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7. 17. 05:28ㆍ글씨쓰기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의 그림 - 1786(정조 10)~1856(철종 7) ‥‥‥‥山寺와 역사산책
지란병분(芝蘭並芬) <17.4×67cm>
김정희는 부채의 중심에 난초를 엷은 먹으로 그리고, 오른 쪽에는 진하게 영지를 그려 넣었다. 추사가 “지초와 난초가 향기를 함께 하다. 남은 먹으로 장난하다.”라고 관서(款書)하고,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과 이재 권돈인(權敦仁)이 발문을 썼다. 권돈인은 “백년이 지난다 해도 도(道)는 끊어지지 않고, 만 가지 풀이 모두 꺾인다 해도 향기는 사라지지 않는다.”라고 썼다. 지초와 난초는 친구를 상징하는 그림이다.
세한도(歲寒圖) <23.5×108.3cm>
제주도 유배 중에 있던 1844년, 59세의 추사가 아끼는 제자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1804∼1865)에게 그려준 서화합벽(書畵合璧)의 명품으로, 국보로 지정된 작품이다. 우선은 그 후 이를 가지고 북경에 가서 청나라 명사 16명에게 제찬(題贊)을 받아왔다.
추사 김정희(1786∼1856)의 대표작인 ‘세한도(歲寒圖)’를 두고, 옛 그림 연구에 업적을 남긴 동주 이용희는 “일견 퍽 싱거운 그림”이라고 했습니다. 소나무가 있고, 엉성하게 보이는 집이 한 채 있을 뿐 아마추어가 보면 왜 좋은 그림인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추사의 일생을 다룬 최초의 본격적인 비평서인 ‘완당평전’을 내놓은 유홍준도 “실경산수로 치자면 0점짜리”라고 거들었지요.
그럼에도 ‘세한도’를 추사 예술의 극치로 꼽는 것은 눈에 보이는 모습을 옮긴 것이 아니라 사의(寫意), 즉 뜻을 그렸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구도와 묘사력이 뛰어나 가치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과 글씨, 글의 내용이 삼위일체를 이루어 좋다는 설명이지요.
‘세한도’는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된 지 5년째를 맞은 1844년 제자인 우선 이상적(1804∼1865)에게 그려준 것입니다. 중인 출신 역관인 이상적은 추사가 낙마하여 절해고도에 위리안치된 상황에서도 의리를 저버리지 않아 스승을 감격케 했습니다.
‘세한도’를 보면, 그림과 발문(跋文)이 각각 담긴 두 장의 종이를 이어붙이고 경계 부분의 아래쪽에는 ‘阮堂(완당)’이라고 새겨진 도장을 찍었습니다. 두 장으로 되어 있지만 하나의 그림으로 보아달라는 뜻이겠지요. 실제로 세상의 시비에 여간해서는 흔들릴 것 같지 않은 엄정한 필치의 발문이 없다면 ‘세한도’는 다소 심심한 그림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길이 108.3㎝짜리 ‘세한도’를 제대로 전시하기 위해서는 10m가 훨씬 넘는 쇼케이스가 필요합니다.‘세한도’ 두루마리에는 이 그림을 감상한 인물 20명이 직접 쓴 감회가 줄줄이 붙어 있기 때문이지요. 지난해 추사 서거 150주년을 기념하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특별전에서도 두루마리를 모두 펼쳐놓을 수 없었습니다.
이상적은 ‘세한도’를 전해받은 해 동지사 이정응을 수행하여 연경에 갔습니다. 그는 이듬해 정월 중국인 친구 오찬(吳贊)이 베푼 재회축하연에서 청나라 명사들에게 그림을 보여주고 16명으로부터 제문(題文)과 발문을 받았지요. 이상적은 장목(張穆)의 제문을 표지삼아 그림과 제발을 한 축의 두루마리로 표구한 뒤 가져왔고 다시 제주도로 보내 추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이상적이 세상을 떠난 뒤 이 두루마리는 제자였던 매은 김병선에게 넘어갔고, 그의 아들 소매 김준학이 물려받아 끄트머리에 감상기를 적어 놓았습니다. 이후 ‘세한도’는 민영휘의 집안이 소유했다가 일본인 추사연구가 후지쓰카 지카시오(藤塚隣)에게 팔아넘겼지요.
