 기 刻記 …………… 96

한 탁 澣濯 ………… 95 도 재 屠宰 …………… 96

종 예 種蓺 ………… 95 시 수 施水 …………… 96

어 漁 ………… 95 토 산 土産 …………… 97

초 樵 ………… 96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4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二十四 卷

절 장 節仗 ………… 99 첫째 신기대 神旗隊 ……… 99

다음 기병 騎兵 ………… 100 다음 조여 詔輿 …………… 101

다음 요고 鐃鼓 ………… 100 다음 충대하절充代下節 …… 101

다음 천우위 千牛衛 …… 100 다음 선무하절 宣武下節 …… 102

다음 금오위 金吾衛 …… 100 다음 사부 使副 …………… 102

다음 백희 百戱 ………… 101 다음 상절 上節 …………… 103

다음 악부 樂部 ………… 101 끝 중절 中節 …………… 104

다음 예물 禮物 ………… 101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5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二十五 卷

수 조 受詔 ………… 105 기 거 起居 …………… 106

영 조 迎詔 ………… 105 제 전 祭奠 …………… 107

도 조 道詔 ………… 106 조 위 弔慰 …………… 107

배 조 拜詔 ………… 106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6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二十六 卷

연 례 燕禮 ………… 109 하 절 석 下節席 …………… 111

사 적 私覿 ………… 109 관 회 館會 …………… 111

연 의 燕儀 ………… 110 배 표 拜表 …………… 112

헌 수 獻酬 ………… 110 문 전 門餞 …………… 112

상 절 석 上節席 ………… 110 서교송행 西郊送行 …………… 112

중 절 석 中節席 ………… 111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7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二十七 卷

관 사 館舍 ………… 113 정사와부사의 자리 使副位 … 115

순 천 관 順天館 ………… 113 도할․제할위 都轄提轄位 … 115

관 청 館廳 ………… 115 서장관위 書狀官位 …… 115

조 위 詔位 ………… 115 서 교 정 西郊亭 …………… 116

청 풍 각 淸風閣 ………… 115 벽 란 정 碧瀾亭 …………… 116

향 림 정 香林亭 ………… 116 객 관 客館 …………… 116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8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二十八 卷

공 장1 供張一 ……… 117 힐 막 纈幕 …………… 117

수 막 繡幕 ……… 117 단 칠 조 丹漆俎 …………… 118

수 도 繡圖 ………… 118 흑 칠 조 黑漆俎 …………… 118

좌 탑 坐榻 ………… 118 와 탑 臥榻 …………… 119

연 대 燕臺 ………… 118 문 석 文席 …………… 119

광 명 대 光明臺 ………… 118 문 유 門帷 …………… 119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9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二十九 卷

공 장2 供張二 ……… 120 화 탑 선 畵榻扇 …………… 120

수 침 繡枕 ……… 120 삼 선 杉扇 ……………… 120

침 의 寢衣 ………… 120 백 접 선 白摺扇 …………… 120

저 상 紵裳 ………… 120 송 선 松扇 …………… 121

저 의 紵衣 ………… 120 초 구 草屨 …………… 121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0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三十 卷

기 명1 器皿一 ……… 122 주 합 酒榼 …………… 123

수 로 獸爐 ……… 122 오 화 세 烏花洗 …………… 123

수 병 水甁 ………… 122 면 약 호 面藥壺 …………… 123

반 잔 盤琖 ………… 122 부 용 준 芙蓉尊 …………… 123

박 산 로 博山爐 ………… 123 제 병 提甁 …………… 124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1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三十一 卷

기 명2 器皿二 ……… 125 탕 호 湯壺 …………… 126

유 앙 油盎 ……… 125 백 동 세 白銅洗……………… 126

정 병 淨甁 ………… 125 정 로 鼎爐 …………… 126

화 호 花壺 ………… 125 온 로 溫爐 …………… 126

수 부 水釜 ………… 125 거 종 巨鐘 …………… 126

수 앵 水甖 ………… 125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2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三十二 卷

기 명3 器皿三 ……… 127 등 준 藤尊 …………… 128

다 조 茶俎 ……… 127 도 준 陶尊 ……………… 128

와 준 瓦尊 ………… 127 도 로 陶爐 …………… 128

식 조 食罩 ………… 128 수 옹 水瓮 …………… 129

등 비 藤篚 ………… 128 초 섬 草笘 …………… 129

죽 부 鬻釜 ………… 129 도 필 刀筆 …………… 129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3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三十三 卷

주 즙 舟楫 ………… 130 막 선 幕船 …………… 131

순 선 巡船 ………… 130 궤 식 饋食 ……………… 131

관 선 官船 ………… 130 공 수 供水 …………… 131

송 방 松舫 ………… 131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4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三十四 卷

해 도1 海道一 ……… 132 해 려 초 海驢焦 …………… 138

신 주 神舟 ……… 133 봉 래 산 蓬萊山 …………… 138

객 주 客舟 ………… 134 반 양 초 半洋焦 …………… 139

초 보 산 招寶山 ……… 135 백 수 양 白水洋 …………… 139

호 두 산 虎頭山 ………… 136 황 수 양 黃水洋 …………… 139

심 가 문 沈家門 ……… 137 흑 수 양 黑水洋 …………… 140

매 잠 梅岑 ………… 137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5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三十五 卷

해 도2 海道二 ……… 141 흑 산 黑山 …………… 142

협 계 산 夾界山 ……… 141 월 서 月嶼 ……………… 142

오 서 五嶼 ………… 141 난 산 도 闌山島 …………… 142

배 도 排圖 ……… 141 백 의 도 白衣島……………… 142

백 산 白山 ………… 141 궤 섬 跪笘 …………… 142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6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三十六 卷

해 도3 海道三 ……… 143 죽 도 竹島 …………… 143

춘 초 섬 春草笘 ……… 143 고 섬 섬 苦笘笘 …………… 143

빈 랑 초 檳榔焦 ………… 143 군 산 도 郡山島 …………… 144

보 살 섬 菩薩笘 ……… 143 횡 서 橫嶼 ……………… 145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7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三十七 卷

해 도4 海道四 ……… 146 아 자 섬 鵝子笘 …………… 146

자 운 섬 紫雲笘 ……… 146 마 도 馬島 …………… 146

부 용 산 副用山 ……… 146 구 두 산 九頭山 …………… 147

홍 주 산 洪州山 ……… 146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8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三十八 卷

해 도5 海道五 ……… 148 화 상 도 和尙島 …………… 148

당 인 도 唐人島 ……… 148 우 심 서 牛心嶼 …………… 148

쌍 녀 초 雙女焦 ……… 148 섭 공 서 聶公嶼 …………… 148

대 청 서 大靑嶼 ……… 148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9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三十九 卷

해 도6 海道六 ……… 150 합 굴 蛤窟 …………… 150

소 청 서 小靑嶼 ……… 150 분 수 령 分水嶺 …………… 150

자 연 도 紫燕島 ……… 150 예 성 항 禮成港 …………… 151

급 수 문 急水門 ……… 150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40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四十 卷

동 문 同文 ……… 153 악 률 樂律 …………… 157

정 삭 正朔 ……… 153 권 량 權量 …………… 159

유 학 儒學 ……… 155

행 장 行將 ……………………………… 장 효 백(張孝伯) … 162

발 跋 …………………………………… 서 천(徐 蕆) … 170




선화봉사고려도경 서 宣和奉使高麗圖經序


   천자가 정월 초하루에 큰 조회(朝會)를 갖는데, 뜰에다 사해(四海)의 도적(圖籍)을 다 늘어놓아 왕․공․후․백(王公侯伯)이 만국에서 모여들어도 그들을 다 헤아려 알 수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유사(有司 도적을 관장하는 채임을 맡은 관원)가 그것들을 수장함이 특히 엄격하고 신중하며, 사신의 직책 중에서도 더욱이 이것을 급선무로 하였다.


   옛날 주(周) 나라의 직방씨1)(職方氏)는 천하의 그림2)을 맡아 가지고 천하의 땅을 장리(掌理)하여 그 나라의 도비(都鄙 도회지의 변두리)와 사이(四夷)․팔만(八蠻)․칠민(七민)․구맥(九貊)․오융(五戎)․육적3)(六狄)의 인민을 분간하고 그 이해(利害)를 두루 알았던 것으로, 행인4)(行人)의 관권들이 도로에 연달아 있었다. 경축과 군대의 위문, 재앙의 불제(불除) 같은 따위의 행사에는 무릇 다섯 가지 종류의 일5)치고 처리되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안락과 재액․빈곤 같은 따위의 경우에는 무릇 다섯 가지 종류의 분간치고 참고할 책이 없는 것이 없어, 그것들을 가지고 왕에게 복명하여 천하의 일을 두루 알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외사6)(外史)는 그 일들을 써서 사방의 지(志 관계기록)를 만들었고, 사도7)(司徒)는 그것들을 모아 토지의 그림을 만들고 송훈8)(誦訓)은 그것들을 설명해서 살필 일을 일러 주고 토훈9)(土訓)은 그것들을 설명해서 토지의 일을 일러 주었다. 이 때문에 한 사람의 존귀함으로 구중궁궐에 깊숙이 있어 높이 팔짱끼고 지내면서도 사방 만리의 먼 곳을 손바닥 가리키듯이 환히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패공(沛公 후의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처은 함곡관(函谷關)으로 들어갔을 떄 소하10)(蕭何)는 혼자서 진(秦) 나라의 도서(圖書)를 거둬들였는데, 천하가 평정되기에 이르러 한(漢)에서 그 요해지와 호구를 남김없이 알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소하의 공로였다. 수(隋) 나라의 장손 성11)(長孫晟)이 돌궐(突厥)에 가서는 사냥 나갈 때마다 그 국토의 상세한 상황을 기록하곤 하였고, 돌아와 문제12)(文帝)에게 표문(表文)을 올리고서는 입으로는 그 형세를 말하고 손으로는 그 산천을 그리곤 하다가 마침내 그 일로 후일의 보람을 가져왔던 것이다.


   그러니 유헌(輶軒 천자의 사자가 타는 수레)을 타고 다른 나라에 사신가는 자로서는 <도적(圖籍)의 수집 제작>이란 본래 먼저 힘써야 할 일이다. 하물며 고려는 요동(遼東)에 있어서, 아침에 명령을 내리면 저녁에 와서 바칠 수 있는 후전근복(候甸近服 가까이 있는 복속 지역) 같지 않기 때문에 도적의 작성은 더욱 어렵다. 황제는 천지와 같은 덕업(德業)으로 만국을 다 내조(來朝)하게하여 고려가 예우를 받도록 돌보았거니와, 신령하신 선왕13)께서는 더욱 따르게 만드시어 인재를 뽑아14)조정에 있게하여 위무(慰撫)와 하사(下賜)의 어명을 받들게 하시었으니, 은혜의 융숭함과 예의 후함이 전례가 없었다.


   이제 급사중(給事中) 신 윤적15)(允迪)은 경전에 통달한 재주와 세상에 뛰어난 문장으로 갑과(甲科)로 급제하여 오랜 명망이 드러나 있고 중서사인(中書舍人) 신 묵경16)(墨卿)은 학문의 훌륭함이 행실에 나타나 충효를 근엄하게 지키고 일에 임해서 마음이 변하지 않는데 이 두 사람이 함께 사명을 받들고 가게 되었으니, 이들은 비단 부절(符節)을 가지고 전대(專對 타국에 사신가서 제대로 전달하는 것)하는 것이 옛날의 선량한 사신에 못지않을 뿐더러, 풍채와 명망도 조정의 위엄을 드높이고 외국인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임명을 받고서 아직 떠나기 전에 마침 왕 우17)(王俁)가 훙거하였음을 알게 되어 드디어 전제(典祭) 조위(弔慰)하는 예를 겸임하고 갔다.


   나는 우매한데도 외람되이 결원에 충당되어 사신의 속관 말석에 끼게 되었다. 큰 일이야 물론 그 장(長)의 결정에 따라야 하겠지만, 단독으로 처리할 수 있는 소소한 것은 또 조정에서 자격에 따라 시킨 일의 만분의 일도 보답하기에 부족하다. 물러나 스스로 생각하기를, ‘성실하게 찾아서 묻고 의논하라’고 황황자화(皇皇者華)의 시에 노래되었으니18), 일을 두루 묻는 것은 정사(正使)된 사람의 직책일 것이다. 그래서 삼가 이목이 미치는 데 따라 널리 여러 설을 채택하여, 중국과 같은 것은 뽑아 버리고 중국과 다른 것들을 취하니 도합 3백여 조가 되었다. 이를 정리하여 40권으로 만들었는데, 물건은 그 형상을 그리고 일은 설명을 달아 「선화봉사고려도경」이라 명명하였다.


   신이 숭녕(崇寧 송 휘종(宋徽宗)의 연호. 1102∼1106)연간에 왕 운19)(王雲)이 찬술한 「계림지」(鷄林志)를 본 적이 있느데, 처음에는 그 설20)(說)을 해설하였으나 그 형상은 그렇지 않았다. 근자에 사신 행차 때 그것을 가져다 참고하였는데 도움이 이미 많았다. 이제 신이 저술한 「도경」은 손으로 펼치고 눈으로 보고 하면 먼 이역땅이 다 앞에 모이게 되는데, 이는 옛날 쌀을 모아 지세의 모형을 만들던 유제21)(遺制)이다. 그렇기는 하나 옛날 한 대(漢代)의 장 건22)(張騫)이 월지(月支)에 사신으로 나갔다가 13년 후에 돌아왔는데도, 경우 월여를 머물렀을 뿐이요, 숙소가 정해진 귀에는 파수병이 지켜 문밖을 나가 본 것이 5~6 차례에 불과 하였다. 따라서 거마를 달리는 동안과 연석에서 수작하는 경우에 이목이 미쳐 간 것은 13년이라는 오랜 세월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 건국(建國)과 입정(立政)의 근본과 풍속과 사물의 상황을 대충 터득할 수 잇어서, 그것들을 그림과 기록에서 빠지지 않게 하였다. 감히 박식을 자랑하고 경박함을 가다듬어 황상의 총명을 흐리게 하자는 것이 아니라, 다만 사실들을 모아서 조정에 복명하여 명령받은 책임을 나소나마 면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어부(御府)에 바치라는 조명(詔命)이 있어 삼가 그 대강의 경위를 추려서 서문을 지었다.


선화 6년8월 6일

봉의랑(奉議郞) 충봉사고려국신소제할인선예물(充奉使高麗國信所提轄人船禮物) 사비어대23)(賜緋魚袋) 신(臣) 서 긍 근서(謹序)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 권


건 국 建國

   이적(夷狄)의 군장(君長) 등은 거개 속임수와 폭력으로 스스로를 높이되, 이름이나 호(號)를 별나고 괴상하게 하여 ‘선우’(單于)니 ‘가한’(可汗)이니 하나, 족히 말할 만한 것이 없다. 오직 고려(高麗 우리나라의 범칭)는 기자(箕子)가 봉(封)해졌을 때부터 덕(德)으로 후(侯)가 되었는데 후대에 점점 쇠약했으며 타성(他姓 기자 이후의 여러 왕조를 뜻한다) 역시 한(漢)나라 작(爵)을 써서 갈음하여 그 자리를 차지하었으니, 위로는 떳떳한 높임이 있고 아래로는 차등이 있다. 그러모로 나라를 이어받고 재를 전하여 감에 있어 자못 기록할 만한 것이 있다.

이제 모든 사적을 고찰하고 그 억대의 왕을 서차(序次)하여 이 건국기(建國記)를 짓는다.


시 봉 始封

   고려의 선조는 대개 주 무왕(周武王)이 조선(朝鮮)에 봉한 기자(箕子) 서여(胥餘 기자의 이름)이니, 성은 자(子)이다. 주(周)․진(秦)을 지나 한 고조(漢高祖) 12년(箕準(기준) 26, B.C.195)에 이르러 연(燕) 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망명(亡命)할 때에 당(黨)을 모아 추결(椎結 상투를 가리킨다)하고 와서 오랑캐를 복속시켜 차차 조선 땅을 차지하고 왕 노릇을 하였다. 자성(子姓)이 나라를 차지한 지 8백여 년 만에 위씨(衛氏)의 나라가 되었고 위씨가 나라를 차지함이 80여 년이었다.


   이에 앞서, 부여(夫餘)의 왕이 하신(河神)의 딸을 얻었는데 햇빛에 비추임을 받아 감응되어 임신하였으며 알(卵)로 낳았다. 자라서 활을 잘 쏘았는데, 세속에서 활 잘 쏘는 것을 ‘주몽’(朱蒙)이라 하므로, 따라서 ‘주몽’이라고 이름지었다. 부여 사람들이 그의 출생이 이상했던 때문에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제거할 것을 청하였다. 주몽이 두려워서 도망하다가 큰 물을 만났는데 다리가 없어 건너지 못하게 되매 활을 가지고 물을 치면서 주문(呪文)을 외니, 물고기와 자라가 모두 떠올랐다. 그리하여 타고 건너가 흘승골성(紇升骨城  만주 흔강(흔江) 유역의 환인(桓仁)지방으로 비정(批定)된다.)에 이르러 살면서 그 곳을 스스로 ‘고구려’(高句麗)라고 부르고, 따라서 ‘고’(高)로 성씨를 삼고 나라를 고려(高麗)라 하였다.


   모두 5 부족(部族)이 있었는데, 소노부(消奴部)․절노부(絶奴部)․순노부(順奴部)․관노부(灌奴部)․계루부(桂婁部)가 이것이다.

한 무제(漢武帝)가 조선을 멸하고 고구려를 현(縣)으로 삼아 현도군(縣도郡)에 소속시키고, 그 군장(君長)에게 고취(鼓吹)와 기인(伎人)을 내려주었다. 고려는 늘 현도군에 가서 조복(朝服)․의복․책(幘 머리에 쓰는 건의 하나)을 받아왔고, 현령(縣令)이 명적(名籍 장부)을 맡아 보았다.

뒤에는 점점 교만하여져 다시 군(郡)에 나아가지 아니하니, 군에서 동쪽경계에 자그마한 성을 쌓고 세시(歲時)에 받아가게 하였다. 따라서 그 성을 ‘책구루’(幘溝漊)라고 이름하였는데, 고려 말로 성을 ‘구루’라 한다. 그리고 이 때에 와서 비로소 왕이라 일컬었다.


   왕망(王莽)이 고려 군사를 출동시켜 흉노(匈奴)를 치려고 했으나 가지 아니하매 왕을 낮추어 후(侯)로 삼으니, 이 때문에 고려 사람들이 더욱 그의 국경을 침범했다.

광무(光武 동한(東漢)의 시조 유수(劉秀))가 중흥하여 변방에 관원 보내는 것을 폐지하매, 건무(建武 광무의 연호) 8년(32)에 사신을 보내어 조회(朝會)하러 갔다. 따라서 왕호(王號)를 복구시켜 주고 외번(外藩)의 반열(班列)에 끼위 주었다.

안제(安帝 후한 제6대 임금) 이후에는 5부(部)의 민중이 번성하여 비록 다소 초포(鈔暴)함이 있었으나, 곧 되돌아서 빈복(賓服)하였다.


   처음에는 소노부(消奴部) 출신이 왕이 되었었는데 쇠약하여지매, 계루부(桂婁部)가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 그리하여 왕 궁(宮)에까지 이르렀는데, 궁(宮)은 태어나서 바로 눈을 뜨고 능히 봤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미워했다. 궁은 장성하여 매우 건장하고 용맹스러워, 화제(和帝 동한 제5대 임금) 때에 자주 요동(遼東)을 침략했다. 그리하여 백고(伯固)왕까지 전하여 갔고 백고가 죽자 아들 둘이 있었는데, 형인 발기(拔奇)는 불초(不肖)했기 때문에 동생인 이이모(伊夷模)를 나라 사람들이 왕으로 세웠다.

한(漢) 나라 말기에 공손강(公孫康 요동태수 공소도(公孫道)의 아들)이 이이모를 그 나라 환도산(丸都山) 아래에서 격파하니, 나라 사람들이 그 아들 위궁(位宮)을 세웠는데, 위궁 또한 용력(勇力)이 있어 말타기를 좋아했다. 그의 선조(先祖) 궁(宮)이 출생하면서 눈을 뜨고 능히 보았는데, 지금 왕도 역시 그러했다. 고구려에서는 서로 같은 것을 일러 ‘위’(位)라고 하므로, 이름을 위궁이라고 한 것이다. 뒤에 위(魏) 나라 장수 관구검24)(毌丘儉)이 쳐들어와 무찌르고 숙신(肅愼 여진․말갈족의 전신)에까지 추격해 가서 공로를 돌에 새겨 기록하고 돌아갔다.


   위궁의 5대손 유(劉)가 진(晉) 나라 영가(永嘉 회제(懷帝)의 연호 307~321) 연간에 요서(遼西)의 선비족(鮮卑族)인 모용외(慕容廆 전연(前燕)의 무선제(武宣帝))와 이웃하였었는데, 모용외도 억제하지 못하였다. 강제(康帝) 건원(建元) 초에 모용 외의 아들 모용황(慕容煌)이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가 크게 격파시켰는데, 뒤에 백제에게 멸망되었다.

그 뒤에 모용 보(慕容寶)가 고구려 왕 고안(高安)으로 평주목(平州牧)을 삼았다. 안의 손자 연(璉)이 의회(義熙 동진(東晉) 안제(安帝)의 연호. 405~418) 연간에 장사(長史) 손익(孫翼)을 보내어 자백마(赭白馬)을 바치니, 영주목 고려왕 낙랑군공(榮州牧高麗王樂浪郡公)을 삼았다.


   연(璉)의 7대손 원(元)이, 수 문제(隨文帝) 때에 말갈(靺鞨)을 거느리고 요동(遼東)을 침범했고, 당 태종(唐太宗) 때에는 동부(東部 순노부(順奴部)) 대인(大人) 개소문(蓋蘇文)이 잔학하고 무도하므로, 태종이 친히 정벌하여 위엄이 요동에 떨쳤다.

고종(高宗 당 나라 제3대 임금)이 또한 이적25)(李勣)을 명하여 가서 평정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왕 고장(高藏)을 사로잡고 그 땅을 갈라 군현(郡縣)을 만들었으며, 안동 도호부(安東都護府)를 평양성(平壤城)에 설치하고 군사를 두어 지켰다.


   뒤에 무후(武后)가 장수를 보내어 그 왕 걸곤우(乞昆羽)를 죽이고 걸중상(乞仲象)을 왕으로 세웠으나 또한 병으로 죽으매, 중상의 아들 조영(祚榮  대조영(大祚榮))이 즉위하였고 따라서 그민중 40만을 차지하여 읍루26)(挹婁)에 웅거하여 당 나라의 신하가 되었다. 중종(中宗 당 나라 제4대 임금)때에 와서 홀한주(忽汗州)를 설치하고 종영으로 도독 발해군왕(都督渤海郡王)을 삼으니, 그 뒤부터 드디어 이름을 발해라고 하였다.

   처음에 고장(高藏)이 사로잡혔을 적에, 그 추장(酋長)에 검모잠27)(劍牟岑)이라는 자가 있어 고 장의 외손자 순(舜)을 왕으로 세우니, 또 고간(高간)을 시켜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도호부(都護府)가 이미 누차 옮겨져 옛성이 신라(新羅)로 들어간 것이 많게 되매, 유민들이 돌궐(突厥)・말갈(靺鞨)에 분산되었다.


   고씨(高氏)가 이미 멸망되었으나 오랜 뒤에는 점차 회복되어, 당 나라 말기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그 나라에서 왕 노릇하였고 후당(後唐) 동광(同光 장종(莊宗)의 연호) 원년(923)에는 사신을 보내어 조회하러 왔었는데, 국왕(國王)의 성씨(姓氏)를 사관이 빠뜨리고 기재하지 않았다.

장흥(長興 후당 명종의 연호) 2년(931)에 왕건(王建)이 나라 일을 권지(權知)하여 사신을 보내어 공물(貢物)을 바치고, 드디어 작위(爵位)을 받아 나라를 차지했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2권


세 차 世次

   사가(史家)의 방법이, 시대가 먼 것을 전하기는 간략하게 하고 가까운 것은 상세하게 한다고 한다. 고려(高麗)의 역대 임금은 이미 앞에 대략 서술하였거니와, 지금 왕씨(王氏)가 나라를 세워 여러 세대 동안 본조(本朝 송나라를 말한다 )를 존대하여 섬겼고 왕우(王우)와 지금 왕해(楷)에 이르러서는 또한 대접하는 예(亨禮)를 더 후하게 하였으니, 조목조목 드러내지 않을 수 없기에, 그 세차(世次)와 종계(宗系)를 적은 다음에 이어서 해(楷)의 행적을 기록한다,


왕 씨 王氏

   왕씨의 선조는 대개 고려의 큰 씨족이다. 고씨(高氏)의 정사가 쇠퇴하게 되매, 나라 사람들이 왕건을 어질게 여겨 드디어 군장(君長)으로 세웠다. 후당(後唐) 장흥(長興) 3년에 마침내 스스로 권지 국사(權知國事)라 칭하고 명종(明宗)에게 봉작(封爵)하여 주기를 청하니, 곧 왕건에게 원도주 도독(元도州都督)을 제수(除授)하고 대의군사(大義軍使)에 충임(充任)하여 고려의 왕으로 봉하였다.

진(晉)나라 개운(開運)2년에 왕건이 죽고 아들 무(武)가 즉위하였으며, 한(漢) 나라 건우(乾우) 말년에 무가 죽고 아들 소(昭)가 즉위하였다.


   황조(皇朝) 건륭(建隆) 3년에 태조 황제(太祖皇帝)가 등극(登極)하여 만국(萬國)을 다 차지하매 소(昭)가 사신을 보내어 조회하러 왔으므로, 공신(功臣)의 호(號)를 내리고 이어 식읍(食邑)28)을 주었다.

개보(開寶) 9년에 소가 죽고 아들 주(주)가 즉위하여 사신을 보내어 봉작(封爵)을 청하므로 고려 국왕으로 봉하였고, 태종 황제(太宗 皇帝)가 즉위하여 대순군사(大順軍使)로 고쳐 봉하였다.


   태평흥국(太平興國) 7년에 주가 죽으매, 아우 치(治)가 글을 올려 계승하여 봉작 받기를 원하므로 조칙(詔勅)을 내려 허락하였다. 순화(淳化) 6년에 거란(契丹)이 공격하자 치가 나약하여 지키지 못하고 북로(北虜)를 신하로 섬기면서 드디어 조공(朝貢)을 하지 않았다.

치가 죽고 아우 송(誦)이 즉위하였다. 함평(咸平) 3년에 그의 신하 주인소(朱仁紹)가 조회하러 들어와 말하기를 ‘나라 사람들이 황제의 덕화(德化)를 사모하나, 강한 오랑캐에게 핍박받아 소원대로 하지 못한다.’고 하므로, 조정에서 아름답게 여겨 조서(詔書)를 내려 포상하고 효유(曉諭)하였다.


   대중상부(大中祥符) 7년에 송이 죽고 아우 순(순)이 나라일을 권지(權知)하여 거란을 크게 깨뜨리고 다시 조공(朝貢)을 바쳤으며, 존호(尊號)를 내릴 것과 정삭(正朔)의 반사(頒賜)를 바랐고, 또한 봉책(封冊)을 청하였다. 진종 황제(眞宗皇帝)는 처음에 그대로 따르려고 하다가 의논하는 사람들이 어렵게 여기므로 드디어 중지하고, 따라서 조서만 내렸다.

천성(天聖) 연간에 사신이 여려 번 여진(女眞)과 함께 와서 방물(方物)을 조공하므로, 천자가 은혜를 내려 보답하는 예(禮)를 특별히 두텁게 하였다.


순   이 죽고 아들 융(隆)이 즉위했는데, 유약하고 결단성이 없어서 정사가 어지러워지고 힘이 모자라 북로(北虜)를 꺼리다가 드디어 다시 신하로 그들을 섬겼다. 그리하여 조공하는 사신이 끊어졌다. 융이 죽으매, 정(正)이라고 사시(私諡)29)하였다.

아들 덕왕(德王) 흠(欽)과 흠의 아우 목왕(穆王) 형(亨)도 모두 조공하러 오지 않았고, 조정에서도 사신 보내는 것을 폐지했다.

형의 아우 휘(徽)가 희령(熙寧) 4년에 권지국사(權知國事)로서 다시 방물(方物)을 조공하였고 7년과 9년에 사신이 거듭 왔으므로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그 충성을 아름답게 여겨, 원풍(元豊) 원년(元年)에 좌간의대부(左諫儀大夫) 안도(安燾)로 국신사(國信使)를 삼고 기거사인(起居舍人) 진목(陳睦)을 부사(副使)로 임명하여 명주(明州) 정해(定海)에서 바다를 건너갔었다.

이때 휘(徽)는 풍병(風病)으로 마비되어 겨우 명령을 받았고, 또한 의약(醫藥)을 청하므로 상께서는 그가 아뢴 것을 보고 그대로 따랐다. 3년과 4년에도 계속 사신이 와서 조회했다. 6년에 휘가 죽으니, 왕위에 있은 지 무릇 38년이었고 시호를 ‘문(文)’이라고 했다.


   세자(世子) 훈(勳)은 즉위한 지 백일 만에 죽고 아우 국원공(國原公) 운(運)이 즉위했는데, 이때에 좌간의대부 양경략(楊景略)을 제전사(祭奠使)로, 예빈사(禮賓使) 왕순봉(王舜封)을 부사(副使)로 임명하고,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전협(錢협)을 조위사(弔慰使)로, 서상합문부사(西上閤門副使) 주구(朱球)를 부사로 임명하여, 7년 7월에 밀수(密水) 판교(板橋)에서 배를 타고 건너갔다. 8년에 철종 황제(哲宗皇帝)가 즉위하매, 위문하는 사신과 하례하는 사신을 함께 보내왔다.

운(運)이 즉위한지 4년만에 죽으니, 시호를 ‘선(宣)’이라고 했다. 아들 요(堯)는 즉위한 지 1 년도 못되어 병으로 폐위(廢位)되매, 나라 사람들이 그의 숙부(叔父)  희(熙)에게 섭정(攝政)하기를 청했다. 얼마 되지 않아 요가 죽으니, 시호를 ‘회(懷)’라고 했다. ]

희가 곧 왕위를 승습하여, 원우(元우) 5년에서 원부(元符) 원년까지에 공사(貢使)가 두번이나 왔다. 그래서 3년에 무마하는 사신을 보냈는데, 이것은 원풍(元豊)때의 고사에 따른 것이다.


   황제(皇帝)가 왕위를 이어받아 선대를 추모하여 효성을 이루고 거룩하게 선조들의 업적을 계승하매, 사해(四海)의 안팎이 신하 노릇하지 않는 사람이 없어 덕이 번복(藩服)에 덮이고 은혜가 사해에 퍼졌다.

그리하여 숭녕(崇寧) 원년에 호부 시랑(戶部侍郞) 유규(劉逵)와 급사중(給事中) 오식(吳식)을 명하여 절(節)을 가지고 사신가도록 하되, 예물(禮物)을 풍성하게 하고 은륜(恩綸)이 분명하였다. 이는 고려에 은덕을 내리어 상주어 신임하고 무마함으로써 신고(神考)의 뜻을 더욱 거룩하고 훌륭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2년 5월에 명주도(明州道) 매잠(梅岑)에서 바다를 건너갔는데, 이때 희(熙)가 거란(글안) 왕의 이름을 혐명(嫌名)하여 희(熙)를 고쳐 옹(옹)이라고 했다. 그러나 신고(神考) 때부터 시작하여 힘써 먼 나라 사람들을 오도록 하매, 하늘이 슬기로운 계책을 도와 주어 고려 임금 휘(徽)가 봉작(封爵)을 승습하고 그 뜻을 이어 받드니, 참으로 우연한 일이 아니다.


   휘는 충순(忠順)하여 사리를 따르며 중국을 높일 줄 알고, 사신을 대접하는 예와 뜻이 근간하고 후하였으며 장사치를 대접하는 데 있어서도 역시 체모가 있었고 정사는 인자와 용서를 숭상하니, 나라를 장구하게 누림이 당연하다. 숭녕(崇寧) 2년에 옹(옹)이 죽으니 나이 50세였고, 세자 오(우)가 즉위하였다.

장흥(長興) 3년 임진(任辰)으로부터 금상(今上) 선화(宣化) 6년 갑진(甲辰)까지 왕씨가 나라를 차지한지 9세(世)인데, 무릇 17인으로서 합하면 1백 93년이다.


세계 世系

건(建)ꠏꠏ 무(武)ꠏꠏꠏ 소(昭)ꠏꠇꠏ 주

ꠉꠏ 치(治)

ꠉꠏ 송(誦)

ꠌꠏ 순(詢) ꠏꠏ 융(隆)ꠏꠇꠏ 흠(欽)

ꠉꠏ 형(亨)

ꠌꠏ 휘(徽) ꠏꠇꠏꠏ 훈(勳)

ꠉꠏ 운 (運) ꠏꠏꠏꠏ 요(堯)

ꠌꠏꠏ 옹 ꠏꠏꠏꠏ 우 ꠏꠏꠏꠏ 해(楷)


고려국왕 왕해 高麗國王王楷

   해(楷)는 왕우(王우)의 세자이다. 임인 봄 3월에 우가 병이 위독하매 이자겸(李資謙)을 불러들여 후사(後嗣) 일을 의논했었는데, 4월에 우가 죽자 이자겸 등이 곧 해를 세워 왕을 삼았다.

해는 용모가 준수하고 몸집은 작으나 얼굴이 풍후하며 살이 뼈보다 많다. 성격이 지혜로와 배운 것이 많으며 또한 매우 엄명하며, 동궁(東宮)에 있을 때 관속(官屬)들이 과오를 범하면 반드시 꾸짖음을 당했고 즉위하여서는 비록 나이가 어렸지만 나라 관원들이 자못 두려워하고 꺼렸다.


   이번에 신사(信使)가 가매, 그가 조서(詔書)와 표문(表文)을 받고 연향(燕饗)하는 예를 거행하는데, 올라가고 내려감과 나아가고 물러감이 여유가 있어 성인(成人)의 풍토가 있으니, 역시 동이(東夷)의 어진 왕이 됨직했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3권


성 읍 城邑

   사이(四夷)의 군장(君長)들이 흔히 산과 계곡을 의지하거나 물과 풀이 있는 곳을 따라 수시로 옮겨다니기를 편리하게 여겼으므로, 원래부터 나라에 도읍 제도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서역(西域)의 거사(居師)․선선(선善) 등 나라가 겨우 담장을 쌓아 거성(居城)으로 만들 줄 알았으므로, 사가(史家)들이 그것을 가리켜 ‘성곽 제국(城郭諸國)’이라 하였으니, 대개 그 특이함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고려 같은 나라는 그렇지 아니하여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세우고, 읍(邑)에는 가옥(家屋)을 만들고 주(州)에는 마을문을 세웠고, 높은 성첩(城堞)을 둘러 쌓아 중화(中華)를 모방하였으니, 아마도 이것은 기자(箕子)가 봉작(封爵)받은 옛땅이라서 중화의 전해오는 풍속과 습관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조정에서 간간히 사신을 보내어 그 나라를 무마하기 위하여 그들의 지경에 들어가면, 성곽들이 우뚝우뚝하여 실로 쉽사리 업신여길 수 없다. 이제 그 나라를 세운 형세를 모두 파악하여 그림으로 그린다.


봉 경  

고려는, 남쪽은 요해(遼海)로 막히고 서쪽은 요수(遼水)와 맞닿았고 북쪽은 옛 거란 땅과 연속되고 동쪽은 금(金) 나라와 맞닿았다. 또한 일본․유구․탐라․흑수(黑水)․모인(毛人) 등 나라와 견아상제(犬牙相制)의 모양으로 되어 있다.오직 신라와 백제가 스스로 그 국경을 견고히 하지 못하여 고려 사람들에게 합병(合倂)되니, 지금의 나주도(羅州道)와 광주도(廣州道)가 이것이다.


   그 나라는 경사(京師)의 동북쪽에 있는데, 연산도(燕山道)로부터 육로(陸路)로 가다가 요수(遼水)를 건너 동쪽으로 그 나라 국경에 이르기까지, 무릇 3천 7백 90리이다.

만약 바닷길로라면, 하북(河北)․경동(京東)․회남(희南)․양절(兩浙)․광남(廣南)․복건(福建)에서는 모두 갈 수 있는데, 지금 세워진 나라는 바로 등주(登州)․내주(내州)․빈주(濱州)․체주(체州)와 서로 바라다 보인다.


   원풍(元豊) 이후부터 매양 조정에서 사신을 보내려면, 언제나 명주(明州) 정해(定海)에서 출항(出航)하여 바다를 가로질러 북으로 간다. 배 운행은 모두 하지(夏至) 뒤에 남풍(南風)의 바람편을 이용하는데, 5일이 못되어 곧 해안(海岸)에 닿는다.

옛적에는 봉경(封境)이 동서는 2천여 리, 남북은 1천 5백여 리이었는데, 지금은 이미 신라와 백제를 합병하여 동북쪽은 조금 넓어졌지만 그 서북쪽은 거란(契丹)과 연속되었다.


   옛적에는 대요(大遼)와 경계를 했었는데, 뒤에 대요와 경계를 했었는데, 뒤에 대요의 침벌을 받게 되매, 내원성(來遠城)을 쌓아 요새로 삼았다. 그러나 이것은 압록강을 믿고 요새로 한 것이다.

압록강의 물 근원은 말갈(靺鞨)에서 나오는데, 그 물 빛깔이 오리의 머리빛깔 같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요동(遼東)에서 5백 리쯤 흘러가다 국내성(國內城)을 지나서 또 서쪽으로 흘러 한 강물과 합류하니, 이것이 염난수(鹽難水)이다. 두 강물이 합류하여 서남쪽으로 안평성(安平城)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고려에서는 이 강물이 가장 크다. 물결이 맑고 투명하여 지나는 나루터마다 모두 큰 배가 정박해 있는데, 그 나라에서 이를 천참(天塹)으로 여긴다. 강물의 너비가 3백 보(步)인데, 평양성(平壤城)에서 서북으로 4백 50리이고, 요수(遼水)에서 동남으로 4백 80리에 있다. 요수에서 동쪽은 옛날 거란에 소속되었었는데, 지금은 그 오랑케 민중이 이미 멸망되었고, 금(金) 나라에서는 그 땅이 불모지(不毛地)이기 때문에 다시 성을 쌓아 지키지 않았다. 그리하여 한갓 왕래하는 길이 되었을 뿐이다.


   압록강 서쪽에 또한 백랑(白浪)․황암(黃嵒) 두 강이 있는데, 파리성(頗利城)에서 2리쯤 가다가 합류하여 남쪽으로 흐른다. 이것이 요수(遼水)이다.

당(唐) 나라 정관(貞觀) 연간에 이 적(李勣)이 남소(南蘇)에서 고려를 크게 깨뜨리고, 강을 건너가신 그 강물이 매우 얕고 좁은 것을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이것이 요수(遼水)의 근원’이라고 했다. 이로써 전고(前古)에는 일찌기 이 강을 믿어 요새로 여기지 않았음을 알 수 있고, 이래서 고려가 물러들어가 압록강의 동쪽을 확보한 것이 아니겠는가?


형 세 形勢

   고려는 본디 글을 알아 도리에 밝으나 음양설(陰陽說)에 구애되어 꺼리기 때문에, 그들이 나라를 세움에는 반드시 그 형세를 관찰하여 장구한 계책을 할 수 있는 곳인 연후에 자리잡는다.

한(漢) 나라 말엽(末葉)부터는 환도산(丸都山) 아래로 옮겼고, 후위(後魏)부터 당나라 때까지는 모두 평양(平壤)에 있다가, 이적(李勣)이 그 곳을 평정하고 도호부(都護府)를 설치함에 이르러서는, 도망하여 점점 동쪽으로 가서 살았기 때문에 그 곳을 자세히 알 수 없다.


   당나라 말엽에 나라를 복구한 데가 곧 지금 도읍한 곳에 해당되는데, 대개 전에 개주(開州)이던 곳으로, 지금도 오히려 개성부(開城府)가 설치되어 있다.

그 성(城)은 북쪽으로 숭산(崧山)에 의지했는데, 그 형세가 건해방(乾亥方)에서 뻗어내려오다가 산 등성이에 이르러서는 점차 나뉘어 두 줄기가 되어 다시 서로 감고 돌았으니, 음양가들이 말하는 청룡(靑龍)과 백호(白虎)줄기이다.


   오음(五音)으로 논한다면, 왕씨(王氏)는 상(商)에 해당하는 성이니, 서편이 높게 보이면 흥하는데, 건(乾)은 서북에 해당하는 괘(卦)이다. 뻗어내린 등성이가 해방(亥方)으로 나갔는데, 그 오른쪽에서 산 하나가 꺾어져서 서쪽에서 북쪽으로 가다가 다시 정남(正南)으로 돌아나와 봉우리 하나가 우뚝 솟아 형상이 동이를 엎어놓은 것 같고, 따라서 안산(案山)이 되었다.

그 밖에 또 안산 하나가 있어 그 높이가 배나 되는데, 좌향(坐向)이 서로 호응하여 객산(客山)은 남방(丙)에 있고 주산(主山)은 북방(壬)에 있다. 물은 숭산(崧山) 뒤에서 발원(發源)하여 북쪽으로 곧게 북쪽(子位)으로 흐르다가 돌아서 동북쪽(랑)에 이르러 꾸불꾸불하게 성으로 들어와 광화문(廣化門)에서 조금 꺾어져 북으로 향하다가 다시 남쪽(丙地)으로 흘러나간다.


   이상은 대개 건괘(乾卦)는 금(金)이 되고 금의 장생방(長生方)은 동남쪽(巳方)에 있는 것이니, 이는 길한 자리가 되는 것이다.

숭산 중턱에서 성안을 내려다보면, 왼쪽에는 시내, 오른쪽에는 산, 뒤는 등성이, 앞에는 고개인데, 숲이 무성하여 형세가 ‘시냇물을 마시는 푸른 용’과 같으니, 그 자리가 동토(東土)에서 역년(歷年)을 오래도록 보유하면서, 항시 성조의 속국이 됨직하였다.


국 성 國城

   고려는, 당 나라 이전에는 대개 평양(平壤)에 있었으니, 본래 한 무제(漢武帝)가 설치했던 낙랑군(樂浪郡)이며, 당 고종(唐高宗)이 세운 도호부(都護府)이다. 「당지」(唐志)를 상고하여 보면 ‘평양성은 바로 압록강 동남쪽에 있다’ 하였는데, 당 나라 말엽에 고려의 군장(君長)들이 여러 대를 겪은 전란을 경계하여 점점 동쪽으로 옮겨갔다. 지금 왕성(王城)은 압록강의 동남쪽 천여리에 있으니, 옛 평양이 아니다.


   그 성은 주위가 60리이고, 산이 빙 둘려 있으며 모래와 자갈이 섞인 땅인데, 그 지형에 따라 성을 쌓았다. 그러나 밖에 참호(塹壕)와 여장(女墻)을 만들지 않았으며, 줄지어 잇닿은 집은 행랑채와 같은 형상인데 자못 적루(敵樓)와 비슷하다. 비록 병장(兵仗)을 설치하여 뜻밖의 변을 대비하고 있으나, 산의 형세대로 따랐기 때문에 전체가 견고하거나 높게 되지 않았고, 그 중 낮은 곳에 있어서는 적을 막아낼 수 없었으니, 만일 위급한 일이 있을 때는 지켜내지 못할 것을 알 수 있다.


   열 두 외문(外門)에 각각 표시한 이름이 있었느데, 옛 기록에는 겨우 그 중 7곳을 말했으나 지금은 다 알 수 있다. 정동(正東)에는 선인(宣仁) 숭인(崇仁) 안정(安定)이 있고, 동남에는 장패(長覇)가 있고, 정남에는 선화(宣華) 회빈(會濱) 태안(泰安)이 있고, 서남에는 광덕(光德)이 있고, 정서에는 선의(宣義), 산예(산猊)가 있고, 정북에는 북창(北昌)이 있고, 동북에는 선기(宣祺)가 있다.


   서남 모퉁이에는 왕부(王府), 궁실(宮室)이 있고, 그 동북 모퉁이에 있는 것이 곧 순천관(順天館)인데 매우 완전하게 수리되어 있으며, 서문(西門)도 또한 웅장하고 화려하니, 대개 중국에서 사신 오는 사람을 위해서 설치한 것이다.

경시사(京市司)에서 흥국사(興國寺) 다리까지와, 광화문(廣化門)에서 봉선고(奉先庫)까지에 긴 행랑집 수백 간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민중들의 주거가 좁고 누추하며 질서가 없고 가지런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으로 가리워 사람들에게 그 누추함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동남쪽의 문은, 대개 시냇물이 동남쪽(巳方)으로 흐르니 모든 물이 모이게 되는 곳이요, 그 나머지 모든 문과 관부(官府), 궁사(宮祠), 도관(道觀), 승사(僧寺), 별궁(別宮), 객관(客館)도 모두 지형에 따라 여러 곳에 별처럼 널려 있다.

백성들의 주거는 열 두어 집씩 모여 하나의 마을을 이루었고, 정읍(井邑)과 시가(市街)에는 취할 만한 것이 없었다.

이상으로 건국(建國)의 대략을 총괄하여 그렸고, 그 나머지는 딴 편(篇)에 간간이 나와 있다.


누 관 樓觀

   왕성(王城)은 과거에는 누관(樓觀)이 없다가 사신이 상통한 이래로, 상국(上國)을 관광(觀光)하고 그 규모를 배워 차차 만들게 되었다. 당초에는 오직 왕성의 왕궁이나 절에만 있었는데, 지금은 관도(官道) 양쪽과 국상(國相), 부자들까지도 두게 되어 점점 사치해졌다. 그래서 선의문(宣義門)을 들어가면 수십 집 가량에 누각(樓閣) 하나씩이 세워져 있다.


   흥국사(興國寺) 근처에 두 누각이 마주 보고 있는데, 왼쪽것은 ‘박제(搏濟)’라 하고 오른쪽 것은 ‘익평(益平)’이라 한다. 왕부(王府)의 동쪽에도 누각 둘이 거리에 임해 있어, 간판은 보이지 않으나 발과 장막이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들으니, 모두 왕족들이 놀이하는 곳이라고 했다.

   사신이 지나가게 되면, 부녀자들이 그 속에서 내다보는데 의복 꾸밈새가 서민들과 다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왕이 눌러 올 때면 그 안의 왕족들이 비로소 비단 옷으로 바꾸어 입는다’고 했다.


민 거 民居

   왕성이 비록 크기는 하나, 자갈땅이고 산등성이어서 땅이 평탄하고 넓지 못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거주하는 형세가 고르지 못하여 벌집과 개미 구멍같다. 풀을 베어다 지붕을 덮어 겨우 풍우(風雨)를 막는데, 집의 크기는 서까래를 양쪽으로 잇대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부유한 집은 다소 기와를 덮었으나, 겨우 열에 한두 집뿐이다.

   전에는 전하기를 ‘창우(倡優)들이 사는 집은 긴 장대를 세워 양가(良家)와 구별한다’ 하였는데, 지금 들으니 그렇지 않다. 대개 그 풍속이 지나치게 귀신을 받들고, 또한 기양(祈禳)하는 기구를 더없이 좋게 하는 것뿐이었다.


방 시 坊市

   왕성(王城)에는 본래 방시가 없고, 광화문(廣化門)에서 관부(官府) 및 객관(客館)에 이르기까지, 모두 긴 행랑을 만들어 백성들의 주거를 가리웠다. 때로 행랑 사이에다 그 방(坊)의 문을 표시하기를, ‘영통’(永通), ‘광덕’(廣德), ‘흥선’(興善), ‘통상’(通商), ‘존신’(存信), ‘자양’(資養), ‘효의’(孝義), ‘행손’(行孫)이라 했는데, 그 안에는 실제로 가구(街구)나 시정(市井)은 없고, 적벽에 초목만 무성하며, 황폐한 빈터로 정리되지 않은 땅이 있기까지 하니, 밖에서 보기만 좋게 한 것 뿐이다.


무 역 貿易

   고려의 고사(故事)에, 매양 사신이 오게 되면 사람이 모여 큰 저자를 이루고 온갖 물화(物貨)를 나열하는데, 붉고 검은 비단은 모두 화려하고 좋도고 힘쓰고, 금과 은으로 만든 기용(器用)은 모두 왕부(王府)의 것을 때에 맞추어 진열하나, 실제로 그 풍속이 그런 것은 아니다. 숭녕(崇寧)이나 대관(大觀) 때의 사자는 이런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대개 그 풍속이 거사(居肆)는 없고 오직 한낮에 시장을 벌여, 남녀, 노소, 관리, 공기(工技)들이 각기 자기가 가진 것으로써 교역(交易)하고, 천화(泉貨)를 사용하는 법은 없다.

오직 저포(紵布), 은병(銀甁)으로 그 가치를 표준하여 교역하고, 일용(日用)의 세미한 것으로 필(疋)이나 냥(兩)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쌀로 치수(치銖)를 계산하여 상환한다. 그러나 백성들은 오래도록 그런 풍속에 익숙하여 스스로 편하게 여긴다.

중간에 조정에서 전보(錢寶)를 내려 주었는데, 지금은 모두 부고(府庫)에 저장해 두고 때로 내다 관속(官屬)들에게 관람시킨다 한다.


군 읍 郡邑

   주현(州懸)의 설치는 명칭이 맞지 않고, 취락(聚落)이 번성한 곳일 뿐이다. 나라의 서북(西北)으로부터 거란(글안), 대금(大金)의 접경(接境)에 이르기까지 간간이 보루(堡壘)와 참호가 있고, 그 동남쪽은 해변에 닿았는데 섬에도 설치한 것이 있다.

오직 서경(西京)이 가장 번성하여 성과 시가가 대략 왕성(王城)과 같다. 또한 3경(京), 4부(府), 8목(牧)이 있고, 또 방어하는 군(郡) 1백 18과 현진(縣鎭) 3백 90과, 주도(洲島) 3천 7백을 설치하고 모두 수령(守令), 감관(監官)을 두어 백성을 다스린다. 그런데 목(牧), 수(守), 도호(都護)의 공해(公해)만은 여러 간이고, 영장(令長)은 소재에 따라 거주하는 백성들의 집에 거처한다.

고려의 정사는 조부(組賦)이외의 송사는 없다. 관직에 있는 사람이 공전(公田)으로 비용을 충당할 수 없으면, 부유한 백성에게서 공급받게 된다고 한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4 권


문 궐 門闕

   황제(黃帝 중국 전설상의 제왕)와 요․순(堯舜)은 예방하기를 숭항하여 겹문을 설치하고 딱다기를 쳐서 폭객(暴客 도적)을 대비했고, 후세의 성인들은 또 존비(尊卑)를 나누어 등급을 만들었기 때문에, 천자(天子)의 문(門)은 고문(皐門)․고문(庫門)․치문(雉門)․응문(應門)․노문(路門)이라하여 모두 다섯문이고, 제후(諸侯)들은 이 중 두문을 없애고 고문․치문․노문이라는 것 뿐이었다. 그래서 노(魯)나라는 주공(周公)의 후손으로서도 치문(雉門)에 새로 두 누관(樓觀)을 지었다가 「춘추」(春秋)의 꾸지람을 면하지 못하였거든, 더구나 그 나머지 제후들이겠는가?


   고려의 궐문(闕文) 제도는 자못 옛 제후의 예(禮)를 따랐다. 비록 그들이 누차 상국에 빙문다니며 본떠다가 모방한 것이나, 재목이 모자라고 기술이 졸렬하여 결국 투박하고 누추했다고 한다.


선의문 宣義門

   선의문은 곧 왕성의 정서쪽 문인데, 서(西)는 금방(金方)으로서 오상(五常 인․의․예․지․신)에선 의(義)에 속하기 때문에 이름하게 된 것이다. 정문은 이중으로 되었고, 그 위에 누관이 있는데, 합쳐 옹성(瓮城 큰 성문 밖 작은 성)이 되어 있고, 남․북 양편에 따로 문을 내어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각각 무부(武夫)가 수위하고 있다.


   중문(中門)은 늘 열어놓지 않고 오직 왕이나 사자가 출입할 떄만 열고 나머지는 모두 편문(偏門)으로 다닌다.

벽란정(碧蘭亭)에서 서교(西郊)에 이르기까지 바로 이 문을 지나야 관(館)에 들어 갈 수 있는데, 왕성의 문으로는 오직 이 문이 가장 크고도 화려하다. 그런데 이 문은 국조(國朝 송나라 조정) 사신을 위해 설치한 것이다.


외문 外門

   왕성의 모든 문은 거개 초창기(草創期)에 만든 것인데, 선의문(宣義門)은 사자(使者)가 출입하는 곳이고, 북창문(北昌門)은 사자가 회정(回程 돌아가는 길)하거나, 사묘(祠廟)하러 가는 길이기 때문에 아주 엄숙하게 꾸며져 다른 문은 이에 미치지 못한다.

회빈문(會賓門)․장패문(長覇門) 등부터는 그 제도가 대략 같은데, 오직 그 한가운데에 쌍문을 만들어 존비(尊卑)에 구애없이 모두 출입할 수 있게 했다.

성은 모두 양쪽을 나무로 받치고 철통(鐵筩)으로 보호하였으며, 위에는 작은 행랑집을 지었는데 산 지형의 높고 낮은 대로 쌓았다.


   아래서 숭산(崧山) 등성이를 바라보면, 성의 담장을 빙 두른 것이 마치 뱀이 꿈틀거리는 형상과 같다.

장패문은 안동부(安東府)로 통하고, 광덕문(光德門)은 정주(正州)로 통하고, 선인문(宣仁門)은 양주(楊州)․전주(全州)․나주(羅州) 등 3주로 통하고 숭인문(崇仁門)은 일본으로 통하고, 안정문(安定門)은 경주(慶州)․광주(廣州)․청주(淸州) 등 3주로 통하고, 선기문(宣祺門)은 대금국(大金國)으로 통하고, 북창문은 삼각산(三角山)으로 통하는데, 신탄(薪炭 땔나무와 숯)․잣[松子]․포백(布帛)이 나는 지방이다.


광화문 廣化門

   광화문은 왕부(王府)의 편문(偏門)인데, 동쪽으로 향했고, 모양과 제도는 대략 선의문과 같은데, 유독 옹성(瓮城)이 없고, 문채나게 꾸민 공력은 더했다.

역시 3문을 냈는데, 남쪽 편문에는 의제령(儀制令) 4가지 일을 방시(榜示)했고, 북쪽 문에는 건괘(乾卦)의 요사(繇辭) 5글자 건(乾)․원(元)․형(亨)․이(利)․정(貞)을 방시했으며, 또한 춘첩자(春帖字 입춘날 대궐 안 기둥에 써 붙이는 주련(柱聯))가 있는데,

눈 자취 아직도 삼운폐에 있는데,

햇살이 비로소 오봉루에 오르네.

제후들 잔 올려 축수하니,

곤룡포 자락에 서광이 어렸도다.袞龍布上瑞光浮

라고 했다.


승평문 昇平門

   승평문은 곧 왕궁(王宮)의 정남문이다. 위에는 겹으로 누각을 만들고 곁에 두 누관을 세웠으며, 3문을 죽 늘어세워 제도가 더욱 굉장하고 웅대한데, 문의 네 모서리는 각각 동화주(銅火珠 문짝에 붙이는 장식)로 장식이 되어 있다.

문 안에서부터 좌우로 나누어 두 개의 정자를 만들고 모두 ‘동락정’(同樂亭)이라고 했다. 작은 담장 몇 백이 서로 연속되어 신봉문(神鳳門)까지 이르렀는데, 문의 제도는 승평문보다도 웅장하고 컸다. 동쪽 문에는 ‘춘덕’(春德)이라고 편액했는데 세자궁(世子宮)으로 통하고, 서쪽 문은 ‘태초’(太初)라고 했는데, 왕이 거처하는 비좌(備坐)와 통한다.


   또 10여 보(步)쯤 가면 창합문(閶闔門)이 있는데, 이는 왕이 조서(詔書)를 받는 곳이다. 좌우 양쪽에 승천문(昇天門)이 있고, 여기서부터 위로는 산세가 점차 급하고 뜰이 좁고, 회경전 문과의 거리가 두어 장(丈)에 지나지 않는다.

승평․신봉․창합 3문의 제도와 채색은 대개 서로 비슷한데, 신봉문이 으뜸이다. 제방(題榜)의 글씨는 붉은색 바탕에 금자(金字)로 씌여 있는데, 구솔경(歐率更)의 글씨체이다. 대개 고려 사람들은 거개 옛체를 법받았고, 감히 억설(臆說)이나 자기 소견을 가지고 망령되어 속체(俗體)를 쓰지 않는다.


동덕문 同德門

   동덕문은 좌우로 두 문이 서로 마주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 것이 곧 승평문이다. 모양과 제도는 대략 전문(殿門)과 같아 매우 높으나, 대관(臺觀)이 없다.

창덕(昌德)․회빈(會賓)․춘궁(春宮)․승휴문(承休門)은 그 제도가 동덕과 다르지 않은데, 특히 합문(閤門)․승천(承天) 두 문이 조금 좁을 뿐이다.


전문 殿門

   회경전(會慶殿)의 문은 산 중턱에 있고 돌사닥다리 높이가 5장(丈) 가량인데, 이것이 정전(正殿)의 문이다. 3문을 나란히 세웠는데, 중간 문은 오직 조서를 가진 사람만 들어갈 수 있고, 왕과 사신은 좌우로 나누어 통행한다.

문밖에 창 24자루를 늘어 세웠고, 갑주(甲冑)를 입은 군사가 의위(儀衛)를 담당하고 수위병이 매우 많아서, 다른 문보다도 특히 엄중하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5 권


궁 전 1 宮殿一

   신종황제(神宗皇帝)가 크게 문교(文敎)를 펴 먼 나라까지 미치매, 보물을 바치고 알현(謁見)하려는 사람이 바다를 건너 답지하였다.

그 가운데 고려에게만 더욱 예우(禮遇)하여 주고, 따라서 근시(近侍)를 사신으로 보내어 무마하였으며, 일찍이 예지(睿旨 황제의 분부)를 내렸다.

무릇 접견하는 궁전 이름과, 대마루 끝 기와에 솔개 꼬리 장식하기를 거리낌없이 했으니, 여기서 성상의 계책이 크고 원대하여 오랑캐를 작은 일을 가지고 책망하지 않고, 그들의 충성하고 순종하는 큰 의리만 아름답게 여김을 알았다.


   하동(夏童)이나 북로(北虜)들은 털가죽으로 만든 천막을 가지고 사철 물과 풀이 있는 온화하고 시원한 곳을 따라 옮겨다니고, 처음부터 일정한 도읍이 없었다. 그러나 고려는, 전대(前代)의 역사에 이미 기록되어 있는데,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살며, 농지가 작아 힘써 지어도 자급(自給)할 수 없으며 그 풍속은 음식을 절제하고 궁실(宮室)을 수축(修築)하기 좋아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왕이 거처하는 궁궐의 구조는 둥근 기둥에 모난 두공(頭工)으로 되었고, 날아갈 듯 연이은 대마루는 울긋불긋 문채나게 꾸며져 바라보면 담담(潭潭 깊고 넓은 모양)한 듯하고, 숭산(崇山) 등성이에 의지하여 있어서 길이 울퉁불퉁하고 걷기 어려우며, 고목(古木)이 무성하게 얽히어 자못 악사(嶽祠)․산사(山寺)와 같다.

지금 그 형상과 제도를 그리고, 그 명칭은 그대로 써 둔다.


왕부 王府

   왕부에는 내성(內城)이 둘려 있고, 열 세 군데의 문에는 각각 편액(扁額)이 걸렸는데, 방향에 따라 의의를 나타내었다. 광화문(廣化門)이 정동(正東)의 문으로 긴 거리와 통했고, 전문(殿門)은 15개인데 신봉문(神鳳門)이 가장 화려하다.

내부(內部)는 16부인데 상서성(尙書城)이 우두머리가 된다. 아홉 궁전은 모양이 같지 않은데 회경전(會慶殿)이 정침(正寢)이고, 세 각(閣)이 대치해서 있는데, 청연각(淸燕閣)이 웅장하고 화려하다. 또 작은 전(殿)이 있어 연거(燕居 한가로이 거처하는 곳)하는 곳으로 쓴다.


   날마다 편좌(便坐)에서 정사(政事)를 보는데, 오직 인욕(茵褥)을 탑(榻) 위에 깔았다. 국관(國官)이나 친시(親侍)들이 그 곁에 꿇고 늘어 앉아 왕의 분부를 받아 차례로 전달한다.

대신은 5일에 한번씩 알현(謁見)하는데 따로 정사를 의논하는 당(堂)이 있고, 나머지 관원들은 매달 1일과 15일 이외에 4차례 왕에게 알현하여 분부를 받는다. 분부 받을 일이 있으면 상주관(上奏官)이 문에 서서 받는데, 섬돌에 올라갔다 자리로 돌아갈 때는 언제나 신을 벗고 무릎 걸음으로 나아가고 물러가며, 궁정(宮廷)에서 추창(趨蹌 예도에 맞도로 허리 굽혀 빨리 걷는 것)할 때에는 반드시 왕을 향하여 절을 하니, 그 조심함이 이와 같다.

나머지 옥우(屋宇)에 있어서는 모두 초창(草創)한 것으로서 이름이 실제보다 과하여 상세히 기록할 것이 못되므로 가려서 그렸는데, 여타의 편(篇)에 섞여 보이기도 한다.


회경전 會慶殿

   회경전은 창합문(閶閤門) 안에 있는데, 따로 전문(殿門)이 있고, 규모가 매우 웅장하다. 터의 높이는 5장(丈)이 넘고, 동․서 양쪽의 섬돌은 붉게 칠하고, 난간은 동화(銅花 구리로 꽃무늬를 만든 것)로 꾸몄는데, 웅장하고 화려하여 모든 전(殿) 중에 제일이다.

양쪽 행랑은 모두 30간이고, 뜰안은 벽돌로 깔았는데 견고하지 못하여 다니면 소리가 난다.


   상례(常禮 보통의 예법) 때에는 감히 거처하지 않고 오직 사신(使臣)이 오게 되면 뜰아래에서 조서(詔書)를 받고 표문(表門)도 받는다. 연회(燕會) 때에는 정사와 부사의 자리를 전(殿)의 서영(西楹)에 동으로 향하여 차리고, 상절(上節)들은 동서(東序), 중절(中節)은 서서(西序), 하절은 문의 양쪽 행랑에 자리하여 북으로 향한다.

나머지 예식(禮式)은 딴 전(殿)에서하여 구별한다.


건덕전 乾德殿

   건덕전은 회경전의 서북쪽에 있는데, 따로 전문(殿門)이 있고, 그 제도는 5간으로 되어 회경전과 비하여 조금 작다.

예전에는 사신이 거기에 가면, 제3차 연회 때에 왕의 예(禮)가 더욱 근간하여 특별히 궁녀를 불러 모시도록 하고 그 속에서 잔치를 하였다 한다. 이번에 갔을 때에는 해(楷 인종의 이름)가 의복제도에 구애되어 시행하지 아니하고, 오직 회경전에서와 같이 수작(酬酌)하고 그쳤다.

만약 중국에서 보낸 자이면, 조정에서 보낸 사신이 아니고 군리(郡吏)로서의 사신이 통첩(通牒)을 가지고 가 명령을 전하더라도 역시 이 전에서 잔치하나, 다만 예의 절차에 차등이 있을 뿐이다.


장화전 長和殿

   장화전은 회경전 뒤 북으로 뻗은 하나의 멧부리에 있는데, 지형이 높고 험준하며, 모양과 제도가 더욱 좁아 건덕전만 못하다.

양쪽 행랑은 모두 탕장(帑藏 왕실의 창고)인데, 동쪽 행랑에는 성조(聖朝 송나라를 말한다)에서 내린 내부(內府)의 보물을 저장하고, 서쪽 행랑에는 그 나라의 금백(金帛) 따위를 저장한다. 경비하는 병졸이 다른 곳보다 더 많다.


원덕전 元德殿

   원덕전은 장화전 뒤에 있다. 지형이 더욱 높고 만듬새가 초라하다. 듣건대, 그 왕이 늘 거처하지 않고, 오직 이웃나라가 침범하거나 변방이 시끄러우면, 거기로 나아가 장수에게 명하여 군사를 출동시키게 하고 만약 중요한 인사(人士)를 죽이려면 친밀한 근신(近臣) 1~2인과 여기에서 의결(議決)한다고 한다.


만령전 萬齡殿

   만령전은 건덕전 뒤에 있는데, 터와 구조가 조금 작으나 문채나게 꾸며 화려하니, 이것이 침실이다. 비빈(妃嬪)과 시녀들이 양편 행랑에 방을 잇대어 빙 둘러 거처하는데, 숭산(崧山) 중턱에서 그 방안을 내려다보니 또한 그다지 넓지 않았다. 생각건대, 그 궁녀가 시녀의 수도 역시 그 방의 수와 같은 듯 싶었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6 권


궁 전 2 宮殿二


장령전 長齡殿

   장령전은 건덕전 동쪽 자문(紫門) 안에 있고 그 제도는 3간인데, 비록 화려함은 만령전(萬齡殿)만 못하나 규모는 크다.

매양 중국에서 사자가 고려에 가려면, 기일에 앞서 반드시 먼저 보내는 소개서(紹介書)가 있는데, 그 연락이 오면 여기에서 받는다. 고인(賈人)이 국경에 이르면 관원을 보내어 맞아 위로하고, 사관(舍館)이 결정된 뒤에 장령전에서 그가 바치는 것을 받고서 그 값어치를 계산하여 방물(方物)로 두 배쯤 되게 보상한다.


