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집(東溟集)》 해제(解題)
2017. 11. 3. 01:31ㆍ문집 해제 및 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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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집(東溟集)
- 기건(氣健)의 풍격(風格)을 지닌 현실참여적인 문학세계 -
정선용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1. 머리말
본 《동명집(東溟集)》은 17세기 우리나라의 문학사(文學史)와 사상사(思想史)에서 뚜렷한 위치를 차지하는, 동명(東溟) 정두경(鄭斗卿, 1597~1673)의 시문집(詩文集)을 일반 독자나 연구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동명이 살았던 시대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등이 이어지던 국난기(國難期)와 그 이후의 북벌운동(北伐運動)이 벌어졌던 우리 민족의 시련기였던 만큼, 《동명집》은 그 당시 우리 역사를 증언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또한 본 번역의 대본으로 사용된 중간본(重刊本) 《동명집》은 국내에는 공개된 것이 없고 오직 일본에만 한 질 남아 있는 귀중한 문헌으로, 문헌 자체가 우리 민족문화의 귀중한 유산이기도 하다.
동명은 우리나라 문학사상사에서 매우 독특한 성격을 지닌 인물이다. 사상적인 면에서 당대의 유학자들과는 달리 유학은 물론 도학(道學)까지도 겸섭(兼攝)하였으며, 문(文)과 아울러 무(武)에 대해서도 남다른 관심을 가진 인물이다. 문학적인 측면에서는 기건의 문학을 추구하면서 글을 통해 현실을 개혁하고자 했으며, 극단적인 비평과 찬사를 엇갈리게 받으면서 후대의 문학에 큰 영향을 끼친 문제의 인물이다.
동명과 《동명집》에 대한 연구는 당시의 정치사상 및 문학을 논하면서 결코 빠뜨려서는 안 되는 중요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명집》이 한문(漢文)으로 되어 있고, 그마저도 널리 보급되어 있지 않아 연구자들이 쉽사리 접근할 수 없었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는 《동명집》의 중요성과 시의성을 감안하여 연차적인 계획을 세워 번역본을 제공함으로써, 연구자들과 일반 독자들의 편의를 도모하고자 한다. 번역에 앞서 동명이라는 인물과 《동명집》의 내용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하고, 그동안의 연구 성과와 아울러 번역의 기본 방침에 대해서까지 언급하여, 이용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본 해제를 작성하기 위해 여러 편의 논문(論文)을 읽어 보았는데 동명에 관해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한 남은경 선생의 박사학위 논문에 《동명집》의 편찬 동기나 체재, 내용 등이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어, 이를 요약한 다음, 몇 가지 사항을 더 보충해 해제를 작성하였음을 미리 밝혀 둔다.
2. 동명집의 간행 경위
《동명집》 번역의 대본으로는 일본의 오사카〔大阪〕 부립(府立) 나카노시마〔中之鳥〕 도서관에 소장된 중간본(重刊本) 《동명선생집(東溟先生集)》 (도서번호 韓7-29)을 사용하였다.
현재까지 알려진 《동명집》은 모두 세 차례에 걸쳐 간행되어, 총 세 종류가 있다. 맨 처음 간행된 문집은 자찬본(自撰本) 《동명집》이다. 이 문집은 다른 문집들이 대개 저자의 사후에 간행된 데 반해, 저자의 생전인 1646년(인조24)에 간행된 것으로, 동명 자신이 찬한 것을 윤신지(尹新之)의 서문과 아울러 간행한 것이다. 현재 이 자찬본 《동명집》은 전해지는 것이 없다. 동명에 대해 깊이 연구한 남은경에 의하면, 이 자찬본 《동명집》을 진산 강씨(晉山姜氏)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으나 공개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두 번째 문집은 1674년(현종15) 남구만(南九萬)에 의하여 함흥(咸興)에서 간행된 《동명선생집》으로, 이것을 흔히 초간본(初刊本)이라 칭한다. 이 초간본에는 다른 서발(序跋)은 없고, 1646년에 쓴 윤신지의 서문만 들어 있다. 동명의 문(文)은 한 편도 수록되지 않았고, 시 1204수만이 수록되어 있는데, 전체가 11권 3책이나 11권 4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초간본은 동명의 자손들이 가장(家藏)하고 있던 유고(遺稿)와는 상관없이 남구만이 갖고 있던 동명의 시고(詩稿)를 저본으로 대강 편차하여 간행한 것이다. 현재 국내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이 초간본 《동명집》뿐이다. 이 초간본은 국내의 각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한국고전번역원에서 구두를 찍어 한국문집총간 100집에 영인하여 수록하였다.
세 번째 문집은 초간본이 간행된 지 24년 뒤인 1711년(숙종37) 남구만의 교정을 거쳐 동명의 후손인 정수곤(鄭壽崑) 등에 의해 총 26권 8책으로 간행되었다. 여기에는 악부(樂府)와 시(詩) 및 초간본에는 빠져 있던 문(文), 중요 저술 가운데 하나인 〈시풍(詩諷)〉이 수록되어 있다. 이어서 부록(附錄)의 형태로 동명의 동생인 정성경(鄭星卿)의 《옥호자유고(玉壺子遺稿)》, 정인경(鄭麟卿)의 《남악유고(南嶽遺稿)》 및 동명에 대한 만사(輓詞), 제문(祭文), 언행록(言行錄)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것을 흔히 중간본 《동명집》이라고 칭하며, 이 책의 번역 대본이기도 하다.
이 외에도 《동명장구(東溟長句)》라는 제명(題名) 하에 장구(長句)만을 모은 연대 미상의 필사본이 전해진다. 이 책은 동명의 칠언고시만을 뽑아 베껴 놓은 것으로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중간본 《동명집》의 편찬 과정에 대해서는 최석정의 서문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그에 의하면, 이 중간본은 저자의 종손(從孫)인 정수곤이 가장(家藏)한 유고(遺稿)를 정리하여 남구만의 편차(編次)와 교정(校訂)을 거친 뒤, 형 정수륜(鄭壽崙)이 현감으로 있던 의령(宜寧)에서 처음으로 간행하였다. 그러나 물력(物力)이 부족하여 중단되었다가 다시 정수곤이 나머지 작업을 계속하여, 근 10년 동안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총 26권으로 간행되었다. 이 중간본은 그동안 발견되지 않다가 남은경에 의해 일본 오사카 부립 나카노시마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이 발견되어 국내에 소개되었다. 남은경에 의하면, 이 중간본 역시 진산 강씨 문중과 한화그룹 아단문고(雅丹文庫)에 소장되어 있기는 하나 일반 연구자에게는 공개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3. 동명의 생애와 행적
정두경은 1597년(선조30) 호조 좌랑을 지낸 정회(鄭晦)와 광주 정씨(廣州鄭氏)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나 1673년(현종14) 77세로 졸하였다. 정두경의 본관은 온양(溫陽)이고, 자는 군평(君平)이며, 호는 동명이다.
동명의 고조는, 동명의 삶에서 걸림돌로 작용하였던, 명종조의 권신(權臣) 정순붕(鄭順朋)이다. 증조는 경기 도사(京畿都事)를 지낸 십죽헌(十竹軒) 정담(鄭䃫)으로, 형인 북창(北窓) 정렴(鄭磏), 고옥(古玉) 정작(鄭碏)과 더불어 모두 시문에 뛰어나 명성이 일세에 자자하였다. 특히 정렴은 우리나라 단학파(丹學派)의 대가였다. 할아버지인 총계당(叢桂堂) 정지승(鄭之升)과 아버지 무송당(撫松堂) 정회(鄭晦) 역시 시문에 뛰어나 각각 《총계당유고》와 《무송당유고》를 남긴 문장가였다.
동명이 살았던 17세기는 광해조의 혼정, 인조반정, 정묘호란, 병자호란, 주화파(主和派)와 척화파(斥和派) 간의 주도권 다툼,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죽음, 효종의 북벌정책,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 문제를 놓고 벌어진 기해예송(己亥禮訟) 등 굵직한 사건으로 점철된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에 태어나 여러 가지 사건들을 온몸으로 맞았던 동명은, 시대 분위기의 변화에 따라 그 자신도 부침할 수밖에 없었다.
동명의 일생은,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정두경 졸기(鄭斗卿卒記)〉에 “정두경은 소싯적부터 문명(文名)이 있었으며, 신흠(申欽)ㆍ이정귀(李廷龜)ㆍ장유(張維) 등 여러 사람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시(詩)에 뛰어났는데 근세(近世)의 작자 가운데에는 그와 비견될 자가 드물었다. 성품이 술을 좋아하고 몸단속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일찍이 경기 도사로 있을 때에, 군읍(郡邑)의 어떤 자가 ‘성묘(聖廟)에 빗물이 새니 수선해야 한다.’라고 하자, ‘한 조각 썩은 나무판을 무엇 하러 덮어 주는가.’ 하였다. 대개 이런 식으로 허튼소리를 하였기 때문에 문한(文翰)의 직책을 얻지 못하였다. 송준길(宋浚吉)이 그의 문재(文才)를 애석하게 여겨 경연 석상에서 진달하고 전관(銓官)에게 말하여 비로소 제학(提學)이 되었는데, 그때는 정두경이 이미 노쇠한 상태였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동명의 일생을 일목요연하게 평한 말이다.
