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차 제다방법의 현대적 응용 外

2019. 6. 2. 05:48차 이야기


전통차 제다방법의 현대적 응용 茶의 현대화

2010. 4. 15.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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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차 제다방법의 현대적 응용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목 차

1. 시작하며

2. 차 문화의 전래와 변천

3. 제다의 원리와 변천

4. 전통제다법의 현대적 응용(응송스님의 제다 법을 중심으로 )

   1) 차 잎 따기

   2) 화목(火木) 선정

   3) 차 잎 덖기

   4) 차 보관

5. 마치며

 

1. 시작하며

   한국의 경제발전은 많은 분야에서 다양한 변화와 물질의 풍요를 가져 왔다. 특히 먹고 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면서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삶이며 유익한 삶의 방식인가에 대해 매우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한 때 소홀했던 전통 문화에 대한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우리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으며, 전통문화의 가치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 이로 인하여 이곳저곳에서 우리 것을 찾고 가꾸려는 소모임도 많아졌고 국악, 복식, 전통 먹거리, 차문화, 심지어는 삶의 방식까지도 옛것을 경험해 보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이런 움직임은 차 문화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양적인 팽창은 긍정적인 측면도 많지만 이에 따른 부작용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런 수요와 호기심은 결국 부실하고 왜곡된 문화를 양산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쉽고, 어설프게 모방한 국적 불명의 문화 형태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품위를 실추시킬 가능성이 많다. 상업적이고 소모적인 저급한 양태는 전통 문화가 지니고 있는 우수성을 알기도 전에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할 수 있어서 모처럼 찾아온 호기를 놓치고 마는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선 현재의 시점에서 냉철한 반성과 개선을 과감히 실천해야한다.

 

   첫째, 전통 문화의 우수성을 치밀히 조사하고 연구하였는가. 둘째, 옛것을 바탕으로 현대 생활에 유익한 실익을 가져 올 수 있는 아이디어를 찾았는가. 셋째, 전통적인 문화를 어떻게 보존하고 발전시킬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세심한 점검이다. 실제로 우리가 전통을 중시하는 참된 이유는 바로 오랜 역사 속에 다양한 경험과 지혜를 가지고 살아왔던 사람들의 지혜와, 삶에서 체득된 경험을 중시하는 것이다. 특히 전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 풍토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삶의 지혜와 기호, 취향, 사유방식 등 그 민족만이 공유할 수 있는 정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다. 차 문화도 또한 마찬가지이어서 우리나라 사람이 좋아하고 즐겼던 것이 있었고 차의 특성이 있게 마련이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차를 처음 발견한 것은 신농씨이라고 한다. 약초에 중독된 신농씨가 차를 먹고 해독했다는 신화적인 이야기는 차의 상징성을 나타낸 것이다. 결국 차는 약용으로 이용되기 시작하여 사람들의 의식 수준의 향상에 따라 많은 발전을 거듭하면서 독특한 문화를 이룩하였다.

 

   오늘날에 와서는 건강을 중시하는 현대인의 대표적인 “마실 거리”로 인식되어 일상생활에 빠질 수 없는 물품이 되었으며 서양에서 조차 차가 “십대 건강식품”으로 손꼽을 정도로 주목 받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차가 발견된 이래 지금처럼 차 문화를 융성하게 발전시킬 수 있는 절호 기회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바로 오랜 경험에서 체득된 지혜를 담고 있는 전통 문화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오랜 세월 속에서 면면히 이어온 차 문화는 수많은 정보를 담고 있는 지혜의 창고이며, 그만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차를 만드는 방법의 변천은 사람들의 기호와 의식 수준에 따라 발전되어 왔다. 그리고 시대마다 독특한 제다법이 생겨났다. 초기에 차는 차 죽의 형태에서 단차로, 연고차를 거쳐 산차로 차를 만들어 왔다. 물론 이런 제다법의 변천은 차품의 향상을 의미하지만 다분히 사람들의 기호와 그 시대의 유행에 따른 것이며, 노력의 산물이기도 하다.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라고 말한다. 결국 “문화의 세기”를 선두에서 이끌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전통문화를 현대에 알맞게 응용하여 그 우수성을 세계인과 함께 공유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한국의 전통 차는 과연 세계인들과 공유할 수 있는 것이며, 보편성을 가지고 있는가. 또 현대적인 응용은 가능한가. 우리는 지금 그것을 논의하고자 한다.

 

2. 차 문화의 전래와 변천

   차란 음료의 총칭이며, 대용차인 인삼차, 대추차, 유자차 등을 포함한다. 하지만 차의 엄격한 의미는 차나무에서 채취한 어린 잎을 가공한 것이다. 한국 차는 장백산(백두산)을 중심으로 자생한 석남과에 속하는 철쭉 종류로 만든 백산차가 있으며, 가야시대 남인도에서 들어왔다는 인도 유입설이 있다. 또한 일찍부터 양나라와 교류하던 백제가 삼국 중에 제일 먼저 차를 유입해 왔을 가능성이 있다는 설과 7세기 이전부터 신라에 차가 있었다는 설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런 설들은 유추한 것이어서 사료에 의한 것은 아니다.

 

   다만 『삼국사기』“신라 흥덕왕 3년 (AD.828) 입당사인 김대렴이 차씨를 가져와 지리산에 심었으며, 이미 7세기 선덕여왕 때부터 차가 있었다.”는 것이나 일연『삼국유사』 “신라 경덕왕이 3월3일에 귀정문에 나갔다가 충담을 만나 3월3일과 9월9일에 삼화령 부처님께 차를 올린다는 말을 듣고 차를 대접 받은 일”, 설총 「화왕계」 “차로 정신을 맑게 한다.”는 것에서 이미 황실을 중심으로 차 문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당시 어떤 형태의 차를 만들었으며, 일상생활에서 차를 어떻게 활용했는지에 대한 것은 자세히 알 수 없다.

 

   중국에 있어서도 8세기경 육우『다경』을 저술한 이 후 비로소 차의 제다법이 완성되었다. 차에 곡물, 생강 등을 섞어서 걸쭉한 죽의 형태로 마시던 잡차의 형태를 벗어난  것은 육우의 공이 컸다. 육우는『다경』을 저술하여 차가 하나의 문화적인 기틀을 갖추게 되었고 자신이 차의 감독관이 되어 새로운 제다술을 창안하였다. 한국은 9세기 이후 선종의 유입과 함께 문화적인 틀을 갖춘 차문화가 유입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나말 려초 입당했던 유학 승려, 혹은 선진문물에 일찍 눈을 떴던 계층과 상업과 해상무역을 주도했던 그룹들에 의해 차가 도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나말려초(羅末麗初)에 당에 유학했던 구법 승려들은 차를 마시는 것이 일상화되었을 것이다. 이미 선종의 수행에 차를 마시며 수행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던 시기이다. 신라로 돌아온 수행승들은 차를 마시며 수행하는 풍습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였을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차가 왕의 중요한 하사품이었으며 팔관회수륙제 등, 황실의 행사와 국빈을 대접하는 연회 차는 주요한 귀중품 중 하나이었다. 이 시기 차는 귀족문화의 일부이었으며 사치품 중 하나이었다. 특히 정신을 고양하는 사람들에게는 필수적인 음료이었고 정신을 맑게 하는 물질로써 인식되었다. 고려의 멸망 이후 조선시대에는 차가 불교의 상징적인 문화이며 사치품으로써 백성을 수탈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차의 긍정적인 측면보다 폐단이 큰 것으로 여겼다. 상대적으로 유학을 숭상하였던 조선시대는 차문화가 발전할 수 없던 분위기이었으며, 청빈을 숭상했던 선비정신은 방만하고 사치스러웠던 고려의 차문화에 호감을 가질 수 없었다. 이것은 차의 맑고 깨끗함과 마음을 안정시키는 차의 효용성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결과이기도 하다. 한편 차문화의 쇠퇴 원인으로 불교의 쇠퇴도 한 원인이었으며, 사원 경제의 약화는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이로 인해 조선 말 차가 나는 지역에서 감기나 이질을 치료하는 민간약으로 전락되었고 일부 문사나 수행승들 사이에서 겨우 명맥이 이어졌을 뿐이다.

 

   차에 대한 호기심을 가진 것은 19세기 청의 연경을 출입하던 신진 지식인들이었다. 청의 과학 문물에 자극을 받았던 신지식인들과 실학파박제가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해거도인 홍현주와 그의 형제들, 변지화, 해남 대흥사에서 주석하던 초의선사에 의해 한국의 차 문화는 새롭게 해석되었다. 1837년 해거 홍현주의 요청으로 초의 선사가 저술한『동다송(東茶頌)』은 한국의 차문화를 다시 정립하는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손수 차를 만들고 연구했던 초의선사는 조선의 차가 약용이나 차품에서도 중국차와 차이가 없으며 더 월등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조선의 기품을 담은 조선의 차를 만들었으며 기미(氣味)를 강조하여 조선 차의 특성을 중국차과 차별하였다. 이것은 조선의 자연환경 즉 풍토적인 환경이 만들어낸 차는 초의선사에 의해 독특한 차품의 경지를 이룩하였다.

 

   잠시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한국 차의 환경적 우수성을 발견한 것은 일본인이었다. 좋은 차를 생산할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간과할 리 없는 일본인들은 대규모 차밭을 조성하기 위한 예비 단계로 차를 재배할 수 있는 지역을 선별하는 연구가 국가적인 지원 아래 실시하였다. 기실『조선의 차와 선』을 저술하게 된 동기도 이런 연구의 일환이었으며 보성, 강진, 지리산 근역 등 차가 될 만한 모든 곳을 집중적으로 실험 연구하였다. 특히 보성지역의 대규모 다원의 조성은 일본의 기호에 알맞은 품종을 개량할 수 있는 지형적인 조건과 수송을 용이하게 할 수 있는 조건을 두루 갖추었던 지역 중의 하나라는 것이 고려된 것이다. 해방이 후 한국은 차를 마실 수 있는 경제력 갖지 못하여 차를 마시는 계층은 일본에 영향을 받았거나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지식인 중 일부가 차를 알았을 뿐이며, 소수의 수행승 사이에서 겨우 명맥이 유지되었다. 일반인들 사이에서 차에 대한 인식은 거의 희박하여 감기약의 비상약에 불과했다.

 

3. 제다의 원리와 변천

   제다 방법의 변천은 탕법(湯法)의 변화를 가져 왔으며, 차를 다루는 다구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차를 마시는 풍습에도 점차 세련되고 고상한 기품을 강조하는 차풍이 일어나면서 차의 맑고 투명함을 들어내는 차품이 요구되었다. 투차(鬪茶)를 하며 차를 품평하고 예술품을 감상했던 문인들의 모임은 차가 예술품과 동등한 위치에 놓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최고수준의 감식안과 문기(文氣) 있는 이들의 차품평은 최고품의 차품이 나올 수 있는 직접적인 요인이었다. 기실 신라시대에서 고려. 조선 시대를 통해 차를 선호하던 계층은 귀족층과 지식인들이 대부분이었고 그들의 미의식과 기호에 따라 극품의 차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이것은 차품이 향상되었던 사회적인 요인을 말한 것이다.

 

   한편 제다의 궁극적인 목표는 차가 지니고 있는 본질을 잘 갈무리해 내는 것으로 사람들의 일상에 유용하게 이용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 모든 생물은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어서 외부의 위험을 방지하는 수단을 장치하게 마련이다. 결국 제다란 생기(生氣)를 제거하고 순화시켜 사람들이 마실 수 있게 하는 것이며, 정신과 몸을 건강하고 안정되게 하는 것이다. 결국 차를 찌든가, 아니면 덖든가, 발효의 과정을 거치든, 햇빛에 건조하든, 그늘에서 말리는 방법을 응용하든지 간에 열을 이용하여 그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물론 차가 자라는 자연 환경에 따라 차를 다루는 방법에 차이가 있는 것은 잎의 상태와 습도, 기온을 고려한 것일 뿐 차의 생기를 제거한다는 의미는 같다.

 

   중국 삼국시대 『광아』에 “형주와 파주 지역에서는 차 잎을 따서 떡차를 만들어 쌀죽에 넣었다 꺼낸다. 만약 차를 마시려면 먼저 차를 구어서 색을 붉게 하여 분말을 만들어 자기 중에 넣고서 끓은 물을 부어 젓는다. 파, 생강을 넣는다. 차를 마시면 술이 깨고 졸음을 없애 준다.” 라고 하였다. 이 당시 차는 단차(團茶)로 걸쭉한 죽처럼 만들어 생강이나 다른 향신료를 넣은 것이다. 차가 하나의 음식처럼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차의 이용이 술을 깨거나 졸음을 방지하는 약으로 이용되었다는 증거이다. 또 당대 육우는 『다경』에서 차를 만드는 방법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차잎을 시루에 쪄서 찐 차잎을 절구에 찧는다. 고형 틀에 찧은 차 잎을 넣고 원형 틀이나 네모, 혹은 꽃모양의 틀에 넣어 모양을 만든 후 약하고 은근한 불에 건조 시킨다. 완성된 차는 종이로 만든 주머니에 넣어 보관한다.”는 것이다.

 

   육우에 의해 완성된 차의 제다은 당나라 이전과 현저한 차이를 보이며 실제로 순수한 제다법은 육우에 의해 만들어졌다. 차에 소금만을 넣어 마시는 순차(純茶)의 시대연 것이다. 차색은 담황색을 최고의 차색으로 여겼고 녹색빛은 아름다운 차색으로 여기지 않았다. 이 시기의 제다법은 단차류산차류의 제다법이 있었으며 송에 와서 다선(茶筅)을 이용하여 점다(點茶)하여 마시는 법이 생겼다. 특히 송대에는 연고차가 출현하여 제다법이 가장 발달한 시대는 송대이다. 탕법도 토호잔을 이용하여 다완에 다말을 점다하는 방법으로 발전으로 다구의 아름다움도 극치를 이루었던 시기이다. 특히 문인적인 취향이 강했던 송 휘종(1100~1125 ) 황제는 백색의 차 빛을 선호하여 제다법에도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 왔다. 차잎을 쪄서 찧는 과정에서 녹색 진액을 짜내어 차빛이 순백이 돌도록 만든 제다법은 당대 최고 안목을 가졌던 휘종의 취향을 고려한 제다법 이었다.

 

   한편 제다법의 변천에 획기적인 변화는 명대 주원장에 의해 단. 병차 제조를 국법으로 금지한 조이다. 단차를 만들 때 필요한 많은 노동력은 국민에게 큰 고통을 주었기 때문에 단차를 만들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따라서 다양한 기법의 제다법이 생겼으며, 잎차를 우리는 다관이 새로 만들어져 탕법 또한 많은 변화를 가져 왔다. 한국의 제다법의 변천도 단차에서 연고차, 산차로 변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라 경덕왕23년(764) 삼화령의 부처님께 올렸던 충담선사의 차는 단차일 가능성이 크다. 특히 최치원(857~?)이 쓴 진감국사 (774~851)대공탑비 “당나라 명차로써 공양하는 자가 있으면 섶으로 돌솥에 물을 끓여 가루를 내지 않고 달인다.”라는 것에서도 단차를 마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 최승로(927~989)가 올린 시무 28에 왕이 공덕제를 올리며 “차를 손수 가는 것을 금하도록” 상소하였다. 이것은 연고차이었다. 조선 시대는 연고차 종류와 산차를 혼용하여 사용하였으며 조선 후기 초의선사가 만들었던 차의 종류는 단차이다. 『동다송(東茶頌)』「조다편」“솥이 뜨거워지면 급히 차 잎을 넣고 덖는다. 불 온도가 떨어지지 않게 하며, 다 익은 다음 꺼내서 대 광주리에 넣고 가볍게 흔들어 다시 솥에 넣어 불을 점점 낮추어 건조한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산차를 만드는 법으로 초의스님으로부터 차법을 이어 온 응송 박영희 (1893~1990)까지 이어 온 대흥사 전통제다법이다.