장경전 長慶殿

   장경․중광(重光)․선정(宣政) 3 전(殿)은 옛 기록에 비록 그 이름이 실려있으나 지금 듣건대, 중광전․장경전을 중수하여 딴 전(殿)으로 바꾸었다 하니, 아마도 지금 전각(殿閣)을 세운 곳이 선정전으로서 곧 외조(外朝 군왕이 국정을 듣는 곳)인 것 같고, 이곳에서 세시(歲時)에 그 신하들과 모여서 연회를 베푼다. 왕의 탄일(誕日)에도 명절 이름을 붙였으니, 왕우(王俁)가 8월 17일 출생했으므로, 그 날을 ‘함녕절’(咸寧節)이라고 부른다.


   그 날은 공족(公族)․귀신(貴臣)․근시(近侍)들을 장경전에 크게 모으고, 중국 고인(賈人)으로 사관에 있는 사람에게도 역시 관원을 보내어 자리를 마련하되, 화․이(華夷 중국과 고려) 두 가지 음악을 쓰며 또한 치어(致語 임금에게 올리는 송덕문(頌德文))가 있다.

그들이 노래 부른 것을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지금 궁궐 숲에 서기 비치어 宮時端色照宮林

무르녹은 화기에 쌓인 음기 걷히었네 和氣濃濃破積陰

집집마다 향불 피워 국운을 빌고 香火千家祈國壽

두 나라 음악에 손인 마음 즐거우리

취기 돌자 햇살 주렴에 옮겼고,

춤을 끝낸 기생 머리 옥비녀가 삐딱. 舞罷花枝倒玉簪

부디 좋은 때 실컷 즐겨야 하니 須盡淸歡酬美景

술잔 크다 말고 조용히 드세. 慫容莫訴酒杯深



연영전각 延英殿閣


   연영전각은 장령전(長齡殿) 북쪽에 있다. 제도와 대소(大小)는 대략 건덕전(乾德殿)과 같은데, 왕이 여기에서 진사(進士)들을 친히 시험 보인다. 그 북쪽의 것을 또 자화전(慈和殿)이라고 하는데, 역시 연회하는 곳이다.

앞에 3각(閣)을 세웠는데 ‘보문각’(寶文閣)이라고 하는 곳에는 열성(列聖 중국의 여러 임금들)이 내린 조서(詔書)를 간직했고, 서쪽 것은 ‘청연각’(淸燕閣)이라고 하는데 여러 가지 사기와 자․집(子集 제자(諸子)와 백가(百家)의 문집)을 간수했다. 일찌기 그 청연각의 기문(記文 문체의 하나로서 그 건물의 사적이나 경치를 적은 글)을 구득했는데, 그 글은 이러하였다.


   개부의동삼사 수태보 겸문하시랑 감수국사 상주국 강릉군개국후 식읍일천삼백호 식실봉삼백호(開府儀同三司守太保兼門下侍郞監修國史上柱國江陵郡開國候食邑一千三百戶食實封三百戶) 신(臣) 김 (金緣)은 봉교(奉敎)하여 찬(撰)하고, 통봉대부 보문각학사 좌산기상시 상호군 당성군개국남 식읍삼백호 사자금어대(通奉大夫 寶文閣學士 左散騎常侍 上護軍 唐城郡開國男 食邑三百戶 賜紫金魚袋) 신(臣) 홍관(洪灌)은 봉교하여 비문(碑文)을 쓰고 아울러 전액(篆額)했다.


   왕께서는 총명하고 슬기로우며 독실하고 빛난 덕으로, 유술(儒術)을 숭상하고 화풍(華風 중화풍속)을 흠모하기 때문에, 대내(大內)의 옆과 연영서전(延英書殿)의 북쪽과 자화전(慈和殿)의 남쪽에 따로 보문․청연 두 각(閣)을 지어 송(宋)나라 황제(皇帝)의 어제(御製 임금이 지은 글)․조칙(詔勅)․서화(書畵)를 모셔 놓고, 계시하여 훈칙으로 삼았으며 반드시 용의(容儀)를 엄숙하게 한 뒤에 절하고 우러러보았다.

   한결같이 주공(周公)․공자․맹자․양웅(揚雄)이래의 고금 서적을 모아놓고 날마다 노사(老師)․숙유(宿儒)들과 선왕(先王)의 도를 토론하여 부연하며 배우고 닦고 익히니, 집[堂] 밖을 나갈 것도 없이 삼강(三綱)․오상(五常)의 교화와 성명(性命)․도덕의 이치가 사방에 흘러 퍼졌다.


   그리하여 금년(고려 예종12 1117) 여름 4월 갑술일에 특별히 수태부 상서령 대방공(守太傅尙書令帶方公) 신(臣) 보(俌), 수태부 상서공 태원공(守太傅尙書公太原公) 신 효(효), 수태보 제안후(守太保 齊安候) 신 서(서), 수태부 통의후(守太傅通義候) 신 교(僑), 수태보 낙랑후(守太傅樂浪候) 신 경용(景庸)․문하시랑(門下侍郞) 신 위(偉), 문하시랑(門下侍郞) 신 자겸(資謙)․신 연(緣), 중서시랑(中書侍郞) 신 중장(仲璋), 참지정사(參知政事) 신 준(晙), 수사공(守司空) 신 지화(至和), 추밀원사(樞密院使) 신 궤(軌), 지추밀원사(知樞密院使) 신 자지(字之),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使) 신 안인(安仁) 등을 불러, 청연각에서 성대한 모임을 차리고서 조용히 이르기를,


   “돌아보건대, 덕이 부족한 몸인데 하늘이 내린 태평을 힘입어 종묘와 사직에 복이 쌓이고 3면의 변방에 병란(兵亂)이 일지 않고, 글과 법이 중하(中夏)와 같게 되었다. 무릇 정책을 세워 일을 하여감과 대소간(大小間)의 행사를 중국에 자품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리고 숭녕(崇寧 송나라 휘종의 연호)․대관(大觀 송나라 휘종의 연호) 이래로 시행하고 주조(注措)하는 방법과 보문각(寶文閣) 경연(經筵)에 선비들을 맞아들이는 것은 선화(宣化 송나라 휘종의 연호) 때 제도를 따른 것이요, 깊숙한 궁궐 조용한 자리에 재상들을 인견(引見)함은 태청(太淸 양무제(梁武帝)의 연호)의 연회를 법받은 것이니, 비록 예(禮)는 차등이 있다 하더라도, 어진 사람을 우대하고 재능있는 사람을 높이는 뜻은 한가지다.

지금 입조(入朝 송나라에 조회하러 가는 것)했던 진공사(進貢使) 자량(資諒)이, 계향(桂香)․어주(御酒)․용봉(龍鳳)․명단(茗團 송나라 차[茶])․진과(珍菓) 보명(寶皿)을 가지고 돌아왔기로, 아름답게 여겨 경들과 함께 이 훌륭하고도 아름다움을 즐기고자 하노라.“


   하니, 신하들이 모두 황송하고 송구스러워 섬돌에 몰려가 엎드리며,

“고루(固陋)한 몸이라 감히 훌륭한 예에 참여할 수 없읍니다.”

하고 사양하니, 왕이 곧 도로가 앉도록 하고, 온화한 안색으로 대접하며 각가지 음식을 갖추어 먹였는데, 거기에 차려놓은 그릇과 잔이나 접시에 담긴 음식과 각가지 과일은,30)육상(六尙)의 이름난 진품과 사방의 맛좋은 것들이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또한 상국(上國)의 파리(玻璃 유리)․마노(瑪瑙 보석)․비취(翡翠)․서시(犀兕 무소의 뿔이나 가족을 말한다)와 기괴하여 애완(愛玩)스러운 물건들을 상 위에 진열하여 놓고 훈(壎)․지(篪)․강(椌)․갈(楬)․금슬(琴瑟)․종(鍾)․경(磬)의 즐겁고 단아한 곡조로 당(堂) 아래서 합주(合奏)하도록 하고, 왕이 잔을 들고서 근신(近臣)을 시켜 권하며 이르기를,

“군신의 사이는 오직 지성으로 하여야 하는 것이니, 각기 양대로 사양하지 말고 마셔라.”

하니, 좌우 신하들이 재배(再拜)하면서 감사함을 아뢰고 잔을 비웠다. 그리고는 잔을 올리기도 하고 혹은 받기도 하여 화락한 즐거움이 매우 흡족하였다.


   술잔이 9번 돌게 되자, 잠시 물러가 쉬도록 하였다가, 이어서 궁중 귀인(貴人)들로 습의(襲衣)와 보대(寶帶)를 가져다가 내리도록 하여, 그 후의(厚意)를 표시하였다.

그러고 나서 다시 불러 자리에 앉기를 재촉하고, 음식 먹고 행동하기를 각기 편리한 대로 하도록 하므로, 더러는 마음을 터놓고 담소하기도 하고 더러는 눈망울을 굴려 관람하기도 하였다. 난간 밖에는 돌을 쌓아 산을 만들고 뜰가에는 물을 끌어다가 못을 만들었는데, 오만 가지로 우뚝우뚝한 산과 사방에 고여 있는 맑은 물은 동정호(洞定湖)와 오(吳)나라 회계산(會稽山) 같은 그윽한 흥취를 불러일으키니, 잔치가 끝나도록 더위를 잊고 취하도록 몹시 마시다가 밤이 깊어 파했다.


   이에 진신(搢神) 사대부(士大夫)들이 모두 흔연(欣然)하게 기쁜 기색을 띠며 서로 말하기를,

“우리 왕께서는 인자와 검소를 보배로 삼고 넘치는 행동이 없으며, 옷은 문수(文繡)를 입지 않고 그릇은 조각한 것을 쓰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한 사람이라도 곳을 얻지 못하고, 한 가지 일이라도 법도에 맞지 않을까 하여, 날마다 소의간식(宵衣旰食)31)하는 중에도 노심 초사하여 가엾게 여기고, 반대로 군신(群臣)과 귀한 손님에게 잔치 대접함에 있어서는, 내부(內附)에 간수했던 진귀한 것과 상국(上國)에서 특별히 은사(恩賜)한 것까지 다 털어, 하루가 다 가도록 놀고 밤에까지 계속하고도 오히려 만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니, 어진이를 존대하고 예를 중하게 여기며 선(善)을 좋아하고 권세를 망각하는 마음이, 실로 역대의 왕들보다 뛰어나게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하였다.


   듣건대, 옛날 노(魯)나라 임금이 천자의 예악으로 풍속을 교화하였기 때문에, 반궁(泮宮)에서 선생(先生)과 군자(君子)가 같이 즐겼는데, 그 시(詩)에 이르기를 ‘노후가 와서 반궁에서 술을 마시누나! 이미 좋은 술 마셨으니 길이 장수하리로다.’ (「시경」 노송(魯頌)에 있다)하였고, 노침(路寢 임금이나 제후가 정사를 보던 곳)에서 잔치하면서는 대부(大夫)와 서사(庶士)가 같이 서로 즐겼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노후가 잔치차려 기뻐하니 대부와 서사도 즐거워하는구나! 나라를 가지고 있으니 이미 많은 복을 받음이로다.’ (「시경」 노송(魯頌)에 있다)하였다 한다.


   지금 우리 임금께서도 천자(天子 송나라 임금을 말한다)의 은의(恩意)를 받들어, 신하들을 총애로 대우하였다. 그러므로 공경대부(公卿大夫)들은 천보32)시(天保詩)와 같이 임금에게 보답할 뜻을 갖고, 언어(言語 왕의 측근 관리)․법종(法從)은 ‘아유가빈’(我有嘉賓)33)의 시(詩)를 부(賦 노래부름)하고, 고사(瞽史) ․ 가공(歌工)은 군신(君臣)이 같이 즐기는34)음악을 연주하여, 환희(歡喜)가 서로 교환되고 예의가 법도에 맞게 되었다.


   이때에 있어, 사람과 신령의 화락함, 천지의 아름다운 감응, 상하가 베풀어 주고 보답하는 것, 풍속을 교화시키는 근본이 모두 화락하게 음식을 들며 담소(談笑)하는 속에서 나오게 되었으니, 어찌 길이 늙지 않고 많은 복을 받는 다는 것에 그칠 뿐이겠는가? 반드시 억만년토록 태평한 복을 누리며, 천자(天子 송나라 임금을 말한다)의 한없는 아름다움을 대양(對揚 천자의 명을 받들어 백성에게 칭양하는 것)할 것이다.

신은 우매하고 졸렬한데도 만행(萬幸)한 때를 만나 변변치 못한 재능으로 재부(宰府)를 맡고 있는데, 신을 못났다 아니하고 특별히 글을 지으라는 명령이 있기에 사양했으나 허락하여 주지 않으므로 삼가 머리 조아리고 두 번 절하며 억지로 ‘기’(記)를 짓는다.


임천각 臨川閣

   임천각은 회경전(會慶殿) 서쪽, 회동문(會同門) 안에 있다. 집은 네 기둥으로 되었고 창문이 툭 트였으나 밖이 겹처마로 되어 있지 않아 자못 대문(臺門)과 같은데, 연회하는 곳이 아니다. 그 안에는 서책 수만 권이 간직되어 있을 뿐이다.


장경궁 長慶宮

   장경궁은 왕부(王府) 서남쪽 유암산 등성이에 있다. 두 개의 조그만 길이 있는데 북으로는 왕부와 통하고 동으로는 선의문(宣義門)과 통하며 긴 거리에는 낡은집 몇 채가 있다. 왕옹(王顒)의 여러 자매가 그 속에서 살았는데, 뒤에 시집가고 드디어 그 곳을 비워 두었으므로 황폐가 더욱 심했다. 왕우(王俁)가 병이 위독하여 거기에 가 치료했는데, 마침내 치유하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따라서 제사 모시는 사당으로 삼았다. 왕우를 모시던 궁녀와 그의 옛 관속 수십인이 지킨다.


좌춘궁 左春宮

   좌춘궁은 회경전의 동쪽 춘덕문(春德門) 안에 있다. 왕의 적장자(嫡長子)가 처음으로 책봉(冊封)되면 세자(世子)라 하고, 관례(冠禮 성인이 되는 예식)를 하고 난 뒤에는 여기에 거처하는데, 옥우(屋宇)의 제도는 왕궁(王宮)만 못하다.

대문의 편액은 ‘대화’(大和)라고 했고, 다음은 ‘원인’(元仁), 그 다음은 ‘육덕’(育德)이라고 했다.

일 보는 집은 편액이 없고, 들보와 기둥은 길고 크며, 병풍 위에는 <문왕세자편(文王世子篇)>이 씌어져 있었다. 또한 관속(官屬) 십수 인을 두었다.

우춘궁(右春宮)은 승평문(昇平門) 밖 어사대(御史臺) 서쪽에 있는데, 왕의 자매와 여러 여인이 거처한다.


별궁 別宮

   왕의 별궁 및 그 자제들이 거처하는 곳을 모두 궁이라 한다. 왕의 모․비(母妃)와 자매 중에 따로 사는 사람은 궁(宮)과 전토(田土)를 받으며, 탕목(湯沐)도 받는데, 더러는 비워 두고 거처하지 아니하며, 민간에게 이득을 보게 하여 세금을 바치도록 한다.

계림궁(鷄林宮)은 왕부(王府) 서쪽에 있고 부여궁(拊餘宮)은 유암산(由巖山) 동쪽에 있으며, 또한 진한(辰韓)․조선(朝鮮)․상안(常安 타본에는 장안(長安))․낙랑(樂浪)․변한(卞韓) 등 6궁이 성안에 나뉘어 배치되어 있는데, 모두 왕의 백숙(伯叔)․곤제(昆弟)가 거처하는 곳이다. 왕의 계모(繼母)가 거처하는 궁을 적경궁(積慶宮)이라 한다.


   지금 공족(公族)으로는 현달한 자리에 있는 사람을 볼 수 없고, 별궁은 10채에 9채는 비어 있다. 그 전토를 과거는 수창궁(壽昌宮)에서 관할했는데, 지금은 모두 왕부에 소속되었고 또한 관원을 두어 관장하게 한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7 권


관복 冠服

   동이(東夷)의 풍속은 머리를 자르고 문신(文身)하며, 이마에 문신35)하고 발이 교차한다36)[雕題交趾]고 한다. 그런데 고려는 기자(箕子)를 봉했을 때부터 이미 밭갈이와 누에치기의 이로움을 가르쳤으므로 마땅히 의관(衣冠)의 제도가 있었을 것이다.

한사(漢史)에, 그 공회(公會)할 때의 의복은 다 비단에 수놓고 금과 은으로 이를 장식하되, 대가(大加)․주부(主簿)는 책(幘)을 쓰는데 관(冠)과 같고, 소가(小加)는 절풍건(折風巾)을 쓰는데 변(弁)과 같다고 하였으나, 이것이 어찌 상(商 중국 고대 은나라의 처음 이름)이나 주(周)의 관(冠)과 변(弁)의 제도를 모방해서 그렇겠는가? 당(唐) 나라 초에 차츰 오채(五采)의 옷을 입어 백라관(白羅冠)을 쓰고, 혁대(革帶)에는 다 금이나 옥으로 장식하였더니, 우리 송 나라에 이르러 해마다 신사(信使)를 보내므로 자주 왕이 옷을 내려 점차 우리 중국풍에 젖게 되고, 천자의 총애를 입어 의복의 제도가 크게 갖추어지고 우리 송의 제도를 따르게 되었으니, 다만 변발(辮髮)을 풀고 좌임(左袵)을 덜었을 뿐만이 아니다.

그러나 관직명이 일정하지 않고 조정에서 입는 옷과 집에서 입는 옷이 혹, 우리 송의 제도와 다른 것이 있으므로, 이를 들어 관복도(冠服圖)37)를 그린다.


왕복 王服

   고려왕은 상복(常服)에는 높은 오사모(烏紗帽)에 소매가 좁은 상포(緗袍 담황색(淡黃色) 포)를 입고, 자라(紫羅)로 만든 넓은 허리띠38)[勒巾]를 띠고 이 허리띠는 사이사이에 금실과 푸른 실로 수를 놓았다. 나라의 관원(官員)과 사민(士民)이 모여 조회(朝會)할 때에는 복두(幞頭)를 쓰고 속대(束帶)를 띠며, 제사지낼 때에는 면류관(冕旒冠)을 쓰고, 옥규(玉圭)를 든다. 다만, 중국의 사신이 가면 자라(紫羅)의 공복(公服)을 입고, 상아(象牙)로 만든 홀(笏)을 들고 옥대(玉帶)를 띠고, 행례의 범절이 아주 신절(臣節)에 조심한다. 혹 평상시 쉴 때에는 검은 건[烏巾]에 흰 모시[白紵] 도포를 입으므로 백성과 다를 바 없다 한다.


영관복 令官服

   고려의 관제는 당(唐)나라 무덕(武德 당(唐) 고조(高祖)의 연호) 연간에 아홉 등급[九等]이 있었다. 첫째는 대대로(大對盧)인데 나라 일을 총괄하고, 다음이 태대형(太大兄), 다음이 울절(鬱折), 다음이 태대부인사자(太大夫人使者), 다음이 의두대형(衣頭大兄)으로 기밀을 맡고 정사(政事)를 논의하여 병마를 보내는 일과 관작(官爵)을 주는 일을 맡았고, 다음이 대사자(大使者), 다음이 대형(大兄), 다음이 사자(使者), 다음이 상위사자(上位使者), 다음이 소형(小兄), 다음이 제과절(諸過節), 다음이 선인(先人)이며, 또 빈객(賓客)을 맡는 이가 있어 중국의39)홍로경(鴻矑卿)에 비할 수 있으니, 대부사자(大夫使者)로써 그 관리를 삼고, 또 국자감박사(國子監博士 정 7품벼슬), 통사사인(通事舍人 각문(閣門)의 정 7품벼슬) 전서객(典書客)이 있는데, 다 소형(小兄) 이상으로 관리를 삼는다.


   또 여러 큰 성에는 욕살(傉薩)을 두었는데, 중국의 여러 독부(督府)40)에 비할 수 있으며, 여러성에는 처려근지[處閭近支]를 두었는데, 이는 중국의 자사(刺史)에 비할 수 있는 것으로, 또는 도사(道使)41)라고도 이르고 무관(武官)에는 대모달(大摸達)이 있는데 이는 위장군(衛將軍)에 비할 수 있는 것으로 조의 두대형(皀衣頭大兄) 이상이라야 될 수 있으며, 다음은 말객(末客)인데 중랑장(中郞將)에 비교되는 것으로 대형(大兄) 이상으로 그를 삼고, 그 다음은 영천인(領千人)인데 이하 각기 등차(等差)가 있다. 이제 그 관(官)의 이름이나 공훈[勳秩]의 품계가 혹 중국을 모방하고 있으니, 누가 그 사유를 물으면 곧 개원(開元 당 현종의 연호) 고사(故事)를 쓰고 있다고 한다. 그 의관(衣冠)에 있어서도 또한 혹 비슷한 것이 있다. 전세(前世) 고구려의 신하의 복식이 청라(靑羅)로 관을 하고 강라(袶羅 붉은 나)로 이(珥 원래는 귀걸이이지만, 여기서는 귀를 싸는 장식)를 하고 새깃[鳥羽]으로 장식하더니, 요즈음은 나라의 관원들이 거의 다 자주 무늬가 있는 엷은 나의 포[紫文羅袍]를 입고 비치는 깁으로 만든 복두(복두)를 쓰며, 허리에는 옥띠[玉帶]를 띠고, 금어(金魚)42)를 차되, 관이 태사(太師)․태위(太尉)․중서령(中書令)․상서령(尙書令)인 자가 입는다.


국상복 國相服

   국상(國相)의 복색은 자문나포(紫文羅袍)에 둥근 문양이 있는 금띠[毬文金帶]를 띠고 이에 금어대(金魚帶)를 차는데, 시중(侍中), 태위(太尉), 사도(司徒), 상서(尙書)・중서문하시랑(中書門下侍郞 정2품)・평장사(平章事)・참지정사(參知政事 종2품)・좌우복야(左右僕射 정2품)・정당문학(政堂文學)・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추밀사(樞密使 종3품)・동지원주사(同知院奏事) 등의 관원들도 모두 이를 입는 것을 허락해 준다.


근시복 近侍服

   근신[近侍]의 복색은 자문나포(紫文羅袍)에 구문금대(毬文金帶)를 띠고 이에 금어대(金魚帶)를 차는데, 좌우상시(左右常侍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정3품 벼슬)・어사대부(御使大夫), 좌・우승43)(左右丞), 육상서44)(六尙書)․한림학사(翰林學士 한림원(翰林院)의 학사(學士), 정3품 벼슬)․승지학사(한림원의 학사승지(學士承旨), 정3품 벼슬) 이상 및 지대국조사명 접반관(祗待國朝使命接伴官)과 관반관(館伴官) 등이 다 입는다.


종관복 從官服

   종관의 복색은 자문나포(紫文羅袍)에 어선금대45)(御仙金帶)를 띠니, 어사중승(御史中丞 어사대(御史臺)의 중승, 종4품)․간관(諫官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좌․우 간의대부, 정4품)․급사(給事 종4품)․시랑(侍郞 육부(六部)의 정4품 벼슬), 주(州)․목(牧)의 유수(留守)와 사(使)․부사(副使)․합문집찬(閤門執贊 합문의 집찬벼슬, 종4품)․육상직관(六尙直官)․도지병마46)(都知兵馬)․사부호사47)(四部護使) 등과 특별한 은수(恩數 훈공에 의하여 왕의 특별한 은영(恩榮)을 입는것)를 입은 자가 다 입으며, 왕의 세자(世子) 및 왕의 형제도 또한 그러하다.


경감복 卿監服

   경감의 복색은 비문나포(緋文羅袍)에 붉은 가죽 바탕의 무소 뿔의 띠[紅鞓犀帶]를 하고, 이에 은어대(銀魚帶)를 차니, 육시경이48)(六寺卿貳)․성부승랑(省部丞郞), 상서도성(尙書都省)과 육부(部)의 승과 낭(郎))․국자유관(國子儒官 국자감(國子監)의 유관이 사업(司業))․비서전직(秘書典職 비서성(秘書省)의 감(監)․소감(少監) 등) 이상은 다 이를 입는다.


조관복 朝官服

   조관의 복색은 비문나포를 입고 흑정각대(黑鞓角臺)를 띠고, 은어대(銀魚帶)를 차니, 사업박사(司業博士 국자감(國子監)의 종4품 벼슬․사업(司業))와 사관교서(史館校書 직사관(直士館)(정9품)벼슬), 태의(太醫)․사천(司天)의 두 성(省)의 녹사(綠事 정9품) 이상은 다 이를 입는다. 그 계(階)나 관(官)은 또한 햇수를 따지며, 반드시 그 계나 관을 옮긴 뒤에야 갈아 입는다. 관반(館伴 사신의 접대관)이 중국의 사신을 관(館)에서 뵐 때에는 각기 두 사람의 비포(紕袍)를 입은 자를 두어 앞을 인도하게 하는데, 다만 어대(魚袋)를 차지 않으니, 마땅히 이것은 중국의 주의쌍인(朱衣雙引 향도(嚮導)하는 관원은 붉은 옷을 입었으므로 주의리(朱衣吏)라고도 한다)의 제도를 본받은 것이라 생각된다.


서관복 庶官服

   서관(庶官 6품(六品) 이하의 하급관원)의 복색은, 녹의(綠衣 서관의 옷은 포(袍)라 하지 않고 의(衣)라 하였다)에 목홀(木笏)을 들고, 복두(幞頭)를 쓰고, 검은 가죽띠[烏鞓]를 띠니, 진사(進士)로 입관(入官)한 때로부터 성조(省曹)의 보리(補吏)나 주현(州縣)의 영위49)(令尉)․주부(主簿 각 관아의 종7품 종8품의 주부(注簿) 벼슬인 듯함.)․사재(司宰 사재감(司宰鑑)의 벼슬인듯함.) 등이 다 이를 입는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8권


인 물 人物

   동남쪽의 이적(夷狄)들 중에는 고려의 인재(人材)가 가장 왕성하다. 나라에 벼슬하는 자라야 귀신(貴臣)이 되며 족망(族望)으로 서로 겨루고, 나머지는 혹 진사(進士)를 하여 뽑히거나 혹 재물을 바치고 되기도 하는데, 세록(世祿)50)받는 이직(吏職)까지도 등급이 있으니, 그러므로 직(職)이 있고 계(階)가 있고 훈(勳)이 있고 사(賜)가 있고 검교(檢校)가 있고 공신(功臣)이 있고 여러 위(衛)가 있다.

이것은 본조(本朝)의 괸제를 고찰하여 본받되 개원(開元 당 나라 현종(玄宗)의 연호)의 예(禮)를 참작하여 한 것이다. 그러나 명실(名實)이 맞지 않고 청탁(淸濁)이 혼동되어 한갓 형식에 불과하다.


   이번에 사자가 국경에 들어가매, 모든 신하들 중에 현명하고 민첩한 자들을 가리어 영접하는 예절을 맡겼는데, 주목(州牧) 중에는 형부시랑 지전주(刑部侍郞知全州) 오준화(吳俊和), 예부시랑 지청주(禮部侍郞知靑州) 홍약이(洪若伊)․호부시랑 지광주(戶部侍郞知廣州) 진숙(陳淑)이 맡았고, 맞아 위로하고 전송하는 일은, 은청 광록대부 이부시랑(銀靑光祿大夫吏部侍郞) 박승중(朴昇中), 개부의 동삼사 수태보 중서시랑 중서문하평장사(開府儀同三司守太保中書侍郞中書門下平章事) 김약온(金若溫), 개부의 동삼사 수태보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開府儀同三事守太保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최홍재(崔洪宰), 개부의 동삼사 수태보 문하시랑 겸중서문하평장사(開府儀同三司守太保門下侍郞兼中書門下平章事) 임문우(林文友),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척준경(拓俊京)․이자덕(李資德)이 맡았었는데, 이들은 모두 왕의 근신이다.


   왕부(王府)에서의 4차례 연회를 제한 외에는 이들과 같이 잔치하며 담소하였는데 화락한 분위기였다.

사적(私적 사사로이 임금과 만나는 것)과 송유(送遺 선사)는, 호부시랑(戶部侍郞) 양인(梁鱗)과 김유간(金惟揀), 형부시랑(刑部侍郞) 임경청(林景淸), 공부시랑 노영거(盧令거), 중시대부(中侍大夫) 황군상(黃君裳), 공부낭중(工部郎中) 정 준(鄭俊), 좌사낭중(左司郎中) 이지보(李之甫), 전전승지(殿前承旨) 임총신(林寵臣), 조산랑 비서승(朝散郞秘書承) 김단(金端), 합문사(閤門使) 김 보신(金輔臣),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 이영지(李潁之)와 조기(曹祺), 내전숭반(內殿崇班) 호인영(胡仁潁), 인진사(引進使) 왕 의(王儀), 합문지후(閤門祗候) 고당유(高唐愈)와 민 형(閔仲衡), 통사사인(通事舍人) 이 점(李漸)과 양문구(梁文矩), 중위랑(中衛郞) 유 급(劉及), 중량랑(中亮郞) 팽 경(彭京), 충훈랑(忠訓郞) 왕 승(王承), 성충랑(成忠郞) 이준기(李俊琦)와 김세안(金世安), 보의랑(保義郞) 이준이(李俊異), 승절랑(承節郞) 허 의(許宜)․하 경(何景)․진언경(陣彦卿)이 맡았으며, 전명(傳命)하고 찬도(찬導 안내)함은, 정의대부 예부상서(正議大夫禮部尙書) 김부일(金富佾), 통의대부 전중감(通議大夫殿中監) 정 담(鄭覃), 상서(尙書) 이 도(李도), 중량대부 지합문사(中亮大夫知閤門事) 심안지(沈安之), 중량대부 합문부사(中亮大夫閤門副使) 유문지(劉文志), 합문인진사(閤門引進使) 김 원(金義元),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 심 기(沈起)․왕 수(王 洙)․김 택(金澤)․이예재(李銳材)․김순정(金純正)․황 관(黃觀)․이 숙(李淑)․진 적(陳迪), 합문지후(閤門祗候) 윤인용(尹仁勇)․박 승(朴承)․정택(鄭擇)․진 칭(陳칭), 통사사인(通事舍人) 이덕승(李德承)․오자여(吳子璵)․탁 안(卓安)이 하였는데, 모두 재능(才能)과 언변과 박식으로 뽑혀 이 일을 맡았다.


   상면할 때부터 돌아올 때까지 같이 서로 연락(燕樂)하고 유관(游觀)하였는데, 그들의 읍손(揖遜 인사범절)하는 거동이 절차있고 화락하여 볼만한 데가 있었다.

   지금 우선 이 자겸(李資謙) 이하부터 그형상을 그린 것이 5사람인데, 아울러 그 족망(族望)까지 설명을 하겠다.


수태사상서령 이자겸 守太師尙書令李資謙

   고려는 본래부터 족망(族望)을 숭상하고 국상(國相)은 거개 훈척(勳戚 나라에 공이 있는 임금의 친척)을 임용한다. 왕 운(王運)으로 부터 이씨(李氏)의 후손에게 장가들었는데, 왕 우(王俁)도 세자(世子) 때에 또한 이씨의 딸을 맞아 비(妃)로 삼았다.

이로 말미암아 문호(門戶)가 빛나고 드러나기 시작하여, 자겸의 형 자의(資義)가 전대(前代) 왕 때에 이미 국상이 되었다가 일에 연좌되어, 유찬(流竄 귀양보내는 것)되었기 때문에 자겸이 형의 일을 경계삼아 매양 스스로 조심하였으므로, 왕 우가 깊이 신임하고 중히 여겨 춘궁(春宮 세자)의 스승이자 벗을 삼았다.


   이때 왕 해(王楷)가 아직도 어렸지만, 자겸이 박식하고 견문이 많은 선비 8인을 선발하여 지도하게 하였다. 이를테면 김 단(金端) 같은 무리는 그 무렵 본조(本朝)로부터 사제(賜第 임금의 명령으로 특별히 급제한 사람과 똑 같은 자격을 주는것)를 받고 귀국하였는데, 바로 이 선발에 참예되었다.

임인년(고려 예종(睿宗) 17, 1122) 여름 4월에 왕 우(王俁)가 죽으매, 여러 아우들이 다투어 서려고 했다. 이에 앞서 왕 옹(王옹)이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왕 우가 맏이었다.


   자겸이 이미 왕 해를 세웠는데, 중부(仲父) 대방공(帶方公) 보(보)가 그 왕위를 탈취하려고 하여 드디어 문하시랑(門下侍郞) 한 교여(韓교如)․추밀사(樞密使) 문 미(文公美)와 더불어 불궤(不軌  반역)를 음모하니, 예부상서(禮部尙書) 이 영(李永)․이부시랑(吏部侍郞) 정극영(鄭克永)․병부시랑(兵部侍郞) 임 존(林存) 등 10여 인이 내응(內應)하기로 했었었는데, 미처 거사하기 전에 음모가 누설되매, 곧 체포하여 하옥(下獄)하였다. 자겸이 이에 왕에게 풍간(諷諫)하여 보를 해도(海島)에 추방하고 여러 악인들을 베었으며 여당(餘黨) 수백 인을 잡아들였기 때문에, 변란을 안정시킨 공으로 태사(太師)로 승진시키고 식읍(食邑)과 채지(采地)를 더 주었으며 벼슬이 상서령(尙書令)에 이르렀다.


   자겸은 풍모(風貌)가 의젓하고 거동이 화락하고 어진이를 좋아하고 선(善)을 즐겁게 여겨, 비록 정권을 장악하고 있으면서도 자못 왕씨(王氏)를 높일 줄 알아서, 이적 중에서는 능히 왕실을 부장(扶獎)하는 자이니, 역시 현신(賢臣)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참소를 믿고 이득을 즐기며 전토(田土)와 제택(第宅)을 치장하여 전답이 연달아 있고 집 제도가 사치스러웠고, 사방에서 궤유(饋遺 선물)하여 썩는 고기가 늘 수만 근이었는데, 여타의 것도 모두 이와 같았다. 나라 사람들이 이 때문에 비루하게 여겼으니 애석한 노릇이다.


접반 정봉대부 형부상서 주국 사자금어대 윤언식 接伴正奉大夫刑部尙書柱國賜紫金魚袋尹彦植

   윤씨는 원래 유학(儒學)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윤 관(尹瓘)이 왕 우(王우) 때에 중추부사(中樞府事)가 되어 일찌기 조공하러 중국에 왔었는데, 언식은 곧 그의 아들이다. 대대로 이씨(李氏)들과 혼인했고, 또한 이자겸(李資謙)과 퍽 좋게 지냈다. 왕 해(王楷)가 세자로 있을 때 언식도 역시 인익(引翼 인도하고 보익하다)의 반열(班列)에 참여하였었기 때문에, 왕 해가 즉위한 뒤 높고 귀한 벼슬에 승진되었다.

언식은 풍채가 아름답고 자질이 훤칠하여 완연(宛然)히 유자(儒者)의 기풍이 있어, 오랑캐로 대할 수 없었다.


동접반 통봉대부 상서예부시랑 상호군 사자금어대 김부식 同接伴通奉大夫尙書禮部侍郞上護軍賜紫金魚袋金富軾

   김씨는 대대로 고려의 큰 씨족이 되어 전사로부터 이미 실려 오는데, 그들이 박씨(朴氏)와 더불어 족망(族望)이 서로 비등하기 때문에, 그 자손들이 문학(文學)으로써 진출된 사람이 많다.

부식은 풍만한 얼굴과 석대한 체구에 얼굴이 검고 눈이 튀어 나왔다. 그러나 널리 배우고 많이 기억하여 글을 잘 짓고 고금 일을 잘알아, 학사(學士)들에게 신임과 복종을 받는 것이 능히 그보다 앞설 사람이 없다.

그의 아우 부철(富轍)은 또한 시(詩)를 잘한다는 명성이 있다. 일찌기 그의 형제들의 이름 지은 뜻을 넌지시 물어 보았는데, 대개 사모하는 바가 있었다.


관반 금자광록대부 수사공동지추밀원사 상주국 김인규 館伴金紫光祿大夫守司空同知樞密院事上柱國金仁揆

   김경융(金景融)은 왕 옹(王옹) 때의 태부 수중서령(太傅守中書令)이니, 인규는 곧 그의 아들이다. 옹의 아버지 휘(徽)가 일찌기 김씨의 딸을 맞이하였으니, 왕 해(王楷)가 인규를 원구(元舅)로 존대할 분의가 있다.

한교여(韓교如) 등이 반역하였을 때, 이자겸(李資謙)이 왕 해를 도와 여러 반역 도당을 베었는데, 인규가 참여하여 공력이 있었기 때문에, 사공(사空)으로 벼슬을 올리고 중추부(中樞府)에 있도록 했다.

인규는 늘씬하고 수염이 아름답고 모습이 훤칠하고 준수하며, 행동도 단정하고 장중하므로, 선발하여 사신을 접대하게 한 것이다.


   동관반 정의대부 수상서 병부시랑 상호군 사자금어대 이지미 同館伴正義大夫守尙書兵部侍郞上護軍賜紫金魚袋李之美

   고려는 매양 중조(中朝)에서 사신이 가게 되면 반드시 인재(人材)를 선발하거나 혹은 조공(朝貢)갔던 사람으로 관반(館伴)을 삼는다.

지미는 곧 자겸의 아들인데, 풍채와 용모가 준수하고 아름답다. 언젠가 일찌기 천궐(天闕)에 입근(入覲)하고 관(館)에 머무는 여러 달 동안 관중에서 일어났언 모든 일을 지미가 처결하였는데 예(禮)에 맞지않게 하는 것이 없었고, 동작이 찬찬하고 단아하여 여유 작작하게 중화(中華)의 풍도(風度)가 있었으며, 매양 조정(朝廷) 일에 언급되면 반드시 권권(眷眷 마음이 늘 쏠리는 것)하게 쏠리는 뜻이 있었으니, 그의 충성이 또한 가상하다고 할 만했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9 권


의 물 1 儀物一

   여러 오랑캐 나라는 비록 임금이 있으나, 그 출입에는 정(旌 장목을 단 기)과 전(전 자루 위가 굽은 기) 십여 개가 따르는 데에 불과하여 신하붙이들과 거의 뚜렷한 분별이 없다. 다만, 고려는 본래 조빙(朝聘)을 통하여 오랫동안 중국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그 군신 상하가 거동할 적에 예문(禮文 예법의 명문)이 있으니, 왕의 순행(巡行)에 각기 의물(儀物)과 신기(神旗)가 있어, 선구(先驅)하는 갑사(甲士)가 사람이 오가지 못하게 길을 막고, 육위(六衛)51)의 군대가 각기 그 의물을 잡고 가니, 비록 다 전례(典禮)에 맞지는 않으나, 다른 여러 오랑캐에 비하면 찬연히 빛나 볼 만하다. 이것이 공자(孔子)가 살고 싶다 하고 더럽다 하지 않은 이유이다. 더구나, 고려는 기자(箕子)의 나라인데다가 성조(聖朝 송을 일컬음)의 권회(眷懷)함이 두터운 터이니 더욱 말할나위 있겠는가? 이제 아울러 그 의물을 아래에 그린다.


반리선 盤리扇

   반리선이 둘이니, 강라(絳羅 붉은 비단)로 만들어 붉은 자루[朱柄]에 금색으로 장식을 하고, 가운데에 단리(單리 한 마리의 작은 용)가 꾸불꾸불 굼틀거리는 그림을 수놓았는데, 그 제도가 뿔은 하나요 비늘은 없고, 그 모습은 용(龍)과 비슷하되, 대개 도롱뇽[蛟]이나 뿔 없는 용[ ]의 붙이이다. 왕이 행차할 때면 앞에 서서 금포(錦袍)를 씌워 바람을 막는데, 친위군(親衛軍)52)이 이를 잡고, 잔치할 때는 뜰 가운데에 세우되, 예(禮)가 끝나면 거둔다.


쌍리선 雙리扇

   쌍리선은 넷이다. 그 빛깔과 장식은 대략 단리(單리)와 비슷한데, 다만 수놓은 모양이 줄로 벌렸고, 예를 행할 때는 친위군이 이를 잡는다.


수화선 繡花扇

   수화선은 둘이다. 붉은 나[絳羅]로 만들어 붉은 자루[朱柄]에 금색으로 장식하고, 가운데에 모란꽃 둘을 수놓았는데, 부채의 모습은 이문선(이文扇)에 비하면 그 위가 조금 패어, 예를 행할 때는 이선(이扇)의 다음에 벌여 세우는데, 친위군이 잡는다. 삼색선(三色扇)은 그 너비가 2척이요, 높이가 4자요, 그 자루의 길이는 각각 10자가 된다고 한다.


우선 羽扇

   우선은 넷이다. 그 제도는 푸른깃[翠羽]을 모아 차차 엮어내려 아래를 은으로 장식하였는데, 모양이 문금(文禽) 같다. 여기에 황금(黃金)을 칠하여, 자못 화려한 문채가 나지만 다루기가 어렵고, 오래 되면 깃이 빠져 그 형상이 위가 모[方]지게 된다. 이제 그 완전한 형상을 그렸는데, 처음의 모습에서 오래되지 않은 것과 같으니, 거의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제도는 자루의 길이가 10자요, 부채의 너비가 1척 5촌, 높이가 2자다. 예를 행할때는, 금화곡각(金花曲脚)53)으로 장식한 복두와 비단옷[錦衣]을 입은 친위장군(親衛將軍)이 이를 잡게 한다.


곡개 曲蓋

   곡개(曲蓋)54)는 둘이다. 그 모양은 6모지고, 각기 유소(流蘇 내려뜨리는 장식물)가 있고, 붉은 나〔絳羅〕로 장식하고 위에 명주(明珠)와 금은을 섞어 장식하고 그 자루는 조금 굽었다. 왕이 출입할 때 그것을 받치지 않고 다만 위군(衛軍)이 이를 잡혀서 보(步) 앞에 가게 하는 것으로 의식을 삼는다. 그 만듦새는 높이 12자요, 너비 6자이다.


청개 靑蓋

   청개의 만듦새는 거의 중국과 같다. 안쪽은 붉은 나〔絳羅〕로 만들고, 넓은 폭을 아래로 늘이고, 또 노란 실로 짠 끈으로 장식했다. 듣건대, 보통 때는 다홍〔紅〕을 쓰나, 중국 사신이 오면 청라(靑羅)로 위를 가린다 한다. 대개 고려인은 다홍을 가장 귀히 여겨 국왕(國王)이 아니면 쓰지 못하는데, 이제 위를 덮는 것은 또한 중국 조정에 공순하여 사절(使節)에게 겸손하는 일단인가 한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0 권


의 물 2 儀物二

화개 華蓋

   화개의 제도는 문라(文羅)에 그림과 수(繡)를 섞어 꾸미고, 위는 육각(六角)이요 각기 유소(流蘇)가 나왔는데, 그 모양이 패환(佩環 패옥(佩玉)의 고리)과 같으며, 오채(五采 오색의 비단)로 드림을 가지런히 내렸는데 여기서 방울소리를 낸다. 그 뚜껑[蓋]은 세로가 세 자요 가로가 여섯 자요 길이가 25척이니, 대례(大禮)인 즉 금오장위군(金吾仗衛軍 8위(衛)의 하나)이 이를 잡고, 창합문(창闔門)밖에 서 있다.


황번 黃幡

   황번의 제도는 문양 있는 나[文羅]로 만들고, 위에 상운(祥雲 상서로운 구름)을 수놓고, 그 형상이 위를 뾰족하게 하고, 두 귀에 유소(流蘇)를 내렸는데, 흔들면 소리가 난다. 번(幡)의 머리에서 끝가지 길이가 9척이요, 넓이가 1척 5촌이요, 자루의 길이가 1장 5척이며, 대례(大禮) 때에는 화개(華蓋)와 나란히 세우는데 그것을 잡고 선 군인의 복식(服飾)도 한가지이다.


표미 豹尾

   표미55)의 제도는 창[矛]위에 꽂아 크고 작기가 같지 아니하며, 그 표범의 꼬리 모양에 따라 이를 취하니, 조서[詔]를 맞을 때는 천우위군(千牛衛軍)이 이를 잡고 앞에 섰으며, 문(門)에 이르면 동덕(同德)․승평(昇平) 두 문 사이에 세운다.


금월 金鉞

   금도끼의 제도는, 주부(住斧)와 비슷하되 장대의 끝에 나는 난조(鸞鳥)를 한 마리 세워, 갈 적에는 움직여 치켜오르는 형상을 하니, 왕이 거둥하면 용호친위군장(龍虎親衛軍將) 한 사람이 이를 잡고 뒤에 따른다.


구장 毬杖

   구장56)의 제도는 나무를 깎아 만들고, 은[白金]으로 이를 감싸되, 가운데에 조금 좋은 것은 구멍에 채수(采綬)를 꿰어 늘어뜨렸다. 대례(大禮)에는 산원교위(散員校尉) 10명이 이를 잡고, 회경전(會慶殿) 양쪽 층계 밑에 서 있다.


기패 旂旆

   기패의 제도는 강라(絳羅 붉은 깁)로 이것을 만들고, 서로 잇대어 대[竿]위에서 맺어 내려뜨리며, 또는 그 꼭대기에 흰깃[白羽]으로 장식을 하는 것도 있다. 군산도(群山島)부터 이미 보이며, 다만 영군(領軍)이나 집사(執事)하는 이에게 각기 내려준다. 대개 이를 빌어 지휘하는 물건이므로 위군(衛軍)은 기패를 소중한 물건으로 여기고 있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1 권


장 위 1 仗衛一

   고려 왕성(王城)의 장위는 다른 군(郡)에 비하여 가장 성대하고, 날랜 군사가 모두 모였으며, 중구의 사절이 이르면 이들을 모두 내어 영예로운 모양을 보인다.

그 제도는 인민이 16세 이상이면 군역(軍役)에 충당되는데, 그 육군(六軍 육위六衛)의 상위(上衛)는 항상 관부(官府)에 머무르고, 나머지 군사는 모두 전지[田]를 지급하여 생업에 종사하게 하였다가, 경(警 외국의 침입등 국가의 비상사태)이 있으면 무장을 하고 적지에 달려가고, 일을 맡게되면 또 그일에종사하며, 일이 끝나면 다시 전묘(田苗久)에 복귀하니, 우연하게도 옛날의 향민제도[鄕民之制]57)에 부합된다.


   처음 위 나라 때[魏世]의 고려(高麗 즉 고구려) 호수는 3만에 불과하더니, 당나라 고종(高宗 649∼683)이 평양(平壤)을 함락시켰을 때 수합한 군사가 30만이었고, 지금은 전세(前世) 에 비해 또 배가 증가되였다.

왕성에 머물러 숙위(宿衛)하는 군사는 항상 3만이며, 이들이 교대로 번(番)을 나누어 수비한다. 군사를 제어하는 방략58)은, 군(軍)에는 장(將)을 두고, 장에는 영(領)을 두고, 대오(隊伍)에는 정보(正步)를 두었으며 열(列)에는 등(等)을 두었다. 열은 육군(六軍)으로 되었는데 용호(龍虎)․신호(神虎)․흥위(興衛)․금오(金吾)․천우(千牛)․공학(控鶴)이며, 이를 나누어 양위(兩衛)를 만드니 좌위(左衛) 우위(右衛)이며, 이를 또 3등으로 구별하여 초군(超軍) 맹군(猛軍) 해군(海軍)이라 한다.


   경묵(黥墨 묵형(墨刑), 즉 먹물로 살갗을 뜨는 형벌) 하는 제도나 영둔(營屯)하는 거처는 없고, 오직 공적인 일에 사역되면 의복으로 구별할 뿐이다. 투구와 갑옷[鎧甲]은 아래위가 붙어 있는데 그 제도는 봉액(逢掖)59)과 같아서 형상이 궤이(詭異)하다. 금화 고모(金化高帽 모자위에 금화로 꾸민 戰帽)는 거의 2자[尺]이나 되고, 비단 옷과 푸른 도포[錦衣靑袍]에 헐렁하게 맨 띠[帶]는 사타구니[袴]에까지 드리우니, 대개 그 나라 사람은 키가 작아서 특별히 높은 모자와 비단옷[錦衣]을 입어 그 모양을 장하게 한 것이다. 이제 그림을 그려서 각각 그 명색(名色)을 뒤에 나열한다.


용호좌우친위기두 龍虎左右親衛旗頭

   용호좌우친위기두60)는 구문 금포(毬文錦袍 환상(環狀)무늬가 있는 비단도포)를 입고, 도금(塗金)한 띠를 띠며, 전각 복두(展脚幞頭 복두의 일종. 후면에 좌우 양 뿔이 있는 것)를 쓰니 대략 중국의 복식(服飾) 제도와 같다. 작은 깃발[小旗]을 가지고 육군(六軍)을 호령하니 이것이 군위(軍衛)의 대장(隊長)이다. 왕부(王府) 안에는 지키는 자가 두 사람뿐인데, 사자(使者 중국사신을 가리킴)가 오게 되면 한 사람을 병장(兵仗) 안쪽에 배치하여 말을 타고 앞서서 인도하게 한다. 이것은 사신을 대우하려고 공급하는 것으로서, 왕을 모시는 사람을 거둔 것이니, 예의가 이 정도면 가히 지극하다고 할 만하다.


신호좌우친위군장 神虎左右親衛軍將

   신호좌우친위군장도 또한 구문금포(毬文錦袍)에 도금한 띠를 띠며, 모두(帽頭)의 뿔을 꺽어 올려서 오른쪽으로 조금 굽게 구부렸는데, (즉 절각복두(折脚幞頭)를 말함) 금화(金化)로 장식하였다. 왕이 출입할 때에는 10여 인이 우선(羽扇 새깃으로 만든 부채.의장의 하나)과 금월(金鉞 금도끼. 의장의 하나)을 잡고 시종한다.


신호좌우친위군 神虎左右親衛軍

   신호좌우친위군도 구문 금포에 도금한 띠를 띠며 금화 대모(錦化大帽 금화로 장식한 큰 모자)를 썼는데, 붉은 띠를 더하여 턱 아래에 맨 것이 갓끈[紘纓] 등속과 같다. 그 만듦새는 매우 높아 바라보기에 우뚝하다. 옛날 제(齊) 나라 영녕(永寧)61)연간에 고려 사신이 왔을 때 궁고(窮袴 통이 좁은 바지)를 입고 거풍(拒風)을 썼었다. 중서랑(中書郞) 왕융(王融)62)이 이를 희롱하여 말하기를, ‘의복이 맞지 않는 것은 몸의 재앙이다. 머리에 쓴 것은 무슨 물건이오?’ 하니, 대답하기를 ‘이는 옛날 고깔[弁]의 유상(遺像)이오.' 하였다. 지금 높은 모자의 제도를 보니, 그 거풍의 풍속은 아직도 그런가보다.


흥위좌우친위군 興威左右親衛軍

   흥위좌우친위군은 분홍 무늬의 비단을 입었는데, 옷깃에 점점이 오색 모양의 꽃송이로 장식하였으며, 금화 대모를 쓰고, 흑서속대(黑犀束帶 검은 물소뿔로 만든 띠)를 띠었다. 왕의 좌우에 20여 인이 있는데 출동할 때에는 이문 수화(螭文繡化 뿔 없는 용 무늬와 수 넣은 꽃 무늬)의 대선(大扇 의장의 하나)과 곡개(曲蓋 자루가 굽은 일산(日傘). 의장의 하나)를 잡고 전후에서 호종한다. 평상복은 용호・신위 이하 모두가 보라색 모자[紫帽]를 썼는데 금식(금식)이 없다. 여러 위(衛) 가운데 이들의 인품만이 조금 헌칠하다.


상육군좌우위장군 上六軍左右衛將軍

   상육군좌우위장군은 개주(介冑 갑주(甲冑) 즉 갑옷과 투구)를 입었는데, 검은 가죽과 쇠로 만들었으며, 무늬 있는 비단으로 꿰매어 서로 붙어있게 하였다. 허리 아래에는 10여개의 띠를 드리웠는데 오색 수놓은 꽃무늬[五采繡化]로 장식하였고, 왼쪽에는 활과 칼을 찼다. 손을 마주 끼고 국궁(鞠躬 몸을 굽히는 것)하여 궁전 문 위에 서 있는데, 수조(受詔 천자의 조서를 받는 것)를 하거나 배표(拜表 천자에게 올리는 표(표)를 절하고 보내는 것)하는 날에는 회경전(會慶殿) 중문에 6인, 양쪽 곁문[偏門]에 각각 4인이 우뚝하게 산처럼 서있는 것이 흙이나 나무로 만든 허수아비와 같다. 공손하고 엄숙한 모습이 또한 가상스럽다.


상육군위중검랑장 上六軍衛中檢郞將

   상육군위중검랑장은 궁금(宮禁 왕궁)에 공이 있는 사람을 차례로 옮겨 보직을 하니, 왕이 친신(親信)하여 이들의 힘을 입어 내외를 보전하고 막는 것이다. 평상복은 모두 보라색 옷과 복두(幞頭)이며, 대례(大禮 국경의례)와 재제(齋祭 불교의식과 유교의식)・수조・배표에는 갑옷과 투구를 입고 나오는데 투구[兜鍪]는 머리에 쓰지 않고 등에다 진다. 보라색 무늬 비단건[紫文羅巾]을 썼는데 이것은 구슬[珠具]로 장식하였다. 왼쪽에는 활과 칼을 차고 손에는 탄궁(彈弓 탄환을 쏘는 활)을 들었다. 왕이 출행할 때는 그 앞에 있으면서 훤화(喧嘩 큰 소리로 떠들썩한 것)가 있으면 시위를 당기는데 발사하지는 않고 경계만 하여 사람들이 모두 숙연해지게 한다. 새가 지나가면 탄환으로 쏘고, 밤에는 횃불을 들고 가면서 순시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전에 탄궁을 든 뜻이 의심스러워 까닭을 물으니, ‘어사를 탄핵하는 뜻을 취한 것이다.' 하였다.


용호중맹군 龍虎中猛軍

   용호중맹군은 푸른 베로 만든 좁은 저고리[靑布窄衣]와 흰 모시로 만든 좁은 바지[白苧窮袴]를 입고, 다시 투구와 갑옷을 덧입었는데, 오직 부박(覆膊 어께를 가리는 것)만이 없다. 투구는 머리에 쓰지 않고 등에 지고 다닌다. 각각 작은 창을 들고 창 위에 흰 기를 달았는데, 큰기는 한자가 안되며, 구름무늬를 그려 장식하였다. 조서를 맞이하기 위해 성에 들어가 수조(受詔)하고 배표(拜表)할 때는 여러 의장군 뒤에서 길을 끼고 전진하며, 부(府)에 모일 때와 유관(遊觀)을 할 때는 투구와 갑옷을 착용하지 않는다. 병장(兵仗) 가운데 이 군사가 가장 많아 약 3만 인이나 된다.


금오장위군 金吾仗衛軍

   금오장위군은 자관수삼(紫寬袖衫 자색 넓은 소매의 적삼)을 입었으며, 복두를 말아 썼는데 [著] 색동[采]으로 위를 묶어서, 각각 그 방위의 빛깔을 따라 한 방위가 한 대(隊)가 되고 한 대가 한 빛깔이 되며, 간간이 둥근 꽃을 수놓아 장식하였다. 번개(幡蓋 번은 기치, 개는 청개(靑蓋). 황개(黃蓋) 등 의장의 한가지) 등 의물(儀物)을 들고 창합문(閶闔門) 밖에 섰다.


공학군 控鶴軍

   공학군(숙위 근시(宿衛近侍)하는 군사)은 자문나포(紫文羅袍)를 입었는데, 오색으로 간간이 크고 둥가나 꽃을 수놓아 장식하였고 절각복두(折脚幞頭)를 썼다. 무릇 수십인이 조여(詔與 조서를 실은 가마)를 받들며, 왕이나 사신이 사사로이 보러 왕래할 때는 상비(箱篚 상자와 대그릇)를 받든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2 권


장 위 2 仗衛二


천우우장위군 千牛右仗衛軍

   천우우장위군은 붉은 착의(窄衣 좁은 옷)를 입고 피변(皮弁 가죽으로 만든 고깔)을 썼으며, 검은 뿔로 만든 띠[黑角束帶]를 띠었다. 허리에는 두쪽의 옷 가리개가 있는데, 짐승 무늬로 장식하였고, 손에는 작은 창[小戈]을 들었는데 창 위에 한개의 북을 꿰어 다니 그 제도가 <중국의> 도(鞉 작은 북)와 같다. 화극(畵戟 그림을 그려넣은 창)‧등장(鐙杖)‧표미(豹尾 표범 꼬리로 장식된 의장물(儀仗物)) 등속을 든 사람도 있는데 복식은 모두 한 모양이다.


신기군 神旗軍

   신기군(고려 금군(禁軍)의 일종)은 가죽으로 머리를 덮었는데, 상부에 목비(木鼻)를 만들어 짐승의 이마 모양이 되게 한 것은 용맹스러움을 표시한 것이다. 붉은 저고리는 짧고 뒤에 또 두 쪽의 옷가리개를 덮붙이고 있는데, 이는 짐승 무늬로 장식이 되어 있다. 조서(詔書)를 받거나 예(禮)를 받을 때는 앞에 진열하여 오방대신기(五方大神旗)를 펼쳐 수레에 싣고 향하는 곳을 따라 꼼짝 않고 서 있는데, 수레마다 10여 인씩 탄다. 산길이 험난하고 높은데다 마침 큰 더위에 땀이 흘러 등을 흠뻑 적시니, 다른 장위군에 비하여 가장 수고가 많다.


용호상초군 龍虎上超軍

   용호상초군(용호위의 한 군)은 푸른 착의를 입고, 문라두건(文羅頭巾 무늬 있는 비단으로 만든 두건)을 썼다. 앞깃과 등에 모두 단호(團號 둥근표시)가 있는데, 그 제도는 한결 같지 않다. 왕궁의 사령(使令)은 모두 용을 그린 무늬[龍文]로 하고, 나머지는 서려있는 꽃무늬[盤化]로 하였는데 모두가 금박을 먹이고 간간이 수 놓은 것도 섞였는데 그 제작이 정교하다. 관중(館中 사신이 머물러 있는 객사)의 삼절(三節)63)이 있는 자리 곁에 두서너 사람을 배치하고 순라(巡邏)라 이름하니, 이는 실로 비상사태를 살피는 것이다. 사신이 출입할 때는 또 사령을 지급하는데, 상절(上節)에게는 10 인이고 나머지는 등급에 따라 강쇄(降殺)한다.


용호하해군 龍虎下海軍

   용호하해군은 청포 착의를 입었는데, 맴도는 소리개[盤鵰]를 누렇게 수놓았으며 붉은 가죽과 구리로 만든 장식을 띠고 붉은 채찍을 들었다. 순천문(順天門)의 수위(守衛)가 20여 인인데, 매향 관회(館會)에 이르면, 뜰 가운데 벌여 있다가 술잔이 돌면 ‘예' 하고 물러나 동서 두 줄로 엇갈려 돌아가며 다시 문밖으로 나간다.


관부문위교위 官府門衛校尉

   관부문위교의는 자문라착의(紫文羅窄衣 보라색 무늬의 비단으로 만든 좁은 옷)를 입고 전각복두(展脚幞頭)를 썼으며, 오른쪽에 장검(長劍)을 차고서 손을 마주끼고 섰다. 그 맡은 직책을 보면 군사의 계급을 총할하며, 전진(戰陣)에서 적진의 수급(首級)을 노획하고서도 은자(銀子)의 하사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차례로 여기에 보직되어 왕부(王府)에 머무르면서 여러 문들을 수위한다. 회경문(會慶門)에서부터 좌・우친위장군(左右親衛將軍)을 배치하였는데, 그 밖에는 안은 광화문(廣化門)과 밖은 선의문(宣義門) 등 여러 문에 모두 있으며 사관(寺觀 불사와 도관(道觀))이나 관부(官府)에서도 또한 쓴다. 그러나 복식과 인재가 모두 앞의 것에 미치지 못하고, 한때에 임시로 배치하였다가 다른 명색(名色)의 사람으로 충당하는데, 이는 일등 품질(品秩)이 아니다.


육군산원기두 六軍散員旗頭

   육군산원기구는 자연도(紫燕島 인천항 서쪽 27리에 있음)에서 처음으로 보았는데, 이 또한 군중(軍中)의 총령자(總領者)이다. 전각복두를 쓰고 자문라착의(紫文羅窄衣)에 속대를 띠고 가죽신을 신었으며, 손에는 기패(旗旆)등 장위의물(仗衛儀物)을 들었다. 영군집사(領軍執事)는 대(隊)마다 각각 한 사람인데 행렬의 진퇴는 이들을 보고 표준을 삼으니 바로 중국의 인원(員人)과 같은 유이다.


좌우위견롱군 左右衛牽攏軍

   좌우위견롱군은 자색착의(紫色窄衣)를 입으니 연작문금(練鵲文錦 까치 무늬가 든 누인비단)이다. 검은 깁[烏紗]을 연결하여 만든 연모(軟帽)를 쓰며, 베적삼에 짚신을 신고 많은 말을 어거한다. 오직 사부(使副 정사와 부사)와 상절관(上節官)에게만 있고, 나머지는 모두 용호초군으로 대신하였다.


영군랑장기병 領軍郞將騎兵

   영군랑장기병은 복식의 등급이 한결같지 않다. 무릇 자색 비단 전포[戰袍]를 입고 흰 고의[白袴]에 검은 짚신과 무늬있는 비단으로 만든 두건에 구슬로 장식한 것은 모두 고려 사람이었다. 그리고 청록긴사대화전포(靑綠緊絲大花戰袍 청록색 촘촘한 실로 짠 옷감에 큰 꽃무늬가 있는 전포)를 입었으며, 바지가 자색․황색 또는 검은 빛인 것과, 머리를 깍고 두건이 길지 않으며 정수리에 딱 붙게 쓴 것은, 듣건데 글안(契丹)의 항졸(降卒)이라 한다. 사부(使副)가 왕부(王府)에서 화합하고 봉선고(奉先庫 선왕의 제사때 쓰는 곡식 등 제물을 두는 곳집)앞 언덕 위에 돌아왔을 때 앞에서 인도하는 전구(前驅) 수십 기(騎)를 보았는데, 말방울을 울리며 치닫고 안장과 등자(革登子) 사이에서 날뛰는 것이 경쾌하고도 민첩하였다. 이것은 무술을 자랑하려는 것이다. 도이(島夷 고려를 말함)가 편벽되고 먼곳에서 우연히 경졸(勁卒)을 만나 님이 알아주기를 바라기에 급급한 것을 보니 또한 가소로왔다.


영병상기장군 領兵上騎將軍

   영병상기장군은 자색 비단 착의[紫羅窄衣]를 입고, 전각복두를 썼으며, 오른쪽에는 호창(虎韔 호랑이를 그린 활집)을 띠고 왼손에는 활과 살을 들었다. 병장(兵仗)안에 무릇 1백여 인을 세워 두는데, 이를 양대(隊)로 나누어, 매양 인사(人使)가 나갈 때는 앞에 있다가 광화문에 이르면 말에서 내려 정지하고 들어가지 않는다. 귀관(歸館)하면 다시 순천문의 외문(外門)에 서 있는다. 행렬이 극히 정제하고 기율이 있어 낭기(郎騎)에 비할 바가 아니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3 권


병 기 兵器

   범엽서64)(范曄書 후한서)에 이르기를 ‘이(夷)는 뿌리[柢]이니, 어질어서 생육하기를 좋아함[仁而好生]을 말하는 것이니, 만물은 땅에 뿌리를 박고 자라나는 것이므로 그 천성이 유순하다.' 하였다. 따라서 서융(西戎)이 싸움을 좋아하는 것과는 같지 않은 것이다. 고려는 본래 기자(箕子)가 팔조(八條)로 교화한 땅이지만, 그러나 그 병기가 매우 간단하고 성긴 것이 어찌 그 성품에 근원하여 그런 것이겠는가? 병법에 이르기를 ‘병기가 견고하지 못하면 맨손으로 치는 것과 같다' 하였다. 고려 사람의 병기가 성기고 간단한 것은 여러 차례 흉노(匈奴)에게 곤액(困扼)을 당하여 능히 더불어 겨루지 못한 까닭이다. 그러나 습속이 다른 병기라 해도 각각 베푸는 바가 있는 것이니, 알아두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제 그 명물(名物)을 갖추어 완쪽에 그린다.


행고 行鼓

   행고의 모양은 아악(雅樂)의 작은 북[搏拊]과 약간 닮았는데 중강(中腔 북의 불룩한 부분)이 조금 길고 구리 고리로 장식하였으며, 보라색 띠로 죄어 허리 아래 매었다. 군대가 행진하면 앞에서, 쇠징[金 ]과 간격을 두고 치는데 그 음절이 자못 느리다. 쇠징의 모양은 중국의 제도와 다르지 않으므로 생략하고 그리지 않는다.


궁시 弓矢

   궁전(弓葥)의 제도는 형상이 간략하여 탄궁(彈弓)과 같다. 몸집의 전 길이가 5자이며, 화살은 대를 사용하지 않고 버드나무 가지로 만드는데 더 짧고 작다. 화살을 쏠 때는 시위가 가득히 당기어지기를 기다리지 않고 온 몸을 들어 쏘아 보내니, 화살이 비록 멀리 나가기는 해도 힘은 없다. 전문수위(殿門守衛)와 장위군 내의 기병 및 중검랑장(中檢郞將)이 모두 호창(虎韔 활집이름)에 살을 끼고 있으니, 이는 뜻하지 않은 일에 대비하는 것이다.


관혁 貫革

   과녁의 모양은 대략 도고(鞉鼓)와 같은데, 양변에 모두 가죽으로 만든 귀가 있어서 움직이면 소리가 나며, 창[矛] 위에 꾀어 달았다. 대(隊)마다 약 20여 인이고, 대례(大禮)에는 천우좌우장위군(千牛左右仗衛軍)으로 잡게 한다.


