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청시대(明淸時代)의 한장다마무역(漢藏茶馬貿易)  

2017. 7. 18. 22:26차 이야기


2008.11.17 12:30:40 (*.120.235.31)


명청시대(明淸時代)의 한장다마무역(漢藏茶馬貿易)  

 

                                                                          村顔  朴 永 煥 (中國 四川大學 歷史學 博士)


1.한장다마무역(漢藏茶馬貿易)1)의 기원(起源)

 중국(中國)은 방대한 다민족(多民族)국가로서 티벳(西藏)2)과는 일찌기 당(唐)나라 때부터 지속적인 우호관계를 맺어 왔다. 군사력에 있어 당나라와 거의 대등(對等)한 위치(位置)에 있던 투뽀(吐蕃:지금의 티벳)3)왕국은 수시로 당(唐)의 변경(邊境)을 침략하여 당나라 왕실의 공주와 혼인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를 견디다 못한 당태종(唐太宗)은 정관(貞觀) 15年(서기641년)에 드디어 문성공주(文成公主)를 투뽀의 대왕(짠푸․贊普)인4) 쏭짠깐뿌(松贊干布)에게 출가를 시켰으며, 이 시기는 바로 중국 내지(內地)의 차(茶)가 티벳(西藏)으로 전파되는 시기이기도 하며, 티벳인의 음차기원(飮茶起源)이 되기도 한다. 그 후 경륭(景隆) 원년(서기707년)에 당중종(唐中宗)이 금성공주(金城公主)를 투뽀왕국으로 다시 출가시킴으로써, 양국의 관계는 그야말로 아주 밀접한 구생(舅甥:외삼촌과 조카)의 관계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한장(漢藏)의 역사는 한장 다마무역의 관계를 통해 일천여 년 동안이나 계속되어간다.




2.역대(歷代) 한장다마무역(漢藏茶馬貿易)의 발전과정


  당송(唐宋)이래,중국이 방대한 다민족으로 형성되어 온 국가라는 점에서 볼 때, 다마무역(茶馬貿易)은 한장관계(漢藏關係)의 발생과 발전의 오랜 세월동안 매우 일관성있게 진행되어 온 중대한 역사적 사건이다. 소위(所謂) ‘한장다마무역(漢藏茶馬貿易)’이란 바로 티벳인(西藏人)들이 말(馬)이나 기타의 토산품을 이용하여 중국 내지(內地)에서 생산되는 차(茶)를 교환해 간 일종의 ‘물물교역(物物交易)’형식의 경제활동이었다. 이러한 경제활동은 후에, 중국 서북지역의 도시경제의 번영과 한장(漢藏) 간의 정치、경제 및 문화 그리고 교통의 발달에까지 큰 영향을 미치게 되며, 다민족인 중국의 민족단합의 차원에 있어서도 한장(漢藏) 간의 우호관계를 유지시켜주는 유대 작용까지도 하였다.  


  당대(唐代)로부터 시작한 한장다마무역은 송대(宋代)의 중흥기(中興期)를 거쳐, 명대(明代)에 이르러서 갑자기 쇠락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당대(唐代)에 티벳 고원에서 발흥한 투뽀(吐蕃)왕국은, 당나라와 호시(互市)관계를 형성하게 되는데, 개원(開元) 연간(年間)의 기록에 의하면 주로 츠링(赤岭) 일대에서 호시(互市)가 많이 이루어졌다.5) 그러나 이 때의 한장다마무역은 아직 초기 단계로서 국가적으로도 정착된 제도가 없었으며, 그 교역의 품목 또한  다마(茶馬)에 국한된 것이 아닌 종합무역의 형태였다.


  당대(唐代) 이래, 중국은 군마(軍馬)의 중요성과 그 수요에 대한 인식이 절박해지면서부터 서북 변방민족에 대해 ‘이차역마(以茶易馬:차로써 말을 바꾸다)’의 정책을 일관성있게 시행하게 된다. 송대(宋代)에서는 티벳과의 접경지역에 다마사(茶馬司)를 건립하고 ‘다법(茶法)’을 제정하여 차(茶)의 판매를 국가의 전매로 하는 ‘각다법(榷茶法)’을 실시하였다. 이는 당시 송나라의 시급한 군마(軍馬)의 문제를 해결해 줌과 동시에 날로 그 세력을 팽창해가는 티벳을 회유하여 서북 변방의 안녕을 도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재정수입에 있어서도 한 몫을 하게 된다. 