 

4. 전통제다법의 현대적 응용

    (응송스님의 제다 법을 중심으로)

   응송 스님이 주석했던 해남 백화사 대흥사 반야교 아래 위치해 있던 암자이다. 이곳은 응송스님이 차를 연구하며 거처하였다. 대흥사에서 출가 했던 응송스님은 초의선사의 종법손으로 초의선사의 다맥 특히 제다 법을 전승 받았다. 평생 차를 연구하고 생활화 했던 다인이며, 우리가 오늘날 한국 차를 말할 수 있는 근거인 『동다송(東茶頌)』을 오늘에 전한 분이기도 하다. 그는 실제 차를 만들며 실용적인 차를 연구하였으며 평생 동안 초의선사의 사상을 연구하기도 하였다. 김운학『한국의 차문화』응송스님에 대해 “ 대흥사의 산역사로 130여 년 전 초의가 이곳에 남겨 논 다풍을 그대로 간직해 온 스님이다. 오늘날 우리가 초의를 이야기하고 우리 차의 전통을 이야기하게 된 것도 거의 응송노장의 공로다.”라고 하였다. 현재 우리가 응송스님의 제다 법에 주목하는 것은 한국 차의 원형과 특징이 무엇인지를 살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의 제다 법은 현재 필자에게 전해지고 있다.

 

  1) 차 잎 따기

   차를 만드는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긴장의 연속이다. 차를 만드는 일은 차나무의 관리, 채다, 차 잎의 관리, 불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 화목의 관리부터 인부의 관리까지 모든 것을 총괄할 수 있어야한다. 특히 중요한 것은 차를 만드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며, 편안하고 안정된 마음으로 차를 만들어야한다.

 

차를 채취할 시기가 되기 전에 자연의 변화를 관찰하는 주의가 필요하다. 기후의 변화는 차의 채다 시기는 물론 그 해의 생잎 상태를 결정하는 직접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기후에서는 산지에 따라 채다 시기가 조금씩 차이가 날 수 있다. 차나무가 자라는 주변 환경, 일조량, 다원의 방향, 위도, 대단위로 조성된 다원인가, 아니면 자연 상태의 산지인가에 따라 차 잎이 피는 정도가 현저한 차이를 보일 수 있다. 적게는 5일에서 심지어 보름씩 차이를 보일 수 있다. 채다 시기에 대해 초의스님“ 입하를 전후하여 채다하는 것이 좋다고” 했으나 지금은 지구의 온난화로 인한 기후 변화로 인해 곡우를 지난 후 일주일 정도이면 적당하다. 물론 지역에 따라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시기를 보고 정하는 것보다 차 잎의 상태가 관찰하여 일창 일기(一槍一旗) 혹은 일창이기(一槍二旗) 정도에서 채취하는 것이 좋다.

 

   옛날 왕실에 공납하던 차는 맥아를 채취했던 경우도 있었지만 이것은 단차를 만들던 때 극품의 차를 만들기 위한 것이다. 지금처럼 산차를 만들 경우 너무 어린잎은 채다하기도 어렵고 공력이 많이 들기 때문에 바람직한 채다 시기라고 볼 수는 없다. 다만 초 극품을 만들겠다는 의지라면 한번 시험할 수 있지만 기대만큼 좋은 차를 만들기는 쉽지 않다. 차를 채취는 청명한 날로 정한다. 비가 오는 날은 차를 따지 않는다. 만약 비가 오면 비가 그친 후 2~3일 경과한 후 차를 딴다. 한편 차 잎을 채취할 때 잎이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손톱을 이용하여 최대한 잎에 상처를 내지 않아야한다. 만약 잎이 상처를 내거나 잎의 중간이 끊어지면 차를 만들었을 때 차 품이 일정하거나 투명한 빛을 내지 못하게 된다. 물론 채다하는 사람들은 손을 정결히 하여야하며, 향이 강한 비누나 화장품을 쓰지 않아야 한다. 혹 차 잎에 잡향이 나는 것을 미리 방지하기 위함이다.

 

   채취한 차잎의 관리는 채다 요령보다 더 주의가 요구된다. 잎이 시들거나 발효될 경우 차색과 향, 맑은 맛을 낼 수 없게 된다. 채다할 때 작은 대바구니를 이용하여 공기의 소통이 원활하게 해야 하며, 만약 산 속에서 채다할 겨우 보자기를 이용하면 용이하게 채다할 수 있다. 그러나 통풍을 위해자주 자주 채다한 잎을 거두어 잎끼리 부딪쳐 상처를 입거나 뜨거워져 뜨는 것을 막아야 한다. 차 잎은 채다한 날 바로 차를 만들어야 하며 날을 넘기게 되면 잎이 상하고 발효될 수 있으므로 혼자 감당할 양을 미리 정해 둔다.

 

  2) 화목 선정

   차를 만들기 전에 화목의 선정이 중요하다. 차는 접물성이 강하기 때문에 화목으로 쓸 수 있는 나무는 향이 강하거나 연기가 많이 나는 것을 피하는 것이 좋다. 참나무 떡갈나무 싸리나무, 감나무, 밤나무 등 비교적 화력이 좋고 연기가 적은 것을 쓴다. 특히 젖은 나무는 연기가 많이 나므로 금하며 매 년 나무를 미리 준비하여 바싹 말려 둔다. 준비한 나무가 썩거나 곰팡이가 핀 나무는 쓰지 않는다. 깨끗한 나무를 잘 말려두어 화력을 잘 조절할 수 있게 한다. 장작은 크기를 다양하게 잘라 준비하고 장작을 여러 번 패서 가는 것, 굵은 것, 중간 쯤 되는 것을 준비하여 불의 온도를 조절한다.

 

  3) 차 잎 덖기

   차를 잘 만드는 것은 차 잎의 덖기가 가장 중요하다. 솥을 정갈한 것을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며 고기나 비린내 냄새나는 것을 사용한 솥은 쓰지 않는다. 밥을 하거나 물을 끓이는 것은 사용하여도 무방하다. 혹 녹이 나거나 사용한지 오래된 솥은 쓰지 않다. 이런 솥을 하면 차에서 풋내가 나기 쉽고 차를 덖을 때 솥이 일어난 폐단이 생길 수 있다. 미리 솥을 점검해 둔다.

 

   차를 덖기 시작하면 보조해 줄 2~3명 정도가 곁에서 도와 주어야한다. 신속히 차 잎을 준비해 주고 덖은 차 잎이 식지 않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솥에 불을 지피고 불이 오르기 시작하면 마음을 가다듬어 안정을 취하여 조용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차를 덖어야 낸다. 만약 주변이 소란하면 정신이 산만하여 차가 익는 변화를 놓칠 수 있다. 솥의 온도는 대략 400도 내외에서 차 잎을 덖어낸다. 대솔을 이용하여 빠른 손 놀임으로 차를 덖어내는데 이때가 가장 중요하다. 차가 다 덖어지면 재 빨리 꺼내서 비빈다. 너무 힘을 주면 차가 부스러질 염려가 있으므로 살살 돌려가며 비비는 것이 요령이다. 차를 비빌 때 거품이 나도록 하는 것이 좋다. 이렇게 비벼진 차 잎은 낱낱이 떨어 뭉치지 않게 한다. 솥의 온도를 낮추고 재건을 시작하는데 수분이 거의 다 사라질 때까지 살살 펴 가면 말린다. 이때 불의 온도가 높으면 차가 탈 염려가 있으므로 주의해야한다. 차를 만들 때 가장 주의해야하는 것은 차를 태우지 않는 것이다.

 

 4) 차 보관

   완성된 차를 보관하는 일은 제다를 잘하는 일만큼이나 중요하다. 차를 보관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할 일은 습기의 침투와 냄새가 배는 것을 막아야한다. 접물성이 강한 차는 조금만 소홀히 다루면 애써 만든 차를 버릴 수 있기 때문에 특별히 주의해야한다. 『동다송(東茶頌)』에 보면 죽순 껍질을 말려 두었다가 차를 담는 항아리 입구를 밀봉하고 다시 종이를 겹쳐 포장하는 방법을 쓴다고 하였다. 하지만 요즈음은 포장 용구의 발달로 손쉽게 포장할 수 있다. 포장은 소단위로 하여 30그램, 50그램 100그램 포장하는 것이 좋다. 만약 고급차라면 25그램씩 포장하는 것도 무방하다.

 

  5. 마치면서

   한국 차의 우수성은 이미 널리 알려진 것이 사실이다. 우수한 토양과 사계절이 순환하는 자연 환경과 투명한 바람, 기운찬 산들은 명차를 만들기에 적합한 천연 조건을 갖추고 있다. 옛날부터 근대까지 지역적 특성상 대량의 차를 만들어 산업을 일으키지는 못했지만 한국의 풍토성에 알맞은 차품을 만들어 왔다. 한국인의 소박한 심성과 품위를 갖춘 차의 완성은 한 사람의 힘에 의해 이룩된 것은 아니다. 오랜 세월 역사 속에서 차는 무엇인가. 차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명제를 가지고 고민했던 사람들에 의해 한국의 자연과 한국인의 모습을 닮은 우리의 차가 생겨난 것이다. 한국 차의 특징은 처음에는 쓴 듯하지만 뒤에 단맛의 감도는 소쇄하고 담박한 향과 맛을 가지고 있다. 특히 초의스님도 강조했던 기미(氣味)는 아마 한국 차의 최종 목표였을 만큼 중요한 것이다. 온난하고 다습하며, 추운 겨울을 지냈던 한국인들은 뜨거운 차를 마시며 시원하다고 말하듯이 뜨거운 차를 선호하였다. 따라서 95도 되는 물의 온도를 견딜 제다법이 남아 있는 것이다. 우리가 전통 차에서 응용할 요소는 바로 이런 경쾌하고 시원한 기품을 대량 생산 체제에서 어떻게 응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며, 만약 소농가 중심의 가내 공업 형태라면 차나무의 관리에서부터 완품(完品)의 차를 만드는 전 과정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미 중국처럼 대단위 국가 지원 산업으로 전환된 중국차를 견제할 핵심은 우리의 자연환경, 풍토를 체득하여 얻었던 전통 차의 핵심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야한다. 이에 따라 특화된 차 품을 만들고 과학적인 체계를 가지고 교육과 연구를 통해 표준화하는 일이다.






[차의 종류] 단병차(團餠茶)=병차(餠茶, 떡차)=단차(團茶)| 2. 차, 다기 이야기

초인목 | 조회 255 |추천 0 | 2004.06.25. 16:42


단병차(덩어리 차) 사진 보기 - 덩이차(덩어리차)

 

단병차(團餠茶)=병차(餠茶, 떡차)=단차(團茶)
   기록상 3세기 초에 이미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 차는 당나라와 송나라 시대의 주요 차였습니다. 찻잎을 따고 증기로 찐 후 압착하여 떡으로 만들고 불에 쬐어 말려서 메주같은 덩어리 모양으로 만든 것이며 단차(團茶)나 병차(餠茶, 떡차)라고도 합니다.
처음 나온 단병차는 여러가지 파나 생강 등 여러가지 양념을 넣거나 소금 등으로 간을 하였습니다. 차 덩어리를 불에 구운 뒤 식혀서 가루를 내고 끓인 물에 소금으로 간을 맞추고 가루차를 넣어 우려내어 마셨습니다. 오늘날에도 티벳이나 몽고 등 중국 변방지역의 소수민족들은 이러한 차를 마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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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발견된 기록에 의하면 삼국시대(-중국의 삼국시대를 말하는 것 같음: 220-265년)에 이르면 비로소 찻잎에 일정한 제다 공정을 거쳐 만들어진 차를 음용하였다.

최초의 기록은 기원 230년 전후인 삼국시대 ‘위’나라 ‘장읍’의 <광아>에서 발견되는데 내용인즉 “형주와 파주 일대에는 찻잎을 따서 덩어리차(병차)로 만드는데 쇤 찻잎인 경우에(접착력이 떨어지기에) 쌀죽을 찻잎과 섞어 차틀에 찍어내어 덩어리차로 빚는다. 차를 마실 때는 우선 습기를 제거하기 위해 병차를 빨갛게 구워 가루를 내어 끓은 물을 부어 마시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파’ ‘생강’ ‘귤’ 등을 넣어 끓여 마시기도 한다. 이러한 차탕을 마시면 숙취가 제거되고 또한 흥분이 되어 잠이 잘 오지 않는다”라고 적혀 있다.

 ㅡ 찻잎 제다법 및 음용법   짱유화/한국다도대학원 교수/다인 2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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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시대 당나라 이전엔 덩어리 형태인 긴압(緊壓茶. pressed tea). 즉 떡차가 있었는데 음다법이 시대에 따라 상이하나 당, 송, 명 초기까지 병단餠團 덩어리 차가 주종을 이루었다.

 오늘날의 긴압차는 대부분 전차(煎茶)종류로 사용하는 원료에 따라서 녹차로 만든 녹차긴압차와 홍차로 만든 홍차긴압차, 청차로 만든 청차긴압차, 흑차로 만든 흑차긴압차(보이차)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떡차가 매우 성행하여 조선 말기, 즉 근대 초기까지 이어져왔었다. 소위 청대전靑台錢 또는 돈차(錢茶)라 불리워져 약차로서 대구 약전시장에서 방물장수들이 다약茶藥으로 팔아 서민들이 마셨던 것이다. 황차 또한 다산 정약용 선생님의 다산 초당에서 제자들과 찻잎을 그늘에 시들게 하여 띄워서 만들어 마셨던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 일부 황차라고 하는 것은 녹차를 만들다가 떠버린(부분 발효) 것을 잘못 알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일본 차문화에는 녹차긴압차를 다마茶磨에 섬세하게 갈아서 차선으로 풀어 마시는 가루차인 말차가 있다.
 ㅡ 여연스님/일지암 주지(다인 199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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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나라(618-907년)-병차 만드는 기술이 상당히 발달한 시기. 육우의 <다경, 삼지조>에 보면, “맑은 날에 찻잎을 따서, 찌고, 찧고, 두두리고, 불에 쪼이고, 꿰고, 밀봉해서 차를 말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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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다법에서 사용되던 찻 가루와 암다법에서 사용되었던 찻가루는 다르다, 자다법에서의 찻가루는 솥에 끓여지면서 마실 때 찻가루의 떫고 쓴 맛이 사라지고 새로운 맛과 향이 우러나게 되지만, 이 찻가루를 암다법에 사용하게 되면 뜨거운 물을 차호에 함께 넣어도 끓이지 않은 찻가루는 마실 때 떫고 쓴 맛이 유지되기 때문에 사용할 수 없었다.

때문에 암다법의 차 마심을 위해서는 제다과정에서 시루에 찻잎을 쩌낸 다음 절구통에 찌지 않은 계피나 박하, 산수유, 생강, 파 같은 첨가물을 함께 넣어 찧은 뒤 건조시키고 구워지면서 첨가물과 함께 가루로 된 차는 향과 맛이 혼합되면서 떫고 쓴 맛은 사라지며 맛있는 차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이 당말기에 이르러 차호를 사용하지 않고 차완에 찻가루와 탕수를 넣어 마시는 점다법의 형태로 발전하면서 송대의 크게 유행했던 점다법의 모태가 되었다.