동명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독서를 좋아하였고, 말을 할 때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14세인 1610년(광해군2) 별시 초시(別試初試)에 입격하였으며, 15세에 사마 초시(司馬初試)에 입격하였다. 이후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문인으로 들어가 큰 기대를 받았다. 동명은 독서에 심취하여 다양한 서책을 읽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특히 《사기(史記)》는 중요한 애독서였으며, 이때의 독서 경험이 그의 일생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20세에 〈검부(劍賦)〉를 지어 문학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으며, 가행(歌行)과 악부(樂府)의 작품으로도 이름을 떨쳐, 당대 문단의 주요 인사들로부터 추중을 받았다.
동명은 20대에 주변 문인들과 문학적인 교류를 하면서 시로는 당시(唐詩)를, 문장으로는 한(漢) 이상의 작품을 규범으로 삼았으며, 다른 것은 취하지 않았다. 또한 광해군조가 혼탁하다고 여겨 벼슬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고 시와 술로 세월을 보냈다.
동명이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 계기는 인조반정이었다. 어릴 때부터 동명을 인정해 주었던 인물들이 대거 정계에 참여함으로써, 동명에게도 출사(出仕)의 기회가 왔던 것이다. 1626년(인조4)에 30세였던 동명은 원접사(遠接使)인 북저(北渚) 김류(金瑬)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관서 지방에 가 있으면서 변방의 정세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로부터 1년 뒤에 정묘호란을 겪었다.
33세인 1629년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후 1632년에 북평사(北評事)가 되어 관북 지방을 순행하면서 많은 변새시(邊塞詩)를 지어 당대의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다. 조정으로 돌아온 동명은, 당시 북방의 경계가 급한데도 조정에서 인조의 생부인 원종(元宗)의 추숭의례(追崇儀禮)에 대한 논의만 일삼고 있자 〈완급론(緩急論)〉을 지어 올렸다. 이해 5월에 청현직(淸顯職)인 홍문관 정언(弘文館正言)에 제수되었으나, 정순붕(鄭順朋)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서경(署經)이 거부되어 정치적인 좌절을 맛보게 되었다.
1635년(인조13)에 경기 도사(京畿都事)로 나갔다가 취중의 실언으로 인해 선성(先聖)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탄핵받고 파직되었다. 1636년에 〈병자년에 올린 상소[丙子疏]〉를 올려 무비(武備)에 힘쓸 것을 건의하고, 또 ‘어적십난(禦敵十難)’이라고 칭해지는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지은 상소[代人疏]〉를 지어 올려 국방력을 강화할 것을 진달하였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동명이 이 상소를 올린 지 얼마 안 되어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병자호란 이후 동명은 벼슬살이에 대한 회의가 일었으며, 1643년에 모친상을 당한 것을 계기로 관직에 나가지 않은 채 성서(城西)에서 지냈다. 1649년 다시 관직에 나간 동명은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로 있으면서 〈시풍(詩諷)〉 2편을 지어 올렸다.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자 동명은 장편의 〈시풍〉을 지어 올려 효종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1654년(효종5)에 부사직(副司直), 1655년에 공조와 예조의 참의가 되었다. 1656년에 《서경(書經)》의 〈무일(無逸)〉을 모방해 〈일곱 조목에 대해 진달한 소[七條疏]〉를 올렸다. 1657년에 〈원리설(原利說)〉과 〈원명론(原命論)〉을 지어 올렸으며, 이후에도 재이(災異)를 만나거나 진계(陳戒)할 일이 있을 때는 항상 진언하여 임금을 바로잡았다.
효종이 죽은 뒤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동명은 1664년(현종5) 왕명으로 장유(張維)의 묘지명(墓誌銘)인 〈계곡 장 상공의 묘지[谿谷張相公墓誌]〉를 지었다. 1666년에 70세의 나이로 다시 관직에 나가 예조 참의가 되었으며, 1669년에 홍문관제학 겸 예조참판이 되었다가 1673년 6월 5일 병으로 성서(城西)에서 졸하였다. 동명의 죽음을 애석해하던 현종은 곧바로 이조 판서와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에 추증하였다. 그해 8월에 한 달 먼저 죽은 부인과 함께 양주(楊州) 사정리(砂井里)에 있는 선영에 묻혔다.
4. 동명의 사상과 문학
동명이 어떠한 인물이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 시대의 일반 유학자나 문인들과는 다른, 동명만이 가지고 있던 특질을 유의해 보아야 한다. 사상적인 면에서 동명은, 유학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했던 당대의 일반 지식인들과는 달리 도학(道學)과 불교(佛敎)에도 친화를 보인, 폭넓고 개방적인 인물이었다. 또한 당시의 문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무(武)를 중시하였다. 당시의 현안인 청나라와의 관계에서 명분론(名分論)에 의한 척화론(斥和論)과 북벌론(北伐論)이 아니라 비판적인 척화론과 북벌론을 주장했다. 문학적인 면에서 동명은, 17세기의 문학 창작 경향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대표적인 인물이었으며, 시(詩)는 물론 문(文)도 우리나라 문학사에서 반드시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만큼 큰 성과를 남긴 문인이었다. 또한 동명은 후대의 문인들로부터 ‘천기(天機)가 드러나지 않고 허경(虛境)의 묘사가 중심이었다.’라는 극단적인 악평과 ‘엄청난 기력(氣力)을 가진 조선 최고의 문인이다.’라는 찬사를 동시에 받는 문제의 문인이었다.
1) 동명의 사상
동명은 기본적으로는 유교 사상을 중심으로 공부한 유학자였으며, 유학의 종지(宗旨)를 따르는 선비였다. 유학에서 중시하는 기본 강목들은 그가 평생 지켜 나간 기본 명제였다.
동명은 나라를 위해 자신의 능력을 다 바치려는 선비의 태도를 가져, 당시의 여느 유학자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수양하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하나의 이상으로 삼고, 그 스스로 유교적인 윤리를 중시하였다. 동명은 관직에 있는 동안 유교적인 이념을 실천하기 위해 국정에 도움이 될 만한 상소를 끊임없이 올리고, 다른 사람에게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시풍(詩諷)〉을 지어 올리기도 하였다.
동명은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들여온 고려조의 안향(安珦)을 높이 평가하면서 성리학의 참된 도통(道統)을 찾아보고자 하였으며, 이항복의 문하에 있던 초년 시절부터 당대의 유학자로서 서인계(西人係)의 핵심 인물이었던 장유(張維)나 이경직(李景稷) 등과 폭넓은 교제를 하였고, 노년에는 산림계(山林係)의 대표 인물인 송시열(宋時烈)이나 송준길(宋浚吉) 등과도 깊은 친분을 쌓았다.
그러나 동명은 사상적인 면에서 폭넓고 개방적인 면모를 보였다. 실제로 동명은 당대 극성하여 세력을 떨치던 향교나 서원의 역기능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하였으며, 이로 인해 심한 곤욕과 좌절을 맛보기도 하였다.
유가(儒家)로서 나라에 이바지하려는 사명감을 가진 동명에게 또 하나의 중요한 사상은 도교 사상, 즉 도학이었다. 동명은 가문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도학에 대한 관심과 친화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종증조인 북창(北窓) 정렴(鄭磏)은 우리나라 도학의 대표적인 인물이었으며, 그 일가는 대대로 도학의 맥을 이어오고 있었다.
동명이 도학에서 주목한 것은 장생불사(長生不死)를 위한 신선술(神仙術)이 아니라, 천하를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유학의 사상적 보완 요소로서의 도학이었다. 즉 도학을 유학 위주의 절대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폭넓은 사고를 할 수 있게 하는 보조 수단으로 보았던 것이다. 또한 동명은 도학의 사상적 근원을 우리 민족에게 전해 내려오는 도가의 현풍(玄風)에서 찾았다. 최치원(崔致遠)을 유가이면서 동시에 도교적인 인물로 설정하여 찬양하였으며, 우리 민족의 시조(始祖)인 단군(檀君)과 동명왕(東明王)을 현풍을 지닌 인물로 서술하였다. 동명이 이처럼 민족 자생의 현풍을 강조해 주장한 것으로 볼 때, 동명은 ‘도가적 민족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도학에 대한 폭넓은 식견을 지닌 동명은 예론(禮論)으로 경직되어 가는 유교적 명분과 격식으로부터 자유로운 호흡을 함으로써, 절대주의적 가치를 추구하는 유가에 비해 상대주의적 가치를 추구할 수 있었다. 또한 문약(文弱)에 물들어 가는 사회 풍조 속에서 무(武)의 가치를 인식하였으며, 중국에 대한 사대(事大) 관념에서 탈피하여 민족의 자존(自尊)을 일깨우기도 하였다.
