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대사 업적

2017. 5. 26. 02:08차 이야기





       원효대사 업적| 원효대사 업적

보현연명 | 조회 138 |추천 0 | 2013.09.29. 15:50

  

   원효 元曉 (617-686)는 한국불교가 낳은 불멸의 성사(聖師)이다. 그는 대승불교의 건설자인 인도의 나가르주나(Nagarjuna, 용수龍樹)나 중국불교를 새롭게 열어간 천태지자(天台智者)대사에 비견되기도 한다. 한국불교에서만이 아니라 세계불교사에 있어서 원효의 위치는 그만큼 찬연하게 빛나고 있다.
   이름 그대로 민족의 첫새벽을 열어간 원효는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압량군 불지촌(현 경산군 압량면 신월동)에서 태어났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가 원효를 잉태할 때 유성이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으며, 그를 낳을 때는 오색의 구름이 땅을 덮었다고 한다. 원효의 아명은 서동(誓幢)이라 하였다. 서당은 '첫새벽'을 뜻하는데 그의 의미 그대로 비단 한국의 불교사상만이 아니라 철학사상 일반에 있어서도 큰 새벽을 연 밝은 별이었다.

   <송고승전>에서는 원효가 일찍이 나이 십세 무렵에 출가하여 스승을 따라 학업을 배웠다고 한다. 그러나 태어나면서부터 남달리 영특했던 그에게 일정한 스승은 따로 없었다. 불교가 공인된 지 100년이 지나던 이무렵 신라에는 적지 않은 고승들이 배출되어 있었다. 원효가 그들을 찾아 배우고 물었지만, 뒷날 佛法의 깊은 뜻을 깨달음에 있어서는 특정한 스승에 의존하지 않았던 것이다.

   젊은 날의 원효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다. 그러나 그는 불교학은 물론 유가(儒家)와 도가자(道家者)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학문을 닦는 한편 수행자로서 간절하고 피나는 고행을 다했던 것 같다. 그가 남긴 다양한 저술들에서 그 편린들을 찾아볼 수 있다.

   원효의 행적 가운데서 각별히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두 차례에 걸쳐 입당(入唐) 유학을 시도했던 그가 문득 스스로 크게 깨닫고 발길을 돌린 일이 그것이다. 원효는 34세때 당에 유학하기 위해 의상(義湘)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요동까지 갔다가 그곳 순라꾼에게 잡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되돌아 왔다. 45세에 다시 역시 의상과 함께 이번에는 해로(海路)로 해서 당(唐)으로 가기 위해 백제 땅이었던 당주계(唐州界)로 향하였다. 항구에 당도했을 때 이미 어둠이 깔리고 갑자기 거친 비바람을 만나 한 땅막에서 자게 되었다. 아침에 깨어났을 때 그곳은 땅막이 아닌 옛 무덤 속임을 알았지만 비가 그치지 않아 하룻밤을 더 자게 되었다. 그날 밤 원효는 동티(귀신의 장난)를 만나 잠을 이룰 수 없었고, 이는 곧 그에게 큰 깨달음의 한 계기가 되었다.

   그는 지난 밤 잠자리는 땅막이라 여겨 편안했는데 오늘밤 잠자리는 귀신의 집이므로 이처럼 편안치가 못함을 확인하였다. 이어 '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땅막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래서 원효는 "삼계(三界)가 오직 마음이요, 만법(萬法)은 오직 인식일 뿐이다. 마음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할 것이 있으랴.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다!"하고 다시 신라로 되돌아 왔다. 마음밖에 법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이는 곧 진리이다. 당나라에 진리가 있다면 그것이 왜 신라에는 없겠는가. 그는 이처럼 인간의 내면 속에 간직되어 있는 마음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또한 신라인으로서 주체적인 자각을 이루고 있다. 원효의 이같은 깨달음은 후대 사람들에 의해 더욱 드라마틱하게 각색되어 흥미를 더해주고 있다. 그가 무덤 속에서 해골을 담긴 물을 마시고 깨달았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스토리 자체보다도 이 신라인의 주체성, 그리고 이로부터 확장해간 그 사상적 보편성과 세계성에 더욱 주목해야 한다.

   젊은 시절부터 장년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열렬하게 유학의 꿈을 품어 온 원효가 한 순간에 전회(轉回)하여 신라로 돌아온 후, 그는 오직 불교학의 연구와 저술 그리고 대중교화에 몰두하였다. 여러 문헌에 의하면 그의 저술은 100여종 240여권(또는 86부 180여권)으로 알려져 있다. 그 연구 범위도 대·소승불교의 모든 부문을 망라하고 있어, 가히 넓고 깊은 學解와 초인적 저술활동을 보여준다. 그 가운데서도 그의 대표적 저술이라 할 수 있는 <대승기신론소>와 <금강삼매경론>에서 보인 탁월한 이해와 견해는 중국 석학들까지도 찬탄과 경이를 아끼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그의 저술은 19부 22권만이 1천3백년의 장구한 세월을 뚫고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그 가운데는 소의 두 뿔 사이에 벼루를 놓고 집필했다는 저술배경에 일화도 많은 「금강삼매경소」, 원효사상의 중심 개념인「화쟁」을 풀이한「십문화쟁론」 등은 다행이 남아있다. 그리고 원효철학의 성격을 가장 잘 말해주는 연구저작으로는 「대승기신론소」를 들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대승기신론」는「금강경」「원각경」「능엄경」과 함께 우리나라 불교의 근본경전인 사교과에 속하는 논서이다. 마명의 저작이라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치않고 산스크리트 원본은 발견되지 않은채 한역본만 유통되고있다. 그 내용은 치밀한 구성, 간결한 문체, 독창적인 철학체계등 모든 면에서 불교문학사상 최대 걸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대승기신론」은 당시 인도에서 대립하고 있던 중관파와 유가파(유식파)의 양대 불교사상을 지향, 화합시켜「진과 속이 별개의 것이 아니며」(진속일여),「더러움과 깨끗함이 둘이 아니라」(염정불이)는 사상을 나타낸 논서이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르는 현실세계(속)에서 깨달음의 세계를 향하여 끊임없이 수행함으로써 완성된 인격(진)을 이룩할수 있으며, 깨달음의 세계에 이른 사람은 아직 염오한 단계에 있는 중생을 이끌어가야 한다는 것이「진속일여」,「염정불이」의 사상이다.

   원효는「대승기신론」을 대하자마자 스스로의 삶과 학문의 목표와 너무나 맞아떨어짐에 감명을 받아 기존의 논의에 관한 9종의 연구서를 내놓았다. 그 가운데서 4권(대승기신론소 2권, 대승기신론별기 2권)이 현재까지 남아 전해지고 있다. 국가나 종파를 초월하여 널리 유포된「대승기신론」에 관해서는 수백여종의 주석서들이 나와있으나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은「기신론삼소」라 일컫는다. 중국 정영사의 혜원(서기 523∼592)의 주석서인「정영소」, 신라의 원효대사의 주석서인 소위「해동소」, 그리고 중국 화엄학의 대가 법장(서기 643∼712)의「현수소」가 곧 그것이다.

기   신론의 3소 중에서도 원효의 「해동소」는 혜원의 「정영소」를 그 내용에 있어 단연 능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기신론」주석의 백미라 일컫는 법장의 「현수소」는「해동소」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놓은 대목이 허다하며 원효의 견해를 표현만 바꿔 재정리한 면도 적지가 않다. 요컨대「현수소」는「해동소」가 있어서 비로소 그를 토대로 저술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당나라의 징관이 스승 법장으로부터「해동기신소의」를 배웠다고 증언하고 있음을「송고승전」도 밝히고 있다.

   원효는 젊은 시절에 도당유학을 단념하고 국내에 머물었으나 그의 학문과 사상은 국경을 넘어 중국, 일본, 인도로 멀리 세계화되었다.「불출호 지천하」란 노자의 말과 같이 그는 문밖을 나가지 않고도 능히 세계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원효는 그러나 교학연구나 관념적인 사상 속에만 머물러 있던 인물이 아니었다. 삼국의 통일을 전후하여 소용돌이치는 한 시대를 살았던 그에게는 왕실·귀족불교도 인도해야 할 대상이었고, 더구나 서민 대중과 고통받는 하층민 그리고 정복지역의 유민들도 다같이 뜨겁게 안아야 할 이 땅의 가엾은 중생들이었다. 원효가 과부가 되어 있는 요석궁의 공주와 짧은 인연으로 아들 설총을 낳고, 스스로 승복을 벗어던진 채 小姓居士라 자처한 일은 분명 놀라운 파격이었다. 그러나 이를 겉에 드러난 액면대로 파계나 타락으로 볼 수 있을까? 그 파계의 소생이 한국 유교의 문묘에 배향된 십팔유현 중에서도 첫번째로 모시고 있는 설총이라니 만만치가 않다.

