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당시 전국토의 인심을 풍미했던 영랑(永郞) 술랑(述郞) 남랑(南郞) 안상(安詳), 4선(仙)은 어디를 가나 늘 함께 하였다.
이 4선(仙)은 무릇 수천 년 우리 고대문화의 전통적 결정체(結晶體)이며, 나라의 정수(精髓)요, 정신의 중심(中心)이요, 무사(武士)의 혼(魂)이라 할 만한 영향력을 당시대 신라 사회에 끼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영랑(永郞)은 우리민족 고유의 선맥(仙脈)을 이어받은 인물이었다.
학(鶴)이 논 곳에 깃털이 남는다고, 4선(仙)이 노닐던 금강산과 관동팔경 동해안 일대에는 4선(仙)의 유적들이 지금까지도 남아 전해지고 있다.
1. 금강산의 사선봉(四仙峰)과 무선대(舞仙臺)
금강산 사선봉(四仙峰) 무선대(舞仙臺)에서 4선(仙)이 취무(醉舞)했다는 데서 유래하여 사선무(四仙舞)라는 춤이 유래되었다. 사선무(四仙舞)는 신라시대에 있던 궁중 무용의 하나로, 향악정재(鄕樂呈才)에 속한다.
이 사선무(四仙舞)는 고려로 이어지면서 팔관회(八關會)에서 사선악부(四仙樂部)와 용(龍)·봉(鳳)·상(象)·마(馬)·차선(車船)과 함께 선보이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순조 29년(1829) 6월에 ‘4선(仙)이 와서 노닐 만큼 태평성대’라는 내용의 노래를 부르며 사선무(四仙舞)를 추었다고 전해진다.
2. 강릉 경포대 한송정(寒松亭)
4선(仙)은 차(茶)의 달인이었다고 한다. 고려시대 문인 김극기(金克己,1148~1209)는 ‘한송정(寒松亭)’이란 시(詩)에서 4선(仙)의 차(茶) 생활을 노래하였다.
여기는 4선(仙)이 유람하던 곳
지금도 남은 자취 참으로 기이하구나.
주대(酒臺)는 쓰러져 풀 속에 묻히고
다(茶)조에는 내당굴 이끼 끼었구나.
역시 고려말 문인 이곡(李穀,1289~1351) 또한 『동유기(東遊記)』에서 ‘관동팔경을 유람중, 강릉의 경포대 한송정에서 4선(仙)이 차(茶)를 달이던 석조(돌부뚜막)와 석정(石井, 돌우물), 석구(石臼, 돌절구)를 보았다면서 이렇게 말을 잇는다.
’옛날에 4선(仙) 비(碑)가 석벽 위에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유적이 보이지 않는다. 동봉(東峯)에도 옛 비갈(碑碣)이 있는데, 비면(碑面)이 떨어지고 닳아져 한 자도 알 수가 없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신라 때 4선(仙)이 무리 3천 명과 더불어 와서 놀았다.”고 하니, 그 무리가 세운 것일까?’
《동문선(東文選)》에 보면 송나라 사람 호종단이 고려에 거짓 귀화하여 예종·인종 시대에 고관(高官)으로 등용된 뒤,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귀중한 화랑 국선들의 비갈(碑碣) 들을 쪼아버리고 혹은 파괴하며 심하면 바다 속에 침하(沈下) 인멸시켰다고 증언하고 있다.
조선 고종 때 윤종의(尹宗儀,1805~1886)는 강릉 부사로 부임하면서 ‘한송정신라선인영랑연단석구(寒松亭新羅仙人永郞鍊丹石臼)’라는 글자를 돌에 새겼다.
3. 강원도 고성(高城) 삼일포(三日浦)의 사선정(四仙亭)과 단서(丹書)
4선(仙)이 3일 동안 머물며 놀았다 하여, 이름이 삼일포(三日浦)가 되었다. 이 삼일포(三日浦)에는 사선정(四仙亭)이 있으며, 삼일포 남쪽 산봉의 돌벽에는 ‘영랑도남석행(永郞徒南石行)’이라는 6글자의 단서(丹書)가 붉은 글씨로 새겨져 있다. 해석하면 ‘영랑(永郞) 무리의 남석행’이 된다. 남석행(南石行)은 바로 남랑(南郞)으로서 영랑을 흠모하고 추종하던 무리였다.