동명이 활동했던 인조조부터 현종조의 시기는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가 긴장 국면에 접어든 때였다. 원접사의 종사관으로서 평안도 서새(西塞)에 가 있을 때 목격한 명나라의 쇠약한 상황과 청나라의 조선 변방에 대한 약탈은 조선 지식인 동명으로 하여금 강한 분노와 위기의식을 동시에 느끼게 하였다. 또 정묘호란의 발발은 당대 지식인이었던 동명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다른 문인들과는 달리, 무(武)를 중시하고 절의(節義)를 중시했던 동명은 자연스럽게 주화론(主和論)보다는 척화론(斥和論) 쪽으로 흘렀다. 그러나 대부분의 척화론자들이 명분론적인 존주대의론(尊周大義論)에 입각한 척화론을 주장한 반면, 동명은 국방력 강화에 대해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등, 실제적인 척화론을 주장하였다.
동명은 젊은 시절의 독서와 서새에서의 경험을 통해 습득한 지식을 바탕으로 상소를 지어 올려, 당시 청나라 대비책에 대한 여러 가지 모순점을 지적하면서 개선해야 할 점을 조목조목 설파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직전에 올린 상소인 〈병자년에 올린 상소〉와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지은 상소〉를 보면, 동명이 얼마나 무를 중시하면서 냉철한 눈으로 당시의 현실을 파악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동명은 그 상소에서, 당시 조정에서 동명의 상소를 채택하여 청나라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하였다면 병자호란의 전개 양상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평가될 만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대비책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동명의 주장은 채택되지 않았고, 곧바로 병자호란이 일어나 삽시간에 서울이 함락되고 인조가 청나라의 황제 앞에 무릎을 꿇는 크나큰 국가적 수모를 당하였다.
인조조에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척화파와 주화파로 나뉘어 있던 우리 지식인들의 대립은 효종조를 맞아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즉 북벌론이 중요한 대의(大義)로 천명된 것이다. 효종 즉위 후 동명은 다시 정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재개하였지만, 송시열이 중심이 된 존화의식(尊華意識)에 입각한 북벌론에 대해서는 그다지 동조하지 않았다. 유교와 도교 사상을 겸섭(兼攝)한 동명은 명나라에 대한 맹목적인 의리나 존화의식을 중심 가치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외적과 맞서 싸울 수 있는 현실적인 무력의 육성을 주장하는 의미에서의 북벌론을 주장하면서 소극적으로 동조하였던 것이다.
2) 동명의 문학
동명은 17세기 인조조에서 현종조까지의 사상적ㆍ문학적 조류의 다양한 국면을 작품을 통해 골고루 보여 준 인물이다. 동명은 운문은 물론 산문에서도 뛰어난 성과를 이룬 대표적인 문인으로, 시에서는 권필(權韠)이나 이안눌(李安訥)과 우열을 다퉜고, 문에서는 장유(張維)나 이식(李植)과 병칭되는 등, 문명이 매우 높았으며, 효종이 가장 사랑했던 문인이다.
유학은 물론 도학까지도 아우르는 동명의 문학은 동시대의 다른 문인들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몇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 첫째, 사상적 측면에서 동명은 기존의 관각문인(館閣文人)들과는 다른 개방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으며, 이로 인해 다양한 문학적 면모를 나타냈다. 특히 상무정신(尙武精神)의 고양과 협객(俠客)이나 검(劍) 등의 이단적 소재, 단군(檀君)과 동명왕(東明王) 등의 민족 시조에 대한 중시, 신선과 도가에 대한 관심 등을 문학을 통해 표현하였으며, 전체적으로 풍자(諷刺)와 풍간(諷諫)을 통해 현실 문제의 개선을 위한 적극적인 현실 참여를 하였다.
둘째, 미학적 측면에서 동명은 학당풍(學唐風)의 시를 쓰면서 그 이전의 여성적 감성 위주의 시에서 벗어난 강건하고도 기발한 남성적 시풍(詩風)으로 기건(氣健)의 풍격(風格)을 추구하였다. 이는 한위풍골(漢魏風骨)과 성당기상(盛唐氣象)과 관련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동명의 시풍은 그 전 시대의 해동강서시파(海東江西詩派)의 누(陋)나 대각체(臺閣體)의 기려(綺麗), 삼당시인(三唐詩人)의 청완유미(淸婉有味)의 기풍을 벗어나 침체되어 있던 시풍을 변화시켰다.
셋째, 문학정신적 측면에서 동명은 시뿐만 아니라 문필진한(文必秦漢)의 산문 창작을 실천해 낸, 우리나라 진한성당파(秦漢盛唐派)의 대표적인 인물로, 이전의 산문 작품들과는 상당히 다른 작품을 지었다. 특히 〈시풍(詩諷)〉은 동명의 개성적 성향과 문학정신을 잘 드러낸 것인 동시에, 조선 중기 사회의 사상적ㆍ문학적 변모를 드러내 보여 준 것이기도 하였다.
동명의 문학에서 특장(特長)으로 주목받았던 문학 양식은 악부(樂府)와 가행(歌行)이다. 동명은 한위(漢魏)의 악부와 더불어 이백(李白)의 의고악부(擬古樂府)를 모범으로 삼아 악부를 창작하였으며, 고악부(古樂府)의 정조구현(情調具現)과 함께 다양한 특성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동명의 의고악부는 17세기 악부 창작의 한 유형을 보여 준다. 악부와 아울러 동명의 기질이나 문학적 취향과 가장 잘 맞는 것은 가행이다. 동명은 이백과 두보의 가행을 배워 근체시(近體詩) 율격(律格)의 구속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장단구의 시형식을 통해 격정적인 감정을 표출하면서 대사회적(對社會的)인 발언을 하였으며, 압운(押韻)을 통해서도 강한 기세를 자유자재로 표현해 내어 자신만의 강한 개성적 면모를 한껏 드러냈다. 이러한 동명의 가행은 성당가행(盛唐歌行)의 수준에 이른다는 평가와 함께 조선조 고체시(古體詩) 창작의 대표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하게 하였다.
동명은 근체시에서도 악부나 가행에 못지않은 성과를 이루었다. 동명은 시를 지으면서 전고(典故)와 관용적(慣用的) 표현으로 시적(詩的) 함축(含蓄)을 즐겼으며, 과장법과 강조법을 써서 강한 기세를 풍겼다. 또한 시에는 강한 상무정신(尙武精神)을 담았으며, 동명 자신이 경험했던 변새(邊塞)의 풍광을 잘 묘사하였으며, 동명의 문학적 개성이라고 할 기건(氣健)의 풍격과 남성적인 기력을 잘 드러냈다. 또한 동명의 초기 시 작품을 보면 관각문인으로서의 우국충정과 나약한 조정의 현실에 대한 비판정신을 드러낸 반면, 노년기의 작품을 보면 주로 한거(閑居)와 도불적(道佛的) 풍취를 보여, 초반기의 작품과는 다른 품격을 띤다.
동명은 악부와 가행 및 시와 부(賦) 등 운문에서 뛰어난 성과를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전(傳)을 여러 편 남겼다. 동명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 열전(列傳)의 정신을 계승하여 전을 지었는데, 그 가운데 〈산군전(山君傳)〉은 호랑이를 소재로 하여 가전(假傳)의 형태로 무(武)의 가치를 강조한 작품이다. 〈벽계옹전(碧溪翁傳)〉은 가전적(假傳的)인 요소와 아울러 탁전(托傳)의 형태로, 동명 자신이 지향하는 처세관(處世觀)을 노래하였다.
동명이 이룬 문학적 업적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다른 문인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양식인 〈시풍(詩諷)〉을 남겼다는 점이다. 동명의 〈시풍〉은 역사 산문과 《시경》의 시구를 이용하여 역대 군왕의 치정(治政)에 대한 평가와 그 교훈을 서술한 일종의 논설문이다. 이는 간언문학(諫言文學)이라는, 문학을 통한 사회참여의 구체적인 형태를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동명이 활동했던 17세기 문단에는 명대(明代)의 복고주의(復古主義) 문학이 유행하였고, 동명은 이 문학사상을 그대로 수용하여 계승하였다. 동명의 문학에 보이는 다양한 양상들은 복고 지향 아래 참다운 복고의 정신을 갖춘 문학을 이루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후대에 들어 시대적인 상황이 변모하면서 문학이 구현하고자 하는 바가 달라짐에 따라 그 평가가 달라졌다.