  명대(明代)는 역대 한장 다마무역의 최고 전성기로서, 제도적인 측면에서 대단히 세밀함을 보였는데 차발마제도(差發馬制度)의 건립과 금패신부(金牌信符)의 제작이 바로 이러한 것이다. 이는 당송(唐宋) 때에 있었던 단순한 물물교역형태와 다마호시(茶馬互市)의 다마사제도(茶馬司制度)가 아닌 부세(賦稅)의 제도로서 티벳의 각 부족에게 조공이 아닌 부세의 의무를 떠맡기는 획기적인 제도의 변화라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명나라는 조공호시(朝貢互市)를 제도화하여 정착시킴으로써 차발마제도의 실행에서 오는 티벳 각 부족의 수령과 종교지도자들의 불만을 해소시키고 그들을 회유하는 데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차발마제도와 조공호시제도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구체적으로 서술하겠다.)


  이상의 제도적 기틀 아래, 명나라는 차상(茶商)들이 개인적으로 차를 판매하는 것을 법으로 엄격히 금지시키는 ‘사차금지(私茶禁止)’의 조치를 내리는가 하면 그 처벌에 있어서도 전대(前代)의 어느 왕조보다 더욱 구체화되고 엄격하였다. 이로써, 티벳은 중국의 국가기관(茶馬司등의 정부기구)을 통해서만 차(茶)를 수입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중국이 차(茶)를 미끼로 변방의 소수민족을 회유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통치권 안에 귀속시켜 변방의 안녕을 도모하고 국방에 필요한 군마(軍馬)를 손쉽게 얻으려는 정치적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3.중국 차(茶)의 전래(傳來) 와 티벳인의 음차(飮茶) 배경


   티벳에 차가 전래된 시기와 그들의 음차 기원에 대해서는 상세한 역사문헌의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당나라의 문성공주가 티벳왕국으로 출가한 시기를 통상 중국 차의 전래시기와 티벳인들의 음차 기원으로 삼고 있다. 물론 각종 문헌의 서로 다른 기록으로 말미암아 학자들 간에 이론(異論)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아직은 정확한 고증(考證)의 방법이 없으므로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시기(문성공주가 티벳으로 출가한 시기)를 잠정적인 정설(定說)로 삼고 있다.

  티벳고원 지대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티벳인들에게 있어 차(茶)는 매우 절실한 생활필수품이었을 뿐만 아니라, 마치 생명(生命)의 약(藥)처럼 중요시되어져 왔다. 그 이유는 대략 다음의 세 가리로 집약해 볼 수 있다.


  첫째, 티벳인들은 유、육류(乳、肉類)를 주식(主食)으로 하는 유목민족(遊牧民族)으로서 채소나 과일의 섭취는 거의 불가능했다. 티벳 고원의 대부분 지역은 해발 3、000미터 이상인데다가 평균 온도가 0℃이하기 때문에 농업보다는 목축업이 비교적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야채나 과일 대신 차(茶)를 마심으로써 인체(人體)에 필요한 식물성의 영양소를 대신 섭취하게 되었다.


  둘째, 티벳 고원은 공기(空氣)가 매우 희박한데다가 기압이 낮고 기후가 건조하며 연평균 상대습도가 40%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인체에 충분한 음료를 별도로 공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티벳인들이 마시는 하루의 음차량(飮茶量)은 거의 30~40그릇에 달하는데, 이 양은 약 5~7리터 정도에 해당하는 양으로써, 하루 세 끼 식사 때마다 거르지 않고 마시는 음차량을 제외하고라도 평소 얼마나 많은 양의 차를 마시는지를 과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차(茶)는 여러 가지 생리(生理) 활성분 및 비타민、아미노산 등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 의약(醫藥)이 비교적 낙후된 티벳 지역의 티벳인들에게 있어서는 잡병을 치료하고 예방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약품과도 같은 것이다. 실제로 티벳의 의약전적(醫藥典籍)에는 차(茶)가 감기、풍한(風寒)과 설사、복통 등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데 좋은 양약(良藥)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티벳인(西藏人)들의 다실 내부 모습. 그들은 중국 사천성 명산(名山/蒙頂茶 유명한 蒙山이 소재하는 縣)이나 아안(雅安)시에서 제다되어 티벳지역으로 수출되는 변차(邊茶/흑차류)에 치즈나 우유 등을 섞어 만든 '쑤여유'차를 마신다.  내부에 보이는 긴 나무 통이 쑤여우 차를 만드는 도구.