또 조선 선조 때의 문인 송강(松江) 정철도 45세 되던 해에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관동팔경을 두루 유람하면서 이런 시(詩)를 지었다.
고성(高城)을 저만치 두고 삼일포(三日浦)를 찾아가니
영랑도남석행(永郞徒南石行) 마애단서(磨崖丹書) 바위에 뚜렷한데
영랑·남랑·술랑·안상 4선(仙)은 어디로 갔는가?
여기서 3일을 머문 후에 어디로 가서 또 머물렀을까?
선유담(仙遊潭), 영랑호(永郞湖), 그곳으로 갔을까?
4. 강원도 속초시 영랑호(永郞湖)
고려말 문인 근재(謹齋) 안축(安軸)은 ‘영랑호에 배 띄우고(永郞浦泛舟)’라는 시(詩)의 말미에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古仙若可作 옛 신선 다시 올 수 있다면
於此從之遊 여기서 그를 따라 놀리라.
이로 보아 영랑호(永郞湖)라는 이름은 최소한 고려시대까지 올라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속초의 영랑호(永郞湖)는 신라의 화랑 영랑(永郞)이 최초로 발견한 호수라 하여 그렇게 명명되었다고 한다.
4선(仙)이 금강산(金剛山)에서 수련을 하고 내려오면서, 고성(高城) 삼일포(三日浦)에서 3일 동안 놀았다. 그리고 무술대회 장소인 신라의 서울 금성(金城, 지금의 경주)에서 만나기로 하고, 각각 헤어져 따로따로 출발하였다. 아마도 무술대회를 앞두고 4선(仙)이 축지법 시합을 하였으리라.
그런데 영랑(永郞)은 가는 도중에 한 호수를 발견하였다. 호수의 풍경에 도취된 영랑은 시간가는 줄 모르고 무술대회조차 잊어버렸으니, 이 호수가 바로 영랑호(永郞湖)였다. 신선(神仙) 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는 것은, 선인(仙人)들 사이에는 흔히 있는 일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영랑호(永郞湖)를 선인(仙人) 영랑(永郞)이 놀며 구경하던 암석이 기기묘묘한 곳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이중환의《택리지》에도 구슬을 감추어둔 듯 신비롭고 아름다운 곳이라 표현하고 있다. 호수의 좁다란 입구를 통하여 동해와 연결되고 있으며, 이 위에 영랑교(永郞橋)가 놓여져, 강릉과 고성을 연결하는 국도가 통과한다.
《청학집(靑鶴集)》에 의하면 환인(桓因)과 환웅(桓雄)을 계승한 단군(檀君)은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선(神仙)이 되었고, 그 교훈은 결청지학(潔淸之學)으로 요약되어 문박씨(文朴氏)를 거쳐 신라의 영랑(永郞)에게 전해졌다고 한다.
영랑(永郞)은 나이가 90살이 되었어도 안색이 어린아이와 같았으며, 노우관(鷺羽冠)을 쓰고 철죽장(鐵竹杖)을 짚고 산수(山水) 사이를 소요하였다고 한다.
마한(馬韓)의 신녀(神女) 보덕(寶德)이 아침이슬처럼 사라져 갈 삶을 한탄하며 도(道)를 구하던 중, 스승 영랑(永郞)을 만나 도(道)를 이어받았다.
마한(馬韓)의 신녀(神女) 보덕(寶德)은 바람을 타고 다니며 거문고를 안고 노래를 불렀는데, 그 모습은 마치 가을 물의 부용과 같이 아름다웠다고 한다.
2011년 8월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배내골 계곡의 바위에서 영랑(永郞)과 보덕(寶德)으로 추정되는 남녀 신선(神仙)을 그린 암각화 선유도(仙遊圖)가 발견되었다.
역시 같은 고장인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川前里) 대곡천 바위에 새겨진 각석(刻石)에는 ‘戌年六月二日永郞成業’ 이라고 새겨진 글귀가 있는데, 1970년 12월 처음 발견되었고, 1973년 5월 4일자로 국보(國寶) 147호로 지정되었다. 풀이하면 ‘술년 6월 2일, 영랑 성업’이라는 글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