동명의 문학은 동명의 사후 후배 문인들, 그 가운데서도 특히 김창협(金昌協) 계열의 문인들로부터 혹독한 평가를 받았다. 이들은 동명의 문학에 대해 “천기(天機)가 나타나 있지 않고 정언(精言)과 묘사(妙思)를 통해 그윽한 경지를 살핌이 부족하다.”라고 비판하였으며, “출처(出處)가 있는 시어(詩語)를 쓰고 허경(虛境)의 묘사가 중심이 되었다.”라고 비판하였다. 김창협 계열의 비판은 그 이후 시대 상황이 변함에 따라 재평가되었다. 김창협 이후의 문인인 남극관(南克寬)과 이사질(李思質) 등은 동명의 문학에 대해 “엄청난 기력(氣力)을 가진 우리나라 제일의 시인이다.”라고 평가하고 찬양하였다.
후대 문인들의 양극단적인 평가는, 동명 문학에 대한 평가 기준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김창협의 시대에는 ‘천기를 중심으로 한 대내적인 자기 관조(自己觀照)’의 문학이 중심이 되어, 동명의 시대 문학이 중심에 두고 있던 ‘대사회적인 발언’과 그에 따른 ‘기력의 표출’이 무의미하게 평가되었던 것이며, 그 이후에는 다시 동명의 개성적 면모가 중시되어 조선 제일의 문인으로 평가되었던 것이다.
5. 동명집의 내용
《동명집》은 문집 26권과 부록 1권, 도합 27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형태상으로는 원집(原集) 18권, 〈시풍(詩諷)〉 8권, 상하권(上下卷) 합본으로 이루어진 부록(附錄) 1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집은 운문(韻文), 여어(儷語), 산문(散文)으로 나뉘어 있고, 〈시풍〉은 법편(法篇)과 징편(懲篇)으로 구분되어 있다. 부록 상에는 동명의 동생들의 저술인 《옥호자유고(玉壺子遺稿)》와 《남악유고(南岳遺稿)》가 실려 있고, 하에는 동명에 대한 만장(挽章)과 제문(祭文), 언행록(言行錄)이 실려 있다. 이를 각 문체별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1) 운문(韻文)
악부(樂府:원집 1권)
모두 116수가 실려 있다. 동명이 젊은 시절에 지은 이 악부는 문학적 개성이 가장 잘 드러나 있어서 젊은 시절 문명을 드날리게 된 계기가 된 작품이다. 동명의 시에 대한 비판에 앞장섰던 김창협(金昌協)조차도 “동명의 악부는 한위(漢魏)의 시와 이백(李白), 두보(杜甫)의 시를 섭취했다.”라고 인정할 정도였다. 악부는 동명의 문학을 논하면서 빠뜨려서는 안 되는 것으로, 후대의 평자들이 “동명의 전반적인 시 작품 속에는 악부풍(樂府風)이 들어 있다.”라고 평가하기도 하였는바, 악부야말로 동명을 이해하는 첩경이 된다고 하겠다.
악부에는 기격(氣格)과 아건(雅健)을 추구하였다는 동명의 일반적인 시풍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악부 가운데에는 동명이 그리는 이상적인 인물인 협객(俠客)을 소재로 하여 쓴 작품이 상당수 있으며, 동명의 사상과 연결된 ‘무(武)의 중시’를 드러내는 작품도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동명의 일반적인 시풍과는 다른, 여인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한 작품도 간간이 보인다.
〈북풍행(北風行)〉은 중국의 포조(鮑照)나 이백(李白)의 작품과는 달리 동명의 독특한 기격(氣格)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며, 〈백마편(白馬篇)〉은 동명의 이상적 인물형인 협객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알게 해 주는 작품이다. 〈서문진녀(西門秦女)〉와 〈동해유용부(東海有勇婦)〉는 자신의 원수를 직접 응징하는 여인들을 묘사한 작품으로, 동명이 그리는 이상적인 여인상(女人像)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장진주(將進酒)〉는 이백의 걸작인 〈장진주(將進酒)〉를 연상시키는 작품으로, 이백의 〈장진주〉가 자신의 재능을 받아들이지 않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좌절감을 우회적으로 노래한 것처럼, 이 작품도 당대 현실에 대한 소극적인 저항을 굴절된 형태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유의해 볼 작품은 악부의 맨 마지막에 나오는 총 144구 851자로 이루어진 장편고시형의 〈고악부행(古樂府行)〉이다. 이 악부는 당시 ‘궁궐 밖의 대제학’이라고 칭해졌던 권칙(權侙)에게 써 준 것으로, 고악부에 대한 소개와 악부 창작의 전범을 제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쓴 작품이다. 동명은 이 작품에서 한대(漢代) 악부의 생성과 발전, 대표적인 고악부의 제목, 한대 이후 당대(唐代)에 이르기까지의 악부 문학의 대표 작가, 조선 문단의 악부 창작의 상황 등을 차례로 서술하여, ‘짧은 악부사(樂府史)’라고 할 만한 작품이다.
시(詩:원집 2~9권)
총 1140수의 시가 시체별(詩體別)로 오언절구 62수, 육언절구 4수, 칠언절구 320수, 오언율시 374수, 오언배율 15수, 칠언율시 195수, 칠언배율 1수, 오언고시 40수, 칠언고시 129수의 순으로 실려 있다.
2권에 수록된 시 가운데 조선 시대의 평자(評者)들로부터 극찬을 받은 〈마천령에 오르다[登磨天嶺]〉는, 시인의 주관적인 감정을 표현함이 없이 눈앞의 자연이라는 객관적인 상황을 그대로 진술한 것이라는 특징을 가진 작품으로, 감정을 배제한 객관적 상황의 서술을 통해 높은 기력(氣力)을 보이고 있는 동명 산수시(山水詩)의 특징을 잘 보여 주는 작품이다. 역시 평자들로부터 “준일(俊逸)한 가운데 극히 한아(閒雅)하다.”라는 평을 들은 〈풍악으로 가는 오산인을 전송하고……[送楓岳悟山人……]〉는, 동명 시의 개성적 요소를 잘 보여 주는 작품이다. 함경도 변경 지역의 풍경을 노래한 〈새상곡(塞上曲)〉은, 섬세한 묘사를 생략하고서도 상황을 눈으로 직접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하는 시이다. 명나라 장수인 양호(楊鎬)에 대해서 읊은 〈양 경리가 북정하는 데 대한 노래[楊經理北征歌]〉는, 효종(孝宗)이 극찬한 시이다. 〈술에 취한 채 자문과 휴휴를 이별하다[醉別子文休休]〉는 동명의 호방한 기상과 거침없는 기질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시이다.
3권에 수록된 시 가운데 〈느낌이 있어서 읊다[有感]〉는 청나라에 치욕을 당하고도 그에 대한 설욕보다는 굴욕을 감내하려는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에 대한 의분을 표출한 시이다. 〈도가의 서책을 읽다[讀道書]〉는, 신선(神仙)이나 선계(仙界)를 밖에서 구하려는 일반 사람들의 우매함을 비난하면서 도교와 현실과의 조화를 꾀하려고 한 동명의 생각을 읽게 해 주는 시이다. 1652년(효종3) 10월에 천둥과 비가 내리는 상황에서 식년 회시(式年會試)를 치른 것을 기념하여 쓴 〈시원에서 짓다[試院作]〉는, 겨울철에 우레의 재변이 일어난 것을 소재로 쓰면서도 그것을 오히려 긍정적인 시각에서 서술한 시로, 동명의 시적 재능을 엿볼 수 있는 시이다.
4권에 수록된 〈큰바람이 불다[大風]〉는, 거친 북방의 자연환경을 우리 당대 현실 상황과 연관시켜, 시를 통해 동명 자신이 말하고 싶은 내용을 표출한 시이다. 변방을 방어하기 위해 떠나는 무인의 기상을 노래한 〈양 첨사를 전송하다[送梁僉使]〉는, 일반적인 유학자들과는 달리 무(武)를 중시하면서, 그 당시에 중시되었던 예법(禮法)과 예론(禮論)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동명의 생각을 잘 드러낸 시이다. 술을 소재로 자신의 심경을 표출한 〈박중열 대이에게 주다[贈朴仲說大頤]〉는, 세속의 자잘한 일이나 강화된 예학적(禮學的) 분위기와는 잘 어울릴 수 없어 시대와 잘 조화되지 못했던 동명의 고뇌를 엿볼 수 있는 시이다. 동명 생전에 평자들로부터 ‘조선 최고의 오언율시’라는 높은 평가를 받았던 〈봉은사에서 묵다[宿奉恩寺]〉는, 불교에 대한 동명의 관심을 엿볼 수 있는 시이다.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왕검(檀君王儉)을 소재로 한 시 가운데 대표적인 시로 칭해지는 〈단군사(檀君祠)〉는, 우리 민족과 단군에 대한 자부심이 강렬하게 표출되고 있어, 17세기 사상적 경향을 보여 주는 동시에, 도교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던 동명의 성향을 잘 나타낸 시이다.