암다법의 또 다른 방법은 자다법에서 사용하던 병차를 가루 내지 않고 쪼개어 조각들을 차호에 뜨거운 물과 함께 넣어 우려 마시는 방법으로서 이 방법은 일종의 포다법에 해당되기도 한다.

단단하게 구워진 병차의 조각들은 쉽게 풀어지지 않아 차호가 막히지도 않았고 또한 잘 구워진 찻 조각들이 뜨거운 물에 맛과 향이 우러난 차맛은 식은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또한 가루를 내는 어려움이나 솥에 끓이는 번거로움도 덜어주었다. 자다법에서 끓여진 찻가루를 마시던 탁했던 맛에 비교하여 향기롭고 맑은 찻물의 매력은 분명 크게 애호되었을 것이다
 ㅡ 혼란기에 태동하는 당의 차문화 - 김성태/도예사 연구가.다인200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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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明, 1368-1644)

명나라에 접어들면서 단병차(團餠茶)의 결정들이 점차적으로 다인들에게 인식이 되었는데 제다(製茶)상 지나친 시간과 인력의 낭비,또한 찻잎이 물에 의한 세척,착즙으로 인해 차맛과 향기의 손상 등 요인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점차 잎차를 선호하게 한다.

잎차로 우려 마시는 포차법(泡茶法)이 기존의 점다법보다 간편하고 차의 향기가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즐기게 되었다.

특히 명나라 건국 태조(太組) 황제인 주원장(朱元璋, 1368-1398)이 핍박을 받던 다농들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1391년 9월 16일 단안을 내려 단차(團茶)를 폐지시켰으며, 이 칙령으로 인해 근 400년동안 중국 차문화를 이끌어 왔던 연고차의 점다법은 중국 차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포차법(泡茶法)시대가 열렸다.

포차법시대가 등장함으로써 찻잎을 넣고 물을 부어 우려내는 다기인 다호(茶壺)가 출현하여 명나라를 지나 오늘날까지 크게 유행한다. 명나라의 잎차 시대가 열리자 제다법의 연구개발이 급속토록 발전이 되어 덖은 형식인 초청녹차(炒靑綠茶) 제다법이 출현하게 되었고, 이와 더불어 홍차(紅茶, Black tea), 황차(黃茶, Yellow tea), 흑차(黑茶, Dark tea). 백차(白茶, White tea),등 새로운 차들도 등장한다.


 

관련 자료 링크보기

2-2092-덩이차[단병차(團餠茶)=병차(餠茶, 떡차)=단차(團茶) ] 종합


단병차(團餠茶)=병차(餠茶, 떡차)=단차(團茶) 2004.06.25

cafe.daum.net/choinmock/Ixuy/89   초인목(艸人木)  




악양 차천지 단차(團茶)| 茶香가득히-----------

날마다 좋은날 | 조회 5 |추천 0 | 2008.10.09. 17:02

악양 차천지 단차(團茶)

 

지난 유월에 거의 끝물로 만든 단차(團茶) - 저온살청을 하고 비비고,  햇볕건조를 하고,

긴압의 과정을 거친 우리 후발효차 입니다 ...

생김새가 듬직하지 않습니까...  한마디로 인물입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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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물 ..  약간의 고삽미가 있습니다. 풋맛도 살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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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  보이생차와 비교하면 아주아주 부드럽습니다.. 뒤로는 감칠맛이 좋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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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번,, 이제 단맛이 조금씩 올라옵니다.. 상큼한 香이 生茶의 모습이 보여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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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  구감에서 부드러움과 은근한 香味가 입안을 적셔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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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저가 볼만 합니다. 저온살청의 흔적도 보이고, 탄력이 살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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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좋지만 더욱 깊은맛을 위하여 아직 세월을 조금 보태야 하겠지요.

아마 내후년쯤이면 지리산의 깊은맛을 우리에게 선사하리라 봅니다..

 

茶와 함께 하는 기분좋은 저녁 입니다........ ^^

 






[차의 종류] 덩이차/긴압차 [병차(團餠茶)=병차(餠茶, 떡차)=단차(團茶) ] 종합| 2. 차, 다기 이야기
초인목 | 조회 251 |추천 0 | 2005.02.13. 19:13
 






佛會寺의 錢茶(團茶)| 발효차
생목 | 조회 62 |추천 1 | 2012.09.19. 13:27

朝鮮의 茶와 禪(崔淳子 譯)에 실린

第 2長 羅州郡 茶道面 佛會寺의 錢茶(團茶)내용을

복사한 것입니다.

물론 익히 읽으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새로움을 더해준다는 뜻으로 올리오니 오해마시고 참고하셨으면 합니다.

 

草衣大師(1786~1866)께서 한 尼僧에게 전한 것이 약 100년 정도 되었다. (1940년 경)

이 尼僧에게서 佛會寺주지는 배웠다고 한다.

부근에서 錢茶 만드는 법을 아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주지가 말하는 전차 만드는 방법을 기록하여 보자.

 

園茶를 만드는 찻잎을 따는 시기는 대체적으로 5월경이며

잎이 다섯 장 정도 났을 때 부드러운 잎만 마을 사람에게 부탁하여 딴다.

아울러서 5월에서 6월까지 잎이 점점 나오면 그동안 필요한 부분만 따서 만든다.

 

이 茶를 따는 것은 아침 이슬이 없을 때이며.

찻잎사귀에 물이 있는 것은 제조할 때 나쁘므로 비 올 때 따지 않아야 한다.

 

딴 찻잎은 떡시루로 찻잎이 흐물흐물해 질 때까지 찐다.

이때 솥뚜껑에서 하얀 증기가 나온다.

조금 있다가 찐 가마솥에 넣어 불로 덖는다.

덖을 때는 약간 큰 젓가락을 하나씩 양손에 갖고 저어 섞는다.

섞는 시간은 잎이 마르지 않을 정도다.

이때 찻잎에서 찐득찐득한 즙이 나온다.

즉 조금 습기가 있고 굳히기에 알맞은 가를 보아 꺼내어,

나무 절구통에 넣고 절구대로 찧어 떡과 같이 될 때

조금씩 손에 나누어 들고 깨끗한 공기 밑에 엄지로 눌러

표면을 平平하게 하고 그대로 구멍을 뚫는다.

 

즉시 밖에 내어 直射光의 햇빛에서 급히 말린다.

만일 直射光의 햇빛에서 마른 것이 충분히 안 되면

온돌에서 종이를 깔고 충분히 말린다.

대강 말림은 그 날 끝내도록 하고,

잘 말린 것은 새끼나 짚을 가지고 30개 정도 종이에 싸서

온돌의 마른 곳에 두고 필요한 量만 내서 마신다.

더구나 이것은 ㅡ年中 만들 수 있어 오래 저장 해 둘 필요가 없다 한다.

 

사용할 때는 먼저 圍茶 한 개 내지 두 개를 불 위에 놓고 황색이 될 때까지 굽고,

이것을 용기에 넣어 차를 우려 내 마신다.

이 차의 크기는 지름이 4.2cm이며 두께는 0.9cm정도이고,

중앙의 구멍 크기는 지름 0.6cm정도이다.

한 개의 중량은 5.6g~ 7.5g 이다.

 

그런데 이것의 특징은

採取期에 있어서 上等茶(1번차에서 3번 차까지)를 딴 후

이용되지 않는 4번차 이후의 殘葉을 뜯어 이용할 것을 목적으로 오늘에 이른 것이다.

 


cafe.daum.net/tea3-namdo/GX7J/4   남도의 아침 






충남 內浦(예산, 서산)地域 역사탐방일정 및 해설요점| 역사 동호회
로드경 | 조회 327 |추천 1 | 2017.08.23. 21:26


문화역사탐방(17)


충남 內浦(예산, 서산)地域 역사탐방일정 및 해설요점


*탐방일정


윤 봉길의사 생가 - 남연군묘 - 상가리 미륵석불 - 헌종대왕 태실 - 서산 마애여래삼존불 - 보원사지 - 개심사


*윤봉길의사 생가(生家)


윤 봉길(尹奉吉 1908-1932)의사는 독립 운동가이며 본명은 우의(禹儀) 아호는 매헌(梅軒) 193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인애국단의 일원으로 홍커우 공원에서 개최하는 일본의 전승축하기념식에서 폭탄을 던져 주요인사 여러 명을 사상시켰다 그리고 현장에서 체포된 후 사형 당했다 이 거사는 임시정부가 중국국민당의 장제스로부터 지원을 받아 항일운동을 활발하게 이어 갈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윤 봉길 의사 생가는 광현당(光顯堂)과 저한당(狙韓堂) 두 군데이다 저한당은 4살이 되던 해(1911) 이사하여 1930년 중국만주로 망명하기(23세)까지 살았던 곳이다


*저한당 : 저한당은 초가지붕과 나무문으로 된 입구가 정겹다 사적지로 지정된 1972년까지 이곳에서 유족들이 살았고 1976년 새로 집을 중수하였다


*광현당 : “내건너”라고 불리기도 했던 이곳은 “빛이 타는곳”이란 뜻으로 후에 “광현당”이라 명명되었다 윤 의사는 이곳에서 윤 황의 장남으로 태어나 4세까지 성장했다


*남연군(南延君)이구(李球)묘


남연군 이구(李球 : 1788-1836)는 조선시대의 문신왕족으로 이름은 구(球) 시호는 영희(榮僖), 충정(忠正)이다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이며 고종황제의 할아버지이다 원래 인조의 셋째아들인 인평대군의 6대손이나 아들 없이 사망한 사도세자의 서자 은신군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살아생전 행적보다 사후 그 무덤이 독일인 상인 오페르트 일행에게 훼손당한 사건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남연군묘는 높은 언덕에 반구형봉분이 크게 자리 잡고 있으며 앞에 석물과 비석이 있다 원래 경기도 연천군 남면 남송정(현 군남면 진상리 “큰피우개”부락)에 있던 것을 1846년(철종13)이곳으로 이장했다 이하응은 풍수지리설을 믿고 아버지인 남연군의 무덤자리를 찾기 위해 지관(地官) 정 만인에게 부탁하여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를 얻었다 이곳에는 본래 가야사라는 절이 있었고 묘 자리에는 탑이 있었으나 대원군에 의해 폐사되고 남연군의 무덤이 옮겨졌다 이장한  7년 후 명복(命福)을 낳았다 철종이 후사 없이 돌아가자 종손이었던 명복이 12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무덤 주변에서는 조선시대 기와가 많이 나오고 또 탑을 파괴할 때 백자 2개와 단차(團茶) 두 덩이와 사리도 3개가 나왔다


*상가리(上加里) 미륵불


상가리 미륵불은 남연군묘에서 동북쪽으로 150m떨어진 곳에 있는 골짜기에 가야사를 없애고 남연군묘를 쓰자 반대편으로 등을 돌렸다는 설도 있고 북쪽 계곡으로부터 쳐들어오는 병마를 물리치기위해 북향을 하고 있다는 설도 전해진다 이 불상은 전체적으로 돌기둥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일반적으로 미륵불로 불리지만 형태를 볼 때 관세음보살을 표현한 것이 분명하다 머리에는 풀과 꽃무늬가 장식된 화려한 관(冠)을 쓰고 있으며 관의 가운데 작은 부처가 조각되어있다 이 불상에 표현된 양식은 고려시대에 유행한 것으로 이런 유형의 불상은 충청도 지방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 상가리 주민들은 오랜 세월 이 석불을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겨 해마다 추수가 끝나거나 정월에 떡을 해서 제를 올려왔다 미륵불 머리에 돌을 얹으면 자식을 낳는다고 해서 치성을 드리는 아낙네도 있었고 우환이 있는 사람들도 이 석불 앞에서 소원을 빌었다


*헌종대왕(憲宗大王) 태실(胎室)


조선 왕실은 아기가 태어나면 태(胎)를 백자 항아리에 보관해 두었다가 아기의 무병장수와 왕실 번영을 위해 전국 명산에 묻었다 예산 가야산 자락 옥계저수지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태를 묻은  헌종(1827-1849)은 8세 때 조선 24대 왕으로 올랐고 재임 중인 1847년 태를 묻은 곳을 단장했다 1827년 (순조27) 7월 18일 태어난 헌종의 태실은 예산군 덕산면 옥계리의 옥계저수지 부근의 태봉에 자리 잡고 있다 순조실록(27년 11월 12일)에서는 안태사(安胎使) “이지연”이 이달 11일에 태를 모시고 덕산현 가야산 밑 명월봉(明月奉) 태봉소(胎封所)에 가서 그날 신시(申時)에 태를  봉안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태실가봉(胎室加封)은 1847년 1월28일 영조의 태실석물가봉시례에 따라 부역군 1000여명이 동원되어 2개월 후인 3월 21일에 태봉의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태실(胎室)이란?


예로부터 태(胎)는 태아의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라고 해서 태아가 출산된 뒤에도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보관하였다 보관하는 방법도 신분의 귀천에 따라 다르다 특히 왕실인 경우에는 국운과 관련이 있다고 더욱 소중하게 다루었다 태실은 일반적으로 태옹(胎甕)이라는 항아리에 안치하는 것이 통례이다 왕세자나 왕세손등 다음 보위를 이어 받을 사람의 태는 태봉(胎峰)으로 가봉(加封)될 것을 감안해 석실을 만들어 보관하였다 태를 태실까지 봉송하는 절차와 봉안하는 의식도 까다롭다 왕자나 공주, 옹주가 태어나면 태를 봉안할 장소를 관상감(觀象監)에서 물색하고 봉송 및 개기(開基), 봉토 등의 날을 가려 정하였다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磨崖如來三尊像)


  마애여래삼존상은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의 가야산 절벽에 새겨진 백제 후기의 마애불로서 국보 제84호이다 이 마애불은 마애삼존불 또는 별칭으로 백제의 미소라고도 부른다 마애 삼존불은 10m가 넘는 거대한 암벽의 동면을 깎아서 만들었다 본존(2.8m)과 우 협시보살(1.7m)은 입상이고 좌 협시보살(1.66m)은 반가사유상으로 특이한 구도를 갖고 있다 본존의 여래 입상은 얼굴에 해맑고 온화한 모습을 띠고 있다 좌 협시의 반가사유상은 한손을 얼굴에 대고 생각하면서 입술과 볼에 웃음을 띠고 있다 우 협시는 보배로운 보주(寶珠)를 양손으로 감싸고 있는 보살입상으로 좋은 일이 있는 듯 수수한 웃음을 띠고 있다 이곳 마애여래 삼존불은 법화경(法華經)의 수기삼존불(授記三尊佛)인 과거-현재-미래불인 석가불, 미륵보살, 제화갈라보살을 나타낸 것이다 시간을 초월하여 중생을 구제하고자하는 법화경사상이 백제사회에 유행한 사실을 입증해주는 가장 중요한 사료이다 또한 조선시대 사찰에 건립된 응진전(應眞殿) 수기삼존불의 가장 오래된 원조로서의 의의(意義)가 있다


*마애삼존불이 가야산 용현계곡 벼랑에 있는 까닭


6세기말엽 백제는 장수왕의 남하로 한강유역을 잃게 되었다 고구려와 관계가 좋을 때는 육로로 통해 중국과 교류했지만 한강유역을 빼앗기자 바닷길을 찾아 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찾아낸 곳이 바로 서산, 태안지역으로 중국의 산동반도로 가기에 요긴한 곳 이었다 당시 백제에서 배를 타고 중국을 드나들던 스님이나  상인들이 인근의 보원사에 머물면서 가야산 계곡  벼랑에 이 마애불을 조성했다고 한다 위험천만했던 바닷길은 중국을 오고가야만 했던 당시 사람들이 멀리까지 볼 수 있는 벼랑 높이 불상을 새겨 넣음으로서 자신들의 무사귀환을 염원했던 것이다


