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변 경제학자’의 정책 체험기 <1>관치금융과 금융자율화

2018. 11. 3. 20:25잡주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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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8-10-17 12:19:37 최종수정 2018-10-17 12:28:55
    이경태 | 前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원장, 前 OECD 대사




 ‘관변 경제학자의 정책체험기’는 공직생활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해외유학과 산업연구원 부원장,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원장, 국제무역연구원 원장, 그리고 주OECD대사를 역임한 이경태 박사가 겪은 주요 경제정책 결정과 집행과정의 뒷얘기들을 담은 연재물이다. 


   주로 정부 경제정책의 수단과 방법을 연구해 제공한 탓에 본인 스스로 ‘관변 경제학자’라는 수식어를 사용했지만, 그만큼 정책 이면사(裏面史)를 꿰뚫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의 정책당국자들에게도 많은 참고가 되리라 믿는다. 우리 경제발전의 주요 분수령이 된 정책과 사건들을 되돌아보면서 시사 하는 교훈을 찾아본다.<편집자>​ 

 


   공직생활의 첫발을 내디딘 것은 1974년으로 1977년까지 재무무에서 근무했다. 당시는 정부가 금융을 마음대로 주무르던 관치금융시대의 연속이었다. 특히 이때가 역사상 관치금융의 전성기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1961년에 시중은행을 국유화하였다가 1980년대 초에 다시 민영화하였으니까 그 당시 은행들은 정부의 장악 하에 들어있었다. 그러니 관치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5.16정변 이후 은행 국유화정부가 직접 금융배분

 

   물론 포항제철처럼 국유기업이면서도 경영자율화를 보장한 경우도 있었으니까 국유은행이라고 해서 반드시 관치를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었지만 은행을 국유화한 이유를 살펴보면 관치하기 위해서 국유화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민간은행을 정부가 장악하였다면 시시비비를 가려야 마땅하겠지만 정부소유은행을  관치를 했다고 해서 잘못된 것이라고 매도하기는 무언가 석연치가 않다. 정작 따져야 보아야 할 것은 어떤 연고로 은행들을 국유화했는가? 그 배경을 살펴보고 관치의 내용이 무이었는지를 점검해 보는 것이다.

 

   국유화 이전에 은행들의 소유주는 재벌대기업들이었다. 그런데 5.16군사정변으로 군사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들을 부정축재자로 단죄하려고 했다. 결국 군사정부의 입장에서는 은행을 범법용의자의 수중에 계속 남겨둔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경제개발에 필요한 금융자금의 배분을 탐욕적인 은행가들에게 맡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의 금융자금은 워낙 희소가치가 높아서 그 배분을 담당하는 은행가들은 이른바 금융지대(金融地代)를 추구할 수밖에 없었다. 서민들에게 은행은 언감생심 넘볼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문턱이 높았고 기업들도 은행돈을 빌릴 수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특혜를 누리는 것이었다. 은행들은 충분한 담보를 잡고 돈 빌려주면서도 요새말로 하면 수퍼 갑(甲)행세를 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은행가들이 국가기간산업전략산업부문에 우선적으로 대출한다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은행은 국민경제 발전에 관심 없고, 돈 장사에만 몰두하는 이기적인 조직” 

 

   당시 은행에 대한 시각은 ‘국민경제발전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돈 장사에만 몰두하는 이기적인 조직’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1961년 군사정부은행을 국유화했고, 이후 은행은 국가기간산업과 전략산업건설에 소요되는 자금을 공급해 주는 정책금융의 도구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1974년에 재무부 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때 배치된 부서는 금융제도심의관실이었다. 이름이 말해주듯 금융제도를 발전시키는 정책방안을 고민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이선(二線)조직이었다. 일선(一線)조직관치금융에 몰두하고 있는 까닭에 조직이기심에서 자유로운 이선조직을 만들어 금융제도를 진일보시키겠다는 취지였다. 관치금융을 하면서도 그 폐해를 다소나마 인식하는 양심이 있었다고나 할까.

 

    폭넓은 의견을 모으기 위해 민관으로 구성된 금융제도심의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여기에는 금융학자, 은행가, 그리고 재무부 간부들이 위원으로 참여해서 정기적으로 회의를 열어서 토의하였다. 나는 그 위원회의 사무국 역할을 담당하는 실무자였다.