   염정불이 진속일여(染淨不二·眞俗一如)는 그의 학문적 이론이자 종교적 실천의 기초이다. 더럽고 깨끗함이 둘이 아니고 진리의 길과 세속의 길이 본래 같다는 이해는, 진리의 근원인 우리들 一心의 통찰에서부터 나온다. 이미 그것을 확연하게 깨달은 원효에게 성(聖)과 속(俗)의 구별은 무의미했을 터이다. 그는 聖과 俗을 一心으로 아우르고 있다. 그렇게함으로써 원효는 더욱 역동적이고 자유로운 큰 삶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당시의 승려들 대부분이 왕실과 귀족들의 존경을 받으면서 성내(城內)의 대사원에서 귀족생활을 하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원효는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녔다. 지방의 촌락이며 시장거리며 뒷골목을 승려가 아닌 세속인의 모습으로 무애가-무애가는 화엄경의 「일체무애인/일도출생사」(모든 것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대번에 생사를 벗어나리로다)라는 구절에서 따온 노래이다.-를 지어부르고 가무와 잡담으로 서민들 사이에 끼어들어 불법을 설법하는 교화작업에 힘썼다. 누가 그런 기이한 행색의 원효를 이 땅에서 가장 뛰어난 학승이며 왕실에서도 존경받는 고승이라 생각했을 것인가. 그러나 그는 자신을 한없이 낮춘 자유로운 성자였고 민중의 벗이었다. 그리하여 가난한 사람, 천민, 부랑자, 거지, 어린 아이들까지 모두 그런 원효를 허물없이 따랐다. 그들은 가슴 절절히 와닿는 생기를 얻었으며, 염불을 따라부르며 정토에 때어날 희망을 키우기도 하였다.

   원효의 만년에 대해서는 역시 자세한 자료가 없다. 다만 보살행(菩薩行)으로써 민중교화행을 마친 그는 소성거사가 아닌 원효성사로 되돌아가 穴寺에서 생애를 마쳤다는 기록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신문왕 6년(686) 3월 30일의 일이었다.

   자주적인 가성인이자 위대한 사상가로서, 성속(聖俗)을 넘나든 자유인이자 민중의 구제자로서 원효는 그의 70년 생애를 그렇게 열정적으로 살다가 갔다. 그러나 그는 떠나지 않았다. 우리 민족의 정신과 한국사상사의 첫 새벽을 환하게 열어 놓은 원효는 오늘에도 여전히 우리들 가슴속에 살아 있다.



통일신라 불교의 대중화에 결정적 역할

   당시 신라사회는 원광(圓光)과 자장(慈藏)의 교화에 큰 영향을 입었으나 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불교와 일반 서민불교 사이에는 여전히 괴리가 있었다. 이러한 때 혜공·혜숙(惠宿)· 대안(大安) 등이 일반 서민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가 그들에게까지 불교를 일상생활화시켰다. 원효 역시 이들의 뒤를 이어 당시의 승려들이 대개 성내의 대사원에서 귀족생활(그들은 엘리트의식에 사로잡혀 민중은 무지와 나약 때문에 어떻게 해도 석가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다고 판단, 애써 민중을 외면했다.)을 하고 있었던 것과는 반대로 지방의 촌락, 길거리를 두루 돌아다니며 무애호(無碍瓠; 이상한 모양의 큰 표주박으로 두드리면서 無碍歌를 불러서 붙여진 명칭)를 두드리고 〈화엄경〉의 "모든 것에 걸림 없는 사람이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났도다"라는 구절로 노래(무애가無碍歌=모든 것에 걸림이 없다는 뜻의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가무와 잡담 중에 불법을 널리 알려 일반 서민들의 교화에 힘을 기울였다. 이는 불교의 이치를 노래로 지어 세상에 유포시킴으로써 부처님의 가르침을 무식한 대중에까지 알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노래에 담겨있는 무애사상은 원효의 사생활에도 잘 나타난다. 그는 거사들과 어울려 술집이나 기생집에도 드나들고 혹은 석공들의 쇠칼과 쇠망치를 가지고 다니며 글을 새기기도 하고, <화엄경>에 대한 해설서를 지어 그것을 강의하기도 했다. 또 어떤 때는 여염(보통사람이 모여있는)집에서 유숙하기도 하고 혹은 명산대천을 찾아 좌선하기도 하는 등 어떤 일정한 틀에 박힌 생활태도가 없었다. 이와 같이 행적도 뚜렷한 규범이 없었고, 사람들을 교화하는 방법도 일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원효의 이러한 행적은 귀족중심의 불교를 대중에 확산시키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원효의 사상

   현존하는 그의 저술은 20부 22권이 있으며, 현재 전해지지 않는 것까지 포함하면 100여부 240권이나 된다.특히, 그의 <대승기신론소>는 중국 고승들이 해동소(海東疏)라 하여 즐겨 인용하였고, <금강삼매경론>은 인도의 마명(馬鳴)·용수 등과 같은 고승이 아니고는 얻기 힘든 논(論)이라는 명칭을 받은 저작으로서 그의 세계관을 알 수 있는 대저술이다. 그는 학승(學僧)으로서 높이 평가될 뿐만 아니라, 민중교화승으로서 당시 왕실 중심의 귀족화된 불교를 민중불교로 바꾸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또, 종파주의적인 방향으로 달리던 불교이론을 고차원적인 입장에서 회통(會通)시키려 하였는데 그것을 오늘날 원효의 화쟁사상(和諍思想)이라 부르며, 이것은 그의 일심사상(一心思想)·무애사상(無碍思想)과 함께 원효사상을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그의 사상은 너무나 다양하여 헤아리기 어려우나 항상 ‘하나’라는 구심점을 향하였고, 화쟁과 자유를 제창하였다.


일심사상:원효의 일심사상은 그의 저서 <금강삼매경론>·<대승기신론소> 등 그의 모든 저술에서 철저하게 천명되고 있다. 인간의 심식(心識)을 깊이 통찰하여 본각(本覺)으로 돌아가는 것, 즉 귀일심원(歸一心源:일심의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 설정하고 육바라밀(六波羅蜜)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그는 만법귀일(萬法歸一)·만행귀진(萬行歸眞)을 굳게 믿고 사상과 생활을 이끌어갔다. 그리고 일심이야말로 만물의 주추(主樞)이며, 일심의 세계를 불국토(佛國土) 극락으로 보았고, 이것을 대승·불성(佛性)·열반이라고 불렀다.


화쟁사상:원효는 어느 한 종파에 치우치지 않고 <화엄경>·<반야경>·<열반경>·<해심밀경 海深密經>·<아미타경> 등 대승불교 경전 전체를 섭렵하고 통효(通曉)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전체 불교를 하나의 진리에 귀납하고 종합 정리하여 자기 분열이 없는 보다 높은 입장에서 불교의 사상체계를 세웠다.
   이러한 그의 조화사상을 화쟁사상이라고 한다. <십문화쟁론 十門和諍論>은 바로 이러한 화쟁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의 핵심적인 저술이다. 그는 여러 이설(異說)을 십문으로 모아 정리하고 회통함으로써 일승불교(一乘佛敎)의 건설을 위한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였다. 그의 이와같은 통불교적 귀일사상은 한국불교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무애사상:원효의 무애사상은 그의 사생활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는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철저한 자유인이었다.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단번에 생사를 벗어난다(一切無#애14人 一道出生死).”라고 한 그의 말을 보더라도 그의 무애사상은 짐작된다.
   그는 부처와 중생을 둘로 보지 않았으며, 오히려 “무릇 중생의 마음은 원융하여 걸림이 없는 것이니, 태연하기가 허공과 같고 잠잠하기가 오히려 바다와 같으므로 평등하여 차별상(差別相)이 없다.”라고 하였다.그러므로 그는 철저한 자유가 중생심(衆生心)에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고, 스스로도 철저한 자유인이 될 수 있었으며, 그 어느 종파에도 치우치지 않고 보다 높은 차원에서 일승과 일심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밖에도 원효는 여래장사상 등 불교의 모든 사상에 대하여서도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확립하였다.




cafe.daum.net/birdnamu9876/LCkU/1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스크랩] 놓아두어라 (원효대사)| 元曉대사님 자료

道門최일수 | 조회 44 |추천 0 | 2016.07.31. 09:24


        놓아버려라.        