*마애삼존불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찬사(관리인 성원 할아버지)


이 마애불의 미소는 조석으로 다르고 계절에 따라 다르게 나타납니다 아침에 보이는 미소는 밝은 가운데 평화로운 미소고 저녁에 보이는 미소는 은은한 가운데 자비로운 미소입니다 계절 중으로는 가을날의 미소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어느 시인은 “강냉이가 익었거든 자셔도 좋소” 라고 읊었지만 강냉이 술이 붉어질 때 마애불의 미소는 더욱 신비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일년 중 가장 아름다운 미소는 가을해가 서산을 넘어간 어둔 녘에 보이는 잔잔한 미소입니다(1995년 발간 나의문화유산답사기(2)중에서)


*서산 보원사지(普願寺址)


  백제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는 보원사의 옛터로 통일신라-고려초에 크게 융성하였고 왕사, 국사를 지낸 법인국사 탄문이 묻힌 곳이며 주변에 100개의 암자와 1000여명의 승려가 있었다고 전하는 대사찰 이었다 이 절터에 신라와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대형 철불2구가 있었던 것을 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있으며 1967년도에는 백제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금동여래입상이 출토되는 등 유물로 보아 당시에는 매우 융성했음을 알 수 있으며 백제와 신라, 고려 초 불교 미술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있는 사적지이다 유물로는 백제 양식 기반위에 통일신라와 고려 초의 석탑양식을 갖춘 5층 석탑(보물 104호). 통돌을 장방형으로 파내어 만든 한국 최대의 석조(보물102호) 975년(광종26)에 법인국사가 입적하자 광종의 지시로 세운 보승탑 (법인 국사탑, 보물105호), 법인국사의 생애가 기록된 보승탑 비(법인국사탑비, 보물106호), 사찰에 불교 행사가 있을 때 깃발을 걸기위해 만든 당간지주(보물103호)가 있다 이 밖에 소형금동여래입상과 좌상들 ,청동인왕상, 5층석탑사리장엄구, 유리구슬, 상평통보, 고려철불좌상, (통일신라)철조여래좌상등 각 시대를 아우르는 다수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가까이에 서산마애삼존불상을 비롯한 백암사지, 개심사등 불교유적이 집중되어 있어 불교사 연구에 중요한곳이다


*서산 개심사(開心寺)


개심사는 운산면 신창리 상왕산(象王山)기슭에 자리 잡은 13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충남 4대 사찰중의 하나로 백제 의자왕 14년 (654)에 혜감국사가 창건하고 고려 충정왕2년(1350)에 처능대사에 의하여 중수되었다 대웅전의 기단만이 백제 때의 것이고 건물은 조선 성종6년(1475)에 산불로 소실된 것을 성종15년(1484)에 다시 중창하였다 그 뒤 1740년(영조16) 중수를 거쳐 1955년 전면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밖에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을 비롯해 명부전, 심검당, 무량수각, 안양루, 팔상전등이 있다


*대웅전(보물제143호)


대웅전은 창건 당시 기단위에 조선 성종(1484)때 중창한 다포식과 주심포식을 절충한 건축양식으로 그 작법이 아름다워 건축 예술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법당안의 삼존불은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입상을 협시로 한 아미타불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500년 자연미를 그대로 지니고 있는 심검당(尋劍堂)


심검당의 평면배치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이나 지금 ㄱ 자형의 방을 이어지게 늘려지어 상당히 큰 요사(療舍)로 남아있다 구조는 기단석 위에 자연석의 주춧돌을 놓고 배흘림이 가미된 원기둥을 세워놓았다 갂아서 볼록하게 만든 것이 아닌 나무 그 자체가 배흘림공법이다 기둥윗부분에 공포(拱包)를 짜 올려 지붕의 무게를 모두 기둥에 받도록 한 주심포(柱心包)양식이다 지붕의 뒷부분은 홑처마 앞은 겹처마의 맞배지붕이다 심검당은 그 남쪽으로 ㄴ자형의 다른 요사와 함께 연결되어 있다 평지의 사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산속의 다른 건축물과는 차이를 보이며 건축미가 아름답다 심검당이 500년 세월을 견디고 못생기고 굽고 휜나무로 지어져 자연미를 그대로 지니고 있어 정감이 간다 자연미 를 이용해 건축한 심검당을 보면 우리 선조들의 지혜에 탄복하게 될 것이다


*참고 : 내포지역(內浦地域)이란?


산이 별로 없이 구릉이 많고 들이 넓게 펼쳐지면서 작은 하천들이 바다와 만나고 있는 해안가의 연안지역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충남서북부의 가야산 앞뒤의 10개 고을 태안, 서산, 면천, 당진, 홍주, 덕산, 예산, 신창, 보령, 해미를 말한다



2017.08.23




잎녹차의 종류 | ♤..약차.한방차
나드리(조용대) | 조회 1118 |추천 2 | 2017.09.17. 18: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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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녹차의 종류


차의 종류에는 크게 소형차와 중형차, 대형차가 있습니다.

용도에 따라선 승용차, 화물차, 수송차, 응급차 등등이 있고, 회사에 따라선 소나타, 프라이드, 티코,

무쏘 등등이 있지요.

이렇게 굳이 농담스런 말을 하는 이유는, 차의 종류에도 그같은 세분을 하는 것이 이해를 돕지 않을

까 해서입니다.

어떤 분류법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종류를 달리 가름할 수 있기 때문이죠.


우선 가장 큰 분류법인 발효도(효소의 활성도)에 따른 개략적 종류입니다.

발효란, 차 잎의 떫은 맛을 내는 폴리페놀이 산화효소작용으로 인해 테아플라빈 또는 테아루비긴 성

분으로 바뀌어, 색, 향, 맛이 변화되는 작용을 말합니다.

 

불발효(발효 안함) - 녹차(영어로는 Green-tea 라고 합니다).

이것은 차잎을 딴 후 바로 솥에 덖거나 증기로 쪄 산화효소의 활성을 정지시켜 푸른 빛깔이 그대로

남 도록 합니다.

 

반발효(반쯤 발효) - 우롱차(Oolong-tea), 황차, 화차(花茶). 차잎을 시들게 하므로써 약간의 효소활

성화 작용을 거친 후 덖어서 만듭니다.

녹차와 홍차의 중간 형 태로, 발효정도는 약 10 - 65% 입니다.

 

강발효(많이 발효) - 홍차(영어로는 Black-tea 라고 합니다).

차잎을 시들게 하고 잘 비벼서 차잎 속의 산화 효소가 충분히 작용케 합니다.

탄닌이 산화됨에 따라 홍황의 아름다운 색으로 변함과 동시에 특유의 달콤한 방향을 생성하게 됩니

다. 발효정도는 85% 이상입니다.

 

후발효(곰팡이 발효) - 흑차, 보이차. 녹차의 제조법과 같이 효소를 파괴시킨 뒤 차잎을 쌓아두어 공

기 중의 미생물 번식을 유도해 다시 발효를 일으킨 차입니다. 잎차보다는 덩어리차 형태로 많이 만듭

니다.


미얀마와 타이의 라페소우(: 먹는 차)는 유산균발효를 한 것이라 합니다.

(여기서 녹차, 황차, 홍차, 흑차 등은 백차와 함께 색상에 따른 분류가 되기도 합니다.)


참고로, 강발효 종류인 홍차의 경우 인도의 다즐링(Dazeeling), 스리랑카의 우바(Uva), 중국의 기문

(祁門), 이 세 곳에서 나는 것이 세계 3대 홍차로 꼽히고 있습니다.

하나 더, 인도의 아샘(Assam) 홍차를 들 수 있는데, 이는 우유를 섞어마시는 밀크티로 적당하다 합

니다.

홍차 또한 잎의 위치나 크기에 따라 보통 다섯가지로 구분됩니다.

제일 위의 어린 싹에서 부터 순서대로,

- FOP(Flowery Orange Pekoe)

- OP(Orange Pekoe)

- P(Pekoe)

- PS(Pekoe Souchon)

- S(Souchon) 가 그것이지요.

Pekoe는 원래 '어린 싹'을 뜻하는 중국의 지방사투리였다 합니다.

인도에서는 대개 CTC(: Crush, Tear, Curl 즉, 부숴서 찢고 말림) 방법으로 홍차를 만들어 티백용의

원료로 많이 사용합니다.

 

스리랑카에선 차 산지의 해발 높이에 따라,

- 로우그로운 티(Low-Grown Tea, 600m 이하)

- 미들그로운 티(Middle-Grown Tea, 600-1200m 사이)

- 하이그로운 티(High-Grown Tea, 1200m 이상)

등으로 나누는데, 높은 곳에서 나는 것일수록 고급품이죠.


차(茶)는 호산지성(好山地性) 식물이기 때문에 해발고가 차의 품질에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고지의 차는 저지의 차에 비해 생산량은 적으나 품질이 좋습니다.

따라서 개울물을 굽어보며 배수가 잘 되고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산에 닿아 안개가 되어 개울물과 함

께 흐르는 산 중턱의 경사지가 이상적인 차의 재배환경입니다.


채취시기(이와 함께 차잎의 크기)에 따른 종류입니다.

 

우전차(雨前茶) - 녹차로선 최고로 쳐주는 겁니다.

24 절기상 곡우(穀雨) 전에 따서 만든 것이지요.

이 때 따 는 잎의 상태를 '일창이기(一槍二旗)'라 하는데요, 창은 새로 나오는 싹이 아직 펴지기 전의

뾰족한 모양을, 기는 창보다는 먼저 나와 조금 펴진 듯 오므라진 듯 깃발처럼 펄럭인다 해서 붙은 이

름입니다.

 

세차(細茶, 세작) - 곡우 이후를 전후한 시기에 딴 것으로 고급품이죠.

잎이 난 지 얼마 안된 거라 가늘고 작습니다.

한편으로는 시기적 순서상 첫물차, 맏물차라고도 합니다.

 

중차(中茶, 중작) - 입하 이후, 여름에 들어설 무렵 딴 것입니다.

한창 이파리가 커질 때 말이죠. 대중적인 차랄 수 있습니다.

한편, 두물차 그리고 그 이후의 세물차까지를 포함합니다.

 

대차(大茶, 대작, 왕작) - 이는 한여름 그리고 그 이후 딴 것입니다.

이파리는 아주 크고 품질로는 별로인. 한편으론 끝물차라고도 합니다.

막차(말작) - 굳고 다 커버린 잎인데 대개 숭늉 대신 끓여마십니다.


경우에 따라 세작, 중작, 대작, 말작은 곡우 이후에 15일 정도의 간격을 두는 것만으로 또는 잎 따는

시기에 따라 납차(臘茶), 사전차(社前茶), 화전차(火前茶), 화후차(火後茶), 기화차(騎火茶),

우전차(雨前茶), 우후차(雨後茶), 입하차(立夏茶), 소춘차(小春茶) 등으로 세분하기도 하지만,

이런 자세한 것은 차를 취하는 데 오히려 번거로움이 될 것 같아 생략하렵니다.

참고로 말하자면, 녹차의 품질은 순간의 선택이 아닌 채취시기가 좌우한다는 사실! 알아두세요.


녹차의 만들어진 형태에 따른 분류입니다.

 

말차(末茶, 抹茶) - 쉽게 말해 가루차입니다.

일조량 4 시간 정도의 반그늘 상태(섬유소 함량이 감소, 엽록소량이 증가)에서 재배한 차 잎을 증제,

건조한 후 맷돌로 빻아 미세한 가루형태로 만든 것이지요.

 

잎차(葉茶) - 우리가 흔히 보는 차입니다.

이파리를 따 서 볶고, 덖고, 비벼 만든 것입니다.


덖어 만든 것을 '덖음차' 라고 부르는데 비해, 증기로 쪄서 만든 것을 '증제차(蒸製茶)' 라고 하는데

요, 일본의 잎차는 대개 이 런 증제를 거쳐 만든 증제차입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옥로차를 들지요.

중국의 잎차는 주로 덖음 방법을 사용합니다.

또 하나의 제법으로 더운물에 데쳐 만드는 '자비차(煮沸茶)'가 있고, 잎차 중에는 이들 외에도

증제 + 덖음의 방법을 사용한 새로운 형태도 있습니다.

 

단차(團茶, 덩이차) - 생김새는 이름으로 미루어 짐작 하실테죠.


모두 일정한 것은 아니지만 각각의 모양새에 따라 떡차, 벽돌차 또는 덩어리차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전차(錢茶)라고 있는데, 옛날 동전처럼 중앙이 뚫려 있다고 해서 이름한 거랍니다.

대략 500원 동전 크기에 5mm 두께로 먼거리 여행시 실에 꿰어 휴대가 간편하게 끔 만든 것이지요.


기타 차의 산지 및 유래에 따른 이름으로는 오룡차(烏龍茶, 보통은 '우롱차'라 부르는 이 차는

또한 용정차와 함께 중국의 대표적인 차 이름이 되었지요),


철관음(鐵觀音), 우지차(宇治茶), 원후차(猿후茶), 죽로차(竹露茶) 등등이 있고,

차잎의 모양에 따라 이름붙인 작설차(雀舌茶 : 참새의 혀를 닮았다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는데요,

 

지금에야 작설차라고 하면 한국차의 대명사로 통합니다),

응조차(鷹爪茶 : 매의 손톱을 닮았데서),

맥과차(麥顆茶 : 보리알을 닮았데서) 등등이 있어요.


제조회사에 따라선 우리나라의 경우 태평양의 oo, 한국제다의 oo, 지리산제다의 oo, ??제다의 oo

등이 있습니다. (oo은 상표명입니다. 특정회사의 광고가 될까봐...)


커피점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1회용 티백 녹차는 일반인들이 마시는데 부담이 없도록 다른 성분을

더한 것이랍니다.

일테면 현미가루라든가 율무가루라든가 하는, 쉽게 말하자면 정통이 아닌 보급용, 대중화용이라는

것이지요.


차 마시는데 무슨 정통이 있을까마는 '다도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그걸 녹차로 쳐주지도 않으니...

(사실 티백은, 원재료 차 이파리가 조잡하고 줄기나 찌꺼기가 섞여있어 차로서의 질이 낮다고 볼 수

있습니다.)

좀 더 완고한 사람들은 자스민차(Jasmine, 한자로는 말리화(茉莉花)차 : 녹차에 말리화 말린 꽃잎을

넣어 향기가 배게 만든 것)도 차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하지요.

꽃냄새가 차의 수수하고 정갈한 기품을 떨어뜨린다나요.


저로서는 그런 태도들이 녹차에 대한 접근을 어렵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정신적인 가치만을 너무 주장한다던가, 그에 따라 녹차에 대한 외곬수적 견해만을 고집하는 그런 거

말이죠.

물론 '정통'으로 마시기 위한 절차와 의식, 다기 마련에 드는 비용도 녹차에 대한 접근과 일상화를 어

렵게 만드는 요인들입니다.


하지만 얼마만큼은 절차와 의식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지요.

몸에 배면, 또 익숙해지면 오히려 편안해지고 자연스런 몸동작과 기풍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항상 그렇듯이 과도한 지나침과 모자람이 문제라는 얘기인데...

중용(中庸)을 지키는 것이 최선일 것입니다.