등장 鐙杖

   등장은 국왕이 조서를 받을 때마다 베푸는데, 위는 말둥자를 만들고, 대[竿]에는 붉은 칠을 하였다. 사자가 앞으로 나갈 때 천우위군(千牛衛軍) 수십인이 이를 잡고, 왕의 행차에는 앞에 있는데, 등자는 도금으로 장식하였으며, 나머지 제도는 모두 쇠로 만들었다.


의극 儀戟

   의극(의장에 쓰는 창)은 두 가지 등급이 있다. 회경문(會慶門) 안에 각각 12개를 진열하고, 상하를 금동(金銅)으로 장식하였는데 형체가 매우 크다. 조서를 맞고 연회를 베풀 때는 병장(兵仗) 안에 진열된 것은 크기가 겨우 6자쯤 되는데, 대체로 중국과 대략 같으나 제작의 대소가 같지 않을 뿐이다.


호가 胡笳

   호가의 제도는 위가 빨고 아래는 굵으며, 그 모양이 약간 짧다. 사자가 군산도(群山島)에 처음 이르렀을 때 순위장(巡尉將 순시하는 위의 장수)이 주졸(舟卒 수병)을 맞아 푸른 옷을 입고 이를 부는데, 그 소리가 오열하는 듯 곡조를 이루지 않고 오직 무리로 시끄럽게 더들썩함이 문맹(蚊虻 모기와 등에)의 소리처럼 들렸을 뿐이다. 조서를 맞을 때는 앞에서 행진하며, 매양 수십 보마다 문득 조금 물러나 조여(詔輿)쪽으로 얼굴을 돌려 불고, 소리가 그쳐야 행진을 하는데, 그런 뒤에야 징과 북을 쳐서 박자를 맞춘다.


수패 獸牌

   수패(방패의 일종)의 제도는, 몸체는 나무이고 그 뒤에 가죽을 덮었으며 산예(狻猊 사자) 모양을 그렸다. 위에 다섯 개의 칼을 꼿고 꿩 꼬리로 가리웠는데, 그것은 자신을 보호하고 또 능히 상대방을 찌를 수 있으나, 그 견고하고 예리함을 남에게 훤히 보이지 않게 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다만 여러가지 유희하는 아이가 가지는 물건 같으니, 족히 시석(矢石)을 막아내지 못할 듯하다. 지금 고려의 병장 가운데는 두 가지가 모두 있으나 작고 큰 차가 있을 뿐이다.


패검 佩劍

   패검의 장식은 모양이 길고 날이 예리하여 백금(白金)과 오서(烏犀 검은 물소뼈)로 섞어 만들었다. 해사어피(海沙魚皮 바다상어 가죽)로 칼집을 만들고, 곁에 환뉴(環紐 칼집 둘레에 고리를 달아 매는 것)를 만들어 색 끈으로 꿰거나, 혹은 혁대(革帶) 상옥체(象玉王彘) 봉필(琫珌 칼의 장식, 즉 위의 장식은 봉, 아래 장식은 파이다.) 등속으로 하니, 역시 옛날의 유제(遺制)이다. 문위교위(門衛校尉)와 중검랑기(中檢郞騎)가 모두 찼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4 권


기 치 旗幟

   고려의 의장제도[制度]는 매양 재제(再製)와 사천(祀川)할 때는 10면에 큰기를 세우며, 각각 그 방위의 빛깔에 따라 신물(神物)을 그리고 이를 ‘신기’(神技)라 하니, 그 제도가 매우 넓다. 기마다 비단 몇 필(匹)을 쓰는데, 아래에는 바퀴를 달아 수레를 만들고, 수레마다 붉은 옷 입은 장위군(仗衛軍) 십수 인이 끌고 가다가 왕이 있는 곳을 따라 차례로 서 있게 마련이다. 사면에는 각각 큰 새끼줄을 달아 풍세(風勢)에 대비하는데, 높이가 10여 장(丈)이다. 나라 사람들은 신기를 세운 것을 바라보면 감히 그곳을 향하여 가지 못한다. 오직 조서가 처음 입성하여 예를 받을 때까지만 모두 특별히 사용하니 이는 송 나라 황제의 명령을 존중하는 것이다. 이밖에 오방(五方) 중기(中旗)가 있으니, 군산도 (群山島)에 올랐을 때부터 이미 보았는데, 오직 홍기(紅旗)에만 용호(龍虎)를 장식하였고 맹군 갑사(甲士)가 잡고 있었다. 또 작은 백기(小白旗)가 있는데, 크기가 손바닥에도 차지 않으며, 창에 매단 것이 아이들 장난과도 같다. 지금 아울러 그림에 나열한다.


상기 象旗

   상기(코끼리를 그린 기, 남방의 상징)는 둘이며, 그 제도는 몸체와 술(旒)이 모두 검으니 이는 수수(水數 즉 북방의 수)를 상징한 것이다. 가운데에는 한 마리의 코끼리를 그렸는데, 앞에 한 호아 (胡兒 동호[東胡]아이 즉 거란 사람)가 한 자루의 금과(金戈)를 들고, 다시 큰 새끼줄로 그 머리를 끌어 잡아당기니 왼쪽을 돌아보는 경향이 있다.

행진할 때는 그 뒷 멍에에 달고 지세(地勢)에 따라 붙둘고 전진하며, 예를 행할 때가 되면 방향에 의하여 세우는데, 상기의 위치는 검은 것을 우선으로 한다. 「예경」(禮經 예기)을 살피건대, ‘무거’(武車)는 깃발을 펴고, 덕거(德車)는 깃발을 맨다.65)하였으니, 수레에 기를 세우는 것은 예로부터 이미 그린 것이요, 특별히 동이(東夷)만 그런 것이 아님을 알겠다.


응준기 鷹隼旗

   응준기는 둘이며, 그 제도는 몸체와 술[旒]이 모두 붉으니, 이는 화수(火數 즉 남방의 수)를 상징한 것이다. 가운데에는 새와 새매가 날아 오르는 모양을 그리니, 빠르고 속한 의취가 있다.

「주관」 (周官 「주례」<周禮>에 ‘새매로 기를 만든다’66)(鳥隼爲旗)하였으니, 지금 이 붉은 기에 새매를 쓴 것도 또한 우연히 옛 제도에 부합한다. 그 항렬은 상기의 다음에 있다.


해마기 海馬旗

   마기(馬旗)는 둘이며, 그 제도는 몸체와 술이 모두 푸르니, 목수(木數 즉 동방의 수)를 상징한 것이다. 가운데 한 마리의 말을 그렸는데, 앞 어깻죽지에 갈기가 있어 마치 불이 치솟는 것 같으니, 대개 말은 화축(火畜 불기운을 지닌 가축)이기 때문이다. 푸른 기에 그려서 나무와 불이 상생(相生)하는 것을 상징하고 위치는 청룡(靑龍 동방의 별자리 이름)과 주작(朱雀 남방의 별자리 이름) 두 신(神)을 응하였다. 그 항렬은 응기(鷹旗)의 다음이다.


봉기 鳳旗

   봉기는 둘이며, 그 제도는 몸체와 술이 모두 누르니, 토수(土數 즉 중앙의 수)를 상징한 것이다. 가운데에 나는 봉(鳳)을 그리니, 봉의 물건됨이 몸에 오채(五彩)를 띠었고, 위치는 중궁(中宮)을 향하였다. 대개 오행(五行 금.목.수.화.토<金.木.水.火.土>은 흙[土]이 아니면 나지 못하는데, 다섯 방위의 빛깔이 우모(羽毛 봉황새의 털)에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형상을 취한 것이다. 그 항렬은 태백기(太白旗) 다음에 있다.


태백기 太白旗

   태백기는 둘이며, 그 제도는 몸체와 술이 모두 희니 금수의 수[金數 즉 서방의 수)를 상징한 것이다. 가운데에는 사람 하나를 그렸는데, 금관을 쓰고 규옥(圭玉)을 들었으며, 누런 옷에 초록 겉옷을 걸쳤는데, 이는 태백신(太白神)을 상징한 것이다. 한 마리의 거북을 탔는데, 거북은 뱀의 머리가 있어, 그 합한 모양을 취하였다. 대개 금(金)은 수(水)의 모체가 되고 수는 능히 금을 생(生)하는 것이니 위치는 백호(白虎 서방의 신)와 진무(眞武)67)의 두 신에 응한다. 「예경」(禮經)에 ‘국군(國君)의 행차에는 앞에 주작(朱雀)이 있고 뒤에 진무(眞武)가 있으며, 왼쪽에 청룡, 오른쪽에 백호가 있다’ 하였으니, 두 기에 서로 나타난 것이 자뭇 고제 (古制)에 부합한다. 그 항렬은 마기(馬旗)의 다음에 있다.


오방기 五方旗

   북방의 기는 흑색의 한 술[一旒]로 된 것이며 그 너비는 두 폭인데, 그림이나 수놓은 무늬가 없다. 사신이 처음 국경에 이르면서 부터 임성할 때까지 여러 기와 더불어 전도(前導)가 되며, 항렬은 차례가 없고 세워 놓은 것도 무수한데 푸른 옷 입은 군사로 이를 잡게 한다 . 처음에 국신 사부(國信使副 국신을 가지고 가는 사행(使行)의 정사와 부사)가 구례(舊例)에 의하여 금수(錦繡)로 된 사이사이에 번쩍이는 광택이 있는 기 40면(面)을 주었다가, 조서가 처음 입성할 때 주인(舟人 뱃사람)을 시켜 들고 전도하게 하였는데, 들판이 휘황하게 비치니, 고려 사람들이 놀라 구경하면서 자못 스스로 그 비루한 것을 부끄러워 하였다.


   남방의 기는 붉은 색 한 술[赤色一旒]로 된 것으로, 가운데에 신인(神人)을 그렸는데, 손에 나무 채찍을 들어 다른 것들과 차이가 있다. 오방의 기 가운데 홀로 붉은 기만이 많았다.

동방의 기는 푸른색 한 술로 된 것인데, 가운데에 그림과 수가 없다. 넓고 좁은 것, 또는 많고 적기가 여러 기들과 비슷하다.

서방의 기는 흰색 한 술로 된 것으로 역시 그림과 수가 없으며, 여러 기에 비하여, 숫자가 약간 적었다.

중앙의 기는 황색 한 술로 된 것이며, 역시 그림과 수가 없다.

오직 군산도(群山島)와 자연도(紫燕島)에서 신사(信使)를 맞이하여 해안에 진열했을 때에만 있었다. 또 한 가지는 여러 채색이 섞인 가운데 번적이는 광택이 나는데, 네 모퉁이에 운기(雲氣)를 그린 것이 있는데, 이는 여러 고을의 순위(巡尉)와 전선(戰船)의 나병(邏兵)이 들고 있었다.


소기 小旗

   소기의 제도는 붉은 술에 흰 바탕으로 되고, 위에 초록색 구름을 그렸다.

사신이 입성하고 국왕이 조서를 맞이할 때 용호군(龍虎軍) 수만 인이 갑옷을 입고 기를 잡고 길 양편으로 행진하였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5 권


거 마 車馬

   나라가 있으면 반드시 군사가 있는데, 군사는 수레로 운송하며 수레는 말로 끌게 한다. 그러므로 옛적에 나라를 제정할 때에 반드시 수레의 수를 보아 그 크고 작음의 차등을 두었으니, 「시」(詩 모시 毛時)의 송(頌)에 노(魯)와 위(衛)의 부(富)를 칭송함도 모두 말(馬)로써 말한 것이다. 고려는 비록 해국(海國)이나, 무거운 짐을 끌고 먼 곳을 가는 데는 거마를 폐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토지가 낮고 좁으며 도로에는 모래와 자갈이 많아 중국과 비교되지 않으므로 수레의 제도와 말을 어거하는 방법도 또한 다르다.


채여 采輿

   채여는 셋인데, 하나는 조서를 봉안하고, 또 하나는 어서(御書)를 봉안하며, 앞의 한 채여에는 대금향구(大金香毬)68)를 담았다. 그 제도는 오색 무늬의 비단을 쓰고 사이사이 금수(錦繡)를 섞어 맺었으며, 위엔 나는 봉[飛鳳]을 만들고 네 모퉁이에는 연꽃이 보이는데 행진하면 흔들린다. 아래에는 붉게 칠한 좌석을 앉히고, 네개의 대[竿]에는 용머리[龍首]를 만들어, 강학군(控鶴軍) 40인으로 이를 메게 한다. 앞에서는 두 사람이 의장을 잡고 맞이하여 인갈(引喝 벼슬아치가 행차할 때 앞에서 행인이 비키도록 소리치는 것) 하니, 행동이 매우 엄숙하다. 왕세자(王世子)와 고려의 관리들이 조서를 맞아 길목에서 채여를 바라보고 절하였다.


견여 肩與

   견여의 제도는 대략 호상(胡床)과 같은데, 등(藤)으로 상란(翔鸞 나는 난새)을 꿰고, 꽃무늬로 붉게 칠했으며, 사이사이 금을 칠하여 꾸몄다. 위에는 비단방석을 깔고, 네 개의 대에는 각각 채색 실을 싸매었다. 군산도로부터 입성할 때까지 매양 사관을 나서면 반드시 견여로 받드니, 사부(使副 정사와 부사)가 참람된 예라 하여 감히 타지 못하고, 오직 전장(前丈 얖선 장위군) 가운데 행진하여 의식을 삼았을 뿐이었다.


우거 牛車

   우거의 시설은 제작이 간략하여 아주 법도가 없다. 아래에 두 개의 수레바퀴가 있고, 앞의 멍에에 소를 매어 끌게 하는데, 매양 그 위에 물건을 싣고는 반드시 새끼줄로 꿰매어야 비로소 기울어 엎어짐을 면할 수가 있다. 더구나 그 나라는 거개가 산길이어서, 행진하면 울퉁불퉁 흔들리니, 다만 예를 갖춘 도구일 뿐이다.


왕마 王馬

   왕이 타는 말은 안장이 매우 화려하여, 혹은 금 혹은 옥으로 되었으니, 모두 조정(朝廷 증국을 지칭)에서 내린 것이다. 평상시 탈 때에는 말에 갑옷을 입히지 않고, 오직 팔관재(八關齋)와 조서를 받는 큰 예식이 있을 때에만 마갑(馬甲) 위에 다시 안장과 고삐를 더하고, 수놓은 휘장(繡장)을 씌우며, 혁대와 번영(繁纓 여러 가닥의 끈)에 모두 난성(鸞聲 방울소리)이 어울려 또한 매우 화려하다. 다만 중국에 비하여 안장 뒤에 다시 수놓은 방석을 더하였으니, 또한 시종관(侍從官)이 융좌( 융坐 융가죽으로 만든 방석, 융은 짐승이름 )를 까는 것과 같다.


사절마 使節馬

   고려는 대금(大金 여진족이 세운 나라 이름)과의 거리가 멀지 않으므로 그 나라에는 준마(駿馬)가 많다. 그러나 말 기르는 사람[ 人]이 길들이기를 잘못하여, 그 걸음이 빠른 것은 모두 천연적인 것이요, 사람의 힘을 빌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안장의 제도는 오직 왕이 타는 것만이 붉은 비단에 수놓은 안장에다 금옥 장식을 더한 것이고, 대신들은 보라색 비단에 수놓은 안장에다 은으로 장식을 하였다. 나머지는 거란의 풍속과 같이 또한 등급이 없다. 처음 사신이 사관에 도착하면 날을 가려 조서를 받는데, 받드는 안마(鞍馬 안장 갖춘 말 )가 대략 왕의 제도와 같았다. 그래서 사자가 참람되고 사치하다고 굳이 사양하기를 여러 차례 한 뒤에야 고려 관원이 타는 것과 같은 다른 말로 바꾸었다. 상절(上節)이 탄 것은 사부(使副)의 것보다 한 등급 내리고, 중절(中節)은 등급에 따라 강쇄하였다.


기병마 騎兵馬

   기병이 탄 안장은 매우 정교하다. 나전으로 안장을 만들고, 안장의 끈과 고삐는 백지(栢枝)와 마노석(瑪瑙石 보석의 일종)으로 만들었는데, 사이사이 황금과 오은(烏銀)을 섞어 장식하였다. 양쪽 원( 수레의 뒤를 누르는 장치)에는 거위 목을 그렸는데 몸의 배나 되며, 고려 사람은 이를 ‘천아’(天鵝 )라 한다. 가죽 고삐와 방울 울리는 것도 또한 옛 뜻이 있다.


잡재 雜載

   고려는 산이 많고 도로가 험하여 수레로 운반하기가 불리하다.

또 낙타(駱駝)로 무거운 것을 끄는 것도 없으며 사람은 매우 가벼운 것이나 지고 간다. 그래서 이것저것 싣는 데는 말을 많이 쓴다. 그 제도는 두개의 그릇을 좌우에 장치하고 말 등에 옆으로 걸쳐 놓은 다음 물건들을 모두 그 그릇 속에 넣어둔다. 머리를 얽고 가슴을 매는 것은 승기(乘騎 타는말)의 제도와 같으며, 앞에서 끌고 뒤에서 모는데 그 걸음이 자못 빠르다고 한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6 권


관 부 官府

   당・우(唐虞) 때에는 백 명의 관원을 두었고 하・상(夏常) 때는 관원이 늘어났으나 그것만으로도 잘 다스릴 수 있었다. 주(周) 나라에 이르러서는 상세하게 갖춰져, 천지(天地)와 사시(四時)를 위로 관찰하고 아래로 살피어 도(道)에 맞게 운영(運營)하여 정사가 잘 거행되었으니, 어찌 형식만 갖추어 실지와 맞지 않는 폐단이 있었겠는가?

고려는 초기에 12등급의 관원을 두고 오랑캐의 언어로 명칭을 붙이고서 다시 정화(淨化)하지 않다가, 황화(皇化 송나라 황제의 교화)를 입게 되면서부터 관(官)을 설치하고 부(府)를 두어 중화를 모방하여 부르기는 하였으나, 직(職)에 임하여 일을 처리할 적에는 오히려 이풍(夷風)을 그대로 따르므로 이따금 형식만 갖추고 실지는 맞지 않는다. 그러나 의리를 사모하는 뜻은 역시 가상하다고 할만하다.


대성 臺省

   관부(官府)의 설치는 대개 모두 조정(朝廷)의 아름다운 명칭을 모방하였으나 그 직(職)을 맡기고 벼슬을 제수함에 이르러서는 실지가 이름과 맞지 아니하여, 한갖 형식만 갖춘 것이고 보기에만 좋을 뿐이다.

  

   상서성(尙書省)은 승휴문(承休門)안에 있다. 앞에 대문이 있고 양쪽의 행랑은 10연 간씩이며, 중앙에 당(堂) 3간을 만들었는데 곧 관원들이 일을 보도록 한 곳으로서, 정사가 여기에서 나온다.

상서성 서쪽과 춘궁(春宮) 남쪽 앞에 문 하나가 트였고 안에 3채의 집이 나란히 서 있는데, 중앙의 것이 중서성(中書省)이고 왼편의 것이 문하성(門下省)이고 윗편의 것이 추밀원(樞密院)이니, 곧 국상(國相)・평장사(平章事)・지원사(知院事)가 정사를 처리하는 곳이다.


   예빈성(禮賓省)은 건덕전(乾德殿) 앞쪽 옆에 있는데 사방 이웃 나라의 빈객(賓客)을 관장하는 곳이고, 팔관사(八關司)는 승평문(昇平門) 동쪽에 있는데 재제(齋祭)의 일을 맡은 곳이고, 어사대(御史臺)는 좌동덕문(左同德門)안에 있는데 풍헌(風憲 풍교와 헌장)을 펴는 소임을 맡은 신하들이 거처하는 곳이고, 상승국(尙乘局)은 거마(車馬)를 저장하는 하는 곳이고, 군기감(軍器監)은 갑장(甲仗)을 간수 하는 곳이다.


   빈성(賓省)은 예의(禮儀)를 맡고, 합문(閤門)은 찬도(贊導)를 맡아 보고, 대영창(大盈倉)은 보화(寶貨)를 저장는 내탕(內帑)이고, 우창(右倉)은 곡식을 축적(蓄積)하는 곳인데, 이것들은 모두 왕이 거처하는 내성(內城)에 있다.

광화문(光化門) 밖으로 말하면 관도(官道)의 북쪽에 있는 것은 상서호부(尙書戶部)요, 또 그 동쪽의 것은 공부(工部)・고공(考功)・대악국(大樂局)・양온국(良瑥國)으로 네개의 문이 모두 북으로 열지어 남쪽을 향하고 있는데, 각각 이름이 표시되어 있다.


   관도의 남쪽에는 병・형・이(兵形吏) 삼사(司三)가 있는데, 그 문은 남쪽에 열지어 북쪽을 향하였고, 또 동남쪽으로 수십 보쯤에 있는 것은 주전감(鑄錢監)이고 조금 북쪽의 것은 장작감(獎作監)이다.

감문(監門)・천우(千牛)・금오(금오) 3위(가)는 북문(북문) 안에 있는데 금오가 조금 동쪽에 가까이 있는 것은 호위의 임무를 맡고 있기 때문이다.


   대시(大市)・경시(京市) 2사(司)는 남쪽 큰 거리에 있는데 동.서로 마주하고 있으니, 관시(關市)의 정사를 균형 있게 하기 위한 때문이다.

관현(管絃악기) 같은 것에 있어서도 방(坊)이 있고 궁전(弓前)은 사(司)가 있으며 복두(僕頭)는 소(所)가 있고 점천(占天 관상하는것)은 대(臺)가 있으니, 무릇 이들은 모두 외성(外城) 안에 있다.

또한 개성부(開成府)가 성(城)과 40리 거리에 있는데, 모든 백성들의 혼인.전답.투송(鬪訟)하는 일을 관리한다.


국자감 國子監

   국자감은 전에 남쪽 회빈문(會賓門) 안에 있다. 앞에 대문이 있는데 편액을 ‘국자감’이라고 했다. 중앙에 선성전(宣聖殿)을 세우고 양쪽 향랑( )에 재사(齎舍)를 설치하여 제생(諸生)들을 거처하게 했다. 전의 제도는 지극히 좁았는데 지금은 예현방(禮賢坊)으로 옯겼으니, 학도가 많이 불어났기 때문에 그 제도를 키운 것이다.


창름 倉廩

   창름의 제도는 관약(關 빗장이나 자물쇠)을 걸지 아니하고 밖에 담장[牆垣]을 쌓되 오직 문 하나를 내어 도적을 막는다. 내성(內城) 안에 3창(倉)이 있었는데, 지금 볼 수 있는 것은 우창(右倉) 뿐이다.

   선의문(宣義門) 밖에 있는 창고는 ‘용문창’(龍門倉)이요 홍주(洪州) 산중(山中)에 있는 창고는 ‘부용창’(富用倉)이니, 세속에 전하기를 ‘부용창’(富用倉)이라 함은 잘못이다.


   대의창(大義倉)은 전에는 서남문 (西南門)에 있었는데 쌀 3백만을 쌓았었다. 화재를 만나 모두 타 버리게 되자 드디어 장퍠문(長覇門)으로 옮겼으니, 고려 사람들이 여러 물이 모이는 곳이므로 화재를 예방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해염(海鹽)・상평(常平) 2창(創)이 있는데, 서로 거리가 수백 보쯤 된다. 오직 부용창과 우창은 평상시에는 풀지 아니하고 전쟁・수재・한재에 대비하는 것을 저장하는데 그 쌓은 모양이 둥근 집과 같으니, 바로「시경」(詩經)에 이른바 ‘또한 큰 창고가 있도다’ 한 것이 이것이다. 바닥에다 훍으로 대를 쌓았는데 그 높이가 두 자「尺」쯤 되며 풀을 엮어 멱서리[ ]을 만들어 그 속에 미곡 한 섬씩을 담아 쌓아 올렸는데, 그 높이가 두어 길[丈]이나 되어 담장 밖으로 솟아 있다. 그리고 그 위를 다시 풀로 덮어 비바람을 막는다.


   대개 쌀은 기운이 소통되지 아니하면 부패하게 되는데, 지금 고려의 창름에는 비록 두어 해가 된 쌀이라도 새로운 것은 멱서리로 쌓는 법을 써서 다소 그 기운이 소통하기 때문이다.

국상(國相)에게는 해마다 쌀 4백 20멱서리를 주되, 치사(致仕 지금의 정년퇴임과 같다)하면 반으로 주고, 상서(尙書). 시랑(侍郞)이하는 2백50멱서리, 경(卿). 감(監). 낭관(郎官)은 1백50멱서리, 남반관(南班官)은 45멱서리, 제군(諸軍)의 위(衛). 녹사(錄事)는 19멱서리인다, 그중 무신(武臣)은 이등급에 비교하여 문관(文官)과 서로 비등하게 올려준다.

내・외직(內外職)의 현임(現任)으로서 녹을 받는 관원이 3천여 명이고, 산관 동정(散官同正)으로서 녹은 없이 전토(田土)를 급여(給與)받은 사람이 또한 1만 4천여 명인데 그 전토는 모두 지방 고을(外州)에 있으며, 전군(佃軍)이 농사지어 시기에 맞추어 가져다 바치면 나누어 급여해 준다.


부고 府庫

   봉선고(奉先庫)는 광화문(廣化門) 동쪽과 순천관(順天館)의 관도(官道) 북쪽에 있다. 앞문이 2간인데 조금 동쪽으로 문을 냈고 왼쪽에 집 하나가 있는데 그 제도가 지극히 높아 담장 밖으로 솟아 있다.

오른쪽에 누각(樓閣) 하나가 있는데 동쪽면에는 창문을 내지 않았고 오직 그 기둥에 방시(방示)하기를 ‘저수 방화’(貯水防火)라고 하였다. 대개 그 안에 저장한 것은 바로 선왕(先王)을 받드는 제기(祭器)와 생뢰(牲牢 제물)요, 또한 국기(國忌 왕이나 황후의 제삿날)에는 재료(齋料)를 여기에서 지급하여 모든 절(寺) 에 풀어 준다.


약국 藥局

   고려의 옛 풍속은 사람이 아파도 약을 먹지 아니하고 오직 귀신을 섬길줄만 알아, 저주(詛呪) 하여 이겨내기를 일삼는다. 왕 휘(王徽)때 사신을 보내어 입공(入貢)하고 의술(醫術)을 구해 간 뒤로부터 사람들이 점차로 배워 익혔으나, 그 방술에 정통(精通)하지는 못했다.

   선화(宣化) 무술년(고려 예종<睿宗> 13.1118) 에 사신이 와서 소장( 소章)을 올려, 의직(醫職)을 내리어 가르쳐 주기를 청하므로, 상(上)이 그 건의를 허락하여 드디어 남줄(藍茁) 등을 고려로 보냈는데, 그런 지 두 해 만에 돌아왔다.

그 뒤부터 의술을 통한 자가 많아져서, 보제사(普濟寺) 동쪽에 약국(藥局)을 세우고 3등급의 관원을 두니, 첫째는 ‘태의’(太醫), 둘째는 ‘의학’(醫學), 세째는 ‘국생’(局生)이라 하여, 푸른 옷에 나무 홀(笏 벼슬아치가 조정에 들어갈 때 조복에 갖추어 손에 쥐는것) 차림으로 날마다 그 직에 임했다.

   고려는 다른 물화는 모두 물건으로써 교역(交易) 했으나, 오직 약을 사는 것은 간혹 전보(錢寶)로써 교역하였다.


    영 어 囹圄

영어의 만듦새는 그 담장이 높아 모양이 환도(環도)와 같고 중앙에 집이 있으니, 대개 옛날의 원토(園土 감옥)와 같이 만든 것이다. 지금 관도(官道)의 남쪽에 있어 형부(形部)와 마주하고 있다.

가벼운 죄인은 형부로 보내고 도둑 및 중죄인은 옥(獄)으로 보내는데, 포승으로 잡아매어 한 사람도 도망갈 수 없고, 또한 가추(枷 )를 채우는 법도 있다. 그러나 지체시키기만 하고 판결을 내리지 아니하여 철을 넘기고 해를 지나게 되기까지 하는데, 오직 금(金)으로 속바쳐야만 풀려나게 된다.


   무릇 장형(仗形)을 집행하는 법은, 하나의 큰 나무를 가로질러 놓고 두손을 그 위에 묶어 땅에 엎드리게 한 다음에 치는데, 태장(笞杖)은 매우 가벼워 백에서 열까지를 그 경중에 따라 가감(加減)한다.


   오직 대역(大逆)과 불효(不孝)죄는 참형(斬刑)하고, 다음은 뒤로 결하여 비골( 骨 넓적다리뼈)과 가슴이 서로 닿도록 하여 피부가 터지게 되어야 그만두니, 또한 거열(車裂)과 같은 유이다. 외방 고을에서는 형살(刑殺)을 시행하지 아니하고 모두 칼을 쉬워 왕성(王城)으로 보내는데, 해마다 8월에 여수(廬囚 죄상을 참작하여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는 것) 한다.

오랑캐들의 성격이 본디 인자하여, 죽을 죄라도 거의 용서하여 산골이나 섬으로 유배(流配)하고, 사면해 주는 것은 세월의 다소와 죄의 경중을 헤아려 용서하여 준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7 권


사 우 祠宇

   고려는 본래 귀신을 두려워하여 믿고 음양(陰陽)에 얽매여, 병이 들면 약은 먹지 않고 부자(父子) 사이 같은 아주 가까운 육친이라도 서로 보지 않고 오직 방자와 압승69)(壓勝)을 알 따름이다. 전대의 역사에 이르기를 ‘그 풍속이 음란해서 저녁이 되면 으례 남녀가 떼지어 난잡한 노래를 하고 귀신⋅사직⋅영성70)(靈星)을 제사하고, 10월에 하늘을 제사하기 위해 큰 모임을 갖는데 그 것을 동맹(東盟)이라 부른다. 그 나라 동쪽에 굴이 있는데 수신(수神)이라 부르고, 역시 10월에 맞아다가 제사한다.71)’ 하였다. 왕씨(王氏)가 나라를 차지한 이후 산에 의지하여 나라 남쪽에 성을 쌓고 건자월(建子月 북두성의 자루 끝이 자(子)의 방향을 가리키는 달)에 관속들을 거느리고 의장물(儀物)을 갖추고 하늘에 제사한다. 후에 글안(契丹)의 책명(冊命)을 받을 때와 그들이 세자(世子)를 세울 때에는 역시 거기서 예식을 거행하였다. 그들이 10월에 동맹하는 모임은, 지금은 그 달 보름날 소찬을 차려놓고 그것을 팔관재(八關齋)라하는데 의식이 극히 성대하다. 그 조상의 종묘는 나라의 동문 밖에 있는데, 왕이 처음 습봉(襲封 왕위의 계승을 말함) 할때와 3년에 한 번씩 하는 큰 제사 때에만 거복(車服)과 면규(冕圭)를 갖추고 친히 제사하고 그 나머지는 관속들을 나누어 파견한다.


   원단(元旦)과 매달 초하루와, 춘추와 단오에 다 조상의 신주에 제향을 드리는데, 부중(俯中)에 그 화상을 그려 놓고 중들을 거느리고 범패(梵唄)를 노래하여 밤낮을 계속한다. 또 일반이 부처를 좋아하여 2월 보름에는 모든 불사(佛寺)에서 촛불을 켜는데 극히 번화하고 사치스럽다. 왕과 비빈이 다 가서 구경하고 나라 사람들은 도로를 시끄럽게 메운다. 그들이 신사(神祀)로 백리 안에 있는 것에는 사시에 관원을 보내어 태뢰(太牢 제물로 쓰는 소) 로 제사하게 한다. 또 3년에 한 차례씩 있는 큰 제사는 그 경내에 두루 다 베풀어 진다. 그러나 기일이 되어 신을 제사한다는 명목으로 분담시켜 백성의 재물을 거둬들여 백금(白金 은을 말함)1천냥을 모으고, 나머지 물건들도 이와 맞가는 데 그것들을 신하들과 함께 나누어 갖는다. 이것은 우스운 일이다. 왕이 거처하는 궁실 말고는 오직 사우(祠宇)의 만듦새만이 화려하다. 여러 사찰 중에서 안화사(安和寺)가 으뜸인데, 그것은 거기에 신한(宸翰 임금이 쓴 글을 말함)을 봉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 곳에서의 일로 도로에서 지내온 것과 재사(齋祠)를 가 보고서 이목에 접한 것들을 취해서 그림으로 그리고, 그 나머지 보지 못한 제도는 생략하고 싣지 않는다.


복원관 福源觀

   복원관72)은 왕부(王府 왕궁을 말함) 북쪽 태화문(太和門) 안에 있는데 정화(政和 송 휘종(宋 徽宗) 연호. 1111∼1117) 연간에 세워진 것이다. 앞 방은 ‘부석지문’73)(敷錫之門)이라 하였고 다음 방은 ‘복원지관’(福原之觀)이라 하였다. 들은 바에 따르면, 전내(殿內)에 삼청상74)(三淸像)을 그렸는데 혼원황제(混元皇帝)의 수염과 머리털이 다 감색이어서 우연히 성조(聖朝)께서 진성(眞聖)75)의 모습을 그린 뜻과 합치한다니 또한 가상하다. 예전에는 나라 사람들이 허정(虛靜)의 가르침(도교를 말함.)을 듣지 못했었는데, 이제는 사람마다 다 귀의하여 신앙할 줄 안다고 한다.


정국안화사 靖國安和寺

   안화사는 왕부의 동쪽에서 산길을 3∼4리 가면 점차로 수풀이 깨끗하고 우거진 산록이 험악한 것이 보인다. 관도(官道)의 남쪽에 있는 옥륜사(玉輪寺)에서 수십 보를 지나가면 작은 길이 구불구불 얽혀 있고 높은 소나무가 길을 끼고 있는데, 삼엄하기가 만 자루의 미늘창을 세워놓은 듯하다. 맑은 물이 여울져 뛰어오르며 놀란 듯 달려가 돌을 씻어내는 것이, 쇠를 울리고 옥을 부수는 것 같다. 시내를 가로질러 다리를 놓았고 건너쪽 강언덕에 세운 두 개의 정자가 여울 돌무더기에 반쯤 잠겨 있는데, 청헌정(淸軒亭)・연의정(連의亭)이 그것들로 서로간의 거리는 수백 보가 된다. 다시 깊은 골짜기 속으로 들어가서 산문각76)(山門閣)을 지나 시냇물을 끼고 몇 리를 가 안화문(安和門)으로 들어가고, 다음에 정국안사로 들어간다. 절의 액자는 곧 지금의 태사(太師) 채경77)(蔡京)의 글씨이다. 문의 서쪽에 정자가 있는데 방(榜)이 ‘냉천’(冷泉)으로 되어 있다. 또 좀 북쪽으로 가면 자취문(紫翠門) 으로 들어가고, 다음에는 신호문(神護門)으로 들어간다. 문 동쪽 월랑에 상(像)이 있는데 그것은 제석78)(帝釋)이다. 서쪽 월랑의 대청을 ‘향적’(香積)이라 하며, 가운데에는 무량수전79)(無量壽殿)이 세워져 있고, 그 곁에 두 누각이 있는데 동쪽의 것을 ‘양화’(陽和) 라하고 서쪽의 것을 ‘중화’(重華)라 한다. 여기서부터 뒤에는 세 문이 늘어서 있는데 동쪽 것을 ‘신한’(神翰)이라하며, 그 뒤에 전각이 있는데 ‘능인’80)(能仁)이라고 한다. 전각의 두 액자는 실로 금상 황제께서 내린 어서(御書)이다. 중문은 ‘선법’(善法)이라 하는데 그 뒤에 선법당81)(善法堂)이 있고, 서문은 ‘효사’(孝思)라 한다. 뜰 뒤에 전각이 있는데 그것을 ‘미타당’(彌陀堂)이라고 한다. 전각 사이에 두 곁채가 있는데 그 중 하나에는 관음82)(觀音)을 봉안하였고 또 하나에는 약사83)(藥師)를 봉안하였다. 동쪽 월랑에는 조사상84)(祖師像)이 그려져 있고 서쪽 월랑에는 지장왕85)(地藏王)이 그려져 있다. 나머지는 승도(僧徒)의 거실이다.


   그 서쪽에 재궁86)(齋宮)이 있는데, 왕이 그 절에 오면 심방문(尋芳門)으로 해서 그 위(位)를 들러 간다. 앞문은 ‘응상’(凝祥), 북문은 ‘향복’(嚮福)이며, 가운데는 인수전(仁壽殿)이고 뒤는 제운각(齊雲閣)이다. 샘이 산 중턱에서 나오는데 달고 깨끗하여 사랑스럽다. 그 위에 정자를 세웠는데 방(榜)이 역시 안화천(安和泉)이다. 화훼(花卉)・죽목(竹木)・괴석(怪石)을 심어서 놀고 쉬는 놀이터로 만들었는데 , 토목과 분식(粉飾)이 은근히 중국 제도를 모방하였을 뿐 아니라 경치가 맑고 아름다와 병풍 속에 있는 듯하다. 고려인들은 규장(奎章 천자의 글을 말함)과 예조(睿藻 왕의 글을 말함)가 거기에 있기 때문에 더욱 엄숙하게 만드는 것이다. 지금 사자(使者)가 그 곳에 가서 삼절(三節)의 관속과 종리(從吏)를 거느리고 어서전(御書殿) 아래에서 배례하고서 불승들을 공양하여[飯僧] 복을 빌고 날이 저물어서 관사로 돌아가니, 실로 선화(宣和) 5년(123) 7월 2일 계축이었다.


광통보제사 廣通普濟

   광통보제사는 왕부의 남쪽 태안문(泰安門) 안에서 곧장 북쪽으로 백여 보의 지점에 있다. 절의 액자는 ‘관도’(官道) 남향쪽에 걸려 있고, 중문의 방은 ‘신통지문(神通之門) 이다. 정전(正殿)은 극히 웅장하여 왕의 거처를 능가하는데 그 방(榜)은 ‘나한보전’(羅漢寶殿)이다. 가운데에는 금선(金仙)‧문수(文殊)‧보현(普賢) 세상이 놓여 있고87), 곁에는 나한 5백 구를 늘어놓았는데 그 의상(儀相)이 고고(古高)하다. 양쪽 월랑에도 그 상이 그려져 있다. 정전 서쪽에는 5층 탑이 있는데 높이가 2백 척이 넘는다. 뒤는 법당이고 곁은 승방인데 1백 명을 수용할 만하다. 맞은편에 거대한 종이 있는데 소리는 가라앉아 시원하지 못하다. 전례에 따라 예물의 나머지 말과 고려에서 정사와 부사에게 준 것 도합 2필에 백금 2근을 더해 향화(香花)와 과속(果속 과일과 채소)의 비용으로 주고, 불사(佛事)를 하고 불승을 공양하였다. 정사와 부사는 몸소 가지 않고 다만 도할관(都轄官)과 제할관(提轄官)이하 삼절을 보내어 의식을 거행하게 하였다.


흥국사 興國寺

   흥국사는 광화문(廣化門) 동남쪽 길 끝에 있다. 그 앞에 시냇물 하나가 있는데, 다리를 놓아 가로질러 넘어간다. 대문은 동쪽을 면하고 있는데 ‘흥국지사’(興國之寺)라는 방이 있다. 뒤에 법당과 정전이 있는데 역시 매우 웅장하다. 뜰 가운데 동(銅)으로 부어 만든 번간(幡竿 표기를 다는 장대)이 세워져 있는데, 아래 지름이 2척, 높이가 10여 장(丈)이고, 그 형태는 위쪽이 뾰쭉하며 마디에 따라 이어져 있고 황금으로 칠을 했다. 위는 봉새 머리[鳳首]로 되어 있어 비단 표기[錦幡]를 물고 있다. 다른 절에도 혹 있으나, 다만 안화사의 것에는 ‘대송황제성수만년’(大宋皇帝聖壽萬年)이라 씌어져 있다. 그들이 마음을 기울여 송축하는 뜻이 성심에서 나왔음을 보니, 그들이 성조(聖朝)께서 총애 회유하심을 후히 받는 것도 마땅한 일이다.


국청사 國淸寺

   국청사는 서교정(西郊亭) 서쪽 3리 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긴 낭하와 넓은 곁채에 높은 소나무와 괴석이 서로서로 비치며 둘러 있어 경치가 맑고 수려하다. 곁에 석관음(石觀音)이 벼랑 밑에 높이 서 있다. 근자에 사절이 지나가는데 국청사의 문을 경과할 때 그 곳 치의(緇衣) 차림의 승도(僧徒) 1백여 명이 떼지어 나와 구경을 하였다.


왕성내외제사 王城內外諸寺

   흥왕사(興王寺)는 국성(國城) 동남쪽 한구석에 있다. 장패문(長覇門)을 나가 2리 가량을 가면 앞으로 시냇물에 다가 있는데 그 규모가 극히 크다. 그 가운데에 원풍(元豊 송 신종의 연호 1018∼1085)연간에 내린 협저불상88)(夾紵佛像)과 원부(元符 1098∼1100) 연간에 내린 장경(藏經 대장경 또는 불경을 말함)이 있고, 양쪽 벽에는 그림이 있는데, 왕옹(王옹 고려숙종) 이 숭녕(崇寧 송 휘종 연호 1102∼1106)때의 사자(使者) 유규89)(劉逵) 등에게, ‘이것은 문왕(文王 고려 문종을 말함)께서 사신을 보내어 신종황제(神宗皇帝)께 고해 상국사90)(相國寺)를 모방해 만든 것으로, 본국인들이 우러러볼 수 있게 되었읍니다. 우러러 황은에 감사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 것입니다.’ 하고 말한 적이 있었다. 조금 서쪽으로 가면 곧 홍원사(洪圓寺)이고, 장패문으로 들어가 시내의 북쪽은 숭화사(崇化寺)이며 남쪽은 용화사(龍華寺) 이다. 뒤로 작은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미타(彌陀)・자씨(慈氏) 두 절이 있다. 그러나 그리 완전하게 수리되어 있지는 않다. 숭교원(崇敎院)은 회빈문(會賓門)안에 있고, 보제(普濟)・도일(道日)・금선(金善) 세 절은 태안문(太安門)안에 있는데 정족(鼎足)을 이루고 솟아 있다.


   관도(官道)의 북쪽 유암산(由암山)을 사이에 두고 또 봉선(奉先)과 미륵(彌勒) 두 절이 나란히 늘어서 있고, 조금 서쪽으로 가면 곧 대불사(大佛寺)이다. 왕부(王府)의 동북쪽으로 가면 춘궁(春宮 태자가 거처 하는 궁전)과 상거가 멀지 않은 곳에 두 절이 있는데 하나는 ‘법왕’(法王)이고 다음은 ‘인경’(印經)이다. 태화북문(太和北門)으로 해서 들어가면 구산(龜山)과 옥륜(玉輪) 두 절이 있는데, 그것은 안화사(安和寺)로 가는 길에 있는 절이다. 광진사(廣眞寺)는 장작감91)(將作監) 동쪽에 있고, 보운사(普雲寺)는 장경궁(長慶宮) 남쪽에 있다. 숭인문(崇仁門)에서 동쪽으로 나가면 곧 홍호사(洪護寺)이고, 또 동북쪽으로 안정문(安定門)을 나가면 귀법(歸法)・영통(靈通) 두 절이 있다. 순천관(順天館 송의 사절 일행이 묵는 관사) 북쪽에 작은 집 수십 간이 있는데 ‘순천사’(順天寺)라는 방이 붙어 있다. 사절이 관사에 와서부터 한달 동안은 승도들이 계속 범패를 불렀으며, 방에는 ‘이기국신사부일행평선’92)(以祈國信使副一行平善)이라 하였다. 대체로 충심에서 우러난 진실이지 일시적인 거짓이 아니다.


   또 자연도(紫燕島 인천 앞바다에 있는 섬)에는 제물사(濟物寺)가 있고 군산도(群山島)에는 자복사(資福寺)가 있는데, 정전과 문과 월랑 이외에는 대청이나 방이 없고 그 승도는 2∼3인뿐이다. 이상의 모든 절들은 그 건물이 좁고 누추한데다 또 수효가 많아 그 그림은 생략하고 그 이름만 적어 둔다.


숭산묘 崧山廟

   숭산신사(崧山神祠)는 왕부의 북쪽에 있다. 순천관에서 나가 병부(兵部)까지 가서 곧장 북쪽으로 시내를 따라 가다가 구산사와 복원관을 지나고, 북창문(北昌門)을 나가 5리 가량을 가면 산길이 험악하고 높은 소나무가 울창한데 성중을 굽어보면 손바닥을 가리키듯이 환하다. 그 신(神)은 본래 고산(高山)이라고 했었다. 나라 사람들이 전하기로는, 상부(祥符 곧 대중상부(大中祥符). 1008∼1016) 연간에 거란(契丹 요(遼)를 말함)이 왕성으로 침입해 다가오자93), 그 신이 밤중에 소나무 수만 그루로 변화하여 사람 소리를 내매, 오랑캐들은 원군이 있는가 의심하고 곧 철퇴하였으므로, 후에 그 상을 봉해서 숭(崧)이라 하고 그 신을 제사드려 받들었다고 한다. 백성들은 재난이나 질병이 생기면 옷을 시주하고 좋은 말을 바치며 기도를 한다. 근자에 사신이 와서 6월 26일 정미에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드렸는데, 사당이 멀어서 산중턱까지만 가서 주찬을 진설하고 배례하였다. 이것은 구법[舊典]에 따른 것이다.


동신사 東神祠

   동신사는 선인문(宣仁門) 안에 있다. 땅이 좀 평평하고 넓은데, 정전의 집이 낮고 누추하며 행랑과 월랑 30간은 황량하게 수리하지 않은 채로 있다. 정전에는 ‘동신성모지당’(東神聖母之堂)이란 방이 붙어 있고 장막으로 가려 사람들이 신상(神像)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는데, 이는 나무를 깎아 여인의 형상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부여(夫餘)의 처인 하신(河神)의 딸이라고 한다. 그녀가 주 몽(朱蒙)을 낳아 고려의 시조가 되었기 때문에 제사를 모시는 것이다. 전부터 사자(使者)가 오면 관원을 보내어 전제(奠祭)를 마련하는데 그 생뢰(牲牢 제물로 바치는 희생)와 작헌(酌獻 잔을 드림)은 숭산신에 대한 법식과 같다.


합굴룡사 蛤窟龍祠

   합굴룡사는 급수문(急水門)의 위쪽 공지에 있다. 작은 집이 두어 간 있는데 그 가운데에 신상(神像)이 있다. 뱃길로는 물이 얕아 접근할 수 없고, 다만 뱃사공들이 작은 배로 맞아다가 제사할 뿐이다. 근자에 사자가 그 곳에 가서 제물을 차려 제사하였더니 그 이튿날 작은 뱀 한 마리가 나왔는데 푸른 색이었다. 이를 보고 다들 신의 화신이라 하니, 역시 팽려94)(彭려)를 순풍으로 건너게 한 이적과 같았다. 그래서 신물(神物)이란 없는 데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조정의 영검한 위력이 가는 곳이면 만맥(蠻貊)의 나라라도 통하는 것이다.


오룡묘 五龍廟

   오룡묘는 군산도(群山島)의 객관(客館) 서쪽 한 봉우리 위에 있다. 전에는 작은 집이 있었다. 그 뒤 두어 걸음 되는 데에다 지금 홀로 두 기둥이 있는 한 채의 집만을 새로 지었을 뿐이다. 정면에 벽이 서 있고 거기에 오신상(五神像)이 그려져 있는데, 뱃사람들은 그것을 퍽 엄숙하게 제사한다. 또 서남쪽 큰 수풀 가운데 작은 사당이 있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숭산신(崧山神)의 별묘(別廟)라 하였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8 권


도 교 道敎

   고려는 땅이 동해에 접해 있어서 틀림없이 도산(道山)・선도(仙島)와는 상거가 멀지 않을 것이다. 그 백성들이 장생불사하는 가르침을 사모할 줄 몰랐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나, 다만 중원(中原)에서는 앞서 대부분 정토(征討)를 일삼고 청정무위(淸淨無爲)의 도로 교화시킨 자가 없었던 것이다. 당실(唐祚)이 일어나는 혼원시조95)(混元始祖)를 섬겼다. 그래서 무덕(武德 당 고조의 연호.618∼626) 연간에 고려(고구려를 말함.)에서 사신을 보내어, 도사가 그 곳에 가서 오천언(五千言 노자의 도덕경을 말함.)을 강론하여 현미(玄微 심오한 이치)를 풀이해 주기를 간청하였던 것이다96). 고조(高祖 당 고조를 말함.618∼626재위)는 성군이었는지라 그것을 기틀하게 여겨 그 청을 다 들어주었다. 그때부터 비로소 도교를 숭상함이 불전(佛典)을 능가하였다.


   대관(大觀) 경인년(고려 예종5, 1110)에 천자께서 저 먼 고장에서 묘도(妙道)를 듣기를 원함을 돌보시어서 신사(信使)를 보내시고 우류(羽流 도사를 말함) 2인을 딸려 보내어 교법(敎法)에 통달한 자를 골라 훈도(訓導)하여 주게 하였다97). 왕 우(王俁 고려 예종(睿宗))는 신앙이 돈독하여 정화(政和 송 휘종의 연호,1111∼1117)연간에 비로소 복원관(福原觀)을 세워 도의 터득이 높고 참된 도사 10여인을 받을었다. 그러나 그 도사들은 낮에는 재궁(齋宮)에 있다가 밤에는 집으로 돌아가고는 하였다. 그래서 후에 간관(諫官)이 지적 비판하여서 다소간 법으로 금하는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간혹 듣기로는, 우(우)가 나라를 다스렸을 때는 늘 도가의 도록(圖錄 도가의 서적)을 보급하는 데 뜻을 두어 기어코 도교로 호교(胡敎 곧 불교)를 바꿔 버릴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해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것이 있는 듯하였다98).


도사 道士

   도사의 복장은 우의(羽衣 새털로 짜서 민든 도가의 옷)를 사용하지 않고, 백포(白佈)로 만든 갖옷에 조건(早巾 검정색 두건)과 사대(四帶 네 줄이 늘여 뜨려진 의대)를 입는데 평민의 의복과 비교하면 다만 그 소매가 좀 큼직할 따름이다.


석 씨 釋氏

   부처의 가르침은 천축(天竺 인도의 고칭.)에서 처음 나와 드디어는 사방의 이족(夷簇)들에 전파되어 그 법이 성하여졌다. 고려는 비록 바다 동쪽에 있기는 하나 듣기로는 청량법안99)(淸凉法眼)의 한 차가 동쪽으로 건너온 후에 승도들이 성리(性理)를 꽤 알게 되었다 한다. 한 번은보제사(普濟寺)의 승당(僧堂)에서 방을 걸어[揭榜] 대중에게 보이는 글을 본 일이 있는데 그 대략은 이러하다.


   “말[言]이 도를 싣기에 부족한 지가 오래 되었다. 대천경권(大千經卷무수한 북교경전을 말함)은다 병을 고쳐 주는 설이기는 하나 정법안장100)(正法眼藏)을 부촉(付囑)할 데가 없는지라, 세존(世尊)이 이에 꽃을 들어 보여 주었더니, 미소하는 자가 있었다101). 그런데 자손들에 내려와서는 언변으로 서로 나타내는 것을 담선(談禪 선을 이야기함)이라고들 부르니 망령되지 아니한가?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는 오직 가섭(迦葉) 하나 뿐이었으니 그런 깨달음을 뭇사람들에게 쉽사리 기대할 수가 있겠는가? 옛사람 조차도 양(羊)을 남기기를 좋아하여서 예(禮)의 큰 뜻을 잊지 않았거든102), 하물며 말[言說]이라는 도구는 족히 그 뜻을 얻을 수 있겠는가. 듣건데, 시를 설명하는 것은 그 생각으로 시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데103)우리 교종(敎宗) 역시 그러하다. 대체로 말로서는 생각을 찾지마는 생각이 따르는 곳을 말로는 전달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또한 잠자코 있으면서도 그것은 아는 법이 있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그과 말 같은 말단적인 것에 급급할 것인가?”


   이 수백 마디를 보니 깊이 종지(宗旨)를 터득하고 있다. 북상과 공구(供具 제물.향화 따위를 괴어 놓는 제구)가 모두 다 깨끗하고 표기의 장식과 비단 천개(天蓋 불상위 같은 데 설치 하는 덮개)는 질서가 정연하다. 대경(大經)으로는 화엄(華嚴)과 반야(般若)104)가 있고 작은 것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또 본래 중국에서 연구하여 중국어를 할 수 있는 자도 있어서, 낭송시켜 보았더니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들의 범패(梵唄)로 말하면 또 사투리여서 전연 분간할 수가 없다. 그들의 요발(饒跋 불가에서 쓰는 악기 이름.)은 생김새가 작고 소리가 시름겹고, 그들의 소라 소리는 호통을 치듯 매우 크다.


   앞서 원풍(元豊 송 신조의 연호. 1078-1085) 연간에 상절(上節)의 사신 송 밀(宋密)이 자연도(紫燕島)에서 죽었는데105), 그 후부터는 사신이 오면 반드시 제물사(濟物寺)에서 불승의 공양과 함께 제사를 드리고, 상절이 차례에 따라 무덤 아래에 둘러서서 베례하였다. 근자에 어명을 받들고 그곳에 가서도 역시 전례에 따랐다. 비록 생존자와 사망자 사이의 은의(恩義)는 물론 그럴 것이라고 하겠으나 사람의 마음이란 처음 이국에 가면 멀리 고향을 생각하게 되는지가, 느닷없이 객사한 무덤을 보고서는 눈물을 뿌리지 않는 사람이 없게 된다. 대체로 이역 땅에 사신을 가는 데는 요동이 가장 어려우니, 해양이 막혀 있어 위험이 오만 기지인데, 온전히 끝마치고 조종에 복명할 수 있게됨이 어찌 다행하지 읺겠는가? 본래 왕의 위령에 의지함이 아니라면 교룡과 조개의 뱃속에 장사지내지 않을 자가 극히 드물 것이니, 어씨 부처가 오로지 보호해 줄 수가 있겠는가? 이제 그 의복 제도를 그려서 이동(異同)을 고찰하여 보기로 하겠다.


국사 國師

   국사의 칭호는 대체로 중국에 승직의 강유(綱維)106)가 있는 것과 같다. 그 위의 한 등급은 왕사(王師)라고 하는데 왕이 만나면 그에게 배례를 한다. 다 산수납가사(山水衲袈裟)107)와 긴 소매의 편삼108)(偏衫)과 금발차109)(金跋遮)를 착용하고, 아래에는 자상(紫裳)과 오혁검리110)(烏革鈐履)가 있다. 인물과 의복은 비록 대략은 중국과 같지마는 고려인은 대개 머리에 침골(枕骨 후두부에 돌출한 뼈.)이 없으나 중이 되어 머리를 깍아 버리면 그것이 보이는데 퍽 놀랍고 이상하다. ‘진사’(晉史)에는, ‘삼한(三韓)’ 사람들은 갓난아이를 곧 돌로 그 머리를 눌러 넙적하게 만든다고 하였으나 옳지 않다. 대체로 종류와 타고난 자품에 그렇게 되는 것이지 반드시 돌 때문에 넙적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삼중화상대사 三重和尙大師

   삼중화상 장도(張度)는 율사111)(律師)의 종류이다, 자황첩상복전가사112)(紫黃貼相福田袈裟)와 긴 소매의 편삼을 입고, 아래는 역시 자상(紫裳)이다. 지위는 국사 아래에 있고 경론(經論)을 강설하며 성종113)(性宗)을 전습시킨다.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언변이 좋고 박식한 이를 택해서 그 일을 시킨다.


아사리대덕 阿闍梨大德

   아사리114)대덕은 삼중화상보다 한 등 떨어진다. 교문(校門)의 직무를 분답하는데, 그 옷은 짧은 소매의 편삼(偏衫)과 괴색(壞色 진한 고동색) 괘의115)(掛衣)에 오조116)(五條)이고, 아래는 황상(黃裳)이 있다. 국사와 삼중은 몇 사람에 불과하고 아사리 한 등급은 사람수가 극히 많은데 그 취지를 알아보지 못했다.


사미비구 沙彌比丘

   사미비구117)는 어려서부터 출가(出家)하여 수구118)(受具)를 거치지 않은 자이다. 괴색의 포의(布衣)로 역시 첩상(貼相 첩상가사를 말함)이 없다. 계율이 높아져야 비로소 자복(紫服)으로 바꾸고, 차례에 따라 옮겨지고 올라가고 한 뒤에야 납의(衲衣)를 갖게 된다. 대체로 고려의 승복은 마납119)(磨衲)만을 가장 존중한다.


재가화상 在家和尙

   재가화상은 가사를 입지 않고 계율을 지키지 않으며, 흰 모시의 좁은 옷에 검정색 깁으로 허리를 붂고 맨발로 다니는데. 간혹 신발을 신은 자도 있다. 거처할 집을 자신이 만들며 아내를 얻고 자식을 기른다. 그들은 관청에서 기물을 져 나르고 도로를 쓸고 도랑을 내고 성과 집을 수축하는 일들에 다 종사한다.변경에 경보가 있으면 단결해서 나가는데 비록 달리는 데 익숙하지 않기는 하나 자못 씩씩하고 용감하다. 군대에 가게 되면 각자가 양식을 마련해 가기 때문에 나라의 경비를 소모하지 않고서 전쟁할 수 있게 된다. 듣기로는 중간에 거란이 고려인에게 패전한 것도 바로 이 무리들의 힘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사실 형벌을 받은 복역자들인데, 이족(夷簇)의 사람들은 그들이 수염과 머리를 깎아 버린 것을 가지고 화상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9 권


민 서 民庶

   고려는 땅이 넓지 못하나, 백성이 매우 많다. 사민(四民)의 업(業) 중에 유(儒 선비)를 귀히 여기므로, 그 나라는 글을 알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산림이 지극히 많고 땅이 넓고 평평한 데가 적기 때문에, 경작하는 농민이 공장이를 따르지 못한다. 주(州)나 군(郡)의 토산(土産)은 다 관가의 공상(公上)에 들어가므로, 장사치는 멀리 나들이하지 않는다. 다만 대낮에 고을에 가서 각각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서로 바꾸는 것으로서 만족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은혜를 베푸는 일이 적고 여색[色]을 좋아하여, 분별 없이 사랑하고 재물을 중히 여기며, 남자와 여자의 혼인에도 경솔히 합치고 헤어지기를 쉽게 하여120), 전례(典禮)를 본받지 않으니 진실로 웃을 만한 일이다. 지금 그 나라의 백성을 그림으로 그리되 진사(進士)를 편(篇) 머리에 둔다.


진사 進士

   진사의 이름도 하나가 아니어서 왕성(王城) 안에서는 토공(土貢)이라 하고, 군읍(郡邑)에서는 향공(鄕貢)이라 한다. 국자감(國子監)에 모여서 거의 4백명을 합시(合試)한 뒤에 왕이 친시하여, 시(時)・부(賦)・논(論) 세 제목을 시험보여 합격하는 이에게 벼슬을 준다. 정화(政和) 연간에 학생(學生) 김단(金端) 등을 입조(入朝)케 하매 은사과(恩賜科)에 합격하니, 이로부터 선비를 뽑을 때 경술(經術)과 시무책(時務策)으로, 그 고부를 견주고 우열(優劣)을 시합하여 고하(高下)를 정하였으므로, 이제 유(儒)를 업(業)으로 하는 자가 더욱 많아지니,이는 중국을 향모(向慕)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지사의 복식은 사대문라건(四帶文羅巾)을 쓰고, 검은 주[筽紬]로 웃옷[衣]을 하고 검은 띠에 가죽신을 신고, 공(貢)에 들면 모자를 더 쓰고121), 급제하면 청개(靑蓋)와 복마(僕馬)를 주어 성안에 크게 놀아 영관122)(榮觀)을 삼는다 한다.


농상 農商

   농상의 백성은, 농민은 빈부할 것 없이, 장사치는 원근할 것 없이 다 백저포123)(白紵袍)를 만들고, 오건(烏巾)에 네 가닥 띠를 하는데, 다만 베의 곱고 거친 것으로 구별한다. 나라의 벼슬아치나 귀인(貴人)도 물러가 사가(私家)에서 생활할 때면 역시 이를 입는다. 다만 두건(頭巾)의 띠를 두 가닥으로 하는 것으로 구별하고 간혹 거리를 걸어갈 때에도 향리(鄕吏)나 백성들이 이 두 가닥 띠를 보고는 피한다.


공기 工技

   고려는 공장이의 기술이 지극히 정교하여, 그 뛰어난 재주를 가진 이는 다 관아(官衙)에 귀속되는데, 이를테면 복두소124)(僕頭所)・장작감125)(將作監)이 그 곳이다. 이들의 상복(常服)은 흰 모시 도포에 검은 건이다. 다만 시역을 맡아 일을 할 때에는 광에서 붉은 도포[紅袍]을 내린다. 또 듣자니, 거란(契丹)의 항복한 포로 수만 중에 공장이가 열 중에 하나는 있는데. 그 정교한 솜씨를 가진 이를 왕부(王府)에 머물게 하여, 요즈음 기복(器服)이 더욱 공교하게 되었으나, 다만 부화스럽고 거짓스러운 것이 많아 전날의 순박하고 질박(質朴)한 것을 회복할 수 없다.


민장 民長

   민장의 명칭은 중국의 향병(鄕兵)이나 보오(保伍)의 장과 같다. 즉 백성 가운데 부족(富足)한 자를 뽑아 시키되, 그 마을의 큰 일이면 관부(官府)에 가되 작은 일이면 곧 민장에게 속하므로 거기 사는 세민(細民)들이 자못 존중하고 섬긴다, 그 복식은 문라(文羅)로 건(巾)을 하고 검은 주(紬)로 갖옷을 하고 혹각 대를 띠고 검은 가죽의 구리126)(句履)를 신으니, 또한 아직 공(貢)에 들지 않은 진사(進士)의 복식과 서로 닮았다.


주인 舟人

   고려의 두건127)(頭巾)은 다만 문라(文羅)를 중히 여겨 한 건의 값이 쌀 한 섬[石] 값이 되어 가난한 백성은 이를 장만할 만한 밑천은 없고, 또 알상투를 하여 죄수(罪囚)와 다름없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기 때문에, 죽관128)(竹冠)을 만들어 쓰는데, 모나기도 하고 둥글기도 하여 전혀 일정한 제도가 없다. 짧은 갈(褐 거친 옷)을 입고, 아래에는 바지를 걸치지 않는다. 배마다 10여인이 밤에는 갑판을 올리고 삿대를 뚜드리며 노래 부르며 서로 화답하여 시끄럽기가 거위와 따오기의 무리가 우는 것 같아 조금도 소리의 곡조나 감정이 없으니 대개 그 풍속이 그러하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0 권


부 인 婦人

   삼한(三韓)의 의복 제도는 염색(染色)한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고, 꽃무늬를 넣는 것을 금제(禁制)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사(御使)를 두어 백성의 옷을 살펴 무늬를 넣은 비단과 꽃부늬를 넣은 비단을 입고 있는 자가 있으면, 그 사람을 죄주고 물건을 압수하므로 백성이 잘 지키어 감히 어기는 자가 없다. 옛 풍속에, 여자의 옷은 흰모시 노랑치마인데, 위로는 왕가의 친척과 귀한 집으로부터 아래로는 백성의 처첩에 이르기까지 한 모양이어서 구별이 없다 한다. 얼마 전에 세공(歲貢) 사신이 중국 궁궐에 이르러 조정에서 내리는 십등관복(十等冠服)을 얻어와 드디어 이를 본받아129), 지금은 왕부(王府)와 국상(國相)의 집에도 자못 중국풍이 있으니, 다시 세월이 지나가년 다 중국풍이 될 것 같다. 이제 잠깐 그 중국과 다른 것만 골라, 이를 그림으로 그린다.


귀부 貴婦

   부인의 화장은 향유(香油) 바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분을 바르되 연지는 칠하지 아니하고, 눈썹은 넓고 ,검은 비단으로 된 너울130)을 쓰는데, 세 폭으로 만들었다. 폭의 길이는 8척이고, 정수리에서부터 내려뜨려 다만 얼굴과 눈만 내놓고 끝이 땅에 끌리게 한다. 흰모시로 포(袍)를 만들어 입는데 거의 남자의 포와 같으며, 무늬가 있는 비단으로 너른 바지를 만들어 입었는데 안을 생명주로 받치니. 이는 넉넉하게 하여 옷이 몸에 붙지 않게 함이다. 감람(橄攬)빛 넓은 허리띠(革帶)를 띠고, 채색 끈에 금방울[金釋]을 달고, 비단(錦)으로 만든 향낭(香囊)을 차는데, 이것이 많은 것으로 귀하게 여긴다. 부잣집에서는 큰자리를 깔고서 시비(恃妃)가 곁에 늘어서서 각기 수건(手巾)과 정병(淨甁)을 들고 있는데 비록 더운 날이라도 괴롭다 하지 않는다. 가을과 겨울의 치마는 간혹 황견(黃絹)을 쓰는데. 어떤 것은 진하고 어떤 것은 엷다. 공경대부(公卿大夫)의 처와 사민(士民)의 처와 유녀(遊女 기생)의 복색에 구별이 없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왕비(王妃)와 부인(夫人)은 홍색을 숭상하여 더욱 그림과 수를 더하되, 관리나 서민의 처는 감히 이를 쓰지 못한다.’고 한다.


비첩 婢妾

   궁부(宮府)에는 후궁(後妾)이 있고, 관리에게는 첩(妾)이 있는데, 백성의 처나, 잡역에 조사하는 비자(婢子)도 복식이 서로 비슷하다. 그들은 일을 하고 구실을 들기 때문에 너울을 아래로 내려뜨리지 아니하고, 머리 정수리에 접어올리며131)옷을 걷고 다니며, 손에는 부채를 잡았으나 손톱 보이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많이들 붉은 한삼으로 손을 가린다.