5권에 수록된 시 가운데 당시 도학(道學)의 대가로 칭해졌던 권극중(權克中)에게 보낸 〈청하자 권극중에게 부치다[寄靑霞子權克中]〉는, 도학을 추구하고 싶은 동명의 심정을 잘 드러낸 시이다.
6권에 수록된 시 가운데 당대의 실존 무인(武人)을 대상으로 읊은 〈양 감군이 바다를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육운으로 읊다[聞梁監軍渡海賦六韻]〉는, 무인이 되어 공을 세우고 싶어 하는 동명 자신의 심정을 잘 표현한 시이다. 28세 때인 1628년(인조4) 강왈광(姜曰廣)과 왕몽윤(王夢尹) 두 조사(詔使)가 조선에 왔을 때, 원접사인 김류(金瑬)의 종사관으로 평안북도에서 지은 〈능한산성에 올라 술을 마시다[登凌漢飮酒]〉는, 동명의 장건(壯健)한 필력을 느낄 수 있는 시이다. 〈용만의 이 부윤과 함께 통군정에 오르다[携龍灣李府尹登統軍亭]〉는 동명의 굳건한 기격(氣格)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마천령을 읊은 역대의 시 가운데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히는 〈마천령 위에서 짓다[磨天嶺上作]〉는, 시만 읽고서도 마천령의 험준함을 한눈으로 보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해 주는 시로, 동명의 청신(淸新)하고 호준(豪俊)한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시이다.
7권에 수록된 시 가운데 총 11편의 연작시(連作詩)로 이루어진 〈유선사(遊仙詞)〉는, 현실에 대한 불만을 역설적으로 표현하여 환상적인 가상의 세계를 그려낸 시이다. 이 시를 통해 성리학적 명분론을 내세워 개인과 당파의 이익만을 위해 시시비비하는 현실을 초월하고자 하는 동명의 염원을 엿볼 수 있다. 열악한 근무 환경에서 고생하는 변방 병사들의 애처로운 모습을 형상화한 〈변방 성에서 추위로 고생하다[邊城苦寒]〉는, 추위에 떠는 병사들의 참혹한 모습을 보면서 애처로워하는 동명의 인간적인 면모와 청나라에 핍박받는 현실에 대한 울분을 느끼는 동명의 모습을 느낄 수 있는 시이다. 성리학적인 세계관만으로는 자기 시대를 감당할 수 없다는 인식 하에 쓴 〈장자를 읽다[讀莊子]〉는, 세상에 두루 퍼져 있는 여러 가지 학설에 대해 어느 한 가지만이 절대적인 진리라고 규정할 수 없다는 개방적이고 균형적인 동명의 사고가 드러난 시이다.
8권에 수록된 시 가운데 《사기》 〈자객열전(刺客列傳)〉의 내용을 요약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한 〈자객가(刺客歌)〉는, 자객들의 행동력, 신의, 비극적 결말을 보여 주는 시이다. 조선 시대 평자들로부터 극찬을 받은 〈협객편(俠客篇)〉은, 형가(荊軻)가 진 시황(秦始皇)을 암살하러 떠난 이야기의 후일담을 다룬 것으로, 협객을 소재로 하여 강개한 정조를 그려낸 시이다. 한 고조(漢高祖)가 백등산(白登山)에서 흉노에게 포위당하였다가 미인계를 써서 풀려난 일을 소재로 하여 쓴 〈백등행(白登行)〉은 청나라에게 받은 조선의 치욕을 언제인가는 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염원을 담은 작품이다. 〈경성에서 사냥하는 것을 보다[鏡城觀獵]〉는, 산짐승이나 사냥하는 작은 사냥이 아닌 오랑캐 토벌이라는 큰 사냥을 수행해 주기를 바라는 심회를 토로한 작품이다. 동명의 문학적 특성이 골고루 나타나 있는 작품이라고 평가되는 〈이 절도사의 보검에 대한 노래[李節度寶劍歌]〉는, 보검을 소재로 삼아 당대 무인을 향한 동명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지은 시로, 육진(六鎭) 장사(壯士)들의 사력(死力)을 진검(眞劍)이라는 칼의 이미지로 형상화하여, 동명 자신의 오랑캐를 평정하고픈 소망을 표현한 작품이다.
9권에 수록된 시 가운데 병자호란이 끝난 뒤 관직을 떠나 아산(牙山)에서 은거하던 시기의 작품인 〈난리가 끝난 뒤에 서수부에게 부치다[亂後寄徐秀夫]〉는, 병자호란 직후부터 벼슬길에서 떠나 한가로이 지내고픈 한거(閑居)의 심회를 잘 드러낸 시이다. 〈평택의 수령으로 있는 이성구에게 부치다[寄李使君聖久]〉는, 세속에 대한 집착을 도가적(道家的) 수양을 통해 떨치려고 애쓰는 동명의 마음을 드러낸 시이다. 용(龍)을 소재로 하여 쓴 작품인 〈화룡행(畫龍行)〉은 기이함을 좋아하는 기질적인 측면과 더불어 오랑캐와 대치하고 있던 당대의 위기 상황과 관련지어 지은 작품으로, 동명의 특성을 잘 알 수 있게 해 주는 작품이다. 한(漢)나라의 뛰어난 인물들이 국방과 외교 면에서 성공적으로 이룩한 업적을 노래한 〈전억석가(前憶昔歌)〉와 송(宋)나라가 오랑캐로 인해 멸망하게 된 과정을 서술한 〈후억석가(後憶昔歌)〉는 오랑캐와 관련된 국방과 외교에 대한 동명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 시이다. 이 작품들을 통해 동명이 정책 방향의 한 축을 이루고 있던 주화론(主和論)에 대해 반대 입장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부류(賦類:10권)
동명은 〈검부(劍賦)〉와 〈애만월대부(哀滿月臺賦)〉를 남겼는데, 두 편의 부 모두 뛰어난 작품성으로 우리나라 부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으로 칭해진다.
〈검부〉는 280여 구 1324자로 이루어진 장편(長篇)이다. 문답체(問答體)를 이용하고, 산문, 운문, 산문의 순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한부(漢賦) 형식을 갖추었다. 창작된 시기는 동명이 벼슬에 나가지 않고 문학 연마에 몰두한 20세 때로, 동명의 독서 경향과 초기 창작상의 개성이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이 작품으로 당대 문단의 중진들에게 문학적 재능을 널리 알렸다. 17세기의 후배 문인인 김석주(金錫冑)가 편찬한 《해동사부(海東辭賦)》에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사부(詞賦) 작품으로 선록(選錄)되어 있어, 당대 및 후대에 동명의 문학적 성취가 높이 인정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 부에서 동명은 임금이 휘둘러야 할 참다운 보검이란 물질적이고 가시적인 보검이 아니라, 백성을 잘 다스리고 하늘의 뜻을 잘 따르며, 천하를 잘 다스리는 덕치(德治)라고 하였다. 이 작품은 《장자(莊子)》의 〈설검(說劍)〉과 주제가 비슷하고, 표현에서도 상당 부분 유사성을 보인다. 또한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자허부(子虛賦)〉나 〈상림부(上林賦)〉와 구성면에서 유사하여, 동명의 독서 경향과 복고적 문학창작의 한 양상을 보여 준다.
〈애만월대부〉는 27구 148자로 된 단편이다. 동명이 포의의 신분으로 평안도에 갔을 때인 30세경에 지은 작품이다. 이 부에서 동명은 개성의 만월대에 올라 그곳에서 바라다보이는 풍경에 대한 묘사와 그를 통한 자신의 심회를 그리고 있다. 형식은 산문의 구법과 이소(離騷)의 구법을 혼합하여 겸용한 소산혼합체(騷散混合體)이다. 동명은 자신의 행동 등 사실에 대한 묘사는 산문체로 쓰다가 격앙된 감정을 표현할 때 초사체(楚辭體)와 직서체(直敍體)를 쓰고 있다. 이 부는 우리 역사의 자취를 찾아가 그에 대한 회고의 정을 읊고 있는 동시에 임금의 올바른 정치에 대한 풍간(諷諫)의 뜻을 담고 있어 풍자와 풍간의 현실참여 문학을 중시하였던 동명의 전반적 문학관을 엿볼 수 있다.
2) 여어(儷語:10권)
문집을 편집하면서 별도로 여어라는 제목을 붙이는 것은 다른 사람의 문집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으로, 《동명집》이 가지고 있는 한 특색이다. 여어류는 총 11편의 글이 조(詔) 2편, 표(表) 2편, 서(序) 4편, 문(文) 3편의 순으로 실려 있다.