 

  이상의 서술한 세 가지 주요 원인은 마침내 티벳인들을 ‘불가일일무차이생(不可一日無茶以生:차가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다)’의 상태에까지 이르게 하였다. 이러한 티벳인들의 차(茶)에 대한 절실한 요구는 때마침 군마(軍馬)의 수요가 시급했던 중국과 그 조건이 잘 부합되었다. 이러한 서로의 필요성에 의해 한장다마무역(漢藏茶馬貿易)은 당대로부터 송、원、명、청에 이르기까지 수대에 걸친 왕조의 교체에도 불구하고 천여 년 동안을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게 된다.



4.명대(明代)의 차발마제도(差發馬制度)와 조공호시(朝貢互市)  


  명조(明朝)는 당、송、원을 이어 새롭게 등장한 강력한 중앙통치왕조로서, 특히 원(元)나라가 티벳(當時의 우쓰장<烏思藏>)을 중국의 영토 내에 정식으로 귀속시킨 후, 명조는 중국 내지(內地)와 변강지역(邊疆地域)의 무역왕래에 있어 무역방식과 제도 그리고 그 내용에 이르기까지 전대(前代)에 비해 매우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당시, 명(明)나라는 비록 원나라 때의 영토를 그대로 계승하지는 못했지만, 다마무역(茶馬貿易)을 통해 정치、경제、문화교류 등에 걸친 다방면(多方面)에서 티벳을 자신들의 세력권 안으로 귀속시키려는 통치의지를 집중적으로 구현시켜 나간다. 명대에 계속 이어지는 한장다마무역(漢藏茶馬貿易)의 관계는 얼핏 보면 일종의 단순한 경제활동에 불과하지만, 사실 그 배경 속에는 명왕조(明王朝)가 티벳을 통치、지배하려는 정치적 의도(意圖)와 야심(野心)이 더욱 짙게 깔려있는 정치적 관계라는 사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茶馬貿易을 관장하던 다마사(茶馬司)/현,중국 四川省 名山縣 新店鎭 소재

 


  명대의 한장다마무역 진행과정에서 가장 특이할 만한 점이라면 바로 공전절후(空前絶後)의 다마무역제도인 ‘차발마제도(差發馬制度)’의 건립이다. 각종 문헌기록에 의하면 ‘차발(差發)’은 부렴(賦斂), 즉 부세(賦稅)를 의미한다. 명나라는 바로 이 ‘차발마제도’를 통해 티벳인들에게 말(馬)을 세금으로 상납하게 하고 그 대가로서 차(茶)를 하사품으로 주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명나라가 세금으로 말을 받고 대가로서 차(茶)를 지불했다는 것이다.


  이는 차발마제도가 표면상에 있어서는 분명 부세제도(賦稅制度)이었으나, 실제상에선 여전히 이차역마(以茶易馬)의 무역형식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명대(明代)가 전대(前代:唐、宋)와 현저하게 다른 점은 그것을 부세의 형식으로 제도화시켰음은 물론 다마무역(茶馬貿易)의 주동권(主動權)을 완전히 장악했다는 것이다. 이는 명나라 전기(前期)의 다마무역에 있어 매우 중요한 무역의 방식이 되며, 역대 다마무역의 획기적인 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문헌에 기록된 당시의 교역량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차발마제도가 막 건립되었던 명태조(明太祖) 25년(1392년), 티벳은 차발마 10、340여 필을 상납하고 하사받은 차(茶)는 고작 30여 만근에 불과하였다.6) 이를 환산해 보면 말 1필과 차 30근을 맞바꾼 것이며, 이는 차발마제도가 아직 건립되기 전인 명초기에 말 1필에 차 1、800근을 지불한 것에 비하면 너무나 현저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7) 이것이 바로 명나라가 바라는 차발마제도 건립의 목적이었다.