천사 賤使

   부인의 머리는 귀천이 한가지로 오른 쪽으로 드리우고, 그 나머지는 아래로 내려뜨리되 붉은 깁으로 묶고 작은 비녀를 꽂는다.132)가난한 집에서는 다만 너울이 없으니, 대개 그 값이 은(銀) 한근과 맞먹어 살 힘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며, 금제(禁制)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또 두르는 치마를 입되 8폭으로 만들어 겨드랑이에 높이 치켜 입는데, 주름이 많은 것을 좋아한다. 그 부귀한 자 처첩들의 치마는 7∼8필을 이은 것이 있으니133), 더욱 우스운 일이다. 숭녕(崇寧 송 휘종의 연호) 연간에 종신(從臣) 유 규(劉逵)와 오 식(吳拭) 등이 사명을 받들고 고려에 갔을 적에 칠석(七夕)을 만났다. 마침 관반사(館伴使). 유신(柳伸) 이 무악(舞樂)하는 기녀[女倡]를 돌아보며 정사・부사에게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머리를 빗어 늘어뜨리니, 필시 옛 추마계134)(墜馬磎)인가 합니다.”

하매, 유 규 등이 대답하기를,

“추마계는 동한(東漢) 양 기(梁冀)의 처 손 수(孫讐)가 한 것이니, 본받을 만한 것이 못 되는 것 같소이다.”

하니, 신(伸) 등이 그렇게 여겼다 한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를 고치지 못하니, 아마 이는 그 옛풍속의 퇴결135)(堆結)로 말미암아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귀녀 貴女

   만이(蠻夷)의 옷이 비록 거의 같은 종류이나, 또한 정한 제도가 없는 것 같다. 사신이 처음에 성(城)에 들어갈 적에 길옆 누관(樓觀) 사이에 난간에 의지하고 있는 귀녀를 가끔 보았다. 이는 아직 시집가지 않은 겨우 열살 남짓한 여자였는데도 머리를 풀지 않았고, 황의(黃衣)는 또한 여름 복식으로는 마땅한 것이 아니기에, 시험삼아 이를 힐문하였으나 끝내 이를 자세히 알지 못했다. 어떤 이가 ‘왕부(王府) 소아의 옷이다.’하였다.


여자 女子

   서민(庶民)들의 딸은 시집가기 전에는 붉은 깁[紅羅]으로 머리를 묶고 그 나머지를 아래로 늘어뜨리고, 남자도 같으나 붉은 깁을 검은 노[黑羅]로 대신할 뿐이다.


부 負

   고려의 법이 관비(官婢)를 두어 대대로 물려오기 때문에 왕부(王府)로부터 국리나 도관(道觀)이나 사찰(寺刹)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들을 주어 구실들게 하였다. 그들이 일할 적에 어깨에 멜 힘이 없으면 등에 지는데, 그 행보가 빨라 남자라도 미치지 못할 정도이다.


대 戴

   지고 이는 일이 그 노고는 한가지다. 물이나 쌀이나 밥이나 마시는 것이나 다 구리항아리에 담았으므로 어깨에 메지 않고 머리 위에 인다. 항아리에는 두 귀가 있어 한 손으로는 한 귀를 붙들고 한 손으로는 옷을 추키고 가는데, 등에는 아이를 업었다.

경서(經書)를 상고하면 ‘머리 희뜩희뜩한 자가 도로에 지고 이지 않는다.’함은, 그 힘을 쓰는 것이 진실로 근골에 고통을 주는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아이마저 등에 업었으니, 소위 그 아이를 포대기에 싸업고 살기 좋은 곳으로 찾아온다는 것인가?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1 권


조 례 早隷

   여러 만이(蠻夷)의 나라들이 이마를 파서 물들이고 다리를 꼬아 앉고 머리를 풀고 몸에 환을 그리고, 승냥이와 이리와 같이 살고 사슴과 더불어 논다 하니, 어찌 또 관원과 서리를 두는 법을 알겠는가? 오직 고려는 그렇지 않아, 의관(衣冠)과 예의(禮儀)며 군신 상하에 찬연히 법도가 있어서 그것으로 상접(相接)한다. 안으로 대․성․원․감(臺省院監)을 두고 밖으로 주․부․군․읍(州府郡邑)을 두어 직(職)을 나누고 서리[吏]를 뽑아136)일을 맡기고, 위에서 그 강목(綱目)만을 들 뿐이고, 아래에 있는 자는 번다스럽고 어려운 일을 맡으니, 비록 나라의 일이라도 간략하고 이치에 닿아, 적을 치고 도적을 잡으려 백성을 부르면, 다만 편지(片紙) 몇 자면 백성이 모이는 기한을 어기지 않는다. 고로 중서급사(中書給事) 중추당관(中樞堂官)으로부터 그 민장(民長)에 이르기까지 감히 태만할 수 없다. 그 나라의 관리(官吏)를 길에서 만나면 반드시 꾸부려 무릎 꿇고 절하고 국공(鞠恭)을 한다. 언사(言事)가 있으면 무릎걸음으로 꾸부리고 나아가서 손을 위로 하고 얼굴을 낮추어 듣고 이를 받드니, 오랫동안의 중국의 영향이 없으면 능히 이렇게 될 수 있겠는가? 이제 이직(吏職)으로부터 구사(驅使)에 이르기까지 아울러 아래에 그림을 벌여 그린다.


이직 吏職

   서리(胥吏)의 복색은 서관(庶官)의 복색과 다를 바가 없다. 다만 녹의137)(綠衣)에 때로 진하고 엷은 것이 있다. 예로부터 전하는 말에는, ‘고려는 당(唐)의 제도를 모방하여 푸른[碧] 옷을 입는다’ 하나, 이제 물어 보니 틀린다.

그게 그 대개 나라는 백성이 가난하고 그 풍속이 검약하여 도포[袍] 하나의 값이 거의 은[白金] 한 근(斤)이나 되매, 항상 빨아서 다시 물들이니 색이 진하여 푸른 것 같을 뿐이요, 한 복색이 아니라 한다. 그러나 성부(省府)의 보리(補吏)는 유품(流品)에 한하지 않고 귀가(貴家)의 자제도 때로는 이것이 된다. 지금이 청복(靑服)은 곧 서리(胥吏)의 세습하는 자만이 입는다.


산원 散員

   산원의 복장은 붉은 깁의 소매 좁은 옷138)[紫羅穿衣]을 입고 복두에 가죽신을 신는데, 중국의 반직(班直)이나 전시(殿侍) 따위와 같은 것이다. 무신(武臣)의 자제로서 병위(兵衛)에 구실든 자로 이를 보한다. 중국 사신이 이를 때마다 소반을 받들고 술잔을 들이며 옷을 들고 수건을 받드는 데 다 이들을 쓴다.


인리 人吏

   인리의 칭(稱)은 성부(省府)의 직에 비할 바 아니다. 대개 창름사(倉름司)는 주현(州縣)에 속하여 금곡(金穀)이나 포백(布帛)같은 것을 출납(出納)하는 자로서 검은 옷[皁衣]에 복두를 쓰고 검은 가죽의 구리(句履)를 신는다. 때로는 시가(市街)의 많은 사람이 있는 데서 이를 볼 수 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관부(官府)에 들어갈 때는 간혹 색의(色衣)로 갈아입는 자가 있다고 한다.


정리 丁吏

   정리는 정장(丁壯)한 사람을 처음으로 서리(胥吏)에 둔 자들이다. 옛 설에 의하면 전(轉)하여 ‘정례’(頂禮)라 하였다는데, 대개 이것은 어음(語音)이 잘못된 것이다. 이로부터 뽑아 올려 서리로 삼고, 이 서리를 거친 뒤에 관직을 준다. 높은 관으로부터는 각각 정리(丁吏)를 주어 심부름을 시키는데, 관품(官品)에 따라 많고 적은 차이를 두었다. 그들이 보통 일을 볼 때는 문라(文羅)의 두건을 쓰되, 중국 사신이 오면 여기에 책(巾責)을 보태어 쓴다. 높은 신하마다 따르는 자가 한두 명이니, 다만 반관(伴官)이나 굴사(屈使)에 시중드는 자나 정사(正使)나 부사(副使)에 내리는 자나 같은 복색을 하고 있다.


방자 房子

   방자는 사관(使館)의 심부름을 하는 자들이다. 각방에 사신과 부사로부터 관의 높낮음에 따라 많고 적고의 차이가 있다. 그 복색은 문라(文羅)의 두건에 붉은 옷[紫衣]에 각대139)(角帶)와 검정신[皁履]을 신는데, 응대를 잘하는 자만을 선택하여 방자를 삼는다. 그 몸가짐을 보니 매우 근직하게 법을 시키고 또 붓글씨를 잘 쓴다. 고려의 봉록(俸祿)이 지극히 박해서 다만 생쌀과 채소를 줄 뿐이며 또 상시에 고기를 먹는 일이 드물어서, 중국 사신이 올 때는 바로 대서(大暑)의 계절이라 음식이 썩어 냄새가 지독한데, 먹다 남은 것을 주면 아무렇지 않게 먹어 버리고 반드시 그 나머지를 집으로 가져간다. 접대례를 마치고 관(館)을 물러날 때에는 몇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니, 대개 고려 사람이 중국에 대하여 동경심이 있어 그 정이 두텁기 때문에 방자라도 그렇게 떨어지기 섭섭해 한다.


     소친시 小親侍

   소친시는 붉은 옷[紫衣]에 두건을 쓰고, 또 머리를 아래로 내려뜨렸는데, 대개 궁중에서 부리는 아이들이다. 왕의 귀척(貴戚)이나 종신(從臣)에게도 때로 내려 준다. 고려 사람이 대개 아직 장가들지 않은 자는 다 건[巾]으로 머리를 싸고 뒤에 머리를 내려뜨리다가 장가든 뒤에 속발(束髮 머리를 묶고 한 가닥을 내려뜨리는 것)을 하는데, 소친시는 다 겨우 여남은 살이기 때문에, 조금 자라면 궁을 나간다 한다140).


구사 驅使

   구사란 선랑(仙郞)과 비슷한데, 대저 다 아직 장가들지 않은 자들이다. 귀한 집에 있는 자제들은 이를 ‘선랑’(仙郞)이라 한다. 그러므로 그 옷은 사(紗)나 나(羅)인데, 모두 검정색[皁]이다. 또 같은 것이 있는데 삼수(삼袖 소매의 중도막에서 다른 천을 대어 만든 넓은 소맷부리)가 달린 옷을 입고 검은 건을 썼으니, 곧 서관(庶官)이나 소리(小吏)의 노자(奴子)인데 이름하여 구사(驅使)라 한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2 권


잡 속 1 雜俗一

   왕제(王制)에 넓은 들과 큰 내로도 제도(制度)를 달리하고, 백성이 그 사이에 생활하여 풍속을 달리한다 하였으니, 그 이른바 넓은 들과 큰 내는 애초부터 반드시 먼 지방이나 절원한 지역이 아닐 것이다. 특히 중국의 땅이라도, 내[川]의 풍속도 혹 다르면, 습속이 각기 달라서 다 같을 수는 없는 것인데, 하물며 만이(蠻夷)의 한계가 바닥 밖에 있으니, 그 풍속이 한 가지일 수 있겠는가? 고려는 여러 이적(夷狄)의 나라 가운데서 문물 예의(文物禮義)의 나라라 일컫고 있다. 그 음식은 조두(俎豆)를 사용하고 문자는 해서(楷書)와 예서(隸書)에 맞춰 쓰고, 서로 주고받는 데 절하고 무릎을 꿇으니 공경하고 삼가는 것이 족히 숭상할 만한 것이 있다. 그러나 그 실제로는 풍속이 박잡하여 오랑캐 풍속을 끝내 다 고치지 못했다. 관혼상제141)(冠婚喪祭)는 예(禮 예기(禮記))에 말미암은 것이 적고, 남자의 건책(巾責)은 조금 당제(唐制)를 본받고 있으나 부인의 딴 머리를 아래로 내려뜨리는 것은 아직 완연히 좌수(좌首) 변발(변髮)의 모습이 있고, 귀인이나 선비 집안에서는 혼가(婚嫁)에 대략 빙폐(聘幣)를 쓰나 백성에 이르러서는 다만 술이나 쌀을 서로 보낼 뿐이다. 또 부가(富家)에서는 아내를 3~4인이나 맞이하되 조금만 맞지 않아도 바로 이혼하고, 아들을 낳으면 딴 방에 거처하고, 병을 앓을 때는 비록 가까운 가족이라도 약을 들이지 않으며, 죽어 염(殮)할 때 관에 넣지 않는다. 비록 왕이나 귀족에 있어서도 그러니, 만약 가난한 사람이 장사지내는 기구가 없으면 들 가운데 버려 두어 봉분도 하지 않고 비도 세우지 않으며 개미나 까마귀나 솔개가 파먹는 대로 놓아두되142), 다 이를 그르다고 하지 않는다. 제사 지내기를 좋아하고 부도(浮屠)를 좋아하며, 종묘(宗廟)의 사당에도 중을 참배시켜 가패(歌唄)를 부르고 말을 하는데 통하지 않는다. 욕심이 많고 회뢰(賄賂)가 성행하며, 길을 다닐제 달리기를 좋아하고 섰을 적에는 허리 뒤에 손을 얹는 자가 많으며, 부인이나 승니(僧尼)가 다 남자의 절을 하니, 이런 것들은 가히 해괴(駭怪)한 것들이다. 자질구레한 것의 도리에 맞지 않은 것을 들려면 한두 가지가 아니로되, 지금 잠깐 귀로 듣고 눈으로 본 바를 모아 그림으로 그리고 아울러 토산(土産)과 자양(資養)의 물건을 아래에 붙인다.


정료 庭燎

   고려의 풍속이 밤에 술마시는 것을 좋아하며, 더우기 사신 접대하기를 더욱 삼가한다. 항상 잔치가 파하면 한밤중을 넘어 산이나 섬․주․군의 교․정․관․사에는 모두 뜰 가운데 홰를 묶어 불을 밝히고, 산원(散員)들이 이 홰를 잡고 사신이 숙관(宿館)에 돌아갈 때면 앞에 나열하여 서로 나란히 간다.


병촉 秉燭

   왕부(王府)의 공회(公會)에 옛날에는 촛불을 쓰지 못하였으나, 요즈음은 차차 잘 만들어 큰 것은 서까래와 같고 작은 것도 길이가 2척에 이르나 끝내 시원히 밝지는 못하다. 회경(會慶)이나 건덕(乾德)에서 잔치를 할 때는 뜰 가운데 홍사(紅紗)의 초롱[燭籠]을 마련하고 녹색(綠色)의 옷을 입은 이가 띠와 홀(笏)을 잡고 있다. 이를 물어보니 말하기를, ‘새로 입사(入仕)한 사람이라.’ 한다. 옛 기록에 이르기를, ‘새로 급제한 사람이라.’ 하였으나 이제야 다 같은 유품143)(流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설호 挈壺

   설호의 직은 그 명칭과 구실이 옛날과 비슷하다. 이들은 시각(時刻)을 따라 북을 치는 것으로 시간을 알리는데 중정(中庭)에 기둥을 세우고서 패를 건다. 매시 정각에 한 붉은 옷[紫衣]를 입은 자가 시각 패를 받들고 왼편에 서고, 한 녹의(綠衣)를 입은 자가 몸을 구부려 ‘···시’라고 알린 뒤에 기둥으로 가서 패를 바꿔 놓고 물러간다.


향음 鄕飮

   고려의 풍속이 술과 단술을 중히 여긴다. 공회 때에는 다만 왕부(王府)와 국관(國官)만이 상탁(牀卓)과 반찬(盤饌)이 있을 뿐, 그 나머지 관리와 사민은 다만 좌탑144)(坐榻)에 앉을 뿐이다. 동한(東漢)에서는 예장태수(豫章太守) 진 번(陳蕃)이 서 치(徐稚)를 위하여 한 탑(榻)을 마련하였을 뿐인즉 전고(前古)에도 이 예법(禮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고려인은 탑 위에 또 소조(小俎 작은 소반)를 놓고, 그릇에는 구리[銅]를 쓰고 숙석(魚肅月昔)과 어채(魚菜)를 섞어서 내오되 풍성하지 않고, 또 주행(酒行 순배(巡杯))에도 절도가 없으며 많이 내오는 것을 힘쓸 뿐이다. 탑마다 다만 두 손[客]이 앉을 뿐이니, 만약 빈객이 많이 모이면 그 수에 따라 탑을 늘려 각기 서로 마주 앉는다. 나라 안에 밀이 적어 다 장사치들이 경동도145)(京東道)로부터 사오므로 면(麵)값이 대단히 비싸서 큰 잔치가 아니면 쓰지 않는다. 식품 가운데도 나라에서 금하는 것이 있으니, 이 또한 웃을 만한 일이다.


  치사 治事

   고려의 정사(政事)가 간편한 것을 숭상하므로 소송의 문서 같은 것은 간략하게 하여 글로 기록하지 않는다. 관부에서 일을 다스릴 적에도 앉아서 책상에 의지하지 않고, 다만 걸상에 앉아서 지휘할 따름이다. 아전이 안독146)(按牘)을 받들어 무릎꿇고 앞에서 아뢰면, 웃사람은 듣고 즉시 비결147)(批決)하되, 뒤에 상고하기 위하여 남겨 놓는 일이 없고 일이 끝나면 버리고 문서고[架]를 마련하지 않는다. 다만 중국의 조명(詔命)이나 신사(信使)의 글은 왕부의 창고에 잘 간수하여 비검(備檢 상고를 위한 검사)거리로 삼는다. 음식을 공궤하고 세숫물을 받들 적에는 머리를 숙이고 무릎걸음으로 가며 높이 손을 받들어 이를 바치니, 그 위의가 매우 공손하다. 이적(夷狄)으로 능히 그러니 가상한 일이다.


답례 答禮

   고려의 풍속은 관리(官吏)나 병졸이 기율이 엄하기는 하나 평소에는 자질구레한 예를 일삼지 않는것 같다. 무릇 국상(國相)이나 종관(從官)도 자기 소속이 왕래하다가 서로 만나면, 반드시 얼굴을 가다듬고 기립한다. 통할이 없는 나머지 관원이나 이졸(吏卒)들이 오래 서로 보지 못했으면 비록 네거리나 궁정에서라도 반드시 배례를 하는데 관(官)에 있는 자도 역시 구부렸다가 펴서 답배(答拜)하는 시늉을 한다. 대저 남에게 예하되 답하지 않으면 공경했는가를 반성해 보라. 예를 잃으면 이를 야(野)에 구하라 하였으니, 대략 여기에서 볼 수 있다.


급사 給使

   급사(給使) 같은 천인도 관품에 따라 많고 적음의 숫자가 다르다. 국상(國相)에는 정리(丁吏)가 4인이요, 구사(驅使)가 30인이요, 영관(令官)은 이의 배이다. 앞에는 청개(靑蓋)가 있는데 이를 가지고 수십 보 밖에 있다. 승마(乘馬)에는 두 사람으로 고삐를 잡게 한다.

국상 이하는 그 수가 줄어지며, 앞에 청개를 베풀지 아니하고, 말을 타되 두 사람으로 고삐 잡히지 못한다.

백성은 말을 타되 오직 자기 스스로 고삐를 잡을 뿐이다.

정리는 대개 전구가 되고 급사는 수건이나 병에 딸린 물건을 가지고 뒤에 따른다. 열경148)(列卿) 이상은 정리가 3인, 구사가 20인이요, 정랑(正郞)은 정리가 2인, 구사가 15인이요, 원랑149)(員郞) 이상은 정리가 1인, 구사가 10인이요, 초품(初品)은 같이 3인을 내리되 다 관노예(官奴隸)이며 대대로 물려받는다.


여기 女騎

   부인의 출입에도 역시 말과 노복과 청개(靑蓋)를 공급하는데, 이는 공경(公卿)이나 귀인의 처이고 따르는 종자가 2~3인에 지나지 않는다. 검은 깁으로 너울을 만들어 쓰는데 끝이 말 위를 덮으며, 또 갓을 쓴다. 왕비(王妃)와 부인(夫人)은 다만 다홍으로 장식을 하되 거여(車輿)는 없다. 옛 당(唐)나라 무덕(武德 618~626)․정관(正觀 627~649) 연간에 궁인이 대개 말을 타고 너울을 하고 전신을 가렸다고 하는데, 지금 고려의 풍속을 보니 너울의 제도가 어찌 당 나라 때 멱라(冪羅)의 유법이 아니겠는가?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3 권


잡 속 2 雜俗二


한탁 澣濯

   옛 사서에 고려를 실었는데 그 풍속이 다 깨끗하다 하더니, 지금도 그러하다. 그들은 매양 중국인의 때가 많은 것을 비웃는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목욕을 하고 문을 나서며, 여름에는 날마다 두 번씩 목욕을 하는데 시내 가운데서 많이 한다. 남자 여자 분별없이 의관을 언덕에 놓고 물구비 따라 몸을 벌거벗되, 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의복을 빨고 깁이나 베를 표백하는 것은 다 부녀자의 일이어서 밤낮으로 근로해도 어렵다고 하지 않는다. 우물을 파고 물을 깃는 것도 대개 내에 가까운데서 하니, 위에 도롱태[鹿轤]를 걸어 함지박으로 물을 깃는데, 그 함지박의 모양이 배의 모양과 거의 같다.


종예 種蓺

   나라의 강토가 동해에 닿아 있고 큰 산과 깊은 골이 많아 험준하고 평지가 적기 때문에 밭들이 산간에 많이 있는데, 그 지형의 높고 낮음에 따랐으므로 갈고 일구기가 매우 힘들며 멀리서 바라다보면 사다리나 층층계와도 같다. 그 국속이 감히 사전(私田)150)을 가질 수 없고, 대략 구정(丘井)의 제도같은 것이 있는데 관리(官吏)나 민병(民兵)에게 등급[秩序]의 고하에 따라 나라에서 내려준다. 국모(國母)⋅왕비(王妃)⋅세자(世子)⋅왕녀(王女)에게는 다 탕목전(湯沐田)151)이 있는데, 1백 50보(步)를 1결(結)이라 한다. 백성이 8세가 되면 관에 문서를 내어 전(田)을 분배받되 결수에 차이가 있고 국관(國官)이하 병리(兵吏)⋅구사(驅使)⋅진사(進士)⋅공기(工技)에 이르기까지 일이 없으면 밭[田]에 일하게 하고, 변방의 수자리에는 쌀을 대어준다. 그 땅에 황량(黃梁)⋅흑서(黑黍)⋅한속(寒粟)⋅참깨[胡麻]⋅보리⋅밀 등이 있고, 그 쌀은 멥쌀이 있으나 찹쌀은 없고, 쌀알이 특히 크고 맛이 달다. 소 쟁기나 농구는 중국과 대동소이하므로 생략하고 싣지 않는다.


어 漁

   고려 풍속에 양과 돼지가 있지만 왕공이나 귀인이 아니면 먹지 못하며, 가난한 백성은 해산물을 많이 먹는다. 미꾸라지[鰌]⋅전복[鰒]⋅조개[蚌]⋅진주조개[珠母]⋅왕새우[蝦王]⋅문합(文蛤)⋅붉은게[紫蟹]⋅굴[蠣房]⋅거북이다리[龜脚]⋅해조(海藻)⋅다시마[昆布]는 귀천없이 잘 먹는데, 구미는 돋구어 주나 냄새가 나고 비리고 맛이 짜 오랜즉 싫어진다. 고기잡이는 썰물이 질 때에 배를 섬에 대고 고기를 잡되, 그물은 잘 만들지 못하여 다만 성긴 천으로 고기를 거르므로 힘을 쓰기는 하나 공을 보는 것은 적다. 다만 굴과 대합들은 조수가 빠져도 나가지 못하므로, 사람이 줍되 힘을 다하여 이를 주워도 없어지지 않는다.


초 樵

   나뭇꾼은 원래 전업이 없고 다만 일의 틈이 있으면 소년이나 장년이 힘에 따라 성밖의 산에 나가 나무를 한다. 대개 성 부근의 산은 음양설에 의해 사위가 있다하여 나무하는 것을 허용하지 아니한다.152)그러므로 그 가운데에는 아름드리 큰 나무가 많아 푸른 그늘이 사랑할 만하다. 사신이 관에 머물러 있는 동안이나 배에 오르더라도 다 공급을 맡은 자가 있어 때고 끓이는 나무를 대는데, 어깨에 메는 것은 잘하지 못하고 등에 지고 다닌다.


각기 刻記

   고려의 풍속에 주산(籌算)이 없어 관리가 돈이나 천을 출납할 때, 회계리는 조각나무에 칼을 가지고 이를 그으니, 한 물건을 기록할 때마다 한 자국을 긋고 일이 끝나면 내버리고 쓰지 않으며, 다시 두었다가 계고(稽考)를 기다리지 아니한다. 그 정치가 매우 간단한 것은 또한 옛 결승(結縄)이 끼친 뜻인가 한다.


도재 屠宰

   고려는 정치가 심히 어질어 부처를 좋아하고 살생을 경계하기 때문에 국왕이나 상신(相臣)이 아니면, 양과 돼지의 고기를 먹지 못한다. 또한 도살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다만 사신이 이르면 미리 양과 돼지를 길렀다가 시기에 이르러 사용하는데, 이를 잡을 때는 네 발을 묶어 타는 불 속에 던져, 그 숨이 끊어지고 털이 없어지면 물로 씻는다. 만약 다시 살아나면, 몽둥이로 쳐서 죽인 뒤에 배를 갈라 장위(腸胃)를 다 끊고, 똥과 더러운 것을 씻어낸다. 비록 국이나 구이를 만들더라도 고약한 냄새가 없어지지 아니하니, 그 졸렬함이 이와 같다.


시수 施水

   왕성(王城)의 장랑(長廊)에는 매 10간(間)마다 장막을 치고 불상을 설치하고, 큰 독에 멀건 죽을 저장해 두고 다시 국자를 놓아 두어 왕래하는 사람이 마음대로 마시게 하되, 귀한 자나 천한 자를 가리지 않는다. 승도(僧徒)들이 이 일을 맡아 한다.


토산 土産

   고려는 산을 의지하고 바다를 굽어보며 땅은 토박하고 돌이 많다. 그러나 곡식의 종류와 길삼의 이(利)와 우양(牛羊) 축산의 좋음과 여러 가지 해물의 아름다움이 있다. 광주(廣州)⋅양주(楊洲)⋅영주(永住) 등 3주에는 큰 소나무가 많다. 소나무는 두 종류가 있는데, 다만 다섯 잎이 있는 것만이 열매를 맺는다. 나주도(羅州道 지금의 전라도)에도 있으나, 삼주(三州)의 풍부함만 못하다. 열매가 처음 달리는 것을 솔방[松房]153)이라 하는데, 모양이 마치 모과[木瓜] 와 같고 푸르고 윤기가 나고 단단하다가, 서리를 맞고서야 곧 갈라지고 그 열매가 비로소 여물며, 그 방(房)은 붉은 색[紫色]을 이루게 된다. 고려의 풍속이 비록 과실과 안주와 국과 적에도 이것을 쓰지만 많이 먹어서는 안 되니, 사람으로 하여금 구토하여 멎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인   삼의 줄기[幹]는 한 줄기로 나는데 어느 지방이고 있으나, 춘주(春州) 것이 가장 좋다. 또 생삼(生蔘)과 숙삼(熟蔘) 두 가지가 있는데 생삼은 빛이 희고 허(虛)하여 약에 넣으면 그 맛이 온전하나 여름을 지나면 좀이 먹으므로 쩌서 익혀 오래 둘 수 있는 것만 같지 못하다. 예로부터 전하기를, 그 모양이 평평한 것은 고려 사람이 돌로 이를 눌러 즙을 짜내고 삶는 때문이라 하였지만, 이제 물으니 그것이 아니다. 삼의 찐 것을 뿌리를 포개서 만들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고, 그 다리는 데에도 의당한 법이 있다. 관에서 매일 내놓는 나물에 또한 더덕이 있으니, 그 모양이 크고 그 살이 부드럽고 맛이 있는데 약으로 쓰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또 그 땅에 솔이 잘 자라 복령(茯笭)이 나고, 산이 깊어서 유황(流黃)이 나며, 나주(羅州)에서는 백부자(白附子)⋅황칠(黃漆)이 나는데 모두 조공품[土貢]이다.


   고려는 모시[紵]와 삼[麻]을 스스로 심어, 사람들이 많이 베옷을 입는다. 제일 좋은 것을 이(糸㐌)라 하는데, 깨끗하고 희기가 옥과 같고 폭이 좁다. 그것은 왕과 귀신(貴臣)들이 다 입는다. 양잠(養蠶)에 서툴러 사선(絲糸戔)과 직임(職紝)은 다 장사치를 통하여 산동(山東)이나 민절(閩浙)154)지방으로부터 사들인다. 극히 좋은 문라화릉(文羅花綾)이나 긴사(緊絲 매듭에 쓰는 실 같은 것)나 비단[錦]이나 모직물[罽]을 짜는데, 그동안 여진[北虜]의 항복한 졸개에 공장이[工技]가 많았으므로 더욱 기교(奇巧)하고, 염색(染色)도 그 전보다 나았다.

땅에 금은(金銀)이 적고 구리가 많이 난다. 그릇에 옷[漆] 칠하는 일은 그리 잘하지 못하지만 나전(螺鈿)일은 세밀하여 귀하다고 할 만하다.


   송연묵(松煙墨)은 맹주(猛州 평안북도 맹산(孟山))것을 귀히 여기나 색이 흐리고 아교가 적으며 모래가 많다.

황호필(黃毫筆 족제비의 털로 만든 붓)은 연약해서 쓸 수가 없다. 예부터 이르기를 성성(猩猩 원숭이의 일종)의 털이라고 하나 반드시 그렇지 않다.

종이는 전혀 닥나무만을 써서 만들지 않고 등나무를 간간히 섞어 만들되, 다듬이질을 하여 다 매끈하며, 좋고 낮은 것의 몇 등급이 있다.


   그 과실 중에 밤의 크기가 복숭아만한 것이 있으며 맛이 달고 좋다. 옛 기록에 이르기를 ‘여름에도 있다’는 것이다. 그 연고를 물으니 ‘질그릇에 담아서 흙 속에 묻으면 해를 넘겨도 상하지 않고 6월에 또 함도(含桃)가 있으나 맛이 시어 초와 같고, 개암[榛]과 비자[榧子]가 가장 많다’고 한다. 외국에서 오는 것도 있으며, 능금[來禽]⋅청리(靑李)⋅참외[瓜]⋅복숭아⋅배⋅대추 등은 맛이 적고 모양이 작으며, 연근(蓮根)과 화방(花房)은 다 감히 따지 않으니, 국인이 이르기를 ‘ 그것은 불족(佛足)이 탔던 것이기 때문이라’ 한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4 권


절장 節仗155)


   “춘추(春秋)의 법으로는 왕이 보낸 사람은 지위가 비록 보잘것 없다 하더라도 그 서열은 제후(諸侯) 위에 있도록 되어 있다.” 하니 이것은 왕의 명령을 존중하기 때문일 것이다.156)그런데 그 때에는 주실(周室)의 기강이 무너지고 제후가 강대해져서 왕을 경시하는 마음을 가져 공자(孔子)가 빈 말을 가지고 천하 후세의 신하로서 지켜야 할 법을 마련하였는데도 이토록 간곡하였다. 하물며 태평성세에 친히 왕의 사람을 파견하여 멀리 외국으로 사신을 보내시었으니, 그 곳에서 받드는 예절을 어찌 감히 조금이라도 게을리하였겠는가? 생각건대, 송(宋)이 천하를 차지한 지는 2백년이 되어 가고 전쟁은 점차로 그쳐, 이족(異族)의 군장(君長)들이 조서(詔書)로 일러줌을 기다리지 않고 믿고 순종하는 성의는 금석(金石)같이 굳으니, 대체로 용성씨(容成氏)의 시대 이래로 이토록 대단한 태평은 있어 본 적이 없었다.157)제후들이 왕이 보낸 사람을 높이 추대하고 그 예문(禮文)이 번거로움은 당연한 일이다. 근년에 사신이 고려국에 갈 때마다 의장이 화려함과 호위하는 군사의 많음을 있는 대로 갖추어 조서를 맞이하고 모절(旄節)을 인도하고 하는 예의가 심히 근실하고 지성스러웠다고 한다. 그러나 이번의 행차는 마침 왕 우(王俁)의 상기(喪期)가 끝나지 않아, 북과 피리 등속은 다 잡고만 있고 울리지 않았으니, 이 또한 예(禮)를 알고서 하는 일이라 말할 수 있겠다.


첫째 신기대 初 神旗隊

   신주(神舟)가 예성항(禮成港)158)에 도달하고 나서 닻을 내리는 일이 끝나면 고려인이 채색을 베푼 배를 가지고 와서 맞이한다. 사자(使者)가 조서를 받들고 상륙하면 삼절(三節)159)이 걸어서 따라가 벽란정(碧瀾亭)160)에 들어가서 조서를 봉안하는 일을 끝내고 물러가 묵는 곳에서 쉰다. 이튿날 새벽에 도할관(都轄官)과 제할관(提轄官)이 조서를 마주 받들고 채색 가마에 들어가면 군대의 의장이 앞에서 인도하는데 여러 의장 가운데서 신기가 먼저이고, 서교정(西郊亭)161)에서부터 미리 관전(館前)에 세웠다가 조서가 당도하는 것을 기다려서 나머지 의장들과 연접해 가지고 인도 호위하여 성으로 들어간다. 신기대의 기는 10면(面)이 늘어서서 수레에 실려서 가는데 수레마다 10여인이 탄다. 이 때부터는 조서를 받고 표문(表文)을 바치고 할 때는 다 신기대를 군대의 의장 앞에 설치한다. 청의용호군(靑衣龍虎軍)162)은 갑옷과 과모(戈矛)를 들었는데 거의 1만 군졸에 이르는 것이 두 갈래로 나누어서 길을 끼고 행진한다.


다음 기병 次 騎兵

   신기 다음에는 금의용호친위(錦衣龍虎親衛)가 있다. 기두(旗頭) 한 명이 말을 타고 앞에서 달리는 데 작은 붉은 기를 잡고 있다. 그 다음은 영병상장군(領兵上將軍)이고, 그 다음은 영군랑장(領軍郞將)인데 다 기병들이다. 활과 화살을 가졌고 칼을 찼으며, 말을 장식한 제구에서는 다 방울 소리가 나고 달려가는 것이 심히 빠르며 자못 보란 듯이 뽐낸다.


다음 요고 次 鐃鼓

   기병 다음에는 초금[茄] 부는 군사들이 오고, 징과 북을 치는 군사들이 또 그 다음에 온다. 1백여 보마다 초금 부는 군사들은 반드시 물러서서 조서 가마를 마주보면서 합주하는데 그 소리가 멎으면 징과 북을 쳐서 그 절주를 맞춘다.


다음 천우위 次 千牛衛163)

   북과 호각 다음에는 곧 의장물[儀物]이 있는데 관혁등장(貫革鐙杖)164)을 천우군위(千牛軍衛)가 잡고 같이 서서 행진한다.


다음 금오위 次 金吾衛

   천우위 뒤에는 금오장위군(金吾仗衛軍)165)이 오는데, 황색 깃발과 표미(豹尾)․의극(儀戟)166)및 화개(華蓋)167)를 잡고 약간씩 사이를 두고 행진한다.


다음 백희 次 百戱

금오장위 뒤에는 백희 소아(百戱小兒)168)가 오는데 복식의 종류는 대략 중국 풍습과 같다.


다음 악부 次 樂部

   가공(歌工)과 악색(樂色) 역시 세 등급의 복색이 있고, 가지고 있는 악기는 어쩌다 약간 다른 것들이 있다. 그 행렬은 소아대(小兒隊) 뒤에 있다. 근자에 사자(使者)가 그 곳에 갔을 때는 마침 우(俁)의 상기가 끝나지 않아서, 악부에서 모두 그 악기를 잡고 있으면서도 연주는 하지 않았었다. 단지 조명(詔命)을 받들기 때문에 감히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다음 예물 次 禮物

   예물의 갑(匣)은 그 크기가 같지 않다. 그 표면은 하사한 물건의 이름을 표제로 쓰고 황제의 신보(信寶)로 봉하였다. 고려인은 총애를 높이 받들므로 들것에 올려놓고 황색 보를 덮는다. 그리고 들것마다 공학군(控鶴軍)169)4인씩을 쓰는데, 자주색 수의 무늬가 든 웃옷을 입고 절각복두(折脚幞頭)170)를 썼다. 그 행렬은 악부 다음에 섰다.


다음 조서의 가마 次 詔輿

   채색 가마의 시설은, 수놓아진 무늬 비단에 오색이 뒤섞여 있는데, 만듦새가 화려하고 정교하다. 앞의 한 가마에는 큰 쇠 향로를 놓았고, 다음 것에는 조서와 왕 우(王俁)를 제사하는 글을 받들고, 그 다음 것에는 어서(御書)를 받들었는데 역시 공학군(控鶴軍)이 들고간다. 표문(表文)을 배(拜)하고 관(館)으로 돌아가면 그 가운데의 한 가마는 쓰지 않는다.


다음 충대하절 次 充代下節171)

   국조(國朝 즉 송(宋)을 말함)의 구례(舊例)로는 고려의 사행 하절(下節)은 다 군졸들이었으나, 근년에는 벼슬을 가진 선비와 예술을 하는 기술자로 그 인원을 대체하도록 약간씩 허락하였다. 이번 사자의 행차에는 사람마다 성상(聖上)의 회유하시자는 뜻을 체득하여, 그 일을 담당해서 이역의 풍속을 살피기를 원하였었다. 하물며 또 어전을 하직하던 날 성상의 말씀으로 간곡하게 타일러 주심을 직접 받들었으므로, 사람들은 다 감읍하여 바다에서의 생사를 근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일행 중에는 성출랑(成忠郞)172)주 통(周通), 승신랑(承信郞)173)조 개(趙漑), 등사랑(登仕郞)174)웅저년(熊樗年)․윤 경(尹京), 문학(文學)175)강대형(江大亨)․이 훈(李訓)․당 준(唐浚), 한림 의학(翰林醫學)176)양 인(楊寅) 같은 사람들이 들어 있고, 진사(進仕)177)로는 조정지(晁正之)․서 형(徐亨)․황대본(黃大本)․섭언자(葉彦資)․석 역(石懌)․진흥조(陣興祖)․도 정(陶挺)․맹 휘(孟徽)․고백익(高伯益)․이 예(李銳)․최 세미(崔世美)․고대범(顧大範)․김안지(金安止)․왕거인(王居仁)․유집희(劉緝熙) 같은 사람들이 들어 있고, 부위(副尉)178)로는 이 휘(李暉)․왕 택(王澤)․여 점(呂漸)․서 공(徐珙)․서가언(徐可言)․시우종(施祐鍾)․우 공(禹功)이 있고, 성(省)․부(府)․시(寺)․감(監)의 서리(胥吏)로는 동 기(董琪)․우민년(牛敏年)․담 공(郯恭)․진 좌(陳佐)․양대동(楊大同)․양 환(楊渙)․유종무(劉宗武)․손 순(孫洵)․왕 우(王祐)․윤공립(尹公立)․손 완(孫琬)․조 유(曹裕)․왕백전(王伯全)․진유개(陳惟漑)․왕도심(王道深)․양 혁(楊革)․장우계(張雩桂)․임 범(林范)․민 구(敏求)․서 장(舒障)․추종지(鄒琮志)․장약박(張若朴)․범영지(范寧之)․주언강(朱彦康)․유 절(劉楶)․호윤승(胡允升)․주 욱(周郁)․담 \백성(郯伯成)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복색은 자주 깁의 좁은 옷에 오사모(烏紗帽)와 도금쌍록대(塗金雙鹿帶)179)를 하고 양쪽으로 갈라 서서 조서 가마[詔輿]를 따라 행진한다.


다음 선무하절 次 宣武下節180)

   선무하군(宣武下軍)은 명주(明州)181)의 토병(土兵)으로 도합 50인이다. 복식은 충대(充代)와 다르지 않으나, 다만 아래 옷을 처들고 가면서 수무늬 비단이 뚜렷이 나타나게 한다. 사자가 처음 <송의> 도성 문을 나가면 도금기명(塗金器皿 금칠한 그릇)과 딸린 물건을 내려 주고, 또 계속 나갈 때마다 절(節)182)을 공급하는데, 사람마다 각각 앞에서 잡고 있어 찬란한 빛이 눈부신데 이것은 외국에 영광스러움을 보이기 위한 것이다.


다음 사부 次 使副

   국신사(國信使)와 부사가 조서(詔書)를 따라 성 안으로 들어가고, 공식 회견에 가고 하는 데는 다 두 필의 말이 함께 달린다. 그의 복색은 자주색 옷에 어선화금대(御仙花金帶)183)이고 또 금어대(金魚袋)를 패용한다. 고려의 반사(伴史 외국 사신을 접반하는 관원)는 말을 타고 부사 오른쪽 몇 걸음 떨어진 데서 어깨를 나란히 하여 행진하고 굴사(屈使)184)가 또 그 다음에 온다.


다음 상절 次 上節

   상절은 다음과 같다. 도할관(都轄官)인 무익대부(武翼大夫) 충주자사 겸합문선찬사인(忠州刺史兼閤門宣贊舍人)185)오덕휴(吳德休)는 그 복색이 자주색 옷에 금색 띠이고 정사(正使) 뒤에서 말을 타고 갔다. 제할관(提轄官)인 조봉대부(朝奉大夫) 서 긍(徐兢)은 붉은색 옷에 어대(魚帶)를 패용하고 부사(副使) 뒤에서 말을 타고 갔다. 법록도관(法籙道官)인 태허대부(太虛大夫) 예주전교적(蘂珠殿校籍)186)황대중(黃大中)과 벽허랑(碧虛郞) 응신전교적(凝神殿校籍)187)진응상(陳應常)은 자주색 옷에 푸른색 옷단으로 금방부(金方符)188)를 패용하였다. 서장관(書狀官)은 선교랑(宣敎郞)189)인 등무실(滕茂實)과 최사도(崔嗣道)로 제할관의 복색과 같았다. 수선도순검(隨船都巡檢)190)인 오 창(吳敞)과, 지사 겸순겸(指使兼巡檢)인 노윤승(路允升)․노 규(路逵)․부숙승(傅叔承)․허흥문(許興文), 관구주선(管勾舟船)191)인 왕각민(王覺民)․황처인(黃處仁)․갈성중(葛成仲)․서소필(舒紹弼)․가 원(賈垣), 어록지사(語錄指使)192)인 유소경(劉昭慶)․무 완(武忨)․양 명(楊明), 의관(醫官)인 이안인(李安仁)․학 수(郝洙), 서장사신(書狀使臣)193)인 마준명(馬俊明)․이공량(李公亮)은 그 복색이 자주빛 옷에 도금어선화대(塗金御仙花帶)였다. 인접(引接)194)인 형 순(荊珣)과 손사흥(孫嗣興)은 초록색 옷을 입었다. 이들은 각각 관직의 서열에 따라 말을 타고 조서를 따라 도성으로 들어갔다. 시사부행(侍使副行)195)은 초모(草帽)를 쓰고 채찍을 잡았으며, 전견행례(專遣行禮) 역시 푸른 우산을 펴 들었다. 저 나라에서는 그 나름으로 반관(伴官)196)이 있어 배동(陪同)하는데, 대부분 인진관(引進官)197)으로 그 일을 시킨다.


끝 중절 終 中節

   중절(中節)은 다음과 같다. 관구예물관(管勾禮物官)인 승직랑(承直郞)198)주명발(朱明發), 승신랑(承信郞) 누 택(婁澤)․범백민(范白民), 적공랑(迪功郞) 최사인(崔嗣仁)․유 숙(劉璹), 장사랑(將仕郞)199)오 구(吳構), 행견적공랑(行遣迪功郞) 왕침(汪忱)․진사 왕처인(王處仁)과, 점후풍운관(占候風雲官)200)인 승신랑 동지소(董之邵)․왕 원(王元), 서부금주(書符禁呪)201)인 장순인(張洵仁), 기술(技術)인 곽 범(곽範)․사마관(司馬瓘), 사부친수(使副親隨 친수는 개인 비서)인 서 굉(徐閎)․장 호(張皓)․이 기(李機)․허 흥고(許興古), 친종관(親從官)인 왕 근(王瑾)․노 준(魯蹲), 선무십장충대(宣武十將充代)인 조 우(趙祐), 정명(定名)인 정 정(程政), 도할친수인리(都轄親隨人吏)인 왕가빈(王嘉賓)․왕 자(王仔)는 그 복색이 복두(幞頭)와 자주빛 좁은 옷에 도금보병대(塗金寶甁帶)202)고 이들이 말타고 가는 것은 상절 다음이었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5 권


수 조 受詔

   주(周) 나라에서 재공(宰孔)을 시켜 제후(齊侯)에게 제육(祭肉)을 내렸을 때에203)제후가 하배(下拜 대청 아래로 내려서서 배례하는 극도로 공손한 예)하려 하니 공이 이르거늘, ‘또 뒤따르는 어명이 있습니다. 천자께서는 백구(伯舅 주 나라 때 천자가 이성(異姓) 제후를 부를 때 쓴 말임)가 연로하여서 위로하시어 한 급(級 층계의 한급을 말함)을 하사하셨으니204)하배하지 마시오.’ 하였다. 이에 대답하기를, ‘하늘의 위엄이란 얼굴 앞 지척에서도 어김이 없는 것인데 나 소백(小白 제환공(齊桓公)을 이름)이 감히 천자의 총명(寵命)을 믿고 마구 굴겠습니까? 아래에서 예법을 실추시켜 천자께 수모를 끼칠까 두렵습니다. 감히 하배하지 않겠습니까? ’ 하고 하배한 다음 올라와 제육을 받았다. 주실(周室)이 쇠미해져서 예법은 본래의 법전에서 벗어나 버리고 간신히 남아 있었는데, 제후(齊侯)는 패자(覇者)였음에도 감히 예를 폐하지 않았다. 지금은 천자의 존엄하신 힘이 미쳐나가 해외에서까지 두려워하여 떨고 있는데 거기다 위무하시는 뜻이 내용과 형식에 걸쳐 후하고 번화하니, 고려인이 뚜렷하신 명령을 삼가 받듦을 하늘 끝을 바라보듯이 하고, 감히 조금이라도 게을리하여 예법을 실추시킬까를 근심하게 하지 못함은 당연한 일이다. 이제 그들이 일을 다루고 예를 집행하는 근실함을 그려서 관찰하시는 데 대비하는 바이다.


영조 迎詔

   정사와 부사가 조서를 받들고 순천관(順天館)205)으로 들어가면 10일 이내에 길일(吉日)을 택해 국왕이 조서를 받는데, 기일 하루 전에 먼저 설의관(設儀官)206)을 보내어 정사와 부사를 만나게 한다. 다음 날 굴사(屈使) 하나가 순천관에 당도하여 도할관과 제활관이 저서를 받들고 채색 가마 안으로 들어가면, 의장과 병갑이 맞이하여 인도하며 앞에서 가고, 정사・부사・관반 및 굴사가 동시에 말에 오르고, 하절(下節)이 그앞에서 걸어서 가며, 상・중절은 말을 타고 뒤에서 따라간다. 고려국의 관원들이 먼저 순천관 문 밖에서 줄지어 서서 조서가 순천관을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길을 막고 재배(再拜)가 끝나면, 말을 타고 앞에서 인도하여 왕부(王府)에까지 간다. 광화문(廣化門)으로 들어간 다음 좌동덕문(左同德門)으로 들어가 승평문(昇平門) 밖에까지 가서는 상・중절이 말에서 내리고 인접(引接)・지사(指使) 등이 말 앞에서 걸어가는데 상절은 뒤에서 따라간다. 신봉문(神鳳門)으로 들어가 창합문(閶闔門) 밖에 다다라 정사와 부사가 말에서 내리면, 국왕과 나라의 관원이 차례로 조서를 맞이하여 재배가 끝나면 채색 가마가 들어가 회경전(會慶殿) 문 밖에 멎는다.


도조 導詔

   채색 차마가 들어가 회경전 문 밖에 멎으면 도할관과 제할관이 가마 속에서 조서를 받들고 나와 막위(幕位 조서를 맞이하는 의식을 의한 장막 안의 조서를 놓도록 마련한 자리.)에 봉안하고 정사와 부사가 잠시 쉰다. 국왕이 다시 문 아래로 내려와 서쪽을 향해서면 정사와 부사는 국왕과 나란히 가면서 중문으로 인도해 들어가고, 상절(上節)․예물 등은 양편으로 나뉘어 회경전 아래로 들어가서 국왕이 조서를 받기를 기다린다.


배조 拜詔

   국왕이 조서를 인도하여 회경전으로 들어가면 궁정 아래 향안(香案 상위에 놓은 향료)이 마련되어 있는데, 국왕은 서쪽을 면해 서고 정사와 부사는 북쪽 위에 자리잡고 남쪽을 면해 선다. 상절(上節)의 관원들은 차례에 따라 정사와 부사 뒤에 서고 나라의 관원들은 왕의 뒤에 선다. 왕이 재배하고 몸소 성체(聖體 북송의 휘종황제를 두고한 말)의 안부를 묻고서는 자리로 돌아가서 무도(舞蹈 손을 휘젖고 말을 구르는 임금에 대한 예의)와 재배가 끝나면, 나라의 관원들이 무도 재배를 왕이 한 의례와 같이 한다. 국신사(國信使)가 조칙이 있음을 말하면 국왕은 재배하고 일어나 입으로 이르는 말을 몸소 듣고서는 홀(笏)을 띠에 꽂고 꿇어 앉는다. 부사가 조서를 정사에게 주면 정사는 조서를 왕에게 주는데, 조서는 이러하다. “고려국왕 왕 해(王楷)시어, 멀리서 듣기로는 국왕의 자리를 이어받아 삼가 나라를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하시었다 하니, 진실로 즉위 초에 왕통을 잊는데 부친 여망에 부응하도록 힘쓰실 수 있으셨을 것입니다. 급작스레 변고를 겪으셔서 슬픔이 대단하실 것입니다. 이제 서둘러 사자에게 명하여, 왕위를 계승하신 분에게 총애를 가서 알려드리도록 하고, 풍성한 예물과 함께 슬퍼하고 축하하는 뜻을 표하오니, 왕의 존엄한 힘(송 휘종 자신을 두고 한 말임)에 삼가 복종하시어 제후로서의 절도를 영원히 지키도록 하소서. 이제 통의대부(通議大夫) 수상서예부시랑(守尙書禮部侍郞) 원성현개국남 식읍삼백호(元城縣開國男食邑三百戶) 노윤적(路允迪)과 태중대부(太中大夫) 중서사인(中書舍人) 청하현개국백 식읍구백호(淸河縣開國伯食邑九百戶) 부묵경(傅墨卿)을 정사와 부사로 보내어 경(卿)께 나라의 신서(信書)와 예물 등을 내리거니와, 별록(別錄)과 같이 갖추었사오니 받아주도록 하소서. 그래서 이에 조서로 일러 드리오니 잘 아시게 되리라 쟁각합니다. 봄철 따뜻한데 경께서는 요즈음 평안하시겠지오. 이만 줄입니다.”

왕이 조서를 받아서 나라 관원에게 주고는 홀을 꺼내 들고 무도함이 처음의 의례와 같았고, 나라의 관원들 역시 그렇게 하였다.


기거207)起居

   정사와 부사가 조소를 인도하여 궁정에 당도하고 나면 왕이 재배하고 일어나 자리에서 피해 서서 몸소 성체(聖體)의 안부를 묻는다. 정사역시 자리에서 피해 서서 몸소 대답하기를, ‘근자에 대궐을 떠났는데 황제의 성궁(聖躬)은 만복을 누리고 계십니다.'하고는 각각 자리로 돌아가 재배 무도함이 조서를 받을 때의 의례와 같다. 이에앞서 전주(全州)에서 광주(廣州)에 이르는 3주(전주・청주 및 광주)의 수령들이 성체의 안부를 왕이 한 의례 같이 하여 묻고, 영접 전송하는 관반관(館伴官)들이 만날 때에도 역시 그렇게 한다.


제전 祭奠

   임인년(1122 고려 인종 즉위년) 봄 2월에 정사와 부사는 성지(聖旨 송 휘종의 명령을 두고 한 말)를 받고 국신사의 직무를 가지고 떠나가려 하였더니, 여름 4월에 우(俁 고려 예종의 휘)가 훙거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제전(祭奠)과 조위(弔慰)의 임무를 겸하게 되었다. 이는 원풍(元豊 송 신종(宋神宗)의 연호. 1078∼1085)의 제도에 따른 것이다. 계묘년(고려 인종 1. 1123) 6월 13일 갑오에 정사와 부사가 순천관에 도달하고, 왕이 조서를 받고 나서 이틀이 지나자, 왕이 먼저 사람을 보내어 도할관 오덕휴(吳德休)에게 가서, 불사(佛事)를 바칠 차비가 되었음을 고하였다. 다음날 제할관(堤轄官) 서긍(徐兢)이 하사할 제전(祭奠)의 예물을 가져다 앞에 진열하였다. 날이 새자 정사・부사 및 삼절(三節)의 관리가 조서 가마를 받들고 장경궁(長慶宮)에 이르러 삼절은 자리에서 쉬고, 정사와 부사는 오서대(烏犀帶)로 띠를 바꿔 띠고 가서 때가 오기를 기다려 제실(祭室)로 들어 갔다. 왕 해(王楷)는 소복으로 동쪽 기둥에 서고 정사와 부사는 재배하고 일어났다. 정사가 꾾어 앉아서 다음과 같이 어제 제문(御製祭文)을 읽었다.


   “선화(宣和) 5년 세차(歲次) 계묘 4년 갑인삭 14일 정묘에 황제는 사신 통의대부(通議大夫) 수상서예부시랑(守尙書禮部侍郞) 원성현개국남(元城縣開國男) 식읍삼백호(食邑三百戶) 노윤적(路允迪)과 태중대부(太中大夫) 중서사인(中書舍人) 청하현개국백(淸河縣開國伯)식읍구백호(食邑九百戶) 부묵경(傅墨卿)을 보내어 고려국왕의 영에 제사를 드립니다. 생각하건대 왕(훙거한 고려 예종을 말함)께서는 몸소 한결같은 덕을 지니시고, 이 동쪽 땅의 왕위를 이어 효성과 우애가 숙경 공손하였고, 신령(조상의 신령을 말함)과 백성을 은혜롭게 이끌며, 전대의 예문(禮文)과 인민을 계승하여 사방의 나라들이 모범으로 받들었습니다. 그리고 충성이 일찍부터 드러나시며, 돈독한 의(義)로 왕(송의 황제를 말함)을 근실하게 섬기셨고, 보내신 자제들이 조정에 있어 명령에 복종함이 근엄하였습니다. 짐(朕)이 생각하건대 왕께서는 의지 바다 한모퉁이에 있으면서도, 헌상(獻上)하는데 마음을 쓸 수 있으셨으니, 마음이 왕실에 있지 않은 적이 없으셨습니다. 큰 공적을 가상히 여겨 잊지 않고 돌보며 바야흐로 차비를 차려 사람을 시켜 짐의 뜻을 가서 알려 그대 나라를 잘 진무(鎭撫)하였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생각하였겠습니까? 하늘이 남겨두지 않아 급작스레 큰 변고가 나 나라가 고통 속에 빠졌음을 듣게 되어, 가슴속이 놀라고 슬퍼졌습니다. 이제 그대에게 휼전(恤典)208)을 내려 그것으로 뚜렷하신 덕을 찬미하여서 그대의 나라를 안녕하게 하는 터입니다. 바라건대 오셔서 내가 신령을 총애함을 받아들여, 그대의 후대 사람들에게 영윈히 복을 드리워 끝없이 아름다움을 누리게 하소서. 상향(尙饗).”


조위 弔慰

   이날 제전의 예가 끝나고 잠시 물러나 있다가 조위(弔慰)의 예를 거행하였다. 먼저 궁정 안에다 향안(香案)을 마련하고 서쪽으로 천자의 궁궐을 바라보았다. 왕 해(王楷)는 소복으로 서쪽을 면해 서고, 정사는 남면하여 서쪽 웃자리에 자리잡고, 부사는 또 그 다음에 자리잡았다. 부사가 조서를 정사에게 주니 정사는 이를 왕에게 주었다. 왕은 허리를 깊이 굽혀 국궁하고 재배하고서 꿇어앉아 그것을 받았다. 조서는 이러하다.


   “고려국왕 왕 해시여, 생각하건대 그대의 선왕(先王)께서는 밝은 덕을 근신하게 지키시어 그 왕위를 보전하여 나 한 사람을 돕기에 어울리셨습니다. 천명(天命)이란 믿기 어려운지라 급작스레 부음(訃音)을 알려 왔습니다. 멀리 생각하거니와 그지없이 사모하시니라 진실로 슬픔이 대단하실 것입니다. 즉위 초에 덕을 닦아 실천에 옮기기를 부탁 드리거니와 힘써 슬픔을 억누르시어 나의 권고(眷顧)하는 생각에 부응하도록 하소서. 이제 국신사(國信使) 통의대부 수상서 예부시랑 원성현개국남 식읍삼백호 노 윤적과, 부사(副使) 태중대부 중서사인 청하현개국백 식읍구백호 부묵경을 보내어 제전과 조위의 임무를 겸임시키고, 아울러 제전.조위.예물 등을 별록과 같이 내리오니 받아 주소서. 그래서 이에 조서로 일러 드리오니 잘 아시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봄철 따뜻한데 경께서는 요즈음 평안하시겠지오. 이상으로 줄입니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6 권


연 례 燕禮

   선왕(先王 여기서는 고대의 명철했던 임금)의 연향(燕饗)209)하는 예는 거기에 참석한 자들의 작위의 등급에 따라 높이고 줄이고 하는 절도를 삼아, 술 부어 올리는 데는 횟수가 있고 받은 잔을 돌리는 데는 의례가 있다. 본조(本朝 송조(宋朝)를 말함)에서는 그것을 상세히 따져서 옛것을 스승으로 삼고 지금에 편리하게 하여 선왕의 의도를 떨어뜨리지 않았다. 그러나 고려의 제도는 잔을 잡고 술을 따라서 무릎걸음으로 앞으로 나오는데, 이것은 빈객에게 술을 드리는 방법으로 옛사람의 유풍(遺風)이 있는 것이다. 이는 정녕 사신에게 더 후하게 하여서 왕자가 보낸 사람을 높이는 것일 것이고, 자기 나라에서 행하는 것은 반드시 다 이렇지는 않을 것이다. 모두 그림에 넣어서 그들이 중국을 사모하는 뜻을 기록하여 두기로 한다.


사적210)私覿

   왕이 조서를 받고 나면 왕과 정사. 부사는 자리에서 잠시 쉰다. 왕은 동쪽, 정사와 부사는 서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찬자(贊者 의식의 절차 진행을 돕는 자)가 정사와 부사의 기거상황을 왕에게 고하면 왕은 개(介 의식에서 주인과 빈객 사이를 연락하는 사람. 찬자(贊者)를 돕는 사람)를 보내어 복명한다. 그리고 인접관(引接官)들은 좌우로 나뉘어 왕과 정사.부사를 인도하여 회경전(會慶殿)의 전정으로 나가서게 한다. 마주보고 읍(揖 두 손을 마주잡고 상반신을 약간 굽히는 경례)하는 일이 끝나면 왕은 동쪽 기둥에 서고 정사와 부사는 서쪽 기둥에 서는데, 각자 욕위(褥位 요를 깔아 앉을 수 있게 만든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왕과 정사가 서로 향해서 재배가 끝난 다음 각각 몸을 좀 앞으로 내어 문안의 교환을 끝내면 다시 재배하고 정사는 조금 물러선다. 부사는 정사의 자리에 서서 왕과 마주 배례하는 것을 처음의 예(禮)와 같이 하고 각각 자리로 돌아간다. 그렇게 한 뒤에 각각 잡았던 자리로 가서 그 곁에 선다. 상절관(上節官)들은 방자(榜子)211)를 내고 참례하는데 도할관(都轄官)과 제할관(提轄官) 이하는 배례하지 않고 다만 몸을 굽혀 왕에게 읍하고 왕 역시 몸을 굽혀 그것에 답하면 물러나 동쪽 행랑에 선다. 다음은 중절(中節)을 인도하여 뜰 아래에서 참례시키는데, 네 번 배례하면 왕은 몸을 조금 움직여 읍으로 답례하고 그것이 끝나면 물러나서 서쪽 행랑에 선다. 왕과 정사・부사는 좌석으로 가서 앉고 상절과 중절 역시 그렇게 한다. 다음은 하절(下節)을 뱃사람들과 함께 인도해오는데 역시 뜰아래에서 여섯 번 배례하고 문의 동서 두편으로 나뉜 차례에 따라 북쪽을 면해 앉는데, 동쪽이 상석이다. 그렇게 한후에 술이 돌아간다. 헌수(獻酬 술을 드리고 회례함을 말함)의 예는 별편(別篇)에 나온다.(헌수조 참조)


연의 燕儀

   연음의 예에 쓰이는 장식과 장막 등속은 다 광채가 나고 화려하다. 매청 위에 비단보료를 펴놓았고 양쪽 행랑에는 단을 두른 자리를 깔았다. 그 술은 맛이 달고 빛깔이 짙은데, 사람을 취하게 하지는 못한다. 과일과 채소는 풍성하고 살쪘는데 대부분 껍질과 씨를 제거하였고 안주에는 양육(羊肉)과 제육이 있기는 하지마는 해물이 더 많다. 탁자 표면에는 종이를 덮었는데, 이는 정결함을 취한 것이다. 기명(器皿)은 대부분 금칠한 것을 썼고 혹 은으로 된 것도 있으나, 푸른색 도기(陶器)를 값진 것으로 친다. 헌수의 의례는 빈객과 주인이 백번이고 배례하여 감히 예법을 버리지 않는다. 영관(令官 삼성(三省)의 장관)・국상(國相 재상들)・상서(尙書 각부의 장관) 이상은 궁전 동쪽 처마 끝에 서서 왕의 뒤에 서고 나머지 관원들은 문무가 동서 양편으로 나뉘어 뜰 가운데 서고 가운데에 푯말을 하나 세워서 시각을 나타낸다. 곁에는 초록색 옷을 입은 사람들(신분이 비천한 궁중의 선역인)이 띠에 홀(笏)을 꽂고 붉은 천으로 된 초롱을 잡고 백관(百官)앞에 서고 또 위군(衛軍)을 시켜 각각 의장물들을 잡고 그 뒤에 서게 있게 한다.

   고려인들은 왕을 받드는 것이 매우 엄해서 연락(燕樂)으로 예를 행할 때마다 늘어선 관리와 병위(兵衛)는 비록 뜨거운 햇빛과 급작스런 비 속에서라 할지라도 산같이 서있고 움직이지 않으며 결코 얼굴빛을 바꾸는 법이 없으니 그들의 엄숙 공손함이 가상하다.


헌수 獻酬

   왕과 정사・부사가 자리에 가서 앉고 나면 왕이 개(介)를 보내어 정사와 부사에게 ‘몸소 일어나 술을 따라 권해 드리고자 합니다.’ 하고 고하게 하는데, 사자(使者)는 재삼 고사하고 나서야 그 말에 따른다. 각각 자리에서 물러나 일어서서 마주 읍하는 일이 끝나면 집사자(執事者)가 정사의 술잔을 가지고 왕 앞에까지 온다. 왕이 꿇어 앉아 술준(준)을 잡고서 술을 따르게 하면 집사자가 무릎걸음으로 앞으로 가져오고 정사 역시 꿇어앉아 술잔을 받는다. 끝나면 다시 잔을 집사자에게 주고 각각 자리로 돌아간다. 자리잡고 앉고 나서 마시는 일이 끝나면 일어나 몸을 굽혀 마주 읍하고 간단히 사의(謝意)를 표한다. 왕이 또 친히 부사에게 술을 따라 주는데, 그예는 정사의 경우와 같다. 정사와 부사가 왕의 잔을 받는 일을 끝내고 나서는 다시 친히 술을 따라서 왕에게 회례하기를 처음의 예와 같이 하는데, 술이 세 차례 돌고서야 통상의 의례와 같이 한다. 술이 15차례 돌고서는 차(次 임시로 머물게 마련해 놓은 자리)에서 중간 휴식을 취하고 잠시 후에 다시 자리에 나가 앉는다. 정사와 부사부터 그 아랫 사람들에게 까지 습의(襲衣)212)와 금은대(金銀帶)를 각각 차등을 두어 선사하고 술이 다시 10여 차례 돌고 밤중이 되어서야 파하는데, 왕은 정사와 부사가 문밖으로 나갈 때까지 전송한다. 삼절(三節)의 사람들은 차례에 따라 말을 타고 관사(館舍)로 돌아간다.


상절석 上節席

   상절의 좌석은 서쪽을 향해 앉는데 북쪽이 상석이다. 기물은 금색을 칠했고 예법은 정사와 부사에 대한 것과 같은데 좀 간략하다. 그리고 왕이 친히 술을 따르지 않고 단지 상서랑(尙書郞 각부 낭관(郞官)의 통칭)이나 혹은 경감(卿監 각사(寺)의 장)을 보내서 대신하게 한다. 먼저 그 예(禮)를 왕에게 고하고 왕이 그 말을 좋다고 하면 재배하고 물러나서는 부리는 사람에게 ‘임금께 모관(某官)을 보내어 상절에게 술을 권하게 하였읍니다.’라고 말하게 하면 도할관과 제할관 이하가 몸을 굽혀 그것에 답한다. 처음 앉아서는 두 차례 권하고, 저녁 연음에 다시 자리에 나가 세 번째 권하기를 이르러서는 다 거굉(巨觥 거대한 뿔모양의 술잔)으로 바꾸고 술이 다 없어지면 물러난다. 보내왔던 관원은 다시 궁전 뜰에서 왕에게 재배하고 물러간다.


