宋代 福建地域 茶 生産의 特徵과 地域文化 / 徐 銀 美 (慶星大)

2017. 9. 10. 03:00차 이야기



       

宋代 福建地域 茶 生産의 特徵과 地域文化*| 중국 역사 논문
낙민 | 조회 14 |추천 0 | 2016.01.13.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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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代 福建地域 茶 生産의 特徵과 地域文化*

 

徐 銀 美 (慶星大)

 

 

Ⅰ. 序 論

Ⅱ. 福建의 茶 生産과 社會經濟的

特徵

Ⅲ. 福建 臘茶와 宋朝의 貢茶制度

Ⅳ. 福建地域의 茶 文化

Ⅴ. 結 論

 

 

 

Ⅰ. 序 論

 

   福建에서 생산되는 차는 宋代에 이르러 크게 각광받으면서 ‘天下第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福建産 茶는 皇室 進貢用으로 명성을 높였는데 이는 宋代의 특색있는 貢茶制度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皇室에 進貢되는 차는 全國의 차 생산지에서 最上品이 올려지는 것이 일반적인 방식이었는데 宋代의 경우 貢茶의 생산을 특정지역에 한정시키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貢茶制度를 통해 福建産 茶는 발전을 거듭하였고 이로써 宋代의 皇室茶는 곧 福建産 茶를 의미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宋代 福建産 茶는 當時代 사람들에게 뿐만아니라 후세인들에게도 관심이 집중되는 대상이었다. 그를 반영하듯 宋代 쓰여진 茶書의 다수가 福建産인 北苑茶를 주제로 삼고 있고, 宋代 茶에 대한 연구에서도 타지역과 비교해 福建地域 茶에 대한 연구가 진척되어 있다. 기왕의 연구는 茶法의 경우 전매제도의 틀 안에서 福建茶法이 제도사적으로 연구되었고 茶書를 중심으로 飮茶法과 製茶法 등 御茶園이 있었던 北苑茶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어 왔다.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에서 아쉬운 점은 여전히 종합적인 이해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福建地域의 경우 별개의 연구대상으로 취급되어 왔던 專賣制度와 貢茶制度의 상호 관련성과 차별성이 정리되어야 하겠다. 이 두 제도의 존립환경을 설명하는 것은 福建産 茶를 이해하는데 뿐만 아니라 宋代 차 산업의 전체적인 틀을 이해하는데도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이와 함께 宋代 福建産 茶에 대한 시대적 평가와 이해를 높이기 위해서는 福建地域이 가지고 있었던 상황 속에서 茶의 生産과 茶業의 발전을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즉 福建地域의 社會․經濟的 여건이 어떠하였으며, 이것이 茶業의 발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또한 ‘宋朝 第一의 名茶’ 생산지로서 福建地域이 茶와 관련되어 가지고 있는 風俗은 무엇인가 등등의 지역 내적인 이해는 福建 茶業과 茶 文化의 특징을 도출해 내는데 유용한 접근이라고 생각된다.

本稿에서는 이를 위하여 먼저 宋代 福建地域이 가지고 있었던 社會․經濟的 여건이 어떠하였는가 살펴보기로 하겠다. 福建地域의 폐쇄적인 지리적 환경과 부족한 경작지 문제, 특히 宋代 福建地域의 발전은 어떤 단계였는가, 그리고 이러한 福建地域의 여건이 茶 生産과 茶業의 發展과는 어떤 연계성이 있었는가 하는 문제 등의 해결을 통해 宋代 복건지역 차의 발전에 대한 기반적인 이해를 높일 것이다.


   福建地域의 茶는 주지하다시피 皇室用 貢茶였고 이것이 福建産 茶의 명성을 높이고 발전하는데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는 것은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따라서 다음으로 宋朝의 貢茶制度의 운용을 살펴보고 貢茶로서의 지정이 福建 茶業 발전에 미친 영향이 무엇이었는가 분석해 보기로 하겠다. 전매제도와 茶業의 발전에 대한 평가에도 양면적인 측면이 있는데, 즉 官에 의한 착취와 제한이라는 부정적인 측면에서 茶業의 발전에 저해가 되었다는 지적이 있는 반면 다른 한편 官의 보호라는 범위 내에서 茶業의 일정한 발전이 가능했다는 시각이 있다. 福建地域에 있어서도 貢茶로서의 지정이 과도한 인력과 자금 투여라는 측면에서 지역 경제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이 있었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반면 貢茶라는 명성이 이 지역 차에 대한 수요를 높여줌으로써 오히려 茶業 발전을 자극한 측면도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한 고찰은 官 主導의 경제정책과 상업의 발달을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福建地域에 있었던 차와 관련된 풍속을 살펴봄으로써 宋代 茶 文化의 대표적인 모습과 地域文化로서의 단면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Ⅱ. 福建의 茶 生産과 社會 經濟的 特徵

 

   차를 재배하는 데에 있어 알맞은 자연환경은 가장 필수적인 조건이다. 現代의 福建地域은 연평균 온도가 18~22.3℃이고 연평균강수량은 1,200~2,000mm로 온난하며 ‘八山一水一分田’이라고 하듯이 구릉이 많은 지형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토양의 산도(pH4.5~6.5)나 유기질 함량(1.5~2%이상)도 차 재배에 적합하다. 이와 같은 자연 조건은 이전 시대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宋代 福建地域 역시 온도, 강수량, 습도, 토양 등 차 나무 생장에 적합한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이는 福建地域 茶의 生産과 茶業의 成長에 가장 필수적이고 기초적인 조건이었다.

   그러나 적당한 자연환경이 茶 生産과 茶業의 발전에 필요충분조건이 아니었다는 것은 福建地域의 차 생산 및 茶業의 발전 시기가 그다지 이르지 않았다는 사실로 알 수 있다. 福建地域의 차는 唐末五代를 거치면서 일정한 발전을 이룩하여 宋代 이르러 최고의 명성을 얻었다. 이와 같이 이곳의 차 생산과 다업의 발전 시기가 이르지 않았다는 사실은 宋代人들에게도 관심의 대상이었다. 宋代 쓰여진 茶書인 黃儒의 ?品茶要錄?, 熊蕃의 ?宣和北苑貢茶錄? 등에는 陸羽의 ?茶經?과 裵汶의 ?茶述?에 建州의 茶品이 실리지 않은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는 宋代 사람들 입장에서 당시 최고의 명성을 가진 建茶를 바로 앞 시대 인물이며 茶를 논할 때 항상 언급되는 인물인 陸羽와 裵汶이 알아주지 않았다는 섭섭함과 의구심이 공존한 것이라고 하겠다. 福建地域은 차 생산에 좋은 자연 환경을 갖추고 있었지만 중국에서 차가 유행하기 시작한 초기부터 주목을 받은 차 산지는 아니었다. 이에 대해 宋代人들은 陸羽나 裵汶이 당시 교통여건이 좋지 않았던 福建地域에 와본적이 없어 그 산물에 대해 알수가 없었고, 또한 모든 일이 그렇듯이 이러한 일에도 때가 있다는 것으로 建茶의 茶品이 이전 茶書에 실리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였다.