 

         



2017.09.17





우리나라 단차團茶

기사승인 2018.11.07  19:5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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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강스님의 차 품평기 '사랑하기'

▲ 2012년에 만들어진 단차(團茶)의 앞면. 색으로만 보면 오래 발효된 차처럼 보인다.

2018년 10월 4일 한가로운 저녁을 맞아 우리나라 단차(團茶-호떡처럼 만든 차)를 시음하기로 했다. 이 차는 한 비구니 스님이 오래 전부터 새로운 차를 만들기 위한 노력의 결과로 만들어진 차이다. 2012년에 만들어진 단차는 335g의 둥근 모양이다. 6년이 지난 차이지만 색으로 보면 엄청 오래된 발효차나 보이 숙차熟茶처럼 보였다. 그것은 차의 법제 과정이 발효차를 만드는 공정과 비슷한 점이 많아서인 듯했다.

▲ 단차를 쪼갠 단면을 매크로렌즈로 촬영한 것. 색이 검은 색에 가까운 것은 많이 발효를 시켰기 때문이다.

스님으로부터 들은 공정은 다음과 같다. 낮에 잎을 땀-밤에 실내에 펼쳐 둠-이른 아침 햇볕에 내어 11시경까지 뒤적임-기계로 유념-차를 쌓아서 물에 적셔 짠 천을 덮어 5~6시간 햇볕에 둠(발효 촉진)-햇볕에 펼쳐 말림-모차(毛茶)로 3년 이상 보관-단차로 만듦-특별한 곳에 1달 정도 보관-뜨거운 곳에서 습기 제거-보관.

▲ 25년 정도 사용해온 청대(淸代)에 만들어진 다호. 자사로 만들어 표면을 주니로 덮은 평개호(平蓋壺).

2012년에 만든 단차를 쪼개니 향이 진동했다. 침향, 석청의 달콤한 향, 한약재의 향, 꽃 향, 삭고 있는 볏짚의 향까지 골고루 올라왔다. 이 차가 오래 발효된 차가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은 쪼갠 단면을 매크로렌즈로 확대 촬영했을 때 미세한 곰팡이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육안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그 곰팡이는 세월만이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단차를 우릴 다호는 청대淸代에 만들어진 것으로, 자사로 만들어 바깥을 주니로 덮은 평개호平蓋壺였다. 두 잔을 만들기에는 크기가 작아서 두 번을 다해(茶海-차를 부어 골고루 잔에 분배하는 다기)에 우려 두 잔을 만들어서 한잔은 마시고 한잔은 비교할 용도로 두었다. 물은 펄펄 끓는 상태로 다호에 붓고 곧바로 우려내는 방식을 취했다. 총 16회 우려 여덟 잔은 마시고 여덟 잔은 비교용으로 두었다.

▲ 단차의 찻물을 비교한 것. 좌상에서 우상으로 다시 아래로 진행됨

잔의 횟수는 숫자로 표시한다.

(01)처음 우리느라 몇 초간 두었더니 찻물색이 맑은 홍차의 색. 옅은 침향과 약초 향과 석청의 향과 꽃 향이 섞인 듯한 향이 피어오름. 머금으니 부드럽고 약간 달콤하며 피어나던 향도 입안에 함께 느껴짐, 약간 새콤하고 맑은 맛.

(02)찻물은 약간 맑아져서 레드골드. 석청 향과 약초 향과 꽃 향이 피어오름. 머금으니 새콤하고 야생 오래 자란 나무 버섯 특히 상황의 맛이 살짝 느껴짐. 타닌의 맛인 떫거나 쓴 맛이 없음. 기분 좋은 차 트림이 올라옴. 배가 뜨거워지고 온몸에 땀이 남.

(03)찻물은 선홍색. 달콤한 석청과 약초와 꽃의 향이 섞여 올라옴. 머금으니 새콤한 맛 뒤에 맑은 단맛. 입안은 깔끔함. 회감 거의 없음. 빈 잔에서 피어나는 향은 무이암차처럼 꽃과 꿀의 향기가 남.

(04)찻물은 보다 짙은 선홍색. 약초와 삭은 짚과 꽃의 향이 섞여 피어오름. 머금으니 새콤하고 부드러운 약재를 달인 듯한 맑은 맛. 입은 맑음. 기분 좋은 차 트림. 땀이 많이 남.

(05)찻물은 선홍색. 피어오르던 향은 살짝 약해짐, 머금으니 새콤한 맛 뒤의 옅은 단맛. 타닌의 느낌은 여전히 없음.

(06)찻물은 황금색. 맑은 꿀 향과 약초의 향이 피어오름. 머금의 맑게 삭은 짚을 삶은 맛과 새콤한 맛. 몸에 열이 많이 남.

(07)찻물은 맑은 금색. 피어오르던 향은 부드러워짐. 머금으니 많이 부드러운 녹차 대작의 맛.

(08)찻물은 맑은 금색. 피어오르던 향은 많이 숨었음. 머금으니 옅은 대작의 맛. 입은 담백함. 타닌 느껴지지 않고 회감 없음.

▲ 단차를 우리고 난 뒤 퇴수기의 물에 잠긴 찻잎.

이 단차團茶는 향에 특징이 있었다. 단차 자체에서도 그렇고 우렸을 때 피어오르는 향도 침향과 석청의 향과 약초의 향과 꽃의 향이 섞여 올라왔다. 잔향 또한 좋았다. 이 차에서는 타닌을 느낄 수 없었다. 그래서 떫거나 쌉싸래한 맛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마신 뒤에 오는 회감도 없었다. 아마도 법제 과정 두어 곳에서 타닌이 사라진 것이 아닌가하고 혼자 짐작해 보았다. 요즘은 차를 담담하게 마시는 이들도 많다. 그러면서 뜨거운 차를 원하는 이라면 이 차를 시험해 보는 것이 괜찮을 듯하다. 만약 향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피어나는 향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도 개인 취향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이 단차를 고산에서 자란 야생차로 만든 오래된 보이차와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차의 산지가 다르고 차의 품종이 다르며 법제과정 또한 다르고 발효된 햇수가 다르기 때문이다. 2천 미터 정도의 고산에서 자란 야생 대엽 찻잎으로 이 단차를 만들면 어떤 향과 맛이 날까 궁금해졌다.다 우린 찻잎을 퇴수기에서 살필 때까지 방안은 차향으로 가득했다.

<서울 개화사를 창건해 차와 향을 공유하고 있는 송강스님의 차에 관련된 편안한 이야기를 연재한다. ‘사랑하기’란 이름으로 차에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송강스님의 허락을 받아 전제한다. 송강스님의 ‘사랑하기’는 현대인들에게 차 생활의 묘미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려주고 제대로된 차 마시기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담고 있다. -편집자 주>

 

송강스님 teac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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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단차團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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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宋代 團茶의 色 · 香 · 味에 관한 一考 = The Study of Color, Fragrance and Taste of DanCha in Song Dynasty

    제어번호 : 101961774

    저자명 : 이묘희

    학술지명 : 차문화ㆍ산업학(The journal of tea culture & industry studies)

    권호사항 : Vol.16 No.- [2010]

    발행처 : 국제차문화학회

    발행처 URL : http://www.tealove.or.kr/

    자료유형 : 학술저널

    수록면 : 1-25(25쪽)

    언어 : Korean

    발행년도 : 2010년

    KDC : 381

    등재정보 : KCI등재

    주제어 : 宋代 ,團茶 ,단차의 색·향·미 ,茶書 ,단차의 폐해 ,단차폐지령

    제공처 : 무료 RISS

    • 국문 초록 (Abstract)
      • 중국의 오래되고 다양한 차문화 역사 속에서도 송대의 차문화는 화려하고 독특한 차문화를 이루고 있다. 송대는 開門七件事의 하나로 자리 잡을 만큼 차문화가 대중화·일반화 되었다. 또한 차마무역과 전매제도 등 각종 차 관련 법규와 제도가 발달한 시기였다. 이는 차가 송대 국가의 중요한 재정재원중의 하나였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송대의 독특한 제조방식으로 만든 團茶 또한 송대의 차문화를 대표하는 하나의 표상이다. 단차는 唐代의 병차와는 달리 차의 膏를 모두 짜내고, 갈아서 만들었으며 그 형태면에서 고급스럽고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단차의 지속적인 개발과 고급화는 송대의 대표적 음다법 이었던 점차법의 발달과 함께 투차, 분차 등의 놀이문화로까지 차문화를 성행하게 하였다.
        본고에서는 가장 독특하다고 할 수 있는 제다방식으로 만들어진 단차는 어떤 색향미를 지녔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했다. 송대의 제다방식을 계승하여 계속 만들어지고 있는 단차 종류가 없고, 유물로도 남아있지 않아, 그 자취를 더듬어 유추해보는 것은 송대의 다서를 통해서 알아보았다. 단차의 자취를 쫓아가다보면 송대 황실에 진상되던 차의 중심이며 그렇게 각광받았던 단차가 후대에 들어서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리게 된 이유에 대해서도 유추해 볼 수 있다.
        단차는 차의 진액을 모두 제거하고 만드는 과정에서 차의 진향·진미가 훼손되고, 차의 형태는 섬세하고 화려해졌으나, 차를 만드는 지난한 과정에 있어서의 고통이 茶農에게 고스란히 무거운 짐이 되는 폐해로 인해 단차의 제조가 후대에는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 Tea culture of Song Dynasty is one of the most unique feature in tea history of China. Tea has been popular in Chinese history, but in Song dynasty tea became one of seven must-be items that every household have. In previous Chinese history tea was not this much of popularity. Also during Song Dynasty including Tea- Horse trade, many of tax and trade regulations appeared. This may be the evidences that tea was a very important tax sources to government.
        DanCha is one of the unique features in Song Dynasty. Manufacturing process of DanCha was somewhat different with ByungCha in Tang Dynasty. After picking off the very young tea leaves, called SuAh, steam it and then press strongly under the DaeJa and SoJa. So the sap(juice) of tea leaves was removed, and the most of the unique ingredients of tea were removed. So the color of DanCha is almost white, not blue and the taste of DanCha may be very pale. So to supplement this weak taste, sometimes strong fragrances like camphor was added to DanCha. In the present such a process looks very weared, but it was not rare at that time. The shape of DanCha, however became more and more luxurious. Many patterns like dragons or phoenix were printed on it.
        Tea is an organic material that no DanCha remains cannot be found. However, fortunately we can find many books that mention about DanCha. Books, poems and literatures of many high scholastic persons are main sources of this study.
        Through the Song Dynasty DanCha was one of the most popular tea drinking method, but still it was for the emperor and high aristocratic class. Most of general public enjoyed scattered leaf tea(SanCha). Anyway manufacturing process of DanCha was so painstaking that JuWonJang, first emperor of Ming Dynasty prohibited DanCha manufacturing, and after that DanCha only remains in the books. DanCha is not made anymore, but DanCha contributes a lot to make tea history more rich and prosperous.
    • 목차
      • Ⅰ. 서 론
      • Ⅱ. 宋代 團茶의 탄생배경과 의의
      • Ⅲ. 제다법에 따른 단차의 색·향·미
      • Ⅳ. 단차 제다의 폐해와 쇠락
      • Ⅴ. 결 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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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와 도자기 만남전수성아트피아 10월 20- 25일까지뉴스 차와문화l승인2015.10.08       



    차와 도자기의 만남전이 열린다. ‘혜우스님의 차와 월송요 서대천 작가’를 초대하는 ‘차와 도자기 만남’전이 그것. 대구 TBC는 오는 10월 20일부터 25일까지 대구수성아트피아 전시실에서 영호남 화합을 위해 호남지역 차의 명인인 혜우스님과 도자기의 명인인 월송요 서대천 선생을 초대하는 초대전을 가진다.

    혜우스님은 이번전시에서 자신이 직접 재현하거나 개발한 16종의 차를 선보인다. 선보이는 차 전시품들은 아직은 이른 봄, 봄날의 꿈, 사시락四時樂, 홍류동차紅流洞茶, 황금단차黃金團茶, 청금단차靑金團茶, 죽통차 죽로, 죽통차 추월, 침향차, 부풍향차보 칠향차등이다. 월송요 서대천선생은 달항아리, 다관등 100여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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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김성수기자

    등록일2014-05-21

    제목

    [제품]장흥 청태전을 아시나요! 부드럽고 깊은 맛의 녹차 청태전

    고운빛깔 뽐내는 청태전의 녹차는 부드럽고 깊은 맛이 입안 가득 오래 남는다. 

     

     

    청태전이란?  


    녹차잎으로 만든 우리 전통차로 삼국시대부터 근대까지 전남 장흥을 비롯한 남해안 일대를 중심으로 즐겨 마시던 차.

     

    청태전은 떡차의 일종으로 동전의 모습과 흡사하여 일명 돈차라고 불리기도 하며, 녹차의 발효과정에서 파란색의 이끼가 생긴것 같이 변한다하여 청태전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떡차는 녹차를 일정한 모양의 성형틀에 맞춰 모양을 만들어내고, 건조과정을 거치면 딱딱하게 굳어 버리게 되는데 이렇게 제조한 덩어리차를 말한다. 

     


     ▲ 방금 만든 청태전의 모습

     


     ▲ 청태전을 연구개발 및 홍보하고 있는 장흥농엽기술센터


    생김새도 우리가 먹는 쑥떡의 빛깔과 흡사한 떡 모양으로 되어 떡차라는 이름이 이상하지 않다. 그 모양에 따라 청태전(靑笞錢), 전차(錢茶), 단차(團茶), 병차(餠茶)라 불렀다.​ 

     

    이러한 청태전의 우수성을 알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기호식품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장흥군 농업기술센터에서 청태전사업단을 구성하여 연구개발 및 홍보 마케팅을 본격적으로 가동하고 있다.  

     

    청태전은 우리 고유의 발효차로 옛부터 눈을 밝게하고 해독, 변비, 해열 등의 효과가 있어 약 대용으로 마시기도 하는 매우 귀한 녹차였다. 

     



     ▲ 청태전을 만들기 위한 작업은 고되지만 자부심은 높다.

     


     ▲ 고운빛을 내는 청태전의 녹차

     

    장흥군은 고부가가치를 낼수 있는 전통차를 복원하고 명품화 시키는 사업을 진행중에 있는데 목포대학교 산학협력단과의 용역을 시작으로 2008년 부터는 청태전 재현과 시제품 생산을 시작 하게 이르렀다.  

     


    2008년 세계녹차콘테스트에서 최고 금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얻었고 2012년에는 농림수산식품부의  향토산업으로 선정되어 집중 육성하는 단계까지 활성화 확대작업이 이루어 졌다.

     



                                ▲ 청태전을 알리기 위한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 다양한 제품을 선 보이고 있다.

     

    청태전의 시발점인 전남 장흥의 보림사는 구산선문의 종찰로 조선시대때 다산 정역용 선생이 보림사 스님들에게 전차 제다법을 알려주어 명맥을 유지하던 곳이다.  

     

    보림사 뒷편의 야산에는 지금도 야생 녹차밭이 조성되어 있어  스님들의 관리를 받고 있는데 이곳에서 자란 녹차로 찌고, 덕는 일을 하여 깊은 맛이 우러나는 녹차를 아직도 만들고 있다. 

     


     ▲ 보림사 뒷편에는야생녹차 밭이 조성되어 있다.

     


     ▲ 녹차밭 한켠에서는 차를 덕는 일을 하고 있다.

      

    전통방식을 고수하며 제조하여 청태전이 어떻게 만들어 내는지 지켜 볼수 있다.  음용법도 알아 볼수 있어 보림사를 찾는 사람들도 많다.