  그러나 차발마제도가 아직 확립되지 않았던 실행 초기(初期)라  변방의 관리들은 직권을 남용하고, 조정(朝廷)의 명의(名義)을 내세워 티벳의 말을 개인적으로 착복하는 등의 부정부패(不正腐敗)가 빈번히 행해지곤 하였다. 그래서 명나라 조정에서는 이를 방지하고 차발마제도의 정상적인 운영과 공정성을 위해 홍무(洪武) 26년(1393년)에 드디어 동질(銅質)의 ‘금패신부(金牌信符)’라는 것을 제작하여 티벳 각 부족의 수령과 승려들에게 발급해 주었다.8)


  이것은 일종의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마패(馬牌)의 성격과 흡사한 것으로서, 티벳의 각 부족들이 변방으로 파견된 관원들에게 말을 상납하거나 차를 하사받을 때 자신의 금패와 관원의 것을 반드시 대조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탐관오리에게 속아서 말을 상납하는 일을 방지함은 물론 티벳의 말이 탐관들에 의해 내륙으로 밀수되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封鎖)하기 위한 것이었다.


  문헌에 의하면 금패신부(金牌信符)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상단 일행에 ‘황제성지(皇帝聖旨)’,하단의 좌측 일행에는 ‘합당차발(合當差發)’ 그리고 하단의 우측 일행에는 ‘불신자사(不信者死)’”라고 새겨져 있다. 또한 문헌에는 여기에 덧붙여 “‘호시(互市)’라고 이르지 않고 ‘교역(交易)’이라고도 이르지 않으니 이를 일러‘차발(差發)’이라 한다.”라고 규정하여 기록하고 있다.9) 위 금패신부의 명문(銘文)과 문헌의 부연(敷衍) 설명 속에서 우리는 명나라가 차(茶)를 이용하여 티벳을 자신들의 통치권 아래로 완전히 귀속시켜 군신(君臣)의 관계를 확립하려는 철저한 정치적 의도와 목적을 다시 한번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명대의 다마무역 중에서 또 하나의 특이할 만한 점은 바로 ‘조공호시(朝貢互市)’인데, 그 실체(實體)는 바로 조공의 형식을 빌어 한장(漢藏) 간에 이루어진 또 하나의 다마무역(茶馬貿易)이었던 것이다. 당시 명나라는 티벳 각지에 흩어져 있는 티벳의 종교지도자 및 각 부족의 수령들에게 봉작(封爵)을 내리는 ‘분봉정책(分封政策)’을 실시하여, 한편으론 그들을 회유하고, 또 한편으론 티벳지역에 정책기구를 설치하여 중앙에서 관리(駐藏大臣)를 파견하거나 그들을 임명하여 티벳을 직、간접으로 감시하고 통치하는 정책을 병행하였다.


  명조(明朝)의 분봉정책(分封政策)에 의해 작위(爵位)를 받은 티벳 각 부족의 수령들과 승려들은 해마다 줄을 이어 명나라 조정(朝廷)으로 조공을 오거나 혹은 사자(使者)를 파견하여 조공함으로써 명왕조에 대해 신하의 예를 표명(表明)하였다. 이 때 그들이 바친 조공품의 대부분은 말(馬)이었고, 명나라 조정에서 하사한 회사품(回賜品)의 대부분은 중국 내지(內地)에서 생산되는 차(茶)였다. 아울러 조공의 대가로 돌아오는 회사품은 차발마제도에 의한 불평등한 대가와는 전혀 다른 조공의 삼배에 달하는 후(厚)한 대가였다. 이 때문에 그들의 조공회수와 조공인원은 나날이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으며, 티벳인들의 목적 또한 조공을 구실로 차(茶)를 얻어가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납공(納貢)과 상사(賞賜)로 이루어지는 조공호시(朝貢互市)는 티벳에 있어서 중요한 경제왕래(經濟往來)이었던 것이다.