   중국의 경우 淮水 부근을 경계로 그 이남의 넓은 차 생산지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宋朝에 이르러 福建産 茶가 ‘天下第一’의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원인을 살펴볼 때 단지 적합한 자연환경 때문이었다고 하기에는 확실히 부족한 측면이 있다. 적합한 자연환경을 기반으로 차 생산이 성장하게 된 사회, 경제적 요인, 즉 자연적 혜택 이외의 인위적인 노력이 경주되었을 것을 상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와 관련하여 지금까지 福建産 茶의 경우 끊임없이 신제품이 개발되어 名品이 계속 생산되었다는 점이 지적되어 왔다. 끊임없는 신제품의 개발이라는 측면은 福建地域의 차가 명성을 얻게 된 주요 원인의 하나이기도 하고, 또한 御用茶의 生産이란 문제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기도 하다. 咸平年間(998~1003) 丁謂에 의해 제작된 大龍團, 慶歷年間(1041~1048) 蔡襄에 의해 제작된 小龍團, 元豊年間(1078~1085)의 密雲龍 등이 그 대표적인 御用茶이고 徽宗代에 이르면 ‘계속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어 더할 것이 없을 정도이다(益究極新出 而無以加矣)’라고 평가되었다. 御用茶와 관련된 문제는 다음장에서 다시 언급하기로 하고, 본장에서는 먼저 福建産 茶의 생산과 발전이 일정 정도에 오르기까지 福建地域의 사회․경제적 여건과의 관련성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福建地域은 지형이 험하고 삼면이 산으로 둘러쌓여 고대 中原 및 주변지역문화와의 교류에 있어 곤란한 측면이 있었다. 폐쇄적인 자연환경은 오랜 기간동안 이 지역의 발전에 커다란 장애요인으로 작용하였다. 海運이 발전하면서 福建地域은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고 이에 따라 인구도 집중되었다. 인구와 茶業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즉 茶의 생산에는 단기간 집중적인 노동력 투하가 필수적이므로 차 생산지역은 지역내 노동력의 이동이 활발하거나 지역내 유효 노동력의 사용이 원활한 지역이기도 하였다. 宋代 福建의 인구와 경작지 문제를 살펴보면, 茶業의 성장에 매우 유리한 환경이었음을 알 수 있다.


   宋代에 이르면 福建의 인구는 이미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唐朝 元和年間(806~820) 74,467戶였던 福建地域의 戶數는 太平興國年間(976~983) 467,815戶로 52%의 증가를 보였고, 元豊初에는 1043,839戶로 太平興國年間에 비해 123%나 되는 증가를 나타냈다. 南宋에 이르면 金과의 전쟁 영향으로 福建 人口의 증가는 최고조를 나타냈다. 南宋 紹興32年(1162) 福建의 戶數는 1,390,566戶에 달하였고 人口는 2,808,851名에 달하여 元豊初와 비교해 33%와 37%가 증가하였고 이후 규모가 축소되었어도 계속적인 인구증가를 보였다.


   물론 宋代 人口의 증가라는 현상은 福建地域만의 특수한 현상은 아니었다. 太祖 開寶9年(976)의 戶數 3,090,504戶를 지수 100으로 보고 송대 인구를 살펴보면, 인구지수가 北宋末까지 꾸준히 증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眞宗 天禧5年(1021)年의 인구지수는 281, 仁宗 嘉祐8年(1063)은 403, 神宗 元豊6년(1083)은 557를 나타냈고 徽宗 大觀4年(1110)은 676를 보여 최고점에 이르렀다. 이 徽宗 연간의 호수는 5인가족을 기준으로 하였을 때 인구 1억을 넘기는 수치였다. 南宋代에는 高宗 紹興30년(1160) 368를 보였고 꾸준히 증가하여 寧宗 嘉定16년(1223)에는 410를 나타냈다. 高宗 시기 南宋의 人口는 北宋末에 비해 절반 정도를 나태냈지만 淮水이북의 국토를 상실했던 여건을 감안한다면 결코 인구감소라고 볼수 없는 측면이 있다. 또한 이후 꾸준히 증가하여 北宋 1060年代의 戶數와 비슷한 戶數로 보였다는 것은 南宋時代 상당한 인구밀도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표> 元豊年間(1078~1085) 每戶當 平均 墾田畝數

 

 

地 域

戶 數

墾田數(畝)

每戶平均畝數

兩 浙 路

1,778,941

36,247,756

20.3

江南東路

1,127,311

42,160,447

37.4

江南西路

1,287,136

45,046,680

35

成都府路

771,531

21,606,258

28

福 建 路

1,044,225

11,091,453

10.6

 

 

 

   이와 같이 북송대 인구의 증가는 전반적인 경향이었고 福建地域은 타지역에 비해 인구수가 월등히 많은 지역은 아니었다. 그러나 福建地域은 인구수에 비하여 경지면적이 매우 적다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따라서 경작 면적이 적은 福建에서 인구압박은 타 지역과 비교해 커다란 사회문제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元豊年間의 상황을 살펴보면, 北宋의 戶當 평균경지면적은 26.8畝였는데 비해 위에 표에 보이는 바와 같이 福建地域은 10.6畝에 불과하였다. 이는 평균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으로 福建地域의 인구압박이 가지는 사회적인 비중을 가늠해 볼수 있다.

   풍부한 노동력이 존재하였고 경지부족에 따른 식량부족이라는 문제는 福建의 지역 경제를 다른 지역과의 활발한 교역을 주축으로 운영되게 하였다. 福建地域에 있어서 경지부족에 따른 식량부족의 문제와 농업경제 발전의 한계는 手工業과 商業의 발달이라는 길을 통해 극복되면서 발전의 한단계를 올라섰다. 福建地域은 銀, 銅 등 광산자원이 풍부하고 기후가 온화하며 강수량이 넉넉해 각종 경제작물의 성장에 적합하였다. 또 긴 해안선을 확보하고 있으므로 풍부한 해산물을 확보하고 있었다. 여기에 외부 인구의 유입은 北方의 선진 수공업 생산 기술의 전래를 가져왔다. 이로써 福建地域은 수공업발전에 필요한 풍부한 원료와 기술이 확보되었고 일정한 농업기술의 발전을 기반으로 수공업 발달에 박차가 가해졌다.


   또한 交通의 발달은 수공업과 상업의 번영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지형이 산지가 많은 만큼 福建의 교통사정은 본래 낙후되어 있었다. 閩江을 이용한 수로는 험난한 흐름으로 수월한 교통로가 되지 못하였다. 唐代 이르면서 관리의 안전한 행로를 보장하고 교통 운수 편리의 편리를 위해 陸路의 개통에 관심이 기울여졌다. 그 결과 福建과 浙江지역을 있는 陸路가 확립되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隋唐이래 해외무역이 발달하면서 해상교통로가 발달하였다. 唐代까지 福建지역은 泉州港를 중심으로 해상무역이 일어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廣州의 발달에는 미치지 못하였고 또한 내지 교통의 불편으로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唐末 전란이 福建地域에 미친 영향이 적어 상대적으로 안정되었고 이에 외국상인들이 대거 福建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宋代에 이르면 泉州는 이미 東南6路에서 커다란 도시가 되었고 福州 및 中原都市와의 연계도 십분 기밀해졌다. 이로써 福建은 풍부한 광산자원과 해산물, 경제작물 재배에 적합한 기후 등을 기반으로 수공업과 상업, 해운업 등을 발전시킴으로써 지역내 식량부족 문제를 해결하며 발전해 나아갔다.