옳다 그르다.
길다 짧다.
깨끗하다 더럽다.
많다 적다를
분별하면 차별이 생기고
차별하면 집착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옳은 것도 놓아 버리고
그른 것도 놓아 버려라.


긴 것도 놓아 버리고
짧은 것도 놓아 버려라.


하얀 것도 놓아 버리고
검은 것도 놓아 버려라.


바다는
천개의 강


만개의 하천을 다 받아 들이고도
푸른 빛 그대로요
짠 맛 또한 그대로이다.


- 원효대사 -




원효대사 [元曉大師](617 - 686)





   원효(元曉, 617년 ~ 686년 4월 28일(음력 3월 30일), 경상북도 경산시)는 삼국시대와 신라의 고승이자 철학자, 작가, 시인,

정치인이다.

원효는 법명이고, 속성(俗姓)은 설(薛), 속명은 사(思),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이며, 별명은 모(毛), 호는 화정(和淨)이다.

아버지는 내말 설담날이며, 태종무열왕의 둘째 사위이고 설총이 그의 아들이다. 별명은 소성거사(小姓居士)이며 이외에도

서곡사미(西谷沙彌), 백부논주(百部論主), 해동법사(海東法師), 해동종주(海東宗主)라 불렸다. 고려시대에는 원효보살,

원효성사(元曉聖師)라 존칭되고, 화쟁국사(和諍國師)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본명은 설사(薛思)이나, 보통 한국에서는 법명을

따라 원효대사로 불린다. 경주 설씨와 순창 설씨의 중시조인 설총의 생부이며, 한국불교 최초의 깨달은 스님, 한국 최초의

대처승으로도 유명하였다.




   원효대사의 일생   
 




   원효는 진평왕 39년 출생. 그는 항상 열심히 배우는 자세로 노력하여 유학, 불교, 도교에 대하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의 사람들이 믿고 있던 불교에 많은 관심을 가져 15,6세에 불교의 진리를 담고있는 삼학에 능하게 되었다. 화랑으로 여러

전투에 참가하면서 많은 죽음을 본 그는, 사는 것에 대한 깊은 반성과 속세의 삶에 대한 허무감 때문에 승려가 되기로 결심하여

황룡사에서 승려가 되었다.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가던 중, 해골에 괸 물이 상황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에서

"모든 깨달음은 마음속에 있다."는 진리를 깨닫게 된다. 그래서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와 참선을 계속하면서, 그가 깨달은 진리를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려고 애썼다. 그는 남루한 옷을 입고 사람이 모인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중생을 구제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그의 노력으로 불교는 백성들 사이에 널리 전파되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정신적인 기둥이 되었다.

그는 한 때 파계하여 요석공주와의 사이에 설총을 낳기도 하였으나, '무애가'를 지어 부르며 백성들 속에 파고들어 불교를

전파하였다. 또한 당나라에서 들여온 '금강삼매경'을 왕과 고승들 앞에서 강론하여 존경을 받았고, 참선과 저술로 말년을

보내다 입적하였다. 그는 우리 나라 불교 사상 가장 훌륭한 승려로 추앙 받고 있다.




   시대적 상황  
 
   당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침략으로 몹시 시달림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인재 양성과

국력 증강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당시 불교는 왕과 귀족들의 종교였으며, 승려들은 산속에 들어가 참선을 하여, 일반

백성들이 불교를 접하기는 힘들었고 교리도 너무 어려웠다.



   원효대사의 불교 사상   





   원효는 승려가 산 속에서 파 묻혀 참선만 하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니라, 일반 백성 속에 파고들어 어리석은 중생들을 깨우쳐

주는 것이 부처님의 참 뜻이라고 하였다. 그는 "모든 것은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지 사물 자체에는 깨끗함도 더러움도 없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가 백성들에게 전파하려고 한 불교의 진리는 다음과 같다. "신분의 높고 낮음, 재산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누구나 불교의 진리에 가까이 갈수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실제로는 하나로 합해질

수 있다."

 
    원효대사의 업적   




당시 신라사회는 원광(圓光)과 자장(慈藏)의 교화에 큰 영향을 입었으나 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불교와 일반 서민불교

사이에는 여전히 괴리가 있었다. 이러한 때 혜공·혜숙(惠宿)· 대안(大安) 등이 일반 서민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가 그들에게까지

불교를 일상생활화시켰다. 원효 역시 이들의 뒤를 이어 당시의 승려들이 대개 성내의 대사원에서 귀족생활(그들은 엘리트

의식에 사로잡혀 민중은 무지와 나약 때문에 어떻게 해도 석가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다고 판단, 애써 민중을 외면했다.)을

하고 있었던 것과는 반대로 지방의 촌락, 길거리를 두루 돌아다니며 무애호(無碍瓠; 이상한모양의 큰 표주박으로 두드리면서

無碍歌를 불러서 붙여진 명칭)를 두드리고 〈화엄경〉의 "모든 것에 걸림 없는 사람이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났도다"라는 구절로

노래(무애가無碍歌=모든 것에 걸림이 없다는 뜻의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가무와 잡담중에 불법을 널리 알려 일반 서민들의

교화에 힘을 기울였다. 이는 불교의 이치를 노래로 지어 세상에 유포시킴으로써 부처님의 가르침을 무식한 대중에까지 알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노래에 담겨있는 무애사상은 원효의 사생활에도 잘 나타난다. 그는 거사들과 어울려 술집이나 기생집에도

드나들고 혹은 석공들의 쇠칼과 쇠망치를 가지고 다니며 글을 새기기도 하고, <화엄경>에 대한 해설서를 지어 그것을

강의하기도 했다. 또 어떤 때는 여염(보통사람이 모여있는)집에서 유숙하기도 하고 혹은 명산대천을 찾아 좌선하기도 하는 등

어떤 일정한 틀에 박힌 생활태도가 없었다. 이와 같이 행적도 뚜렷한 규범이 없었고, 사람들을 교화하는 방법도 일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원효의 이러한 행적은 귀족중심의 불교를 대중에 확산시키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출처 : 네이버 지식iN)


 참고사항

    원효사   



경기도 전통사찰 제77호인 원효사(元曉寺)는 의정부시 호원동 도봉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아담한 비구니 사찰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입니다. 도봉산(道峰山) 기슭에는 무수히 많은 사찰들이 자리잡고 있는데 망월사,

회룡사 등과 함께 원효사(元曉寺)는 도봉산의 대표적인 사찰로 손꼽히고 있으며 원효사가 위치하고 있는 곳은 맑은 계곡과

함께 여러 암봉들이 마치 병풍처럼 감싸 안고 있는 명당 중의 명당이라 합니다. 신라 선덕여왕(632~649)때 원효대사가 한동안

이 곳에 안거하면서 수도처로 삼았다고 하며 이러한 연유로 비구니 우일스님이 1954년에 이곳에 원효대사의 동상을 세우고

절의 이름도 원효사(元曉寺)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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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대사 그의 깨달음| 불교 방

수호천사 | 조회 15 |추천 0 | 2008.03.30. 01:50
  


 

원 효 대 사

 

     신라시대의 고승,  성은 설씨,  볍명은 원효,  아명은 서당 (誓幢)

 

     신라 진평왕 617년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사이의 싸움이 한창이던 때에

     경상북도 경산에서 태어나, 불교 진리의 깨달음을 얻은 후로, 많은 업적을

     쌓고 중생을 구제하였으며, 말년은 참선과 저술로 보내다가 686년 입적함.

 

 

   원효대사의 성장배경.

 

     1. 신라 진평왕 39년(617)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에서 태어났습니다.

 

     2. 불교, 유교, 도교 등을 두루 공부하였으며 화랑으로 여러 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죽음을 보고

        삶의 근본 의미에 대한 깊은 성찰 끝에 29세 때 황룡사의 승려가 되었습니다.

 

     3. 34세 이 후, 승려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가 해골에 담긴 물을 먹은 후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4. 귀족 불교에 머물러 있던 당시의 상황에서 원효스님은 민중속에 불교를 전파하려고 노력하였으며

        그러한 노력으로 불교는 삼국 통일의 정신적인 기둥이 되었습니다.

 

 

   원효대사의 생애

 

     원효는 신라 진평왕 37년에 출생,  그는 항상 열심히 배우는 자세로 노력하여, 유학 후 불교 및 도교에

     대하여 많은 지식을 쌓았습니다. 당시의 믿고 있던 불교에 많은 관심을 가져 15 ~16세에 이미 불교에

     진리를 담고 있는 삼학에 능하게 되었습니다.