  이 때 명나라가 조공을 오는 티벳 수령과 승려들에게 주는 사차(賜茶)의 규모는 실로 가관(可觀)이었다. 명헌종(明憲宗)의 성화(成化) 18년(1482년)에 총 412명이 조공(朝貢)을 왔고, 일인당 받은 사차(賜茶)는 50근씩이었다. 티벳의 수령들과 승려들이 받아간 사차(賜茶)의 총수량은 약 2만 6백근이었다.10) 명무종(明武宗)의 정덕(正德) 13년(1518년)에는 조공을 온 티벳 승려들에게 내린 사차(賜茶)의 총수량이 무려 8만 9천근에 달했다.11) 이는 성화(成化) 연간(年間)의 사차(賜茶) 양의 4배로써 조공의 인원과 회수가 얼마나 많이 증가했나를 잘 입증해 준 것이라 하겠다. 이 때 티벳인들이 바친 공마(貢馬)의 대부분은 열등마(劣等馬)로서 전투에는 전혀 쓸모가 없는 화물 운반용에 불과했으니 그들의 조공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즉, 조공(朝貢)은 형식이고 그 실체(實體)는 바로 다마무역(茶馬貿易)이었으며 티벳인들은 오직 차(茶)를 구해 돌아가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이러한 목적을 바탕으로 한 티벳인들의 조공의 증가 추세는 명헌종(明憲宗) 초기에 이미 나타났으며, 이에 재정(財政)의 위기감을 느낀 명나라는 마침내 조공에 관한 법을 제정하게 된다. 이 법규는 태조 홍무 연간(年間)에 제정되었던 ‘삼년일공(三年一貢)’의 구례(舊例)12)를 바탕으로 하여 구체적으로 심화 발전시킨 것으로 지역과 신분에 따라 조공의 시기와 회수 그리고 조공 사절단의 인원수의 제한에 이르기까지 아주 상세하게 법으로 규정하여 명시하고 있다.13) 이 법규는 성화(成化) 연간에 수차례에 걸쳐 강조 실시되지만, 여전히 잘 지켜지지 않았다.


  이상에서 서술한 명대의 ‘차발마제도’와 ‘조공제도’를 종합적으로 비교해 보면 꽤 흥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차발마제도가 티벳에 대한 명왕조(明王朝)의 통치 의지를 구체적으로 실현시켜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조공제도는 반대로 티벳인들이 중국에서 대량의 차(茶)를 구해가려는 목적을 실현하는 데 유리한 작용을 했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볼 때 명나라는 겉으로는 차발마제도(差發馬制度)를 통해서 티벳을 명나라의 직、간접의 통치하에 두었고 안으로는 조공호시(朝貢互市)를 통해 그들을 회유하는 양면성의 정책을 병행하였던 것이다.



5.청대(淸代) 한장다마무역(漢藏茶馬貿易)의 쇠락(衰落)


  명대(明代)에 이렇게 극도로 발전했던 한장다마무역도 청대(淸代)에 이르러서는 그야말로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데, 그 원인은 대략 두 가지 정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청나라는 명나라와는 달리 십전십미(十全十美)의 무공(武功)을 자랑하는 왕조였기 때문에 원(元)나라처럼 티벳을 중국의 영토로 복속시킬 수 있는 충분한 무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므로 회유(懷柔)와 통치(統治)의 목적수단이었던 다마무역(茶馬貿易)은 그들에게 있어 더 이상 필요치 않았던 것이다.