    경제작물과 수공업의 발전을 토대로 타지와의 교역을 활발히 발전시켜 온 福建地域의 특성이 茶業에 있어서도 품질 향상과 적극적인 제품 개발을 통해 상품성을 높이도록 자극하였다. 이러한 측면은 福建地域 茶業의 발전 과정이 어떠하였는가를 통해 이해할 수 있겠다.

먼저 宋代 福建路의 차 생산구역을 살펴보면, 建州의 建陽․崇安․浦城․松溪․政和․甌寧․建安의 7縣에서 차가 생산되었고 南劍州의 將樂․龍溪․劍浦․順昌․沙의 5縣, 福州의 古田縣, 汀州의 寧化․上杭․淸流․武平․長汀․蓮城의 6縣에, 邵武軍의 泰寧․邵武․建寧, 光澤 4縣에서 생산되어 총 7州 23縣에 달하였다. 福建의 차 생산은 97% 정도를 建州 1州에서 생산하였기 때문에 福建産 茶는 建州에서 생산된 차라는 의미에서 建茶라고 불렸다. 이외에도 차 품명을 따서 臘茶라고도 지칭되었다.

建茶는 다른 州縣에 비해 차를 따는 시기가 가장 일렀는데 그중 北苑, 壑源이 더욱 빨랐다. 따뜻한 해에는 驚蟄(3월 6일경)보다 10일 일찍 차싹이 텄고 추운 해에는 驚蟄에서 5일이 지난 후가 되어야 가능하였다. 民間에서도 경칩을 차를 따기 시작하는 시기로 삼았는데 대개의 茶焙들은 北苑보다 15일 늦게 시작하였으며 거리가 멀수록 시기는 더 늦어졌다. 일찍 수확이 가능하였다는 것은 建茶의 명성을 높이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른 新茶에 대한 관심과 선호도는 상층소비자에게 해당되는 것이라고 해도 당시 상당히 높았던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福建地域은 선진적인 차산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지역 발전과 더불어 주변 지역과의 교류를 통해 빠른 성장을 보인 곳이었다. 唐 後期부터 찌고 갈아서 제작하는 硏膏茶와 향료 기름을 첨가해서 만드는 蠟面茶가 등장하였는데 이는 建茶의 명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덩어리차인 團餠茶 제조에 있어서 唐代와 宋代의 차이는 차잎을 찐 다음부터 틀로 모양을 만들기 이전까지의 공정에 있었다. 唐代의 경우 차잎을 따서(采之) 찐(蒸之) 다음 절구에 찧고(搗之) 쳐서(拍之) 모양을 만들었는데, 宋代의 경우 절구에 찧고 쳐서 모양을 만드는 대신 갈아서(硏之) 틀에 넣고 찍어서 모양을 완성하였다. 찌고 갈아서 만드는 硏膏茶의 제조 방법은 이후 福建産 茶, 즉 建茶 또는 臘茶의 것으로 인식되었는데, 이는 福建地域에서 처음 시작된 방식도 아니었고 또한 福建지역만의 독특한 것도 아니었다.


   五代 쓰여진 毛文錫의 ?茶譜?에 의하면 衡州, 封州, 蒙頂, 袁州, 湖州 등에서도 硏膏茶가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福建地域에서 처음 硏膏茶가 제조된 시기는 唐 貞元年間(785~805)이었다. 당시 常袞을 建州刺史로 파견하여 建州에서 처음 찌고 갈아서 硏膏茶를 제작하였다. 여러 곳에서 시작된 硏膏茶 제작은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建州에서 독점하게 되었는데 이는 五代 南唐 通文2年(937)에 建州에서 ‘耐重兒’라고 하는 색다른 맛의 硏膏茶를 제작하여 금실로 장식하여 공납하기도 하였다는 기사가 그 주요 시점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建州의 硏膏茶 제조는 곧 臘面茶의 제조로 이행되었다. 建州 北苑의 硏膏茶 제조는 熊蕃의 ?宣和北苑貢茶錄?에 “北苑에서 차를 따 처음에 硏膏로 만들고 이어서 臘面을 만들었다(采茶北苑 初造硏膏 繼造臘面)”라고 한것과 같이 곧 이어 臘面茶의 제조로 연결되었다. 臘面茶의 제작 역시 建州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복건지역내에서는 福州에서 먼저 제작되었으므로 福州를 통해 그 제작 기술이 建州로 들어왔을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어떤 경위를 통해 建州에 臘面茶 제조가 시작되었는지는 알수 없으나, 丁謂의 ?茶錄?에 南唐王 李璟이 泉南의 老僧 淸錫에게 硏膏茶를 얻었는데 두해를 사이에 두고 臘面茶를 얻었다고 한 것을 토대로 보면 짧은 기간내 臘面茶의 제조기술을 확보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빠른 발전의 요인으로 외부적 영향, 즉 외부 기술의 도입을 상정하는 것이 타당하며 특히 인접성에 따라 福州 차 제조기술의 유입이라는 측면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요컨대 建州의 차 제조는 常袞에 의해 외부 기술이 전수되어 발전하였고 그것을 토대로 향상되어 唐末 五代를 거치면서 다른 지역보다 월등한 기술력을 보유할 수 있었다. 즉 建州의 차 제조 수준은 五代 南唐을 거치면서 완성되었고 그 결과 南唐을 접수한 宋朝는 곧 太平興國(976~983)初에 御苑을 설치하여 御用茶를 조달시킴으로써 民間의 차와는 구별되는 皇室茶를 구축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福建地域의 차 생산과 茶業의 발전이 시기적으로 늦었다는 여건은 해당지역의 사회, 경제적 여건과 함께 차 제조기술의 빠른 흡수와 노력으로 차 품질의 향상을 이룩하여 경쟁력을 확보해 나가는 방향으로 작용하였다.


   한편 차의 제조기술과 차 마시는 방법은 상호 밀접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발전하였다. 五代를 거치면서 이후 차의 제조 기술이 보다 정밀해지고 발달한 데에는 이 시기 차를 마시는 방법이 변화하였다는 사실과도 관계가 있다. 唐代에는 소금 등의 첨가물을 넣고 차가루도 끓고 있는 물에 넣어 끓어오르게 하는 과정을 통해 차를 끓이는 煎茶法이 주류였다. 五代를 거치면서 宋代에는 차가루를 찻잔에 넣고 더운 물을 부어 저어마시는 방법인 點茶法이 등장하였다. 이 點茶法은 五代에 시작되어 臘面茶의 발전을 선도하였던 것이다. 저어서 거품을 내어 마시는 방법에 따라 보다 세밀한 분말을 만들어낼수 있는 제조방법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飮茶法에 따른 환경변화에 차 생산의 후발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福建地域은 발빠르게 적응하였던 것이다.