    

     화랑으로 여러 전투에 참가하면서 많은 죽음을 본 그는 사는 것에 대한 깊은 회한과 속세의 삶에 대한

     허무감 때문에 승려가 되기로 결심한 후 마침내 출가하여 황룡사에서 승려가 되었습니다. "의상"과 함

     께 당나라로 유학을 가던 중 해골에 고인 물이 상황에 따라서 때때로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에서, 그는

     "모든 깨달음은 마음속에 있다" 는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와 참선을 계속하면서 그가 깨달은 진리를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려

     고 애썼습니다.  그는 남루한 옷을 입고 사람이 모인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가 중생을 구제하려고 노력

     하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노력으로 불교는 백성들 사이에 널리 전파되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데에

     정신적으로 큰 기둥이 되었습니다.

    

     그는 한 때 파계하여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낳기도 하였으나 (무예가)를 지어 부르며 백성들

     속에 파고 들어 불교를 계속 전파 하였습니다.  또한 당나라에서 들여온 (금강삼매경) 을 왕과 고승들

     앞에서 강론하여 많은 존경을 받았고, 참선과 저술로 말년을 보내다 입적하였습니다.

 

 

   원효대사의 사상

 

     1. 자기 자신에게서 진리를 찾아야 함을 강조하였습니다.

 

     2. 일심 사상

     - 해골속의 물을 통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 마음에서 탐욕, 성냄, 어리섞음을 버려야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다 하였습니다.

     - 마음을 깊이 통찰하여 탐욕, 성냄, 어리섞음이 사라진 근원으로 돌아가라는 사상.

 

     3. 화쟁 사상

     - 쪽빛과 남색이 하나이고 물과 얼음이 근본적으로 같다는 관용의 사상.

     - 모든 대립된 것들은 하나로 합쳐질 수가 있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그 대립을 합리적인 도리에 따라 조화롭게 해결할 수 있다는 화쟁사상

     - 불교의 어느 한 종파에 집착하지 않고, 다른 것도 모두 참모습을 깨달으면 진리가 될 수 있다는 화합의 사상

 

  

    원효대사의 업적

 

     1.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들에게 불교를 전하여 마음을 편하게 하였습니다..

 

     2.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습니다.

 

     3. 모든 불교 경전과 여러 종파를 종합하여 새로운 체계를 이룩하였습니다.

 

     4. 40 여권이 넘는 많은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배울 점 ( 교 훈 )

 

     1. 진리를 구하려고 노력하는 자세.

 

     2. 서로 다른 의견을 존중하고 대립과 갈등을 관용의 정신으로 해결하려는 태도.

     - 일심 사상 : 해골에 담긴 물  ㅡ> 마음이 이 세상의 근본.

     - 화쟁사상 : 쪽빛과 남색이 하나이며, 물과 얼음이 하나임. 

  ㅡ>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는 주장들도 하나로 합쳐질 수 있다는 마음.

 

     3. 현대 사회에 주는 의의

  ㅡ> 서로 다른 의견을 존중하고, 관용의 정신을 발휘하여,  대립과 갈등을 풀고 화합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

 

    원효대사,  그는 우리나라 불교 역사상 가장 훌륭한 승려로 추앙 받고 계신 분입니다.


cafe.daum.net/dwklys/7uRQ/113  불교인연법






원효대사 일생 한눈에 본다

경주박물관, 신라 역사 인물 특별전
주간불교 | 2010/09/27 13:03


원효대사 진영, 저술 등 전시

 

원효대사가 55세 때 저술한 <판비량론 >






   무애의 삶을 실천한 원효대사(617~686) 특별전이 개최돼 눈길을 끈다. 국립경주박물관(관장 이영훈)은 ‘신라 역사 인물 특별전’ 첫 번째 시리즈로 원효대사의 삶을 집중 조명한다.

경주박물관 관계자는 “‘신라 역사 인물 특별전’ 은 신라를 세우고, 일구고, 가꾼 인물들을 조명하고자 기획됐다. 이에 한마음(一心)과 화쟁(和諍)사상으로 통일신라 사상 발전의 초석을 다졌던 원효대사를 그 첫번째 주인공으로 채택했다”며 기획취지를 밝혔다.

 

11월 21일까지 열리는 이 전시는 원효대사의 삶과 업적을 다채롭고 종합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코너로 마련됐다. 독백 형식을 빌려 작성한 연표와 관련 자료를 전시, 도입부에 모았고 후세가 기록한 원효대사의 기록과 진영(眞影)들도 전시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원효대사의 사상을 살펴 볼 수 있는 저술들이다. 특히 일본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오타니대학(大谷大學) 소장의 <판비량론判比量論(8세기 필사본)>이 국내에서 최초로 공개돼 주목을 끈다. 원효대사 55세때인 671년에 행명사(行名寺)에서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이 책은 전체의 8분의 1만이 남아 있는 사본이다. 지난 2002년 고바야시 요시노리 히로시마대 명예교수가 신라의 언어와 한자 발음이 적혀 있는 각필 흔적을 발견 신라인이 만든 것임을 확인한 바 있다.

 

   이밖에도 <이장의二障義>, <보살계본지범요기 菩薩戒本持犯要記> 등 국내에 없는 원효의 저술도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된다. 더불어 일본 고산사(高山寺) 소장의 원효대사 진영과 화엄종조사회전(華嚴宗祖師繪傳) 모사본도 눈여겨 볼만하다.

박물관 관계자는 “이번 전시를 통해 617년 압량군(지금의 경산) 남쪽 불지촌에서 태어나 15세에 출가, 대중들에게 불법을 전파한 원효대사의 삶을 심도 있게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150여권의 책을 저술한 저술가이자 사상가의 원효를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또한 원효대사를 추모하기 위해 세웠던 서당화상비(誓幢和上碑)도 만나볼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과 동국대학교에 나뉘어 보관됐던 이 비는 당시 원효대사의 업적을 짐작해볼 수 있는 자료다. 이와 더불어 2009년 가을 경주시내 주택가에서 200여년 만에 재발견된 문무왕릉비편(文武王陵碑片)도 보존처리를 끝내고 최초로 공개된다.

 

   전시와 더불어 원효대사를 좀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한 다양한 기념 강연회도 마련됐다. 그동안 원효 연구에 매진해온 서울대 남동신 교수가 11월 13일 ‘원효의 저술과 사상’을 주제로 강연한다. 또  <화엄종조사회전>을 바탕으로 일본 고산사를 창건한 묘에(明惠)와 원효, 그리고 의상과의 관계를 조명한 일본 나라국립박물관 니시야마 아쓰시(西山厚) 학예부장의 강연이 9월 29일 열린다. 앞서 9월 18일에는 동국대 사학과 김상현 교수의 ‘원효 화쟁사상의 현대적 의미’ 강연도 열린 바 있다.

 

   경주박물관 관계자는“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절이 국내에 100여 곳에 이르고 원효로, 원효대교처럼 길이나 다리 이름에도‘원효’가 있을 만큼 유명하지만 원효대사를 잘 알고 이해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번 특별전을 찾는 이 모두가 원효대사에 대해 깊이 있게 알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고산사 원효대사 진영














정혜숙 기자


m.jubul.co.kr/news/20173   주간불교






원효 무애 삼국유사2016-06-03 12:06:58
최고관리자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

                        

신라시대의 고승. 성은 설(薛)씨. 원효는 법명, 아명은 서당(誓幢) 또는 신당 (新幢).

 압량(押梁 : 지금의 慶山郡) 불지촌(佛地村) 출신. 잉피공(仍皮公)의 손자이며 내마(奈麻) 담날(談捺)의 아들이다.

  648년(진덕왕 2) 황룡사에서 중 이 되어, 각종 불전을 섭렵하며 수도에 정진하였다.
  650년(진덕여왕 4)에 의상 과 함께 당(唐)의 현장과 규기에게 유식학 을 배우려고
  요동까지 갔지만, 그곳 순라군에게 첩자로 몰려 여러날 갇혀 있다가 겨우 풀려나 돌아왔다.

  10년 뒤, 다시 의상과 함께 해로를 통하여 입당(入唐)하기 위하여 가던 중,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 "지리는 결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 다" 는 깨달음을 터득하고 의상과 헤어져서 돌아왔다.