조(詔) 2편은 실제로 임금이 내리는 조서를 지은 것이 아니라, 한나라 황제가 내리는 조서에 비겨서 지은 것이며, 표(表) 2편 역시 중국의 진나라와 한나라 신하들이 황제에게 올리는 표에 비겨서 지은 것이다. 〈춘야유도리원서(春夜遊桃李園序)〉는 이백의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를 모의(模擬)해서 지은 것이고, 〈관어당서(觀魚堂序)〉는 수원의 광교산에 있는 관어당에 대한 서이다. 〈내승 이정숙이 볼모가 되어 심양으로 가는 것을 전송하는 서[送李內乘靜叔以質子赴瀋陽序]〉는 이시백(李時白)의 아들인 이한(李憪)이 볼모가 되어 심양으로 가는 것을 전송하는 서이다. 〈최 학사 고운 비의 서[崔學士孤雲碑序]〉는 최치원(崔致遠)의 비석에 대한 서인데, 이 서가 《고운집(孤雲集)》에는 정홍명(鄭弘溟)이 지은 것으로 잘못 실려 있으며, 이곳에 실려 있는 것과 글자의 출입이 약간 있다.
〈전횡을 조문하는 글[弔田橫文]〉은 정묘호란 3년 뒤에 지은 작품으로, 이 글에서 동명은 장렬한 최후를 마친 전횡과 그 무리들에 대해 강한 기개를 느끼면서 무한한 찬사를 바치고 있다. 〈고용산에 있는 연화사의 권선문[高聳山蓮花寺勸善文]〉과 〈화장사 중창문(華藏寺重創文)〉은 아산의 고용산에 있는 연화사와 서울의 관악산(冠岳山)에 있는 화장사를 짓는 데 필요한 재물을 희사하기를 권하는 글이다. 이러한 글은 동시대 다른 인물의 문집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글로, 불교에 대한 동명의 관심을 보여 준다.
3) 산문(散文)
서기류(序記類:11, 12권)
《동명집》에 실려 있는 서는 총 22편으로, 이 가운데 각 문집에 대한 서가 19편이며, 그 나머지는 화첩(畫帖)이나 시(詩)를 대상으로 하여 쓴 서이다. 기는 모두 3편이 실려 있다.
서 가운데 특히 주목해 보아야 할 작품으로 〈읍취헌집 서(挹翠軒集序)〉가 있다. 이 글을 통하여 동명이 문학에서 가장 중요시한 것이 사회참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글에서 동명은, 다른 문인들이 박은(朴誾)의 문학작품이 ‘수식이나 인공적이지 않고 타고난 성정(性情)과 천기(天機)에서 나온 것’에 대해 높이 평가하는 데 반해, 곧은 도를 지키려다가 필화(筆禍)를 당해 젊은 나이에 죽음을 당한 박은의 문학정신을 높이 평가하면서, 박은을 통해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적 문인상(文人像)을 그려냈다. 〈석전집 서(石田集序)〉에서는 문학 작품 자체의 미학적 측면과 함께 그 작가의 삶에 대한 태도 및 창작 의식을 매우 중시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둔암시고 서(芚蓭詩稿序)〉 등에서는 동명이 글의 기격(氣格)을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해동이적 서(海東異蹟序)〉는 동명이 70세 되던 해에 우리나라의 《열선전(列仙傳)》이라고 할 만한 책인 《해동이적》에 써 준 서문으로, 이 서문 역시 동명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글이다. 이 서에서 동명은 도교가 불교보다 더 훌륭하다고 결론적으로 말하고 있는데,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불교는 개인의 내적 수양에만 힘쓰는 것으로 현실사회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하는 반면, 도교에는 천하를 다스리는 교리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 서를 통해 동명이 도교에서 주목한 것은 장생불사(長生不死)를 위한 신선술(神仙術)이 아니라, 천하를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유교에 대한 사상적인 보완 요소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기(記)는 아주 적은 분량으로, 〈조자성의 선영도에 대한 기[曺子誠先塋圖記]〉, 〈삼애당 기(三愛堂記)〉, 〈목달부가 가지고 있는 병풍의 기[睦達夫屛風記]〉 3편이 있다. 동명은 〈삼애당 기〉에서 벼슬길에 들어선 유자(儒者)가 가장 유념해야 하는 것은 애군(愛君)이라고 하였다. 유가의 기본 이념인 자신의 몸을 닦아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신하로서 임금을 잘 보필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말한다. 이 기를 통해 조선조 문인들이 대부분 애민(愛民)의 정신을 강조했던 것에 비해, 애군(愛君)을 가장 중시하였던 동명 문학의 한 특성을 엿볼 수 있다.
잡저류(雜著類:11, 13권)
11권에 설(說) 2편, 논(論) 1편, 전(傳) 3편이 실려 있고, 13권에 서(書) 2편이 실려 있다. 이 글들은 모두 동명의 사상과 문학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빠뜨려서는 안 되는 중요한 글들이다.
설(說)은 〈선악설(善惡說)〉과 〈독서설을 권 정자에게 주다[讀書說贈權正字]〉 2편이 실려 있다. 〈선악설〉에서 동명은 절대적으로 고수할 진리는 없고 상대적인 진리만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통하여 동명이 그 당시 지식인들이 유교 원리를 절대화하여 이에 반하는 자를 용납하지 않았던 것과는 달리, 당대를 지배하는 가치나 윤리규범을 맹목적으로 준수하지 않고 비판하며, 보다 개방적이고 균형적인 사고를 취했음을 알 수 있다. 동명이 권유(權愈)에게 써 준 〈독서설〉에서 동명은 다른 일반 유학자들과는 달리 《춘추좌씨전》이나 장주(莊周), 굴원(屈原), 사마천(司馬遷), 가의(賈誼), 양웅(揚雄) 등의 글을 읽을 것을 권장한다. 이를 통해서도 동명의 독서 경향을 파악할 수 있다.
논은 〈완급론(緩急論)〉 1편이 실려 있다. 이 글은 동명이 북평사(北評事)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북쪽 오랑캐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조정으로 돌아온 뒤, 조정에서 인조의 생부인 원종(元宗)의 추숭(追崇)에 대해 갑론을박하고 있는 것을 보고 통탄스러운 마음에서 지은 것이다. 이 글에서 동명은 국정에서 가장 시급한 일은 국방력을 강화하여 오랑캐의 침입에 대비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는 이를 도외시하고 있다고 탄식하면서, 국방력을 강화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전(傳)은 〈이효자전(李孝子傳)〉, 〈산군전(山君傳)〉, 〈벽계옹전(碧溪翁傳)〉 3편이 실려 있다. 〈이효자전〉은 동명의 전 가운데 유일하게 정통 전의 양식에 맞게 창작된 것으로, 실제 인물의 생애를 기리기 위해 지은 작품이다. 동명은 이 글에서 이흡(李歙)의 일가족이 효(孝)와 절의(節義)를 지키기 위해 자결한 것을 중심 소재로 삼아, 참다운 삶의 태도에 대한 고민과 이상적인 죽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표출하였다. 또한 이를 통해 병자호란 당시 우리 민중이 겪었던 참혹한 수난상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였다.
〈산군전〉은 호랑이를 의인화하여 지은 작품이다. 동명의 초기작으로 보이는 이 작품은 동명의 당대에 이미 유명하여, 그의 문학에 대한 평가에서 자주 언급되곤 하였는데, 한유(韓愈)의 〈모영전(毛潁傳)〉과 비교되면서 당대 원로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산군전〉은 호랑이가 처음 등장하고, 배경의 규모가 여타의 가전 작품들보다 웅대하고, 가전문학(假傳文學)의 특징인 전고(典故)를 여타의 가전 작품들과는 다르게 사용하고 있고, 문체가 기존의 가전 작품들과 차이가 난다는 특징이 있다.
〈벽계옹전〉은 백로를 의인화하여 지은 것으로, 비교적 짧은 전이다. 동명이 은거하고 있을 때 쓴 것으로 보이는 이 글은 가전(假傳)과 탁전(托傳)의 요소를 아울러 가지고 있다. 동명은 이 작품을 통하여 자신의 정신적 자유를 갈구하는 내밀한 목소리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소차류(疏箚類:12, 13권)
10편의 상소와 1편의 차자, 총 11편의 소차가 실려 있어 다른 문집의 소차류에 비해 상당히 적은 분량이다. 그러나 이들 소차 가운데에는 당대의 현실 상황을 정확하게 꿰뚫어 본 동명의 현실적인 식견을 엿볼 수 있는 상소와 임금을 바로잡기 위한 충정을 엿볼 수 있는 상소가 있어 주목된다.
이들 상소 가운데 특히 주목해 보아야 할 상소는, 병자년(1636, 인조14) 봄에 국가가 처한 상황에 위기의식을 느껴 당대의 여러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하여 올린 상소인 〈병자년에 올린 상소[丙子疏]〉와 역시 병자년 봄에 권경(權憬)을 대신하여 지어 올린 상소로, 흔히 ‘어적십난소(禦敵十難疏)’라고 칭해지는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지은 상소[代人疏]〉이다.