   建茶는 硏膏茶에 이어 臘面茶의 제조 기술을 습득, 발전시켜 특성화하였다는 점 이외에도 다른 특징이 더 있었다. 그것은 바로 향료의 사용에 있었다. 향료의 사용이라는 建茶의 특징은 建州가 소속되어 있는 福建地域의 특성이 반영된 것이었다. 福建은 해안을 따라 항구와 海路貿易이 발전한 지역이었고 泉州는 대표적인 무역항이기도 하였다. 향료는 당시 항구를 통해 수입되는 상품이었고 藥用으로 쓰이는 외에 寺觀의 종교활동(焚香), 궁정과 상류층의 일상생활에서 소비되었다. 宋代의 경우 차속에 龍腦 등의 향료와 기름을 첨가하여 차의 쓴맛을 조화시키고 眞香을 돋았는데 이것이 建州茶의 특징이었다. 차에 향료를 사용하게 된 것은 建州가 貢茶를 올리는 지역이었다는 점과 향료를 쉽게 구할수 있는 지리적 잇점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北宋代에는 貢茶에 용뇌향을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北宋末인 宣和年間(1119~1125)에 이르면 차 본래의 향을 찾게 되었다. 熊蕃의 ?宣和北苑貢茶錄?에 보면, “처음에 貢茶에는 모두 용뇌향을 넣었는데 이때(宣和年間)에 이르러서 본래의 향을 빼앗을까 염려하여 비로소 사용하지 않았다(初貢茶皆入龍腦 至是慮奪眞味 始不用焉)”라고 하여 貢茶에 龍腦 등의 향료를 첨가하는 것은 오랜 기간 지속되다가 宣和年間에 이르러서야 사용하지 않게 되었음을 기록해 놓았다.

龍腦香을 사용했던 貢茶와는 달리 福建 民間에서는 아래 기사에 보이는 바와 같이 처음부터 본래의 향(眞香)을 위해 다른 향을 사용하지 않았다. 제조기술이 앞선 생산지인 福建이 茶 음용에 있어서도 그 수준이 앞서 있었음을 보여주는 내용으로, 皇室과 朝廷내의 차 음용 수준은 北宋末에 이르러서야 福建 民間의 試茶와 같은 수준에 도달하였다고 하겠다.

 

   차에는 眞香이 있는데 진공하는 것은 龍腦와 기름(膏)을 미미하게 넣어 그 향을 돋우고자 한다. 建安 민간에서 試茶할때는 모두 향을 넣지 않는다. 그 眞香을 빼앗길가 해서이다.

 

   또한 福建地域에 종교색이 짙었다는 사실도 茶業 발달과 무관하지 않았다. 唐 中期 이후 차를 마시는 풍속이 성행하는데 僧道 생활의 간접적인 영향이 지대하였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바이다. 10세기를 전후해 福建産 茶가 명성을 얻게 되는 데 있어서도 이들 僧道의 역할이 무관할 수는 없다. 五代 閩王 王審知(909~925), 王延鈞(927~935)은 北方人士로 외부인 통치에 대한 거부감을 방지하고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종교의 역량을 십분 이용하였다. 이들 王氏 정권은 佛事를 대거 일으키고 승려를 양산시켰을 뿐만 아니라 寺院에 대량의 田産을 지급하기도 하였다. 이로써 寺院經濟는 五代를 거쳐 宋代에도 발달하였으며 福建은 전국에서 사원이 田産을 가장 많이 보유한 지역이 되었다. 이러한 여건은 寺院經濟의 한축으로써 茶業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고 또한 福建産 茶의 발전에 기여한 바가 클 수 밖에 없었음을 알 수 있다.


   福建地域의 차가 지명도를 높이기 시작한 계기의 하나로 禪僧의 활동 역시 빠지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唐 憲宗 元和年間(806~820) 승려 懷惲의 사례를 들 수 있다. 당시 福州에 있던 方山院의 승려인 회운이 궁중에서 설법을 하게 되었고 그 답례로써 憲宗은 그에게 차를 하사하였다. 이때 회운은 하사받은 차가 方山茶에 미치지 못한다고 아뢰었다. 이 일은 福州 方山茶의 지명도를 높이는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福建産 茶에 대한 세인의 관심이 높아졌던 것이다.

타지역과 비교해 寺院經濟가 복건지역에 미친 영향은 컸었다고 평가할 수 있는데 이는 福建地域의 토지소유 분쟁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앞서 평균경지면적에서 보았듯이 宋代 福建地域은 인구 과밀지역이었다. 이러한 여건은 지역내 독특한 상황을 만들어 내기에까지 이르렀다. 일반적으로 宋代人들이 소송을 좋아했다고 하는데 이는 北方에 비해 南方의 특징이기도 하였다. 특히 福建의 경우 인구에 비해 경지면적이 적어 토지소유 분쟁이 많았다. 訴訟의 경우도 경지부족이라는 지역환경이 반영되어 田訟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고, 그 주요 대상이 寺院과 그 僧侶였다는 것도 福建 社會․經濟의 한 특징이었다.


   福建地域의 경우 兩宋時期를 거쳐 1,000개 이상의 불교사원이 신축되었는데 그중 80%는 北宋時代에 이루어졌고 道觀의 건축도 많았다. 송대 전국 僧道의 수는 眞宗 天禧5年에 478,101명에 달하였는데 이들은 징세와 徭役에서 제외되었다. 따라서 僧道의 수 만큼 사회적인 부담이 증가하는 것이었고 이는 僧道 증가라는 사회 상황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게 하였다. 그러나 寺院經濟가 그들의 道觀과 寺刹의 건축과 종교 활동에만 활용되었던 것은 아니고 다리를 건설하고 도로를 닦는 등의 공익사업에도 관여하였다는 사실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사원경제는 福建地域에서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었으며 승려들의 활동은 차 마시는 풍속의 전파에 뿐만 아니라 차의 재배와 차잎 가공기술의 발전에도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송대 建茶가 흥기한 이면에도 南唐이래 불교가 성행했던 福建地域에서 이들 승려들의 노력이 있었던 것이다.

 

 

Ⅲ. 福建 臘茶와 宋朝의 貢茶制度

 

   福建은 臘茶의 주요 산지였다. 臘茶가 생산되었던 지역은 福建 이외에도 池州, 饒州, 睦州 등지가 있었는데 이들 지역에서의 생산은 미미하였고 臘茶의 우수한 품종과 대부분의 생산은 福建에서 이루어졌다. 이 때문에 송대사람인 歐陽修도 “臘茶는 福建에서 나고 草茶는 兩浙에서 성하다(臘茶出于劍建 草茶盛于兩浙)”고 하였듯이 當時代人들이 福建産 茶를 통상적으로 臘茶라고 불렀던 것이다.

福建地域의 차 생산은 宋代 차의 總生産量 속에서 본다면 그 수량이 많은 것은 아니었다. 생산량이 압도적인 것은 아니지만 宋代 福建産 茶가 누린 명성은 최고였다고 하여도 지나치지 않다. 무엇보다도 臘茶의 주요 생산지였고 皇室 進貢用 차의 산지였기 때문이었다. 福建産 茶의 명성은 비단 宋朝에 그친 것은 아니다. 이후 明代 이르러서도 이 지역산 차가 貢茶의 최상품이었고 현대에 이르러서도 福建 武夷山茶는 名茶 중의 名茶로 손꼽히고 있다.

福建의 차 생산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建州가 생산의 97%를 점유하고 있었는데, 차의 생산이 집중된 建州에는 官焙(正焙)가 32곳, 私焙(外焙)가 1,336곳있었다. 官焙 32곳은 다음과 같이 분포되어 있었다.