이것을 서예가 소전 손재형이 1944년 거금을 싸들고 현해탄을 건너가 3개월 동안 아침저녁으로 병석에 누운 후지쓰카를 문안한 끝에 받아들고 돌아왔다는 얘기는 유명합니다.
손재형은 1949년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위창 오세창과 대한민국 초대부통령 이시영, 독립운동가이자 국학자인 위당 정인보에게 그림을 보여주고 글을 받아 두루마리에 이어붙였습니다. 그런데 훗날 국회의원에 출마한 손재형은 ‘세한도’를 저당잡히고 선거자금을 끌어다 썼지요. 하지만 낙선하여 빚을 갚을 수 없게 되자 그림은 미술품수집가 손세기에게 넘어갔고, 지금도 그의 집안에서 갖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세한도’는 1447년 그려진 안견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에 이어 두번째 많은 제문과 발문이 붙은 조선시대 그림이 되었습니다.‘몽유도원도’에는 안평대군의 발문을 비롯하여 22명의 글 23편이 두루마리 두 축에 표구되어 있지요.
손재형은 오세창 등의 발문을 이어붙인 뒤에도 ‘세한도’ 두루마리에 90㎝ 정도의 공백을 남겼다고 합니다. 누군가 그림을 품평할 수 있을 만한 인물을 만나면 발문을 받겠다는 생각이었겠지요. 하지만 발문을 이어붙이는 전통은 끊어지고 지금까지도 당시의 상태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그림에 감상문을 붙여 후세에 물려주는 풍습은 서양의 캔버스 미술문화에서는 불가능한 두루마리 그림문화만의 특징입니다.‘세한도’처럼 그림 자체의 품격도 품격이지만 발문을 쓴 사람이 누구이고, 그 문장의 수준이 어떠한가에 따라 작품의 가치가 더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은 우리 그림이 갖고 있는 묘미의 하나일 것입니다.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
이 걸작은 세속적으로도 우리 회화사상 가장 흥미진진한 사연을 지닌 그림이다. 그림에 제발을 서너개나 붙인 이상한 모양새는 자신의 걸작에 흥분한 추사가 그림 상단에 힘을 가득 넣은 제발 글씨를 쓰는 바람에 균형감이 떨어진데서 비롯한다. 나중에 할 수 없이 두 개의 제발을 오른쪽 왼쪽으로 절묘하게 붙여 균형을 맞췄다.
왼쪽 하단의 제발 ‘애당초 달준이 주려고 아무렇게나 그린 것이다. 다만 이런 그림은 하나만 있지, 둘은 있을 수 없다.’
달준이는 귀양에서 돌아와 과천에서 은거한 청관산옥 초당에서 추사를 모셨고, <불이선란도>는 그 시절 건네준 것이라는 추정이다. 문제는 그림이 절세 걸작임을 알게된 서각가 소산 오규일(추사의 측근)이 이를 알아챘다는 것. 세번째 제발은 그림 달라고 간청하던 소산 앞에서 난처해진 대가의 심경을 읊은 것이었을 터다. 급기야 소산은 그림을 달준에게서 뺏고 그림에 별개의 제발을 해달라고 간청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세째 제발 옆에 조그만 글씨로 익살스런 제발이 또 끼어들었다. “소산이 보고 억지로 빼앗으니 정말 가소롭고 우습구나.”
이런 일화 덕분에 그림은 제발을 덕지덕지 달게 되었다.
