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테아라로아 트레일
2014. 1. 9. 03:49ㆍ여행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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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공개] 뉴질랜드 테아라로아 트레일
길고 흰 구름의 땅, 그 속살을 들여다 보다 월간마운틴 글·사진 앤드류 더치 입력 2014.01.08 11:44 수정 2014.01.08 11:49 뉴질랜드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테아라로아 트레일(Te Araroa trail)이 2011년에 개통되었다. 총 길이 3000km에 달하는 이 하이킹 코스는 해변, 강, 호수, 숲, 암봉, 고봉 등 다양한 지형을 지나게 된다. 뉴질랜드 출신인 앤드류 더치(Andrew Douch)는 국내에 10여년 이상 거주하며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을 종주하고 경상도 일대의 산을 두루 섭렵했다. 스스로를 '방랑자(Mountain Bum)'라 칭하는 필자는 지난해 10월 말경에 고향으로 돌아가 테아라로아 트레일 종주를 시작했으며, 약 5개월 뒤에 뉴질랜드의 최남단인 블러프에 도착할 예정이다. 그의 여정은 <월간 마운틴>을 통해 5회에 걸쳐 연재된다.
뉴질랜드 최북단 레잉가에서 오클랜드까지…약 600km
뉴질랜드 북섬에서도 제일 북쪽으로 뾰족하게 뻗은 레잉가 곶(Cape Reinga)에 도착했을 땐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이른 아침 버스로 오클랜드 시를 출발하여 아일랜즈 만(bay of Islands)에 도착한 뒤 지역 교통편을 이용하여 북쪽으로 200km를 더 갔다. 최북단 레잉가 곶으로 가는 마지막 지역은 모래 언덕과 울퉁불퉁한 화산암으로 되어있으며, 폭이 좁다. 그 서쪽으로는 태즈먼 해(Tasman Sea)가 그리고 동쪽으로는 태평양이 뻗어있고, 거대한 두 바다의 해류가 이 곶에서 부딪혀 흰 파도를 일으키며 북쪽으로 푸른 심연을 품은 망망대해가 펼쳐져있다.
우리의 가이드는 이 지역에 사는 마오리(Maori)족 부부인데, 그들에게는 이 땅이 매우 신성한 곳이다. 13세기 그들의 선조가 배를 타고 광활한 태평양을 남하하여 뉴질랜드에 왔을 때 처음으로 이곳을 보게 되었다. 그들 선조들의 이 대규모 이주 항해는 오늘날의 달 착륙에 비견될 수 있을 정도로 당시의 기술로는 엄청나게 큰 사건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죽은 마오리족 사람의 영혼은 이승을 떠날 때 이 북쪽으로 와서 바다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옛 고향인 하와이이키(Hawaiiki)로 돌아간다고 한다.
곶의 절벽 위에는 북섬의 현대적 상징인 레잉가 등대가 우뚝 서있고, 전 세계의 주요 지점의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있다. 런던, 밴쿠버, 뉴욕, 파리, 도쿄 등은 모두 북쪽 방향이고 남쪽을 향한 단 하나의 지명은 '블러프(Bluff)'다. 블러프는 뉴질랜드의 최남단으로, 레잉가에서부터의 직선거리는 1407km다. 하지만 하이킹 코스는 직선이 아니기 때문에, 테아라로아 트레일은 총 3000km에 달하며, 그것을 완주하는데 평균 5개월이 소요된다. 대개의 하이커들은 '긴 오솔길(the Long Pathway)'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는 이 트레일을 남반구의 여름이 시작되는 10월 하순에 출발하여 해를 등지고 걷는다. 그들이 남알프스(뉴질랜드 남섬의 남북으로 뻗은 높은 산맥. 1770년 쿡 선장 일행이 이곳을 발견했을 때부터 이렇게 불렀다. 3754m의 마운트 쿡(Mt.Cook) 등 해발 3천미터를 넘는 고봉이 18개나 있다)의 고봉들과 강들에 도달할 때쯤에는 남알프스 고지대의 눈이 녹고 없다.