  이후, 655년에서 660 년 사이에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낳았는데,
 이 실계(失戒)의 사실이 오히려 원효로 하여금 더욱 위대한 사상가로 전환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실계 후, 스스로를 소성거사(小性居士)라 하면서 광대들이 무롱(舞弄)하는 큰 박을 본 따
 무애(無碍)박을 만들어 천촌만락을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였다.

   그 노래의 줄거리는 <화엄경>의 이치를 담은 것으로
 "모든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라야 생사의 편안함을 얻나니라. "라는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노랫가락인데, 그 노래를 <무애가(無碍歌)>라 불렀다.

  그리고 별다른 이유도 없이 미친사람 과 같은 말과 행동을 하여 이해할 수 없는 점도 있어 거사(居士)들과 어울려 술집이나 기생집에도 드나들었고, 혹은 가야금과 같은 악기를 들고 사당(祠堂)에 가서 음악을 즐기기도 하였다.


  그는 또 여염집에서 유숙하기도 하는 등 대중들과 쉽게 만날 수 있는 생활을 하였다.

이로 인하여 가난뱅이나 어린이들까지도 모두 부처님의 이름을 알고 염불을 할 수 있 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일생은 화쟁 의 방법에 의하여 자리(自利)를 구하고 대중교화를 통하여 이타(利他)를 행함으로써 석가 이후 '상구보리 하화중행' 으로 대표되는 불타의 참정신을 구현한 것으로 일관되었다고 할 수 있다.

<금강삼매경>에 대한 주석서나 <대승기신론소> 등에서 볼 수 있는 일심사상 (一心思想) ·

  무애사상(無碍思想) · 화쟁사상(和諍思想) 등은 민중 교화승 으로서 당시 왕실 중심의 귀족화된 불교이론을 민중불교로 바꾸는데 공헌하였으며, 또 종파주의적인 방향으로 달리던 불교이론을 고차원적인 입장에서 회통시키려 한 대 저술로, 그의 세계관을 알 수 있다.

                   

   일생을 참선과 저술, 대중교화에 힘쓰던 그는, 686년(신문왕 6) 3월 30일 혈사(穴寺)에서 나이 70세, 법랍 38세로 입적하였다.
 뒤에 1101년(고려 숙종 6)에 대성화정국사 (大聖和靜國師)라 시호했다.

                   

   저술은 <금강반야경소(金剛般若經疏)>3권· <금강삼매경론(金剛三 昧經論)>3권·
<화엄경종요(華嚴經宗要)>· <유마경소(維摩經疏)>3권·<해심 밀경소(解深密經疏)>3권·
<범망경소(梵網經疏)>2권· <범망경보살계본사기( 梵網經菩薩戒本私記)>2권·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1권· <섭대승론소(攝大 乘論疏)>4권·
 <대승기신론종요(大乘起信論宗要)>1권· <초장관문(初章觀文) >2권·
 <반주삼매경소(般舟三昧經疏)>1권· <아미타경소(阿彌他經疏)>1권·
 <무량수경소(無量壽經疏)>1권· <삼론종요(三論宗要)>1권 등 9부 240여권에 달한다.

   이는 양으로도 남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도 매우 훌륭하여
  당나라의 석학들이 그의 저술을 '해동소(海東宵)'라고 칭송했다.



                     

원효대사 이야기

   

원효가 하루는 거리에 나가

                        “누가 내게 자루 없는 도끼를 주겠는가? 내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리라”라고

                        노래한 것이 태종무열왕에게 전해져 요석공주와 잠자리를 같이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설총이 태어났다.

                        

                        이 사실을 스스로 파계로 단정하고, 승복을 벗고 소성거사·복성거사라 자칭하였으며,

                        "무애가" 를 지어 부르며 군중 속에 퍼뜨리자 불교가 민중 속에 파고들었다.

                        

                        또 당나라에서 들여온 "금강삼매경"을 왕과 고승들 앞에서 강론하여 존경을 받았다.

                        

                        그 후 참선과 저술로 만년을 보내다가 70세에 혈사에서 입적하였다.

                        

                        뒤에 고려 숙종이 대성화정국사라는 시호를 내렸다.

                        불교사상의 융합과 그 실천에 힘쓴 정토교의 선구자이며, 한국의 불교사상 큰 발자취를 남긴, 가장 위대한 고승의 한 사람으로 추앙되고 있다.




                        

원효가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구법(求法)의 길에 올랐다가

                        어느 날 무덤 사이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몹시 지치고 갈증이 나던 차에 그릇에 고인 물을 발견하고는 매우 시원하게 마셨다.

                        이튿날 보니 전날 밤에 마셨던 물은 다름 아닌 해골바가지에 담겼던 물이었다.

                        문득 구토증이 일어나는 순간 원효대사는 확연한 깨달음을 얻고 탄식하며 말했다.

                        

                        "마음이 생기면 우주 만물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해골물이나 깨끗한 물이나 서로 다름이 없구나. 부처님도 이 세상 모든 것은 오직 마음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분이 어찌 우리를 속이겠는가?"

                        

                        그리고는 원효는 조용히 일어나 의상에게 말했다.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소. 스님이나 다녀오시오." 의상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는데... 목숨을 걸고 온 길이 아닙니까?"

                        

                        "당나라에 유학가야 할 이유를 깨닫지 못하던 시절의 이야기요.

                                                                                          스님이나 다녀오시오."



                        

                         

                        

                        원효가 당나라로 가던 길을 돌려 돌아와 열심히 정진하고 있을 때에

                        그 당시 서라벌 장안에 걸승이 있었는데 대안(大安)이라는 스님이었다.

                        

                        이 분은 스님복장보다는 떠돌이와 같은 복색을 하고 다니면서 저자거리를

                        '대안!  '대안(크게 평안 하라는 뜻)!' 하며 외치고 다녔다.

                        

                        하루는 정진하고 있는 원효를 찾아와 말했다.

                        "남산의 어느 굴에 어미 잃은 강아지가 있는데 당신이 가서 염불을 좀 해 줘야겠오."

                        하며 원효를 데리고 갔다.

                        과연 굴에 가니 죽은 어미의 나오지도 않는 젖을 물고서 깽깽 거리며 울고 있는

                        눈도 채 안뜬 강아지들이 있었다.대안이 말했다.

                        

                        "자! 이놈들이 굶어 죽지 않도록 염불을 해 주시오."

                        그 말을 들은 원효는 그 자리에 앉아서 염불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대안스님이" 이보시오 이리 나오시오.

                        그 강아지들에게는 그렇게 경을 해서는 안 되오."

                        

                        그러자 원효는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오?"

                        

                        그러자 대안 스님은 나가서 죽을 끓여 와서 강아지 한 마리 한 마리 의 입에다가 죽을 넣어주었다.

                        

                        그리고는 원효를 보고

                        "이 놈들에게는 이것이 바로 염불이요."

                        그 말에 원효는 해골바가지에서 깨달은 마음법과 함께 걸림 없는 무애 실천 사상의 큰 틀을 이룰 깨달음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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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대사가 분황사(芬皇寺) 무애당(無碍堂)에서 참선을 하고 있었다.

                        제자가 문을 열고 들어와서 대사가 물었다.

                        

                        "요석공주瑤石公主)께서 금란가사(金란袈裟)를 보내 왔습니다."

                        

                        대사는 제자가 내미는 가사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말했다.

                        

                        "너의 눈에는 법의로 보이는 모양인데 나의 눈에는 한 여인의 수많은 번뇌가 얽혀있는

                        망상뭉치로 보이는 구나. 너나 입어라."

                        

                        대사는 태종무열왕의 딸 요석공주가 자신을 사모하고 있음을

                        벌써부터 눈치 채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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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께서 분황사에 있을 때 어느 날 밤, 사복(蛇腹)이라는 청년이 찾아왔다.

                        사복은 태어나서 6세가 될 때까지 일어나서 걷기는커녕 네 다리로 기지도 못하고

                        기어 다녔다.

                        그래서 뱀처럼 배로 기어 다닌다고 해서 뱀 사(蛇), 배 복(腹), 사복이라고 했다.

                        

                        그가 6세가 되던 어느 날 제 어미가 밭에 나갔다 돌아오니 아이가 없었다.

                        그래서 사방 팔방 으로 찾아 다녔지만 찾지를 못했는데 저녁 무렵에야 돌아왔는데

                        양손에 뱀을 잡아 쥐고 언제 기어 다녔냐는 듯이 걸어 들어왔다고 했다.

                        

                        그런 그가 대사를 찾아와 말했다.

                        "평생 농사를 짓고 새끼만 돌보던 암소가 한 마리 죽었는데 같이 가서 묻어주지 않겠소?"