난맹첩(蘭盟帖) <30.2×128.1cm>
<난맹첩>은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작품으로 상하 2권에 각각 9폭과 6폭의 묵란화가 수록되어 있다. 이 첩의 난초 그림들은 난엽의 구성에 있어 기존의 법식을 무시한 채 강인한 필치의 단엽을 산일하게 베풀어 놓았다. 난엽은 누르고 떼기를 서너번 반복하여 굵고 얇음을 조절하였고, 그가 강조하던 삼전(三轉)의 법을 이용하여 난엽 형태에 변화를 주고 운율감을 증진시켰다. 난꽃도 서예의 점과 삐침으로 표현하는 등 전체적으로 서예적 필법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난맹첩은 김정희가 추구했던 서화 일치의 경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영영백운도(英英白雲圖) <23.5×38cm>
제주유배 시절 살던 집을 그린 것으로 생각되는 작품으로 남종화풍의 산수화이다. 김정희는 “매화․대나무․연꽃․국화는 어디에나 있지만, 귤만은 오직 제주 고을의 전유물”이라면서 제주시절 살던 집의 당호(堂號)를 귤중옥(橘中屋)이라 하였다. 이 그림은 고담한 문기(文氣)가 살아있는 작품으로 멀리 있는 벗을 그리워하는 시를 덧붙였다.
‘산천이 멀어서 옛적에는 나를 찾아 주지 않더니, 이제는 어떠한가. 아침저녁으로 서로 대하기를 바란다’
고사소요(高士逍遙) <29.7×24.9cm>
고사가 뒷짐을 진채 사색에 잠겨 오솔길을 거닐고 있는데 단정히 갈무리한 머리와 정갈한 옷매무새에서 고사의 맑은 내면세계가 읽혀진다. 전체적인 필치로 보아 제주 유배시절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좌측 상단에 ‘정희(正喜)’, ‘추사(秋史)’ 라는 두 인장을 찍어 마무리 하였다. 「서원교필결후(書員嶠筆訣後)」에 합장된 그림 중 하나이다.
소림모정(疏林茅亭) <14.2×19.8cm>
산과 강이 어우러진 강안(江岸)에 자리한 띠풀 지붕의 정자를 그렸다. 추사의 회화적 지향이 진솔하게 드러나 있는 작품으로 「고사소요」와 더불어 「서원교필결후(書員嶠筆訣後)」에 합장된 그림이다.
모질도/耄耋圖
모질도는 한국동란 와중에 소실되어, 현존하지 않고 다만 흑백 사진으로만 전해져 추사의 또 다른 일면이 사진으로나마 느낄 수 있다.
출처 : 완당평전
이동희 조회 92 추천 0
추사체라는 글씨체로 우리에게 유명한 서예가이자 화가였던 김정희는 조선 말기, 부패한 정치의 희생양이었습니다. 뼈대있는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출세 가도를 달리다가, 조선을 망하게 만들었던 당파 싸움에 휘말려 거의 10여년 동안 제주도와 북청에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힘들고 기구한 일생을 마쳤지요. 하지만 김정희는 그가 그렸던 대나무처럼 꼿꼿한 삶을 살았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다고 스스로 자부하였으며, 많은 이들에게 학문의 본질과 선비의 도리를 가르쳤습니다. 그의 정신 세계는 그가 그린 그림에서도 볼 수 있답니다.