중절석 中節席

   중절의 좌석은 동쪽을 향하는데 북쪽이 상석으로 상절과 마주본다. 그 과일・안주・기명은 또 상절보다 한등이 떨어진다. 관원을 보내어 술을 권하는 것은 대략 상절에 대한 의례와 같다.


하절석 下節席

   하절의 좌석은 궁전 문 안에 있고 북쪽을 면하는데 동쪽이 상석이다. 그 좌석에는 상과 탁자는 마련하지 않고 단지 작은 걸상을 땅에 놓고 앉는다. 기명은 백금(白金 은을 말함)을 쓰고 과일과 안주는 간략하며, 술 돌리는 수는 좀 드물어 중절보다 훨씬 떨어진다.


관회 館會

   사자(使者)가 관사에 들어가고 나면 왕이 관원을 보내어 연회를 열게 하는데, 그것을 불진회(拂塵會)라고 한다. 이때부터는 5일에 한 번씩 연회를 차리는데, 절서(節序 15일에 한차례씩 바뀌는 절후를 말함)를 만나면 예(禮)가 좀 더해진다. 정사와 부사가 그 가운데 있어 자리가 좌우로 나뉘고 나라의 관원과 반연(伴筵) 및 관반(館伴)은 동서로 나뉘어 객위(客位)에 있고 도할관과 제할관 이하는 동서서(東西序)에 나뉘어 앉고 중・하절은 차례에 따라 양쪽 행랑에 앉는다. 술은 15차례 돌리는데 그치며, 밤중에 파한다. 뜰안에는 초롱은 마련하지 않고 단지 횃불은 마련할 따름이다.


   또 과위(過位)의 예(禮)가 있는데 관반이 서신으로 정사와 부사를 그 위(위)로 초청하여 연음(燕飮)의 예와 같이 한다. 이때 삼절(三節)은 함께 가지 않고 단지 인접(引接)・지사(指使)・등속만을 데리고 가서 심부름에 대비한다. 며칠후에 정사와 부사는 관반관(館伴官)을 그들이 묶고 있는 낙빈정(樂賓亭)으로 초청한다. 이 때 숙수를 쓰는데, 과일・안주・기명은 다 어부(御府)에서 준것들이다. 사방의 좌석에는 보완(寶玩 값나가는 노리개)・고기(古器)・법서(法書 글씨본)・명화(名畵)・이향(異香 보기 드문 좋은 향기)・기명(奇茗 진기한 좋은 차)을 늘어놓는데, 오만가지로 진귀하고 정채로움이 눈길을 끌어 고려인들 치고 경탄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술이 한창일 때 좋아하는 것에 따라 원하는대로 집어서 주었다.


배표213)拜表

   사자(使者)는 선명례(宣命禮 휘종의 조서를 전달하는 의식을 말함)가 끝나면 ‘천녕절(天寧節 휘종의 생일, 음력 10월 10일)에 대어 가서 상수(上壽 술을 올리고 축수함을 말함)하려 한다.’는 뜻을 서신으로 한다. 왕은 개(介)를 보내어 서신을 전달하여 간곡히 만류하나 사자는 이를 굳이 사양한다. 왕은 날을 잡아 서신으로 표장(表章 휘종에게 보내는 글을 말함)을 바칠 것을 고한다. 그날이 되어 정사와 부사가 삼절을 거느리고 왕부(王府)에까지 들어가면 왕은 영접하여 읍을 하고 회경전(會慶殿)에까지 간다. 뜰 가운데는 안열(案列 상을 줄지어 늘어 놓은 것을 말함)과 욕위(褥位 요를 깔아 마련한 왕과 정・부사의 자리를 말함)를 마련한 것이 조서를 받을 때의 의례와 같다. 왕이 궁궐을 바라보고 재배가 끝나면 홀(笏)을 띠에 꽂고 꿇어앉는다. 집사관이 표(表)를 왕에게 주면 왕은 표를 받고서 무릎으로 가서 정사에게 바친다. 정사는 꿇어 앉아서 받고, 그것이 끝나면 표를 부사에게 준다. 부사는 표를 인접관(引接官)에게 준 뒤에 좌석으로 간다. 모임이 파할 때에 가서 표를 담은 갑(匣)을 채색 가마 속에 놓고, 의장병이 인도하여 앞에서 가는 것을 따라 관사로 돌아간다.


문전 門錢

   배표연(拜表宴 표문을 바치는 의식에 뒤따르는 잔치)이 파하면 신봉문(神鳳門)에 장막을 치고 빈객과 주인이 자리를 마련한다. 왕은 정사와 부사에게 술을 따라 주고 작별하는 일이 끝나면 좌석 곁에 선다. 먼저 상절을 인도하여 앞에 서게 하면 왕이 친히 거굉(巨觥)에 이별주를 따라 주고 상절은 하직 인사를 하고 물러난다. 다음에는 중절을 인도하여 층계에 세우고 하절은 층계 아래에 세우고 술을 권하는데 이 때의 예는 상절과 같다. 물러나 문밖으로 나가 정사와 부사가 말에 오르기를 기다려 삼절이 차례로 따라서 관사로 돌아간다.


서교송행 西郊送行

   정사와 부사가 귀로에 오를 때는 이날 일찍이 순천관을 떠나 얼마 안 가서 서교정(西郊亭)에 당도하는데, 이 때 왕은 국상(國相)을 보내어 그 안에 술과 안주를 갖추어 놓게 한다. 상.중절은 동서(東西)의 행랑에 자리잡고 하절은 문밖에 자리잡으며 술이 15차례 돌고서 파한다. 정사와 부사는 관반(館伴)과 문밖에서 말을 세우고 작별 인사를 하고, 관반은 말위에서 친히 술을 따라 사자(使者)에게 권한다. 마시는 것이 끝나면 각각 헤어진다. 이보다 앞서 접반관 및 송반관(送伴官)과는 관사에 도달하자 곧 헤어지는데, 귀로에 오르게 되면 이곳에서 다시 함께 가게 되어, 군산도(群山島)에서 바다로 나갈 때까지 같이 간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7 권


  관 사214)館舍

   자산(子産)이 정백(鄭伯)의 재상으로 진(晉) 나라에 갔었는데, 진 나라에서는 노(魯)의 국군(國君)이 죽었다는 이유로 그를 만나 주지 않았다.215)자산은 그가 든 관사의 담을 깡그리 허물고 거마(車馬)를 거기에다 들였다. 진 나라 사람이 그를 나무라자 이렇게 대답하였다.

“문공(文公)216)께서 맹주(盟主)가 되었을 적에는 궁실은 낮았고 바라볼 누대와 정자가 없었으나, 제후의 관사를 높여 국군의 노침(路寢 국군이 정사를 듣는 정전(正殿))같이 지었고, 창고와 마굿간을 수리하여 거마를 둘 데가 있었고, 빈객에게 대령시킨 하인들이 있었으니, 빈객이 오면 자기 집으로 돌아온 듯하였습니다.”

진 나라에서는 부끄러워져 불민함을 사과하였다. 그런즉 제후의 나라에서 사방에서 오는 빈객을 접대하는 방법조차도 관사를 두는 것을 먼저할 일로 삼았었거든, 하물며 외이 번복(外夷藩服)이, 왕자가 보낸 사람에 대해서야 더할 나위가 있겠는가? 생각건대, 고려 사람은 본래부터 공손하였고 또 조정에서 위무함이 체모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관사를 건립한 것에는 제도의 사치스러움이 왕의 거처를 능가하는 점이 있다. 나는 그것을 가상히 여겨 관사도(館舍圖)를 만든다.


순천관 順天館

   정사와 부사가 조서를 받들고 성(城)의 선의문(宣義門)으로 들어가서는, 곧장 북으로 3리 가량을 가서 경시사(京時司 본서 제 40권 악률(樂律) 조 참조)에 이르고, 또 북으로 돌아 5리 가량을 가 광화문(廣化門)에 이르러 다시 서쪽으로 돌아 2리를 가서 매우 높은 산등성이 하나를 지나 좀 북쪽으로 향해 2리를 가면 곧 순천관(順天館)에 다다른다. 바깥 문에는 방(榜 글씨를 쓴 나무 판)이 있고, 중문은 청수의용호군(靑繡衣龍虎軍)이 지키는데, 다만 상․중절이 말에 오르고 내리고 하는 곳으로 쓸 뿐이다. 정청(正廳 중간의 본채)은 9영(楹)인데 규모가 장대하고 건축이 임금의 거처를 능가한다. 외랑(外廊)은 30간인데 다른 물건은 두지 않고, 단지 관회(館會) 때에만 중․하절의 술마시는 자리를 거기에 늘어놓을 뿐이다. 뜰 가운데에는 작은 정자 둘이 있고, 그 중간에 막집[幕屋] 3간을 만들었는데, 전에는 음악을 연주하는 곳이었으나 지금은 왕 우(王俁)의 상기가 끝나지 않아 전연 볼 수 없었다.


   정청 뒤에 지나 다니는 길이 있고 그 가운데에 낙빈정(樂賓亭)이 세워져 있는데 좌우 두 자리를 정사와 부사의 거실로 하였다. 내랑(內廊)은 각각 12자리인데 상절이 나누어 거처한다. 서쪽 자리의 남쪽이 관반관(館伴官)의 자리이고 그 북에다 조서를 봉안하였다. 양쪽 곁채에는 도관(道官)을 거처시킨다. 동쪽 자리에 당(堂)이 있는데 도할관과 제할간의 자리이고, 또 그 동쪽은 서장관(書狀官)의 자리이다. 역시 낭옥(廊屋)이 있는데 심히 넓어 중․하절이 차례에 따라 거처하고 뱃사공도 거기에 거처한다. 북쪽을 상석으로 하여, 정사와 부사 이하에 각각 방자를 주어 심부름에 대비시켰다. 동쪽 자리의 남쪽 복판에는 청풍각(淸風閣)을 지었고 서쪽 자리의 북쪽에는 산세(山勢)에 기대어 향림정(香林亭)을 지었는데, 다 창을 열면 산을 대하게 되고 맑은 물이 감돌며 높은 소나무와 이름 있는 화훼(花卉)가 울긋불긋 서로 그늘지우고 있다. 시설물과 기명은 하나도 갖추어지지 않은 게 없다. 앞서 왕 휘(王徽 고려 문종(文宗))가 이것을 세워서 별궁으로 썼는데 원풍(元豊 송 신종의 연호 1078∼1085) 연간에 조공을 바친 뒤부터는 중국의 사신을 접대할 곳이 없기 때문에 고쳐서 관사로 하고 ‘순천’(順天)이라 명명하였다.


관청 館廳

   정청은 5간이고, 양쪽 곁방은 각각 2간씩이고 창문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데, 통틀어 9영(楹)이다. 방(榜)에는 ‘순천지관’(順天之館)이라 씌어 있다. 동서 양쪽 층계에는 다 난간이 만들어져 있고, 그 위에는 비단 수로된 장막이 쳐져 있는데, 그 무늬는 대부분 나는 난새[翔鸞]와 둥근 꽃이다. 사면에는 온통 꽃을 수놓은 그림 병풍을 쳤고, 좌우에는 팔각빙호(八角氷壺)가 놓여져 있다. 오직 나라의 관원과만 여기서 만나고, 관사 안에서 연회를 할 적에는 정청으로 올라간다. 정사와 부사가 그 가운데 있고 그 나머지 빈객과 주인과 나라의 관원은 동서로 나뉘어 모시고 앉을 따름이다.


조위 詔位

   조위는 낙빈정(樂賓亭) 서쪽 관반 자리의 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작은 전각(殿閣)은 5간인데 그림과 장식이 화려하게 빛난다. 양쪽 행랑은 전에는 압반(押班)217)과 의관(醫官)의 방이었는데, 지금은 두 도관(道官)의 각각 관직의 서열에 따라 나뉘어 거처한다. 정사와 부사가 관사에 들어가서는 먼저 전각에 조서를 봉안하고 왕이 길일(吉日)을 잡아 조서 받기를 기다린다. 그날에는 삼절(三節)의 관원을 거느리고 뜰에서 배례하고, 도할관과 제할관이 마주 받들고, 상절이 앞에서 인도하여 관사를 나가 채색가마속에 놓고 차례대로 따라간다.


청풍각 淸風閣

   청풍각은 관사의 정청 동쪽, 도할관과 제할관의 자리 남쪽에 있다. 그 건제(建制)는 5간이고, 아래에는 기둥을 쓰지 않고 단지 공두(栱斗)218)를 포개 쌓아 올려서 이루어졌고 휘장은 치지 않았다. 그러나 아로새기고 채색 단장한 것이 울긋불긋 화려하고 사치한 것이 다른 곳들에 비해 월등하다. 다만 하사하는 예물을 저장할 뿐이다. 숭녕․대관 연간에는 ‘양풍’(凉風)이라는 이름을 내걸었었으나, 지금은 이 이름으로 바뀌었다.


향림정 香林亭

   향림정은 조서전(詔書殿) 북쪽에 있다. 낙빈정 뒤에서부터 길이 나서 산으로 올라가, 관사에서 1백보 가량 되는 산중턱의 등에 세워져 있다. 그 건제(建制)는 사릉(四稜 네 모서리가 뚜렷하게 보이도록 만들어진 것)이고, 화주(火珠 유리로 된 둥근 구슬)의 정수리이고, 8면에 난간이 만들어져 있어 기대어 앉을 수 있다. 누운 소나무와 괴석에 여라(女蘿)와 칡덩굴이 서로 어울리고, 바람이 불면 서늘하여 더위를 느끼지 않게 된다. 정사와 부사는 여가 있는 날에는 언제나 상절의 관속들과 차를 끓이고 그 위에서 바둑을 두며 종일토록 담소하니, 이는 마음과 눈을 유쾌하게 하고 무더위를 물리치는 방편이었다.


사부위 使副位

   정사와 부사의 자리는 정청(正廳) 뒤에 있는데, 가운데에 큰 정자가 세워져 있다. 그 건제(建制)는 사릉(四稜)에 위는 화주(火珠)이고, 방(榜)에는 ‘악빈’(樂賓)이라 씌어져 있다. 정사의 자리는 동쪽에 있고 부사의 자리는 서쪽에 있는데 각각 3간씩을 차지했고, 중간에는 금칠한 기명을 늘어놓고 비단 수를 펼쳐 놓았으며 방장[帷幄]이 심히 성대하다. 뜰 가운데에는 화훼가 넓게 심어져 있다. 정북(正北)에 있는 한 문으로 해서 산에 오를 수 있는데 그것이 곧 향림정의 길이다.


도할․제할위 都轄提轄位

   도할관과 제할관은 한 당(堂)에 함께 거쳐한다. 그 건제는 3간으로 마주 틔어진 두 방에서 각각 관직 서열에 따라 나뉘어 거처한다. 그 가운데는 회식하고 객을 만나고 하는 장소로 쓴다. 앞에는 푸른색 휘장이 드리워져 있는데, 그 모양이 술집의 방장과 유사하다. 방 안에는 각각 무늬 있는 깁의 붉은 막이 베풀어져 있는데, 전에는 방장을 사용하지 않았었지만 지금은 역시 그것이 있다. 평상 위에는 비단 보료를 깔았고 다시 큰 자리를 올려 놓았는데 비단으로 단이 둘려져 있다. 방 안의 기명은, 향렴(香奩 이 경우는 향을 넣어두는 그릇)․주합(酒榼 술을 담는 그릇)․타구․식야(食匜 음식을 담는 그릇) 같은 것들이 다 백금(白金 은을 말한다)으로 되어 있고, 물을 담는 제구는 다 동을 썼고, 물건들이 다 갖추어져 있다. 당(堂) 뒤에는 돌을 쌓아 못을 만들었는데, 시냇물이 산에서 내려와 그 못으로 들어간다. 가득차면 서장관의 자리로 끌어내어지는데, 콸콸 소리가 난다. 수행하는 사람은 정사나 부사보다 한등 낮고, 나머지 물건들도 거기에 맞춘다.


서장관위 書狀官位

   서장관의 자리는 도할관과 제할관 동쪽에 있는데, 그 당(堂)은 3간이고 그 건제는 약간 떨어진다. 역시 관직의 서열로 나누어 거처한다. 뒤에 못이 하나 있어 서쪽과 서로 통하고, 나머지 물은 동쪽으로부터 관사 밖으로 나가 시냇물과 합쳐진다. 방 안의 발․장막 등속은 도할관과 제할관의 그것들과 대략 같으나, 다만 은이 동(銅)으로 바뀔 뿐이다.


서교정 西郊亭

   서교정은 선의문(宣義門) 밖 5리 가량에 있다. 추녀끝이 높기는 하지마는 갓 지어져서 침실은 마련되어 있지 않았고, 오직 식사 도구가 갖추어져 있고, 사자가 처음 도착하고 귀로에 오르고 할 때 여기서 환영․위로하고 술로 전송하고 한다. 하절(下節)과 뱃사공은 다 들이지 못하므로, 문 맞은쪽에 큰 장막을 치고 죽 앉혀 놓고 술을 먹인다.


벽란정 碧瀾亭

   벽란정은 예성강(禮成江)의 강언덕에 있는데, 왕성(王城)에서 30리 떨어져 있다. 신주(神舟 조서를 실은 사신의 배)가 강언덕에 닿으면 수위병이 징과 북으로 환영하고 조서를 인도하여 벽란정으로 들어간다. 벽란정은 두 자리가 있으니 서쪽을 우벽란정(右碧瀾亭)이라 하여 조서를 봉안하고, 동쪽을 좌벽란정(左碧瀾亭)이라 하여 정사와 부사를 접대한다. 양편에 방이 있어 두 절(節)의 인원을 거처케 하는데, 갈 때와 올 때에 각각 하루씩 묵고 간다. 똑바로 동서로 도로가 있는데, 왕성으로 통하는 길이다. 그 좌우에 10여 호의 주민이 살고 있다. 사절이 성으로 들어가 버리면 뭇 배들은 다 항내에 정박하므로, 뱃사공이 순번을 정해 이곳에서 감시한다.


객관 客館

    객관의 시설은 일정하지 않다. 순천관 뒤에는 10여 간 되는 작은 관사가 있어, 심부름 보내고 소식을 전달시키고 하는 사람들을 접대한다. 영은관(迎恩館)은 남대가(南大街)의 흥국사(興國寺) 남쪽에 있다. 인은관(仁恩館)은 영은관과 나란히 있는데 전에는 ‘선빈’(仙賓)이라고 하였으나, 지금은 이 이름으로 고쳤다. 이것들은 다 이전에 거란(契丹 요(遼)를 말한다)의 사신을 접대하던 곳이다. 영선관(迎仙館)은 순천사(順天寺) 북쪽에 있고, 영은관(靈隱館)은 장경궁(長慶宮) 서쪽에 있는데, 적인(狄人 북방의 미개인이라는 말)인 여진(女眞 금(金)을 말한다)을 접대한다. 흥위관(興威館)은 봉선고(奉先庫) 북쪽에 있는데, 전에 의관(醫官)을 접대한 일이 있던 곳이다219). 남문 밖에서부터 양랑(兩廊)까지에 관사가 도합 넷이 있으니, 청주(淸州)․충주(忠州)․사점(四店)․이빈(利賓)이 그것으로, 다 중국의 상인과 여행자를 접대하는 곳들이다. 그러나 누추하고 허술하여 순천관과는 비교가 안 된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8 권


공 장 1 供張一

   주관(周官 즉 「주례」(周禮))의 장차(掌次)는 왕의 위차(位次 행사나 의례로 나가서 머무는 장소)의 법도를 관정하여서 장막을 치는 일에 대비한다220). 제후의 조근(朝覲)과 회동(會同)에는 대차(大次)와 소차(小次)를 치고, 사전(師田 군대의 이동과 사냥)에는 막을 치고 상을 마련해 놓는다. 왕자(王者)가 제후를 접대하는 것은 그 예를 간략하게 하여도 좋을 게 아닌가 하고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러나 조근․회동․사전을 거행할 때에 머물러 있을 곳을 시설하기를 이토록 철저하였는데, 하물며 해외의 작은 제후가 왕이 보낸 사람을 높이 받들 경우 시설하고 마련해 놓고 하는 일을 어찌 구차스럽게 할 수 있으랴! 고려(여기서는 한인의 고장을 일반적으로 가리켜서 한 말이다)는 왕씨(王氏) 이래로 대대로 본조(本朝)의 번병(藩屛)이 되어 왔고, 주상께서 진무하신 은덕이 심히 후하였기 때문에 언제나 사절이 그 곳에 가면 시설하는 제구가 극히 화려하고 찬란하였다. 은택이 사해에 미쳐감을 쓴 요소(蓼蕭 「시경」 소아(小雅)의 편명이다)의 시에, ‘고삐 끝 드리워져 있고, 방울 소리 절렁인다.221)’ 한 것은 곧 그 의물(儀物 의장으로 쓰여진 물건들)이 예에 맞음을 말한 것으로 그들이 임금을 즐겁게 하려는 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삼가 고려인이 중국의 사절을 공경스럽게 접대한 것을 서술하여 공장도(供張圖)를 만든다.

힐막 纈幕

힐막은 옛 제도는 아니다. 선유(先儒)들의 말로는, 비단을 이어서 물들여 도안을 만든 것을 ‘힐’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고려의 습속은, 지금 힐을 만드는 것이 더욱 정교하다. 그 바탕은 본래 무늬 깁이고 도안의 빛깔은 곧 황색과 백색이 서로 섞인 것이어서 찬란하여 볼만하다. 그 도안의 위는 화주(火珠)이고 사방 끝에 보망(寶網)을 드리웠고, 아래는 연대화좌(蓮臺花座)가 있는대 불가에서 말하는 부도(浮屠) 형상과 같다. 그것은 그래도 귀인이 쓰는 것은 아니고 강가의 정자나 객관(客館)의 속관(屬官) 자리에 설치한다.

수막 繡幕

수막의 장식은 오색이 뒤섞여서 이루어진 것으로, 가로로 꿰매지 않고 한 폭씩을 위에서 아래로 드리웠다. 여기에도 원앙새․나는 난새․꽃떨기 등의 문양(紋樣)이 있는데 홍색과 황색이 강하고, 그 바탕은 본래 무늬 있는 붉은 깁이다. 오직 순천관의 조전(詔殿)․정청․정사와 부사의 자리 및 회경전(會慶殿)과 건덕전(乾德殿)의 공회(公會)에만 설치한다.

수도 繡圖

수도는 붉은 바탕에 초록색 단을 둘렀고 오색이 뒤섞여 있으며, 산꽃과 노는 짐승의 정교함이 수막을 능가한다. 화죽․영모(翎毛 조류를 말한다)․과실 따위도 있는데 각기 다 생기가 있다. 이 나라의 습속으로는, 장막을 10여 폭 칠 때마다 그림 하나씩을 걸어서 사이를 듸우는데, 그것이 대청 속 복판을 차지하게는 하지 않는다.

좌탑 坐榻

좌탑의 제도는 네 모서리에 장식이 없고, 그 위에 푸른색 단을 두른 큰 자리를 깐다. 그기고 그것을 관사 안의 지나 다니는 길 사이에 설치하는데, 이는 관속과 수종 관리가 쉬는 제구이다.

연대 燕臺

연대(좌석 앞에 놓는 상)의 모양은 중국의 궤안(几桉)과 같다. 네 모서리는 예각을 업애고 백색의 등넝쿨이 꽃을 뚫고 나가 있다. 대면(臺面)은 네 군데로 나뉘어져 붉은 칠로 단장되었고 금칠한 장식못이 붙어 있다. 다시 붉은 비단 휘장[繡幃]이 둘려 있는데, 사면에 띠가 드리워져 그것들이 서로 나란히 걸려 있는 것이 날개와 같다. 다만 왕 해(王楷 고려 인종의 이름)가 우(俁 고려 예종(睿宗)의 이름)의 상기가 끝나지 않았다 해서 붉은색을 자주색으로 바꾸었을 뿐이다. 좌상(坐床)의 제도는 중국의 그것과 같으나 높이와 크기가 3분의 1이 더 하다.

광명대 光明臺

광명대는 등불과 촛불을 받치는 제구이다. 아래에 세 발이 있고 가운데 한 줄기가 있는데, 형상이 대나무와 같아 마디 하나씩으로 이어진다. 위에는 쟁반이 하나 있고, 그 가운데 사발 하나가 놓여 있고, 그 사발에는 받침이 있어 촛불을 켤 수 있게 하였다. 등불을 켜려면 구리 항아리로 바꿔서 기름을 담고 심지를 세워 작은 흰 돌로 눌러 놓고서, 붉은 사포(紗布)로 덮어 씌운다. 높이는 4척 5촌이고 쟁반의 넓이는 1척 5촌이고 삿갓은 높이가 6촌이고 넓이가 5촌이다.

단칠조 丹漆俎

단칠조(붉은 칠을 한 적대)는 왕궁(王宮)에서 평일에 사용하는 것이다. 평상 위에 앉아서 기명을 적대에 올려놓고 그 앞에서 먹기 때문에, 음식을 적대의 수효와 다과로 존비가 나뉘어진다. 정사와 부사가 관사에 들면 매일 세 끼씩을 공급하는데, 한 끼는 다섯 적대씩이고, 그 기명은 다 황금이 칠해져 있다. 적대의 넓이는 세로가 3척, 가로는 2척, 높이는 2척 5촌이다.

흑칠조 黑漆俎

식사용 적대의 제도는 크기가 같으나 단지 붉고 검은 차이가 있을 뿐이다. 도할관(都轄官)과 제할관(提轄官) 및 상절(上節)에게는 관사 안에서는 매일 세 끼씩을 공급하는데, 한 끼는 세 적대씩이고 중절은 두 적대씩이다. 하절은 상을 붙여놓고 다섯 사람씩 한자리에서 식사를 한다.

와탑 臥榻

와탑(침상) 앞에는 또 낮은 평상 세 틀이 놓여 있고 난간이 세워져 있는데, 각각 무늬비단 보료가 깔려 있다. 또 큰 자리가 놓여 있는데 돗자리의 편안함은 전연 이풍(夷風 오랑캐 풍속)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국왕과 귀한 신하에 대한 예(禮)이고 아울러 그것으로 중국의 사신을 접대하는 것일 뿐이다. 서민들은 대부분 흙 침상이며, 땅을 파서 아궁이를 만들고 그 위에 눕는다. 고려는 겨울철이 극히 춥고, 또 솜 등속이 적기 때문이다.

문석 文席

문석은 곱고 거칠고 한 것이 일정하지 않다. 정교한 것은 침상과 평상에 깔고 거친 것은 땅에 까는 데 쓴다. 짠 풀은 부드러워서 접거나 굽혀도 망가지지 않는다. 흑․백 두 색이 서로 섞여서 무늬를 이루고, 청자색으로 단을 둘렀는데 본래 일정한 제도가 없다.

문유 門帷

문유의 제도는 푸른 비단 세 폭인데, 위에 거는 고리가 있어 거기에 가로 나무를 꿴다. 모양은 술집의 깃발과 같다. 궁실 안에서 부인들이 가리는데 쓰는 제구이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9 권


공 장 2 供張二


수침 繡枕

   수침의 형태는, 흰 모시로 자루를 만들어 그 속을 향초(香草)로 채우고, 양쪽 끝을 금색 마구리에 실로 놓은 꽃이 있는 것으로 마무렸는데, 무늬가 극히 정교하다. 또 붉은 깁으로 장식한 것이 연잎 형상과 같다. 삼절(三節)에 공급되는데, 그 제도가 같다.


침의 寢衣

   침의의 제도는, 홍황색으로 거죽을 하고 흰 모시로 안을 댔는데, 안이 거죽보다 크고 네 변두기가 각각 1척이 넘는다.


저상 紵裳

   저상의 제도는, 거죽과 안이 6폭인데, 허리에는 가로 두른 깁을 쓰지 않고 두 개의 띠가 매어져 있다. 삼절의 자리마다 각각 저의(紵衣)와 함께 마련하여 놓게 해서 목욕할 때 쓰도록 한다.


저의 紵衣

   저의는 곧 속에 입는 훗옷이다. 이속(夷俗)은 준(純 가장자리에 두른 선)과 영(領 옷깃)을 쓰지 않고, 왕에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남녀 없이 다 저의를 입었다.


화탑선 畵搨扇

   화탑선은 금은을 칠해서 장식하고 거기다 그 나라의 산림(山林)․인마(人馬)․여자(女子)의 형태를 그렸다. 고려인들은 만들지 못하고 일본에서 만든 것이라고 하는데, 거기에 그린 의복을 보니 정말 그러했다.


삼선 杉扇

   삼선은 그리 잘 만들지 못한다. 단지 일본의 백삼목(白杉木)을 종이같이 쪼개어서 채색 실로 꿰어 깃과 같이 이어나간 것으로, 역시 바람을 낼 수 있다.


백섭선 白摺扇

   백섭선은 대를 엮어서 뼈대를 만들고 등지(藤紙)를 말라서 덮어씌우는데, 간혹 은․동의 못으로 장식하기도 한다. 대의 수효가 많은 것을 좋은 것으로 친다. 심부름을 하거나 일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가슴이나 소매 속에 넣고 다니는데, 쓰기가 퍽 간편하다.


송선 松扇

   송선222)은 소나무의 부드러운 가지를 가져다가 가늘게 깎아서 줄을 만들고, 그것을 두드려 실로 만든 후에 짜낸 것이다. 위에는 꽃무늬가 있는데 꽃을 뚫고간 등223)의 기교[穿藤之巧]에 못지 않다. 다만 왕부(王府)에서 사자(使者)에게 준 것이 가장 잘 만들어졌다.


초구 草屨

   초구(짚신)의 형태는 앞쪽이 낮고 뒤쪽이 높아 그 모양이 괴이하나, 전국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 신는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0 권


기 명 1 器皿一

   전대의 역사에 이르기를, ‘동이(東夷)는 그릇에 적대를 쓴다.’고 하였는데, 이제 고려의 토속(土俗)도 여전히 그러하다. 만듦새를 보면 예사스럽게 소박함이 자못 사랑스럽고, 다른 식기들도 왕왕 준이(尊彛)224)와 보궤(簠簋)225)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연음(燕飮) 때의 시설에도 또 완점(莞簟)226)과 궤석(궤席)227)과 유사한 것들이 많다.228)이는 대체로 기자(箕子)의 아름다운 교화에 물들어서 삼대(三代)의 유풍에 방불해진 것이다. 그 개략을 모아서 그림으로 보인다.


수로 獸爐

   자모수로(子母獸爐 짐승 모자의 형상으로 된 향로)는 은으로 만드는데, 깎고 아로새기고 하여 만듦새가 정교하다. 큰 짐승이 쭈그리고 앉아 있고 작은 짐승은 움켜 쥐는 형상으로 뒤돌아보며 입을 벌리고 있는데, 그 입으로 향기를 낸다. 오직 회경전(會慶殿)과 건덕전(乾德殿)의 공회(公會) 때에만 두 기둥 사이에 놓는 것으로 영조(迎詔) 떄에는 사향을 피우고, 공회 때에는 독누(篤耨)229), 용뇌(龍腦)230), 전단(旃檀)231), 침수(沈水)232) 등속을 태우는데, 그것들은 다 어부(御府)에서 하사한 향이다. 하나에 은 30근을 썼고, 짐승의 형태가 받침에 연결되어 있는데, 높이가 4척이고 너비가 2척 2촌이다.


수병 水甁

   수병의 형태는 대략 중국의 주주(酒注 술 주전자)와 같다. 그것을 만드는데는 은 3근을 쓰며, 정사, 부사, 도할관, 제할관의 자리에 설치한다. 높이는 1척 2촌, 배의 지름은 7촌, 용량은 6승이다.


반잔 盤琖

   반잔(술받침대가 있는 술잔)의 만듦새는 다 중국의 것과 같다. 다만 잔은 깊고 테두리가 오무라 들었고, 주(舟 담기는 부분)는 작고 발이 높다. 은으로 만들고, 간혹 금으로 칠하기도 하고 꽃을 아로새긴 것이 재치가 있다. 권주(勸酒)할 때마다 다른 술잔으로 바꾸는데, 다만 용량이 약간 많을 뿐이다.


박산로 博山爐

   박산로는 본래 한대(漢代)의 기물이다. 바다 안에 박산이란 이름의 산이 있는데, 그 형상이 연꽃 같기 때문에 향로에 그 형상을 본따 쓴 것이다. 아래의 분(盆)이 있는데, 거기에 산과 바다에 파도치고 물고기와 용이 출몰하는 형상을 만들어서 끓는 물을 담아 옷에 향기를 쏘이는 용도에 쓴다. 그것은 습기와 향기가 서로 붙어서 연기가 흩어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고려 사람이 만든 것은 그 꼭대기는 비록 박산의 형상을 본떴다고는 하지만 그 아래는 세 발이어서 원래의 만듦새와는 아주 다르다. 다만 재치있는 솜씨는 취할 만하다.


      주합 酒榼

   주합(술 그릇의 일종)은 들고 다니는 기물이다. 위는 뒤집어씌운 연잎으로 되고 양쪽 귀에는 고리사슬로 된 드는 끈이 있는데, 금으로 간혹 칠했다. 권주(勸酒)의 절차에만 쓰고 술은 빛깔과 맛이 다 좋다. 그 만듦새는 높이가 1척, 너비가 8촌, 드는 고리의 길이가 1척 2촌, 용량이 7승이다.


오화세233)烏花洗

   은 꽃무늬의 것은 늘 사용하지는 않고 단지 정사와 부사의 사적(私覿)234)때에만 있다. 약을 찍어서 꽃을 아로새겼고 검정 무늬에 횐 바탕인데 무게는 같지 않다.면의 너비는 1척 5촌이고 용량은 1두 2승이다.


면약호235)面藥壺

   면약호는 오직 정사・부사, 도할관, 제할관의 자리에만 은제(銀製)를 사용하고 나머지는 동으로 만들었다. 둥근 배에 긴 목으로 되어 있는데, 뚜껑의 형태는 좀 뾰족하다. 높이는 5촌, 배의 지름은 3촌 5푼, 용량은 1승이다.


부용준 芙蓉尊

   부용준의 형상은 위에 뚜껑이 있는데, 부용꽃이 막 봉우리진 것 같다. 간혹 금으로 칠해 장식하였고, 긴 목에 넓은 배를 하고 있다. 높이는 2척이고 용량은 1두 2승이다.


제병 提甁

   제병(들고 다니는 물 그릇)의 형상은, 머리가 길고 위가 뽀족하고 배가 크고 바닥이 평평하다. 그 만듦새는 여덟 모서리로 간혹 도금한 것을 쓴다. 속에는 숭늉이나 끓인 물을 넣는다. 나라의 관원과 존귀한 사람은 언제나 가까이 시중하는 자를 시켜 그것을 들고 따라다니게 한다. 크기는 같지 않고, 큰 것은 2승이 들어간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1 권


기 명 2 器皿二


유앙 油盎

   유앙(기름병)의 형상은 대략 술준과 같다. 백동(白銅)으로 만들었는데, 위에 뚜껑이 없다. 쓰러질까 염려하여 나무쐐기로 밑을 막는다. 배의 지름은 2촌, 용량은 3승이다.


정병 淨甁

   정병의 형상은 긴 목과 넓은 배의 곁에 부리가 하나 있고 중간은 두 마디로 되어 있으며 테가 있다. 뚜껑 목 중간에 턱이 있고 턱 위에 다시 작은 목이 있는데, 잠필(簪筆)의 형태를 본떴다. 존귀한 사람과 나라의 관원과 관사(觀寺 도관과 사찰), 민가에서 다 쓰는데 다만 물을 담을 수 있을 뿐이다. 높이는 1척 2촌, 배의 지름은 4촌, 용량은 3승이다.


화호 花壺

   화호의 만듦새는 위가 뾰족하고 아래가 둥글어, 대략 달아맨 쓸개와 같다. 역시 네모난 받침이 있고, 사시 물을 담아 꽃을 꽂는다. 전에는 잘 만들지 못했지만 근래에는 꽤 잘 만든다. 전체 높이가 8촌, 배 지름이 3촌, 용량이 1승이다.


수부 水釜

   수부의 만듦새는, 형상이 격정(鬲鼎 세발솥을 총칭한 말) 같은데 동(銅)으로 주조하였다. 두 개의 짐승꼴 고리가 있어 거기에 나무를 꿰면 짊어질 수가 있다. 고려인의 방언으로는 큰 것 작은 것을 막론하고 다 요복야(㑃僕射)236)라 하는데, 관사안의 여러 방에 다 공급한다. 높이는 1척 2촌, 너비는 3척,용량은 1석 2두이다.


수앵 水甖

   수앵(물통)은 수부의 형태와 같으나 약간 작고, 또 동제 뚜껑이 있다. 그것을 써서 물을 긷는 것으로 중국의 수통(水桶)을 본뜬 것이다. 위에 두 개의 귀가 있어서 쳐들 수 있다. 고려의 풍속은 지고 이고 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 그릇이 가장 많다. 높이는 1척, 용량은 1두 2승이다.


탕호 湯壺

   탕호(더운 물을 담는 그릇)의 형태는 화호(花壺)와 같으면서 약간 납작하다. 위에는 뚜껑을 하고 아래는 받침을 하여 더운 기운이 새나가지 않게 하였으니, 역시 옛 온기(溫器)의 부류이다. 고려인이 차를 끓일 때 많이들 이 호(壺)를 마련한다. 전체 높이는 1척 8촌, 배의 지름은 1척8촌, 용량은 2두이다.


백동세 白銅洗

   백동세(백동으로 만든 대야)의 형태는 오화세(烏花洗), 은화세와 흡사하나 단지 문채가 없다. 고려인은 그것을 빙분(氷盆)이라 한다. 또 한등 낮은 적동(赤銅)으로 된 것이 있는데 만듦새가 약간 졸렬하다.


정로 鼎爐

   정로의 만듦새는 대략 박산로와 같은데, 위에 꽃모양의 뚜껑이 없고 아래에는 세 발이 있다. 단지 도관(道觀)과 신사(神祠)에서만 그것을 쓴다. 높이는 1척, 꼭대기의 너비는 6촌, 아래의 쟁반은 너비가 8촌이다.


온로 溫爐

   온로의 형태는 정(鼎)과 같은데 전이 있고, 배 아래의 세 발은 짐승이 물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그것에 물을 담아서 궤안(几案)에 놓아 두는데, 이는 겨울철에 손을 데우는 기물이다. 면의 너비는 1척 2촌이고, 높이는 8촌이다.


거종 巨鐘

   큰 종은 보제사(普濟寺)237)에 있는데, 형체는 크나 소리는 시원하지 않다. 위에는 이뉴(螭紐 이무기 꼴을 한 종을 매다는 부분)가 있고, 중간에는 한쌍의 비선(飛仙)이 있다. 각명(刻銘)은, ‘갑술년주 용백동 1만 5천 근’(甲戌年鑄用白銅一萬五千斤)이라고 되어 있다.238)고려인이 말하기를, ‘전에는 중루(重樓 이중의 높은 전각)에 설치했었는데, 소리가 거란(契丹)에까지 들리므로 선우(單于 본래는 흉노(匈奴)의 군장, 여기서는 물론 요(遼)의 군주를 말하는 것이다.)가 싫어하여 지금은 이곳에 옮긴 것’이라고 한다. 틀림없이 과장한 말로 반드시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2 권


기 명 3 器皿三


다조 茶俎

   토산다(土産茶)는 쓰고 떫어 입에 넣을 수 없고, 오직 중국의 납다(蠟茶)239)와 용봉사단(龍鳳賜團)240)을 귀히 여긴다. 하사해 준 것 이외에 상인들 역시 가져다 팔기 때문에 근래에는 차 마시기를 자못 좋아하여 더욱 차의 제구를 만든다. 금화오잔(金花烏盞)241), 비색소구(翡色小甌)242), 은로탕정(銀爐湯鼎)243)은 다 중국 제도를 흉내낸 것들이다. 무릇 연회 때면 뜰 가운데서 차를 끓여서 은하(銀荷 은으로 만든 연잎 형상을 한 작은 쟁반)로 덮어가지고 천천히 걸어와서 내놓는다. 그런데 찬자(贊者)가 ‘차를 다 돌렸소’하고 말한 뒤에야 마실 수 있으므로 으례 냉차(冷茶)부터 마시게 마련이다. 관사 안에는 홍조(紅俎)를 놓고 그 위에다 차의 제구를 두루 진렬한 다음 홍사건(紅紗巾 붉은 색의 사포로 만든 상보)으로 덮는다. 매일 세 차례씩 내는 차를 맛보게 되는데, 뒤어어 또 탕(湯 끓인 물)을 낸다. 고려인은 탕을 약(藥)이라고 하는데, 사신들이 그것을 다 마시는 것을 보면 반드시 기뻐하고, 혹 다 마셔내지 못하면 자기를 깔본다고 생각하면서 불쾌해져서 가버리기 때문에 늘 억지로 그것을 마셨다.


와준 瓦尊244)

   고려에는 찹쌀은 없고 멥쌀에 누룩을 섞어서 술을 만드는데, 빛깔이 짙고 맛이 독해 쉽게 취하고 속히 깬다. 왕이 마시는 것을 양온(良醞)245)이라고 하는데 좌고(左庫)246)의 맑은 법주(法酒)247)이다. 거기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와준(瓦尊)에 담아서 황견(黃絹)으로 봉해둔다. 대체로 고려인들은 술을 좋아하지만 좋은 술은 얻기가 어렵다. 서민의 집에서 마시는 것은 맛은 싱겁고 빛깔은 진한데,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마시고 다들 맛있게 여긴다.


등준 藤尊

   등준은 산과 섬의 주군(州郡)에서 진상하는 것이다. 속은 역시 와준이고 바깥은 등(藤)으로 두루 감았다. 배(舟)속이 울렁거려 서로 부딪혀도 깨지기 않으며 위에는 봉함이 있는데 각각 주군의 인장 글씨가 찍혀져 있다.


도준 陶尊

   도기의 빛깔이 푸른 것을 고려인은 비색(翡色)이라고 하는데, 근년의 만듦새는 솜씨가좋고 빛깔도 더욱 좋아졌다. 술그릇의 형상은 오이 같은데 위에 작은 뚜껑이 있는 것이 연꽃에 엎딘 오리의 형태를 하고 있다. 또 주발, 접시, 술잔, 사발, 꽃병, 탕잔(湯琖)도 만들수 있었으나 모두 정기제도(定器制度)248)를 모방한 것들이기 때문에 생략하고 그리지 않고, 술그릇만은 다른 그릇보다 다르기 때문에 특히 드러내었다.


도로 陶爐

   산예출향(狻猊出香 사자 꼴을 한 도제 향료의 이름) 역시 비색(翡色)인데, 위에는 쭈그리고 있는 짐승이 있고 아래에는 앙련화(仰蓮花)가 있어서 그것을 받치고 있다. 여러 기물들 가운데 이 물건만이 가장 정절(精絶)하고, 그 나머지는 월주(越州)249)의 고비색(古秘色)250)이나 여주(汝州)251)의 신요기(新窯器)252)와 대체로 유사하다.253)


식조 食罩254)

   공회(公會)에서 음식을 낼 때 아래는 쟁반으로 받치고 위에는 푸른 덮개를 놓는다. 왕과 정사. 부사의 것에는 적황색의 장식을 가하는데 음식의 정갈하고 거친 것을 구별하는 방법이다.


등비 藤篚

   옛날의 폐백(幣帛)에는 상자와 광주리를 사용하였는데 지금 고려의 풍속에서 그것이 없어지지 않고 있다. 그 광주리는 백등(白藤 표피를 제거한 등을 말함)으로 짜서 만들며 위에는 뒤섞인 무늬가 있는데, 화목(花木)과 조수(鳥獸)의 형상을 하고 있다. 안은 적황색의 무늬 능직을 대며 큰 것과 작은 것을 합친 것을 한 벌이라고 한다. 그 값은 백금(白金 은을 말함.) 1근과 맞먹는다. 왕부(王府)에서 사용하는 것이 가장 좋은데 그것들은 군읍(郡邑)의 진상품이다. 나머지 관원과 서민들이 사용하는 것들은 만듦새가 어성하니 이는 예(禮)에 맞춰서 쓰는 것일 따름이다.


죽부 鬻釜

   죽부는 삶는 기물인데 철로 만든다. 위에는 뚜껑이 있고 배 아래에는 세발이 있다. 소용돌이 모양의 무늬는 가늘기가 털오라기 같다. 높이는 8촌, 너비는 1척 2촌, 용량은 2승 5작이다.


수옹 水瓮

   수옹(물독)은 도기이다. 넓은 배에 오그라든 목을 했는데 그 입이 약간 넓다. 높이 6척, 너비는 4척 5촌인데, 3석 2승이 들어간다. 관사 안에서는 동옹(銅瓮)을 쓰고, 산과 섬과 바닷길에서 배로 물을 실어 나를 때 이 수옹을 사용한다.


초점 草苫

   초점의 용도는 중국에서 포대를 쓰는 것과 같다. 그 형태는 망태기 같은데 풀을 엮어 만든다. 무릇 쌀, 밀가루, 땔나무, 숯 등속은 다 그것을 가지고 담는다. 산길을 갈 때 수레가 불편하면 흔히 그것에 담은 것을 마필에 싵고 간다.


도필 刀筆

   칼과 붓의 집은 나무를 깎아서 만든다. 그 만듦새는 세 칸인데, 그 중의 하나는 붓을 꽂고 그 중의 둘은 칼을 꽂는다. 칼은 튼튼하고 잘 들게 생겼는데, 칼 하나는 약간 짧다. 산원(散員 일정한 임무가 없는 관원) 이하의 관리와 지응(祗應)255), 방자(房子), 친시(親侍)가 그것을 찬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3 권


주 즙 舟楫

   바람이 물위를 가는 것이 괘(卦)에 있어서는 환(煥)인데, 배를 이용하여 통하지 않는 것을 건네주는 것은 이 괘에서 그 법상을 취한 것이다.256)그런데 후세에 성지(聖知)를 지은 이가 교대로 나오고 백공(百工)이 장식을 더했기 때문에, 용의 무늬와 익새 머리를 한 선박이 바람을 타고 물결을 헤치며 하루에 천리를 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반드시 장강과 황하를 가로질러 가는 것이 평지를 밟고 가듯 하게 하여, 비단 나무를 쪼개어 쓰는 간단함에 그치지 않게 되었다.


   고려인으로 말하면 해외에서 생장하여 툭하면 고래같은 파도를 타게 되니 본래 선박을 앞세우는 것은 의당한 일이다. 이제 그 제도를 살펴보니, 간략하고 그리 정교하지 않으니 그들이 본래부터 물을 편안하게 여기고 그것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누추한 대로 간략하게 다루고 노둔 졸렬하면서도 고치지 않는 것일까? 이제 본 것을 가지고 그림에 늘어놓기로 하겠다.


순선 巡船257)

   고려는 땅이 동해(東海 우리의 서해를 말하는 것이다.)에 접해 있는데도, 선박 건조의 기술이 간략하기기 특히 심하다. 중간에 돛대 하나를 세워놓고 위에는 다락방이 없으며, 다만 노와 키를 마련하였을 따름이다. 사자(使者)가 군산(群山)으로 들어가면 문(門)에 이러한 10여 척이 있는데, 다 정기(旌旗)를 꽂았고, 뱃사공과 나졸(邏卒)은 다 청의(靑衣)를 착용하고 호각을 올리고 징을 치고 온다. 각각 돛대 끝에 작은 깃발 하나씩을 세우고 거기에, 홍주도순(洪州都巡), 영신도순(永新都巡), 공주순검(公州巡檢), 보령(保寧), 회인(懷仁), 안흥(安興), 기천(曁川), 양성(陽城), 경원(慶源) 등의 글씨를 썼다. 그리고 ‘위사’(尉司)라는 글자가 있으나 실은 포도관리(捕盜官吏)들이다. 입경(入境)해서부터 회정(回程)할 때 까지 군산도에서 영접하고 전송하고 하는데, 신주(神舟 중국사절의 배를 말한다)가 큰 바다로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고서야 자기 나라로 돌아간다.


관선 官船

   관선의 만듦새는, 위는 띠로 이었고 아래는 문을 냈으며, 주위에는 난간을 둘렀고, 가로지른 나무를 꿰어 치켜올려서 다락을 만들었는데, 윗면이 배의 바닥보다 넓다. 전체가 판책(板簀)은 쓰지 않았고, 다만 통나무를 휘어서 굽혀 나란히 놓고 못을 박았을 뿐이다. 앞에 정륜(矴輪 닻줄을 감는 제구)이 있고, 위에는 큰 돛대를 세웠고, 포범(布帆 천으로 만든 돛) 20여 폭이 드리워져 있는데, 그중 5분의 1은 꿰매지 않고 펼쳐진 채로 두었다, 이것은 풍세(風勢)에 거스를까 두려워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사자(使者)가 경내로 들어가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 접반(接伴), 선배(先排), 관구(管勾), 공주(公廚) 등258)모두 10여척의 배가 크기가 같고, 다만 접반의 배에만 시설과 장막이 있을 뿐이다.


송방 松舫

   송방은 군산도의 배이다. 선수(船首)와 선미(船尾)가 다 곧고 가운데에 선실 5칸이 마련되어 있고 위는 띠로 덮었다. 앞뒤에 작은방 둘이 마련되어 있는데, 평상이 놓여지고 발이 드리워져 있다. 중간에 트여있는 두칸에는 비단보료가 깔려 있는데 가장 찬란하다. 오직 정사,부사 및 상절(上節)만이 거기에 탄다.


막선 幕船

   막선의 준비는 세섬에 다 되어 있어, 그것으로 중・하절(中下節)의 사절들을 태운다. 위는 푸른천으로 방을 만들고 아래는 장대로 기둥을 대신하고 네 귀퉁이는 각각 채색 끈으로 매었다.


궤식 饋食

   사자(使者)가 경내로 들어가면, 군산도의 자연두(紫燕洲)259)세 주(州)에서 다 사람을 보내어 식사를 제공한다. 서찰을 가진 관리자는 자주옷에 복두(幞頭) 차림이고, 그 다음 관리는 오모(烏帽 검정색 모자) 차림이다. 식품은 10여 종인데 국수가 먼저이고 해물은 더욱 진기하다. 기명은 금, 은을 많이 쓰는데, 청색 도기도 섞여 있다. 쟁반과 소반은 다 나무로 만들었고 옷칠을 했다. 신주(神舟)가 정박하고 섬에 가까이 가지 않으면, 반드시 개(介)를 보내어 배를 타고 사자(使者)에게 음식을 드리게 한다. 구례(舊例)로는 3일동안 보내며, 만약에 기간이 지나도 바람에 막혀 떠나지 못하게 되면, 식사의 공급이 더이상 오지 않는다.


공수 供水

   바닷물은 맛이 심히 짜고 써서 입에 댈수 없다. 무릇 선박이 큰 바다를 건너가려고 하면 반드시 물독을 마련하여 샘물을 비축해서 식음에 대비한다. 대체로 큰 바다 가운데서는 바람은 그리 심하지 않고 물의 유무로 생사가 판가름난다. 중국 사람들이 서쪽에서부터 큰 바다를 횡단하고 오느라 이미 여러날이 되었으므로, 고려인은 중국인의 샘물이 반드시 다 없어졌으리라 짐작하고서, 큰 독에다 물을 싣고 배를 저어와 맞이하는데, 각각 차와 쌀로 갚아준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4 권


해 도 海道

   바다는 온갖 물의 모체여서 천지와 더불어 똑같이 극한이 없기 때문에, 그 양은 천지를 측량할 수 없는 것과도 같다. 밀물과 썰물의 왕래로 말하면 시기에 맞춰 어긋나지 않아 천지간의 지극한 미더움이다. 옛사람들이 일찌기 그것을 논하였다. 「산해경」(山海經)에서는 해추(海鰌)가 굴에 들고 나는 도수(度數)라 하였고260), 부도서(浮圖書 불가의 책을 말함)에서는 신룡보(神龍寶)261)의 변화라고 하였다. 두 숙몽(竇叔蒙)의 「해교지」(海嶠志)에서는 물이 달의 차고 기울고 하는 것을 따르는 것이라고 하였다. 노 조(盧肇)262)의 해조부(海潮賦)에서는 해가 바다에 출입하여 충격을 주어 이루어 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왕 충(王充 후한 때 사람)의 「논형」(論衡)에서는, 물이란 천지의 혈맥이어서 기운의 진퇴에 따라 그렇게 된다고 하였다. 모두가 다 억설을 내세우고 편견을 고집하는 것으로 생각은 근사하나 미진하다.


   대체로 하늘은 물을 싸고 있고 물은 땅을 받들고 있는데, 큰 기원의 기운이 태공(太空) 안에서 오르내린다. 땅은 물의 힘을 받아서 스스로를 지탱하고 또 원기의 오르내림과 더불어 서로 내렸다올랐다 하지마는 사람들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그것은 또 배 안에 앉아 있는 자가 배가 스스로 움직이고 있는 것을 모르는 것과도 같다. 기운이 올라가고 땅이 가라앉을 때에는 바닷물이 넘쳐올라서 밀물이 되고, 기운이 내려가고 땅이 뜰 때에는 바닷물이 줄어 내려가서 썰물이 된다. 하루의 12시를 헤아려 보면, 자시(子時)에서 사시(巳時)까지는 그 기운이 양(陽)인데, 양의 기운은 또 그 나름으로 오르내림이 있어서 낮에 움직인다. 오시에서 해시(亥時)까지는 그 기운이 음(陰)인데, 또 그나름으로 오르내림이 있어서 밤에 움직인다. 하룻낮 하룻밤은 음양의 기운을 합치면 도합 두번 오르고 두번 내린다. 그래서 하루사이에 밀물과 썰물이 다 두차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낮과 밤의 시간은 해의 오르내림의 수에 달려 있고 달에 호응한다. 달이 자(子)에 오면 양기가 비로소 오르고, 달이 오(午)에 오면 음기가 비로소 오르기 때문에 밤 밀물때는 달은 다 자에 오르고 낮 밀물 때는 달은 다 오에 온다. 또 해의 운행은 느리고 달의 운행은 빠르다. 빠른 것을 가지고 느린 것에 응하자니까 29도와 반(半)도를 지날때 마다 달의 운행이 따라 간다. 해와 달의 만남을 합삭(合朔)263)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월삭(月朔 음력으로 매달 초하루를 말함)의 밤 밀물 때는 해 역시 자(子)에 오고, 월삭의 낮 밀물 때는 해 역시 오(午)에 온다. 또, 낮은 하늘 위에서 말하자면, 천체는 서쪽으로 돌아가고 해와 달은 동쪽으로 운행하므로 초하루부터 이후는 달이 빨리 가는 것이 동쪽으로 점점 기울어지며, 오시(午時)에 이르러서는 점점 느려지고 밀물 역시 그것에 호응한다. 낮에는 느리기 때문에 낮 밀물은 초하루 이후에는 차례로 차가 생겨 밤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초하루는 오시이고, 2일은 오시 말(末)이고, 3일은 미시(未時)이고, 4일은 미시 말이고, 5일은 신시이고, 6일은 신시 말이고, 7일은 유시이고, 8일은 유시 말이 되는 것이다. 밤은, 바다 아래서 말하자면, 천체는 동쪽으로 굴러가고 해와 달은 서쪽으로 운행한다. 초하루부터 이후는 달이 빨리 가는 것이 서쪽으로 점점 기울어지며, 자시(子時)에 이르러서는 점점 느려지고 밀물역시 그것에 호응한다. 밤에 느리기 때문에 밤 밀물은 초하루 이후에는, 차례로 차가 생겨 낮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초하루는 자시이고, 2일은 자시 말이고, 3일은 축시이고, 4일은 축시 말이고, 5일은 인시이고, 6일은 인시 말이고, 7일은 묘시이고, 8일은 묘시 말이 되는 까닭이다.


   거기다 더해서 철에는 차례에 따른 변화가 잇고 기운에는 성쇠가 있어, 밀물이 밀려오는 것도 역시 그로 말미암아 크거나 작아진다. 묘(卯), 유(酉)의 달이 되면 음양이 교대하는데, 기운은 교대 때문으로 해서 세차게 나온다. 그래서 밀물의 대단함이 유독 나머지 날들과는 달라지는 것이다. 이제 바다 속에는 물고기와 짐승이 있어, 그것들을 잡아서 가죽을 벗겨 말리면, 밀물이 들 때가 되면 털이 다 일어서니, 이것이 어찌 기운을 느껴 물류(物類)가 호응하는 이치에 따라 절로 그렇게 되는데 근본을 둔 현상이 아니겠는가?

물결이 흘러서 소용돌이 치는 것, 모래와 흙이 엉기는 것, 산과 돌이 치솟는 것으로 말하면 또 각각 그 형세가 있다. 이를테면 바다 가운데 땅으로 촌락을 이룰수 있는 것을 주(洲)라고 하는데 십주(十洲) 따위가 그것이다. 주 보다 작으나 역시 살 수 있는 것은 도(島)라고 하는데 삼도(三島) 따위가 그것이다. 도 보다 작으면 서(嶼)라고 하고 서보다 작으면서 초목이 있으면 섬(苫)264)이라고 하고 섬과 서 같으면서 그 바탕이 순전히 돌이면 초(焦 암초를 말함)라고 한다.


   무릇 선박의 운행이란 해문(海門)을 나가 버리면 하늘과 땅이 잠겨 버려 위아래가 하나같이 푸르르고, 곁에는 구름이나 먼지가 없으며, 천지가 갤 때를 만나면 밝은 해가 하늘 복판에 뜨고, 움직이는 구름이 사방으로 들어가 버려, 황홀한 것이 육허(六虛 상하 사방의 극한을 포괄하는 우주의 공간)의 밖을 노니는 듯하여 이미 말로 설명할 수 없어진다. 바람과 파도가 간간이 일어나고 우뢰와 비로 캄캄해지고, 교룡과 이무기가 출몰하고, 신령한 물건이 변화를 일으키기에 이르면, 가슴이 뛰고 담기가 없어져 말할 바를 모르게 된다. 그러므로 그 중 기록할 수 있는 것이란 단지 산의 형태와 밀물의 징후 뿐일 따름이다.


   또 고려의 해도(海道)는 옛날도 지금과 같았다. 옛부터 전해지는 것을 알아보면 지금은 혹 보이지 않는 것도 있고, 지금 기재한 것은 혹 옛사람이 말하지 않은 것도 있으나 그것이 본래부터 달랐던 것은 아니다. 대체로 항해하는 선박이 통하는 곳은 언제나 비바람의 항해를 보고 조절하는 것으로, 바람이 서쪽에서 끌어당길 때에는 동쪽에 있는 주도(洲島)들은 볼 수 없고 남쪽과 북쪽의 경우 역시 그러하다. 이제 밀물 징후의 대개를 이미 앞에 상세하게 논하였으므로 삼가 신주(神舟)가 경과한 도주(島洲)와 섬서(苫嶼)를 늘어놓아 그림으로 그린다.


신주 神舟

   신종황제(神宗皇帝)께서 고려로 사신을 보내실 적에 유사(有司)에게 조명(詔命)을 내려 거대한 함정 두척을 건조시킨 적이 있었다. 하나는 ‘능허치원안제신주’(凌虛致遠安濟神舟)265)이고 하나는 ‘영비순제신주’(靈飛順濟神舟)266)인데, 그 규모가 심히 웅장하였다. 황제께서 제위를 계승하신 뒤에는 <부황 신종황제>를 앙모하시는 효심이 지극하였으니, 고려인들에게 은혜를 더 베푼 까닭은 실로 희풍(熙豊 희령(熙寧)과 원풍(元豊), 신종의 연호 1068~1084)의 치적(治績)을 확대시켜 나간 것이다.267)숭녕(崇寧, 휘종의 연호, 1102~1105)부터 지금에 이르기 까지 자주 사신을 보내어 위무하는 은혜가 융숭하고 예가 후하거니와, 또 유사(有司)에게 조명을 내려 다시 배 두척을 건조케 하였다.


   이에 그 전체를 확대하고 명칭을 크게 하니, 하나는 ‘정신이섭회원강제신주’(鼎新利涉懷遠康濟神舟)268)이고 하나는 ’순류안일통제신주‘(循流安逸通濟神舟)269)이다. 높기가 상악같은데 물결 위에 떠 움직이면 비단 돛에 익새선수는 교룡과 이무기를 굴복시키니, 이는 휘황한 사신이 이적(夷狄)에게 위엄을 보이는 것으로 고금에 으뜸이다. 따라서 고려인들이 조서를 맞이하던 날 나라를 기울여 구경하고 환호 감탄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객주 客舟

례로는 조정에서 사신을 파견하면 언제나 출발 기일에 앞서 복건(福建)과 양절(兩浙)270)의 감사에게 위촉하여 객주를 모집 고용하게 하고, 또 명주(明州)271)에서 장식(裝飾)을 하게 하는데 대략 신주와 같다. 형체는 갖췄으나 크기가 작아, 그 길이가 10여 장(丈)이고 깊이는 3장, 넓이는 2장 5척이며, 2천 곡(斛)의 곡식을 실을 수 있다, 그 만듦새는 다 통나무와 박달나무를 섞어 포개서 이루어진 것으로, 위의 평평함은 저울대 같고 아래의 기울어짐은 칼날 같은데 그것이 물결을 헤치고 갈 수 있어서 가치가 있다. 그 가운데는 세 곳으로 나뉘어져 있다. 앞의 한 선창에는 황판(艎板 배에 까는 나무 판자)를 놓지 않고 다만 바닥에 화덕과 물덕을 놓는데, 그 곳은 바로 두 돛대의 사이에 해당된다. 그 아래에는 곧 무기를 넣어두는 헛간이다. 그 다음의 한 선창은 네개의 방으로 꾸몄다. 그 뒤의 한 선창은 교옥(교屋 높은 집이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높이가 1장여나 되고 사면의 벽에 창문이 마련되어 있는 것이 가옥의 만듦새 같다. 위에 난간이 베풀어져 채색 그림이 화려 찬란한데 휘장을 써서 장식을 더하였다. 사자(使者)들의 관속들이 계급의 서열에 따라 나눠서 거처한다. 위에는 대나무 뜸이 있는데, 평상시에는 포개 쌓아두고, 비를 만나면 두루 촘촘하게 펼쳐 덮는다. 그러나 뱃사공들은 교옥이 높아지는 것을 극히 두려워 하는데, 그것이 바람을 막아서 전대로 있는 것의 편리함만 못하기 때문이다.


    뱃머리의 양쪽 곁기둥 가운데에 수레바퀴가 있고 그 위에 등으로 꼰 동아줄을 매었는데, 그 크기가 서까래 같고 길이는 5백 척이며, 아래는 닻돌을 달아 매었고 돌 양 곁은 두개의 나무 갈고리가 끼고 있다. 배가 큰 바다로 들어가지 않고 산에 근접해서 정박하게 되면, 닻을 풀어놓아 물 바닥에 닿게 하고 뱃줄 등속을 당겨 놓으면 배는 가지 않는다. 만약에 풍랑이 다급하면 유정(遊矴 보조로 쓰는 닻)을 보태는데 그 작용은 큰 닻과 같으며 그 양 곁에 있다. 갈 때가 되면 그 바퀴를 감아서 거둬 들인다. 뒤에는 정타(正柁 주되는 키)가 크고 작은 두 등급의 것이 있어 물의 얕고 깊음에 따라 바꿔 쓴다. 교옥 뒤에 위에서부터 아래로 꽂은 두 개의 노를 삼부타(三副柁)라고 하는데 이것은 오직 큰 바다에 들어가야만 쓴다.


   또 주복(舟腹) 양쪽 곁에다 큰 대나무를 묶어 자루를 만들어서 물결을 막는데, 그것을 장치하는 법은, 물이 자루를 넘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경중(輕重)의 도수를 삼는다. 그리고 수붕(水棚  곁노들을 설치한 의지간(倚支間))이 대나무 자루 위에 있다. 배마다 열개의 곁노가 있어 산을 헤치고 항구로 들어가고 밀물을 따라 문(門)272)을 지나가고 하는데는 다 곁노를 울려 저으며 가는데, 이때 뱃사공들이 올라뛰고 외치고 하며 힘쓰는 것이 대단하여도 배 가는 것은 결국 바람을 타고 가는 것만큼 빠르지 못하다. 대장(大檣)은 높이가 10장이고 두장(頭檣)은 높이가 8장이다. 바람이 빠르면 첫돛 50폭을 펼치고 좀 치우치면 움직이는 뜸을 써서 좌우에 날개같이 펼쳐서 풍세(風勢)를 잡아준다. 대장 꼭대기에 또 작은 돛 10폭을 다는데 그것은 야호범(野狐颿)273)이라고 하며, 바람이 멎으면 그것을 쓴다.


   그러나 바람에는 8면이 있는데, 오직 정면에서 불어올 때만 갈 수가 없다. 장대를 세워 새깃으로 바람의 방향을 알아보는데 그것을 오량(五兩)274)이라고 한다. 대체로 바른 바람을 얻기가 어렵기 때문에, 포범(布帆)을 사용하는 것은 이봉(利蓬 움직이는 뜸)을 접었다 펼쳤다 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에 맞게 할 수 있는 경우만은 못하다. 바다에서의 항행은 깊은 것은 두렵지 않고 다만 얕은 곳에 박히는 것을 두려워한다. 배의 바닥이 평평하지 않기 때문에 만약에 밀물이 빠지면 기울어 쓰러지고 구제할 수 없다. 그래서 늘 노끈으로 납추를 드리워서 제어 본다, 배마다 뱃사공과 수부가 60인 가량이나 되는데, 다만 그 수령(首領)이 해도(海道)를 익히 알고 하늘의 때와 사람의 일을 잘 헤아려서 여러사람의 마음을 잡는 것을 믿을 뿐이다. 그래서 창졸간의 어려움이 생겨도 수미가 한 사람같이 서로 호응하면 구제해 낼 수가 있는 것이다. 신주의 길이, 넓이, 높이, 크기와 집물기구, 인원수로 말하면 다 객주보다 3배나 된다.