 

 

東山에 14焙 : 北苑龍焙․乳橘內焙․乳橘外焙․重院․壑岭․謂源․范源․蘇口․東宮․石坑․建溪․香口․火梨․開山

南溪에 12焙 : 下瞿․濛州東․汾東․南溪․斯源․小香․際會․謝坑․沙龍․南鄕․中瞿․黃熟

西溪에 4焙 : 慈善西․慈善東․慈惠․船坑

北山에 2焙 : 慈善東․豊樂

 

 

   宋代 臘茶의 종류를 살펴보면, ?宋史? 卷183 「茶上」과 ?文獻通考? 卷18 「征榷5」에 모두 臘茶의 품등이 12가지 있다고 하였다. 납차의 상등품인 龍茶와 鳳茶를 제외한 10개의 품명 的乳, 白乳, 頭金, 蠟面, 頭骨, 次骨, 第三骨, 末骨, 山茶, 山鋌이 ?宋會要輯稿? 食貨27-10,13에 보인다. ?文獻通考?에 보이는 12가지 품명은 龍, 鳳, 石乳, 的乳, 白乳, 頭金, 蠟面, 頭骨, 次骨, 末骨, 麤骨, 山挺이라고 하였고, 이를 다시 團片․狹片․闊片으로 나누었다. 龍․鳳은 團片이고, 石乳와 頭․乳는 모두 狹片이며 이름에 京․的․乳를 쓰는 것중에도 闊片이 있지만 乳이하는 모두 闊片이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12品等 안에 더욱 다양한 차의 종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최상등품인 龍茶와 鳳茶는 일반인들에게 판매되지 않았고 다른 품등의 차와 함께 上供되었으며, 나머지 10개 품등은 일반인들에게 茶法을 통해 판매되었다.


   전통왕조에 있어서 각지역의 특산물은 土貢制度를 통해 중앙 지배층에게 공급되었다. 이는 지배자로서의 권리이기도 했고 필요한 물품의 공급 방식이기도 했으므로 제도의 기원도 깊을 뿐 아니라 범위도 지배지역을 포괄하였다. 土貢의 종류는 대략 9가지로 대분되는데 실제로는 필요하다면 포함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土貢制度는 매매과정을 생략하고 공식적인 시장단계를 뛰어넘은 것으로 상업발전을 저해하고 상업 경영의 규모를 축소시키는 부정적인 측면이 있었다. 이러한 요소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정도를 달리하고 있지만 商業革命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도 하는 唐宋時代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존속되었다. 이는 土貢制度의 근본적인 목적이 통치계급의 안락한 생활에 필요한 물품의 수요를 만족시키는데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하겠다.


   土貢制度안에 하나의 품목으로 茶라는 작물이 포함되었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지만 차를 마시는 풍속이 발전함에 따라 차의 上供은 定例化․制度化하는 과정을 밟아 나아갔다. 8세기를 거치면서 中國에서 茶를 마시는 풍속은 차가 생산되지 않는 華北지역까지 폭넓게 확산되었다. 非生産地에서의 차 마시는 풍속은 일찍이 지배상층에서 먼저였고, 皇室의 수요에 부응하여 생산지에서 특별히 만들어지고 선별된 진귀한 차가 황제에게 進貢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차를 貢茶라고 하였다.

貢茶의 기원을 살펴보면, 기원전 12세기에 해당되는 周 武王의 토벌 때로 올라간다. 周 武王에게 巴蜀에서 생산된 차를 貢納하였다는 이 기록은 晋人 常璩가 편찬한 ?華陽國志?의 것이다. 이 책의 저작 연대는 4세기 중엽인 347년 이후이므로 周 武王때의 蜀茶 貢納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질 뿐이다. 그런데 貢茶의 기록에 있어 東南地域의 茶産地보다 四川地域의 기록이 앞선다는 것은 차 생산과 차 문화의 발달이 四川에서 양자강 中下流로, 다시 華北地域으로 확대되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다.


   東南地域 차산지에서 보이는 貢茶기록은 4세기에 이르러서야 나타난다. 東晋 元帝(317~322)때 宣城(현 安徽省 宣城)에서 관직에 있었던 溫嶠가 茶 1,000斤과 芽 300斤을 進貢하였고, ‘浙江 烏程縣 서쪽 20里에 御荈이 생산된다’는 기록 등이 그것이다.

隋나라 때에도 貢茶가 있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지만 이 때까지 貢茶가 定例化되어 제도의 틀을 형성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貢茶의 규모가 커지고 定例化되는 시기는 차의 생산과 수요가 일정 정도 발전한 이후에 가능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 시기는 대체로 唐 中期인 8세기 경으로 생각된다. 唐代 福建 5州의 土貢品目을 살펴보면 福州에 茶가 기재되어 있음을 통해서도 唐代에 이르면 차가 常貢되었음을 알 수 있다.

唐中期를 획기로 唐宋變革期를 거친 이후의 사회는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諸般産業이 발전하였다는 것은 익히 인정된 사실이다. 市場과 상업, 상인계층의 성장에 있어서도 ‘商業革命’이라고 불릴 정도로 괄목할 만한 발전이 있었다. 차의 생산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차의 생산은 괄목할만한 성장을 보였으며 차의 수요도 급증하였는데, 차 경작 면적의 증대 뿐 아니라 茶園 經營의 專業化가 나타났다.

 

   元和(806~820)이전에 束帛으로도 초봄의 蒙頂茶 1斤을 바꿀 수 없었다. 이로써 蒙頂(名山縣) 인근지역 사람들이 마침내 차를 재배하여 후한 이익을 보려고 하였다. 수십년이 지나지 않아……해마나 1,000만근이 생산되었다.

江南 百姓들의 生業 가운데 茶 심는 것을 (專)業으로 하는 자가 많았다.

祁門縣……산이 많고 田이 적으나 물이 맑고 땅이 비옥하다. 산에는 또한 茶를 심어서 높고 낮건 간에 남겨진 땅이 없을 정도이다. 천리 내에 茶를 (專)業으로 하는 자가 (10에) 7,8할이다.

 

   이와 같이 唐 後期 四川地域 뿐 아니라 江南地域에서 차 재배를 專業으로 하는 농가가 많아 차 재배에 적합한 자연 조건을 가진 지역인 물이 맑고 땅이 비옥한 구릉지대에서는 빈땅이 없을 정도로 차가 재배되었다. 이러한 차 생산의 증대는 차 수요의 증대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오랜 기간 동안 차를 마시는 풍속은 차 생산지에 제한되어 있었으나, 運河의 개통 등 交通의 편리와 함께 商業의 발달, 禪宗의 유행, 전문 茶書의 出刊 그리고 장기적인 평화시대가 도래하면서 차를 마시는 풍속은 차가 생산되지 않는 華北地域으로 급속하게 보급되었다. 이에 따라 차 생산지도 이전 시대와 비교해 확대되었다. 陸羽의 ?茶經? 八之出에는 山南, 淮南, 浙西, 劍南, 浙東, 黔中, 江南, 嶺南의 구역별로 생산 州縣이 열거되어 있는데 淮水 以南지역들이다. ?新唐書? 地理志와 ?唐國史補?에서도 唐 後期 차산지로 50餘州를 찾아볼 수 있다. 宋朝의 경우 차 재배 면적이 唐朝의 2~3배로 증가하였다.