추사라는 호를 사용하는 김정희가 태어난 집안은 왕족의 후예로서, 본디부터 강직한 성품의 가문이었습니다. 전해오는 일화에는 그가 3세 때 붓을 잡고 글씨를 썼으며, 6세 때는 입춘첩을 써서 붙이기도 했다고 하니, 어렸을 때부터 그 총명함이 남달랐나 봅니다. 24세 때는 과거에 급제하고, 병조참판까지 지내셨던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 여행을 하고, 조선 학문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청의 문화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세계에 감동을 받은 그는 수많은 청나라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그 곳의 선진사상에 빠져들게 되었고, 이는 그의 학문세계에 반영됩니다. 또한 실학사상의 선구자였던 박제가에게 사사를 받으면서,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조선의 문화와 학문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한 거죠. 김정희는 선진학문을 탐구하면서 추사파라는 학풍을 형성할 만큼 조선의 선비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가 주장한 실사구시(實事求是)라는 학문의 정신은 근거없는 지식과 선입견으로 학문을 하지 말고, 사실적인 진리를 탐구하라는 것입니다. 즉 실험과 연구를 거쳐서 객관적이고도 논리적인 사실만을 추구하는 것이죠. 이러한 그의 정신은, 모든 사리사욕과 허영을 버리고, 정직하면서도 대상의 본질만을 압축시켜 표현했다는 평가를 듣고 있는 추사체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청나라 문인에게서 “해동제일의 문장” 이란 칭찬을 받았던 추사는 <서화불분론>이란 미술 이론을 발전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시,서,화를 일치시키는 청나라 예술의 영향으로 “글씨는 그림처럼, 그림은 글씨처럼” 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아마도 장승업이 들었다면 가슴을 쥐어 뜯으며 우울해 했을 얘기지요.
김정희는 당시 최고의 엘리트로서 암행어사와 의정부 검상, 성균관 대가성을 거쳐 병초판서, 형조판서등을 두루 거치면서 출세의 가도를 달렸습니다. 그러던 중 헌종6년, 1840년 당파싸움과 세도정치의 희생양이 되어 제주도 유배길을 오르게 됩니다. 한참 그 세력이 하늘로 치솟던 중 바닥으로 떨어진 것이니,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겁니다.
권력의 무상함을 뼈 속으로 느끼며 추사는 제주도에서의 귀양살이를 자신의 학문과 예술을 재정비하는 시간으로 삼았습니다. 바닷바람이 많기로 유명한 그 곳에서 자신의 내면 깊숙히에 있는 모든 욕망을 바람에 날려보낸 것 같아요. 그 고독한 유배생활 중에 추사는 그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를 정립하였으며, 많은 제자도 길렀습니다.
특별히 그는 벗들과 차를 만들어 마시며 시를 짓는 것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참선과 차를 끓이는 일로 또 한 해를 보냈다”라는 글도 남겼을 정도니,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시죠? 추사와 차를 마시던 친구들은 그에 대해 “폭우나 번개처럼 당당했다”고 말합니다. 때로는 온화했으며 슬픈 소식을 들으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고 하구요.
추사는 제주도에서 풀려난 뒤에도 몇 번의 유배생활을 더 겪은 후에 관악산 기숡에서 은거하다가 71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습니다. 그의 영정처럼 하얀 수염과 고매한 문인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靜坐處茶半香初 妙用時水流花開
고요히 앉았노라면 차가 한창 익어 향기가 나기 시작하는 듯 하고
신묘한 작용이 일어날 때는 물이 흐르고 꽃이 열리는 듯하네
[고사소요도(高士逍遙圖) (1844) ]
고사 소요란 “뜻 높은 선비가 거닐다”는 뜻입니다. 그의 그림 중 유일하게 사람이 그려져 있는 작품이라고 하네요. 원나라 문인화풍의 간결한 필치가 엿보이기도 하는 데요, 작품의 완숙미는 다른 작품들에 비해 떨어진다고 합니다. 여느 그림처럼 가슴 속에서 붇받치는 감동에 밀려 그려진 것이 아니라 이성적인 사고로 그려진 듯하다는 평을 받기도 합니다.
[ 세한도(歲寒圖) (1844)]
이 그림은 김정희의 가장 대표적 작품이자, 조선 시대 문인화 중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이 <세한도>에 대해 평가를 하는 것 조차 불경스러운 일로 간주될 정도로 신격화, 신비화 되어 있죠. 이는 제주도 유배 중에 그의 처연한 심경을 생생하게 그려냈다고 생각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지란병분(芝蘭竝盆) (1844)]
“지초와 난초가 향기를 함께 하다” 는 뜻의 그림입니다. 중심부에 난초를 엷은 먹으로 그리고, 오른 쪽에 진하게 영지를 그렸는 데요, 영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이 두 가지가 추사의 정서를 보여주는 듯 조화롭게 그려져 있습니다. 왼쪽에는 대원군인 이하응과 친구 권돈인의 발문이 적혀있습니다.