〈병자년에 올린 상소〉에서 동명은 국가의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선결되어야 할 열 가지 조건을 말하였다.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지은 상소〉에서는 외적, 특히 청나라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가장 시급하고도 어려운 열 가지 사항을 ‘혹인(或人)’이 묻고 대답하는 문답식으로 기술하였다. 이 두 상소의 주된 내용은 ‘무비야말로 오늘날에 가장 시급한 일로,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군사(軍士), 무기(武器), 보루(堡壘)를 잘 갖추고 훌륭한 장군(將軍)과 군주(君主)가 필요하다.’라는 것이다. 구체적인 문제점을 지적하고 해결책을 모색한 이 상소문은 그의 평소 국방 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중국 병법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토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들 상소에서 동명이 당시 조정에서 취하고 있던 대비책으로는 청나라 군사를 막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한 점과 그에 대한 개선책을 지적한 것을 보면, 그 글대로 대비책을 세웠다면 병자호란의 양상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보일 정도로 정확하게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동명의 국가적 위기를 해결하려는 노력과 구체적인 대안 제시에도 불구하고, 당대 조정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로부터 몇 달 뒤에 병자호란이 일어나 삼전도(三田渡)의 굴욕이라는 국가적인 치욕을 당하였다.
제문비지행장류(祭文碑誌行狀類:13~18권)
대상 인물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인 제문(祭文)과 대상 인물의 행적을 기술하고 공덕을 기리는 글인 신도비명(神道碑銘), 묘지(墓誌), 묘표(墓表), 묘갈(墓碣), 비문(碑文) 및 대상 인물의 일생을 전기적으로 상세히 서술한 행장(行狀) 등이 《동명집》에는 상당수 수록되어 있다. 동명의 문장 솜씨가 빼어나다는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이렇듯 표덕지문(表德之文)이 그의 손에서 많이 나오게 된 것이다.
제문은 모두 4편이 수록되어 있다. 대상 인물은 조익(趙翼)과 이정귀(李廷龜), 동생인 정성경(鄭星卿), 종제(從弟)인 정뇌경(鄭雷卿), 장인인 강홍중(姜弘重)이다. 이 가운데 조익에 대한 제문은 왕세자를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비갈(碑碣)과 묘지(墓誌)는 모두 56편이 수록되어 있다. 신도비명의 대상 인물은 유홍(兪泓), 이증(李增), 이덕형(李德泂), 정뇌경 등이다. 이 외에도 안향(安珦)의 유허비(遺虛碑)인 〈문성공 안 선생의 옛터 비[文成公安先生舊基碑]〉, 〈국사 도선의 비[國師道詵碑]〉, 〈금강산 송월당대사의 비명[金剛山松月堂大師碑銘]〉, 〈선화당대사의 비문[禪華堂大師碑文]〉, 〈보개산 취운 선사의 비[寶蓋山翠雲禪師碑]〉, 〈춘파당 선사의 비[春坡堂禪師碑]〉 등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1편이 수록되어 있는 행장의 대상 인물은 장유(張維)이다.
이 가운데에 특히 대상 인물의 비중이 크고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유홍(兪泓)의 신도비명을 손꼽을 수 있다. 선조 당시의 중요한 현안이었던 종계변무(宗系辨誣)와 관련된 사항과 임진왜란의 상황 등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어, 유홍의 행적과 당시 상황을 파악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장유에 대한 극도의 존경심을 가지고 심혈을 기울여 쓴 장유의 행장을 통해서는, 문장 솜씨뿐만 아니라 인조조의 정치 상황에 대한 파악은 물론, 주자학이 만연했던 당시에 양명학(陽明學)을 중시하였던 장유의 학문 및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문학에 대해 파악할 수 있다. 〈문성공 안 선생의 옛터 비〉를 통해서는 유교에 대한 동명의 생각을, 〈국사 도선의 비〉 등의 글을 통해서는 동명의 불교에 대한 관심을 파악할 수 있다.
4) 시풍(詩諷:19~26권)
〈시풍〉은 제목에 드러나 있듯이 시를 이용하여 쓴 풍간(諷諫)이다. 법편(法篇) 36편과 징편(懲篇) 68편, 도합 104편의 글이 전체 8권 분량에 실려 있다. 전체가 26권인 동명의 시문집 가운데 8권을 차지하고 있으니, 약 3분의 1에 해당된다. 〈시풍〉은 동명에게 그만큼 중요한 글이며, 우리나라 문집 가운데 《동명집》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기도 하다.
〈시풍〉은 인조 말년 동명이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하며 저술에 몰두할 때 지었다가 인조가 승하한 뒤 왕위에 오른 효종에게 바친 글이다. 이 글은 당대의 문학가는 물론 우리나라 전체의 문학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독특한 형식과 내용을 지닌 글이다. 체재는 크게 법편과 징편으로 나뉘어 있으며, 중국 역대 임금의 명호(名號)를 제목으로 삼았다. 선정(善政)을 하여 본받을 만한 임금은 법편에, 실정(失政)을 하여 경계할 만한 임금은 징편에 실었다. 법편에 실린 임금은 위로 요(堯)부터 아래로 송 인종(宋仁宗)까지 총 36명이며, 징편에 제시된 임금은 위로 하(夏)나라 태강(太康)부터 아래로 송 휘종(宋徽宗)까지 총 68명이다. 각 편들은 제각기 다양한 내용을 제시하고 있으나, 형식적으로는 대략 3단계의 체제를 가지고 있다. 먼저 제목으로 삼은 대상 임금의 행적을 간략히 서술하고, 다음으로 대상 임금의 주요 행적과 관련하여 동명 자신의 주장을 펴는 일종의 논설문을 적당한 소제목을 붙여서 서술하며, 마지막으로 그 글의 내용에 부합하는 《시경》의 시 구절을 인용하여 전체 내용을 마무리하였다.
〈시풍〉은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임금을 소재로 삼고 있다는 점이 동명의 한계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비판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동명의 처지에서는 풍자와 찬미의 대상이 우리 역사의 인물이 아니기에 과거 역사에 대한 시비 판단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펼쳐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소재를 따져 〈시풍〉의 의미를 약화시킬 필요는 없다.
〈시풍〉은 동명의 문학에서 양적으로나 성과 면에서나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글이다. 특히 문학을 바라보는 동명의 관점과 그가 인식한 문학가의 사회적 역할을 잘 보여 주는 글로, 동명 연구에서 빠뜨려서는 안 되는 중요한 글이다.
5) 부록(附錄)
부록 상(上)에는 동명의 동생인 옥호자(玉壺子) 정성경(鄭星卿)의 《옥호자유고(玉壺子遺稿)》와 남악(南岳) 정인경(鄭麟卿)의 《남악유고(南岳遺稿)》가 실려 있다. 《동명집》 맨 앞에 수록되어 있는 최석정(崔錫鼎)의 서문에서 《동명집》이 중국의 두군(竇群) 오형제의 글을 모은 《첩주집(疊珠集)》을 모방하여 편집하였다고 밝히고 있듯이, 엄밀히 말하면 《동명집》은 동명의 글만 모아서 편집한 것이 아니라, 삼형제의 글을 모아 편집한 문집인 것이다.
《옥호자유고》에는 오언절구, 칠언절구, 오언율시, 오언고시, 칠언율시, 칠언고시의 순으로 모두 21수의 시가 실려 있으며, 《남악유고》에도 같은 순서로 총 49수의 시가 실려 있다. 이들 시를 보면 대개 동명의 시 제목과 비슷한 제목의 시가 많으며, 시풍 역시 비슷한 시가 많다. 이들의 시를 통해 동명 집안의 시풍을 파악할 수 있음은 물론, 동명 집안의 교유 관계도 파악해 볼 수가 있다.
부록 하(下)에는 동명과 관련된 제문(祭文)과 만장(挽章) 및 동명의 언행록(言行錄)이 수록되어 있다. 제문은 현종이 치제(致祭)하기 위해 지은 구음(具崟)의 치제문(致祭文)이 가장 먼저 수록되어 있으며, 이후 이헌(李藼)ㆍ권유(權愈)ㆍ홍만종(洪萬宗) 등이 지은 제문이 수록되어 있다. 만장(挽章)에는 석지형(石之珩)ㆍ강석규(姜錫圭) 등이 지은 글이 수록되어 있다. 마지막에는 강빈(姜彬)이 지은 동명의 언행록이 실려 있다.
여기에 수록된 제문이나 만장을 통해 동명의 교유 범위와 동명의 문인들을 파악할 수가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언행록이다. 언행록은, 동명에 대한 상세한 연보(年譜)는 물론이고 행장이나 묘지명 등 동명의 행적을 알 수 있는 글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을 참고하여 파악할 수 밖에 없는 동명의 행적을 그나마 알 수 있게 해 주는 글이다. 그런즉 동명을 연구할 때 반드시 참고해야 하는 글이다.
