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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을 쌓아 두는 것보다 자선을 베푸는 것이 낫다”(토빗 12,8).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1984년부터 해마다 대림 제3주일을
‘자선 주일’로 지내기로 하였다. 자선은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한 가지 방법이며,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송두리째 내주신
성체성사의 나눔의 신비를 체험하게 하는 신앙 행위이다.
오늘 교회는 가난하고 병든 이들, 소외된 이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고, 특별 헌금을 통하여 자선을 실천한다.
교회는 자선이라는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을 통하여
다시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기다릴 수 있도록 준비시킨다.
오늘 전례
▦ 오늘은 대림 제3주일이며, 또한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이들을
기억하며 그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자선 주일입니다.
주님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다른 무엇보다도
이웃을 얼마나 사랑하며 살았는지를 물어보실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이야말로 그분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가장 큰 뜻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길을 닦아 사람들을 주님께 이끌었던 요한 세례자처럼,
우리의 사랑으로 더욱 많은 이가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귀향을 예언하며,
하느님의 백성이 시온에 모여 슬픔과 탄식을 딛고
기쁨과 즐거움으로 환성을 터뜨리게 될 것이라고 전한다(제1독서).
야고보 사도는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것을 기다리는 태도로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금의 상황이 전부가 아니라,
주님께서 언젠가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기 때문이다(제2독서).
요한 세례자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고백했지만(요한 1,34 참조),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는 의심을 품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구약의 위대한 예언자이기는 하지만,
신약의 새로움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고 말씀하신다(복음).
<하느님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35,1-6ㄴ.10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거워 뛰며 환성을 올려라.
레바논의 영광과, 카르멜과 사론의 영화가 그곳에 내려,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우리 하느님의 영화를 보리라.
너희는 맥 풀린 손에 힘을 불어넣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라.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여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복수가 들이닥친다, 하느님의 보복이!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주님께서 해방시키신 이들만 그리로 돌아오리라.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에 들어서리니,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굳게 가지십시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습니다.>
▥ 야고보서의 말씀입니다. 5,7-10
형제 여러분, 주님의 재림 때까지 참고 기다리십시오.
땅의 귀한 소출을 기다리는 농부를 보십시오.
그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맞아 곡식이 익을 때까지 참고 기다립니다.
여러분도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가지십시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습니다.
형제 여러분, 서로 원망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심판받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심판자께서 문 앞에 서 계십니다.
형제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말한 예언자들을 고난과 끈기의 본보기로 삼으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2-11
그때에 요한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그들이 떠나가자 예수님께서 요한을 두고
군중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고운 옷을 걸친 자들은 왕궁에 있다.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보라, 내가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요한 세례자가 감옥에서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질문하게 합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이미 요한은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 때에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오시기로 된 메시아,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깨닫고
그렇게 고백하였습니다(요한 1,32-34 참조).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그동안 하신 일을 전해 듣고 의심을 품은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요한 세례자는 메시아가 곧 오실 것이라고 전하면서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습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마태 3,11-12).
그러나 그가 강조했던 강력한 심판은 아직까지 없을뿐더러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과 세리들과 어울리셨습니다.
그러니 그에게는 예수님의 그러한 모습이 온전히 이해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요한 세례자를 두고 가장 위대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하늘 나라의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구약의 위대한 예언자이기는 하지만,
신약의 새로움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계를 지적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신약은 구약보다 한 단계 뛰어넘은 것입니다.
구약은 율법 준수에 따라 상벌을 결정하는 심판의 방식이었지만,
신약은 그 율법 안에 들어 있는 정신, 곧 사랑을 선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벌을 받아 마땅한 이들과도 함께 지내셨습니다.
신약의 새로움은, 이렇게 조건 없는 사랑을 보여 주신 예수님께 의지하며,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나누는 데에 있습니다.
-출처 매일 미사-
♬ When The Day Comes (그 날에 이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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