   논의주제한국은행 독립, 기업신용평가 강화, 금리 자유화, 은행 민영화 등이었다. 학자들과 은행인사들의 의견은 대체로 이 모든 과제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개선해 나가자는 쪽이었다. 당시는 국제적인 이론의 흐름도 McKinnon, Gurley, Shaw 등의 석학들이 금융억압의 폐해를 강조하고 금융자율화가 경제성장을 촉진한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해서 많은 주목을 받던 때였다. 

 


재무부 관료들 “금리·환율 결정을 시장에 맡기는 건 필요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당시 토의과정을 가까이에서 관찰한 바로는 학자, 전문가들 금융자율화 주장과 금융현실 사이에는 커다란 격차가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재무부의 현업부서에서는 이런 위원회의 논의방향과 주장이 현실을 무시하는 탁상공론이라고 평가절하하는 분위기였다. 

당시 금리와 환율결정은 재무부의 몫이었다. 어느 날인가 금리를 인하하는 보도자료가 배포되기 전에 본 적이 있었는데 인하의 배경과 인하폭이 재무부 실무자에 의해서 작성되었다. 물론 사전에 청와대와 협의를 거쳤을 것이다. 환율도 당시에는 고정환율제도이었는데 평가절하 결정이 재무부에서 이루어졌다. 

 

   재무부 공무원들은 자신들이 최고의 엘리트라고 자부하고 있었고 특히 금융정책을 담당하는 공무원들이 그랬다. 그들에게는 금리와 환율을 시장에 맡긴다는 것은 필요하지도 않았고 바람직하지도 않았다. 금융시장이 기본적으로 초과수요상태에 있는 상황에서 금리자유화는 시기상조이었고 고정환율제도는 당시 국제적 규범이었다. 한국은행의 독립성을 보장해서 금리결정을 하게 했어야 한다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재무부의 엘리트 관리들이 볼 때에는 국민경제에 중차대한 금융정책을 애국심이 의심되는 한국은행에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MOF 금융정책과, 금리·통화량은 물론 은행인사까지도 영향력 발휘

 

   금융제도심의관실에서 이재1과로 자리를 옮긴 다음에 맡은 업무는 국민투자기금이었다. 그때 나의 업무파트너는 한국은행의 기금부장이었다. 아마 연배가 거의 쉰살 근처는 되었을 터이니 나보다 스무살 정도 연상이었다. 그분은 나의 대학선배이기도 해서 공식적으로는 내가 위인 상하관계이었고 사적으로는 그분이 위인 상하관계의 이중적 관계가 형성되었다.

그 당시 나는 주택은행업무도 겸하고 있었다. 매달 열리는 국민주택금융운용위원회에 나가보면 은행장이 회의를 주재하고 은행임원들과 건설부 국장 등이 참석하였다. 이제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사회초년병이 인생의 대선배들과 속된 말로 ‘같이 놀았던 것’이다.


   내가 근무하던 부서 옆에는 금융정책과가 있었다. 이재국의 꽃이었고 관치금융의 핵심이었다. 정책적으로는 거시경제를 관리하는 통화재정 정책의 주무 부서였고 관리적으로는 은행을 좌지우지하는 부서이었다. 지금의 금융통화운영위원회가 수행하는 금리결정은 물론이고 통화증가율도 실질적으로 결정하였다. 내가 직접 경험하지는 못하였지만 추측컨대 은행장을 비롯한 주요인사에도 크고 작은 영향력을 미쳤을 것이다. 

 

   그 당시는 부실기업정리 역시 재무부에서 주관하였는데 한번은 정리대상이 되는 굴지의 재벌회장 이재국장실에 찾아와서 고성을 지르면서 항의하는 소리가 밖으로까지 들린 적도 있었다.  

1975년박정희정부서정쇄신을 발표하였다. 공무원들의 부정부패를 일소하겠다면서 서슬퍼런 칼을 빼 들었다. 당시 재무부 청사는 광화문에 있었는데 공무원들에게 점심때 청사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해서 모두들 구내식당에서 요기를 때우곤 했다. 나에게 가끔 와서 같은 과의 10명 정도 되는 직원들에게 주스 한잔씩 돌리던 한국은행 직원도 주스 접대를 그만 두어야 하는 엄정한 상황이었다. 