     

    장흥의 전 지역 산간에는 야생녹차를 키우고 있는 밭이 조성되어 있는데 그 넓이가 무려 44ha로 전국의 12%에 해당하는 면적을 가지고 있다. 예로부터 정흥은 고급의 차문화가 발달하여 이러한 차문화를 알리고 보급하는 일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 수고스런 작업을 통해 깊은 맛을 내는 청태전이 완성된다.

     


     ▲ 무공해지역에서 자라는 녹차

     

    장흥을 찾은 관광객들에게 청태전 만들기 체험과 시음회를 가질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만들어 진행중에​

    있는데, 장흥 명원다도의 예절문화원에서는 청태전을 만드는 과정을 눈으로 지켜 볼수 있다.  

     

    이곳에서는 야생 차밭을 운영중에 있는데, 장흥읍 행원리 일대의 5만여평에 이르는 넓은 차밭에서는 오염되지 않은 녹차를 생산하여 질 좋고 깊은 맛이 나오는 청태전 생산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 녹차만드는 과정과 시음 체험할 수 있는 전남 장흥 명원다도

     

                                ▲ 잘 건조되고 있는 청태전 

     


     ▲ 흰색의 찻잔속에 고운빛의 녹차가 들어 있다.

     

     

    야생차 잎을 정성스럽게 채취하여 가마솥에서 찌고, 덕는 일을 반복하여 만들어지는 청태전은 장인의

    손길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잘 쪄진 녹차잎을 절구에 넣고 빻아 부드럽게 만들어 발효시킨 후 다시 동그란  틀에 놓어 청태전 모양을 만든다. 작업과정이 힘들고 고되지만 우리 전통차를 만든다는 자부심으로 즐겁게 일하고 있다.​

     



     ▲ 청태전 만드는 과정을 지켜 볼 수 있다.

     

                                 ▲ 장흥다원 청태전 

     


     ▲ 장흥 명원다도 예절문화원에서 시음행사를 가졌다.

     

    예절문화원에서는 청태전(떡차)의 음용법을 체험할 수 있는데, 커피에 입맛 들여진 사람들은 부드럽고 깊은 맛의 청태전 차맛에 흥미로움을 느끼고, 간편하게 집에서 마실 수 있는 제품을 구입하여 가기도 한다.


    청태전 1개에 끓는물 500~600ml 가량을 부어 5분 이상 경과후 마시면 제대로 된 청태전 녹차 
    맛을 음미할 수 있다. 한번 우려낸 청태전은  3~5회 더 우려 마셔도 깊은 맛이 사라지지 않아 좋다. 

     



     ▲ 청태전의 진면목을 알수 있는 곳

     


     ▲ 고운빛깔의 녹차

     

     

    청태전을 주전자에 넣고 바로 끓여 마셔도 될 만큼 음용방법은 간단하다. 이 청태전을 생강이나 유자, 모과, 오가피 등과 함께 넣어 끓여 먹으면 몸을 건강하게 만드는 요소들이 많이 나와 청태전 효능을 제대로 볼 수 있다. 

     


     ▲ 청태전 만드는 과정

     


     ▲ 마시고 나면 입안 가득 진한 녹차의 향이 난다.

     

     


    청태전을 처음 접하면서 생소함을 느꼈지만 제작 과정을 지켜 보고 장흥이 청태전의 역사성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한잔의 차도 차분하게 마시게 되고, 만든 사람들의 노고도 생각하며 마시게 되었다.

     



     ▲ 청태전은 만드는 과정이 쉽지 않다.

     


     ▲ 싱그러운 녹차밭

     

    청태전의 좋은점을 알았다면 이제 부터 청태전으로 우려낸 깊은 맛의 녹차를 마셔 보는것이 어떨까!

     

    [청태전 체험할 수 있는 곳]

    장흥다원: 전남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 295 / 061-862-8958

    http://장흥다예원.com  

    http://www.chungtaeje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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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품]장흥 청태전을 아시나요! 부드럽고 깊은 맛의 녹차 청태전

    nknews.kr/ab-1701-1053&PB_1376666522=7&PB_1376666839=5&PB_13746..    엔케이엔뉴스






      * 1.   [일본] 다도문화사

    chinesetea.co.kr/pds/cont/qt23.htm    수미헌



      * 2.  독자참여

    파인뉴스.kr/searchview.php3?no=19648&read_temp=20120604§ion..        


      * 3.   紫霞 申緯의 飮茶生活에 관한 考察 : 『警修堂全藁』를 중심으로

    academic.naver.com/article.naver?doc_id=79600521    네이버 학술정보




    발효에 따른 분류 || 모양으로 본 분류   || 차 따는 시기와 품질에 따른 분류

        모양으로 본 분류

    ▷덩이차[團茶] : 떡차, 보이차(떡덩이 모양), 벽돌차[전茶]
    ▷낱잎차 : 잎이 말리고 꼬드라진 차, 잎이 눌리어 납작한 차
    ▷싸락차 : 잘게 잘린 차(영국홍차, 봉자차, 부스러기차)
    ▷섞은차(혼합차) : 꽃차(자스민차), 현미차
    ▷가루차[末茶] : 점다(點茶)하여 탁한 다유(茶乳)로 마시는 차유산균을 발효시켜 야채로 먹는 차도 있다.
     

        차 따는 시기와 품질에 따른 분류

      
    우리 차는 잎을 따는 시기에 따라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봄차
       ① 맏물차(첫물차) : 양력 4월 하순(곡우) ~ 5월 상순
       ② 두물차 : 양력 5월 하순 ~ 6월 상순

    ▷여름차(세물차) : 양력 6월 하순 ~ 7월
    ▷가을차(끝물차) : 8월 하순(처서) ~ 9월 상순(백로)
       ※ 곡우 : 양력 4월 20일 ~ 21일
           입하 : 양력 5월 5일 ~ 6일
           처서 : 양력 8월 22일경
           백로 : 양력 9월 8일 ~ 9일

       찻잎이 여리고 굳은 정도에 따라 아래와 같이 품질이 나누어진다.
    ▷우전차 : 곡우전의 애잎을 따서 만든 극세작(極細作)의 차
    ▷세차(細茶, 여린차, 세작) : 곡우 ~ 입하 경에 딴 차로 잎이 다 펴지지 않은 창(槍)과 기(旗)만을 따서 만든 가는 차
    ▷중차(中茶, 보통차, 중작) : 잎이 좀더 자란 후 창과 기와 펴진 잎을 한 두 장 함께 따서 만든 차
    ▷대차(大茶, 왕작) : 중차보다 더 굳은 잎을 따서 만든 거친차
    ▷막차 : 굳은 잎이 대부분으로 숭늉대신 끊여 마시는 차
       ※ 창(槍)과 기(旗)
       창은 새로 나오는 뾰족한 싹이 말려 있어 창과 같이 생긴 것이며, 기는 창보다 먼저 나와 잎이 다 펴지지 않고 조금 오그라들어 있어 펄럭이는 깃발과 같은 여린 잎을 말한다. (鄭英善-한국茶文化)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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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란 무엇인가

    finetea.co.kr/finetea52.htm    파인티







    [차(茶)와 사람] 목은에게 茶의 의미는 이상향 찾는 내비게이션

    [중앙선데이] 입력 2014.06.01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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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려들이 차를 즐기는 광경을 그린 오백나한도. 붉은 비단에 차 가루를 넣어 우려내는 탕법을 이용하고 있다. [일본 교토국립박물관]
    봄날 깊은 계곡을 찾아드니 (산수를 그린) 그림도 이만은 못하리
    (春入溪山畵不如) 
    가벼운 천둥이 밤새 적막을 진동시켰네
    (輕雷一夜動潛虛) 
    아침을 먹은 후, 꽃자기 잔엔 흰 빛이 뜨고
    (花瓷雪色朝飡後) 
    낮잠을 깬 뒤 돌솥엔 솔바람 소리 일어나네
    (石銚松聲午睡餘) 
    달을 보니 완연히 그대 얼굴 본 듯하고
    (弄月宛然親面見) 
    바람을 타니 창생을 소생시킬지 묻고 싶네 
    (乘風欲問到頭蘇) 
    누가 (세속의) 욕심을 잊은 늙은이인가 
    (鬢絲誰是忘機者) 
    흉중의 수많은 글을 깨끗이 씻은 이로다 
    (淨洗胸中書五車) 
    『목은시고(牧隱詩稿)』 권6 

    이색의 초상화
    고려 말 문신이며 다인(茶人)이었던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이 남긴 다시(茶詩) ‘전다즉사(煎茶卽事)’다. 포은(圃隱) 정몽주, 야은(冶隱) 길재와 함께 ‘3은’으로 유명한 이색은 여말선초(麗末鮮初) 격변기를 살면서 차를 통해 속진을 벗어나려 했다.
     
    이색은 분명 깊은 산중의 계곡을 찾았던가 보다. 솜씨 좋은 화가가 그린 산수화보다 계산(溪山)이 더 아름답다 하였다. 그는 아침밥을 먹은 뒤, 혹은 오수를 즐기다 막 깨었을 때 차를 즐겼다. 물론 사원을 방문하여 승려를 만났을 때, 혹은 눈이 내리는 날도 차를 마셨을 게다.
     
    이 시는 14세기 사대부들의 음다(飮茶) 풍속을 짐작케 한다. 당시 이들은 어떤 다완으로 차를 마셨을까. 유행했던 찻잔은 청자 다완과 백자 다완, 혹은 흑유 다완이었다. 하지만 이색은 꽃무늬가 있는 다완을 사용했다. 아마도 이 찻잔은 국화나 연꽃, 인당초 무늬를 상감이나 양각, 혹은 음각 기법으로 장식한 다완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가 즐긴 차는 백차(白茶)였으니 상감으로 장식한 ‘꽃자기 잔’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특히 ‘흰 빛(雪色)’이란 백설이나 백운처럼 희디흰 차색을 말한다. 바로 다말(茶沫·차 거품)의 색깔을 이리 표현한 것이다.

    “돌솥엔 솔바람 소리 들려오네”라고 한 것은 찻물이 끓는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물 끓는 소리를 송풍(松風)으로 상징한 것은 남송의 시인 나대경의 ‘약탕시(瀹湯詩)’에 “물 끓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죽로에서 급히 들어냄이라(松風檜雨到來初 急引銅甁移竹爐)”에서 유래되었다. 이후 찻물이 끓는 소리를 “소나무 위를 스치는 바람 소리(松風)”로 표현했다. 이는 차의 일미(一味)세계를 상징한 것으로, 다시(茶詩)의 대미(對美)를 드러낸 명구(名句)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는 왜 차를 즐겼을까. 예부터 사람들은 신선처럼 오래 살기 위한 차를 찾았다. 첫째는 양생(養生)을 목적으로 차를 마셨고, 둘째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이색이 차를 즐긴 연유는 자명해진다. 바로 “바람을 타니 창생을 소생시킬지 묻고 싶다”는 것이 그것이다. “바람을 타다”라는 것은 차를 마신 후 몸의 변화를 나타낸 것으로 가벼워진 몸의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차를 마시면 신선이 된다는 그의 의지는 설득력을 가졌다. 진정 차는 사람을 소생시킬 수 있는 명약(名藥)인가. 아니면 단순한 음료인가.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좋은 차가 문무화(文武火·센 불과 약한 불)로 잘 끓여진 탕수(湯水)와 어우러져 다신(茶神)을 드러낸다면 명약이 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음료수에 불과할 뿐이다. 이색의 ‘봉산십이영(鳳山十二詠)’ 중 영천(靈泉)은 물의 중요성을 노래한 것이다.

    학이 쪼아 맑은 샘물이 솟아나니(鶴啄淸泉出) 
    서늘한 기운이 폐부까지 닿고(冷然照肺腑) 
    마시면 신선의 몸으로 바뀐 듯(飮之骨欲仙) 
    사람에게 현포(玄圃:곤륜산의 선경)를 상상케 하네(令人想玄圃)
    어찌 시 짓는 마음만 씻으랴(豈惟洗詩脾) 
    죽을병도 물리칠 수 있으리(可以却二豎) 
    평소 청정한 일 좋아하노니(平生愛淸事) 
    다보의 속편을 내고 싶네(有意續茶譜) 
    의당 돌솥은 가지고 가서(當携石鼎去) 
    소나무 끝에 비 뿌리는 걸 보리라(松梢看飛雨) 
    『牧隱詩稿』 권3 

    영천(靈泉)은 신령한 물이다. 신령한 물은 다신(茶神)을 드러낼 수 있다. 학이 쪼아 솟은 물은 맑음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이 물을 먹으면 골수까지 변하여 이미 선경에 든 사람이다. 더구나 이 물은 시를 짓는 사람의 마음만 청정하게 씻어 주는 물이 아니라 죽을병도 고칠 수 있는 물이란다. 특히 물의 중요성을 알았던 그였으니 서둘러 물을 끓여 차의 오묘한 세계를 맛보려 하였다. 실제 그가 이런 차를 마시고 신선의 경지에 도달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차를 통해 이상향에 머물기를 기약했던 것이다. 따라서 차는 맑고 깨끗한 이상향으로 향하는 이들의 길잡이였다. 속세의 여진은 벗어날 수 없는 속박이다. 차는 긍정적인 힘을 가졌다. 그래서 이들은 속진에 살면서도 차를 통해 이상향을 구현하고자 했다. 하지만 고래로 차를 즐긴 이들은 어디에 있는가. 오늘도 선경의 어디쯤에서 송풍(松風) 소리를 듣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몽주와 함께 주자학(성리학)을 흥성시킨 이색은 이 밖에도 수편의 다시를 남겨 차를 즐긴 여유와 즐거움을 노래했다. 

    이색은 어려서부터 차를 즐겼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 말 화려하고 사치한 왕실의 차 문화는 극단적인 폐단을 드러냈고 사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왕실의 권위를 상실하여 공신과 승려, 나라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차를 하사하던 왕실의 전통은 인종 3년(1125) 이후에 사라진다. “이자현이 죽었다…(이자현이) 병이 들자 왕이 내의를 보내 문병하고, 차와 약을 하사했다(仁宗乙巳三年 淸平山人(삭제할 것) 李資玄卒,...及有疾 王遣內醫問疾 賜茶藥)”는 『고려사절요』 기록 이후 왕실에서 차를 하사한 경우는 거의 전무하다. 이미 13세기에 이르면 차가 보편화되어 귀한 물품으로서의 상징성이 사라졌던 것은 아닐까.

    이색이 살았던 당시 고려는 원(元)의 부마국으로 전락해 왕실의 권위가 무너졌고 끝없는 내정 간섭을 받고 있었다. 그는 원의 관료가 됐던 아버지를 따라 원나라에 가 국자감에서 유학했다. 그곳에서 원의 차 문화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원은 풍성한 경제력을 토대로 원대의 독특한 차 문화를 이룩했다. 주로 단차(團茶)를 마셨다. 차를 달이는 방법은 다선(茶筅·차를 물에 잘 풀리도록 젓는 기구)을 이용하거나 긴 젓가락을 이용하여 다말(茶沫)을 내는 점다법(點茶法)이 유행했다. 간혹 선종의 사찰에서는 붉은 비단 속에 가루차를 넣은 후 비단에 싼 차를 다완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가면서 다말을 내는 탕법(湯法)이 함께 사용되기도 했다. 이런 탕법은 송에서 유행되었던 것으로, 다선이 사용되기 전에 응용된 점다(點茶)의 한 유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14세기엔 이미 다선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따라서 이색은 다선을 이용한 점다법으로 백차(白茶)를 즐겼을 것이다.