[ 부작란도(不作蘭圖) (1844)]
문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추사의 전형적인 난화입니다. 그는 난과 대나무를 많이 그렸는 데요, 대원군도 그에게 난 그림을 배웠을 정도입니다. 특히 유배생활 중에 제주도의 한란을 많이 관찰하고, 아끼며 그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그림 속의 힘찬 난을 보면, 꼿꼿한 그의 기개가 보여지는 듯 합니다. 그나 저나 그림에 도장은 참 많이도 찍혀 있네요.
[ 영영백운(英英白雲) (1844)]
“산천이 멀어서 옛적에는 나를 찾아 주지 않더니, 이제는 어떠한가. 아침저녁으로 서로 대하기를 바란다” 는 발문이 오른 쪽에 적혀있네요. 멀리 있는 벗을 그리워하다가 외로움의 차원을 넘어, 이제는 허허로움마저 느낄 수 있네요. 제주 유배 중에 기거하던 자신의 집을 그렸습니다. 고고한 모습이죠.
[ 증 번상촌장(樊上村庄) 난 (1844)]
추사가 제주 유배시절에 친구 권돈인을 위해 그린 작품이며 번상촌장은 번리에 살던 권돈인의 별서이름이라고 하네요. 왼쪽 위의 발문은 권돈인이 붙인 것입니다. “난초꽃과난초잎이 산중 서재에 있는데 어디에서 부는 가을바람이 사람의 애를 태우네 바람과서리에 쉽사리 꺽인다면 어찌 오래도록 산중 서재에 향기를 남기겠는가!”
[ 추사 김정희 서 (1844)]
조선 최고의 명필로 칭송받고 있는 그가 고독한 유배 생활 중에 이루어낸 예술 세계입니다. 세상의 권력과 물욕에서 벗어나 자신을 들여다 보며, 자신을 비워 창조해낸 거죠. 조선시대에는 글씨자체의 멋과 아름다움도 즐겼는데요, 글씨도 그림처럼 열정을 다하여 써 내려간 그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 묵란도 (1892)]
대원군 이하응의 묵란도 입니다. 그는 추사에게 난치는 것을 배웠는 데요, 추사는 이하응을 조선에서 제일 가는 난 그림을 그린다고 칭찬하였습니다. 마치 벼랑에 핀 듯 바위 틈새에 피어 난초와 괴석이 어울린 석란의 모습인데요, 그림 두 폭이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는 대원군이 노년의 병중에 그렸음에도 매우 깔끔하고 고결하게 그려내었습니다.
[ 방석도산수도 (1850)]
추사가 아끼던 제자 허유가 젊은 시절에 그렸던 그림입니다. 그림 위의 발문은 김정희가 썼습니다. 깔끔하고 고매한 정서가 전형적인 문인화의 품위를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젊은 감각 그대로 다소 거칠지만 나름대로 진지한 태도도 묻어나고 있네요.
[ 묵란도 (1850)]
추사를 무척 따랐던 조희룡의 작품입니다. 그는 특히 난초와 매화를 잘 그렸는데요, 추사는 그에 대해 “조희룡은 난초를 배워서 치지만, 끝내 화법이라는 한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가슴속에 문자기가 없기 때문이다.”라는 평을 합니다. 이는 화법과 기교에만 치중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나름대로 절제된 표현과 힘찬 필선은 후대인들에게 인정받고 있습니다.
cafe.daum.net/korloy-ob/CX9I/8 한야어울림
'글씨쓰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성각(茶星閣) / 추사 글씨 外 (0) | 2017.07.20 |
---|---|
이광사 행서 화기(李匡師 行書 畵記) (0) | 2017.07.20 |
신라의 서예 (0) | 2017.07.13 |
[스크랩] 북송 4대 명필 황정견 서예작품 (0) | 2017.07.13 |
무계정사(武溪精舍) (0) | 2017.07.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