  둘째, 역대 왕조가 티벳과 다마무역을 계속 이어서 발전시켜 온 주된 목적은 중국 내지(內地)에서 결핍된 군마(軍馬)를 충당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청나라는 이미 만주(滿洲)에 우수한 전마(戰馬)를 충분히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티벳의 말이 절실히 필요할 까닭이 없었다. 따라서 한장다마무역도 급속히 쇠락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청나라 때에 다마교역(茶馬交易)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청나라가 비록 한장다마무역의 쇠락기에 속하긴 하나, 청나라 한 시대를 두고 봤을 때, 청나라도 한 때 한장다마무역이 흥성했던 적이 있었다. 중원(中原)에 막 입성한 청나라 초기에는 명대와 마찬가지로 ‘차정(茶政)’과 ‘마정(馬政)’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청나라가 자금성(紫禁城:北京)에 입성한 순치(順治) 원년(서기1644년)의 중국은 빈번한 내외전란(內外戰亂)과 천하를 통일시키려는 전쟁이 격렬히 진행 중인 상태였다. 게다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는 명나라 잔여세력의 반청봉기(反淸蜂起) 또한 도무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던 대혼란의 국면이었다. 초기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전란의 연속으로 청나라는 많은 전마(戰馬)를 생산、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전대(前代) 어느 왕조보다도 더 군마(軍馬)의 수요가 시급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혼란은 한장다마무역이 청대 초기에 다시 한번 흥성하게 하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전체적으로 다마무역의 쇠락기에 놓인 청대(淸代)에, 차나무(茶樹)의 종식(種植)은 오히려 명대(明代)보다 더욱 보편화되고 확장되는 추세를 보였다. 이 때 차(茶)의 생산량 증가와 품질의 고급화는 명대보다 훨씬 진보한 것이었으며, 제도방면에 있어서도 명대의 ‘차정(茶政)’이나 ‘차과(茶課)’ 등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이렇게 한장다마무역은 청나라 초기 순치(順治) 연간에 다시 한번 급속도로 회복하게 되는데, 전국이 비교적 안정된 강희(康熙) 초년에 이르러 중국의 대혼란이 끝나고, 강희(康熙) 57년(1718년)에 티벳이 청나라 영토의 일부분으로 정식 귀속됨에 따라 일천여 년을 계속되어 온 한장다마무역은 마침내 쇠락의 길로 접어들고 만다. 그러나 그 후에도 한장다마무역은 부흥과 쇠락의 반복을 거듭하는 시흥시파(時興時罷)의 국면을 맞이하기도 하지만, 마침내 건륭(乾隆) 연간에 이르러서는 역사의 장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최후의 쇠락기를 맞이하게 된다.



6.한장다마무역(漢藏茶馬貿易)의 의의(意義)와 역할(役割)의 전환(轉換)

                                  ----- 일반물자 경제로의 전환 -----


  한장다마무역이 사라지는 청대(淸代)에 이르러, 한장(漢藏) 간의 상업무역은 오히려 더 발전하고 번영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한장다마무역의 본질인 ‘이차역마(以茶易馬)’의 기능이 다른 물자경제의 무역활동으로 대체되어 그 역할이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역대 한장다마무역의 기능과 역할은 분명 ‘이차역마(以茶易馬)’였고 주요 품목 또한 티벳의 말(馬)과 중국의 차(茶)였다. 그러나 이 때 ‘다마(茶馬)’와 함께 부수적으로 교역이 이루어졌던 기타 물품들이 있었는데, 그 수는 비록 극소수이긴 하나 티벳인들은 자신들의 특산품―갓끈、모포、후추、불상(佛像)、약재 등―을 가져 와 한족(漢族)의 종이、비단、철、솥、동기(銅器) 등의 생활필수품으로 바꾸어 갔다.


  특히 청대에는 ‘이차역마(以茶易馬)’의 역할과 기능이 약해지면서 기타 경제물자의 교역이 차지하는 비중은 점차 커져, 마침내 한장(漢藏) 간의 사회、경제물자 및 문화교류의 활동으로서 그 기능을 대신하게 된다.


  이 때, 역대 한장다마무역이 이루어졌던 교역의 경로(茶馬道)와 성시(城市)는 중국 서북지역의 교통과 도시의 발달을 가져왔는데, 따지옌루(打箭爐)、루띵(瀘定)、쏭판(松潘)、빠탕(巴塘)、루훠(爐霍)、창뚜(昌都) 등이 그 대표적인 도시이다.


  이들 도시는 다마무역의 교역이 있기 전에는 산골 오지(奧地)의 작은 마을에 불과했으나 명、청대(明、淸代)를 거치면서 급속도로 발달하게 되었다. 아울러, 이 도시들을 연결하는 다마(茶馬) 운반의 경로는 후에 티벳과 중국 내지(內地)를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가 되었다.