    『고려사 열전』 이색조
    평생 차를 사랑했던 이색은 정몽주와 함께 주자학 발전과 보급에 큰 기여를 했다. 주자학은 당시 불교나 유학이 사장(詞章), 훈고(訓詁)학 중심으로 흘러 불만이 컸던 신진 사대부들을 매료시켰다. 부자간의 효와 군신의 의를 강조하는 실천윤리를 중시하고 이기(理氣)적 세계관을 탐구하는 주자학은 신진 사대부들의 정신적 지주가 될 새롭고도 획기적인 학문 세계였다. 
     
    『고려사』 ‘열전’에는 이색에 대해 “지조와 절개가 굳세지 못하여 국정에 대한 원대한 의견을 내놓은 것이 없다”고 박하게 평한 대목이 나온다. 그러나 그가 남긴 상소문엔 나라를 위한 그의 충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어 코끝을 찡하게 한다. 이색은 사후 문정(文靖)이란 시호를 받았다. 『목은집(牧隱集)』을 남겼다.



    주자학 
    주희(朱熹·1130~1200)가 완성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신유학이라고도 부른다. 주희에 앞서 북송의 장재(張載·1020~1077)와 주돈이(周敦颐·1017~1073)는 화엄교의(華嚴敎義)의 이론체계인 이(理·본체)와 사(事·현상)가 서로 상응하는 상즉(相卽)의 이치로 설명되는 법계관(法界觀)에 주목한다. 이들은 이사(理事)의 상즉(相卽) 원리에 자극을 받아 태극·기·음양 등 전통적인 존재론을 기초로 이기론(理氣論)적 세계관을 탐구하여 신유학의 논리체계를 만들었다. 주자학을 고려에 처음 소개한 것은 안향(安珦·1243~1306)이었다. 원에서 주자학을 배워 왔던 백이정(白颐正)과 그의 제자 이제현(李齊賢·1287~1367)이 고려에 전파하였지만 그 영향력은 미미하고 제한적이었다. 이색과 정몽주에 의해 14세기 중후기 널리 퍼졌다. 주자학의 전파는 불교를 배척하려는 기류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기백은 『한국사신론』에서 “처음 이제현과 이색은 아직 불교 자체를 배격하기보다는 사원의 폐해와 승려들의 비행을 공격하는 데 그쳤다”고 했다. 정도전(1342~1398)은 불교 자체를 멸륜해국(滅倫害國·윤리와 나라를 해침)의 도라 하여 강하게 배척했다. 결과적으로 주자학의 전파가 불교를 배척하려는 기류를 만들었다는 설은 설득력이 있는 듯하다. 여말선초 주자가례에 의해 가묘(家廟)를 세우고 상장제례(喪葬祭禮)에서 불교의 의식을 폐지하는 등 일련의 풍속 변화는 주자학의 대두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 



    박동춘 철학박사,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문화융성위원회 전문위원. 저서론 『초의선사의 차문화 연구』 『맑은차 적멸을 깨우네』 『우리시대 동다송』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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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茶)와 사람] 목은에게 茶의 의미는 이상향 찾는 내비게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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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최초 차 전문 전시회가 열린다

    서울 길상사 정묵당 5월 17일까지뉴스 차와문화l승인2015.05.04l수정2015.05.09 18:32



     

    차와문화 발행인을 역임한 전통덖음차제다교육원 원장 혜우스님이 국내 최초로 차 개인전을 연다. 이번에 전시하는 차의 종류는 총 16가지. 녹차에서부터 청차, 발효차까지 전체를 망라했다. 그 이름을 살펴보면 아직은 이른봄, 봄날에 꿈, 사시락, 홍류동차紅流洞茶, 황금단차黃金團茶, 청금단차靑金團茶, 죽통 죽로차, 죽통 추월차, 침향차, 부풍향차보칠향차 등이다.

    녹차와 황차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차입니다. 우리나라 차 농가 대부분들이 만들어서 차 애호가들에게 판매하는 명차입니다. 녹차인 ‘아직은 이른 봄’은 색, 향기, 미가 뛰어나며, 황차인 봄날에 꿈과 사시락은 풍부한 바디감과 기품있는 향을 선사할 것으로 기대된다.

    다음은 단차다. 혜우스님은 한국 차 산업의 위기를 타개하고 시장에 새로운 활력소로 제시한 것이 바로 단차다. 단차는 누구나 마실 수 있는 고품질의 발효차로 이른바 한국형 청차와 발효차랄 수 있다. 홍류동차紅流洞茶, 황금단차黃金團茶, 청금단차靑金團茶가 그 주인공으로 오랜 보관가치와 부드러운 맛으로 혜우스님의 30년 전통제다 노하우가 그대로 담겨 있다.

    홍류동차는 산화효소작용을 제다과정에서 촉진시켜 단차로 만들어 단맛이 많고 탕색이 붉어 가을 홍류동 계곡에 흐르는 단풍빛에 물든 고운 계곡물 느낌이 난다. 황금단차는 말 그대로 차의 탕색이 화려한 황금색입니다. 황금색 빛깔 속에 깊고 온유한 차 맛이 오랫동안 묻어난다. 청금단차는 말 그대로 차의 탕색이 마치 녹차같은 색깔이 난다. 차 맛 또한 초봄의 산뜻하고 청아한 향이 그대로 퍼져 나온다.

    죽통차인 죽통 죽로차, 죽통 추월차도 눈길을 끌 예정이다. 죽통차는 녹차류로 분류한다. 일쇄를 해 여러번 덖는다. 차의 성미를 다스려서 죽통속에 넣고, 뜨거운 열을 가해서 죽향을 입혔다. 전통의 방식이 아닌 현대적 방식으로 제다를 했다. 연한 죽향이 어우러진 녹차맛이 난다.

    마지막으로 침향차와 현대인들의 삶에 활력을 넣어줄 칠향차다. 침향차는 세상에 존재하는 최고의 약재로 불리는 침향를 섞어 만든 발효차로 침향의 약성과 찻잎의 약성이 만나 새로운 맛과 향을 지닌다. 칠향차는 부풍향차보에 나오는 칠향차를 현대적으로 재현한것이다. 각 차별로 특정 증상에 약효가 있는 차로 풍 맞았을風때 감국甘菊이나 창이자蒼耳子를 넣어 만든 감국차, 추울寒때 계피桂皮, 회향茴香을 넣어 만든 계피차, 더울暑 때 백단향白檀香, 오매烏梅를 넣어 만든 오매차, 열날熱때 황련黃連과 용뇌龍腦를 넣어 만든 황련차, 감기 들었을感때 향유와 곽향藿香을 넣어 만든 향유차, 기침할嗽때 상백피桑白皮와 귤피橘皮를 넣어 만든 귤피차, 체했을滯때 자단향紫檀香과 산사육山査肉을 넣어 만든 산사육차등이 그 주인공이다.

    이번 전시회와 함께 차를 맛볼 수 있는 대중적인 시음행사가 함께 열린다. 시음과 행사는 법정스님 영전에 생전에 좋아하던 아직은 이른 봄과 법정스님 잔으로 별명 붙여진 보원 김기철씨에 잔으로 대웅전에서 누구나 헌다를 할 수 있다. 대웅전 헌다는 김학동 작가의 작품으로 진행된다.

    혜우전통덖음차제다교육원을 운영하며 대한민국의 차농들에게 차 만드는 법을 전수하고 있는 혜우스님은 30년 넘게 우리전통의 차를 만드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차를 가마솥에 덖어서 녹차나 반발효차를 만드는 전통 덖음차 제다법을 비롯하여 , 맥이 끊어지다시피 한 전통 가루차 제다법 복원을 위해서도 힘쓰고 있다. 저서로는 <다반사><찻물기행><알고보면 쉬운 차>등이 있으며 한국차문화잡지인 <차와문화>발행인을 엮임했다.

    이번 혜우스님의 차 개인전은 한국차산업의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문의: 혜우전통덖음차제다교육원 010-9308-7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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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최초 차 전문 전시회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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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구(茶具)

    차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차와 다도(茶道), 그리고 다구(茶具)에 관심을 갖게 된다. 중국인들도 관심이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맛 좋은 차를 즐길 수 있는 3요소로 '좋은 물, 적절한 온도, 아름다운 다구(水好 火足 具美)'를 들었다. 여기에서는 다구가 언제부터 전용기(專用器)로 사용되었으며 어떻게 발전하였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1. 중국 최초의 전용(專用)다구                             2. 역대 다구의 변천

    1. 중국 최초의 전용(專用)다구

    다구는 대용(代用)에서 전용(專用)으로 발전하였다. 즉 차는 초기 음식기구를 사용해 마셨고 특별히 전용 다구는 없었다. 차 마시는 풍속이 성행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전용기가 등장하였던 것이다.

    고대(古代)에는 식기(食器)와 음기(飮器)를 겸용하였다. 춘추시대 기록에 차는 채소와 구별이 되어있지 않으므로 이때까지도 특별히 전용 용기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진한(秦漢)시대 최초로 전용 다구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한(漢)나라때의 사람 왕포(王褒)의 『동약』에“烹茶盡具”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이 글의 뜻은 ‘차를 끓이기 전에 몇가지 다구를 깨끗이 준비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具'는 다구로도, 일반 그릇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한대에는 자기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있었다. 자기 제작의 여건은 곧 전용 다구의 등장을 의미한다. 따라서 왕포의 기록이 최초의 전용 다구 사용을 의미한다고 할 수있다.

    동한(東漢)시대 다구를 전문제작하게 시작하였는데 근래 절강(浙江지역에서 출토된 동한자기(동한자기)는 세계 최초의 자기 다구이다.

     

    2. 역대 다구의 변천

    중국 다구의 발전은 도자기 산업의 발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중국에서 송대(宋代) 이전까지는 단차(團茶 떡차)가 주류였기 때문에 차를 마시려면 물을 끓이고 나서 다시 차를 끓여야 했다. 송대부터 소량의 산차(散茶 잎차)가 생산되기 시작해 명대(明代)에 이르면 중국인들은 대부분 산차를 마셨다. 산차를 마시기 위해서는 물만 끓이면 되었다.

    단차를 마시는데는 10여가지의 다구가 필요하였다.

    * 솥(釜, 요, 복, 甁) : 물을 끓이는 기구로, 한자 명칭은 부, 요, 복, 병 등 다양하지만 솥이나 냄비를 지칭하는 것으로 시대별로 크기와 모양의 차이가 있었다. 육우는  철제로 제작된 것이 적당하다고 하였지만, 송초(宋初) 도곡(陶穀)은 『청이록(淸異錄)』에서 은(銀)으로 만든 것이 으뜸이고 다음이 동(銅)으로 만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소식(蘇軾 1037∼1101)은 동과 철제는 물맛을 변하게 하므로 돌(石)로 만들 것이 최고라고 하였다. 소식의 의견이 과학적인 입장에서도 가장 타당하다. 『다록(茶錄)』을 쓴 채양(蔡襄)은 특히 물 끓이는 기구를 병(甁)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황금으로 만든 것이 상품이고 은제, 철제, 도자기제, 석제가 있다고 하였다. 병(甁)은 손잡이와 뚜껑, 주둥이가 있는 다구이고 부, 요, 복 등과 차이가 적지만 근대의 주전자와 비슷하다.

    * 침추(砧椎)와 차년, 차마(茶磨) : 침추는 덩어리 차를 부수는데 사용하는 다구로 다듬이 돌과 방망이를 연상하면 된다. 다듬이 돌에 해당되는 침은 나무로 만들고, 방망이에 해당되는 추는 금이나 철로 만들었다. 차년과 차마는 침추로 부수어낸 차 덩어리를 가는데 필요한 다구이다.

    * 차라(茶羅) : 차라는 갈아낸 차 가루를 곱게 걸어내는 망이다.

    다완(茶碗), 찻잔(茶盞) : 당대(唐代) 민간에서는 대부분 도자기로 된 다완을 사용하였다. 황실과 귀족들은 금속 다구나 당시 희귀한 비색(秘色)다구 및 유리(琉璃)다구를 사용하였다.

    * 차탁(茶托) : 차 그릇을 받치는 차 받침이다.

    * 차시(茶匙)와 차선 : 차시와 차선은 송대 음차법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다구로, 가루차를 거품이 나게 치는데 필요하다. 송대의 경우 차시는 황금으로 만든 것을 상등으로 쳤고 은제 철제가 있었다. 대나무로 만든 것은 하급으로 보았다.

    이밖에도 차검(茶鈐: 차를 구을 때 차를 집는 기구), 차추(혹은 차쇄: 가루차나 용기를 청소하는 솔), 차표(茶杓: 물을 뜨는 바가지), 차건(茶巾: 다기를 청결하게 하는데 쓰는 헝겊), 풍로, 도람(都籃: 다기를 보관하는 용기) 등 많은 기구들이 필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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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구(茶具)

    teastory.net/dagu.htm    서은미의 차 이야기






    혜우 스님, 茶 개인전 ‘피아골 홍류동차~’

    • 이강식 기자
    • 승인 2015.04.29 08:11



    '차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5월 15~17일 서울 성북동 길상사서
    칠향차ㆍ침향차 등 16가지 茶 전시

    전통차와 현대차, 지리산 피아골 홍류동차 등 차(茶) 전문가 스님이 직접 덖은 차를 선보이는 전시회를 마련해 눈길을 끈다.

    전통덖음차제다교육원장 혜우 스님은 5월 15~17일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 ‘전통차와 현대차 그리고 피아골 홍류동차 이야기’를 주제로 차 개인전을 연다. 개막식은 15일 오후 2시 길상사 정묵당.

    스님은 이번 전시회에 녹차 ‘아직은 이른 봄’, 황차 종류인 ‘봄날의 꿈’과 ‘사시락(四時樂)’, 단차 종류인 ‘홍류동차(紅流洞茶)’, ‘황금단차(黃金團茶)’, ‘청금단차(靑金團茶)’, 죽통차 종류인 ‘죽로’와 ‘추월’, 침향차, 부풍향차보, 칠향차 등 16종류의 차를 선보인다.

    전시회와 함께 시음행사도 진행된다. 또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있어 전시기간 내내 대웅전에서 누구나 헌다를 할 수 있다.

    혜우스님은 30여년 간 전통차 제다법을 연구해오고 있다. 혜우전통덖음차제다교육원을 운영하며 차농들에게 차 만드는 법을 전수하고 있다. 저서로는 <다반사>, <찻물기행>, <알고보면 쉬운 차>등이 있으며 한국차문화잡지인 <차와문화>발행인을 역임했다.

    이강식 기자  lks9710@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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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신문





    혜우스님, 차(茶) 개인전 연다

    5. 15.~17. 서울 성북동 길상사 정묵당 및 대웅전에서
    ‘전통차와 현대차, 그리고 피아골 홍류동차 이야기’ 주제로

    2015-04-30 (목) 22:12

    이학종 기자 | urubella@naver.com


    ‘국내 최초’ 차 개인전 ‘혜우스님의 전통차와 현대차 그리고 피아골 홍류동차 이야기’가 열린다.

     

    5월 15일부터 17일까지 서울 길상사 정묵당 및 대웅전에서 열리는 혜우 스님의 차 개인전 오프닝은 5월 15일 오후 2시 정묵당에서 열린다.

     

    두루 알다시피, 우리 차 문화와 산업은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조선시대부터 쇠락한 차문화와 산업은 1980년대에 들어서서 크게 발전했다. 그러나 한국차산업은 최근들어 정체상태에 있다. 외국에서 들어오고 있는 다양한 종류의 차를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내의 차 시장은 녹차와 황차 두 제품에 의존하고 있다. 한국차산업의 새로운 미래를 열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바로 다변화된 차를 통해 소비계층을 확대하는 것이라는 지적은 이런 이유에서 나온다.