우리는 뉴질랜드의 남쪽 끝, 즉 블러프에 가기 위해 이곳 레잉가에 온 것이다. 이번 도보 여행의 동반자는 미국의 애팔래치안 트레일 (미국 동부 애팔래치아 산맥을 따라가는 길이 3500km의 등산로)과 한국의 백두대간을 종주한 미국인 베테랑 하이커로, 강력한 체력의 소유자인 그는 먼 길의 자유로움을 즐기는 사람이다. 필자 또한 한국에서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의 장거리 산행에 심취하여 영남알프스와 강원도의 산들을 넘어 다니면서 다리를 튼튼하게 단련했으므로, 이번 뉴질랜드 종주 하이킹을 위해 잘 준비한 것으로 생각한다. 13년 동안 한국에서 살아온 나는 이번 하이킹을 통해 고향에도 가보게 되었다.
밀물 때는 모래 언덕, 썰물 때는 평평한 대로?
우리의 첫 달 하이킹 코스는 레잉가 곶을 출발해 노슬랜드(Northland)를 지나 국제적으로 유명한 도시인 오클랜드(Auckland city)에 도달하는 코스로, 약 600km에 이른다. 이 지역은 아름다운 흰 모래 사장과 오래된 숲으로 유명하다. 레잉가 곶에 도착한 다음 날, 우리는 아침 일찍 출발기점인 등대에서 시작하여 4일 동안 모래사막언덕과 '90마일비치(90miles beach)'로 알려진 넓은 모래밭을 지나갔다. 북섬의 서북 해안에 있는 뉴질랜드 최장의 이 해변은 명칭과는 달리, 실제 길이는 약 88km 밖에 되지 않는다. 이곳의 넓은 황금빛 모래밭은 휴식을 즐기는 관광객에게 인기 있는 명소다. 그리고 어부들은 거대한 도미를 잡기 위해 파도에 낚싯줄을 드리우고, 썰물 때 모래에 많이 있는 홍합, 전복, 가리비 등 조개류를 잡는다. 서퍼들은 태즈먼 해의 사나운 파도를 즐기며, 사구에서 말을 타고 달리는 사람도 있으며, 관광객들은 썰물 때 해변을 따라 차를 몰기도 한다. 해변이 공식적으로 도로로 인정되어 심지어 매일 대형 관광버스가 이곳을 달려 레잉가로 간다.
단단하고 평평한 모래밭을 걸어 트레킹을 시작하는 것이 우리에게 좋을 듯싶었다. 높은 산을 등산하지 않고 먼 거리를 갈 수 있으며, 그동안 우리는 큰 배낭의 무게에 익숙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그것이 쉬운 산책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썰물 때는 이 해변이 넓고 평평한 대로가 되지만, 조수가 점점 밀려와서 단단한 모래 위를 수백 미터 덮고 나중에 연한 모래 언덕들을 때리게 되면 태즈먼 해의 위력이 분명해진다.
첫날 의욕이 넘친 우리는 썰물 때만 걷지 않고, 일찍 일어나 오전 9시부터 5시까지 하이킹을 감행하면서 낮에 내내 걷는 과오를 범했다. 썰물 때에는 한 시간에 5km를 여유 있게 걸을 수 있지만, 밀물 때에는 연한 모래를 밟아야하기 때문에 2km 가기도 힘들었다. 가끔 큰 파도가 몰아쳐 피할 틈도 없이 물에 흠뻑 젖기도 했다. 우리는 오후 내내 파도를 피하려고 애쓰다가 옷이 흠뻑 젖고 지친 몸으로 모래밭 밖의 캠프장에 도착했다. 이후 계획을 변경해 나머지 날들에는 이른 오전과 이른 오후 두 차례의 썰물 때에만 걸었다.