   定例化된 貢茶가 언제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차를 마시는 풍속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상하계층으로 모두 스며들어 앞서 언급한 생산과 수요가 증대된 시점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貢茶는 늦어도 玄宗 天寶年間(742~755)에 이르면 定例化가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唐代 貢茶는 陽羨과 顧渚에서 생산된 차가 큰 비중을 차지하였는데 ?新唐書? 地理志에 보이는 貢茶地域은 山南道의 峽州․歸州․夔州․金州․興元府, 淮南道의 壽州․廬州․蘄州, 江南道의 常州․湖州․睦州․福州․饒州․溪州, 劍南道의 雅州 등이 있었다.

定例化된 貢茶는 점차 수량이 증가하기 시작하였고 이와 더불어 進貢에 따른 폐해들도 생겨났다. 玄宗 天寶年間에 이르면 이미 貢茶에 따른 차 생산자의 고통에 대한 기록이 보이는데 이는 貢茶 생산자들의 어려움에 대한 최초의 기사이기도 하다. 湖州 顧渚 紫笋茶는 10,000斤을 進貢하였는데 이 수량은 會昌年間(841~846)에 이르면 18,400斤으로 증가하였다. 또한 이에 동원된 노동력도 3萬을 헤아렸다.


   이러한 唐代의 貢茶는 이후 계승되어 宋朝에 이르러 제도화하였는데 宋朝는 차 전매제도를 시행해 나가면서 동시에 貢茶制度의 변화를 야기시켰다. 宋朝는 乾德3年인 962年 이래 전매지역의 범위를 변경해가며 지속적으로 전매제도를 시행하였다. 遼․西夏와의 전쟁이 지속되는 北宋 前半期에 있어서는 군비 조달 등의 필요성에 의해 전매 수익이 특히 강조되기도 하였다. 전매 시행에 있어서 財政的 軍事的 역할이 강조되면서 전매 수익을 방해할 수 있는 요소들에 대한 경계가 이루어졌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 貢茶 지역을 감소시키는 조치가 실행되었던 것이다.

貢茶 제조와 운반을 위한 人的 物質的 소비는 막대한 것으로 貢茶에 따른 어려움과 곤란함은 이미 貢茶가 정례화된 시기부터 기록이 남아 있었는데, 宋朝에 이르기까지 특별한 조치는 취해진 적이 없었다. 그런데 宋朝에 이르면 아래 기사에 보이는 바와 같이 30餘州에 달하였던 茶 貢納地域에 대한 폐지조치가 시행되기 시작하였다.

 

咸平2年(999)…… 30餘州에서 해마다 貢茶하는 것을 파하였다.

諸路에서 新茶를 進貢하는 지역이 대개 30餘州였는데 수천리의 거리였고 일년 중 두세 차례 이르는 경우도 있어, 上이 그 노고와 소란함을 민망해하였다. 이에 조서를 내려 모두 정지시켜 폐지하였다.

 

   宋朝의 경우 앞 시대와 비교하여 貢茶地域이 적었던 것이 사실이다. 宋朝의 경우 福建 建州와 南劍州를 제외하면, 江南東路의 南康軍과 廣德軍, 荊湖北路의 江陵府, 荊湖南路의 潭州의 貢茶 기록이 보일 뿐이다. 게다가 仁宗 天聖年間(1023~1031) 때 江淮發運使였던 李溥가 상소한 글 속에 “進貢하는 것이 建州 餠茶뿐이다”라고 한 것을 보면 眞宗 때 貢茶의 폐지 기사를 통해 貢茶지역이 매우 제한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國初이래 서민의 飮茶와 구별된 皇室飮茶를 형성시켰던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福建에서 進貢한 茶의 수량은 太平興國初 겨우 50斤에 불과하였으나 점차 증가하여 元符年間(1098~1100)에 18,000편이었다. 宣和年間(1119~1125)에는 47,100편에 달하였는데 이 수량은 趙汝礪의 ?北苑別錄?에 기록된 細色5綱 粗色7綱의 수량 48,869斤과 근사치에 있고, 또한 이러한 수량은 唐代와 비교해 13배 증가한 것이었다. 北宋代 貢茶 규모는 아래 李心傳의 ?建炎以來朝野雜記?의 기록에 보이는 바와 같이 21萬餘斤에까지 이르렀다.

 

   建茶는 한해 95만근을 생산하였다.……舊制에 한해 편차 216,000근을 貢納하였다.……지금 上供하는 龍鳳 및 京鋌茶의 한해 수량은 평화롭던 시기와 비교하면 겨우 절반정도이다.

 

   위의 기사에 따르면, 建茶의 進貢 수량이 北宋末 216,000斤까지 증가하였고 南宋 高宗代에는 그 1/2로 감소되었다는 것인데, 21萬餘斤이라는 貢茶수량은 宣和年間 47,100~48,869斤의 양과 비교해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수치이다. 이에 대해 古林森廣은 「宋代における喫茶の普及について」에서 ?宋會要輯稿? 食貨 30­24 元豊7년 8월 기사에 보이는 都茶庫에서 보낸 建州臘茶 17萬斤과 宣和年間의 수량을 합한 것으로 보았다.

 

해마다 建州臘茶 17萬斤을 사들여 官綱例에 따라 免稅하고 경사에 이르면 1/10 抽解하여 도차고에 보낸다.

 

   都茶庫에서 관장했던 일은 翰林諸司內外의 월봉과 軍食을 지급하는 것이었다. 또한 위의 17만근은 官綱例에 따라서 면세되어 京師에 공급되었다. 이는 일반 판매를 대상으로 하였던 전매와는 별개의 수량이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宋代 21萬斤 정도의 수량이 官綱에 의해 경사에 유입되었다.

貢納制度가 발전한 근저에는 상업경제발달의 미비라는 측면이 있었다. 상품경제가 미발달한 상황이었으므로 지배계층에게 필요한 여러 물품들을 시장을 통해 조달할수 없었으므로 강제적인 징발의 형식이 우선적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宋代 貢茶地域이 縮小된 데에는 차의 소비 형태가 奢侈品에서 大衆的인 상품으로 발전했다는 것을 반영한 것이며 이는 상업경제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함께 貢茶로서의 지정이 福建 茶業 발전에 미친 영향은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물론 貢茶上供을 위한 과도한 인력과 자금의 투여라는 측면이 있지만 그 결과 전국적으로 얻어진 지명도와 貢茶로서의 위상은 福建産 차의 판매에 매우 고무적인 것이었다. 그러한 예는 北宋時代 福建産 차인 建茶가 가장 넓은 판매망을 확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建茶의 경우 비생산지 외에도 차가 생산되는 지역인 淮南東路와 江南東路, 荊湖北路, 兩浙路에까지 판매되었다. 또한 貢茶 수량의 증대와 함께 官에서 소비하는 建茶의 수요가 증대하였다는 사실은 여전히 官主導의 경제정책이 주도하는 환경에서 단일화된 貢茶地로서의 지정은 곧 안정적인 판매망의 확보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Ⅳ. 福建地域의 茶 文化

 