                        대사는 두 말 않고 쾌히 그를 따라갔다.

                        

                        사복이 암소라고 하는 것은 그의 어미였다.

                        둘은 사복의 어머니를 정성스레 장사를 지내면서 사복이 원효에게

                        

                        "어머니 가시는 길에 명복이나 빌어주소." 하자,

                        

                        대사는"무릇 살아있는 것은 고통의 삶을 사는 것이니 태어나지도 말고 사는 동안 병든 것도 역시 고이며...."

                        

                        대사가 이렇게 명복을 빌자, 사복은 그 말을 듣고

                        

                        "너무 기오. 짧게 할 수 없오?"

                        

                        그러자, 대사가 말을 고쳤다.

                        

                        "태어남은 고요 태어나지도 말고..."

                        

                        그러자 또 사복이 말했다.

                        

                        "그것도 기오, 더 짧게 하시오."

                        

                        그러자 원효는 말했다.

                        

                        "태어나지도 죽지도 말지어다."

                        

                        그러자, 사복은

                        

                        "됐오."

                        

                        그렇게 장례를 마치고는 사복이 대사의 제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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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와 대안 스님이 서라벌의 저잣거리를 걷다가 문득 대안 스님이 말을 꺼냈다.

                        

                        "원효 스님, 오늘 저녁 삼악도(三惡道)나 구경하러 갑시다."

                        대사는 궁금한 얼굴로,

                        "삼악도라니요?"

                        대안스님은 껄껄 웃으며 기방(妓房)을 가리켰다.

                        "저 곳이 삼악도가 아니고 무엇이오? 우리 저기 가서 중생제도나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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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 말년에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설총이 찾아왔다.

                        

                        그 때에 대사는 일주문앞에서 낙엽을 쓸고 있을 때였다.

                        

                        아무 말 없이 인사를 하는 아들을 보고 빗자루를 쥐어주며

                        

                        "여기에 있는 낙엽을 쓸어 모아라."

                        

                        그리고는 절로 들어갔다.

                        

                        설총은 깊은 가을에 쌓인 낙엽을 정성스레 쓸어서 모아놓고는. 다시 나온 대사를 보고,

                        

                        "이제 다 쓸었습니다."하니,

                        

                        대사는 설총이 쓸어놓은 낙엽 더미에서 한 아름씩 집어다가

                        원래 있었던 모양으로 일주문 앞에 뿌렸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다시 산사로 돌아갔다.




                        

 



          

                        원효대사가 날린판자

                        

원효대사(917~686)가 경상남도 통도사 앞에 있는 지금의 천성산 에서 주거하고 있을 때다.

                        

 토굴에서 눈을 감고 가부좌를 튼 채 좌선에 들었던 대사는 갑자기 혀를 차면서

 걱정스런 음성으로 혼잣말처럼 뇌였다.

                        

                        「어허, 이거 참 큰일 났는걸. 어서 서둘러야지, 그렇지 않으면 많은 사람이 다치겠구나.」

                        

                        원효대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무엇인가를 급히 찾았다.

                        

                        원효스님을 시봉하기 위해 바로 윗방에 기거하고 있는 학진 사미는 참선 삼매에 들었던 큰방 스님이 갑자기 일어나 황급히 뭔가를 찾는 모습이 이상하기만 했다.

                        

                        「스님! 무슨 일이십니까?」

                        

                        「화급을 다투는 일이 생겼느니라.」 사미승은 어안이 벙벙했다.

                        

                        「스님, 사방이 모두 조용하기만 한데 어디서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멀리 중국에서 변이 생길 조짐이니라.」 사미승은 기가 막혔다.

                        

                        중국에서 일어날 일을 알고 계시다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천안통을 얻어 천하를 두루 볼 수 있는 원효대사의 안목을

                        한낱 사미승이 어찌 이해하겠는가.

                        

                        원효대사는 급한 김에 딛고 서 있던 마루의 판자를 뽑아냈다.

                        

                        그리고는 「신라의 원효가 판자를 던져 중생을 구한다.」는 글을 쓰더니

                        공중으로 힘껏 던졌다.

                        

                        판자는 마치 큰 새처럼 중국을 향해 날아갔다.

                        

                        사미승은 큰스님의 괴이한 행동을 그저 의아스럽게 보고만 있을 뿐이다.

                        

                        한편 천 여명의 스님과 신도들이 법당에 모여 막 법회를 시작하려던 중국 태화사 에서는

                        난데없이 날아든 판자에 모두 놀랐다.

                        

                        「아니 도대체 저게 뭘까. 이상한 물체가 이곳 법당 쪽으로 날아오고 있어요.」

                        

                        한신도가 갑자기 공중을 가리키며 소리치자 몇몇 신도들이 법당에서 나와 하늘을 쳐다보았다.

                        「정말 저게 무엇일까? 거참 이상하게 생겼네.」

                        

                        「나비도 아니고, 새도 아닌 저런 이상한 물체가 어디서 날아왔을까?」

                        

                        「그런데 저 이상한 물체가 법당 주위를 빙빙 돌며 더 이상 날아가지를 않는군요.」

                        

                        법당 밖에서 괴이한 물체가 나타났다고 사람들이 웅성거리자 법당 안에서 법회를 보려던

                        신도들은 이 광경을 보려고 모두 마당으로 나왔다.

                        

                        이때였다. 「우르릉 쾅.」 멀쩡하던 법당이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무너졌다.

                        

                        마침 사람들이 모두 밖으로 나온 뒤라 아무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갑작스런 일에 잠시 정신을 잃었던 신도들이 정신을 차려보니 그제 서야 날아다니던 판자가 태화사 경내에 떨어졌다.

                        

                        사람들은 우르르 몰려가 그 판자를 보았다.

                        

                        「아니 이건, 저 유명한 신라의 원효스님이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날려 보낸 판자로군요.」

                        

                        판자를 보려고 몰려든 사람들은 머나먼 해동의 고승 원효스님이

                        천리안을 갖고 자기들을 구해준 사실을 알고는 모두 동쪽을 향해 합장 배례했다.

                        그리고는 원효스님의 도력에 감탄을 연발했다.

                        

                        「정말 대단하신 스님이시군요.」

                        「일찍이 거룩하신 성자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크신 도력을 지니신 줄은 몰랐습니다. 이제 스승을 만났으니 그분 곁에 가서 수행을 하여야겠습니다.」

                        

                        법회에 설법을 하러 나왔던 한 스님이 원효스님이 도력에 감응하여 신라로 떠나려 하자

                        너도 나도 스님들이 줄을 이었다.

                        

                        스님뿐 아니라 재가 불자들도 원효스님을 친견하고 법을 배우겠다고 나서니

                        천여명이 신라로 향했다.

                        

                        원효스님을 찾아 신라로 들어온 그들은 모두 원효스님에게 제자가 되기를 청했다.

                        

                        그러나 움막 같은 토굴에서는 천여 명이 기거할 수가 없었다.

                        

                        천명의 중국인을 제자로 맞은 원효대사는 천명이 머물 수 있는 새로운 절터를 찾아 나섰다.

                        

                        스님이 산을 내려오고 있는데 어디선가 백발의 산신령이 나타났다.

                        

                        「대사께선 절터를 찾고 계시지요?」

                        「그러 하옵니다.」

                        「이 산중턱 계곡에 이르면 친여 명이 수행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가람 터가 있습니다.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곧장 그곳으로 가보시오.」

                        

                        원효스님은 걸음을 되돌려 산중턱으로 갔다.

                        과연 그곳엔 스님을 기다리고 있는 듯 한 반듯한 터가 있었다.

                        

                        원효스님은 그곳에 절을 세웠다.

                        

                        그리고는 멀리 중국에서 천명의 대중이 왔다 하여 윤자「來」와 멀자「遠」를 써서

                        절 이름을 내원사라 하였다.

                        

                        또 산신령이 나타나 스님의 신을 막았다 하여

                        산신령 만났던 자리는「중방내」라고 불리고 있다.

                        

                        이 산 이름을 천성산 이라 한 것도 중국에서 온 천명의 대중이 원효대사의 가르침을 받고

                        모두 깨침을 얻어 그 산에서 천명의 성자가 나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어느 날 제자들이 밤길을 걷다가 칡넝쿨에 걸려 넘어져 발을 삐고 무릎을 다쳤다.

                        

                        제자들이 다친 모습을 본 원효스님은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있을까 염려하여

                        이 산을 다스리는 산신령께 부탁했다.