 


서정쇄신(庶政刷新)으로 은행원 봉급 삭감됐는데 은행원들 ‘재무부에 항의’

 

   그때 은행직원들의 보수를 삭감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당시 은행에서는 정해진 봉급 이외에 여러 가지 명목으로 보수를 지급하는 관행이 퍼져 있었다. 대학 졸업 후에 한국은행에 입사했던 친구는 자기가 한 달에 받는 보수의 총액을 정확히 잘 알지 못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부에서는 이러한 조직이기적인 관행을 시정하겠다고 나섰고, 그 결과 은행직원들의 봉급이 상당 부분 삭감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때 나는 항의전화를 많이 받았다. 자기 남편이 은행에 근무하는데 난데없이 월급이 깎여서 매달 불입해야 하는 곗돈을 줄 수가 없어서 계가 깨어지게 되었다던가, 아이들 학원비용을 감당할 수가 없다는 호소섞인 항의를 받으면서 나와 동료들은 그 일은 우리 부서의 소관이 아니라고 하면, 항의하는 쪽에서는 재무부가 하는 일을 왜 모른다고 발뺌하느냐고 따져묻곤 했다. 일반국민들도 관치금융의 본산이 재무부라고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1983년산업연구원에 입사해서 처음 담당했던 분야가 금융 산업이었다. 당시 원장이시던 S박사께서 금융도 산업이니까 산업연구원에서 금융산업발전 방안을 연구해야 한다고 하면서 기꺼이 채용해 주셨다. 어느 날 모 일간지에서 금융산업 발전에 대한 좌담토론이 있었는데 나는 금리를 자율화해야 자원이 효율적으로 배분된다고 주장하였다. 미국유학중에 배운 데로 읇조렸던 것이다. 

 


산업연구원 입사 후 ‘금리자유화’ 주장…뒤늦게 ‘한국은 자금 초과수요로 현실과 괴리’인식

 

   연구원 생활을 하면서 한국경제의 현실을 숙지하다보니 금리자유화가 언제 어디에서나 옳은 것이 아니었다. 금리를 자유화하면 자금의 초과수요가 존재하는 한국에서는 금리가 상당 수준 올라 갈 수 밖에 없고 한국수출기업의 비용부담이 늘어나서 선진국기업과의 경쟁이 불리해 진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금리자유화시도가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하고 단명에 그친 예는 일찍이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4년은행정기예금 금리는 연 15%이었다. 당시 물가상승율이 두 자리 숫자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연 15%는 정책적으로 낮게 정해진 수준이었다. 저축을 늘리기 위해서 금리를 현실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관철되어서 1966년도의 정기예금금리는 30%에 도달했다. 

최근 아르헨티나자본해외 유출을 막기 위해서 금리를 45%로 올렸다는 기사를 보고 놀란 적이 있는데 당시의 한국이 그랬다. 그때 나는 서울로 유학 온 지방출신 고등학생이었는데 부모님들이 부쳐주는 하숙비와 용돈, 학비 등을 아껴서 정기예금에 넣어 놓으면 그 이자가 쏠쏠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금리자유화 1988년 시동 걸었으나 중단, 1991년부터 3단계추진 방안 실행

 

   기업들이 연 30%의 금리부담을 견딜 수가 없으니까 수출금융 등 정책대출 금리는 훨씬 낮은 수준에서 정해졌고 은행은 역마진으로 수익이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금리현실화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다시 통제된 저금리로 환원되었다.

금리자유화1988년에 다시 추진되었으나 물가급등으로 인한 금리상승을 견디지 못하고 몇 개월 후에 중단되었다. 1991년에 다시 금리자유화 3단계 계획이 발표되었고 1995년까지 지속적으로 실천에 옮겨졌다. 경상수지흑자전환, 물가안정, 자금의 초과수요 완화 등 금리자유화의 여건이 어느 정도 갖추어 졌기 때문이었다.   