     

    차만들기.jpg

    조계종 교육원 상설 연수교육 프로그램 '혜우스님 차만들기'에 참가한 스님들이 차를 만드는 모습.

     

    바로 이런 국내 차 시장의 단순성을 다변화시키기 위한 시도가 이번의 ‘혜우스님의 전통차와 현대차 피아골 홍류동차 이야기’이다. 전통덖음차제다교육원 원장 혜우 스님은 “이번의 차 개인전이 한국차산업의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전시회의 의미를 설명했다. “각 녹차농가들이 새로운 시도를 할 수 가 있고, 소비자가 선택할 수 있는 시장의 폭을 넓혀서 차 산업의 활성화를 꾀해 차 농가들의 소득증대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차 전시회에서 전시하는 차의 종류는 16가지에 이른다.

     

    ‘녹차-아직은 이른 봄’, ‘황차- 봄날의 꿈’, ‘황차- 사시락(四時樂)’, ‘단차- 홍류동차(紅流洞茶)’, ‘단차-황금단차(黃金團茶)’, ‘단차- 청금단차(靑金團茶)’, ‘죽통차-죽로’, ‘죽통차-추월’, ‘침향차’, ‘부풍향차보 칠향차’ 등이다.

     

    이번 차 전시에는 혜우스님의 30년 전통제다의 노하우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차들이라는 것이 주최측의 설명이다.
     
    이번 차 전시회에는 대중적인 시음회도 열린다. 



    혜우스님.jpg

    *혜우 스님은?
    혜우전통덖음차제다교육원을 운영하며 대한민국의 차농들에게 차 만드는 법을 전수하고 있는 혜우스님은 30년 넘게 우리전통의 차를 만드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차를 가마솥에 덖어서 녹차나 반발효차를 만드는 전통 덖음차 제다법을 비롯하여 , 맥이 끊어지다시피 한 전통 가루차 제다법 복원을 위해서도 힘쓰고 있다. 저서로는 <다반사><찻물기행><알고보면 쉬운 차>등이 있으며 한국차문화잡지인 <차와문화>발행인을 엮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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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뇌원차-용과 봉황의 무늬로 장식하고, 자금색 덩이차 백 개에 일만 금을

    ㅇㅇ(175.200) 2016.09.23 22:18:19
    조회 440 추천 4 댓글 4

    원작 쓰예는 가장 싫어하는 색이 검은색이고

    가장 싫어하는 향이 치자나무 향이며

    좋아하는 꽃은 수택목란이며

    좋아하는 과일은 포도며

    가장 기분 좋은 날씨는 가을 이슬비

    가장 싫어하는 날씨는 내리쬐는 태양

    이었는데


    왕소가 좋아하는 뇌원차에 대한 기록은 아래와 같네



    뇌원차(腦原茶)는 고려의 토산차로, 고려 성종(재위 981~997)때인 989년부터 문종(재위 1046~1083) 때인1049년까지 6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만 기록에 나타나는 차(김동곤, <다담설화>중에서 인용)라고 합니다.
    뇌원차는 문종 3년(1049)의 기록을 끝으로 도깨비같이 홀연히 사라져버렸다고 하는데요,
    <고려사>에 총 5번 기록되었다고 하는 뇌원차에 대해 잠깐 살펴보면
     
    '성종 8년(989) 수시중 최승로가 죽으니 왕이 매우 애통해하며 ... 베 1천 필, 보리 3백 석, 쌀 5백 석, 유향 1백 근, 뇌원차(차의 일종이다) 2백 각, 대차(大茶) 10근을 부의하였다.'
     
    '성종 14년(995) 4월에 평장사 최향이 죽으니 왕이 매우 애통히 여겨... 쌀 3백 석, 보리 2백 석과 뇌원차 1천 각을 부의하고 예로써 장례를 지내게 하였다.'
     
    '목종 원년(997) 7월, 대사령 서희가 죽으니 베 1천 필과 보리 3백 석, 쌀 5백 석, 뇌원차 2백 각, 대차 10근과 매향 3백 량을 부의하고...'
     
    등등의 기록이 있는데요, 아쉬울만큼 적은 분량의 기록이라 자세한 것을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 기록들로 몇 가지를 추정해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문일평 선생은 <차고사(茶古事)>에서 
     
    '그리고 뇌원차는 고려 성종 연간에 거란에 예물로 보냈으므로 토산차임이 틀림없으나 그 명칭의 유래를 알 수 없다 한다 '  하였고,
     
    차 연구가 김명배 선생은 <다도학>에서 뇌원차를
    '보르네오, 수마트라에서 전래된 용뇌(龍腦)의 향기를 차에 흡착시킨 착향차(着香茶)' 라고 추정했는데
    '송나라에서 용뇌의 착향차를 만든 시기(976~1053)와 거의 일치한다'고 하였습니다.
     
    조선 시대의 초의 선사는 <동다송>에서 
    '크고 작은 용단, 봉단은 정위가 만들기 시작해서 채군모가 완성하였다. 향기로운 약(香藥)을 섞어 덩이차를 만들고, 그 위에 용과 봉황의 무늬로 장식하였다. 임금에게 바치는 것은 금으로 장식하였다. 소동파의 시에, 자금색 덩이차 백 개에 일만 금을 들여서 만든다 하였다' 하고 
    뇌원차를 유추할 수 있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용단, 봉단은 흔히 용봉 단차라고 하는 것으로, 차에 용뇌를 섞어서 황실의 상징인 용과 봉황을 새기고 금으로장식한 진상 전용차였다고 합니다.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뇌원차는 거란에 조공으로 보내지기도 하고, 임금의 하사품으로 이용되기도 한 어용단차(御用團茶)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용뇌를 섞은 어용 단차처럼 호화로운 장식을 한 고급 단차였을 거라는 군요.
     
     이러한 여러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뇌원차는
    1. 덩이차(團茶, 餠茶)이고,
    2. 용뇌 향을 흡착시킨 착향차이며,
    3. 먹을 때는 곱게 가루 내어, 끓인 물을 부어 거품을 내어 휘저어 먹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용과 봉황의 무늬로 장식하고, 자금색 덩이차 백 개에 일만 금을 들여서 만들었다니...
    상상만 해도 후덜덜하지 않습니까? 


    뇌원차-용과 봉황의 무늬로 장식하고, 자금색 덩이차 백 개에 일만 금을 - 달의 연인-보보경심 려 갤러리







    용봉문양 불망비 앞에서/조윤수 2010-06-14 19:54:11
    crane43

    ■ 김학
    △《월간문학》등단
    △대표에세이문학회, 전북수필문학회, 임실문인협회, 전북문인협회 회장 역임
    △한국수필문학진흥회 이사.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부이사장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교수(수필창작 전담).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강사
    △전라북도 문화상(문학), 전북수필문학상, 신곡문학상 대상, 연암문학상 대상 외 다수 수상
    △방송수필집 『밤의 여로1』, 『밤의 여로2』 등
    △수필집 『철부지의 사랑연습』, 『춘향골 이야기』 외 다수
    조회:1201
    추천:57

    용봉문양 불망비 앞에서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금요반 조윤수
                                         
                                                                 

      
      뭉게뭉게 피어올랐던 꽃구름이 변하여 떡차[團茶] 덩어리가 되었나. 연초록 잎 무더기가 소복소복 담긴 듯한 싱그러운 5월의 산이다. 꽃잎을 여읜 꽃 꼬투리가 울긋불긋한 벚나무 가지에서 마지막 꽃잎들이 하르르 날리고 있다. 가고 또 가도 그리운 산길. 몇 겁 동안 피고 졌던 세월 속에 닦여진 오월의 투명한 빛살 속으로 들어간다.
       입하가 가까웠는데 이제야 차 순이 겨우 나오고 있다. 차신(茶神)들의 시샘인가, 아니면 벌써 다 마셔버렸나?  4월에 갑자기 엄습했던 추위가 몇 차례 거듭했던 탓이다. 겨우 두어 시간 동안 한 주먹쯤 잎을 따고 개울가로 내려가서 세심하고 점심을 먹었다. 싱그러운 작설(雀舌)을 먹고 또 먹어서 입안이 달콤하다. 이것만으로도 햇차 맞이는 충분하다. 차신(茶神)도 엄살이 심한데 난들 신이 날 리가 있는가. 

      누군가와 묵은 차라도 몇 잔 나누며 옛 이야기를 읊고 싶다. 차신도 내리지 않는 이런 날, 외롭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깊고 은은한 차 맛 같은 고독이 친구처럼 곁에 있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의 반대쪽으로 핸들을 돌리고 만다. 바로 익산 방향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함라면에 있다는 잠곡 김육(1580-1658)의 불망비를 찾아보려고 작정한다. 불현듯 옛사람의 덕이라도 기리고 싶다. 마치 잊어서는 안 될 옛 스승의 흔적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랄까. 익산 역에서 관광정보를 얻고 지도를 얻었다. 익산시 함라면 파출소 바로 뒷편에 김육(金堉)의 불망비가 있다. 연고도 없는 김육의 불망비가 왜 여기에 서 있는 것인가.  350여 년 전 김육의 숨결이 왜 이곳 함라 마을에 남아 있는가. 비란 그 지방민들이 그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워준 비석이 아니던가. 옛 사람들은 그를 잊지 못해 공덕비를 세웠건만 지금 사람들은 그를 잊고 있어 주변이 어수선하다. 오늘의 관리는 그 불망비의 위치도 모른다.
      김육은 충청도관찰사와 영의정까지 지낸 분이다. 도정을 펼치면서 대동법 시행을 관철하였고 수차를 만들어 보급하였다. 김육을 실학자라고 한 것은 백성들의 살림에 도움이 되는 화폐를 유통시키고 수레를 제조하였으며, 시헌력(時憲曆) 제정하고, 지식을 집대성한 백과사전 <유원총보(苑叢寶)>를 편찬하였기 때문이다. 정찬주씨의 <다인(茶人)기행>에서 알게 된 후부터 관심을 가졌다. <유원총보>는 47권 30책으로 37권은 음식을 집대성한 <음식문>인데, <차茶편>이 나온다고 한다. 그런 사실만으로도 나에게는 그분을 그리는 이유가 된다. <차편>에는 <다경>의 저자인 육우, 차의 효능, 차의 일화, 차세에 얽힌 얘기 등이 총 1천 7백 30여 자로 기록되어 그동안 접하지 못했던 흥미로운 정보를 준다.  김육보다 백년 앞선 이목李穆의 <다부(茶賦)>와 이백 년 후의 초의선사의 <동다송>이 차를 개인의 정서에 접목시킨 문학적인 다서(茶書)로 이미 알고 있지만, 이 책은 김육의 차에 관한 다양한 지식을 사전적으로 찾아볼 수 있도록 집필했다는 것이 새롭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사신으로 송나라와 명나라를 다녀온 사람들은 모두 중국의 앞선 문명과 차에 흠뻑 영향을 받고 돌아오기 때문에 김육 또한 다르지 않았다. 김육 이후 200년이 지나도록 아무도 뚜렷이 그의 문화의식과 백성들을 위한 개혁 정책을 잇지 못한 것 같다. 정조시대에 와서야 유형원을 이은 성호 이익과 그 뒤의 박지원, 박제가를 비롯한 정약용과 같은 실학자들에 의하여 김육의 실학정신은 그 맥을 이을 수 있게 되었다. 차문화도 초의스님과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에 이어져서 증흥을 맞았던 게 아닌가. 
      내가 특히 감명을 받은 것은 김육이 광해군 때에 자신의 포부를 펼칠 수 없게 되자, 경기도 가평군 잠곡에 내려가 10년 간 손수 농사를 지었다는 점이다. 김육은 인조반정 이후 관직에 진출하여, 백성과 나라를 위한 경세 이념을 다양한 정책으로 구현하여 추진하였다. 농사의 체험으로 농촌의 실정을 소상히 파악하게 되었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이로운 기구들을 개발하는 정책들을 구체화할 수 있었다. 그는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동전이 전국적으로 보급되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김육이 죽자, 대동법으로 혜택을 입은 충청도 주민들이 슬퍼하여 그의 공덕을 기리는 대동선혜비(大同宣惠碑)를 세웠다. 그것은 현재 경기도 평택시 소사동에 있다. 김육의 유수비는 개성의 선죽교에도 세워진 것이 있다고 한다. 효종임금도 대동법을 추진하던 지난날에, "김 영부사(領府事)가 홀로 담당하여 확고하고 흔들리지 않음으로써(堅確不撓) 성공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매번 생각할 때마다 잊지 못하여 김육처럼 확고한 인물을 얻기를 바라나, 어찌 얻을 수 있겠는가." 라고 탄식하였다고 한다.
           
      함라면 파출소를 찾아 뒤로 돌아가니 바로 조해영 가옥의 안내판이 먼저 나를 맞았다.  조해영 고택 옆에 김육의 불망비를 세운 것은 조해영의 조부 조용규가 농장을 경영하여 부를 쌓았으며 대동법을 제정한 영의정 김육의 불망비를 세우는데 공이 컸기 때문이다. 
      비석의 지붕은 없지만 이수의 조각이 예사롭지 않았다. 머리는 봉황이고 몸통은 뿔 없는 용이다. 한 쌍의 용봉문양이라고 해야 할까. 비석의 이수에 문양을 조각할 때 용봉차의 의미로 새긴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김육의 차에 대한 지식과 나의 관심이 맛닿아 용봉문양을 단차(團茶)와 연관짓게 한다. 단차 즉 떡차에 용봉문양을 새기면 용단봉병이 되었다. 용봉차의 시작이었다. 송나라 때는 단차를 만들고 숯불에 구워서 가루를 내어 마시는 말차가 유행하였다. 황제에게 용봉차를 공납하는 다원이 있었고 시장에서는 금보다 비싼 가격으로 팔리기도 했다. 그런 까닭으로 고려 때는 송나라의 영향을 받아 말차를 마실 수 있는 고려 청자 다완이 탄생되었다. 고려의 왕실 귀족들과 선비들이 송나라에서 수입한 도자기와 단차를 애용하여 고려의 임금도 신하에게 차를 하사하곤 했다.
      혹시 비석을 조각하는 사람이 용봉차에 대한 이력을 알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조선시대에 차문화가 쇠퇴하였지만 고려 때의 영향이 조선왕실에 이어지고 있었다. 김육도 명나라에 다녀왔기 때문에 차에 대한 지식을 집필하기도 하고 애용하면서 백성들에게도 알리고 싶어했을 것 같다. 함라 지방에 우리나라의 최북단 야생차 군락지가 있는 것을 보아서도 김육과 따로 떼어놓고 생각되지 않는다.

       예스런 돌담길을 걷는 동안 담장 밖을 기웃거리는 눈부신 탱자꽃과 수수꽃다리 향은 김육이 이곳에 머물렀을 그 시절로 나를 돌려놓고 묘감에 젖게 한다. 백성을 위한 일이라면 험난한 고통도 마다하지 않았던 경세가이자 도인이었던 그런 분을 오늘 같은 정치 현장에서도 찾을 수 있을까?  마을 곳곳의 돌담과 어울리는 예쁜 꽃밭이 5월의 초록빛과 어울려 사무치도록 영원의 빛에 대한 그리움을 일게 한다. 숙연한 마음으로 신차 맛 흐르는 5월 산을 통째로 바치고 싶다.  (2010년 5월 3일)

      

     


    용봉문양 불망비 앞에서/조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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