                        

                        「산신령께서는 우리 절 대중이 산길을 걷다 칡넝쿨에 걸려 넘어지는 일이 없도록

                        선처를 바랍니다.」

                        

                        그 뒤부터 이산의 칡넝쿨은 옆으로 뻗지 못하고 위로만 꼿꼿하게 자랐다고 한다.

                        

                        래원사 는 음은 같으나 언제부터가 내원사로 표기하고 있다.

                        

                        그리고 원효스님이 마루판자를 뽑아낸 절은 널빤지 를 날려 보냈다 하여 척판암 이라 명했다.





      원효의 사상

    현존하는 그의 저술은 20부 22권이 있으며, 
  현재 전해지지 않는 것까지 포함하면 100여부 240권이나 된다.
  특히, 그의 <대승기신론소>는  중국 고승들이 해동소(海東疏)라 하여 즐겨 인용하였고,
  <금강삼매경론>은  인도의 마명(馬鳴)·용수 등과 같은 고승이 아니고는 얻기 힘든
  논(論)이라는 명칭을 받은 저작으로서 그의 세계관을 알 수 있는 대 저술이다.
                      
  그는 학승(學僧)으로서 높이 평가될 뿐만 아니라,  민중 교화 승으로서 당시 왕실 중심의 귀족화된 불교를  민중불교로 바꾸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또, 종파주의적인 방향으로 달리던 불교이론을 고차원적인 입장에서 회통(會通)시키려 하였는데 그것을 오늘날  원효의  화쟁사상(和諍思想)이라 부르며, 이것은 그의 일심사상(一心思想)·무애사상(無#애14思想)과 함께 원효사상을 가장 특징 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사상은 너무나 다양하여 헤아리기 어려우나 항상 ‘하나’라는 구심점을 향하였고, 화쟁과 자유를 제창하였다.

                        

                        ① 일심사상: 원효의 일심사상은 그의 저서 <금강삼매경론>·<대승기신론소> 등 

                                         그의 모든 저술에서 철저하게 천명되고 있다.

                                         인간의 심식(心識)을 깊이 통찰하여  본각(本覺)으로 돌아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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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조의 무명을 밝히고] 이슈 앤 이슈...차 문화 축제와 원효탄신 1400주년 등

홍진호 기자 | 승인 2017.05.22 17:49



 

한 주간의 불교계 이슈를 짚어보는 이슈앤이슈 시간입니다.

보도국 문화부 홍진호 기자 나와 있습니다. 홍기자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먼저 지난 주말에 서울 도심 산사에서 전통 차를 함께 맛보고 즐기는 차 문화 축제 한마당이 펼쳐졌다고요?

 

네, 지난 토요일 서울 수국사에서 차문화대축제가 열렸는데요.

BBS불교방송과 한국차문화협회의 주최로 향기로운 차향을 음미하고, 다양한 전통 차 문화도 체험하는 특별한 시간이 마련됐습니다.

차문화 축제는 꽃과 차 등 여섯 가지 공양물을 부처님 전에 올리는 육법 공양과 헌다의식으로 시작됐는데요.

수국사 경내에서는 다양한 전통차를 맛보고 다식을 즐길 수 있는 자리가 마련돼 시민들의 발길을 붙잡았습니다.

또 차를 마시는 방법과 예절을 배우는 다례 시연도 펼쳐져, 우리 고유의 차 문화를 배우고 되새길 수 있었습니다.

 

차는 오래전부터 불가에서 즐겨 마셔왔는데요. 이번 행사의 의의 어디에 있을까요?

 

서울 수국사의 주지 호산 스님은 행사에서 차의 향기는 함께 나눌수록 더욱 진하다고 강조하며, 모든 이들이 차를 통해 힐링이 되기를 기원했습니다.

최소연 한국차문화 협회장은 규방 다례를 시작으로 생활다례와 선비다례 등의 시연을 통해 멀게만 느껴졌던 우리 차 문화를 느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강조했습니다.

선상신 BBS불교방송 사장은 차를 마시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불공이자 마음을 닦는 행위라고 생각한다며 차에 담긴 정신을 언급했고요.

박원순 서울시장은 차 문화 축제가 서울시민들의 마음을 달래고 스스로를 성찰해 미래를 설계하고 꿈꿀 수 있는 힘을 주기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지난 주말에 또 어떠한 주요 행사들이 있었나요?

 

생명나눔실천본부가 지난 토요일 서울 동국대 본관 앞 만해광장에서 중·고등학생부터, 대학생, 어르신들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참여하는 생명나눔 희망걷기대회를 열었습니다.

또 서울의 천년고찰 삼각산 진관사는 지난 토요일 오후 경내 특설무대에서 2017 달오름 음악회를 열고 산사의 정취를 지역 주민들과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인터넷방송 유나방송도 개국 10주년을 맞아 지난 토요일 저녁 서울 서초동 한전아트센터에서 ‘내 인생의 순간들’을 주제로 ‘정목 스님과 함께하는 마이클 호페 콘서트’를 열었습니다.

건반 위의 음유시인으로 불리는 마이클 호페는 드라마 가을동화의 삽입곡 ‘잊을 수 없는 마음’으로 국내외 음악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눈여겨 볼만한 주요 행사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HK연구단은 지난주 금요일과 토요일에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원효성사 탄신 1400주년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했습니다.

동국대는 원효스님 탄신 1400주년을 맞아 원효스님의 사상을 문헌학적으로 고찰하고, 원효학의 세계화에 본격 나서기로 했는데요.

대회의 주제는 ‘21세기 원효학의 의미와 전망’이며, 부제는 ‘원효 찬술문헌의 계보학적 성찰’로, 로버트 버스웰 미국 UCLA 교수 등 한중일 3국의 불교석학들이 각각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원효스님하면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고승이자 불교사상가인데요. 이번 국제학술대회의 의미는 무엇 인가요?

 

앞서 잠깐 소개했지만 문헌학적 고찰에 방점이 찍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종욱 동국대 HK연구단장은 “원효의 문헌과 개별 사상을 계보학적으로 분석하고, 그 바탕 위에서 사상사적, 현대적 의미를 추구하고자 한다”고 학술대회의 의미를 밝혔습니다.

동국대 총장 보광스님도 학술대회에 참석해 치사를 했는데요.

보광스님도 이번 학술대회가 원효문헌의 계보를 동아시아 차원에서 집중적으로 규명하는 계기가 되길 바라며, 국내의 원효대사 주석처 복원 등도 발원했습니다.

 

원효스님 탄신 1400주년이 우리사회에 전하는 메시지와 의미는 무엇일까요?

 

화쟁사상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원효스님이 살았던 7세기는 인도에서 넘어온 불교가 완벽하게 중국화 된 시기이자, 다양한 종파불교가 탄생 된 교학불교의 황금기였는데요.

원효스님은 당대에 가장 객관적인 입장에서 수많은 불교사상을 체계화, 종합화 했고요. 그 가치와 성과가 가히 독보적이었기에 동시대 동아시아 3국에서 명성을 얻었습니다.

올해 초에 관련 기획보도를 위해 김종욱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장을 인터뷰 했는데요.

당시 김 원장은 “원효스님은 어디에도 소속이 되지 않았으며, 그렇기 때문에 원효스님은 객관적인 입장에서 불교사상을 종합화 할 수 있었고, 이것은 누구도 하지 못한 업적”이라고 밝혔습니다.

 

한국불교학회도 지난해부터 원효스님 탄신 1400주년을 맞아 학술논문을 공모하고 최근 시상식과 학술대회를 열었죠?

 

한국불교학회는 지난 12일에 원학술대회를 열고, 위대한 불교사상가 원효스님의 생애와 사상을 되새기고 시상식도 개최했는데요.

불교학술진흥상 논문공모전 대상수상의 영예는 이수미 동국대 불교학술원 HK연구교수에게 돌아갔고요.

또 일본 하나노조대 법장스님이 ‘원효의 범망경 주석서와 천태지의의 보살계의소의 비교연구’로 최우수상을 수상했습니다.

이밖에 동국대 담준스님이 원효 윤리의 공리주의적 ‘해석 가능성’ 검토로, 연세대 지혜경 씨가 ‘동아시아 불교의 통합담론 전개에서 원효의 역할’로 우수상을 수상했습니다.

한국불교학회 회장 성운스님은 원효스님은 우리 민족이 낳은 국보라면서, 문재인 새 대통령이 우리시대의 화두인 ‘통합’을 원효스님의 화쟁 사상으로 이루기 바란다고 밝혀 주목받았습니다.

 

대한불교진흥원은 올해로 8회째 불교사상을 현대적 조명을 주도할 인재발굴을 위해 ‘원효학술상’을 시상하고 있지요?