초보산 招寶山275)

   선화(宣和) 4년 임인(고려 예종 17) 봄 3월에 조명을 내려 급사중 노윤적(路允迪)과 중서사인 부묵경(傅墨卿)을 국신사와 부사에 충임하여 고려로 가게 하였다. 가을 9월에 국왕과 왕후가 흥거하였기 때문에 특지를 받고 제전과 조위의 임무를 겸임하고 갔으니, 원풍(元豊 송 신종의 연호) 연간의 고사를 따른 것이다. 5년 계묘 봄 2월 18일(임인)에 장비를 재촉하고 배를 꾸몄으며, 24일에는 조명을 내려 예모전(睿謨殿)에 가서 예물을 선시(宣示)하였고, 3월 11일(갑자)에는 동문관(同文館)에 가서 계유(誡諭)를 들었고, 13일(병인)에는 황제께서 숭정전(崇政殿)에 납시어 평대(平臺)에 자리잡고 친히 보내며 전지(傳旨)를 선유(宣諭)하시었고, 14일 (정묘)에 영녕사(永寧寺)에서 석연(錫宴 황제의 명의로 전송하는 잔치)하시었다. 이날 배를 풀어 변경(汴京 당시 북송의 수도, 지금의 하남성 개봉)을 나갔다. 여름 5월 3일(을묘)에 배가 사명(四明)276)에 머물렀다. 이에 앞서 특지를 얻어 두 척의 신주(神舟)와 6척의 객주(客舟)로 같이 가게되어 13일(을축)에 예물을 받들어 8척의 배에 넣었다. 14일(병인)에 공위대부(拱衛大夫) 상주관찰사직예사전(相州觀察直睿思殿)277)관 필(關弼)을 보내 조명의 취지를 말하고, 명주(明州)의 청사당(廳事堂)에서 석연하였고, 16일(무진)에 신주가 명주를 떠나 19일(신미)에 정해현(定海縣)278)에 도달하였다.


   이 기일에 앞서 중사(中使)279)인 무공대부(武功大夫)280) 용팽년(容彭年)을 보내어 총지원(總持院)281)에서 7주야 동안 도량(道場)을 가졌고, 또 어향(御香)을 내려 현인조순연성광덕왕사(顯仁助順淵聖廣德王祠)282)에 선축(宣祝)하니 신물(神物)이 나타났는데 그 형상이 도마뱀 같았다. 이는 실로 동해의 용군(龍君)인 것이다. 그 사당앞 10여 보 지점에 근강(堇ꞥ江)이 끝나는 곳에 산 하나가 높다랗게 바다 가운데 나와 있는데 그 위에 작은 탑이 있다. 전부터 전해지기로는 바다를 향하는 배가 이 산을 바라보면 그것이 정해(定海)임을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초보(招寶)라고 명명한 것이다.


   이 곳에서부터 비로소 바다로 나가는 입구라고 하게 된다. 24일(병자)에 배에 들어가 징과 북을 울리고 기치를 펼치고서 차례에 따라 배를 풀고 떠났다. 중사관 필은 초보산에 올라가 어향을 피우고 큰 바다를 바라보며 재배(再拜)하였다. 이 날은 날씨가 쾌청하였다. 사각(巳刻)에 동남풍을 타고 뜸을 펼치고 곁노를 저었는데, 수세(水勢)가 매우 급해서 꿈틀거리며 갔다. 호두산(虎頭山)을 지나가니 물이 항구의 입구에 있는 칠리산(七里山)에 가득하였다. 호두산은 그 형태가 유사하여서 그렇게 명명한 것이다. 그곳을 헤아려 보니 이미 정해에서 20리나 떨어져 있었다. 물의 색깔은 근강과 다르지 않았으나 다만 맛이 좀 짤 뿐이었다. 대체로 온갖 냇물이 모이는 곳이라 이곳까지 왔는데도 여전히 맑아지지 않았다.


호두산 虎頭山

   호두산을 지나 수십리를 가면 곧 교문(蛟門)에 이른다. 대체로 바다 가운데 산이 대치하고 있고 그 사이에 물길이 있어, 배가 통할 수 있는 것이면 다 문이라고 한다. 교문은 교룡이 사는 곳이라고 하는데 삼교문(三交門)이라고도 한다. 그 날 신각(申刻) 말에 멀리 크고 작은 두 사산(謝山)283)을 바라보며 송백만(松柏灣)을 지나 노포(蘆浦)에 당도하여 닻을 던지고 8척의 배가 같이 정박하였다.


심가문 沈家門

   25일(정축) 진각(辰刻)에 사방의 산이 안개로 덮여 있는데, 서풍이 일어나 뜸을 펼치고 꿈틀꿈툴 굴곡을 지으며 바람의 세력을 따라가느라 그 진행이 심히 느렸다. 뱃사람은 그것을 ‘거풍’(拒風)이라 한다. 사각(巳刻)에 안개가 흩어져 희두백봉(稀頭白峯)의 착액문(窄額門) 석사안(石師顔)284)으로 나가 뜬 후에 심가문에 이르러서 닻을 던졌다. 그 문산(門山)은 교문(蛟門)과 유사한데 사방의 산이 동그랗게 안고 있으며, 두 문을 마주열고 있는데 산 세개가 연닿아 있어 아직도 창국현(昌國縣)285)에 속해 있다. 그 위에 어부와 나무꾼 10여 집이 모여 사는데, 그중에서 대성(大姓)을 가지고 그 해문을 명명한 것이다.


   신각(申刻)에 비바람이 캄캄하게 닥쳐오고 우뢰와 번개가 급작스럽게 들이닥치니 얼마동안이 지나서야 멎었다. 이 날 밤 산으로 가서 장막을 치고 땅을 쓸고서 제사를 지냈다. 뱃사람은 그것을 사사(祀沙 모래를 제사한다는 뜻)라고 하나 실은 악독(岳瀆 산악과 하해를 말함)을 맡아 다스리는 신(神)으로, 배식(配食)하는 위(位)가 심히 많다. 배마다 각각 나무를 깍아 작은 배를 만들어서 거기에 불경(佛經)과 말린 양식을 싣고, 싣고가는 사람들의 성명을 써서 그 속에 넣어 그것을 바다에 던진다. 재앙을 떨어내고 압승(壓勝 자기의 해로운 것이 기운을 떨치지 못하게 하는 술법)하는 술법의 일단인 것이다.


매잠 梅岑286)

   26일(무인)에 서북풍이 심히 강해서 사자(使者)가 삼절(三節)의 인원을 거느리고 작은 배로 상륙하여 매잠으로 들어갔다. 전부터 이르기를, 매자진(梅子眞)이 은거하던 곳이기 때문에 이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신발 자욱과 표주박 흔적이 돌다리 위에 있다. 그 곳 깊은 산기슭 속에는 소량(蕭粱 남조 양양의 소도성)이 세운 보타원(寶陀院)이 있고 그 절에는 영감관음(靈感觀音)이 있다. 옛날 신라(新羅)의 상인이 오대산(五臺山)287)에 가서 그 곳 관음상을 파내어 자기 나라로 싣고 돌아가려고 바다로 나갔더니 암초를 만나 배가 달라붙고 전진하지 않았다. 이에 도로 암초 위에다 관음상을 놓으니, 보타원의 중인 종악(宗岳)이라는 자가 맞아다 그 절에 봉인하였다. 그 뒤부터 바다를 항해하는 선박이 왕래할 때는 반드시 가서 복을 빌었고 그렇게 하면 감응하지 않는 예가 없다. 오월(吳越)288)의 전씨(錢氏)가 그 관음상을 성 안의 개원사(開元寺)로 옮겼다. 지금 매잠에서 받드는 것은 후에 만든 것이다. 숭녕(崇寧 송 휘종의 연호)때의 사자(使者)가 조정에 알려 절에 새 현판을 내리고 매년 불승의 허가를 내주어서 장식을 더하게 하였다.


   구제(舊制)로는 사자는 여기서 기도를 드린다. 이 날 밤 승도(僧徒)들은 분향 송경하고 범패를 노래하는 것이 심히 엄숙하였고, 삼절의 관리와 병졸도 다들 경건하게 예를 닦았다. 밤중에 이르러 별이 빛나고 깃발이 요동하여 사람들이 다 기뻐 뛰며 ‘바람이 이미 정남(正南)으로 돌았다.’고 하였다. 27일(기묘)에 뱃사람은 풍세가 안정되지 않아서 그대로 그것이 익기를 기다렸다. 바다 위에서 바람의 방향이 돌아서 다음날 까지 바뀌지 않는 것을 ‘익는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큰 바다 속에 이르러서 졸지에 바람의 방향이 돌아가면 망연해져 향할 바를 모르게 된다, 그 때부터 (바뀐 풍향이 익은 때) 곧 바다로 나가기 때문에 바람과 구름과 하늘의 때를 자세히 살펴보고 난 뒤에 전진하는 것이다. 신각신각에 정사와 부사는 삼절의 인원과 함께 다 같이 돌아가 배로 들어갔다. 이 때와서 물빛은 조금 맑아졌으나 물결치는 수면이 약간 움직여 배안은 이미 울렁임을 느꼈다.


해려초 海驢焦

   28일(경진)에 하늘은 해가 돋고 깨끗이 갰다. 묘각(卯刻)에 8척의 배가 함께 떠났다. 정사와 부사는 조복(朝服)을 갖추어 입고 두 도관(道官)과 함께 궁궐을 바라보고 재배하고서 어전(御前)에서 내린 신소옥청구양총진부록(神霄玉淸九陽總眞符籙), 풍사용왕첩(風師龍王牒), 천조직부인오악진형(天曺直符引五嶽眞形) 및 지풍우(止風雨) 등 13부(符)를 바다에 던졌다.289)그것이 끝나자 뜸을 펼치고 가 적문(赤門)을 나가니 한식경에 물빛이 점점 푸르러졌다. 사방을 바라보니 산과 섬은 좀 드물어져, 혹은 끊긴 구름같고 혹은 초승달과 같았다. 그런 뒤에 해려초를 지났는데 그 형상이 엎디어 있는 나귀와 같았다. 숭녕(崇寧) 연간에 뱃사람들 중에 바다 짐승이 물결 사이에 출몰하는 것을 본 자가 있었는데, 그 형상이 나귀의 형체 같았다고 한다. 그것은 틀림없이 다른 한가지 물건이었을 것이고, 반드시 암초에 의지해서 나귀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봉래산 蓬萊山

   봉래산은 바라보면 심히 먼데, 앞이 높고 뒤가 내려갔다. 뾰쪽하게 치솟아 있는 것이 사랑스럽다. 그 섬은 아직도 창국(昌國 정해현을 말함)의 봉경(封境)에 속해 있다. 그 위는 극히 넓어 씨를 뿌릴 수 있어서 섬 사람들이 산다. 선가(仙家)의 삼신산(三神山) 가운데 봉래가 있는데, 그 곳은 약수(弱水)290) 3만 리를 넘어가서야 도달할 수 있다. 지금은 바로 앞에서 <선가의 봉래>를 보게는 안 될 것이므로, 틀림없이 지금 사람이 이것을 가리켜 그렇게 이름 지었을 것이다. 이 곳을 지나면 다시는 산이 나오지 않는다. 오직 연이은 파도가 솟았다 내렸다 하며 내뿜어 두들기고 들끓어 오르고 하는 것만이 보일 뿐이다. 선박이 뒤흔들려 배안의 사람들이 토하고 현기증이 나서 쓰러지고 제몸을 가누지 못하는 자가 십중 팔구나 된다.


반양초 半洋焦

   배의 항행이 봉래산을 지난 후에는 물이 깊고 푸른색이 유리 같으며 물결의 기세가 더욱 터진다. 큰 바다 가운데 돌이 있는데 그것을 반양초라고 한다. 배가 암초에 부딛히면 뒤집혀 물에 빠지기 때문에 뱃사공들은 그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이 날 오후에 남풍이 더욱 급해져 야호범(野狐颿)을 보탰는데, 그것은 돛의 힘을 제약하자는 뜻이었다. 물결이 몰려와서 배가 그 기세를 이겨내지 못할까 두려웠다. 그래서 작은 돛을 큰돛 위에다 보태서 그것들이 같이 어울려서 가게 하는 것이다. 이 날 밤에는 큰 바다 가운데서 머물러 있을 수는 없어서 다만 별을 살피면서 앞으로 가다가, 캄캄해지게 되면 지남부침(指南浮針 나침반의 일종)을 써서 남북을 헤아렸다. 밤중에 접어들어 불을 치켜올리면 8척의 배가 다 그것에 호응하였다. 한밤중에 바람이 서북으로 돌았는데, 그 기세가 심히 급해서 이미 뜸을 내려버렸는데도 이리저리 뒤흘려서, 병이니 항아리니 하는 것이 다 쓰러지고 온 배의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며 담기가 없어져 버렸다. 여명이 되어서야 좀 가라앉아 사람들의 마음이 안정되어 가서 그대로 돛을 올리고 전진하였다.


백수양 白水洋

   29일(신사)에 하늘 빛이 어둡고 풍세가 정해지지 않더니 진각(辰刻)에 바람이 적어지고 또 순해져, 다시 야호범(野狐颿)을 보탰으나, 배의 항행이 심히 둔하였다. 신시(申時) 후에 바람이 돌았고 유각(酉刻)에는 구름이 꽉 차서 비가 오다가 밤중에 접어들어서야 멎었다. 다시 남풍이 일어나 백수양으로 들어갔다. 그 근원이 말갈(靺鞨)291)에서 나왔기 때문에 흰색이 된 것이다.292)이 날 밤에 불을 치켜들었더니 세척의 배가 호응하였다.


황수양 黃水洋

   황수양은 곧 모래톱이다. 그 물은 흐리고 또 얕다. 뱃사람이 말하기를 ‘그 모래는 서남쪽에서부터 와서 큰 바다 가운데 1천여 리에 가로놓여진 것으로 곧 황하(黃河)가 바다로 들어가는 곳’이라 한다. 배의 항행이 이곳에 이르면 닭과 수수로 모래를 제사한다. 대체로 전후로 배를 몰고 모래를 지나가는 동안 해를 입은 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 익사한 혼을 제사하는 것이라고 한다. 중국에서 구려(句麗 우리의 땅을 말함)로 가는 데에는 오직 명주(明州)의 길만이 이 곳을 지나가는데, 등주(登州)293)의 판교(板橋)에서부터 건너가면 이 곳을 피할 수가 있다. 근자에 사자(使者)가 귀로에 이곳에 이르러 첫째 배는 거의 얕은 곳에 박힐 뻔 하였고, 둘째 배는 오후에 세 키를 다 부러뜨렸는데, 종묘 사직의 위령(威靈) 덕분으로 살아 돌아올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뱃사람들은 언제나 모래톱을 지나기는 것을 어렵게 여기는 것이다. 따라서 자주 납추를 사용하여 때때로 그 깊이를 알아보는 것을 조심스럽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흑수양 黑水洋

   흑수양은 곧 북해양(北海洋)이다. 그 물빛은 어둠이 깊이 까지 파고들어 검은 색이 먹같아, 졸지에 그것을 보면 정신과 담력을 다 잃게 된다. 성난 파도가 내뿜고 닥쳐오는 것이 만으로 헤아리는 산들 같이 치솟아 오른다. 밤이 되면 파도 사이가 선명하게 빛나 그 밝기가 불과 같다. 배가 파도 위로 올라갈 때는 바다가 있음을 느끼지 않고, 오직 하늘의 해가 밝고 쾌할 뿐이다. 그러다가 우묵한 파도 밑으로 내려가게 되어 전후의 수세를 쳐다보면 그 높이 하늘을 가리워 위장이 뒤집히고 헐떡이는 숨만 겨우 남아있어, 쓰러져 토악질을 하며 낱알이 목구멍을 내려가지 않는다. 보료 위에서 지쳐 누워있는 자는 반드시 사방을 높이 올려서, 가운데가 구유통 같이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울어져 굴러서 몸을 다치게 된다. 이러한 때에 몸을 만번 죽는 가운데서 벗어나기를 바라니, 위험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5 권


해 도 2 海道二


협계산 夾界山

   6월 1일 임오 여명에 안개가 자욱한데 배는 동남풍을 탔다. 사각(巳刻)에 좀 갰고 바람이 서남으로 돌아 야호범을 더 보태었다. 오정에 바람이 사나와 첫째 배의 대장(大檣)이 와지끈 하고 소리가 나며 휘어서 부러지려고 해서 급히 큰 나무를 거기에 붙여 온전할 수가 있었다. 미시(未時) 후에 동북쪽 하늘 가를 바라보니 은은히 구름 같은 것이 보이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반탁가산(半托伽山)이라고 하였으나 그리 똑똑하게 가려낼 수는 없었다. 밤에는 바람이 약해 배의 항행이 매우 느렸다. 2일 계미에 아침 안개가 자욱하고 서남풍이 일어나더니 미시 후에 맑게 갰다. 정동(正東)으로 병풍같은 산 하나가 바라보이는데 그것이 곧 협계산으로, 중국과 이족(夷族)이 이것으로 경계를 삼는다. 처음 바라볼 때는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유시(酉時)후에 바싹 다가가니 앞에 두 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그것을 쌍계산(雙髻山)이라고 하였다. 그 뒤에 작은 암초 수십 개가 있는데 달리는 말의 형상과 같다. 눈 같은 물결이 세게 뿜는데 그것이 산을 만나서는 튀어 쏟아지는 것이 더욱 높아진다. 자정에 바람이 세고 비가 와서 돛을 내리고 뜸을 걷어 그 기세를 늦추었다.


오서 五嶼

   오서는 곳곳마다 있으나 협계산 가까이에 있는 것이 올바른 것이다. 정해(定海)의 동북쪽 소주(蘇州)의 큰 바다 안의 군산(群山)과 마도(馬島)에도 오서가 있다. 대체로 사공들은 바다의 산 위의 작은 산을 가리켜서 ‘서’(嶼)라고 한다. 그래서 여러 군데에 다섯 산이 서로 다가 있으면 다 그런 것들을 ‘오서’라고 하는 것이다.3일 갑신에 밤새 오던 비가 개지 않고 동남풍이 일어났다. 오시 후에 이 서(嶼)를 지나갔는데, 바람과 파도가 거세게 뿜어대어 오래 계속되는 데 따라 높고 험해지는 것 역시 퍽 사랑스러웠다.


배도 排島

   이날 사각(巳刻)에 구름이 흩어져 버리고 비가 멎어, 사방을 돌아보니 깨끗이 갰다. 멀리 바라보니 세 산이 나란히 늘어서 있고 그 가운데의 한 산이 담 같은데, 뱃사람은 그것을 가리켜 ‘배도’라고 한다. 또 배타산(排垜山)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이 화살받이의 형태 같아서 그런 것이다.


백산 白山

   이날 오시 후에 동북쪽으로 한 산이 바라보였다. 극히 큰 것이 성같이 잇닿아 늘어서 있는데, 햇빛이 쬐는 곳은 희기가 옥과 같다. 미시 후에 바람이 일어 배의 항행이 매우 빨라졌다.


흑산 黑山

   흑산은 백산 동남쪽에 있어 바라보일 정도로 가깝다. 처음 바라보면 극히 높고 험준하고, 바싹 다가서면 산세가 중복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앞의 한 작은 봉우리는 가운데가 굴같이 비어 있고 양쪽 사이가 만입(灣入)했는데, 배를 감출 만하다. 옛날에는 바닷길에서 이곳이 역시 사신의 배가 묵는 곳이었다. 관사가 아직 남아 있다. 그런데 이번 길을 잡음에는 여기서 더 이상 정박하지 않았다. 위에는 주민의 부락이 있다. 나라 (고려를 말함) 안의 대죄인으로 죽음을 면한 자들이 흔히 이곳으로 유배되어 온다. 언제나 중국 사신의 배가 이르었을 때 밤이 되면 산마루에서 봉화불을 밝히고 여러 산들이 차례로 서로 호응하여서 왕성(王城 송도를 말함)에까지 가는데, 그 일이 이 산에서부터 시작된다. 신시 후에 배가 이곳을 지나갔다.


월서 月嶼

   월서는 둘인데 흑산에서는 심히 멀다. 앞의 것을 대월서(大月嶼)라고 하는데 달같이 둘러싸고 있다. 저부터 그 위에 양원사(養源寺)가 있다고 전해진다. 뒤의 것을 소월서(小月嶼)라고 한다. 문같이 대치하고 있어 작은 배가 통행할 수 있다.


난산도 闌山島

   난산도 또 천선도(天仙島)라고도 하는데 산이 높고 험하다. 멀리 바라보면 벽같이 서 있는데, 앞의 작은 두 암초는 거북과 자라의 형상 같다.


백의도 白衣島

   백의도는 세 산이 잇닿아 있고 앞에는 작은 암초가 붙어 있는데, 기울어진 노송과 쌓여 있는 차조기는 푸르고 윤기가 있어 사랑스러웠다. 이곳응 또 백갑섬(白甲섬)이라고도 한다.


궤섬 跪苫

   궤섬은 백의도의 동북쪽에 있는데 그 산은 여러 섬들보다 훨씬 크다. 여러 산이 잇닿아 있고 부서진 암초들이 둘러싸고 있는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밤에는 밀물이 세차게 쳐올라 눈 같은 파도가 부서지는데 달이 지고 어두운 속에 물거품의 밝기가 타오르는 것과 같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6 권


해 도 3 海島三


춘초섬 春草苫

   춘초섬은 또 궤섬 밖에 있는데 뱃사람들은 그것을 외서(外嶼)라고 부른다. 그 위는 다 소나무와 노송나무 등속인데 바라보니 울창하다. 밤중에는 바람이 조용하여 배의 항행이 더욱 둔해졌다.


빈랑초 儐郞焦

   빈랑초는 형태가 유사하기 때문에 그 이름을 얻은 것이다. 대체로 바다 가운데의 암초는 멀리서 바라보면 대부분 이런 형상을 하고 있지만, 뱃사람들은 춘초섬과 가까운 것만을 빈랑초라고 한다. 밤이 깊어지자 밀물이 빠져서 배가 물을 따라 물러나 거의 다시 큰바다로 들어가려 해서 모든 배가 두려워하여 급히 노를 저어 그 기세를 도왔다. 여명까지도 여전히 춘초섬에 있었다. 4일 을유에 날씨가 맑게 푸른 것이 거울 같아 바닥을 볼 수 있었다. 또 바다 물고기 수백 마리가 있어 크기가 수장(數丈)이나 되는데, 배를 따라 왕래하며 즐거이 지느러미를 움직이며 유유자적하고, 선박이 지나가는 것응 전연 아랑곳도 하지 않는다.


보살섬 菩薩苫

   이날 오시 후에 보살섬을 지나갔다. 고려인들이 말하기를, 그 위에서 기적이 나타난 적이 있어서 그렇게 명명한 것이라고 한다. 신시(申時) 후에는 바람이 조용해져서 밀물을 따라 전진하였다.


죽도 竹島

   이날 유시(酉時) 후에 배가 죽도에 이르러 정박하였다. 그 산은 여러 겹이고 수풀의 나무들이 짙푸르게 무성하며, 그 위에는 역시 주민들이 있고 주민들에는 또한 장(長)이 있었다. 산 앞에 흰 돌로 된 암초가 수백 덩어리 있는데 크기가 같지 않고 흡사 쌓아 놓은 옥과 같았다. 사자(使者)가 귀로에 이곳에 이르었을 때 마침 추석달이 돋아 올랐었다. 밤은 고요하고 물은 잔잔한데 밝은 놀이 서로 비치고 비낀 달빛이 천 장(千丈)이나 되어, 섬과 골짜기와 선박과 기물이 온통 금빛이 되어졌다. 사람마다 일어나 춤추어 그림자를 희롱하며, 술을 들고 저를 불고하여 마음과 눈이 즐고워서 앞에 해양이 격해 있음을 잊었다.


고섬섬 苦苫苫

   5일 병술은 날씨가 청명하였는데 고섬섬을 지나갔다. 죽도에서 멀지않고 그 산이 유사한데 역시 주민이 있었다. 고려의 습속으로는 자위모(刺蝟毛 고슴도치의 털)을 고섬섬이라고 한다. 이 산의 나무들은 무성하나 크지 않아 바로 고슴도치털 같기 때문에 그렇게 명명한 것이다. 이날 이 섬에 정박하니, 고려인들이 배로 물을 싣고 와 바쳐서 쌀로 사례하였다. 동풍이 크게 일어 전진할 수 없어서 결국 여기서 묵었다.


군산도 群山島

   6일 정해에 아침 밀물을 타고 항행하여 진각(辰刻)에 군산도에 이르러 정박하였다. 그 산은 열 두 봉우리가 잇닿아 둥그렇게 둘려 있는 것이 성과 같다. 여섯 척의 배가 와서 맞아 주는데, 무장병을 싣고 징을 울리고 호각을 불며 호위하였다. 따로 작은 배가 초록색 도포 차림의 관리를 싣고 있는데 홀을 바로잡고 배 안에서 읍을 하였으나, 통성명은 하지 않고 물러갔다.군산도의 주사(注事 아전을 말함)라고 한다. 이어 역어관(譯語官)인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294)심 기(深起)가 와서 동접반(同接伴) 김부식(金富軾)295)과 합류하였다. 지전주(知全州) 오준화(吳俊和)가 사자를 보내와 원영장(遠迎狀)을 내놓자 정사와 부사가 예를 차려 그것을 받았다. 그러나 읍만 하고 배례하지는 않았고 장의관(掌儀官)을 보내 접촉시켰을 따름이다. 이어 답서(答書)를 보냈다.


   배가 섬으로 들어가 버리자 연안에서 깃발을 잡고 늘어서 있는 자가 1백여 인이나 되었다. 동접반이 서신과 함께 정사, 부사 및 삼절(三節)의 조반을 보내왔다. 정사와 부사가 접반에게 아첨하여 국왕선장(國王先狀 국왕에게 그들의 도착을 만나기 전에 먼저 알리는 서장)을 보내니, 접반이 채색 배[采舫]를 보내어 정사와 부사에게 군산정(群山亭)으로 올라와 만나주기를 청했다. 그 정자는 바다에 다가 서 있고 뒤는 두 봉우리가 의지하고 있는데, 그 두 봉우리는 나란히 우뚝 서 있어 절벽을 이루고 수백 길이나 치솟아 있다. 문밖에는 공해(公廨 관가 소유의 건물) 10여 칸이 있고, 서쪽 가까운 작은 산 위에는 오룡묘(五龍廟)와 자복사(資福寺)가 있다. 또 서쪽에 숭산행궁(崇山行宮)이 있고, 좌우 전후에는 주민 10여 가가 있다. 오시 후에 정사와 부사는 송방(松舫)을 타고 해안에 이르렀고, 삼절은 수종 인원을 이끌고 관사로 들어갔는데 접반과 군수가 달려와 맞이하였다. 뜰에는 향안(香案 향로를 놓은 상)이 마련되어 있는데, 궁궐을 바라보고 배례 무도(拜禮舞蹈)하고서는 공손하게 성체(聖體)의 안부를 물었다.


   그 일이 끝나고서는 양쪽 층계로 나뉘어 대청으로 올라가 정사와 부사가 상좌에 있으면서 차례로 만나 재배하고, 끝나면 좀 앞으로 나가 인사를 하고 다시 재배하고 자리로 갔고, 상,중절(上中節)은 대청 위에서 차례로 서서 접반과 읍을 하였다.

이 나라의 습속은 다 아읍(雅揖 한쪽 무릅을 꿇고 하는 읍을 말함)을 한다. 도할관이 앞으로 나가 인사말을 하고 재배하고는 다음에 군수에게 앞서 한 예와 같이 읍하고 물러나 자기 위치에 와서 앉는다. 정사와 부사는 다 남쪽을 향하고, 접반과 군수는 동서로 마주 향하고, 하절과 뱃사람은 뜰에서 묵례하고, 상절은 대청에 나뉘어 앉고, 중절은 양쪽 행랑에 나뉘어 앉고, 하절은 문의 양쪽 곁채에 앉고, 뱃사람은 문밖에 앉는다. 시설이 극히 정제 엄숙하고 음식은 또 풍성하고 예모는 공손 근엄하다. 바닥에는 다 자리를 깔았는데 대체로 그 습속이 그러한 것으로 역시 고풍에 가까운 것이다. 술이 열 차례 돌아가는데 중절과 하절은 다만 그 회수가 줄어들 뿐이다.

   처음 앉을 때에는 접반이 친히 따라서 바치고 사자(使者)는 다시 그것을 따라 준다. 주연이 반쯤 진행되었을 때 사람을 보내어 술을 권하게 하고, 삼절은 다 큰 술잔으로 바꾼다. 예가 끝나면 상・중절은 처음의 예와 같이 걸어나가 읍하고, 정사와 부사는 송방에 올라타고 타고온 큰 배로 돌아간다.


횡서 橫嶼

   횡서는 군산도의 남쪽에 있다. 한 산이 특히 크며, 또 안섬(案苫)이라고도 한다. 앞뒤에 작은 암초 수십 개가 들려 있다. 돌 밑뿌리의 한 동굴은 그 깊이가 두어 길[數丈]이나 되는데 높고 넓은 것으로 유명하다. 밀물이 들어와 물을 치면 그 소리가 우뢰와 같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7 권


해 도 4 海島四


자운섬 紫雲苫

   7일 무자에 날씨가 쾌청하였다. 아침에 전주 수신(全州守臣 전주목사를 말함)이 서신을 보내와 술과 예를 갖춰 간곡하게 사자를 만류하였으나, 사자가 서신으로 고사(固辭)하여 중지되었다. 다만 그가 준 채소, 어패 등만을 받고서는 방물(方物 여기서는 중국물건을 말함)로 갚아 주었다. 오각(五刻)에 배를 풀어 횡서(橫嶼)에서 묵고, 8일 기축에 일찍 떠났다. 남쪽으로 하나의 산이 보이는데, 그 뒤의 두 산은 더욱 멀어, 흡사 한쌍의 눈썹에 싱그러운 빛이 엉겨 있는 것 같다.


부용산 富用山

   이날 오시(午時) 후에 부용창산(富用倉山)을 지나갔다. 그것은 곧 뱃사람들이 말하는 부용산(芙蓉山)인데, 그 산은 홍주(洪州)296)경내에 있다. 그 위에는 창고가 있고, 또 쌓아둔 곡식이 많다고 한다. 변경의 비상시 용도에 대비한 것이라 해서 부용(富用 풍부하게 씀)이라 명명한 것이다.


홍주산 洪州山

   홍주산은 또 자운섬(紫雲苫)의 동남쪽 수백 리 지점에 있는데, 고을이 그 아래에 이뤄졌다. 또 동쪽에는 금(金)이 나는 산 하나가 범같이 도사리고 있는데, 그섯을 동원(東源)이라고 한다. 작은 산 수십 개가 성같이 둘러싸 있고, 그 산 위에 못이 하나 있는데 맑기가 거울 같고 깊이는 헤아릴 수가 없다. 이날 신각(申刻)에 배가 이 산을 지나갔다.


       아자섬 亞鳥子苫

   아자섬은 또 알자섬(軋子苫)이라고도 한다. 고려인들은 삿갓[笠]을 ‘알(軋)이라고 하는데, 그 산의 형태가 그것과 유사해서 그 이름을 얻은 것이다. 이날 유각(酉刻)에 배가 이 섬을 지나갔다.


 마도 馬島

   이날 유시 후에 풍세가 극히 커서 배의 항행이 나는 듯하였다. 알자섬으로부터 눈 한번 깜짝할 사이에 걷 마도에 정박하였다. 마도는 청주(淸州)땅이다. 샘물은 달고 풀은 무성한데, 나라 안의 관마(官馬)는 일이 없으면 여기에 몰아다 먹인다. 그래서 그런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다. 그 주봉(主峰)은 중후(重厚)해 보이는데, 왼쪽으로 둥그렇게 껴안고 있다. 앞의 돌부리 하나가 바다로 들어가 있어서 물과 부딪쳐 파도를 돌려보내는데, 놀란 여울물이 들끓어오르는 것이 천만 가지로 기괴하여 말로 형언할 수 없다. 그래서 배가 그 아래를 지나갈 때는 대부분 감히 근접하지 못하는데, 그것은 암초에 부딪칠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객관(客館)이 있는데, 안흥정(安興亭)이라 한다. 지청주(知淸州) 홍약이(洪若伊)가 개소관(介紹官)을 역어관(譯語官) 진 의(陣懿)와 함께 보내와 전주(全州)에서와 예같이 하였다. 해안의 환영과 군졸의 기치는 군산도의 경우와 다름이 없었다. 밤으로 접어들어서는 큰 횃불에 불을 붙여 휘황하게 하늘을 비췄다. 그 때 막 바람이 사나워져 배 안이 뒤흔들려 거의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사자(使者)는 부축되어서 작은 배로 상륙하였고, 상견례(相見禮)는 군산정에서의 예와 같았다. 그러나 주례(酒禮)만은 받지 않고 밤중에 사절의 배로 돌아왔다.


구두산 九頭山

   9일 경인은, 날씨는 청명하였으나 남풍이 몹시 강하였다. 진시에 마도를 출발하여 사각(巳刻)에 구두산을 지나갔다. 그 산에는 아홉 개의 봉우리가 있다고 하는데, 멀리서 바라보니 그리 분명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수풀이 무성하여 밝고 윤기가 도는 것이 좋았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8 권


해 도 5 海道五


당인도 唐人島

   당인도는 그 이름에 관해서는 잘 모르겠으나, 그 산은 구두산과 가깝다. 이날 오각(午刻)에 배가 이 섬아래를 지나갔다.


쌍녀초 雙女焦

   쌍녀초는 그 산이 심히 커서 도서(島嶼)와 다름없다.앞의 한 산에는 초목이 있기는 하나 그리 빽빽하지 않다. 뒤의 한 산은 퍽 작고 중간이 끊어져 문이 되어 있으나, 아래에 암초가 있어 배가 지나가지는 못한다. 이날 사각(巳刻)에 배가 당인도에서부터 이어 이 초(焦)를 지나갔는데, 풍세가 매우급해져서 배의 항행이 더욱 빨라졌다.


대청서 大靑嶼

   대청서는 멀리서 바라보면 울창한 것이 진한 눈썹먹같다 해서 고려인이 이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날 오각에 배가 이곳을 지나갔다.


화상도 和尙島

   화상도는 산세가 중첩하고 숲이 우거진 골이 깊고 무성하다. 산 속에는 호랑이가 많다. 옛날 불도를 배우는 자가 거기에 살았었는데, 짐승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하며, 지금의 엽로사(葉老寺)가 그 유적이다. 그래서 고려인들은 그것을 화상도(화상은 중에 대한 경칭)라고 한 것이다. 이날 미각(未刻)에 배가 그 아래를 지나갔다.


우심서 牛心嶼

   우심서는 소양(小洋) 가운데 있다. 한 봉우리가 유독 솟아나 형상이 엎어놓은 바리(盂)와 닮았는데, 가운데가 좀 날카롭다. 고려인들은 그것을 소의 염통이라고 하는데, 이런 것은 어디를 가나 흔히 보게 된다. 또 형체가 이산과 닮고 약간 작은 것은 계심서(鷄心嶼)라고 한다.이날 미시 정각에 이 섬을 지나갔는데, 남풍에 가랑비가 내렸다.


섭공서 攝公嶼

섭공서는 성(姓)으로 이름을 얻은 것이다. 멀리서 보면 심히 날카로운데 바싹 가까이 가면 담같다. 대체로 그 형체다 납작해서 가로 보는 것과 세로 보는 것이 각각 다르다. 이날 미시 말에 배가 그아래를 지나갔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9 권


해 도 6 海道六


소청서 小靑嶼

   소청서는 대청서의 모양고 같은데 다만 그 산이 약간 작고 주위에 초석이 많을 뿐이다. 신시(申時)초에 배가 지났는데 비가 제법 세게 쏟아졌다.


자연도 紫燕島

   이날 신시 정각에 배가 자연도에 머무르니, 이곳은 곧 광주(廣州)이다. 산에 기대어 관사를 지었는데, 방(榜)에 ‘경원정’(慶源亭)이라고 하였다. 경원정 곁에는 막집 수십 간을 지었다. 주민들의 초가집도 많다. 그 산의 동쪽 한 섬에 날아다니는 제비가 많기 때문에 그렇게 명명한 것이다. 접반 윤언식(尹彦植)과 지광주(知廣州) 진숙(陳淑)이 개소(介紹)와 역관 탁안(卓安)을 보내어 서신을 가지고 와서 영접하게 하였는데, 병장과 의례가 융숭하였다. 신시(申時) 후에 비가 멎어 정사와 부사가 삼절(三節)과 함께 상륙하여 관사에 당도하였고, 그 음식과 상견례는 전주에서의 예(禮)와 같았다. 밤의 누각(漏刻)이 2각으로 내려가자 배로 돌아갔다. 10일(신묘) 진각(辰刻)에 서북풍이 불어 8척의 배는 움직이지 않았다. 도할관 오덕휴(吳德休)와 제할관 서 긍(徐兢)은 상절과 함께 다시 채색배로 관상에 갔다가 제물사(濟物寺)에 들러 원풍(元豊 송 신종의 연호) 때의 사신인 고 좌반전직(左班殿直) 송 밀(宋密)을 위해 공양을 드린 후에 배로 돌아갔다. 사각(巳刻)에 밀물을 따라서 전진하였다.


급수문 急水門

   이날 미각(未刻)에 급수문에 도달하였는데, 그 문은 바다섬과는 닮지 않고 흡사 무협(巫峽)의 강로 같았다. 산이 둘러싸고 굴곡을 이루면서 앞뒤로 서로 이어졌는데, 그 양쪽 사이가 물길이다. 수세(水勢)가 산협에 묶여 놀란 파도가 해안을 치고 구르는 돌이 벼량을 뚫는데, 요란하기가 우뢰와 같아 천균(千鈞)의 쇠뇌와 바람을 쫒아가는 말이라 해도 그 물살의 급한 것을 설명하기에는 부적하다. 이곳에 이르러서는 이미 돚을 펼쳐서는 안 되고 다만 노를 써서 밀물을 따라 전진할 뿐이다.


합굴 蛤窟

   신시 후에 합굴에 당도하여 정박하였다. 그 산은 그리 높거나 크지 않고 주민도 역시 많았다. 산등성이에 용사(龍祠)가 있는데, 뱃사람들이 오고가고 할 때 반드시 제사를 드리는데,바닷물이 이곳에까지 이른다. 급수문과 비교해 보면 물빛이 황백색으로 변한 것이다.


분수령 分水嶺

   분수령은 곧 두 산이 마주보고 있는 것으로, 작은 바다가 여기서부터 나뉘어 흘러가는 곳인데 물빛이 다시 매잠(梅岑)같이 흐리다. 11일(임진) 아침에 비가 내리고 오각에 밀물이 빠지며 비가 더욱 심해졌다. 국왕이 유문지(劉文志)를 시켜 선서(先書)를 보내어 왔는데, 사자는 예를 갖추어 그것을 받았다. 유각(酉刻)에 전진하여 용골(龍骨)에 이르러서 정박하였다.


예성항 禮成港

   12일(계사) 아침에 비가 멎자 조수를 따라 예성항으로 들어가고, 정사와 부사는 신주(神舟)로 돌아 들어왔다. 오각에 정사와 부사가 도할관과 제할관을 거느리고 채색배에서 조서(詔書)를 받들고 갔다. 만으로 헤아리는 고려인들이 무기・갑마(甲馬)・기치・의장물(儀物)을 가지고 해안가에 늘어서 있고 구경군이 담장같이 둘러서 있었다. 채색배가 해안에 닿자 도・재할이 조서를 받들고 채색 가마로 들어가고, 하절이 앞에서 인도하며 정사와 부사는 뒤에서 따라가고 상・중절이 차례로 따라갔다. 벽란정(碧瀾亭)으로 들어가서 조서를 봉안하는 일을 끝내고는 위차(位次)로 나뉘어 잠시 휴식을 취했다. 다음날 육로를 따라 왕성(王城)으로 들어갔다. 생각하건대, 바닷길은 어려움이 대단하였거니와, 일엽편주로 바다의 험난한데 떠있을 적에, 오직 종묘가직의 복이 파신(波神)으로 하여금 순종하게 하였음을 힘입어 건너온 것이요,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사람의 힘으로 도달해 낼 수 있었겠는가? 큰 바다에 있을 때에 돛단배로 가는데, 풍랑을 만났다면 다른 나라로 흘러들러갔으리니, 생사가 순식간에 달라졌을 것이다.


   또 세 가지 의험을 싫어하니, 치풍(癡風 음력 7・8월에 부는 동북풍)과 흑풍(黑風 폭풍)과 해동(海動) 바다의 지진으로 이러나는 물의 움직임이 그것이다. 치풍이 일어나면 연일 성내어 외치며 그칠 줄 모르고 사방을 가려내지 못한다. 흑풍은 때없이 성내어 불어닥치고 하늘 빛이 어두워 낮과 밤을 분간하지 못한다. 해동이 일어나면 바닥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것이 거센 불로 물을 끓이는 것과 같다. 큰 바다 가운데서 이것을 만나면 죽음을 면하는 자가 적다. 또, 한 물결이 배를 밀어내는 것이 툭하면 몇 리나 되니, 몇 길의 배로 파도 사이에 떠있는 것은 터럭끝이 말의 몸에 있는 것 정도도 못 된다. 그래서 바다를 건너는 자는 배가 크냐 작으냐 하는 것을 급무로 삼을 것이 아니라 조심해서 이행하는 것이 제일이다. 만약에 의험을 만나면 지성에서 우러나 경건하게 기도하고 슬프게 간구하면 감응하지 않는 경우가 없다. 근자에 사신의 행차에 둘째 배가 황수양(黃水洋) 가운데에 이르러 세 개의 키가 다 부러졌을 때 내가 마침 그 가운데 있었는데, 같은 배의 사람들과 머리를 깍고 슬프게 간구하였더니 상서로운 빛이 나타났다.


   그런데 복주(福州)의 연서신(演嶼神) 역시 기일에 앞서 이적(異蹟)을 나타냈었으므로 이날 재가 비록 의태로왔으나 다른 키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뒤에 바꾸고 나서도 다시 전같이 기울며 흔들렸고 5주야를 지나서야 비로소 명주(明州)의 정해(定海)에 도달하였다. 상륙할 때에 가까와져서는 온 배의 사람들이 초췌해져 거의 산사람의 기색이 없었으니, 그들의 근심과 두려움을 헤아려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바닷길이 험난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조정에 돌아와 복명하고서 후한 상을 받아서는 안 될 것이다. 반드시 죽는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조종(祖宗)때 이래로 누차 사절을 파견하였어도 표류 익사하고 돌아오지 않은 자는 없었다. 다만 나라의 위령(威靈)을 맏고 충신(忠信)에 의지하면 툴림없이 근심이 없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이 점을 서술하여 뒤에 오는 이들에게 격려가 되게 하는 바이다.


   근자에 사절의 행차는, 떠나가는 기간 중에는 남풍을 이용하고 돌아오는 기간 중에는 북풍을 이용한다. 처음 명주를 출발한 것은 그해 5월 28일이었는데, 큰 바다로 나가서는 순풍을 얻어 6월 6일에 가서 곧 군산도에 도달하였다. 귀로에 오르게 되어서는 7월 13일(갑자)에 순천관(順川館)을 떠났고, 15일(병인)에 다시 큰 배에 올랐다. 16일(정묘)에 합굴(蛤窟)에 이르렀고, 17일(무진)에 자연도(紫燕島)에 이르렀고, 22일(계유)에 소청서(小靑嶼)・화상도(和尙島)・대청서(大靑嶼)・쌍녀초(雙女焦)・당인도(唐人島)・구두산(九頭山)을 지났는데, 이날 마도(馬島)에 정박하였다. 23일(갑술)에 마도를 떠나 알자섬을 지나 홍주산(洪州山)을 바라보았으며, 24일(을해)에 횡서(橫嶼)를 지나 군산문(群山門)을 들어가 군산도 아래서 정박하였다. 8월 8일까지 도합 14일 동안 바람이 막혀 가지 못하다가, 신시(申時) 후에 동북풍이 일어나 밀물을 타고 큰 바다로 나가 고섬섬을 지났고 밤으로 접어들어서도 머물지 않았으며, 9일(기축)에는 아침에 죽도(竹島)지났다. 진시와 사시에 흑산(黑山)을 바라보았는데, 느닷없이 동남풍이 사나와지고 또 해동(海動)을 만나 배가 한쪽으로 쏠려 기울어지려고 해서 사람들이 대단히 두려워하여 곧 북을 울려 뭇사람을 불렀더니, 배가 다시 바로 돌아왔다. 10일(경인)에는 풍세가 더욱 맹렬해져 오각(午刻)에 다시 군산도로 돌아갔다.


   16일(병신)까지 또 6일이 지났다. 그날 신시(申時) 후에 바람이 가라앉자 곧 큰 바다로 떠나 밤에 죽도에 정박하였다. 또 이틀 동안 바람에 막혀가지 못하다가 19일(계해)에 이르러, 오시 후에 죽도를 떠나 밤에 월서(月嶼)를 지났다. 20일(경자)에는 아침에 흑산(黑山)을 지났고 다음에는 백산(白山)을 지났고 다음에는 오서(五嶼)와 협계산(夾界山)을 지났는데, 북풍이 대단하게 일어나 뜸을 낮춰 그 기세를 줄였다. 21일(신축)에 사미(沙尾)를 지났고 오시 사이에는 둘째 배의 세 개의 보조 키가 부러졌고, 밤의 누각(漏刻)이 4각으로 내려가자 정타 역시 부러졌다. 사신의 배와 다른 배들도 다 의험을 당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22일(임인)에 중화(中華)의 수주산(秀州山)이 바라보였고 24일(계묘)에 동서서산(東西胥山)을 지나 25일(갑진)에 낭항산(浪港山)으로 들어가 담두(潭頭)를 지났다. 29일(을사)에는 아침에 소주양(蘇州洋)을 지나 밤에 율항(栗港)에 정박하였고 27일(병오)에 교문을 지나 초보산(招寶山)을 바라보았고 오각(五刻)에 정해현(定海縣)에 도착하였다. 고려를 떠나서부터 명주 땅까지 오는 데 무릇 바닷길로 42일이 걸렸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40 권


동 문 同文297)

   정삭(正朔)298)은 천하의 정치를 통솔하는 방법이고, 유학(儒學)은 천하의 교화를 아름답게하는 방법이고, 악률(樂律)은 천하의 조화를 이끄는 방법이고, 도량권형(度量權衡)은 천하의 공용하는 기준을 보여주는 방법이다. 네가지는 비록 다르기는 하나 반드시 천자의 절제와 서로 합치되어야 하고, 그렇게 된 후라야 태평의 표적(表迹)이 갖추어지게 된다. 성인(聖人)299)이 일어나면 반드시 세정(歲正)을 세우고, 국시(國是)를 정하고 한 조대(朝代)의 음악을 새롭게 하고, 율도(律度)와 양형(量衡)을 동일하게 만든다. 대체로 지극함 하나로 뭇 움직임을 바로잡는 데는 그 방법이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우리 국가가 대일통(大一統)으로 만방에 임하니 화하(華夏)와 만맥(蠻貊)이 다 신복하였다.300)비록 고구려(高句麗 우리나라의 범칭(汎稱))는 바다 섬에 자리잡고 있어 거대한 파도가 가로막고, 구복(九服 중국 역대의 복속지역을 말함)안에 들어 있지 않기는 하나, 정삭을 받고 유학을 준봉(遵奉)하며, 악률은 조화를 같이 하고 도량형은 제도를 같이하니, 우순(虞舜)의 태평 시절에 동쪽에서 협력하고 백우(伯禹)의 덕화(德化)가 남쪽에까지 미쳤다 하더라도 그런 것들은 거론할게 못될 정도이다.301)옛사람이 말한, ‘글은 글자를 같이 하고 수레는 차폭을 같이한다’고 한 것을 지금에 보게 된 것이다.302)또 도지(圖志 그림과 기록)의 작성은 이국의 다른 제도를 기록하는 방법인데, 만약에 그 제도가 혹 같을 경우라면 그림의 작성이야 군더더기 같으니 만들어 무엇하겠는가? 삼가 그 곳의 정삭․악률․도량을 중국과 같은 것을 조목지어 기록해서 ‘동문기(同文記)’를 만들고, 그 그림은 생략하겠다.


정삭 正朔

   당(唐) 유인궤(劉仁軌)303)가 방주자사(方州刺史)가 되자, 반포할 역서(曆書) 및 종묘의 휘(諱)를 청하여 말하기를 ‘마땅히 요해(遼海)를 평정하여 우리 조정의 정삭을 나누어 주고, 전쟁에 이기게 되면 군사를 가지고 고려(高麗 고구려를 말함)를 공략하여 그 추장(酋長)을 거느리고 등봉(登封)304)의 모임에 가도록 해야 합니다.’ 라고 하였는데 마침내 처음에 한 말과 같이 해 내어 사신(史臣)이 그 일을 장하게 여겼다. 그러나 인궤는 단지 그 힘을 굴복시켰을 뿐이었지 반드시 그 본심을 굴복시킨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 하면 내가 고려인들이 중국을 섬기는 것을 살펴보건대, 그들이 존호(尊號)305)를 내려주고 정삭을 나누어 주기를 청하는 것이 공손하고 간절하여 입에서 떠나지 않더니, 강한 오랑캐(契丹, 즉 요(遼)를 말함)에게 핍박받게 되고 부터는 표면으로만 복종하였지, 우리 조정에 마음을 돌려 해바라기 같이 기울고 개미 같이 사모하는 정은 끝내 가슴 속에서 떠나지 않았으니, 어찌 군사를 쓰는 것이 덕을 베푸는 것에 대하여 본디 비교가 되겠는가?


   그러나 가까우면 복종시키기 쉽고 멀면 회유하기 어려운 것이다. 고려의 땅은 황제의 고장에서는 멀리 큰 바다 밖에 있으니, 거기서 올 때에는 거대한 배를 띄워 바람을 몰고 밤낮을 도와 10 여일을 와야 비로소 사명(四明)에 도달한다. 바람이 혹시 거세어지면 놀란 파도가 산같이 솟아올라 화덕의 가마솥이 뒤집혀 쏟아져서 한 방울의 물도 남지 않고, 또 취사를 할 수도 없어 뱃사람들은 왕왕 밥을 굶게 되고, 심할 때는 키가 부러지고 돛대가 꺾여져 뒤집어 엎는 변고가 순식간에 생기니 또한 대단히 위험하다. 그러나 건륭(建隆)․개보(開寶 모두 송 태조의 연호, 960~975) 연간부터 신하의 충절을 지키기를 원하여 감히 조금도 해이해지지 않고 지금에 이르렀다. 북쪽 오랑캐와의 관계로 말하면 국토의 거리가 겨우 한 줄기의 물뿐이어서, 오랑캐가 아침에 말을 타고 떠나면 저녁에는 이미 압록강에서 물을 먹이게 된다. 앞서 크게 패전하고서야 비로소 신하가 되어 그들을 섬기고 그들의 연호(年號)를 썼는데, 그 일은 통화(統和 983~1011)와 개태(開泰 1012~1021)에 걸친 도합 21년 동안 계속되었다.


   왕 순(王詢 고려 현종(顯宗))때에 이르러 북쪽 오랑캐를 대파하여 다시 중국에 통하게 되어서 진종 황제(眞宗皇帝) 대중상부(大中祥符) 7년(고려 현종 5, 1014)에 사신을 보내어 정삭을 나눠 주기를 청하여, 조정에서는 그 청 대로 따랐고, 그 후에는 마침내 ‘대중상부’라는 연호를 쓰고 북쪽 오랑캐의 개태(開泰)라는 연호를 갈아 버렸다. 천희(天禧 1027~1021) 연간에 이르러 북쪽 오랑캐가 다시 고려를 격파하고 그 백성들을 거의 다 살륙하여, 왕 순은 나라를 버리고서 합굴(蛤堀)로 도망가기에 이르렀고, 오랑캐는 성안에서 8개월 동안 머물러 있다가 마침 서북쪽 산의 온갖 소나무가 다 사람 소리를 내자 비로소 놀라고 두려워하여 철수해 가버렸다. 그러나 여전히 왕 순에게 강제로 정삭을 나누어 줌으로 왕 순은 힘에 굴복하여 부득이 그것을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태평(太平)306)2년부터 17년이 계속되었고, 중희(重熙 1032~1054)에 이르러서는 22년이 계속되었고, 청녕(淸寧 1055~1064)은 10년이 계속되었고, 함옹(咸雍 1065~1074)은 10년이 계속되었고, 태강(太康 1075~1084))은 10년이 계속되었고, 대안(大安 1085~1094)은 10년이 계속되었고, 수창(壽昌 1095~1100)은 6년이 계속되었고, 건통(乾統 1101~1110)은 10년이 계속되었고, 천경(天慶 1111~1120)은 8년(천경은 10년간 계속했으니 저자의 착각인듯)까지 갔으니 도합 1백년이 된다.


   그리고 야율(耶律 요 황제의 성씨, 요를 말함)이 대금(大金)에게 곤욕을 당하자 고려는 드디어 북쪽 오랑캐의 연호를 버려버렸으나, 또 우리 조정에 명령을 청하지 않아 감히 그대로 정삭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다만 세차(歲次 연수에 따른 간지를 말함)로 해를 기록하고 장차 정삭을 청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조정은 고려와는 저토록 멀고 복쪽 오랑캐는 고려와 이토록이나 가깝다. 그러나 북쪽 오랑캐에게 붙은 것은 언제나 병력에 곤욕을 당해서이었으며, 그것이 좀 이완해진 것을 틈타서는 곧 항거하였다. 성조(聖朝)를 높여 받드는 것으로 말하면 시종여일하게 간절히 추대하고, 비록 어쩌다 때때로 견제를 받아 소원대로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성의의 방향은 굳기가 금석과 같다. 그것은 누대의 성군께서 인자함으로 편안케 하여 주시고 은덕으로 위무하여 주주셔, 안으로 그들의 마음을 얻은 것이 북쪽 오랑캐가 강포하여 한갓 힘으로 그들의 외면을 제압한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철과 달을 맞추어 날을 바로 잡는다.307)’ 하였거니와, 이제 북쪽 오랑캐가 이미 멸망하였으니 고려의 사신이 정삭을 청해옴을 곧 보게 될 것이고, 만방의 시(時)․월(月)․일(日)을 맞춰서 바로 잡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유학 儒學

   동이(東夷)는 천성이 인자하여 그 땅에는 군자가 죽지 않는다는 나라가 있다. 또 기자(箕子)가 봉해졌던 조선 땅에서는 본래부터 8조의 가르침을 잘 알아, 그 남자들은 예의로 행동하고, 부인들은 올바름과 신용을 지키고, 음식은 두변(豆籩 두와 변. 모두 법도에 맞게 쓰는 예기(禮器))을 가지고 하고, 길을 가는 자들은 서로 양보한다. 그리하여 만맥 잡류(蠻貊雜類)들이 이마에 자자(刺字)하고, 발에 굳은 살을 지우며 변발(辮髮)에 횡폭(橫幅 오랑캐의 복식 이름)을 두르고, 부자가 잠자리를 같이 하고 친족이 관곽을 같이하는 따위의 편벽하고 괴이한 것과는 다른 것이다. 한 무제(漢武帝)가 사군(四郡)을 설치해서부터는 신첩(臣妾)으로 내속(內屬)하여 중화의 정치 교화가 점차로 미쳐갔던 것으로 비록 위(魏)를 거치고 진(晋)을 지나면서 시대의 기복에 따라 잠시 이탈했다 잠시 합쳤다 하기는 하였으나 의리가 마음속에 뿌리박은 것은 없어진 적이 없었다.


   당(唐) 정관(貞觀 태종의 연호) 초년에 태종(626~649)이 위 정공(魏鄭公 위 징(魏徵)의 봉호가 정국공(鄭國公)임)의 한 마디를 써서 인의(仁義)로 정치하고 학교를 넓히며 학자를 숭상하였는데, 이 때에도 의론에 참여하였던 대신들은 오히려 의심을 품고 그것의 유익함을 몰랐었다. 그런데 저 나라에서는 서둘러 자기네들의 뛰어난 자제들을 보내어 경사(京師 당시 당의 수도였던 장안(長安)을 말함)에서 교육시키를 청했던 것이다. 그 후 장경(長慶 목종의 연호, 821~824)연간에는 백거이(白居易 자는 낙천(樂天), 당대의 시인)가 가행(歌行 성률이 덜 근엄한 고체시(古體詩)의 일종으로 악부시(樂府詩)의 계통을 이은 것)을 잘 지었는데, 계림(雞林 우리나라를 말함) 사람들은 옷깃을 여미고 감탄 흠모하여 일금(一金 황금 1금을 말함)으로 한 편을 바꿔서 그것으로 규범을 삼기까지 하였으니, 그들의 마음 쓰는 것을 알 수 있다. 왜(倭)․진(辰) 등 나머지 나라들을 살펴보면, 혹은 가로쓰고 혹은 왼쪽으로 획을 긋고 혹은 노끈을 매듭지어 신표로 하고, 혹은 나무를 파서 기록으로 삼고 하여 각각 방법을 달리 하고 있다. 그런데 고려인들은 예서법(隸書法)을 모사하여 중화의 것으로 바로 잡으며, 화폐의 글자와 부절과 인장의 각자에 이르러서는 감히 망령되이 자체를 증손(增損)하지 않으니 문물의 아름다움이 상국(上國)과 맞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송(宋) 나라가 일어나 그 문화가 멀리에까지 미쳐가자 머리를 조아리고 관문을 두드려 번신(藩臣)이 되기를 청해왔다. 그 사자(使者)가 와서 조정에 들 때마다 나라의 찬란한 문물을 보고서는 그 아름답고 찬란함을 부러워하고, 돌아가서는 서로 이야기하여 사람들이 더욱 힘쓰게 되었다. 순화(淳化) 2년(고려 성종 10년 991)에 천하의 선비들에게 조정에서 시험을 베풀었는데, 그들 역시 자기네 사람들을 빈공(賓貢)으로 보내서 문예(文藝)를 바쳐왔다. 태종 황제(太宗皇帝)께서 이를 가상히 여기시어 그 수효 안에서 뽑아주시어 왕 빈(王彬), 최한(崔罕) 등은 진사 급제(進士及第)로 장사랑 수비서성교서랑(將士郞守秘書省校書郞)을 제수하고 배를 태워 귀국케 하였다. 그때의 국왕 치(治 고려 성종(成宗))가 표물을 바쳐 사의(謝意)를 표했는데, 그 언사가 심히 감격스러웠다.


   신종황제(神宗皇帝)께서 속학(俗學)의 폐단을 근심하시어 삼경(三經 「시경」 「서경」 및 「역경」을 말함)을 훈석(訓釋)하여 천하의 암매함을 없애주도록 명하시고, 특히 조명(詔命)으로 그 책들을 내려 그들로 하여금 대도(大道)의 순전(純全)함을 볼 수 있게 하여 주도록 하시었다. 주상(主上 송 휘종을 말함)께서는 선왕의 뜻을 훌륭히 계승하시어 시사법(施舍法)308)을 확대시키셨고, 또 내학자제(來學子弟 당시 고려 유학생을 말함) 김 단(金端) 등에게 과명(科名 과거 급제의 종류에 따른 명칭)을 내리어 귀국시키셨다. 이리하여 휩쓸리 듯 따르고 세차게 교화되어 즐겁고 공경스럽게 유학을 지켜나가 비록 연․한(燕韓)309)의 변두리 편벽한 곳에 살기는 하지마는 제․노(齊魯)310)의 기풍과 운치를 지니게 된 것이다.


   근자에 사신이 그 곳에 가서 물어보고 알았지마는, 임천각(臨川閣)에는 장서가 수만 권에 이르고, 또 청연각(淸燕閣)이 있는데 역시 경․사․자․집(經史子集) 4부의 책으로 채워져 있다 한다.311)국자감(國子監)을 세우고 유관(儒官)을 선택한 인원이 짜여져 하게 구비되어 있었으며, 황사(簧舍 학교를 말함)를 새로 열어 태학(太學)의 월서계고(月書季考)312)하는 제도를 퍽 잘 지켜서 제생(諸生)의 등급을 매긴다. 위로는 조정의 관리들이 위의가 우아하고 문채가 넉넉하며, 아래로는 민간 마을에 경관(經館)과 서사(書舍)가 두셋씩 늘어서 있다. 그리하여 그 백성들의 자제로 결혼하지 않은 자들이 무리지어 살면서 스승으로부터 경서를 배우고, 좀 장성하여서는 벗을 택해 각각 그 부류에 따라 절간에서 강습하고, 아래로 졸병과 어린아이들에 이르기까지도 향선생(鄕先生 자기 고장의 글가르치는 선생)에게 글을 배운다. 아아, 훌륭하기도 하구나!


   그런데 제후가 공을 이룩하는 것은 실은 천자의 위령(威靈)을 빈 것이고, 제후가 덕을 드러내는 것은 실은 천자의 교화를 따른 것이다. 고려인은 중국에 대해서는 바다 한 구석의 후백(侯伯)의 나라일 뿐이다. 이제 그들의 문물이 풍성함이 이와 같음은 대체로 좋은 감화의 소치이니 또한 위대하지 않은가? 이를테면 일월을 비롯한 삼진(三辰 일․월․성을 말함)은 원기(元氣)를 빌어서 열(列)을 이룩하나, 그것들이 빛으로 나타내는 것은 하늘의 밝음으로 되어 지는 것이다. 그리고 초목을 비롯한 온갖 보물은 원화(元化 조화의 위대한 작용을 말함)를 받아서 꽃을 피워내나, 그들 꽃이 아름답게 피고 지고 하는 것은 땅의 문체로 되어지는 것이다.

그 나라의 선비를 뽑는 제도로 말하면, 비록 본조(本朝 송나라를 말함)의 그것을 규범으로 삼기는 하지마는, 전승하여 듣고 구례를 따르고 하는데 따라 약간의 차이가 없을 수 없다. 그들은 학생(學生)들에 대해서는 매년 문선왕묘(文宣王廟 공자묘 즉 문묘)에서 시험하는데 합격자는 중국의 공사(貢士 중앙고시에의 응시자격을 추천 받은 자)와 대등하다. 그들의 거진사(擧進士 진사시에 응시할 자격을 갖춘 자)는 한해 건너 한차례씩 그 소속지에서 시험을 실시하여 합격하면 공자(貢者 학생으로 합격한 자를 말함)와 대등해지는데, 도합 3백 50여 인이다. 추천 선발이 끝나면 또 학사(學士)들에게 명해 영은관(迎恩館)에서 전체 시험을 치루게 하여 30~40인을 뽑아, 갑․을․병․정․무 5등으로 나눠서 급제를 내리는 것이 대략 본조의 성위(省闈 궁중에서 치루는 중앙고시를 말함)의 제도와 같다. 왕이 친히 시험해서 벼슬을 주는 것으로 말하면 시․부․논(詩賦論) 3제를 쓰고 시정(時政)을 책문(策問)하지 않으니 이것은 우스운 일이다. 그 밖에 또 제과(制科)313)와 굉사(宏辭)314)의 명목이 있는데 조문은 갖추어져 있으나 늘 시행하지는 않는다. 대체로 성률(聲律)315)을 숭상하고 경학(經學)은 그리 잘하지 못한다. 그들의 문장을 보니 당의 여폐(餘弊)와 방불하다.316)


악률 樂律

   훌륭한 음악은 천지와 함께 조화를 같이 하거니와317)오성(五聲)의 발생은 오행(五行)에 근원을 두었으며,318)팔음(八音)의 구별은 팔풍(八風)에서 생겨난다. 청탁(淸濁)과 고하(高下)는 다 한 기운에서 나오나, 손과 발이 흥겹게 움직이는 것은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는데도 그렇게 하게되는 점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궤부(蕢桴 흙으로 틀을 만들고 가죽으로 면(面)을 한 악기를 치는 채)와 토고(土鼓 흙을 구워 틀을 만들고 가죽으로 면을 한 악기)로도 다 그 소리를 깃들이고 조화를 토해내기에 족하다. 그래서 갈천씨(葛天氏) 때부터 쇠꼬리의 노래가 이미 문헌에 보이게 된 것이다.319)후세에 성인(聖人)이 음악을 만들어 덕을 숭상하여 금(金)․석(石)․토(土)․혁(革)․포(匏)․목(木)․사(絲)․죽(竹) 등의 물건을 가지고 종(鐘)․경(磬)․도고(鞉鼓)․훈지(塤篪)․생우(笙竽)․축어(柷敔)․금슬(琴瑟)․관적(管篴)320)등의 악기를 제작하여서 연주하고, 멈추고, 읊조리고, 쉬고 하여 천지의 조화에 맞춰 신기(神祇 하늘과 땅의 신령)와 조상의 영혼을 강림하게 하였다.321)


   만이(蠻夷)와 융적(戎狄)의 음악에 있어서도 역시 합주(合奏)를 하는데, 말사(靺師)322)가 있어 그 음악을 관장하고 모인(旄人)323)이 있어 그 무(舞)를 늘어 놓고, 제류씨(鞮鞻氏)324)가 있어 그 가취(歌吹)를 맞춘다. 무릇 민중과 함께 음악을 즐겨서 천하를 즐기므로 처음부터 이하(夷夏 한족과 그밖의 이족)의 구별이 없다. 받아들이고 널리 채택함은 우리 덕이 널리 퍼져나감을 보여 주는 것이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아(雅)를 연주하고 남(南)을 연주하고, 약(籥)을 연주하여도 혼란을 일으키지 않는다.325)’ 하였는데, 설명자가 ‘아는 하악(夏樂 중국의 음악)이고, 남은 이악(夷樂)이라.’고 하였다. 즉 두가지를 합주해서 조화를 이루어 천지의 중성(中聲 중화(中和)의 음성) 에 맞춘 연후라야 음악을 갖춘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방의 이역(異域)에서는 음식이 조화를 달리하고, 의복이 제도를 달리하고, 기용(器用)이 방법을 달리하므로 음악 역시 같아질 수 없다. 그래서 동방의 것을 ‘말’(靺)이라 하고, 남방의 것을 ‘임’(任)이라 하고, 서방의 것을 ‘주리’(侏離)라 하고, 북방의 것을 ‘금’(禁)이라 하여, 각각 그 뜻을 지니고 있어 뒤섞을 수 없는 것이다.


