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2. 30. 22:07ㆍ경전 이야기
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인들은 당대 초기에 비단길을 통해 중국으로 들어왔다. 당나라는 중국의 오랜 역사 속에서 가장 찬란했던 왕조들 중 하나였다.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제국이 되었다. 중앙 아시아, 페르시아 그리고 인도와의 교역은 당의 보호하에서 번창했고, 수많은 외국인들이 비단길을 따라 수도인 장안으로 들어왔다. 군사력과 정치적 힘에 자신감이 있던 당의 왕실은 외국인들에 의해 전해지는 종교를 묵인했으며 후원하기까지 했다. 외국의 예술과 음악 역시 환영을 받았다. 당시 황제 자신이 종교를 연구하고 그것을 승인했다. 황제의 칙령으로 알로펜은 수도원 건축을 허락 받았고 포교 활동을 보장받았다. 당시 몇몇의 주요 도시들에 적어도 50개 이상의 교회가 세워졌다.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는 대체로 금욕주의적이었던 것으로 보여지며, 대개 서민들의 생활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지는 못했다.
AD 84년 황제의 칙령에 의해서 외래 종교의 수도원, 사원, 그 밖의 모든 재산들이 몰수당하고, 당의 쇠퇴기에 접어들면서 본국과의 지원도 끊어지고, 중국인 지도자들을세우지 않음으로 인해 중국인으로부터 고립되어 갔다. 10세기경 중국의 네스토리우스파 교회는 그 자취를 감추었다.
(2)원조(元朝:1279-1368年)∼송(宋)의 그리스도인
1280년경 몽골족은 위대한 징기스칸의 영도하에 동유럽에서 중국에 이르는 제국을 이룩하였다. 몽골족의 원나라는 1368년까지 지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인들은 중국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13세기초 로마카톨릭의 선교사들도 들어왔다. 이러한 선교활동들은 몽골 제국이 몰락하기까지 활발하였다. 몽골제국은 종교에 대해 비교적 관용했던 것에 주로 기인한다. 황제는 포고를 내려 모든 종교가 각기 나름대로 존중받을 것을 보장했다.
13세기 후반, 아득한 동방에 대한 로마의 관심은 마르코 폴로와 그의 삼촌들의 놀라운 중국 여행으로 인해 새롭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1266년 그들이 첫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그들은 교황에게 쿠빌라이 칸의 친서를 전달하였다. 그는 기독교를 잘 알고 있고 또 그것에 헌신한 사람들을 최소한 100명 이상 중국으로 보내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로부터 20년후 프란체스코파의 수도사인 몬테 코르비노 출신의 요한(John of Monte Corvino: 1247- 1328)을 중국에 보내고, 계속해서 교황은 로마 카톨릭의 세력을 확장시키기 위해 더 많은 프란체스코 선교사들을 보내 수 천 명을 회개시켰다. 1305년에 6천여 명의 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뻬이징에서 성당을 셋이나 세웠다. 송의 지도자들은 네스토리우스파와 프란체스코파 신자들을 추방하였고 또한 친 몽골파에 대한 적대감의 표현으로 그 종교의 개종자들을 몰아내었다.
(3) 명과 청대의 로마 가톨릭 선교
1582년에 드디어 마테오 릿치(Matteo Ricci: 1552-1610)는 중국 내에서의 예수회 선교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의 전략은 지식 계층의 호응을 얻게 되면 가난한 사람들이나 하층계급의 복음화도 가능하리라는 생각에 근거한 것이다. 릿치는 천문학, 수학' 시계수리, 지도제작 기술로 황제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베이징에 머물 수 있게되었고, 기독교 교회의 기반이 점차적으로 형성되었으며 중국의 기독교 문학이 발전해 갔다. 마침내 릿치는 2천여 명의 교인들과 기독교를 도와준 많은 영향력있는 학자들을 남겨 둔 채 1610년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이렇게 해서 처음으로 중국에 기독교회와 선교의 견고한 기초를 닦아 놓은 것이었다. 그후 2세기 동안 잦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중국에서 계속 뿌리를 내렸다. 청의 위대한 황제 강희제는 자신을 개인 교수하고 고위 관리들을 가르치게 하기 위해서 베르비스트를 초빙했다. 1692년에 황제인 강희제는 기독교의 법적인 지위를 보장하는 칙령을 공포하였다.
1674년 첫 번째 중국인 성직자인 로웬 챠오가 주교로 임명되었다. 다양한 교단의 중국에서의 성공은 서로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의식논쟁"은 일부 특정의 의식 즉, 조상숭배에 참석을 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하나님의 이란 용어를 중국식으로 예수회는 대개 "상제(上帝)"나 "천(天)"을 사용했던 반면, 도미니크파 선교사들은 "천주(天主)"가 하나님의 유일한 정확한 이름이라고 주장했다. 이 의례논쟁은 1645부터 1745년까지 계속된다. 이에 반작용으로 황제인 강희제는 릿치에의해 세워진 강령에 위배된 선교사들은 남아 있을 수 있었고, 후계자인 건륭제가 기독교를 반대하는 포고를 내림으로 선교사들은 추방되거나 은신했다. 서양 및 중국인 성직자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은밀하게 복음을 전했다. 신자들은 순교당하고 교인들은 흩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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