 

   1980년대 초은행들이 민영화되었으나 은행경영에 대한 정부간섭은 별로 줄어들지 않아서 민유화(民有化)에 그쳤다는 비판이 무성하였다. 소유권만 민간으로 넘어 가고 정부개입은 계속되는 무늬만 민영화이었다. 

민영화 이후의 관치금융은 이전의 관치금융에 비해서 그 폐해가 두드러졌다. 이전의 관치금융은 국가전략산업에 희소한 자금을 공급해준다는 명분이 있었고 실제로도 정책금융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수출금융, 중소기업금융, 설비금융 등이 제도적으로 확립된 원칙과 기준에 따라서 공급되었다. 

 


1980년대 초 은행 민영화했으나 정부 규제와 간섭으로 ‘정책금융 순기능까지 실종

 

   민영화이후에는 제도적 정책금융 기능이 약화되고 대신 비공식적 관계로 맺어지는 금융거래가 늘어났고 부실대출도 늘어났다. 은행의 인사권을 여전히 정부가 쥐고 있는 상황에서 정경유착은 불가피하였다. 민영화를 통해서 은행의 자율과 창의를 고취하고 경쟁의 효율을 증대한다는 순기능은 정부의 여전한 간섭과 규제 때문에 억제되었다. 대신 민영화이전의 관치금융이 수행하였던 정책금융의 순기능은 약화되었다. 다시 말해서 은행민영화이후에 금융산업이 제대로 발전한 것도 아니면서, 관치금융시대에 은행이 담당하였던 공익적 역할은 실종되었다.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친 셈이었다

 

   1998년외환위기가 닥치고 감추어져 있던 은행부실채권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모든 시중은행들이 공적자금의 수혈없이는 문을 닫아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다. 관치금융이 은행위기의 주범으로 지목되었고 이제야 말로 금융산업이 독자적인 산업으로서 도약할 때라는 분위기가 마련되었다. 정부의 산업정책에 부응하여 피동적으로 대출하고, 정부의 간섭과 보호막 속에서 안주하던 폐습에서 탈피해서 부가가치와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금융 산업으로 우뚝 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관치금융‘은 구시대유물 됐지만 ”진정한 민치금융’은 아직 멀어

 

   자율의 범위가 넓어진 은행들은 위험부담이 높은 기업금융을 회피하고 대출금회수가 거의 확실한 주택담보대출에 열을 올리기 시작하였다. 기업이 흥할 때는 대출받아 가라고 선심을 베풀다가 조금이라도 기업이 어려워지는 징후가 보이면 득달같이 대출금을 상환하라고 재촉을 해서 경영난을 가중시키곤 했다. 흑자도산이라는 말이 유행하였고 은행은  “날씨가 개일 때 우산팔고, 비 올 때 우산을 걷어가는 이기적인 조직”이라는 비아냥까지 들었다. 

 

   외환위기 이후 벌써 20년이 흘렀지만 금융산업의 현실은 20년 전의 의욕에 한참 못 미친다. 글로벌 투자은행의 꿈도 이루지 못했고 좋은 일자리도 많이 만들지 못했다. 아직도 정부가 은행장 인사에 관여하는 관치금융의 잔재도 남아있다. 

경제개발단계에서 일정한 역할을 수행했던 관치금융은 이제 흘러간 이야기가 되었지만 이를 대신하는 진정한 민치금융은 아직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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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리즈 순서>

1. 관치금융과 금융자율화

2. 중화학공업의 돈줄, 국민투자기금

3. 급진적 대외개방이냐?, 점진적 대외개방이냐?

4. 반도체산업은 민간주도로 꽃피었다

5. 개혁-개방초기의 중국을 가다 

6. 대우조선을 파산시킬 것인가? 구제할 것인가?

7. 재벌의 업종전문화: 호랑이를 그리려다 고양이가 되었다 

8. 삼성에게 상용차생산을 허용할 것인가?

9. 첨단산업발전법 제정의 무산

10. 연구원노조는 과연 필요한가?

11. 한국의 에너지과소비의 원인을 규명하다

12. IMF 금융위기징후를 무시한 오만 

13. IMF 금융위기와 고금리정책

14. IMF 금융위기와 노동유연성

15. IMF 금융위기와 수출금융문제​​




기사입력 2018-10-17 12:19:37 최종수정 2018-10-17 12:28: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