   宋代에도 지역적 편견이 상존했는데 크게는 북방인들에 의한 남방인에 대한 비하 경향이 있었다. 이는 북방인들의 정치, 문화적 우월감에서 기인하기도 하였고 宋初이래 남방지역에 대한 경계심에 그 원인이 있기도 하였다. 단적으로 太祖는 남방인사를 재상으로 기용하지 말라고 하였다고 하고, 太宗 太平天國7年(982)에는 강남인사들이 본지역의 지주, 통판, 전운사 등의 직무를 맡지 못하도록 하는 조서가 있었다. 물론 이러한 조치에는 시기적으로 늦게 편입된 지역에 대한 정치적인 경계였고 眞宗代 이르면 남방 인사들이 조정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지만 北方人士들을 중심으로 南方人士들에 대한 편견은 존속하였다. 또한 남방인 사이에서도 福建人에 대한 편견이 심하였다. ‘福建子’라는 호칭은 멸시적인 표현이었는데 이는 지형적인 폐쇄성으로 인한 문화적 이질성에 대한 편견이 크게 작용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茶 문화에 있어서는 강남지역이 중심이 되므로 경제발전을 기반으로 한 강남 문화를 대변하는 것의 하나가 茶였다고 하겠다. 당시 차는 대외적으로 북방민족을 제압하는 경제적 수단으로 활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내적으로도 南北이 경제적 문화적 유대를 가지게 하는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였다. 이와 같이 차의 역할이 지대하였는데 그 중심은 생산지로서, 문화적 원류로서 강남지역이 주도하였다. 그중 福建地域은 宋代 특별한 위치에 있었고 차문화에 있어서도 상층 차문화를 대변하는 측면이 있었다. 이는 당시 茶書가 建州 北苑을 대상으로 하였던 것을 통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 蔡襄의 ?茶錄?의 前序에는 저술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즉 “예전에 陸羽의 ?茶經?에는 建安의 茶品이 실리지 않았고 丁謂는 ?茶圖?에서 차잎 따기와 만들기만을 논했을 뿐이다. 烹點해서 試茶하는 것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간단하면서도 명료하게 2편으로 구성해 ?茶錄?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로써 宋代 茶色, 茶香, 茶味부터 시작해서 관련된 모든 조항들이 建州 北苑茶가 기준이 되었음을 알수 있다.


   宋代는 鬪茶가 성행했던 시대이고 福建은 그 중심지였다. 福建人들은 鬪茶를 茗戰이라고 불렀다. 鬪茶가 복건지역에서 성했었던 데에는 그곳이 貢茶를 공급하던 지역이었던 사실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范仲淹이 <和章岷從事鬪茶歌>에 “北苑將期獻天子 林下雄豪先鬪美”라고 한 것과 같이 지역내에서 최고의 상품을 만들려는 노력은 차의 맛과 품질을 품평하는 모임을 번성시켰다. 福建에 鬪茶가 성하여 福建人들이 이에 능했다는 것은 唐庚(1071~1121)이 쓴 ?鬪茶記?의 내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四川人인 唐庚은 廣東東路 惠州로 귀양가 있을적인 政和2年(1112) 2,3명의 동료와 함께 鬪茶한 것을 ?鬪茶記?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政和2年(1112) 3월 임술일에 몇몇 군자와 더불어 寄傲齋에서 투차하였다. 나는 龍塘水를 취해 팽차해서 그 품을 매겼으며 아무개가 위가 되고 아무개가 다음하며 아무개는 민인이라 그 해준 것이 마땅히 더욱 높을 것인데 또 다음하였다.

 

 

   이와 같이 閩人, 즉 福建出身이 鬪茶에 있어 기술이 좋고 높다는 언급만으로도 福建地域이 차 문화를 주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송대의 鬪茶는 고급화와 대중화 내지 놀이화되는 상반된 경향이 모두 나타났다. 唐代는 정신 함양을 목적으로 한 品茶를 추구하였고 文人, 隱士, 僧人들이 차 문화를 주도하였던 시대였다. 宋代의 경우 차 문화가 上下 모두로 범위를 확대해 나갔다. 위로는 궁정 문화의 하나로 자리 잡았고 그 결과 차의 상등품 제조는 보다 정결해지고 高價를 형성하였다. 아래로는 民間에서까지 鬪茶가 보급되었는데, 남송대 鬪茶는 민간에게까지 보급되어 文會 뿐 아니라 시장거리에서도 鬪茶를 즐겼다. 이러한 상황은 李嵩, 史顯祖 등이 그린 ?鬪茶圖?에 묘사된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宋代人들은 ‘茶百戱’라고 하여 가루차에 물을 부어 저으며 갖가지 형상을 만들어 감상하는 놀이를 즐겼다. ‘茶百戱’에 대해서는 陶谷(903~971)이 쓴 ?茗荈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있다.

 

   近世에 탕을 부어 숟가락으로 젖다가 따로 묘수를 부려 탕의 무늬와 수맥이 物象을 이루게 하는 것이 있다. 금수, 벌레, 물고기, 화초 같은 종류로 섬세함이 그림같다. 다만 순식간에 흩어져 사라지니 이는 차의 변화이다. 때의 사람들이 茶百戱라고 한다.

 

   이러한 놀이문화로서의 차 문화는 차를 마시는 풍속이 상하로 폭넓게 확산, 발전된 상황을 배경으로 한 것이며, 宋代의 차 문화는 唐代와 비교해 茶禮 방면으로 보다 발전하는 경향이 있었다.


   宋代는 ‘茶色貴白’에 따라 다기로 쓰여지는 茶器의 색도 흑색을 선호하였다. 唐末宋代 茶盞의 黑色선호는 鬪茶와도 관련이 있는데 蔡襄의 ?茶錄?에 기록되어 있기를, “차색이 희니 흑잔이 마땅하고 建安에서 만든 것은 감흑색으로 무뉘가 토기털 같으며 그 그릇이 정묘하고 두꺼워 불에 데우면 열이 오래가고 잘 식지 않아 가장 요긴히 쓰인다. 딴곳의 것은 혹 얇고 혹 자주색이어서 모두 미치지 못하고 청백잔은 투시가들이 쓰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白茶를 숭상하였기 때문에 그 색을 돋보이는데 청백잔은 적합하지 않고 흑색이 제격이었으므로 당시 우수한 흑색잔을 생산하는 建窯가 각광을 받았다.


   차의 생산과 관련해 복건지역 民間에는 여러 풍속이 있었는데 이러한 것들은 종국적으로 양질의 차 생산과 수확의 증대를 기리는 것이었다. 차를 수확하는 시기는 일반적으로 날씨가 맑은 날 해가 뜨지 전까지인 새벽녘에 이루어졌다. 당시로서는 과학적인 일기예보가 불가능했으므로 날씨가 적당한 날 차를 딸 인력들은 새볔 일찍 모이기 위한 신호가 필요하였다. 이러한 여건에서 적당한 짧은 시기에 수확해야하는 차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하였는가에 대해서는 趙如礪가 지은 ?北苑別錄?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햇빛을 받기전 차를 수확하기 위해 매일 五更(오전 3~5시)에 북을 쳐서 인부들을 산으로 소집시켜 차 따기를 시작하였고 작업이 끝나는 辰時(오전 7~9시)가 되면 징을 울려 작업종료를 알렸다. 이를 위해 산에는 打鼓亭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시기를 맞추어야 하고 노동 시간이 상대적으로 짧은 데서 오는 효율을 높이기 위한 방식이었다.