   고려인으로 말하면 동이(東夷)의 나라이므로 음악은 ‘말’(靺)에 근본을 두었다고나 할까? 또 삼대(三代)의 제도는 상(商)의 것을 대호(大濩)326), 주(周)의 것을 대무(大武)327)라 하는데, 기자(箕子)는 상(商)의 후예로 조선으로 주(周)의 봉(封)을 받았으니, 그 곳의 말악(靺樂)의 비루함을 고쳐 틀림없이 호․무(濩武)의 유음(遺音)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제작(制作)을 차례로 이어받아 지금까지 천년이 지났으나 성음이 조화되고 악률이 맞으니 취할 것이 있어 마땅하다. 희령(熙寧 송 신종의 연호)연간에 왕 휘(王徽 고려의 문종(文宗))가 악공(樂工)을 보내달라고 주청(奏請)하여 조명(詔命)을 내려 그 나라에 가게 하였는데 수년 후에야 돌아온 적이 있었다. 그 후 사람들이 사절로 오면 반드시 재물을 가지고 와서 공기(工技 악공을 말함)를 스승으로 삼아서, 번번이 관사에 가서 가르쳐 주게 하였다. 근년에 입공(入貢)하여서는 또 대성아악(大晟雅樂) 내리기를 청했고, 다시 연악(燕樂) 내리기를 청했을 때는 조명으로 그 청을 다 들어 주었다.328)그래서 악무(樂舞)가 더욱 성대해져 보고 들을 만하게 되었다.


   지금 그 음악에는 2부(部)가 있다. 좌부는 당악(唐樂)이니 중국의 음악이요329), 우부는 향악(鄕樂)이니 이(夷)의 음악이다. 중국 음악은 악기가 다 중국 제도 그대로인데, 다만 향악에는 고(鼓)․판(版)․생(笙)․우(竽)․필률(觱篥 피리. 그 모양이 나라에 따라 약간씩 다름)․공후(箜篌)330)․오현금(五絃琴)․비파(琵琶)․쟁(箏)․적(笛)이 있어 그 형제(形制)가 약간씩 다르다. 슬(瑟)의 기둥은 고정되어 있고 움직이기 않는다. 또 소(簫)가 있는데 그 관(管)의 길이가 2척여로 그것을 호금(胡琴)이라고 한다. 몸을 굽혀서 먼저 그것을 불어 가지고 여러 악기의 소리를 시작하게 한다. 여기(女伎)로 말하면 그것을 ‘하악’(下樂)이라고 하는데 도합 3등급이 있다. 대악사(大樂司)는 2백 60인으로 왕이 늘 사용하는 것이다. 다음 관현방(管絃坊)은 1백70인이요, 그 다음 경시사(京市司)는 3백여 인이다. 또 석지(䄷枝)331)와 포구(抛毬)332)의 기예(技藝)도 있다. 그들의 백희(百戲)333)는 수백인인데 듣기로는 다들 민첩하기가 대단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때 왕 우(王俁)의 상기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악공들은 그 악기를 잡고 있고 연주하지 않아서 성률의 절도를 알아볼 수 없었다.


권량 權量

   대씨(戴氏)의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예악을 제정하고 도량형을 반포하면 천하가 철저하게 복종한다.334)’ 하였고, 노어(魯語)에 이르기를, ‘권량(權量 역시 도량형을 말함)을 조심스럽게 다루고 법도를 자세히 살펴서 사방의 정사가 시행되게 되었다.335)’고 하였다. 대체로 왕자(王者)가 제후를 통솔하는 데는 비록 덕화(德化)와 형위(形威 형벌을 가하는 위력)에 근본을 두기는 하지마는 그 정사를 통솔시키는 방법은 더욱이 권량을 앞세운다. 삼대(三代 하․은․주)가 전성했을 때에는 반드시 왕부(王府)에서 가량(嘉量)336)등의 기구를 내놓아 나라안에 나누어 주어, 그것을 그 관원으로 관장하게 하였고, 그것을 제때에 평준하게 하였으며, 순수(巡狩 천자의 지방 시찰을 말함)할 때에 가서는 또 맞춰서 같게 하여 내외와 원근에 따라 다른 제도가 생기지 않게 하였다.


   그렇게 한 후에 천자의 정치가 시행되었던 것이다. 만약에 사방의 제후로 이 세 가지에서 한 가지라도 변개가 있다면 몰아내고 죽여 없애고 하여 법에 용서가 없었으니, 뉘라서 그것이 기용의 말단이라 하여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대저 오도(五度)의 제도는, 분(分)에서 분별하고 촌(寸)에서 촌탁하고[忖], 척(尺)에서 재고, 장(丈)에서 펼치고, 신(伸)에서 끌어내고, 그렇게 하여 온갖 물건의 길이를 재는 것이다. 오량(五量)의 제도는 약(龠 즉 작(勺))에서 나가게 하고 홉(合)에서 합치고, 승(升)에서 올리고, 두(斗)에서 모으고, 곡(斛)에서 헤아려 보고, 그렇게 하여 온갖 물건의 용량을 되는 것이다 오권(五權)의 제도는 수(銖)에서 시작하고, 양(兩)에서 짝채우고, 근(斤)에서 밝히고, 균(鈞)에서 고르고, 석(石)에서 끝내고, 그렇게 하여 온갖 물건의 무게를 단다.337)그러나 다 동(銅)으로 부어서 찍어 내는데 이는 그것이 동일함을 취한 것으로, 천하의 도량형을 같게 하고 풍속을 일정하게 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주(周) 나라의 도(道)는 동쪽으로 기울어져 정치는 그 권병을 잃었다.338)진(晉)나라의 악률 맞추던 자는 장척(長尺)을 만들어서 종을 쳐 음악의 중성(中聲)을 잃었고, 제(齊)나라의 재상으로 있던 자는 큰 말로 백성들에게 양곡을 주어 자기의 개인적인 은혜를 샀고339), 당(唐)나라의 역법(曆法) 연구자는 옥형(玉衡)과 선기(璿璣)의 제도를 잃어 천도(天道)와 삼진(三辰 일․월․성)의 운행을 고루할 길이 없어졌다.340)이런 일들은 이목으로 접하게 되는 가까운 것조차도 그 법도 가운데서 같은 점을 살피지 못한 것이니, 하물며 멀리 바다 밖에 있는 나라에서 거대한 파도 사이를 뚫고 신기루의 섬을 건너가 도량형이 통일되어 같기를 바라려고 함은 어찌 배를 육지에서 몰고 감과 다르겠는가?


   고려라는 나라는 중화에서 3천 리가 떨어져 있는데, 제왕이 지극하게 다스렸을 때부터 역시 지배를 받는 지역에 들어 있기는 하였으나, 도량권형을 나눠주어서 그곳이 같아지기를 도와준 자가 있었다고는 듣지 못하였다. 우리 송(宋)이 나라를 세우자 덕이 천지와 같아, 하늘 끝까지 그리고 땅의 극한까지 신첩(臣妾)이 아닌 것이 없다. 그런 까닭으로 해서 고려인은 머리를 조아리고 안으로 향해 번병(藩屛)이 되어 중국에서 모범을 취하기를 원했고, 도량권형을 가지고 그 표적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것은 이른바 인자한 은덕이 옆으로 흘러가 제왕이 회유하지 못한 데를 회유해낸 것이고, 무력의 뜻[武誼]이 멀리에까지 미쳐 왕자(王者)가 제압하지 못한 데를 제압해낸 것이다. 앞서 사절의 인원들이 군명을 받들고 그 속에 가서는 연향(燕饗)때 그들의 선물을 주는 예를 받았었다. 뱃사람들이 시장에 가서 그들이 교역하는 물건을 거래하면서, 그들의 길이의 법식과 용량의 수와 중량의 등급을 잠자코 알아보고 그것들을 중국의 법과 비교해 보았더니, 조그마한 차이도 없어서 더욱 그들의 정성이 지극함을 찬양하게 되었다.


   대저 이목이 미치는 데에 근신하는 자는 혹 이목이 미치지 않는 데를 게을리하는 경우가 있고, 형벌의 위엄이 제재하는 데를 두려워하는 자는 혹 형벌의 위엄이 제재하지 않는 데를 깔보는 경우가 있다. 이제 고려는 노정이 우원하고 국도(國都)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이미 이목이 미칠 수 있는 데가 아닌데도 주상께서 위대한 덕을 지니시어 관대한 은전으로 이적(夷狄)을 대우하셨고, 또 까다롭게 형벌의 위엄을 숭상하여서 제재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도량권형을 이토록 근엄하게 지켜 쓸 수 있었으니, 이는 그들이 마음으로부터 기뻐하여 성심으로 복종한 것이지 억지로 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서경」(書經)에 이렇게 말하지 아니하였는가? ‘저울과 말[斛]이 조화를 이루었으니, 왕의 부고에는 그것들이 있다.’ 대저 저울과 말의 조화를 이룬 것은 왕이 부고의 소유뿐인즉, 개인의 입장에서는 감히 고쳐 만들지 못하고 다만 우리 법도에만 같게 만듦이 또한 의당한 일이다.


송 고 상서형부 원외랑 서공 행장 宋故尙書刑部員外郞徐公行狀

   증조부 상(爽)은 황임(皇任 황제가 임명한 것을 말함) 비서성 교서랑(秘書省校書郞)341)증금자광록대부(贈金紫光祿大夫)342)이다. 증조모 섭씨(葉氏)는 증건안군태부인(贈建安君太夫人)이다. 조부 사회(師回)는 황임(皇任) 조의대부(朝議大夫) 증광록대부(贈光綠大夫)343)이다. 조모 임씨(林氏)는 증함녕군태부인(贈咸寧郡太夫人)이다. 부 굉중은 황임 조청대부(朝請大夫) 직비각(直秘閣) 증소보(贈小保)이다.344)모 갈씨(葛氏)는 증위국부인(贈衛國夫人)이다. 공의 이름은 긍(兢), 자는 명숙(明叔), 성은 서씨(徐氏)다. 웃대는 건주(建州)의 구녕현 사람이었으나 광록(光祿 조부 사회를 말함) 때부터 비로소 화주(和州)의 역양(歷陽)으로 옮겨와 살았다.345)비각(秘閣 부친 굉중을 말한 것)이 악주(鄂州)의 법조(法曹)346)가 되어 밤에 이런 꿈을 꾸었다. 황관(黃冠 도사가 쓰는 관)의 도사(道士)와 함께 큰 못 가운데서 놀았는데 품 속을 뒤져 작은 대쪽을 꺼내서 비각에게 주고 가버렸는데, 그것을 읽어 보니 정영위(丁令威)가 화표(華表)에 남긴 말이었다.347)그 후 5일째 되던 날 큰 물이 성곽을 넘어와 관청은 다 다른 데로 피해갔다. 비각은 집안을 황학루(黃鶴樓)348)위에 거처시켰었는데, 그날 밤에 바로 공을 낳았다. 공이 난 지 수개월 만에 글자를 보고는 기쁜 얼굴을 짓고 날뛰었다.


   10여 세가 되어서는 뛰어나게 슬기롭기가 유례가 없었고, 과거 공부를 할 때는 문사의 근원이 넓어 식자들이 그에게 촉망을 걸었다. 나이 열 여덟 살 때 태학(太學)에 들어가 재예를 겨뤄 자주 높은 등급을 차지하였으나, 과거[大比]에 응시하여서는 번번이 좌절되었다. 정화(政和 송 휘종의 연호) 갑오년(고려 예종 9, 1114)에 부임(父任)으로 장사랑(將仕郞)349)에 음보(陰補)되어 통주사(通州司)350)의 형조사(刑曹事)에 제수되었다. 상서랑(尙書郞)351)서 인이 제명(帝命)을 받들고 동남구로(東南九路)352)에 있는 광산에서 보화(寶貨)의 제련을 조처하게 되자 공을 간판공사(幹辦公事)353)로 임명하였다. 정강(靜江)354)에 황 인(黃麟)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대리국(大理國 징강본에는 대례국(大禮國))355)을 끌어들여 입공(入貢)시켰다. 조정에서는 이 일을 의심하여 인에게 조명을 내려 사실을 규명케 하였다. 인(麟)은 궁중의 귀인과 연통하여 권세가 오령(五嶺)356)을 휩쓸어 정강수(靜江帥)357)주 동(周穜)358)은 근심과 두려움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인은 그 일을 공에게 위촉하였는데 공은 ‘그 일은 정녕 처리하기 쉽습니다’ 하고 그 부곡(部曲)들을 앞에다 불러놓고 나라를 세운 연월과 산천과 풍속 등을 잡다하게 물어보자 다 벙어리처럼 대답하지 못해 사기한 죄상이 마침내 드러났다.


   옹구(雍丘)359)에 현령이 비어 조명(朝命)으로 공에게 그 직무를 대리하게 하였다. 이때 그 읍에 형제가 서로 소송을 일으키는 자들이 있었는데, 오래 계류되어 결정을 보지 못했었다. 공이 와서는 지키는 자에게 일러 자리 하나를 마련케 하고 그로 하여금 같이 기거하며 식사는 반드시 그릇을 함께 쓰게 하였다. 10일이 지나자 감동하여 깨닫고 서로 잡고 울며 말하기를 ‘영군(令君 현령의 일을 대행하던 서 긍을 가리켜서 한 말)께서 우리를 가르치신 것이 지극합니다. 스스로 새사람이 되기를 원하거니와 어찌 감히 곡직을 따지겠읍니까?’ 하였다. 그후로부터는 다시 우애로 칭송되었고 민간에서는 그 감화를 받아 옥송(獄訟)이 줄어들어 멎어버렸다. 경서부(京西部)의 사자(使者)360)가 영행(佞倖 말재간으로 아첨하여 총행을 받음을 말함)으로 추천되어 나왔는데, 그는 도망병 2백 명을 시켜 읍에다 집을 짓고 멋대로 포악한 도둑질을 하게 하여 온 읍이 크게 소란해졌다. 공이 그들을 체포하여 치죄하니, 사자는 상총361)이 어명을 얻었다고 칭탁하고 읍에 당도해서 그 도당을 풀어놓아 북을 울리며 외치고 옥으로 들어가 포박된 자들을 깡그리 풀어 내놓았다. 공이 말하기를,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법률을 지키고 천자를 받듦은 동등하다. 그런 입장에서 일을 처리하지 않는다면, 나는 임금을 기만하는 것이다. 임금을 기만해서 남에게 아첨하는 일은 나는 차마 할 수 없다.”

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 집을 물샐틈 없이 막고 다시 흉악한 도당을 잡아 소속을 알아보고 법을 적용시켜 한 사람도 빠져나가지 못했다.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세상에 드러났다.


   전임되어 정주(鄭州)의 원무현사(原武縣事)362)를 대리하게 되어 단신 수레로 부임하였다. 그 때 탄사(炭事)를 관리하던 자가 자기 아우의 높은 지위와 세력을 배경으로 하여 공(功)을 세운다고 멋대로 잔인하게 굴며 강물 가에 창고를 세우고 배를 건조하였는데, 그 위세가 군읍에 떨쳐 칼을 쓰고 포박을 당한 자들이 길에 가득찼다. 그리고 공에게 회장(回狀)을 보내어 늦게 온 자들과 영을 무시한 자를 치죄하라고 하였다. 공이 개탄하며, “현령이 못나서 백성을 보호하지 못하는구나. 이러한 극단적인 형벌에까지 이르는 것을 어찌 참겠는가?” 라고 말하고는 그 해독을 써서 조정에 알리고, 무고한 사람 대신 자신이 죄를 받기를 청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해독은 멎어버리고 말았다. 또 전임 현령이 탐욕 잔학하여 백성들을 괴롭힌 것을 공이 철저하게 위무하여 주자, 읍인들은 궁궐에 가서 공이 정식 현령에 취임하게 되기를 호소하고, 다투어 거마를 마련하여 공의 가족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비각(서긍의 부친을 말함)이 원치 않아 상국(相國)에게 간절하게 말하고서야 가라앉았다. 연국(燕國)의 정공(鄭公)이 동렬자(同列者)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현령들로 하여금 다 서 긍같이 하게 한다면 천하에 어찌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있겠는가?” 제주사사(濟州司士)363)에 조임(調任)되었으나 육조의 부서가 결정되기 전에 모친상을 당하게 되었다. 상기가 끝나자 원풍고감(元豊庫監)364)이 되었다.


   선화(宣和) 6년(고려 인종 1, 1124)에 고려가 입공하여 임금에게 청해 글씨 잘 쓰는 자를 얻어 그 나라로 데리고 가기를 원했다. 이어 급사중 노윤적(路允迪) 을 보내어 보빙(報聘 다른 나라의 빙문(聘問)에 답례함)하게 하였는데, 곧 공을 국신소(國信所)의 제할인선예물관(提轄人船禮物官)으로 삼았다. 그 일로 해서 「고려도경」 40권을 저술하니 조명을 내려 어찰(御札)을 주고 그것을 바치게 하였다. 그는 자서(自序)에서 이렇게 적었다.

“한대(漢代)의 장 건(張騫)이 월지(月氏)에 사신으로 나갔다가 13년 후에 돌아왔는데도 겨우 그가 경과했던 나라의 지형과 산물을 말할 수 있었을 따름이었다. 나는 고려에서 월여 동안 있었는데, 관사에는 파수병이 있었고 나간 것은 겨우 5∼6 차례였다. 거마를 달리는 동안과 연석에서 수작하는 경우 이목이 미쳐간 것은 13년이라는 오랜 세월 같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그 건국과 입정(立政)의 근본과 풍속과 사물의 상황을 그리고 기록하여 거의 빠진 것이 없다. 감히 널리 앎을 자랑하고 경박함을 가다듬어서 황상의 총명을 흐리게 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을 모아서 일을 시키신 은혜의 반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휘종 황제께서 그 책을 보고 대단히 기뻐하시어 편전에서 소대(召對)케 하시고 동진사출신(同進士出身)365)을 내리시어 지대종정승사(知大宗正丞事)366)로 발탁하시고, 장서학(掌書學)367)을 겸임케 하였다가 상서형부원외랑(尙書刑部員外郞)368)으로 옮기시었다. 당시의 재상이 책면(冊免)되자 친혐(親嫌)으로 연좌되어 유배되어 지주(池州)의 영풍(永豊)369)감옥에 감금되었다가 부친상을 당했다. 상기가 끝나자 연강제치사(沿江制置司)370)의 참모관(參謀官)을 제수하였으나 봉사(奉祠)371)를 신청하여 남경(南京)의 홍경궁(鴻慶宮)372)을 주관하였다. 그때부터 대주(臺州)의 숭도관(崇道觀)373)을 세 차례나 맡아보았다.


   공은 천품이 명철 예리하여 일을 당하면 곧 깨달아 번잡을 없애고 극심한 것을 해결하는 지혜가 담소하는 사이에 나와, 강노(强弩)를 당기고 자물쇠를 잠그고 하는 것을 남이 헤아려 알 수가 없었다. 그의 효성과 우애는 천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적이 회전(淮甸 회수(淮水) 지방을 말함)을 범하자 집을 신주(信州)의 익양374)으로 옮기고는 선영(先塋)이 막혀 버린 일로 해서 슬픈 마음을 가누지 못했다. 그런데 광록(조부 사회(師回)를 말함)은 요주(饒州)375)에서 보좌관을 지낸 일이 있고 비각(아버지를 말함)은 또 강동(江東 양자강 하류의 남안 지방)의 조운사(漕運使)376)를 지낸 일이 있어 그 분들의 사당이 덕흥현(德興縣)377)의 청운사(淸雲寺)에 있으므로, 공은 매년 사철마다 사당에 가서 제례를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동모형(同母兄)인 지금의 부문각 직학사(敷文閣直學士)378)임(林)379)이 당시의 재상을 거스르기에 이르러 남쪽으로 포양(蒲陽)380)에 좌천되자 공은 천 리를 멀다 하지 않고 달려가 찾아보고 오래도록 차마 떠나가지 못하며 ‘슬픔이 형제에게 있는데 어느 하가에 처자를 돌보겠는가?’ 말하였다.


   공은 남다르게 뛰어나고 베풀어 주기를 좋아하여 재물 보기를 분토(糞土) 같이 여기고 남의 어려움을 돌봐 주기를 자신을 생각하는 것보다 서둘렀다. 하남소윤(河南少尹)381)허 방(許滂)이 공과 함께 팽려호(강서성의 파양호)를 건널 제, 방의 배가 뒤집혀 공이 그를 건져 주고 그의 집안 식구 20인을 전부 살리고 또 물건을 후하게 주었다. 방이 후에 사례품을 보냈으나 공은 하나도 받지 않았다. 친지 송 포(宋浦)가 사건으로 대리시(大理寺)382)에 회부되어 46만 전(錢)을 물어내게 되어 시장에서 구걸을 했다. 공의 지폐 가운데 다권(茶券)383)이 있어 마침 그 액수가 되므로 그것을 내주어서 포는 형벌을 면할 수 있었다. 무릇 소원한 사람이거나 친척이거나 먼 사이건 가까운 사이건, 고독 곤궁하면 공은 그들을 우환에서 벗어나게 하여 주고, 그들을 혼인과 장례 때에도 도와 주었는데, 그렇게 한 일은 한두 가지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공은 장구(章句 경전의 주석을 중심으로 한 학문)의 학문은 하찮게 여기고 고금의 전적을 섭렵하여 그 내용을 탐색하고 요점을 정리하여서, 아래로 불가, 노자, 손무(孫武), 오 기(吳起), 노편(盧扁 노(盧) 땅의 명의 편작(扁鵲))의 책들과, 산경(山經), 지지(地誌), 방언(方言), 소설(小說)에 이르기까지 관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귀인들 앞에서 손뼉을 치며 사물을 논하면 언제나 온 좌석의 주의를 모았다. 문장이 뛰어나고 민첩하여 당장에 붓을 대어 술술 써내어 그칠 줄을 몰랐다. 더우기 시가를 잘했다. 서초(西楚)의 패왕묘(覇王廟)384)에 들렀다가 28자(칠언절구(七言絶句)를 말함)를 남겼는데 중서사인(中書舍人)385)한 구(韓駒)386)가 그것을 보고 ‘뒤에 오는 사람은 거의 붓을 댈 수 없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림은 신품(神品)의 경지에 들어갔는데 산수와 인물 두 가지가 다 뛰어났다. 한번은 장난으로 평원도(平遠圖)387)를 그리고 그 곁에 장구(長句 칠언고체시(七言古體詩)를 말함)를 써서 구(駒)에게 주었다. 구는 언제나 그것을 꺼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명숙(明叔 서 긍의 자)은 시로 그림을 그리는 것인가, 그림으로 시를 짓는 것인가?’ 라고 말하고는 하였다. 비록 붓을 적셔 먹을 뿌려 잠깐 사이에 그림을 완성하기는 하지마는 흰 비단을 펼쳐 놓고도 혹 한 해가 지나도록 돌아보지 않는 수도 있었다. 세상 사람이 수장하고 있는 것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의 손에서 나왔거나 혹은 공이 지시하여 가르쳐 주었거나 한 것들이라 한다.


   공이 일에 대처하는 데는 일의 대소를 막론하고 다 묘하게 생각한 이치가 들어 있어, 다른 사람들은 지혜와 사려를 다해도 따라가지 못하였다. 음률을 잘 알고 또 휘파람을 잘 불었는데, 가끔 사람을 시켜 피리를 불게 하고 그것에 맞춰 휘파람을 불면 소리가 맑아 피리 소리를 누르고 울려났다. 그리하여 먼지가 날고 장막이 움직이고 하여 거의 난새와 봉새가 떼지어 모여있는 것 같았다. 술을 마시면 두 말까지 가도 난잡해지지 않았다. 객과 대작하게 되면 반드시 가뜩 따라서 먼저 마셔버린다. 술이 한창 어울리면 담론이 신나게 벌어지고, 혹 시문과 서화로 즐기기도 하고, 퉁소를 불고 큰 거문고를 타기도 하여, 그 초연함은 그가 신선들 속의 사람인가 하고 의심하게 된다. 온 천하의 선비들이 공의 이름을 듣고는 다들 교분을 트기를 원했다. 미천한 사나이가 집으로 찾아와도 그를 맞는 데는 역시 꼭 예를 다하고, 요구하는 것이 있으면 작건 크건 그대로 응해 주었다. 그리고 남에게 선한 점이 있으면 자기가 지닌 듯이 기뻐하였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를 가까이하고 아끼고 하였는데, 만맥(蠻貊)의 사이라 하여도 그것이 잘 통하였다.


   농지 수십 묘(畝)를 가꾸고 그것을 세연지(洗硯池)라 명명하였는데, 그윽한 승경이 강남에 소문이 났다. 자신거사(自信居士)라 자호하였고, 봉사(奉祀)한 것이 20년이었는데, 한가히 물러나 있는 것을 편안하게 여겨 그의 마음을 동요시킬 만한 일이 없는 것 같았다. 다만 분묘를 그리워하여 마지않았다. 소흥(紹興 송 고종 연호) 신미년(고려 의종 5, 1151)에 역양(歷陽)으로 돌아가 분황(焚黃 증직(贈職)이 된 때에 관고(官誥)의 부본(副本)을 쓴 누른 종이를 무덤 앞에서 불사르는 일)하여 돌아갈 것을 고하고 오주(吳州 소주(蘇州)의 별칭)에 다다라 병이나 졸(卒)하였다. 아, 공의 포부가 이러하였는데, 장년 때부터 나라를 떠나(조정에서 밀려나 지방에서 지낸 것을 말함) 낙백하여 그 재능을 써볼 데가 없었으니, 비록 공은 그런 처지를 여유 있게 대처하였으나 뜻 있는 인사로 시대를 위해 개탄하고 애석해하는 이들은 눈물을 흘리기까지도 한다.


   공은 원우(元祐 송 철종의 연호) 6년(고려 선종 8, 1091) 5월 21일에 출생하여 소흥 23년(의종 7 1153) 5월 21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63세다. 관직을 역임하여 조산대부(朝散大夫 문산신괸 제16계)에 이르러 삼품복(三品服)을 하사받았다. 봉의인(封宜人) 진씨(陳氏)와 결혼하였고 진씨는 공보다 5년 뒤져서 졸했다. 자녀는, 아들이 3인으로 집(集)은 일찍 졸했고, 藏(宋本에는 箴)은 우승직랑(右承直郞 문산신관 제32계) 강남서로전운사 간판공사(江南西路轉運司幹辦公事)인데, 서 긍의 종형 조봉랑(朝奉郞 문산신관 제22계) 철(喆)의 뒤를 이었으며 공보다 13년 뒤져서 졸했고, 성은 우적공랑(右迪功郞 문산신관 제37계) 감회서강동총령소 호부대군고(監淮西江東總領所戶部大軍庫)다. 딸 2인 중, 맏이는 우봉의랑(右奉議郞 문산신관 제24계) 지임강군 신감현사(知臨江郡新監縣事) 차사문(次師文)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우선교랑(右宣敎郞 문산신관 제26계) 지복주회안현사(知福州懷安縣事) 이 간에게 출가하였다. 손자는 6인으로, 원로(元老)는 우수직랑(右修職郞 문산신관 제36계)이고, 동로(同老), 명로(明老), 양로(洋老), 적(籍)은 장사랑(將仕郞)이고 그 중의 하나는 이름을 짓지 않았다.

손녀는 8인으로, 맏이는 좌적공랑(左迪功郞) 악주주학 교수(鄂州州學敎授) 유 벽(劉壁)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진사 주 진경(朱縉卿)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장사랑(將仕郞) 유모(兪某)에게 출가하였고, 나머지는 출가하지 않았다. 여러 유자손들이 공의 영구를 받들고 와 이해 윤 12월 초1일(을유)에 익양 옥정향(玉亭鄕) 구봉(龜峰)의 좋은 자리에 장사지냈다.


   공의 집안에는 전부터 기성(騎省 송초의 전・예(篆隸)의 대가 서 현(徐鉉). 서 긍의 조상)의 유물이 많았다. 백부 증광록대부(贈光祿大夫) 시중(時中)이 벼루 한 개를 진보(珍寶)로 여겼는데, 그 벼루 곁에 ‘정신’(鼎臣 삼공 등 지위 높은 대신을 말함)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한 번은 여러 아이들에게 말하기를 ‘세업’(世業 서법(書法)을 말한 것임)을 계승해 낸 자가 나오면 이것을 주어야겠다’ 하였다. 공은 그 때 갓 성년이 되었었으나 분별할 줄 알아서 전주에 전념하여 백부는 그 벼루를 들어 공에게 주었다. 공이 태어날 적에 ‘천세래귀’(千歲來歸 주7) 참조)의 조짐이 있었기 때문에 친지들은 공을 기성의 후신이라 말했던 것이다. 처음 소보(小保 서 긍의 부친 굉종을 말함)가 공에게 명해 함녕(咸寧 서 긍의 조모 임씨를 말함)의 묘비를 쓰게 하였는데 써내지 못해 부처에게 기도를 드리고 「반야심경」(般若心經)을 가져다 쓰는 연습을 하였다. 그 뒤 실제로 비문의 글자를 쓸 때에 우연히 바람을 받은 깃발이 날려 움직이는 것을 보게 되어 그로 인해 체세(體勢)를 깨달아 그 때부터 천하의 명성을 독차지하였다.


   휘종(徽宗)께서는 더욱 좋아하시어 한번은 금중에 불러들여 ‘진덕수업’(進德修業) 네 글자를 쓰게 하였는데 그 너비가 1장(丈) 가량이나 되었다. ‘업’(業)자에 가서 공은 특히 기묘한 변화를 일으켰다. 운필이 가운데 획을 밋밋하게 그어 나가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길고 세차며 단정하고 곧게 떨어지는 것이 둥근 돌이 천길을 떨어지는 것과 같았다. 임금께서는 놀라 기이해하며 잘한다고 칭찬하셨고 좌우 사람들은 다 경탄하는 소리를 발하였다. 그의 운필이 정숙(精熟)하여 돌고 꺾고 하는 것은 밤중에 등이나 촛불을 가리운다 하여도 호리의 차오도 없다. 진서(眞書 즉 해서)와 행서(行書)는 굳세며 아름다움이 뛰어나 저(褚 수량(遂良)), 설(薛 직(稷)), 안(顔 진경(眞卿)), 유(柳 공권(公權)) 등 여러 체를 겸비하였다. 만년에는 초서를 좋아하였고, 더욱 회소(懷素 당대 장사(長沙)의 초서에 능했던 불승)에 육박했다. 천하에서 글씨를 말하는 자는 공을 종주로 삼는데, 소학가(小學家 문자학자를 말함)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 사(李斯 진 시황 때의 승상)가 소전(小篆)으로 변개시킨 뒤부터는 진(秦), 한(漢) 사이에는 계승할 수 있는 자가 없어, 비갈(碑碣)에 전해지는 것은 필법에 취할 것이 없을 뿐 아니라 편방(偏傍) 역시 또 어긋나고 잘못되어 있다. 위(魏),진(晉)에서부터 당(唐)까지는 오직 이 양빙(李陽氷)388)이 독보로 불린다. 하지만, 근래 이 학문이 중간에 끊어졌기 때문에 이 양빙이 이 명성을 빼앗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원차산(元次山 결(結). 당대의 시인)의 생질 이 강(李康)이 오계389)와 어대(御臺)의 두 비명(碑銘)을 썼는데 제법 진(秦)의 서법을 터득하여 양빙에 비하면 천양지판이었다. 그러나 이름이 그리 나타나지 않았으니 일에는 본래 행운과 불행이 있는 것인가? 기성 형제(서 현(徐鉉)과 서 개(徐皆))는 이 사를 조술하였고 소학(小學 문자학을 말함)의 심오함은 숙중(叔重 후한의 허신(許愼))과 맞먹을 수 있다. 그리고 공이 또 계승하였으니 그 연원이 심원하다.


   사(斯)의 유적은 역산(嶧山 산동성 추현(鄒縣) 동남에 있음)에서 타버려 당대(唐代)에는 이미 남아 있지 않았다. 구양 문충공(歐陽文忠公 구양 수(歐陽修))이 천하의 금석 각명(金石刻銘)은 퍽 철저하게 모았으나 태산(泰山)의 조문(詔文)은 겨우 수십자가 있을 뿐이었다.390)대관(大觀 송 휘종의 연호) 연간에 하간(河間 하북성 한간현) 사람 유기391)가 산마루에 올라가 각석(刻石 명문에 세긴 돌)을 두루 살펴서 비로소 그 전체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정강(靖康)의 난을 겪은 지 겨우 10여 년이라, 그 탁본이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 배우는 사람들이 사(斯)를 본받는다고 그릇되게 말하지만 과연 그것들이 많이 보이기야 하였겠는가? 공이 그 각명(刻銘)을 얻어 보물로 간직하고 깊이 완미하여 사의 법을 깡그리 터득한 데다가 또 삼대(三代)의 박종정이(鎛鐘鼎彛)392)등의 기물을 고찰하여 관지(款識 금석에 새긴 글자)를 풀이하는 데 모두 근거를 갖게 되었다.


   그의 대전(大篆)으로 말하면 필력이 기고(奇古)하여 그 침착한 곳은 고대에 새긴 진적(眞蹟)과 다름이 없어 붓과 종이로 이루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뿐만 아니라 대전(大篆)에 조정을 가해서 변개하여 소전(小篆)으로 들어가 편방(偏旁)을 갈라내어 문자를 만든 본의와 부합하여 종횡으로 치닫게 되어 그 활용이 무궁하여졌다. 아마 옛날의 명필은 진실로 손가락 꼽아 셀 수 있다. 저승에서 되살아나지 않으니 후에 또 그들을 계승할 자가 나올 것인가? 공이 작고한 지는 지금 15년이 되었다. 장사 때 급해서 묘지명을 만들지 못했다. 나는 대대로 역양(歷陽)에 살았고 또 공의 가문과는 인척 관계가 있어, 공의 행적의 대략을 두서없이 적어서 진정한 작자가 정리해 써서 돌에 새겨 무덤 위에 놓게 되기를 기다린다. 삼가 행장을 쓴다.


건도(乾道) 3년 4월 초 10일

좌적공랑(左迪功郞) 영국부선성현주부주관학사(寧國府宣城縣主簿主管學事)

장 효백(張孝佰)이 행장을 씀





발 跋


   중부(仲父)는 책을 어부(御府)에 바치고 그 부본(副本)을 집에 보관하고 있었다. 정강(靖康) 정미년(고려 인종 5, 1127) 봄에 동네 사람 서주빈(徐周賓)이 그것을 빌어다 보았는데 반환되지 않은 채 적이 들어와 책의 소재를 모르게되었다.393)그 후 10년이 되어 아버님께서 강서(江西)의 조운사(漕運使)로 홍주(洪州 강서성 남창현(江西省南昌縣))에 주재하고 계셨는데 중부가 와서 찾아뵈었다. 그 때 어떤 이가 말하기를 ‘군아(郡衙)에 북방의 의원[北醫] 상관생(上官生)이 있는데 그가 확실히 이 책을 얻었다’ 하기에 급히 찾아가 보았더니, 그 중에 성한 것은 단지 해도(海道) 2권394)뿐이었다. 중부가 한번은 나에게, ‘세상에 전해지는 내 책은 왕왕 그림은 없어지고 경문이 남아 있는데, 내가 후에 그리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나는 그 일을 해내지 못했다’고 한적이 있었다.

아아, 관 뚜껑을 덮으면 일은 끝나버리는 것이다. 우선 이것을 판각하여 징강(운남성 징강현(운남성 징강현(雲南省徵江縣))의 군재(郡齋)에 남겨 두거니와 뒤에 오는 사람들은 그래도 참고할 데가 있게 될 것이다.


건도(乾道) 3년(1167) 하지일(夏至日)

좌조봉랑(左朝奉郞)395)권발견강음군군주관학사(權發遣江陰郡軍主管學事) 서 천이 씀



1)직방씨(職方氏) : 중국 경전의 하나인「주례」 (周禮)는 이상적인 관제(官制)를 엮어 낸 것인데 그 하관(夏官)의 하나로 직방씨(職方氏)가 들어 있다. 직방씨는 각 지방의 일을 맡아 보는 관직으로, “천하의 그림⋯⋯”은 「주례」에 설명된 직방씨의 직책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2)천하의 그림 : 정 현(鄭玄)의 주에 따르면 여지도 (與地圖) 즉 지도다. 서 긍이 「고려도경」에 그렸던 그림은 설명된 내용으로 보아 실물들을 그린 것들이었을 것이다.

3)사이(四夷)……육적(六狄) : 주(周)에 복속했던 미개 족속들을 나열한 것이다. 사이(四夷)는 동방의 이(夷), 남방의 만(蠻), 서방의 융(戎), 북방의 맥적(맥狄). 그밖의 것들은 개별적인 명칭이 전해지지 않는다.≪周禮체 夏官 職方氏 鄭司農注≫

4)행인(行人) : 주례에는 추관(秋官)에속하는 벼슬로 빈객(賓客)을 맡아 보는 것이 그 직책이다. 대행인(大行人)⋅소행인(小行人) 등이 있다. 행인은 사자의 의미로도 쓰였으나 역시 「주례」의 행인의 직책과 연결되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겠다.

5)다섯가지 종류의 일 (五物) : 「주례」 우관 소행인의 직장(職掌)설명에 나오는 말로, 제후국에, 1. 상사가 있으면 부의(賻儀)를 보내 도와주고, 2. 흉년이 들면 구호 양곡을 거두어 보내 주과. 3. 전사(戰事)가 발생하면 재물을 모아서 지원해 주고, 4. 복된 일이 있으면 경하해 주고, 5. 수해나 화재 같은 재앙이 있으면 위문해 주는 다섯 가지다.

6)외사(外史) : 「주례」 의 춘관(春官)에 속하는 관원으로, 외국에 보내는 명령을 쓰는 일을 맡아보는 것으로 되어 있다.

7)사도(司徒) : 「주례」 지관(地官)의 대사도(大司徒)를 말한 것으로, 그 직장(職掌)은 나라의 토지의 그림과 그인민의 수효를 확정하여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돕는 것으로 되어 있다.

8)송훈(誦訓) : 「주례」 지관에 속하는 관원으로, 사방의 기록에 있는 오래된 일들을 설명해서 임금이 각 지방의 옛 일을 살피게 해 주는 것이 그 직책이다.

9)토훈(土訓) : 역시 「주례」 지관에 속하는 관원으로, 지도를 설명해서 각 지방의 사정을 살펴알게 하는 것이 그 직책이다. 임금이 지방을 순해할 때에는 토훈이 임금의 수례 양곁에 붙어 다니는 것으로 되어 있다.

10)소 하(蕭何) : ?~B.C. 193. 한고조 유방이 천하를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워 이른바 개국명상(開國名相)으로 꼽혀 자 양 (張良)・한 신(韓信)과 함께 삼걸(三傑)로 불리우기도 한다.≪漢書 卷三十九≫

11) 장손 성(長孫晟) : 552 ∼ 609. 탄사 (彈射)에 능했는데 그가 돌궐(突厥)에 수항사자(受降使者)로 간 일이 있었다. 그는 머리가 영리한 사람이어서 돌궐을 공략할 준비를 미리부터 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隋書 卷五十一≫

12)문제(文帝) : 수(隋)의 제1대 임금. 그의 재위 기간(581∼604)중에 중국이 통일되었다. ≪隋書 卷一≫

13)선왕(先王) : 송 철종(宋哲宗, 1085∼1099 재위)을 말함

14)인재를 뽑아 : 고려의 인재를 말함. 북송(北宋)의 철종(哲宗)은 원부(元符) 2년(고려 숙종 4. 1099)에 고려로 하여금 학인(學人)을 북송에 보내 빈공과(賓貢科)에 응시하도록 허락하였다. 그래서 고려에서는 자재들을 북송의 국자감에 보내 수학하여 빈공과에 응시하도록 하였다. ≪宋史 高麗傳≫

15)윤적(允迪) : 성은 노(路). 생졸 연대는 미상, 급사중(給事中)은 문하성(門下省)에 속하는 벼슬로서 제칙 박정(制칙駁正)의 일을 관장한다. ≪고려사 인종 원년육월≫ 에는 노 윤적의 관직명이 예부 시랑 예부시랑으로 되어 있다. 송대의 관제(官制)로는 급사중에서 옮겨 가는 다음 자리가 예부시랑이다.

16)묵경(墨卿) : 성은 부(傅). 생졸 연대는 미상. 세 차레에 걸쳐 고려에 사신으로 왔었다. ≪尙友錄 卷十八≫ 중서사인(中書舍人)은 중서성(中書省)에 속하는 관직으로, 조고제칙(詔誥諸勅)을 관장하는데, 문사(文士)로서는 명예스러운 지위로 여겨졌다.

17)왕 우(王俁)는 고려 예종(睿宗). 1122년 4월에 훙거(薨去). ≪高麗史 睿宗世家≫

18)황황자화(皇皇者華)⋯⋯노래되었으니 : 황황자화는 「시경」 소아(小雅)의 편명, 사신을 보낼 때 불러 주던 노래로 인용된 구절은 제 6 장 끝 한 구

19)왕 운(王雲) : ? ∼ 1126. 자는 자비(子飛), 진사(進士)로 사신을 수행하여 고려에 다녀가 「계림지」 (鷄林志)를 저술하여 비서성(秕書省)의 교서랑(校書郞)에 발탁되었고, 그 후 복송이 멸망할 때까지 형부 상서(形部尙書)를 거텨 자정전학사(資政殿學士) 까지 지냈다. ≪宋史 卷三五七≫ 「계림지」는 산일되고 전해지지 않는다.

20)그 설 : 고려에 관한 제반 사항을 말함.

21)쌀을 모아⋯⋯ 유제(遺制) : 후한 때의 장수 마 원(馬援, B.C.14 49)이, 외효(巍효)가 이끄는 군사는 토붕화해할 형세에 있음을 설명하면서 광무제(光武帝) 앞에서 쌀을 모아 산골짜기를 만들고 그 군사의 형세를 지적해 주어 광무제가 그 상황을 잘 알기에 이르렀다는 고사가 있다. ≪後漢書 卷五十四≫

22)장건(張騫) : ? ∼ 114. 한 무제(漢武帝) 건원(建元) 2년(B.C.139)에 대월지(大月지)에 사신으로 가게 되어 수종 인원 1백여 인을 거느리고 장안(長安)을 떠났으나 흉노(匈奴)에 잡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몇 차례의 탈주 끝에 대월지를 들러서 원삭 3년 (B.C.126)에 간신히 귀국했다. 장건의 견문은 한 무제의 서역 경영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漢書 卷六十一≫

23)봉의랑(奉議郞)⋯⋯사비어대(賜緋魚袋) : 북송(北宋) 원풍(元豊, 1078∼ 1085) 연간에 개정된 37계(階)의 문산신관(文散新官) 중에서 봉의랑(奉議郞)은 제 24계이고 구관(舊官)으로는 저작랑(著作郞)에 해당된다. 종정시(宗正時)의 속관이다. ≪宋史 卷一六九≫ 북송 휘종(徽宗)의 정화(政和, 1111∼1118)연간에 고려에 보내는 사신을 ‘국신’(國信)으로 승격시켰는데, 국신은 국신사(國信使)의 약칭으로 나라의 신서(信書)를 가지고 가는 사신이라는 뜻이다. ≪宋史卷 四八七 高麗傳≫ 국신소(國信所)는 본래 글안(契丹)과의 교빙(交聘)을 관장하던 관서로, 고려에의 사신으로 국신으로 승격시킨 것은 당시 북송에서 고려를 국제 관계상 중요시했음을 나타낸 것이다. 서 긍은 고려와의 교빙을 담당한 국신소의 관속으로 충원되었는데 그 임무는 인원,선박,예물 등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제할’(提轄)은 인원과 물건 등을 관리하는 관직으로 탁지관(度支官)의 하나다. ‘비어대’(緋魚袋)는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물로, 송의 사륙지(사六)중 끝의것. 본래는 하급 조관(下級朝官)을 20년을 지낸 자에게 내리는 것인데 특지(特旨)로 내리기도 했다. 송대의 비어대는 귀천(貴賤)을 표시하는 데 쓰였으니 당대(唐代)에 조관의 신분증 구실을 했던 것과는 달랐다. 은색 주머니에 붉은 빛의 물고기 형상을 그린 것을 띠 뒤에 달고 다니게 되어 있었다. ≪唐書 車服志 宋史 職官志≫

24)관구 검(毌丘儉) : 삼국(三國) 시대 위(魏) 나라 사람. 고구러 동천왕(東川王) 18년(신라 조분왕(助賁王) 15, 백제 고이왕(古爾王) 11, 265)에 침입하여 환도성(丸都城)을 함락시켰다. ≪三國志 卷二十八≫

25)이 적(李勣) :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唐)나라 사람이다. 요동도 행군대총관(遼東道 行軍大總官)으로 고구려 보장왕(寶藏王) 4년(645)에 안시성을 침공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가 보장왕 25년에 재차 고구려를 쳐서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고구려를 멸말시켰다. ≪唐書 李勣傳≫

26)읍루(挹婁) : 고조선 시대에 만주(滿州) 지방에서 살던 부족(部族). 뒤에 숙신(肅愼), 말갈(靺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다. ≪後漢書 東夷列傳≫

27)검모잠(劍牟岑) : 고구려의 애국자. 벼슬은 대형(大兄) 보장왕 27년(668)에 나라가 망하자 신라 문무왕10년 (670)에 유민을 규합하여 당병을 물리치고 신라로 가는 도중, 보장왕의 외손자 안승(安勝)을 만나 왕으로 세웠었는데, 뒤에 알력이 생겨 안승에게 피살되었다. ≪三國史記≫

28)식읍(食邑) : 국가에서 종실(宗室)과 공신에게 내려주어 거기서 나오는 조세를 받아 쓰게 한 고을인데, 체지(采地)라고도 한다. <사기 전>에 ꡒ 무성(武成)의 6천호를 식읍으로 하사한다.“ 하였다.

29)사시(私諡) : 친지나 제자들이 지어 주는 시호. 지위가 낮아 임금에게 시호를 받지 못한 덕망 높은 선비들이 가졌다.

30)육상(六尙) : 임금의 일용품 일체를 제공하는 여섯 가지 부서. 송(宋)나라는 상식(尙食)․상약(尙藥)․상의(尙衣)․상사(尙舍)․상온(尙醞)․상연(尙輦)을 두었는데, 이를 육상이라 불렀다.《文獻通考 職宮考》

31)소의 간식(宵衣旰食) : 임금이 정사에 부지런하여 일찍 일어나고 저녁 늦게 식사한다는 뜻. ꡔ당서ꡕ(唐書) 유분전(劉賁傳)에 “어진 사람을 임용하고 자신을 수양하며 일찍 일어나고 늦게 식사한다.·······”하였다.

32)천보(天保) : ꡔ시경ꡕ의 편명. 내용은 신하가 임금의 복을 빌어주며 부르는 노래. 대략 다음과 같다. “하나님이 우리 임금 안정시키기를 매우 공고히 하셨구나! 우리 임금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다 좋게 하셨으니 무슨 복인들 내려 주지 않으랴·······”

33)아유가빈(我有嘉賓) : ꡔ시경ꡕ 녹명편(鹿鳴篇)의 한 구절. 녹명편은 잔치를 베풀어 주며 부르는 노래인데, 대략에 “화목하게 우는 사슴이여! 들에서 풀을 먹고 있구나! 나는 아름다운 손님을 위하여 음악을 연주하노라·······” 하였다.

34)군신(君臣)이 같이 즐기는 음악 : 치소(藢招)와 각소(角招)의 음률로 된 노래인데, 그 내용은 “임금의 잘못을 간(諫)하는 것이 무어 잘못이겠는가! 임금에게 간하는 사람은 임금을 좋아하는 신하이다.” 하였다.≪孟子 梁惠王下≫

35)문신(文身) : 살갗을 바늘로 찔러 먹물이나 기타 물감으로 글씨・그림 무늬를 들이는 것

36)이마에 교차한다[雕題交趾] : 오랑캐의 풍속을 말한다. ꡔ예기ꡕ(禮記) 왕제(王制)에 동이(東夷)는 단발문신(斷髮文身)이라 했고, 남만(南蠻)은 조제교지(雕題交趾)라 하였다.

37)관복도(冠服圖) : 관복의 만듦새를 그린 그림. 이 그림은 지금 전해오지 않는다.

38)넓은 허리띠[勒巾] : 원래는 늑백(勒帛)으로 넓은 띠이다. 이 실물이 일본 정창원(正倉院)에 남아있다. 넓은 띠로 뒤에는 끈으로 매게 되어 있다.

39)홍로경(鴻矑卿) : 홍로(鴻矑)는 홍로시(鴻矑寺)의 약칭으로 당대의 관청이름. 외국에 관한 사무(事務)와 조공(朝貢) 등의 일을 맡아 보던 곳이고, 경(卿)은 그 사무를 관장하는 (官吏)를 말한다.

40)독부(督府) : 총대장(總大將)이 거처하는 마을

41)도사(道使) : 지금의 도지사와 같은 직책. 고려는 성종 2년에 전국에 12목을 두었다가, 성종 14년에 전국을 10도(道)로 나누고, 12주(州)에 절도사를 두었다가 현종 때에 오도・양계로 나누고, 그 밑에 4도호부 8목을 두었다.

42)금어(金魚) : 황금으로 고기 모양과 같이 만든 대(袋). 당대(唐代) 3품관 이상이 차던 것.

43)좌・우승(左右丞) : 상서도성(尙書都省)의 정 3품 벼슬

44)육상서(六尙書) : 상서이부(尙書吏部)․상서병부․상서호부․상서형부․상서예부․상서공부이며 정 3품벼슬이다.

45)어선금대(御仙金帶) : 송(宋) 대에 문신(文臣)이 띠던 띠의 이름

46)도지병마(都知兵馬) : 문종 때에 창립된 국방기관으로, 중앙과 지방으로 나누어 중앙은 문하시중․서령 상서령이 겸임하고, 현지에서는 도병마사(都兵馬使)․지병마사(知兵馬使)․부사(副詞) 등으로 나뉘었다.

47)사부호사(四部護使) : 군사적 주요 도시인 안북(安北)․안남(安南)․안동(安東)․안변(安邊)에 도호부를 두고 도호부사(都護府使)라는 관을 두었다.

48)육시경이(六寺卿貳) : 상서육부(尙書六部) 소관 하의 제시(諸寺), 즉 태상시(太常寺)․위위시(衛尉寺)․태복시(太僕寺)․예빈시(禮賓寺)․대부시(大府寺)․사농시(司農寺)․사재시(司宰寺) 등이 있다.

49)주현(州縣)의 영위(令尉) : 주현의 으뜸 벼슬아치. 《高麗史 卷七五》에, “문종 18년 8월에 모든 주(州)․목(牧)의 자사(刺史)․통판(通判)과 현(縣)의 영위(令尉)․장리(長吏) 등의 실적과 백성의 고락을 조사하기 위하여 관리를 보내어 조사했다.” 하였다.

50)세록(世祿) : 대대로 이어 받는 세습의 국록(國錄). 《孟子 文公上》에 “대대로 국록을 이어 받게 하는 것은 등 나라가 이미 실시하고 있다.” 하였다.

51)육위(六衛) : 좌우위(左右衛)․신호위(神虎衛)․흥위위(興威衛)․금오위(金吾衛)․천우위(千牛衛)․감문위(監門衛)인데 고려 태조 2년(919)에 두었다. 목종(穆宗)시대에 군영을 만들어 직원과 장수를 갖추었고, 이 때(1002) 이미 이군(二軍)을 육위의 위에 두었다. 이 이군은 응양군(鷹揚軍), 용호군(龍虎軍)이다.

52)친위군(親衛軍) : 왕의 친위부대로서 둘이 있으니, 이를 이군(二軍)이라 한다. 이 이군은 바로 응양군(鷹揚軍)․용호군(龍虎軍)이다.

53)금화곡각(金花曲脚) : 《高麗史 卷七四》에“ 충목왕 3년(1347) 10월 김 인관(金仁琯)이 급제하자 왕이 말과 붉은 신을 하사하고 금화모를 쓰도록 허락하였다.” 한다.

54)곡개(曲蓋) : 수레 위에 받쳐 햇빛을 막는 것. 곡직화개(曲直華蓋)란 것도 있고, 청곡병대산(靑曲柄大傘)이라는 것도 있다.

55)표미(豹尾) : 표범 꼬리를 단 의장. 최근 발견된 당대의 벽화에 이 표미의 그림이 있다. 이 벽화에는 칼집도 표미로 장식하고 있다.

56)구장(毬杖) : 격구할 때 쓰는 공채.

57)향민제도[鄕民之制] : 중국 고대의 지방제도. 주제(周制)는 5가(家)를 비(比), 5비를 여(閭), 5여를 족(族), 5족을 당(黨), 5당을 주(州), 5주를 향(鄕)이라 하여, 향은 1만 2천 5백 가였다. 이후 춘추 시대의 제(齊)와 진․한(秦漢) 시대에도 이와 비슷한 제도가 있었다.

58)군사를 제어하는 방략: 상장군(上將軍)․대장군(大將軍)․장군(將軍)․중랑장(中郞將)․별장(別將)․산원(散員)․위(尉)․대정(隊正) 등으로 편성된다. 《高麗史 百官志》

59)봉액(逢掖) : 옛날 선비가 입는 녚이 넓게 트이고 소매가 큰 도포(道袍)의 한가지. 봉의(逢衣).

60)용호좌우친위기두(龍虎左右親衛旗頭) : 용호좌우친위는 용호군(龍虎軍)을 말하는 것으로서, ꡔ고려사ꡕ 동상에 ‘용호군에는 두 영군(領軍)이 있고, 상장군․대장군 각 1인을 두었으며, 매영에는 장군․중랑장․낭장․별장․산원․위․대정을 두었다’ 하였다. 기두는 사기자(司旗者) 즉 군기를 맡은 사람. 고려 때의 중앙군은 2군 6위(二軍六衛) 체제인데, 2군인 응양군(鷹揚軍)․용호군(龍虎軍)은 왕의 친위군이며, 6위 가운데 좌우위(左右衛)․신호위(神虎衛)․흥위(興威衛)의 3위는 수도 개경의 수비와 경수(更戍)를 담당하고, 금오위(金吾衛)는 경찰, 천우위(千牛衛)는 의장(儀仗), 감문위(監門衛)는 궁성 안팍 여러 문(門)의 수위를 담당하였다.

61)제(齊) 나라 영녕(永寧) : 제는 중국 남북조 시대의 남제. 영명(永明)의 잘못. ꡔ남제서ꡕ(南齊書) 권 58 동남이열전(東南夷列傳) 고려조에 이 기사가 보인다. 영명은 남제 무제(武帝)의 연호(483∼493).

62)왕 융(王融) : 중국 남제 때 사람. 자는 원장(元長). 벼슬은 중서랑에 이르고 문사(文辭)를 민첩하게 잘하여 창졸간에 글을 지어도 모두 공교하였다 한다.《南齊書 卷四七》

63)삼절(三節) : 정사・부사 이외의 관원들을 상・중・하 3 절로 나눈다.

64)범엽서(范曄書) : 범 엽은 남조(南朝) 송(宋)나라 사람. 자는 울종(蔚宗). 널리 경사(經史)를 섭렵하고 글을 잘하였다. 문제(文帝) 원가(元嘉 424-453) 초에 여러 사가의 후한(後漢)의 사서(史書)를 정리하여 다시 새로운 ꡔ후한서ꡕ를 완성. 여기 인용된 기사는 동서(同書) 동이열전(東夷列傳)이다.

65)무거(武車)는.......맨다 : 이는 「예기」 곡례펀(曲禮篇)에 보이는데, 주(注)에 “무거는 위무를 숭 상하므로 꽃처럼 펴고, 덕의 아름다움은 속에 있는 것이므로 깃대에 잡아 매는 것이다.” [武車尙威武 故舒散若花 德美在內 故압기於竿] 하였다.

66)새미도.......만든다 : 「주례」 춘관(春官) 사상(司常)에 보인다.

67)진무(眞武) : 즉 현무(玄武). 송(宋) 상부(祥符 1008∼1016) 연간에 왕실선대(先代)의 이름을 휘하여 ‘현무를 진무’로 고친 것.

68)대금향구(大金香毬) : 도금한 향구로 혼천의 (渾天儀)와 같다. 그 가운데 3층으로 된 빗장이 끊임없이 움직인다.

69)압승(壓勝) : 사악한 기를 꺾어 힘을 못 쓰게 만든다는 방술의 일종.

70)영성(靈星) : 천전성(天田星)이라고도 하는데 농사를 맡아 보는 것으로 되어 있다. 중국에서도 한초(漢初)에 영성을 제사한 기록이 사기(史記) 봉선서(封禪書)에 보인다.

71)귀신.......제사한다 : 이상은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 고구려 조의 기사를 추린 것이다.

72)복원관(福源觀) : 고려에서는 복원궁(福源宮)으로 불렸다. 그 건립 연대는, 「송사」(宋史)4백 87권 고려전에는 대관(大觀) 연간(1107∼1110)으로 되어 있고, 「고려도경」에서는 정화(政和) 연간(1111∼1117)으로 되어 있으며, 「고려사」에는 예종(睿宗) 15년(1120) 조에 친초(親醮)한 기록이 처음 나와,지금으로서는 확정짓기 어렵다. 그러나 고려 예종 치하에 세워진 것만은 틀림없다. 고려 측의 복원궁에 관련된 참고할 만한 기록으로는 고려 중기의 문인 임춘(林椿)이 쓴 「일재기」(逸齋記)가 있다. 《西河先生集 卷五, 東文選 卷六四》에 이 중약(李仲若)의 건의에 따른 복원궁의 건립 경위가 비교적 소상하게 다루어져 있다.

73)부석지문(敷錫之門) : ‘부석’은 널리 펴내어 뭇사람에게 준다는 뜻. 《尙書住疏 卷十二 洪範敷錫厥庶民 疏》

74)삼청상(三淸像) : 도교에서 말하는 옥청(玉淸)․상청(上淸)․태청(太淸)의 삼청경(三淸境)의 그림. 삼청경는 도교의 최고 신인 원시천존(元始天尊)이 있는 대라천(大羅天) 바로 아래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각각 중앙과 좌우의 세 궁전이 있고, 각 궁전에는 현세의 궁정 조직같이 선왕(仙王)․선공(仙公)․선경(仙卿)․선백(仙伯)․선대부(仙大夫)가 있으며, 또 이러한 선관(仙官)들과 별도로 독립해서 태상노군천사(太上老君天師)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태상노군은 도교에서 노자(老子)를 교조(敎祖)로 받들어서 존칭한 것으로, 그의 존호(尊號)는 현현황제(玄玄皇帝)등 여러가지 있는데 혼원황제(混元皇帝)도 그 중의 하나다. 결국 상청경의 그림을 그렸는데 그 가운데에 노자의 화상을 부각시켜 그린 것이고 그 노자의 수염 빛깔이 감색이었다는 것이다. 《雲급七籤 卷二 太上老君開天經, 同 卷三 道校 三洞宗元》

75)성조(聖朝).........진성(眞聖) : 성조는 당시의 북송 황제 즉 휘종(徽宗)을 말하며 그림을 잘 그렸다. 진성(眞聖)은 노자의 별칭이다.

76)산문각(山門閣) : 상부가 누각으로 된 산문. 산문은 불교 사원으로 들어가는 최초의 문을 말한다.

77)채경(蔡京) : 1047∼1126. 자는 원장(元長), 선유(仙遊) 사람으로 그 서실(書室)을 육학당(六鶴堂)이라 했다. 그는 왕 안석(王 安石)의 신법을 부활시키는 등 국정을 장악하고 태사(太師)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네 차례 파출되었다가 네 차례 국정을 장악한 인물로, 후에 정강(靖康)의 변란의 책임을 지고 몰려 났다. 《宋史 姦臣傳》

78)제석(帝釋) : 불가의 설화에 나오는 도리천(忉利天)의 주재자로, 수미산(須彌山) 정상의 선견성(善見城)에 살면서 불법을 옹호하고 아수라(阿修羅)를 쳐몰아 내는 것으로 되어있다.그 범명(梵名)은 석가제환인타라(釋迦提桓因陀羅 Sakra devanam Indrah 샤크라)임.

79)무량수전(無量壽殿) : 무량수불 즉 아미타불(阿彌陀佛 Amitabha)을 봉안한 불전.

80)능인(能仁) : 석존(釋尊)의 별칭. (Sakya-muni를 의역(意譯)한 것으로 전해진다. 송 휘종의 글씨로 액자를 만들어서 걸었던 것이다.

81)선법당(善法堂) : 본래 제석천(帝釋天)에 있는 궁전 이름. 제천(諸天)에서 그 곳에 모여 사람의 선악을 논의한다는 것이다. Sudharman.

82)관음(觀音) :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Avaloki-tesvara). 세상의 중생이 구원을 청하는 소리를 들으면 곧 구원해 준다는 것으로, 구원을 청하는 양상이 천태만상인 데 따르느라 관세음보살도 천변만화한다고 한다.

83)약사(藥師) : 약사여래(藥師如來).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고 고뇌를 구제해 주는 부처로 알려진다. Bhaisajyaguru

84)조사상(祖師像) : 조사의 상. 조사는 선종(禪宗)에서는 달마대사(達磨大師)를 말함.

85)지장왕(地藏王) :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말함. Ksitigarbha. 왼손에 보주(寶珠), 오른손에 석장(錫杖)을 들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86)재궁(齋宮) : 나라의 태묘제(太廟祭)에 재(齋)를 드리는 곳.

87)금선(金仙) : 불타(佛陀)의 별칭. 문수는 문수사리보살(文殊師利菩薩 Manjunri), 부처의 지혜를 나타내는 보살로 알려진다. 보현은 보현보살(普賢菩薩 Samantabhadra)로, 문수보살과 함께 석가불 곁에 시립하여 부처의 이․정․행(理定行)의 덕을 맡아 보는 것으로 되어 있다.

88)협저불상(夾紵佛像) : 겹으로 된 모시에 그린 불상.

89)유규(劉逵) : 자는 공로(公路). 수현(隨縣)사람으로, 숭녕(崇寧) 2년(고려 숙종 8, 1103)6월에 호부 시랑(戶部侍郞)으로 국신사가 되어 부사 급사중 오 식(吳拭)과 함께 고려에 다녀갔다. 이 때 의관(醫官) 4인을 대동해 와 고려에서 중국 의술을 교습시켰다. 규는 채 경(蔡京)에 아부하여 중서 시랑(中書侍郞)을 지내다 몇 차례의 부침 끝에 지항주(知杭州)․자정전학사(資政殿學士)까지 지냈다.《宋史 卷三五一》

90)상국사(相國寺) : 하남성 개봉현 동북에 있는 절로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에 따르면 매월 5차례씩 시장으로 개방하였다.

91)장작감(將作監) : 토목이나 영선 등의 일을 맡아 보는 관청. 후에 선공감(繕工監) 등으로 개칭되었다.

92)이기국신사부일행(以祈國信使副一行) : ‘국신사와 부사 일행이 무사하기를 빌기 위하여’ 의 뜻.

93)글안(契丹)이...........다가오자 : 고려 현종(顯宗) 2년(1011)에 글안이 침입하여 송도에 들어와서 태묘․궁궐․민가를 분탕하여 왕이 각지로 파천해다니기까지 하였다. 《高麗史 卷四》

94)팽려(彭려) : 지금의 강서성(江西省)에 있는 파양호(파陽湖). 팽려택(彭려澤)이라고도 한다. 팽려호의 관련된 이적의 고사는 미상.

95)혼원시조(混元始祖) : 노자(老子). 당(唐)이 창업하자, 노자가 동성(同姓)인 이씨(李氏)이므로 노자를 시조로 받들었다. 당 고종(唐高宗)은 건봉(乾封) 원년(666)에 노자를 태상현원황제(太上玄元皇帝)라 추호(追號)하였고, 현종(玄宗)은 천보(天寶) 원년(742)에 현원묘(玄元廟)를 설치하여 규모를 갖추어 조자를 제사하였고, 그 이듬해에는 대성조(大聖祖)라 가호(加號)하였다. 동 8 년(749)에는 대도현원황제(大道玄元皇帝)라 칭하고, 동 13년(759)에는 다시 대성조 고상대도금궐현원천황대제(大聖祖高上大道金闕玄元天皇帝)라 칭했다. 북송 때에 와서 진종(眞宗)은 대중상부(大中祥符) 6년(1013)에 노자를 태상노군혼원상덕황제(太上老君混元上德皇帝)라 칭했다.<各帝王本紀>

96)현미(玄微)를 풀이해.......것이다. : 이 일은 고구려 영류왕(榮留王) 7∼8 양년(624∼625)에 걸쳐 있었던 일로 전해진다. <三國遺事 寶藏泰老 三國史記 榮留王本記>

97)교법(敎法)에 통달한 .......하였다 : ‘고려사’ 10권 예종 5년 5월 조에, 왕 양(王襄)과 장 방창(張邦昌)을 정부사로 한 북송의 사절이 왔다는 기록은 있으나, 도사 2인을 보내온 일은 적혀 있지 않다. ‘송사’(宋史)의 휘종본기(徽宗本紀) 당해년 및 동 고려전에도 언급이 없다.