 

대한불교진흥원 김규칠 이사장은 지난 18일 서울 마포구 다보빌딩 3층 법당 다보원에서 제8회 원효학술상 수상자들에게 상금과 상패를 전달했는데요.

대한불교진흥원이 올해로 8번째 시상하는 원효학술상에는 이병욱 고려대 강사와 김태수 서울대 대학원 박사과정, 중앙승가대 대학원 박사과정 정헌스님 등이 각각 수상했습니다.

‘불교 사회사상의 이해’라는 논문으로 비전임교수 부문 우수상을 받은 이병욱 고려대 강사는 불교의 사회 문제 참여가 낮은 상황에서 원전에 근거한 불교 사회사상을 이끌어내 불교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고요.

학생 부문 은상을 수상한 서울대 대학원 박사과정의 김태수 씨와 ‘염불선 연구’ 논문을 발표해 동상을 받은 중앙승가대 대학원 박사과정 정헌스님은 각각 학문적 가능성을 높이 평가받아 수상의 영예를 안게됐습니다.

올해 원효학술상에는 모두 17편의 논문이 응모됐으며 이들 가운데 엄정한 심사를 거쳐 3편의 논문이 선정됐지만 교수 부문 대상 수상자는 내지 못했습니다.

 

해마다 여름에 열리는 만해평화대상 시상식 수상자들도 발표됐지요?

 

예, 17일에 발표 됐는데요.

제21회 만해평화대상에 시리아 구호단체인 하얀 헬멧이 수상자로 선정됐습니다.

만해사상실천선양회는 하얀 헬멧을 비롯해서 만해실천대상에 환경운동가 제인구달을, 만해문예대상에 최동호 한국시인협회장과 클레어 유 미국 버클리대 교수가 선정 됐다고 발표했습니다.

평화대상에 선정된 ‘하얀 헬멧’은 시리아에서 활동하는 구호단체로 정치 성향이나 종교, 종파 상관없이 전쟁터에서 위험에 처한 사람을 돕고 있으며 지난해 노벨 평화상 유력후보로도 거론 됐습니다.

실천대상 수상자로 선정된 제인 구달은 세계적인 침팬지 학자이자 유엔 평화 대사로 인류사를 통틀어 인간과 자연에 대한 이해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문예대상 수상자인 최동호 한국시인협회장은 한국 문단을 선두에서 이끌어온 중진 비평가이며, 클레어 유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 버클리대 한국학센터 상임고문으로 오랫동안 한국어 교육의 발전과 확대를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만해대상 시상식은 오는 8월12일 인제 인제하늘내린센터에서 열리며, 각 부문 수상자에는 1억원의 상금과 상패가 전달될 예정입니다.

 

봄에 다양한 행사와 학술대회도 잇따라 열리고 있는데, 불교의 생명존중사상을 바탕으로 호스피스 인력양성을 위한 전문 강좌도 마련됐다고요?

 

불교여성개발원 생명존중운동본부가 지난 16일과 18일에 이어, 내일 이죠 23일과 오는 25일 등 모두 4차례에 걸쳐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생명존중사상과 호스피스’를 주제로 각계 전문가를 초청해 강연을 열고 있습니다.

18일 강연은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열렸는데요. 동국대 일산병원과 고려대 안암병원 등에서 온 모두 4명의 저명한 의대교수들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남은 2차례 강연은 잠실 불광교육원에서 열릴 예정입니다.

임정애 생명존중운동본부 본부장은 불교에 담긴 생명존중사상을 고찰하고 이를 알리기 위해 모두 4차례의 호스피스 강의를 마련했다고 밝혔습니다.

건국대학교 마취통증의학과 교수이기도 한 임 본부장은 호스피스 활동을 하면할수록 웰다잉은 잘 죽기 위한 것이 아니고, 잘 살기 위한 것이라며, 특히 불자들이 호스피스 강의를 듣고 활동을 한다면, 남은 생을 자신 만이 아닌 모두와 더욱 의미 있고 행복하게 살고자 노력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는데, 승랍 30년 이상의 스님들을 위한 연수교육이 올해 처음 마련됐다고요.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스님들도 배워야 할 분야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가운데, 조계종 교육원이 승납 30년 이상 스님들을 대상으로 특별 연수를 실시합니다.

교육원은 다음달 27일부터 29일까지 2박3일 동안 공주 한국문화연수원에서 ‘종단최고지도자특별과정’을 개설합니다.

이는 교육원이 종사와 명덕법계 스님들만을 대상으로 한 첫 맞춤형 연수교육이어서 남다른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승납 30년 이상의 스님들은 연수교육 의무대상자는 아니지만,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재교육의 필요성이 종단 안팎에서 꾸준히 제기됐기 때문입니다.

 

연수교육에서 어떠한 강좌를 공부하게 될 지도 궁금합니다.

 

건강에서 경영, 사회 등 다양한데요.

불교와 건강 과목은 김용진 한의사가, 최고경영자로 가는 길은 이언오 바른경영 연구소 소장이, 한국사회와 복지는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이사가 각각 특강을 펼칩니다. 

이와함께 정치 분야와 오늘의 한국사회는 박원석 전 정의당 국회의원이, 불교적 경영의 패러다임은 일과 경영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책 '토요티즘'의 저자 임해성 경영컨설턴트가 특강을 합니다.

교육원은 앞으로도 연수교육 사이트 등을 통해 전법교화에 전력하고 있는 스님들이 양질의 맞춤형 연수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방침이라고 밝혔습니다.

 

지난주의 주요 행사와 그 의미에 대해서 잘 들었습니다. 오늘 주요행사로는 무엇이 있었나요?

 

대한불교 천태종을 중창한 상월원각대조사의 열반 43주기를 맞아 천태종이 오늘 총본산인 단양 구인사에서 상월원각대조사를 기리는 열반대재를 봉행했습니다.

열반대제에는 천태조 종정 도용 스님과 총무원장 춘광 스님을 비롯해 정관계 인사들과 신도 등 2만 여명이 참석했습니다.

춘광스님은 추도사에서 대조사의 가르침을 되새기고 스님의 정신을 올바로 계승해나가자고 말했습니다.

상월원각 대조사는 지난 1945년 소백산 기슭에 구인사를 창건한 뒤 1966년에는 고려 대각국사 의천스님을 계승해 천태종을 중창했고 애국과 생활, 대중불교를 종단의 3대 지표로 삼아 천태종의 중흥을 이끌었습니다.

 

우리사회의 생명평화 확산을 위해 매주 화요일 진행되는 ‘한반도 생명평화를 기원하는 걷기 명상이 내일 200번째 행사를 연다고요?

 

예, 생명평화 걷기명상은 불교시민사회네트워크와 출·재가모임 붓다로살자 등 교계 시민사회단체들 주도로 지난 2013년 5월 시작돼 개성공단 재개와 철도파업, 세월호 참사 등 우리 사회 주요 현안들을 주제로 걷기 명상을 진행해왔는데요.

내일 열리는 2백차 걷기 명상은 낮 12시 조계사 생명평화법당 앞에서 출발해 안국동사거리와 수송공원, 삼봉로를 지나 다시 조계사로 돌아오는 구간에서 진행됩니다.

참석자들은 걷기명상을 마치 뒤 그동안의 소감을 나누고 성과를 짚어보는 대화 마당을 개최할 예정입니다.

 

끝으로 이번 주 주요행사 소개해 주시죠?

 

조계종 환경위원회는 오는 25일 오후2시 서울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자연공원 50주년!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합니다.

조계종 총무원은 우리나라에 남종 조사선을 최초로 전한 조계종조 도의국사 다례재를 오는 27일 오전 11시 조계사 대웅전에서 엽니다. 

같은 날에 한국블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는 붓다 빅 퀘스천이, 서울 동국대에서는 한국불교학회가 주관하는 불교와 4차 산업 월례 워크숍이 열립니다.

이밖에 대한불교진흥원은 내일 저녁 7시 서울 마포 다보빌딩 3층 다보원에서 김영수 역사학자를 초청해 중국의 대표 고전 ‘사기’로 중국을 읽다’라는 주제로 화요열린강좌를 개최합니다.

또 BBS 불교방송의 10만 후원 공덕주 모임인 만공회 동참자가 4만 2천명에 다가선 가운데 방송 포교 불사를 널리 알리기 위한 전법 발원 9시간 특별생방송 ‘참 좋은 오늘입니다’은 내일 방송됩니다.

 

홍진호 기자  jino413@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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