   또한 建州에서는 매년 태양에 제사 지내고 수천명이 모여 산을 에워싸고 북을 울리고 시끄럽게 하여 陽氣를 돋우는 풍속이 있었다. '喊山催春'이라고 하는 이 풍속은 종래 北宋 建州貢焙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알고 있었으나 이미 唐代 貢茶地域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단편적인 기사이지만 李郢의 《茶山貢焙歌》에 “萬人爭啖春山催”라는 구절을 통해 唐代 ‘喊山催春’의 풍습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山茶貢焙地域에서 빠른 차잎의 수확과 높은 품질의 차잎을 얻기 위한 노력의 하나였던 것으로, 宋代에 이르면 建州 北苑 貢焙에서만 그 풍속이 계승된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풍습은 비단 貢茶의 조달이라는 상층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만은 아니었다. 이 “喊山”활동과 鼓鳴, 제사 등의 활동은 차 나무에 대한 神格化의 일종으로, 민간풍속에서 종종 보이는 谷神숭배나 樹神숭배와도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하다.

 

 

Ⅴ. 結 論

 

   福建産 建茶는 宋代 ‘天下第一’이라는 명성을 누리며 당시대의 茶業 뿐만 아니라 茶 文化의 특징을 함축한 茶였다. 建茶는 지역내 사회․경제적인 여건을 바탕으로 발전하며 唐宋茶文化의 변화라는 시류를 정확히 읽어내어 새 흐름에 잘 적응한 茶이기도 하였다. 福建地域에 있어서 경지부족에 따른 식량부족 문제와 농업경제 발전의 한계는 수공업과 상업의 발달이라는 길을 통해 해결되어 갔다. 농업작물 측면에서는 온화한 기후와 넉넉한 강수량으로 각종 경제 작물의 재배가 적합하였다. 차의 재배도 이러한 지역의 자연환경과 사회, 경제적 여건에 부응하여 계속적인 제조방식의 발전을 추구하며 높은 품종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建茶는 자연 지리적 환경으로 차의 생산 시기가 이르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예나 지금이나 차의 상층소비층이 이른 新茶에 대한 관심과 선호도가 높았으므로, 이는 建茶의 지명도를 높이는데 일익을 하였다. 또한 建茶는 硏膏茶에 이어 臘面茶의 제조 기술을 습득, 발전시켜 특성화하였으며, 송대 대표적인 무역항인 泉州를 보유하고 있다는 지역 여건을 반영하여 建茶의 특성을 살렸다. 즉 建州 貢茶의 특징 중 하나는 향료를 사용하였다는 점이었다. 이는 福建이 무역이 활발한 지역으로 향료의 공급이 수월하였다는 점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이밖에도 福建地域에서는 唐末宋初에 차 마시는 방법이 변화하고 있다는 時流에 잘 적응하여 點茶法에 적합한 차를 생산하였던 것이다.


   차 문화의 발전과 불교는 福建地域에서도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南唐때부터 이미 불교가 융성한 지역이었던 福建에서 승려들의 활동은 차의 재배 및 차잎의 제조 기술을 발전시키는데 일조하였으며, 나아가 이 지역의 차를 타지역에 알리는데도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貢茶가 定例化된 것은 차의 생산과 수요가 일정 정도 발전한 8세기 이후이고 宋代 이르러 제도화되었다. 전국 산지의 최상품으로 상공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宋朝는 貢茶地域을 단일화하는 정책을 시행하였고, 따라서 貢茶인 建茶는 그 명성이 대단하였다. 貢茶地域의 축소는 茶가 사치품에서 대중적인 상품으로 변화되어 일반적으로 소비되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貢茶로서의 지정이 福建 茶業 발전에 미친 영향은 매우 긍정적이었다고 하겠다. 물론 貢茶上供을 위한 과도한 인력과 자금의 투여라는 측면이 있지만 그 결과 전국적으로 얻어진 지명도와 貢茶로서의 위상은 福建産 차의 판매에 매우 고무적인 것이었다. 그러한 예는 北宋時代 福建産 차인 建茶가 가장 넓은 판매망을 확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또한 貢茶 수량의 증대와 함께 官에서 소비하는 建茶의 수요가 증대하였다는 사실은 여전히 官主導의 경제정책이 주도하는 환경에서 단일화된 貢茶地로서의 지정은 곧 안정적인 판매망의 확보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더불어 福建은 宋代 차문화를 선도한 지역으로 鬪茶가 성행했던 중심지였다. 양질의 차 생산과 수확의 증대를 목적으로 한 민간의 喊山, 제사 등의 풍속도 貢茶地域으로서 福建地域이 보유한 문화적 특징이었다.

 

 

<中文提要>

 

宋代福建地區茶生産的特性與地域文化

 

 

徐 銀 美

 

 

在宋代福建生産的建茶稱爲?天下第一?. 由于自然環境的影響建茶保持着生産時期比較早的優點. 過去也好現在也好茶的上層消費層對生産比較早的新茶有很大的興趣, 這樣的事實跟建茶的名聲有關. 建茶還學會硏膏茶, 臘面茶的製造技術而發展起來了. 代表宋代的貿易港口泉州位于福建也影響了建茶的特性. 卽建茶貢茶的特性之一是它使用了香料的. 這就表明福建是由于貿易來往很盛的原因而很容易供給香料的. 除了以上幾個原因以外由于唐末宋初是在喝茶的方法上有所變化的時期, 所以福建地區很能適應這種時流而生産了符合點茶法的茶了.

跟其他地方一樣在福建茶文化的發展和佛敎也有很密切的關係. 從南唐開始這個地區的佛敎已經很隆盛, 因而當地僧侶的活動幇助了茶的栽培和茶葉製造技術的發展. 還把當地茶的名聲傳播于各地也做了很大的作用.

由于宋朝實行了貢茶地區的統一, 從而貢茶卽建茶的名聲更出名了. 貢茶地區的縮小就是反映了茶的性質從上層商品轉變成大衆商品的結果.

還有建茶能得到貢茶的承認是對于福建茶業的發展給了很大的貢獻. 雖然貢茶上供需要過分的人力和資金投資, 但是貢茶上供的結果得到的名聲和其地位使福建茶的錐售起了積極作用. 那樣的例子是從北宋時期福建生産的建茶的錐售地區最廣大的事實可以證明的. 貢茶的數量增大和官府的建茶消費量增加又意味着建茶錐售量的穩定狀態.

福建又是處于領導宋代茶文化的地區, 被成爲鬪茶很流行的中心地帶. 貢茶地區福建爲了生産高品質的茶葉和增大收穫量而所實行的民間的喊山, 祭祀等風俗也是當地擁有的文化特性.

 

 

주제어: 복건, 공차, 납차 건차, 북원, 투차

主題語 : 福建, 貢茶, 臘茶, 建茶, 北苑, 鬪茶

Key-Word: Fujian, tributary cha, la cha, jian cha, Beiyuan, dou cha

 

 

(원고접수: 2003년 4월 28일, 심사완료: 2003년 5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