98)우(우)가 나라를 다스렸을......하였다. : 예종 자신이 도록(圖錄)을 받고 불교 대신 도교를 국가의 종교로 올려놓겠다는 생각이 간절했었다는 말은, 예종의 도교에 대한 신심이 독실했던것에 비추어 볼 때, 당시 고려 상하에 나돌고 있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한편 또 서 궁의 이러한 말은 도교 황제인 송 휘종에 대한 일종의 아유적인 언사로 풀이될 수도 있다. 그런데 예종이 훙거하자 그의 장자인 인종이 이 자겸(李資謙)의 힘으로 곧 즉위했는데, 그 해 12월에 예종의 도교 정책과 관련이 깊었던 한 안인(韓安仁)과 이 중약(李仲若)은 왕권을 둘러 싼 갈등에 말려들어 피살되었다. 니러한 일로 미루어볼 때 예종 생전의 도교로의 경도(傾到)가 심상한 것이 아니었으리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99)청량법안(淸凉法眼) : 중국 청량사(淸凉寺)의 법안 문익(法眼文益)에 의해 전해진 선종(禪宗)의 익파. 청량사는 지금의 남경시 남쪽에 있는 이른바 건업청량사(建業淸凉寺)다. 법안종은 화엄초지(華嚴初地) 중의 육상의(六相義)를 들어 삼계유심(三界唯心)과 만법유식(萬法唯識)을 종지(宗旨)로 삼는 것으로 알려지는데, 선가의 육대조(六代祖) 혜능대사(慧能大師)의 제자 행사(行思)에서 시작되어, 5전하여 설봉(雪峯)에 와 다시 현사(玄沙)와 나한(羅漢)을 거쳐 건업 청량사의 법안 문익에게 전해진 것으로 되어 있다. 서궁은 이 법안이 우리 땅에 전파되어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 것으로 말하고 있다.

100)정법안장(正法眼藏) : 선문(禪門)에서 바른 세계를 보는 방법. 즉 깨달음의 진실을 의미하는 말로 쓰이는데, 석존이 깨닥은 무상의 정법(正法)을 가리킨다.

101)꽃을 들어.........있었다 : 이것이 이른바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의 염화미소(염華微笑)의 고사다. 석가가 영취산(靈鷲山)에서 설법할 때 대범천왕(大梵天王)한테서 받은 금바라화를 따서 여러 사람들에게 보였더니 모두 그 뜻을 터득하지 못하였는데, 오직 가섭(迦葉)만이 깨닥아 미소를 지어 석가는 결국 가섭에게 불교의 진리를 전수했다는 것이다. 이른바 이심전심의 묘처를 설명한 것이다. <五燈會元碧巖錄 序>

102)양(羊)을 남기기를 ........않았거든 : 자공(子貢)이 새닥을 고하는 데 바치는 희생용(犧牲用)의 양을 없애려 하자, 공자(孔子)가 그에게, ‘너는 그 양을 아끼지만 나는 그 예를 아낀다.’라고 말했다.<論語>

103)시(詩)를 설명.......하는데: 맹자(孟子)는 함 구몽(咸丘蒙)의 질문에 대답한 말 가운데서, ‘글자로 말을 해치지 않고 말로 뜻을 해치지도 않는다. 읽는 사람의 마음으로 시의 뜻을 맞아 들인다면 그것이 바로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孟子 萬章上>

104)반야(般若) : 반야바라밀다심경 (般若波羅密多心經 Parjna-paramita-hrdaya sutra). ‘마하'(摩何) 두 자를 위에 붙이기도 하고 ‘반야경’으로 약칭하기도 한다. 초기 대승불교 시대에 성립한 경전으로, 탁월한 지혜로 최고의 경지를 풀어낸 경문으로 전해지고 각 종파에서 널리 받들어진다.

105)송밀(宋密)이 자연도에서 죽었는데 : 원풍 연간에 북송에서 고령에 사절을 세 차례 보냈는데 송 밀이 어느 때에 따라왔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106)강유(綱維) : 절 안을 통찰하고 불사(佛事)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는 자로, 사주(寺主).상좌(上座).도유나(都維那) 3인이 있어 그것을 삼강(三綱)이라고도 한다. 고려의 국사는 이러한 중국의 강유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107)산수납가사(山水衲袈裟) : 송대(宋代) 선승(禪僧)의 옷. 능직(陵織) 비단으로 만들고, 여기에 꽃무늬를 수놓았다. 값이 비싼 것이라 한다.<行事少資特記 下 三之一>

108)편삼(偏衫) :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겨드랑으로 걸치는 옷과,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으로 걸치는 옷을 합쳐 만든 법의(法衣).

109)금발차(金跋遮) : 금색으로 만든 금강저(金剛杵), 불승이 번뇌 파쇄의 상징으로 손에 들고 있는 인도의고대 무기. 범어 Vajra의 음역으로 ‘발자라’로 쓰기도 한다. ‘발차’로 쓰는 것은 중국 송대에 그런 물건을 손에 들고 춤을 추는 발차곡(跋遮曲)이 있는 데서 연유된다.

110)오혁검리(烏革鈐履) : 검은 색 가죽으로 만든 조이개가 달린 신발.

111)율사(律師) : 지율사(持律師) 또는 율자(律者)라고도 하는데, 불교의 계율에 통달한 고승을 말한다. 중국에서는 또 도사 삼등 수행(修行)의 셋째를 율사라고도 했다.<唐六典 尙書禮部 祠部郞中員外郞>

112)자황첩상복전가사(紫黃貼相福田袈裟) : 자황색으로 몸에 꼭맞게 만든 밭고랑 줄무늬가 있는 가사.

113)성종(性宗) : 법성종(法性宗)의 약칭. 일체의 법상(法相)은 다 허망하다 하여 진성공적(眞性空寂)의 이치를 나타내 보이는 것을 주지(主旨)로 하는 종파. 삼중화상은 그 이법을 전습시킨다는 것이다.

114)아사리(阿射梨) : 범어 acarya 의 음역. 곧 스승이라는 뜻으로, 궤범사(軌範師)라고도 하는데, 교단의 교사 역할을 하는 자로, 아사리대덕은 덕이 높은 중이라는 뜻. 승직의 하나다.

115)괘의(掛衣) : 괘락(掛絡),괘락(掛洛),괘라(掛羅),괘자(掛子) 등의 별칭이 있는데, 선승(禪僧)이 평소에 사용하는 작은 약식 가사.

116)오조(五條) : 오조가사(五條袈裟antarvasa). 가로 다섯 줄무늬가 있는 천을 말라서 만든 가사. 본래는 내복이었으나 후에 옷 위에 걸쳐 입도록 되었다. 원내도행잡작의(院內道行雜作衣)라고도 한다.

117)사미비구(沙彌比丘) : 어린 중을 말함. 사미(Sramonera)는 자비지(慈悲地)에 안식한다는 것이 그 본 뜻이다.

118)수구(受具) : 구족계(具足戒)를 받음을 말함. 구족계는 정식 비구 또는 비구니가 되기 위해 비구는 2백 50계, 비구니는 5백계를 받는데 그것을 받으면 정식으로 교단에 들어간 것을 의미하게 된다.

119)마납(磨衲) : 고려 특산의 귀중한 직물로 만든 가사.<六祖壇經>

120)남자.......쉽게하여 : 우리 나라 여성사에서도 주목할 만한 구절이다. 조선조 때에 있어서의 여성의 지위는 송유(宋儒)의 처녀 숭배사상의 영향을 받아 여성의 처녀성(處女性)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여성은 중문 밖을 나가지 못하는 내외법(內外法)의 굴레 밑에 청상과부(靑孀寡婦)・소박녀(疏薄女) 등의 가형적 생활을 강요당한 것이다.

121)모자를 더 쓰고 : 문라건 위에 모자(帽子)를 더 쓴다 하였으니, 이는 아마 복두(僕頭)를 더 쓴 것으로 볼 수 있다.

122)영관(榮觀) : 이 전통은 조선조에도 3일간 거리를 돌아다니는 [三日遊街] 행사로 남아 있었다.

123)백저포[白釘袍] : 이 백저포에 대하여는 현재 동경(銅鏡)에 그림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림을 보년 두루마기 비슷하고, 하리에 넓은 띠를 띠고 있다.

124)복두소(服頭所) :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홍패(紅牌)를 받을 때 쓰는 관을 만드는 곳.

125)장작감(將作監) : 제시(諸詩)의 하나로 선공시(繕工詩)라고도 하며, 토목과 영선(營繕)을 맡았었다.

126)구리(句履) : 첨단에 장식이 있는 구형(矩形)의 신.

127)두건(頭巾) : 머리에 쓰는 건(巾)으로, 녹태책(鹿胎責)이라 하는 것인데, 4개의 띠가 달린 두건이다.

128)죽관(竹冠) : 삿갓을 말한다. 우량(雨量)이 많은 동남아.일본 에도 발달한 관모로서 그 제도가 일정치 않다.

129)십등관복(十等冠服)을 ..........본받아 : 고려는 처음에 광종(光宗) 때 후주(後周)의 제도를 들여 중국 복식을 입었으나 그 뒤 글안에서 변복을 들여오고, 분종 32년 6월에 송(宋) 신종(神宗)이 어의(御衣) 2벌을 사여하어 송과 교섭이 되었다. 의종(毅宗) 상정례(詳定禮)에 복식이 보이나, 여기에는 백관(百官)도 면류관을 쓴 것 같이 되어 있으니 이 점은 의심스럽다. 그러나 공복(公服). 상복(常服)은 송제를 입은 것 같다.

130)너울 : 너울은 본문에는 멱라(冪羅)로 되어 있다. 당대(唐代)에 중앙 아시아에서 당에 들어온 것으로, 신라 시대에 이를 하였느냐는 의심스럽다. 신라에서는 영포(領布)라고 하여 쇼올 같은 것은 걸친 듯하며, 이것이 일본에 건너가 비례(比禮)가 되었다. 고려 시대는 한창 유행하여 여자는 너울을 쓰고, 군(裙)을 입고, 말을 탔던 것 같다. 이 글에는 여자도 포(袍)를 닙어 남자의 옷과 같다고 하였으니, 전주 포 도항을 참조하기 바란다. 다만 최근 청주(淸州) 채씨묘(蔡氏墓)에서 발견된 조선 초의 여복(女服)에서 첩리(帖裏). 천익(天翼)이 보이니, 상의 하상(上衣 下裳)의 제도이어서 이는 원대의 질손(質孫)의 영향이므로, 이 전통이 중도에 중단되었음을 알 수 있다.

131)머리 정수리에 접어올리며 : 이 제도는 조선의 가리마(加里魔)의 제도로 혜원(蕙園) 풍속도에 나온다. 너울을 접너올려 머리 위에 책갑(冊匣)과 같이 올려 놓은 형태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고려 이래의 전통임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너울은 조선말까지 존속되었다.

132)붉은 깁으로 묶고.......꽃는다. : 이는 조선말의 사양머리 형식이다. 사양머이에는 도토락 당기를 달게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그런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신라 이래 사양머리형으로 틀어올렸다가 그 나머지는 피발(被髮) 그대로 위에 내려뜨린 것 같다. 또 이 머리가 긴 것이 미인의 조건이기도 하였다.

133)치마는...........있으니 : 이는 당시의 유행으로 특기할 만한 것이지만, 실지로 치마를 포개어 입었다기보다는 조선 때에도 있었듯이, 페티코우트와 같이 3단(段), 5단, 7단으로 치마의 아래 폭을 벌리게 하기 위하여 표상(表裳)안에 그렇게 입은 것 같기도 하나 미상이다.

134)추마계(墜馬繫) : 낭자가 한쪽으로 기울어진 머리. ,<후한書 梁夷傳>에 “수심에 잠긴 눈썹에 가는 허리, 흰 기운머리..........라” 하였다.

135)퇴결(堆結) : 상투의 형태. 원의로서는 머리를 뒤에 내려뜨려 방망이 모양으로 맺는다는 것이며, 중국에서는 남월(南越)의 풍속으로 되어 있다. 고구려 벽화에서 동이(東夷)의 풍습을 보면, 머리 정수리에 상투를 하고 있다. 백제는 머리를 양도(兩道)로 가르는데, 일본의 미두랑(美豆浪)이 그것이다.

136)서리[吏]를 뽑아 : 여기는 ‘뽑아’로 되어 있으나 향리(鄕吏 : 후세의 아전)는 원래는 그 지방의 호족(豪族)들이었다.

137)녹의(綠衣) : 송(宋) 나라의 포가 아니고, 고려의 백저포(白紵袍)가 아닌가 한다. 이 경우는 띠를 띠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녹백은 송에서 전래된 왕복(王服) 중에 이것이 보이니, 이는 중국제이고 백저포(白紵袍)의 띠는 고구려 이래 인습해 온 국속의 띠였을 것이다. 녹백의 경우는 앞이 넓고 뒤는 없는 장식용 띠로, 양 옆구리에서 3분의 1정도의 끈을 달아 매게 되어 있으니, 이 유물이 일본 정창원(正倉院)에 남아 있다.

138)붉은 깁의 소매 좁은 옷[紫羅穿衣] : 원래 자색(紫色)은 고귀한 색이라 하여 하급 관원은 입을 수 없게 되어 있으나, 「고려사」의물편(衣物篇)에 보면 시위하는 군사도 이 자의를 입는 경우가 있어 왕국의 권신들은 원래 입었던 것 같다.

139)각대(角帶) : 여기서 각대(角帶)라 하면, 수우각(水牛角)이나 우각(牛角) 등이 아니었을까 하거니와, 고증할 수는 없다.

140)조금 자라면 궁을 나간다 : 조선에 있어서도, 왕자(王子)라도 10세가 되면 궁중을 나가 따로 궁을 마련한다. 궁을 나가기 전 왕자와 같이 노는 반동을 궁밖에서 들여오는 경우가 있었다.

141)관혼상제(冠婚喪祭) : 관례와 혼례와 상례와 제례를 말한다. 이 제도가 완전히 시행된 것은 조선 태종 때, 「주자 가례」(朱子家禮)에 의하여 신칙(申飭)함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142)솔개가 파먹는 대로 놓아두되 : 이는 육체와 정신의 분리를 내세우는 불교의 영혼관에서 말미암은 일종의 장례법으로, 불교국 일본에서도 1세기 전에는 개천에 시체를 유기하고 신주만 모셔다가 절에 봉안하였다.

143)유품(流品) : 백관(百官)의 입사하고 있는 자 중에서 품계가 같은 자를 말한다.

144)좌탑(坐榻) : 이는 평상으로 고구려의 벽화에도 이미 보이는 바다. 이 평상은 침상(寢床)도 되니, 온돌이 적던 때는 판방(板房)에 이 평상을 놓고 방장(房帳)이나 병풍을 치고 살았다.

145)경동도(京東道) : 송대(宋代)의 변경(汴京)으로부터 산동성(山東省)․하남성(河南省)까지의 전역을 가리킨 것이다.

146)안독(按牘) : 공문서. 한 건의 서류를 말한다.

147)비결(批決) : 관부의 판결문. 조선의 경우는 공문서 끝에 판결문을 쓰고, 해당관이 수결(手決)을 하게 되어 있으니, 고려도 이러한 절차를 밟았을 것이다. 「고려도경」은 견문기이므로 실정을 모르고 기록한 대목도 많을 것이다.

148)열경(列卿) : 대개 정3품 이상의 벼슬을 말한다.

149)원랑(員郞) : 대개 정5품 벼슬인 낭중(郎中)과 정6품의 원외랑(員外郞)을 말한다.

150)사전(私田) : 고려의 토지 제도는 원칙적으로 국유제(國有制)였고, 당(唐)의 균전제(均田制)를 본따 과전(果田)을 근간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개인은 국가로부터 나누어 받은 토지에 대하여 수조권(收租權)만 가지고 있을 뿐 급여받은 토지를 처분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이 수조권이 국가에 있느냐 개인에게 있느냐에 따라 공전(公田)과 사전(私田)으로 구별되었다.

151)탕목전(湯沐田) : 공해 전시과(公廨 田柴科)에 내장전(內庄田)과 궁원전(宮院田)이 있었으니, 이 궁원전은 궁(宮)과 원(院), 즉 국왕의 비첩(妃妾)에게 지급되는 전지(田地)이다. ≪高麗史 卷二十九 忠烈王條≫

152)성 부근의 산은 ……아니한다. : 성 밑 10리에는 원래 묘지를 쓰지 못한다. 고려의 토지제도가 원칙적으로 국유이기 때문에 토지와 초채지(樵採地)를 내리어 전시과(田柴科)라하여 이를 통제하였다. 그러다가 충선왕(忠宣王)때에는 이 제도가 문란하여졌다. ≪高麗史 卷七十八≫

153)솔방[松房] : 솔방울의 사음(寫音)인 듯하다.

154)민절(閩浙) : 지금의 절강성(浙江省)과 복건성(福建省). 즉 중국의 남부 지방.

155)절장(節仗) : 사신 행차의 상․중․하 삼절(三節)의 계층에 따른 의장(儀仗). 여기서는 고려측의 각종 의장이 먼저 소상하게 다루어져 있다.

156)[춘추](春秋)……것이다 : [춘추]는 공자가 편술한 것으로 전해지는 춘추 시대의 간략한 편년사(編年史)로, 대의명분을 밝힌 미언오지(微言奧旨)가 담기어 있다 하여 유가에서는 주요한 경전의 하나로 받들었다. 여기서 왕이라고 한 것은 제후국에 대한 종주국으로서의 주(周)나라 왕을 말한다.

157)송(宋)이 ……없었다 : 송 태조(宋太祖)가 제위(帝位)에 오른 것은 고려 광종(光宗) 11년(960)이므로 노 윤적(路允迪) 일행이 고려에 사신으로 왔을 때까지는 송이 건국한 지 1백 60여 년 밖에 안 되었다. ‘송이 천하를 차지하고’ 운운하였으나 송이 건국한 후 북에서는 요(遼)와 금(金)이 일어나 북방의 땅을 차지해 왔고, 서남에서는 서하(西夏)가 버티고 있어서 송은 중국 대륙 전체를 차지하지 못하고 이들 이족이 세운 국가의 압박을 받았다. 당시 송이 고려에 접근한 것은 그 국제적 지위를 향상시키려는 노력의 일단이었다. 용성씨(容成氏)는 전설상의 중국 제왕인 황제(黃帝)의 사관(史官)으로 알려져 있으나, [장자]같은 도가서(道家書)에서는 한 시대를 태평하게 다스린 군왕으로 다루어지기도 한다.

158)예성항(禮城港) : 예성강의 항구. 예성간은 개성 서부에 있는 강으로,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고려와 송의 왕래는 이 강을 이용하였다. 《東國與地勝覽 卷四》

159)삼절(三節) : 정사・부사 이외의 관원들을 상・중・하 3 절로 나눈다.

160)벽란정(碧瀾亭) : 벽란도(碧瀾渡 : 예성강 웃줄기에 있음)에 있는 관사(館舍)로, 송사(宋使)가 상륙하여 처음 머무는 곳이었다. 여기서 40리를 가면 개성의 성안에 당도한다.《東國與地勝覽 卷四》

161)서교정(西郊亭) : 개성의 오정문(午正門) 밖에 있던 관사(館舍).

162)청의용호군(靑衣龍虎軍) : 청색 군복을 한 용호위(龍虎衛) 휘하의 군사를 말함. 용호위는 친위대 중 첫째 가는 군대.

163)천우위(千牛衛) : 역시 친위대의 하나. ‘천우’(千牛)는 임금의 몸을 방위하는 검의 이름.

164)관혁등장(貫革鐙杖) : 의장의 한가지. 금동으로 만든 등자를 긴 나무 자루에 자주색 끈으로 맨 것으로, ‘관혁’은 여기서는 나무자루를 가죽으로 쌌음을 말한다.

165)금오장위군(金吾仗衛軍) : 친위대의 하나.

166)의극(儀戟) : 의장용의 날이 갈라진 창.

167)화개(華蓋) : 장대 끝에 채색이 베풀어진 큰 우산을 단 의장물.

168)백희 소아(百戱小兒) : 백희를 상연하는 소아대. 백희는 각종 곡예 놀음.

169)공학군(控鶴軍) : 임금을 숙위(宿衛)하는 군사.

170)절각복두(折脚幞頭) : 두 날개가 없는 복두.

171)충대하절(充代下節) : ‘충대’는 대신 충임(充任)함을 말함. 본래 ‘하절’(下節)은 군졸들이었지만 그들 대신 고려 방문을 지원하는 인사들을 충용했다는 의미에서 충대하절이라는 말을 쓴 것이다.

172)성충랑(成忠郞) : 송의 무산신관(武散新官) 52계의 제 48계. 《宋史 職官九, 下同》

173)승신랑(承信郞) : 동상 제 51계.

174)등사랑(登仕郞) : 송(宋)의 문산관(文散官) 15계 중의 제 14계.

175)문학(文學) : 각 부(府)의 속관. 문학을 다루는 것이 그 직책이다.

176)한림 의학(翰林醫學) : 의관(醫官)인 의정(醫正)의 말계(末階).

177)진사(進士) : 중앙 고시에 합격한 자.

178)부위(副尉) : 송 무산관(武散官)의 하급 계위. 소무(昭武) 등 8종이 있다.

179)도금쌍록대 : 금색 사슴 한 쌍이 그려진 각대(角帶).

180)선무하절(宣武下節) : 선무군(宣武軍)의 병졸로 충당된 하절 인원.

181)명주(明州) :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근현(鄞縣)의 땅.

182)절(節) : 여기서는 각 개인에게 교부한 신분증 구실을 하는 나무 조각.

183)어선화금대(御仙花金帶) : 부사(副使) 부 묵경(傅墨卿)은 중서사인(中書舍人)이었으므로 그 신분에 맞는 대(帶)를 착용한 것이다. 송대의 대제(帶制)는 복잡하고 여러 차례 개정되었다. 《宋史 輿服志》

184)굴사(屈使) : 미상. 이 상옥(李相玉)씨의 주에는 ‘副使也’로 되어 있으나 취하지 않음. 제25권 ‘영조’(迎詔)의 동어(同語) 이주(李注)는 ‘屈’이 ‘衤屈’과 통용됨을 말하고 짧은 소매 옷을 입은 사람으로 보았다.

185)도할관(都轄官)……합문선찬사인(閤門宣贊舍人) : 도할관은 인마와 물건을 관리하는 총책임을 맡은 관원. 무익대부(武翼大夫)는 송의 무산신관(武散新官)의 제42계. 충주(忠州)는 지금의 광동성 수록현(廣東省綏淥縣). 자사는 지방장관. 함눈선찬사인은 합문사(閤門使)의 속관으로 선지(宣旨)를 전달하고 알현(謁見)을 돕고 하는 근시직(近侍職).

186)법록도관(法籙道官)……예주전교적(蘂珠殿校籍) : 법록도관은 도서(道書)를 관장하는 도교관원. 태허대부는 도사에게 주는 산관(散官). 예주전(蘂珠殿)은 도교의 천상궁전 이름. 교적은 관직명. 예주전교적은 도사에게 주는 관리.

187)벽허랑(碧虛郞)……응신전교적(凝神殿校籍) : 벽허랑은 도교의 산관. 응신전교적도 도교의 궁관 이름.

188)금방부(金方符) : 사각형으로 된 금색 도부(道符). 도교의 원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189)선교랑(宣敎郞) : 문산신관(文散新官)의 제 24계.

190)수선도순검(隨船都巡檢) : 도순검은 순검(巡檢)의 두목. 변경이나 연안 같은 경계가 필요한 지역 주현(州縣)의 경계를 맡아, 군사의 훈련과 순라․포도․관명의 시행 등을 맡은 관원.

191)관구주선(管句舟船) : 배를 관리 점검하는 직책.

192)어록지사(語錄指使) : 필요한 대화 내용을 지적 기록시키는 직책.

193)서장사신(書狀使臣) : 서장관의 속관을 말함.

194)인접(引接) : 면회를 안내하는 직책.

195)시사부행(侍使副行) : 부사의 승마 행진을 시중드는 마부 같은 일을 맡은 사람.

196)반관(伴官) : 사신을 접반하는 고려의 관원을 말함.

197)인진관(引進官) : 중요 외국 사신에 고나련된 제반 행사와 의식을 맡아 보는 관원. 인진관은 송에도 있었는데 객성(客省)에 속해 있었다. 《宋史 卷百六十六 客省引進史》

198)승직랑(承直郞) : 송 문산신관(文散新官)의 제 31계. 《同上 卷百六十九》

199)장사랑(將仕郞) : 송 문산관의 최종계인 제 15계. 《宋史 卷百六十五》

200)점후풍운관(占候風雲官) : 일기를 예점하는 관원.

201)서부금주(書符禁呪) : 부작․주문 등으로 질병이나 재액을 몰아내는 일을 맞아하는 사람.

202)도금보병대(塗金寶倂帶) : 도금대(塗金帶)의 일종으로 서각(犀角)으로 보병(寶甁 : 부처가 영수(靈水)를 담아 든 병의 형상)의 모양을 만든 장식을 붙인 것.

203)재공(宰孔)을 시켜......내렸을 때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희공(僖公) 9년 조에 나오는 고사. 문장도 약간의 생략은 있으나, 거의 좌씨전의 그것과 같다. 이 때의 제후(齊侯)는 당시 패권을 잡고 있던 환공(桓公)이다.

204)한급을 하사하셨으니 : 당하에서 하배하지 않고 층계를 올라와 배례함을 허락하였다는 뜻. <左傳僖公 9年 疏>

205)순천관(順天館) : 오정문(午正門)밖에 있던 영빈관(迎賓館)의 별칭. <東國與地勝覽 卷四 開城上 宮室>

206)설의관(說儀官) : 의식 절차를 상의 결정하는 관원. 여기서는 고려국왕이 그 임무를 주어 보낸 관원.

207)기거(起居) : 당시의 송나라 황제인 휘종의 안부를 묻는 일.

208)휼전(恤典) : 관원이 사망했을 때 주어지는 각종의 특전을 말함.

209)연향(燕饗) : 주연을 베풀어서 빈객을 향응함을 말함. 고대에는 그러한 연향을 베풀 때의 예법을 제정하여 상하의 정이 소통되기를 꾀하였다. <詩經 小雅 鹿嗚>

210)사적(私覿) : 사적(私的)인 입장에서 면회하는 의식으로 여기서는 북송의 사신일행을 국왕이 계급의 차례대로 접견하는 의식을 두고 한 말이다.

211)방자(榜子) : 송대에 백관(百官)이 면회할 때 사용한 수찰(手札)의 일종으로 거기에는 관직, 성명 등이 씌어 있다. 상절관은 그런 방자를 왕에게 내어 그들의 신분과 성명을 밝히고 왕의 접견에 응한다.

212)습의(襲衣) : 겉에 입는 웃옷. 「예기」(禮記) 옥조(玉藻) 소(疏)에 “갖옷위에 석의(裼衣)가 있고, 석의 위에 습의가 있고, 습의 위에 정복(正服)이 있다.”하였다.

213)배표(拜表) : 사신을 통해 고려의 국왕이 송 휘종에게 표문(表文)을 전달하는 의식

191) 관사(館舍) : 사전 일행을 유숙 또는 휴식시킨 각종 건물로, 여기서는 순천관에서의 정․부사 이하 여러 수행원의 유숙처 배치와 그 환경의 설명이 주요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215)자산(子産)이……않았다. : 정 자산(鄭子産)이 진 나라에 갔을 때의 일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양공(襄公) 31년 춘정월 계유 조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서 긍의 이 말은 동서(同書)의 기록을 요약한 것이다.

216)문공(文公) : 진 문공(晉文公). 만년에 진후(晉侯)가 되어 국세를 일으켜 제 환공의 뒤를 이어 제후의 맹주가 되었다. ≪史記 卷三九≫

217)압반(押班) : 백관이 착석하는 위차(位次)를 맡아보는 관원.

218)공두(栱斗) : 기둥 꼭대기에 물건을 받치도록 둥그렇게 만들어 붙인 것, 그런 형상의 것을 포개 올려서 지주 대신으로 한 것이다.

219)의관을……곳이다 : 송 휘종이 고려에 의관(醫官)을 보내 준 일이 있었다. ≪高麗史 睿宗十六年≫

220)장차(掌次)……한다 : 장차는 「주례」의 천관(天官)에 속하는 관원으로, 국군이 궁외에 출어할 때 그 경우에 따라 머물러 쉬는 장소를 법도에 맞게 마련하여 장막 등 시설을 하도록 지휘 감독하는 관원이다. 이 대목은 주례의 해당 부분을 요약 인용한 것이다. ≪周禮 卷六≫

221)은택이 사해에 ……절렁인다. : ‘은택 운운은 요소(蓼蕭) 소서(小序)에 나오는 말이며, 인용한 구절은 동 제 4 장 제 4∼5구.

222)송선(松扇) : 「패문운부」(佩文韻府)에 인용된 화계(畵繼)의 설명에 따르면, 이 서긍의 말과는 달리, 수류목(水柳木)의 껍질로 만든 것으로, 그 무늬가 소나무와 흡사해서 송선이라고 하였다.

223)꽃을 뚫고간 등 : 이것은 ‘穿花’를 옮긴 것으로, 본서 제 28 권 연대(燕臺) 조의 ‘白藤穿花’와 같은 뜻으로 취했다.

224)준이(尊彛) : 중국 고대의 예기(禮器)로 육준 육이(六尊六彛)를 말함. 희준(犧尊), 상준(象尊), 저준(箸尊), 호준(壺尊), 대준(大尊), 산준(山尊) 및 계이( 彛), 조이(鳥彛), 황이(黃彛), 호이(虎彛), 유이(維彛), 가이(가彛)가 그것이다.

225)보궤(簠簋) : 중국 고대의 예기(禮器). 보(簠)는 외방내원(外方內圓), 궤(簋)는 내원내방의 용기.

226)완점(莞簟) : 초석과 대자리. 역시 중국 고대의 예기(禮器). <<禮器 卷十 禮器>>

227)궤석( 席) : 팔받침과 자리로, 고대에 앉을 때 몸을 편하게 하기 위해 쓰이던 제구.

228)유사한.......많다. : 고려의 기물에는 중국의 고풍을 지니고 있는 것들이 많다는 이야기다.

229)독누(篤耨) : 향목(香木)으로, 그 수지( )를 향으로 쓴다. 독누향.

230)용뇌(龍腦) : 용뇌향목의 수간(樹幹)에서 추출하는 향인데, 그 종류가 많다.

231)전단(旃檀) : 열대산 향나무로, 그 수간을 저며서 피우면 좋은 향기를 풍긴다.

232)침수(沈水) : 침수향. 침향( )의 별칭임. 향목의 굳은 목심( ) 부분으로 물에 가라앉는 것이 향기가 짙은 것으로 알려져 왔다.

233)오화세(烏花洗) : 검은꽃 무늬가 있는 세수대야.

234)사적(私覿) : 사적(私的)인 입장에서 면회하는 의식으로 여기서는 북송의 사신일행을 국왕이 계급의 차례대로 접견하는 의식을 두고 한 말이다.

235)면약호(面藥壺) : 안면에 바르는 약물을 넣는 병. 면약을 바르면 추위와 더위를 막는다고 한다.

236)요복야(幼僕射) : 당시 고려에서 쓰이던 우리 말을 취음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지금으로서는 짐작이 가지 않는다.

237)보제사(普濟寺) : 개경성 안의 중앙부에 있던 불사로, 후에는 연복사(演福寺)로 개칭하였다. <<東國輿地勝覽 卷四 開城府上>>

238)갑술년주.....있다 : 갑술년은 고려 선종(선종) 11년(1094), 이 때에는 요(遼)의 세력이 퍽 강성했었다.

239)납다(蠟茶) : 중국 건주(建州)에서 생산되는 차로 일명 납면다(蠟面茶). 두가지 설이 있으니 차잎을 떡같이 굳혀서 그 표면에 밀을 발랐다 해서 납차 또는 납면차라고 한다는 것이 하나이고, 이 차를 끓는 물에 넣으면 젖 같은 기름이 뜨는데 그것이 녹인 밀같다 해서 납차라고 한다는 것이 다른 한가지 설이다.

240)용봉사단(龍鳳賜團) : 북송 황제가 내린 용봉다(龍鳳茶). 차잎을 둥그런 떡덩어리같이 만들어 용과 봉새의 무늬를 새긴 틀에 넣어 그 무늬를 찍어낸 것으로, 송 인종(仁宗)때부터 좋은 차의 질을 확보하기 위해 궁중의 북원(北苑)에서 제조시켰다. 당시에는 최상품의 차로 꼽혔다.

241)금화오잔(金花烏盞) : 금색 꽃 무늬가 있는 검은 색의 찻잔.

242)비색소구(飛色小甌) : 비취색을 낸 자기로 만든 차 마시는 작은 그릇. 키가 낮은 사발 형태의 것으로, 고대에는 그런 그릇으로 차를 마셨다.

243)은로탕정(銀爐湯鼎) : 은으로 만든 화로와 찻물을 끓이는 세발솥.

244)와준(瓦尊) : 질그릇으로 만든 술병

245)양온(良醞) : 본래 맛있는 술이라는 뜻인데, 또 술에 관한 일을 다루는 관서명으로도 쓰였다. 고려에도 양온서(良醞署)가 있었다. 왕이 마시는 술을 양온이라고 한 것은 양온서에서 감독 양조한 술이라는 뜻이 붙여진 것이라 짐작된다.

246)좌고(左庫) : 양온서에 좌고와 우고가 있었는데, 왕이 마시는 술은 좌고에서 맡았었다.

247)법주(法酒) : 법칙에 맞춰서 빚은 술을 말함. 송대에는 법주고(法酒庫)라는 관서도 있었다.

248)정기제도(定器制度) : 중국의 일정한 형태의 기물을 만드는 법칙을 말한 것이다.

249)월주(越州) : 지금의 절강성 소흥현(浙江省紹興縣)

250)고비색(古秘色) : 글자 그대로의 뜻으로 전부터 전해진 자기의 신비한 빛깔. 청색 계통.

251)여주(汝州) : 지금의 중국 하남성 임여현(河南省臨汝縣)

252)신요기(新窯器) : 새로 개발된 도요에서 구워낸 기물이라는 뜻. 당시 중국에서도 고려자기와 비슷한 빛깔의 자기를 개발한 지가 오래되지 않았던 것이다.

253)대체로 유사하다. : 산예출향 같은 고려자기는 당시 중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특이한 것이었음을 뜻하는 말.

254)식조(食罩) : 상덮개.

255)지응(祗應) : 심부름으로 뛰어다니는 관원, 지후(祗候)라고도 한다.

256)바람이 물위를 ...것이다 : 이것은 「역경」(易經) 환괘(煥卦)의 괘사(卦辭). 선박의 이용은 그 이치를 환괘해서 취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257)순선(巡船) : 해상을 순찰 경계하는 배. 순라선(巡邏船)

258)접반(接伴)....등 : 접반이하 네 명칭은 탑승한 관원의 기명. 선배(先排)는 앞에서 인도하는 직책. 공주(公廚)는 취사를 관장하는 직책

259)자연주紫燕洲 : 자연도. 인천 앞바다에 있다.

260)산해경(山海經)...하였고 : 산해경은 중국고대의 지리서로, 내용은 허황 기괴하여 신화 내지는 소설의 성격을 띤 것이다. 지금 전해지는 것은 18권, 해추(海鰌)의 이야기는 지금 전해지는 「산해경」에는 보이지 않고 역 도원역道元의 「수경주」(水經註)에 보인다. 그것에 따르면, 해추어(海鰌魚)는 길이가 수천리나 되고 해저(海底)에서 혈거(穴居)하는데, 굴로 들어가면 바닷물이 밀물이 되고 굴에서 나오면 밀물이 올라가는데 그것이 굴을 드나드는데 일정한 절도가 있기 때문에 조수에 시간이 있게 되는 것이라 한다.

261)신룡보(神龍寶) : 신이(神異)한 용의 도력(道力)이라는 뜻. 불서의 어디에 이 고사가 있는지는 미상.

262)노 조(盧肇) : 당대인(唐代人)으로 자는 자발(子發), 회창(會昌 : 절강성 영가현) 사람. 그의 글은 「전당문」(全唐文) 제768권 참조.

263)합삭(合朔) : 해와 달이 만나는 합삭은 대략 매월 음력 초하루 전후에 일어난다.

264)섬(苫) : 서(嶼)보다 작으면서 초목이 있는 것을 섬이라고 한다는 어원의 근거는 미상.

265)능허치원안제신주(凌虛致遠安濟神舟) : 허공을 질러 먼 곳에 까지 편안하게 건네주는 신령한 배라는 뜻.

266)영비순제신주(靈飛順濟神舟) : 영특하게 날아가 순조롭게 건네주는 신성한 배라는 뜻.

267)희풍(熙豊)...것이다. : 휘종(徽宗)은 신종의 제11자로 그의 형 철종(哲宗 : 신종의 제6자)의 뒤를 이어서 제위에 올랐다.

268)정신이섭회원강제신주(鼎新利涉懷遠康濟神舟) : 옛 제도를 혁신하여 항해에 편리하게 하여 먼 고장을 회유하도록 편안하게 건네주는 신령한 배라는 뜻.

269)순류안일통제신주(循流安逸通濟神舟) : 흐름에 따라 안일하게 두루 건네주는 신령한 배라는 뜻.

270)양절(兩浙) : 송의 노명(路名)으로, 지금의 강소성(江蘇省)의 일부와 절강성(浙江省) 전역을 포괄하고 그 관서는 지금의 절강성 항주(抗州)에 있었다.

271)명주(明州) : 주명(州名)으로, 지금의 절강성 근현(근縣)의 땅.

272)문(門) : 항구 앞에 있는 산과 산 사이의 수로를 문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273)야호범(野狐颿) : 야호는 들여우, 기만과 농간이 심하므로, 풍향을 운행방향에 유리하도록 조정하는데 쓰인다 하여 그런 돛을 야호범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274)오량(五兩) : 닭털을 장대 끝에 매어 풍향을 알아보는 제구로, 본래는 초(楚) 지방의 방언이었다.

275)초보산(招寶山) : 지금의 절강성 진해현(鎭海縣) 동북부에 있는데, 원래는 후도산(候濤山)이라고 하였으나 외국 선박이 중국에 들어가는 경우 그 곳에 정박하는 것이 항례가 되어 산명을 그렇게 고쳤다고 전해진다.

276)사명(四明) : 지금의 절강성의 근현(근縣) 서남 여요현(餘姚縣) 남부에 위치한 산.

277)공위대부....직예사전 : 공위대부는 송의 무산신관(武散新官) 제12계. 상주(相州)는 주명(州名)으로 지금의 하남성 안양현(安陽縣)의 땅. 내시성(內侍省)에 입내(入內)하여 예사전(睿思殿)의 수직관(守直官)으로 근무한 것이다.

278)정해현(定海縣) : 송대의 정해현은 지금의 절강성 진해현(鎭海縣). 당시는 명주(明州)의 속현이었다.

279)중사(中使) : 황제가 사적으로 보내는 사자(使者).

280)무공대부(武功大夫) : 무산신관의 제26계. 구관(舊官)으로는 황성사(皇城使)였다.

281)총지원(總持院) : 불교의 사원. 거기서 불교의 기축 제전인 도량을 개설한 것이다.

282)현인....왕사 : 중국 동해(東海)의 해신 광덕왕(廣德王)을 제사하는 사당. ‘현인조순연성’은 광덕왕의 위력을 나타낸 가호(加號).

283)사산(謝山) : 대소(大小) 두곳이 있는데 절강성 정해현의 경내에 위치하고 있다.

284)희두백봉.....석사안(石師顔) : 희두백봉은 나무가 성긴 흰 봉우리. 착액문은 꼭대기가 좁은 해문. 석사안은 돌사자처럼 생긴 암면.

285)창국현(昌國縣) : 정해현(定海縣)의 고칭(古稱).

286)매잠(梅岑) : 정해현 동북부에 위치한 산 이름. 전한 말의 학자로 은자가 된 매 복(梅福) 자진(子眞)의 은거지로 알려진 곳. 고려, 일본 등지의 외항선이 이 곳으로 길을 잡아 항해하였다.

287)오대산(五臺山) : 산서성(山西省) 오대현에 있는 중국명산의 하나. 사원이 많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288)오월(吳越) : 오대(五代)의 10국 중의 하나인 전 유(錢유)가 세운 오월국으로 5세 84년 동안 지탱하다가 송에 귀속되었다.

289)부(符)를 ....던졌다: 순조로운 항해를 희구하는 뜻으로 부적을 바다에 던지는 의식을 가진 것이다.

290)약수(弱水) : 신선이 살았다는 중국 서쪽의 전설적인 강. 중국의 장안에서 서남 3만리 또는 4만리의 거리에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291)말갈(靺鞨) : 숙신(肅愼)의 후예로, 후에는 여진(女眞)으로 통칭되어 금제국(金帝國)을 건설하여 대륙의 북반을 지배하였다. 그 근거는 지금의 소만국경과 만주와 한반도의 접경지대를 포괄하는 지역이었으나, 북송의 휘종 당시의 여진의 세력은 중국 본부를 깊이 파고 들어가 양자강에까지 육박하였다. 여기서 ‘말갈’이라 함은 중국 대륙의 동북방 지역을 막연히 가리킨 것으로 이해된다.

292)흰 색이 된 것이다. : 백수양(白水洋)의 물이 담수여서 깨끗함을 말한 것이라 여겨진다.

293)등주(登州) : 주명(州名)으로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봉래현(蓬萊縣). 판교는 그 항구의 이름.

294)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 : 합문(閤門) 즉 통례문(通禮門)의 관원으로 정7품

295)김 부식(金富軾) : 이때 동접반으로서 궁과 접촉이 밀접해져 본서 제 8권 인물(人物) 중에 세 번째로 소개되었다.

296)홍주(洪州) : 지금의 충청남도 홍성군.

297)동문(同文) : 북송과 고려가 같은 문화를 가지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298)정삭(正朔) : 본래 정월(正月)과 삭일(朔日)을 의미하는 말이었으나 그것으로 책력을 뜻하게 되었고, 나아가 고대 중국에서는 제왕이 창업하면 어느 달을 정월로 하느냐를 결정하는 세수(歲首)의 개정이 있었고, 그것에 따라 신력(新曆)를 반포하여 국민은 그것을 지켜 제반사를 집행했다. 그래서 ‘봉정삭’(奉正朔) , 즉 ‘정삭을 받든다’고 하는 것은 곧 신복(臣服)함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리고 매년 원단에는 신력을 반포하고 복속 국가에서는 사신을 보내어 그것을 받아오는 것으로 신복함을 표시하였다. 고려는 당시 북송의 정삭을 받들지 않고 있었다.

299)성인(聖人) : 이 경우 중국에서 새로 국가를 세운 제왕을 의미하는 말로 쓴 것이다.

300)만맥(蠻貊)…… 하였다 : 이것은 서 긍이 송 휘종에게 아첨한 말이고, 실제로는 당시 북송은 중국대륙의 일부를 점유하고 금(金)과 서하(西夏)에 의해 남북에서 큰 압력을 받았고, 그후 결국 금에 의해 남쪽으로 밀려갔다.

301)우순……이다 : 송 휘종 치하의 중국의 위세가 고대의 대표적인 성군인 순․우(舜禹) 치하의 그것보다 우월하다는 논조다.

302)글은……것이다 : 「중용(中庸)」28장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천자가 아니면 예제를 의논하지 않고, 도량을 제정하지 않고, 문자를 시비하지 않는다. 지금 천하는 수레는 궤폭이 같고, 글은 문자가 같고, 예법은 순서가 같다.” ‘글은 글자를 같이하고’ 운운은 본래 진 시황제가 중국을 군현제로 통일한 후의 상황을 표현한 말이다.

303)유 인궤(劉仁軌) : 당 고종(唐高宗) 때 삼한 공략에 전과를 올렸고, 그가 처음 말한대로, 고종이 태산을 봉할 때 삼한과 일본의 대표자들을 이끌고 참여하였다. 후에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로 지정사(知政事)에까지 올랐다.《新唐書 卷100 劉仁軌傳》

304)등봉(登封) : 태산에 올라가 그 신을 봉함. 제왕의 위세를 선양하는 행사의 하나.

305)존호(尊號) : 중국 황제가 제후로 봉해 주는 관작의 칭호를 말함.

306)태평(太平) : 글안(契舟), 즉 요(遼)의 연호. 이하 중희․청녕․함옹․태강․태안․수창․건통․청경 등도 같다.

307)철과 …… 잡는다 : 「서경」 순전(舜典)에 나오는 말. 이것은 순이 요 임금 아래에서 당시 중국의 역법․율도(律度)․도량형․예제(禮制) 등을 통일한 일을 말한 것.

308)시사법(施舍法) : 빈객으로 온 자들의 짐을 풀어주고 무료로 거처를 제공하는 법.

309)연・한(燕韓) : 중국 북방 지역을 포괄해서 말한 것임.

310)제・노(齊魯) : 지금의 산동지방으로 공자․맹자의 영향을 받아 유풍(儒風)을 대표하는 고장으로 여겨져 왔다.

311)임천각(臨川閣)……한다 : 임천각에 관해서는 권 6 동 조 참조. 청연각(淸燕閣)에 관해서는 김 연(金緣 1487~1544)의 「청연각기」 및 본서 권 6 영연전각 참조.《東國輿地勝覽 卷6, 東文選 卷 64》

312)월서계고(月書季考) : 매월 한 차례씩 배운 것을 써보게 하고 사계절에 한 차례씩 배운 내용이나 시문을 시험하는 것.

313)제과(制科) : 임시로 실시하여 특출한 인재를 발탁하는 과거로, 국왕이 직접 출제하여 시험하는 것이다.

314)굉사(宏辭) : 곧 박학굉사(博學宏辭)로 관리를 뽑는 과명(科名). 문장 3편을 시험했다.《文獻通考 選擧考 賢良方正》

315)성률(聲律) : 여기서는 시율(詩律)을 두고 한 말.

316)당(唐)……여폐와 방불하다 : 당대에 시부로 취사(取士)해서 그 방면에만 치중한 데서 빚어진 폐단을 말한다.

317)훌륭한……하거니와 : 이것은「예기」(禮記) 악기(樂記)에 나오는 말을 그대로 옮겨 쓴 것이다.

318)오성(五聲) ……두었으며 : 이 설은 「좌전」(左傳) 소공(昭公) 25년의 소(疏) 참조.

319)갈천씨(葛天氏)……것이다 : 갈천씨는 중국 상고의 전설상의 제왕으로, 그 때 3인이 쇠꼬리를 잡고 발을 내차며 팔결(八闋)의 노래를 불렀다고 전해진다.《呂氏春秋 古樂》

320)종․경 …… 관적 : 도(鞉)는 흔들어서 소리나게 만든 북. 훈(塤)은 흙을 구어 만든 소형 취악기. 지(篪)는 횡적(橫笛)의 일종. 생(笙)은 생황,우(竽)는 저로 모두 관악기다. 축(柷)은 나무상자같이 만든 통에 자루를 넣어 휘져어 좌우에 부딪쳐 소리를 내는 악기로, 합주를 시작시키는 신호로 사용한다. 어(敔)는 범 형상의 목제 악기로 등에 톱니 27개가 있어 나무막대로 그 톱니를 긁어서 소리를 내어 합주의 종지를 알리는 구실을 한다. 관(管)은 6공(孔)으로 된 작은 피리의 일종으로 두 개를 포개서 같이 분다. 적(篴)은 적(笛)의 이자(異字)로 피리.

321)신기(神祇)와 ……하였다 : 제사 때에 악기를 합주하는 것을 두고 그렇게 말한다.

322)말사(靺師) : 말족(靺族)의 음악을 교습시키는 일을 관장하는 관원. 매사(韎師)라고도 한다.《周禮春官》

323)모인(旄人) : 산악(散樂)․이악(夷樂)에 맞춰 춤을 교습시키는 관원.《周禮春官》

324)제루씨(鞮鞻氏) : 사이(四夷)의 음악과 그 노래를 관장하는 관원. 《周禮春官》

325)아(雅)를 ……않는다 : 인용한 시구는 「시경」소아의 고종편(鼓鐘篇) 제4장 말 2구. 이 부분의 모전(毛傳)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아(雅)를 연주하고 남(南)을 연주하는 것이다. 사이(四夷)의 음악에 맞춰서 춤추는 것은 위대한 덕이 널리 미쳐가게 하는 것이다. 동이의 음악을 매(韎)라 하고 남이의 음악을 남(南)이라 하고, 서이의 음악을 주리(侏離)라 하고, 북이의 음악을 금(禁)이라 하는데, 그런 것들에 맞춰 약무( 舞)를 상연하여도 이토록 조화를 이루고 혼란을 일으키지 않는다.

326)대호(大濩) : 은 탕왕(殷湯王)의 음악으로, 그가 이 윤(伊尹)에게 명해서 지었다고 전해진다. 대루(大鞻) 또는 대호(大頀)로도 쓴다.《呂氏春秋 古樂》

327)대무(大武) : 주 무왕(周武王)의 음악으로,무왕이 은주(殷紂)를 토멸하고 덕이 무공을 이룩하게 하여 천하를 평정해 냈음을 나타낸 것으로 전해진다.《周禮 春官 大司樂註》

328)대성아악(大晟雅樂)……주었다 : 대성아악은 고려 예종 11년(1116) 6월에 왕 자지(王字之)가 북송 휘종의 조사(詔賜)로 그 악기와 무구(舞具) 악보 등 일체를 받아온 것인데, 문무무(文武舞)를 포괄하는 등가악기(登歌樂器)와 헌가악기(軒架樂器)로 구분되어 있고, 그 규모는 지금 보아도 거창한 편에 속한다. 예종은 그해 10월에 건덕전(乾德殿)에서 대성아악을 친열(親閱)하였다.《高麗史 卷71 樂1》

329)당악(唐樂)……음악이요 : 「고려사」악지에는 아악(雅樂)․당악(唐樂)․속악(俗樂) 3부로 나뉘어져 있다. 아악과 당악은 그 내용이나 성질이 판이한데, 서 긍은 그것을 당악으로 합쳐서 말한 것이라 여겨진다.

330)고(鼓)․판(版)……공후(箜篌) : 판(版)은 박판(拍版)과 철판(鐵版) 2종이 있다. 박판은 소목판 수개의 끝을 끈으로 묶어 서로 부딪치게 하여 박자를 맞추는 타악기다. 철판은 결국 철판으로 만든 박판이 되겠다. 「당서」(唐書) 악지의 고려악의 악기 중에는 철판이 들어 있다. 공후는 현악기로 그 형체에 따라 와공후(臥箜篌)․수공후(豎箜篌)․봉수공후(鳳首箜篌) 등의 구별이 있다. 서양의 ‘하아프’와 비슷하다.

331)석지(䄷枝) : 대규모의 가무회로 고려에는 당악 대곡의 하나인 연화대(蓮花臺)로 남아 있다. 연화대는 중국의 석지무의 극소 부분에 불과하다. 조선 시대에 내려와 처용학연화대합설무(處容鶴蓮花臺合設舞)로 개편되었다.

332)포구(抛毬) : 포구악(抛毬樂), 공던지기의 운동을 가무회화한 것으로 「고려사」 악지에는 역시 당악 대곡의 하나로 보존되어 있다.

333)백희(百戲) : 줄타기 재주넘기 등등을 포괄하는 각종 곡예를 하는 광대놀이.《三國史記 卷32 崔致遠 鄕樂雜錄》

334)예악을……복종한다 : 이것은 소대(小戴) 「예기」(禮記) 명 당위(明堂位)의 처음 부분에 나오는 말을 인용한 것으로, 원문은 ‘制禮樂’이 ‘制禮作樂’으로 되어 있다.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대신해서 그 제 6년에 그렇게 했다는 이야기로 나온다《禮記註疏 卷31》

335)노어(魯語)에 ……되었다 :「노어」(魯語)는 「국어」(國語)의 ‘노어’가 아니라 ‘노논어’ (魯論語)라는 뜻으로 쓴 말이다.「논어」의 요왈편(堯曰篇) 1장에 “권량을 조심스럽게 다루고 법도를 자세히 살피고, 없앴던 관서(官署)를 일으켜서, 사방의 정사가 시행되게 되었다.”고 하였는데,‘ 관서를 일으킨다’는 말은 빼어 버린 것이다.

336)가량(嘉量) : 주대(周代)의 양기명(量器名)인데, 한 그릇으로 곡(斛)․두(斗)․승(升)․홉(合)․약(龠)의 오량(五量)을 다 될 수 있게 되어 있다.《周禮 老工記》

337)오량(五量)……단다 : 이상 오도․오량․오권에 관한 설명은「한서」(漢書) 율력지(律曆志)에 따른 것이다《漢書 卷21 上》

338)그러나……잃었다 : 주 여왕(周厲王)이 견융(犬戎)에 몰려 서주(西周)는 망하고 동천하여 실권을 잃은 채 그 명맥을 간신히 유지해 주공의 제도는 시행되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

339)제(齊)나라……샀고 : 춘추 시대에 전 걸(田乞)이 제 경공(齊景公)의 대부(大夫)로 있으면서 부세를 거둬들이는데 있어 작은 말로 곡식을 받고 백성들에게 줄 때는 큰 말을 써서 백성들에게 음덕을 행했는데 경공은 그것을 금하지 않았다. 그 일로 말미암아 전씨는 제나라 민중의 환심을 사게 되었고 그 종족들은 더욱 강성하여 졌고, 백성들은 전씨를 사모하게 되었다.《史記 卷46 田敬仲完世家》

340)역법(曆法)……없어졌다 : 「신당서」(新唐書) 13권 천문지(天文志)의 이 순풍(李淳風)의 설을 인용한 서설 부분에 이 일에 관한 설명이 있다. 옥형과 선기는 중국 고대에 천문을 측정하는 의기(儀器)다.

341)비서성 교서랑(秘書省校書郞) : 비서성의 5종 속관 중의 제4가 교서랑으로, 전적의 교감, 와오의 판정 등의 작업에 종사한다. <宋史 券164 職官4>

342)금자광록대부(金紫光綠大夫) : 원풍신제(元豊新制) 24문계(文階)의 제3계. <宋史 卷169 職官9>

343)조의대부(朝議大夫) 증광록대부(贈光祿大夫) : 조의대부는 동상 제9계 광록대부는 동상 제4계.

344)조청대부(朝淸大夫).......이다 : 조청대부는 동상 제10계. 직비각은 비각의 실무책임자. <宋史 卷164 職官4> 소보는 태자소보, 문신경관(文臣京官) 제12위, <宋史 卷169 職官9>

345)건주(建州)의 ....... 살았다 : 건주의 구녕현은 지금의 복건성 건구현(福建省建구縣). 화주의 역양은 지금의 안휘성 화현(安徽省和縣).

346)악주의 법조 : 악주는 지금의 호북성 무창현(湖北省武昌縣). 법조는 주(주)의 사리참군(司理參軍)으로 옥송, 심문 등을 관장하였다.

347)정 영위(丁令威).......말이었다 : 정 영위는 한대(漢代)의 요동(遼東)사람으로 영허산(靈虛山)에서 신선술을 배워 신선이 되어 갔다. 후에 학이 되어 요로 돌아와 성문의 화표주(華表柱)에 앉았는데, 한 소년이 활로 쏘려 하자 날아올라 공중을 배회하며 이런 노래를 하고 높이 하늘로 치솟아 올라가 버렸다 한다. “새가 날아왔으니 이는 정 령위라, 집을 떠난 지 천년 만에 지금에야 돌아왔다. 성곽은 전과 같으나 사람들은 예전 사람이 아니구나. 왜 신선을 배우지 않고서 무덤 주렁주렁 늘어놓는가?” (有鳥有鳥丁令威 古家千年令始歸 城郭如故人民非 何不學仙家)

348)황학루(黃鶴樓) : 호북성 무창현 서쪽의 한양문(한양문) 안에 있는 황학산 위에 있던 문루, 촉(蜀)의 비 문위(費文褘)가 등선(登仙)하여 황학을 타고 이 곳에서 쉰 일이 있었다고 하며 또 술집 주인 신씨(辛氏)의 고사로도 유명하다. <黃鶴樓詩, 報應錄>

349)장사랑(將仕郞) : 원풍신제(元豊新制) 24문계(文階) 중 마지막의 것으로 미출신자(未出身者)를 주보(奏補)한다. <宋史 卷169 職官9>

350)통주사(通州司) : 통주는 지금의 강소성 남통현(江주省南通縣), 통주사는 통주의 주 관아.

351)상서랑(尙書郞) : 상서시랑, 곧 6부의 차관이다. <宋史 卷169 職官9>

352)동남구로(東南九路) : 북송 때에는 그 영토를 26로(路)로 구분했다. 동남구로는 그 26로 중에서 동남쪽에 있는 9로를 말한 것이다. <宋史 卷85 地理1>

353)간판공사(幹瓣公事) : 공사(公事)를 처리하는 직책이라는 뜻으로 그것으로 직명을 삼은 것이다.

354)정강(靜江) : 송대의 부명(府名), 처음에는 주(州). 지금의 광서성(廣西省) 계림현(桂林縣)의 땅.

355)대리국(大理國) : 지금의 운남성(雲南省) 대리현(大理縣) 땅을 차지하고 오대(五代) 진(晉937∼946) 때 단 사평(段思平)이 내세운 국호로, 그 후 국주(國主)와 국명은 바뀌었으나 남송 말기까지도 계속 독립을 유지했다. <讀史方興紀要 雲南1>

356)오령(五嶺) : 광주(廣州) 경내 해안에까지 뻗어 있는 오령인데, 여기서는 거기로 들어가는 5로를 말함. 거기에는 정강으로 들어가는 1로도 들어 있다. <讀史方興紀要 廣東>

357)정강수(靜江帥) : 정강을 진수하는 도지휘사(都指揮使)를 말함. <宋史 卷166 職官5>

358)주동(周穜) : 자는 인숙(仁熟), 태주(太州) 사람으로 왕 안석(王安石)에게 인정된 흉도(凶圖)가 있던 것으로 알려진다. 희령(熙寧 1068∼1077) 연간에 등제(登第), 저작좌랑 겸숭정전설서(著作佐郞兼崇正殿設書) 등을 지냈다. <北宋經撫年表>

359)옹구(雍丘) : 현명, 지금의 하남성 기현(河南省杞縣).

360)경서부(京西部)의 사자 : 경서부는 경서로(京西路)를 통괄하는 관서. 사자는 그 책임자. 경서로는 지금의 하남성 낙양(洛陽) 이서와 황하 이남의 전역.

361)상총 : 여기서는 총재, 후세의 이부상서(吏部尙書)의 뜻으로 쓴 것이라 여겨진다.

362)원무현사(原武縣事) : 정주(鄭州) 지금의 하남성 범수현(氾水縣) 서북의 땅. 원무현은 그 속현(屬縣)으로 지금의 박랑현(博浪縣). <讀史方興紀要 河南開封府>

363)제주사사(濟州司士) : 제주는 지금의 산동성 거야현(鉅野縣) 제주사사는 제주의 속관.

364)원풍고감(元豊庫監) : 원풍고는 송 태부시(太府寺)에 예속된 25관사(官司)의 하나로, 제로(諸路)의 비축잉여물 및 상평전물(商平錢物)로 잘 포장된 것을 다 입고시킨다. ‘감’은 그 관속. <宋史 卷165 職官5>

365)동진사출신(同進士出身) : 진사시의 제 4, 5등급 제자의 호칭. 서 긍은 진사에 급제하지 못했으나 「고려도경」을 저술한 공을 기려 동진사출신의 자격을 준 것이다. <宋史 卷155 選擧1>

366)지대종정승사(知大宗正丞事) : 대종정사(大宗正司)는 황제 종족의 제반 사건을 체결하는 관서로, 종실의 단련사(團練使), 관찰사 이상의 덕망이 있는 자 2인을 그 승(丞)으로 충용하는데, 지대종정승사는 그 승의 실무를 관장 처결하는 관직. <宋史 卷164 職官4>

367)장서학(掌書學) : 서학은 서법에 관한 일을 관장하는 관서, 장서학은 그 관서의 실무를 관리하는 관원.

368)상서형부원외랑(尙書刑部員外郞) : 형부상서에 예속된 원외랑. 원외랑에는 후행, 중행, 전행의 차등이 있다. <宋史 卷169 職官9>

369)지주(池州)의 영풍(永豊) : 안휘성 추포현(秋浦縣) 남부 요수(饒水) 상류에 있는 진(鎭) <讀史方興紀要 江南 池州府 建德縣>

370)연강제치사(沿江制治司) : 장강 연안의 군대를 조정하는 관서. 제치사는 장은 제치사(制置使), 또는 제치대사(制治大使). 그 속관 중의 첫째가 참모관이다. <宋史 卷167 職官7>

371)봉사(奉祠) : 사록(祠祿)에 편입됨을 말한다. 송대에는 사록이라는 관위를 설치해서 관직을 그만둘 노령자들에게 도교 궁관(道敎宮觀)을 관리시키되, 실제의 사무는 맡기지 않고 이름만을 빌려 관료의 봉록을 받게 했다. 왕 안석이 신법에 반대하는 노관료를 현직에서 물러나게 하기 위해 사록의 정원을 거의 무제한으로 확대시켰다. 연로자나 관직에 뜻이 없는 자는 자진해서 사록을 맡기를 신청하기도 했다. <宋史 卷170 職官10>

372)홍경궁(鴻慶宮) : 북송 때의 남경은 응천부(應天府 : 지금의 하남성 상구현(商丘縣)임)인데, 홍경궁은 곧 응천부에 있던 도관. <宋史 卷85 地理1>

373)숭도관(崇道觀) : 지금의 절강성 임해현(浙江省臨海縣)에 있다.

374)익양 : 지금의 강서성 신강(信江)이 지나가는 지역인 익양현.

375)요주(饒州) : 지금의 강서성 파양현.

376)조운사(遭運使) : 선박으로 물자를 운송하는 일을 관장하는 관직. 송대에는 전운사(轉運使) <宋史 卷167 職官7>

377)덕흥현(德興縣) : 지금의 강서성 낙평현(樂平縣).

378)부문각 직학사(敷文閣直學士) : 부문각은 휘종(徽宗)의 어제를 수장한 곳으로 그 곳의 차석이 직학사다. <宋史 卷162 職官2>

379)임(林) : 서 긍의 친형으로, 자는 치산(稚山), 호는 연산거사(硯山居士), 또는 연산거사(硏山居士), 연성거사(硏城居士). 선화(宣和) 연간(1119∼1125)의 진사로 용도각학사(龍圖閣學士)까지 지냈다. <尙友錄2>

380)포양(蒲陽) : 포판의 별칭으로 현명, 지금의 산서성 영제현(永濟縣).

381)하남소윤(河南少尹) : 하남부의 차석(次席), 하남부는 지금의 하남성 낙양현으로 그 관할 지역과 소관업무는 광범했다. <宋史 卷86 地理1>

382)대리시(大理寺) : 옥송사건을 처리하는 중앙관서. <宋史 卷165 職官5>

383)다권(茶卷) : 송대에 차를 경외(境外)에 반출하는 관의 증명서로, 그 값이 수백만 전에 이를 경우도 있었다. <宋史 卷357>

384)패왕묘(覇王廟) : 팽성(彭城)에 있는 항 우(項羽)의 사당. 팽성은 지금의 강소성 동산현(江蘇省銅山縣)에 있다. <讀史方興紀要 江南>

385)중서사인(中書舍人) : 중서성 11관 중의 제 4관. <宋史 卷161 職官1>

386)한 구(韓駒) : 자는 자창(子蒼), 호는 능양(陵陽). 선정감(仙井監 : 지금의 사천성 능수현(四川省陵壽縣) 땅) 사람. 정화(政和) 연간에 소시(召試)되어 사진사출신으로 중서사인 등을 거쳐 지강주(知江州)까지 지냈다. 문장에 뛰어나고 시에 대한 이해도 깊었다. 「능양집」(陵陽集)이 있다. <宋史 卷446 文苑7>

387)평원도(平遠圖) : 땅이 평탄하여 멀리까지 바라보이는 경치의 그림. 소 식(蘇軾)도 곽희(郭熙)의 추산평원도(秋山平遠圖)를 노래한 시가 있다.

388)이 양빙(李陽氷) : 당나라 때의 명필로 특히 전자를 잘 썼다. 자는 소온(蘇溫), 조군(趙郡 : 지금의 하북성 낙성현(河北省樂城縣)임) 사람으로 건원(乾元 758∼759) 연간에 진운령(縉雲令)을 지냈고 장작감(將作監)까지 지냈다. <全唐文 卷437>

389)오계 : 호남성 기양현(祁陽縣) 서남 5리에 있는 물, 원 결(元結)이 그곳의 경치를 좋아하여 거기서 살았다.

390)구양 문충공(歐陽文忠公)......뿐이었다 : 구양 수(歐陽修)는 금석 각명을 모아 「집고록」(集古錄)을 저술하였다. 「구양수전집」에 수록되어 있다. 문충공은 그의 시호.

391)유기 : 자는 사립(斯立), 호는 학역노인(學易老人). 원풍(元豊) 연간의 진사로 조봉랑(朝奉郞)이 되었다. 「학역집」(學易集)이 있다. <宋史 卷340>

392)박종정이(鎛鐘鼎彛) : 박종은 종, 정이는 기물. 다 청동으로 주조한 것으로, 거기에 새겨 넣은 글씨가 이른바 금문(金文)이다.

393)적이.......되었다 : 이 해에 금군(金軍)이 북송의 수도 변경(지금의 하남성 개봉(河南省開封)임)을 함락시키고 흠종(欽宗)과 휘종(徽宗) 부자를 포로로 하여 북방으로 압송해 갔다.

394)해도(海道) 2권 : 본서 제 34∼39권이다.

395)조봉랑(朝奉郞) : 조봉랑은 송대 문산관(文散官)의 제 22계, 좌와 우가 있었다. 강음(江陰)은 강소성(江蘇省) 무석현(無錫縣) 북부에 있던 군(郡). 송대에는 행정 구획의 단위로 군(軍)을 쓰기도 했다. 권발견(權發遣)은 임시 파송의 뜻. 강음군에 임시 파송된 학사 책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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