  다마무역(茶馬貿易)으로 인한 서북지역의 도시와 교통의 발달은 동시에 소수민족의 인구증가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청해(靑海) 일대의 인구가 원대(元代) 초기에 170호(戶)에 불과했던 것이 명대 중기에는 약 2천여 호로 늘게 된다. 무려 10배에 이르는 인구의 증가를 보인 것이다.


  아울러, 차(茶)의 국가 전매(專賣)는 서북 소수민족의 목축업의 발달과 중국 내지(內地)의 다업(茶業) 생산의 발전을 촉진시켰으며, 나아가 중국의 천하통일과 소수민족과의 단결을 촉진시키는 등의 유익한 결과를 가져다 주게 되었다.


  수대에 걸친 왕조의 교체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일관성있게 전승、발전되어 온 한장다마무역(漢藏茶馬貿易)은 중국 역대왕조에 있어서 변방의 통치와 안녕을 위해 대단히 중요한 정치、경제적 수단이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재정(國家財政)의 일부를 충당하는 주요한 재원(財源)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7.결론(結論)


  이상의 서술한 내용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다. 일천여 년을 계속되어 온 다마무역(茶馬貿易)의 발달과정을 거치면서 중국은 점차 세력을 주변으로 확장하고 군주(君主)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해 나갔다.


  반면, 티벳은 당나라와 대등한 세력을 누렸던 투뽀(吐蕃)왕국의 붕괴(崩壞)이후, 점차 그 세력을 잃고, 종족(種族)은 오분사열(五分四裂)되어 다시는 단합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고 점차 중국의 세력권 안으로 흡수되기 시작하는데, 명대에 이르러서는 조공(朝貢)으로 말을 상납하는 것 외에도 차발마제도를 통해 말을 상납함으로써 부세(賦稅)의 의무까지 지게 되었다. 급기야 청대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자신들의 영토마저 온전히 보존치 못하고 중국의 영토로 완전히 복속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중국의 역대 왕조들이 수차례의 왕조의 교체에도 불구하고 계속 한장다마무역을 전승、발전시키고 시행해 온 주된 이유이며 정치적 목적이었던 것이다.


          《明代川陝14)茶馬互市數量表(명대천섬다마호시수량표)》

  연대(年代)

  지구(地區)

역마수(易馬數)     (匹)

차엽수(茶葉數)

(斤)

평균 말(馬)

1필당 茶數

  洪武 9年

秦州,河州

     170

 

  洪武11年

  同上

     686

 

 

  洪武12年 

  同上

   1,691

 

 

  洪武13年

  河州

   2,050

  58,892

    37斤

  洪武14年

秦州,河州

     181

 

 

  洪武14年

  洮州

     135

 

 

  洪武15年

秦,河,洮等

     585

 

 

  洪武17年

  碉門

  596馬騾

 

 

  洪武18年

  河州

     782

 

 

  洪武18年

川,陝,貴州

   6,729 

 

 

  洪武19年

陝西

   2,807

 

 

  洪武20年

碉門

  170駝馬

  163,600

    96斤

  洪武23年

西安左右衛

   7,060

 

 

  洪武25年

  河州

  10,340

  300,000

    29斤

  洪武27年

  川,陝

     240

 

 

  洪武30年

  西番

   1,560

 

  洪武31年

秦,河,洮

  13,528

  500,000

    39斤

  永樂 7年

  碉門

      70

   83,050

1,186斤

  永樂 8年

  河州

   7,714

      

    36斤

  宣德 7年

  河州

   6,500

 

 

  宣德10年

   西寧

   2,300

 

 

  宣德10年

  陝西地區

  13,000

1,097,000

    84斤

  正統12年

   西寧

   2,946

  125,430

    42斤

  正德 2年

  西,河,洮

  19,077

 

 

  正德 3年

  西,河,洮

   9,000

  782,000

    87斤

  萬曆29年

陝西

  11,900

 

 

  天啓 6年

陝西

   9,724

 

 

資料來源:《明實錄》,轉引於陳一石<明代茶馬互市政策硏究>,表載於《中國藏學》,1988年,第3期,頁4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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