6. 동명에 대한 기존의 연구 성과
동명의 문학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를 검토해 보면, 문학사(文學史) 속의 단편적인 서술과 몇 편의 학위 논문 및 소논문뿐이어서, 동명이 이룬 문학적 성취에 비해서는 상당히 소략한 편이다. 또한 남은경을 제외한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동명의 시(詩)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동명의 문학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문(文)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김태준(金台俊)의 《조선한문학사》, 이가원(李家源)의 《한국한문학사》, 문선규(文璇奎)의 《한국한문학사》 등의 개설서(槪說書)에서 동명의 문학에 대해 부분적으로 언급하였다. 여기에 서술된 내용은 동명의 작품을 전반적으로 읽어 보았거나 깊이 연구한 결과에 의한 평가가 아니라, 대부분 조선조 역대의 시화(詩話) 내용을 인용하기만 한 것으로, 동명에 대한 정확한 평가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 이후의 문학사에서는 동명의 시 몇 편을 실제로 분석하면서 그의 문학적 성격을 서술하였다.
조동일은 《한국문학통사》에서 동명의 시 〈등능한산성(登凌漢山城)〉을 예로 들었다. 이 시를 수도 서울의 번성함을 노래한 신도가류(新都歌類)를 이은 작품으로 파악하였으며, 이 작품을 근거로 태평성대를 구가하며 당시에 ‘위기의식을 부정한 집권층의 문인’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동명의 문학에 대한 조동일의 서술은 시 제목부터 잘못되었고, 시에 대한 해석의 오류가 많다.
본격적인 연구는 1988년 윤미길의 〈정두경 연구〉 (원대논문집 제22집, 1988)가 나온 이후에 비로소 진행되었다. 그 이후 김상일의 〈동명 정두경의 시세계〉(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0)와 〈동명 정두경의 정치적 불우와 도선(道仙)에의 경도〉(한국문학연구 제15집, 1992), 박태성의 〈동명 정두경 시 연구〉(연세대 석사학위논문, 1991), 남은경의 〈동명 정두경 문학의 연구〉(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8), 유성준의 〈이조 정두경 시의 도선풍고〉(중국연구 제24집, 1999), 권오웅의 〈동명시에 나타난 의식의 양상〉(한문학연구 제14집, 1999), 유근안의 〈정두경 악부시 연구〉(한국어문학 48집, 2002), 임준철의 〈한시 의상론과 조선중기 한시 의상 연구〉(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 송재소의 〈동명 정두경의 시〉(시와 시학, 2005), 여운필의 〈동명 정두경의 시세계〉(한국한시작가연구 제10집, 2006) 등이 이어졌다.
전문 연구자들 가운데 동명 연구에 관한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한 연구자는 남은경이다. 남은경은 국내에는 공개된 것이 없고 오직 일본의 도서관에만 소장되어 있는 중간본 《동명집》을 발굴하여 국내에 소개하였다. 또 이 중간본을 바탕으로 생애 및 시와 문, 나아가서 〈시풍〉까지를 포괄한 연구를 진행하여, 연구의 지평을 넓혔다.
남은경 등의 전문 연구자들에 의해 동명의 문학, 특히 시문학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정확한 연구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논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논지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인용된 시 가운데 원시(原詩)를 잘못 해석하고 그에 따라 해설 역시 잘못된 부분이 있어 새로운 연구가 요구된다.
7. 동명집 번역의 기본 원칙
해제(解題)를 작성하면서 번역의 기본 원칙 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본 《동명집》 해제는 역자인 필자가 쓰는 것인 만큼, 번역의 기본 원칙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하여 이용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본 《동명집》은 다음과 같은 기본 원칙에 의거하여 번역하였다.
교감(校勘)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본 번역에 이용된 대본인 중간본 《동명집》과 한국고전번역원에서 구두를 찍어 간행한 초간본 《동명집》을 비교하여, 추가되거나 빠진 부분에 대해 교감하였으며, 다른 사람의 문집에 실린 글이 있을 경우에는 상호 비교하여 교감하였다. 둘째, 마모된 글자나 흐린 글자 등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틀린 글자만 교감하였으며, 어느 정도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거나 통용되는 글자에 대해서는 교감하지 않았다. 셋째, 대본의 글자가 분명하더라도 의미가 통하지 않는 경우에는 참고자료를 활용하여 근거를 달아 교감하였으며, 참고할 만한 자료가 없는 글자는 문리(文理)에 의거하여 교감하였다.
번역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운문(韻文)의 번역은 운문의 특성을 고려하여 오언시의 경우에는 4, 4, 5조의 운율을 기본으로, 칠언시의 경우에는 4, 4, 4, 4조의 운율을 기본으로, 장단구로 되어 있는 나머지 시나 악부, 부 및 운문의 형태로 되어 있는 명(銘)이나 제문 등의 번역은 해당 운문의 특성을 고려하여 오언시나 칠언시의 운율에 따라 번역하였다. 번역문에는 문장부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둘째, 산문(散文)은 각 문체의 특성을 고려하여 번역하였다. 변려문은 특성을 고려하여 각 문장이 대구(對句)의 형태가 유지되도록 번역하였으며, 상소문이나 묘갈 등은 사실 전달에 중점을 두고 번역하였다. 셋째, 용어는 일반 독자들보다는 연구자들의 편의를 고려하여 선택하였다. 고사(故事)에 관련된 용어나 역사 용어, 제도 용어 등에 대해서는 정확한 번역을 위하여 지나친 의역을 하지 않고 대부분 그대로 썼다.
주석(註釋)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대본에 소자(小字)로 되어 있거나 두주(頭註)로 되어 있는 경우, 그 내용이 교감 사항에 해당되는 것은 번역문에 노출시키지 않고 소주와 두주임을 밝히고 주석으로 처리하였다. 교감 사항의 경우에는 교감주를 달았다. 둘째, 글이 지어진 배경을 알 수 있도록 각 글의 제목에 대해 가급적 상세한 주석을 달았으며, 고사나 제도 용어 등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주석을 달았다. 셋째, 이제까지 연구된 학계의 성과를 반영하여 주석을 달되, 연구자들의 설을 그대로 인용하여 주석 처리 하였다. 넷째, 시 제목에 나오는 인물의 주석은 자나 호 등을 주석의 표제어로 삼지 않고 이름을 주석의 표제어로 삼았다.
8. 맺음말
17세기 우리나라 문학사(文學史)에 큰 영향을 끼치고, 이후 문단의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동명 정두경(鄭斗卿)의 문집 편찬 과정과 그의 일생, 사상과 문학, 《동명집》의 내용과 가치에 대해서 대략 살펴보았다. 이어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와 번역의 기본 원칙에 대해서도 서술하였다.
문집 26권과 부록 1권, 도합 27권으로 이루어진 《동명집》은, 크게는 원집(原集), 〈시풍(詩諷)〉, 부록(附錄)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집은 운문(韻文), 여어(儷語), 산문(散文)으로 나뉘고, 〈시풍〉은 법편(法篇)과 징편(懲篇)으로 구분되어 있다. 부록 상에는 동생들의 저술인 《옥호자유고(玉壺子遺稿)》와 《남악유고(南岳遺稿)》가 실려 있고, 하에는 동명에 대한 만장(挽章)과 제문(祭文), 언행록(言行錄)이 실려 있다.
《동명집》은 당시 다른 사람들의 문집과 비교해 볼 때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동명 삼형제의 문집을 한 문집으로 묶었다. 둘째, 당대의 다른 문집에서는 큰 비중을 차지하는 서(書)가 한 편만 수록되어 있다. 셋째, 다른 문집에는 보이지 않는 여어(儷語)와 〈시풍〉이 별도의 항목으로 편집되어 있다.
동명에 대한 이제까지의 연구 성과를 보면, 동명이 이룬 문학적 성취에 비해서는 소략한 편이라 할 수 있다. 동명의 사상이나 문학에 대해 전체적으로 어느 정도 실체에 접근하였다고 볼 수 있지만 논문에서 인용된 원시(原詩)의 해석이나 해설 등에 있어서는 미흡한 편이다. 그러한 가운데서 연구자 남은경은 중간본 《동명집》을 발굴하여 국내에 소개하는 성과를 이루었으며, 시에 대해서는 물론 문에 대해서까지 폭넓은 연구를 진행하여, 연구의 지평을 넓혔다. 본 번역서의 출간을 계기로 동명의 실체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이어지길 기대한다.
현재 동명의 연구에서 무엇보다 안타까운 점은 동명에 대한 상세한 연보(年譜)가 없다는 것이다. 동명의 일생을 재구성할 수 있는 연보 작성과 아울러 동명의 작품 연보(作品年譜) 작성이 필요하다. 학계의 성과가 있기를 기대한다.
2011년 12월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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