조수와 기후가 완벽할 때 90마일비치를 하이킹하는 것은 매혹적이다. 저 멀리로 흰 파도 층들이 높이 보이며, 두 시간 간격으로 관광버스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옆을 달려간다. 모래가 끝없이 뻗어있는 남쪽 멀리에 신기루가 보이고, 젖은 모래는 거울이 되어 해안을 따라 뻗은 긴 흰 구름을 반사하고 있었다(뉴질랜드를 일컬어 '길고 흰 구름의 땅(the Land of the Long White Cloud)'이라고도 한다). 이 해변에는 많은 종류의 바닷새가 서식하고 있다. 가마우지들은 날기도 잘하지만 수영도 선수여서 파도 위로 높이 날았다가 어뢰처럼 물속으로 잠수해 물고기를 잡는다. 검은색과 오렌지색의 검은머리물새들은 모래언덕으로 돌아다니면서 하이커를 포함한 예상 침입자들로부터 둥지를 열심히 지킨다. 이 새들은 사람을 보면 신나는 춤과 관심을 끄는 소리로 유인하여 새끼들한테서 멀어지게 한다. 뿐만 아니라 해변에서는 물개들도 흔히 볼 수 있다. 그들은 끊임없이 요동치는 파도에 지친 듯, 사구에서 흘러내리는 담수에서 쉬고 있었다. 해변은 순수한 자연이며 인간의 영향은 안전한 사구 너머에서만 볼 수 있지만, 아주 드물게는 쓰레기가 바다를 넘어오기도 한다. 공해에서 조업하는 한국과 중국 어선에서 버려진 빈 소주병과 고량주병 등이 보이고, 부표들이 먼 항구에서 쓸려오기도 한다.
모래사장의 끝에는 아히파라(Ahipara) 마을에서 서쪽으로 뻗어 나온 갑(岬)이 있다. 아히파라 마을은 작은 어촌으로, 이곳 주민들은 90마일 해변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ATV 대여, 승마, 낚시 관광, 서핑 교습 등을 하는 것으로 돈벌이를 한다. 마을의 한 식당에서는 내가 먹어본 중에서 가장 맛있는 도미 버거(snapper burger)를 팔고 있었다. 이것은 뉴질랜드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큰 햄버거 빵 사이에 비트루트, 양파, 토마토, 양상추 등을 곁들이고 튀긴 생선 덩어리를 넣은 것이다. 시원한 맥주와 함께 버거를 먹으니, 다음 걷기를 위한 완벽한 영양이 채워지는 듯했다.
원시 자연림에 울려 퍼지는 새들의 지저귐
90마일 비치의 남쪽은 걷기가 매우 힘든 곳이다. 큰 강들이 태즈먼 해로 흘러들고 있고, 남쪽으로 가면서 높은 절벽들이 자주 나타났다. 그래서 테아라로아 트레일은 이제 해변을 떠나 내륙으로 들어가는데, 네 개의 산악 산림공원을 가로지른 뒤 아일랜즈 만의 동쪽 해변에 도착한다. 우리는 헤레키노(Herekino) 안부의 숲에 들어갔다. 숲에 들어서자 해변으로 내려가는 고개가 나왔는데, 이 고개는 마오리 족 망자의 넋이 저승으로 가기 전에 쉬어가는 곳이라고 전해진다. 고개에는 망자의 명복을 빌고 그들의 북행을 도와주는 13개의 토템 폴이 세워져있다.
노슬랜드의 자연림에는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 중의 하나인 거대한 카우리 소나무가 많이 있다. 이 소나무의 첫 조상은 쥐라기 때 진화한 것으로 여겨지며, 대부분 직경 5m가 넘고 수명은 2천년을 넘는다. 불행히도 뉴질랜드의 초기 식민지 시대에 사람들의 단견으로 이 나무가 많이 벌목되어 사라졌으나, 이곳에는 일부가 남아있다. 자연림 안에는 다른 나무들도 많았는데, 토착종인 포도카르프, 적송, 양질의 꿀로 유명한 마누카, 목생 고사리 등이 있다. 높이가 10m 이상 자라는 이 나무들은 커다란 양산이 되어 이끼와 곰팡이류가 가득 찬 덤불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숲에는 또한 뉴질랜드 특유의 독특한 새 울음소리가 요란하다. 뉴질랜드에는 박쥐를 제외하고는 토착 육식 포유류가 없었는데, 지난 2세기 동안 고양이, 족제비, 팔란저(쥐의 일종) 등이 들어오면서 토착 동물들이 수난을 당하여 개체수가 크게 줄었다. 그러나 이제 민감한 토착 새들은 이들 포식자들에게 선전포고를 발령하고, 느리지만 착실하게 개체수를 늘리고 있다. 노슬랜드의 숲 전역에서 우리는 노래를 잘 부르는 투이와 벌레를 먹는 팬테일드를 볼 수 있었고, 숲 비둘기인 녹색의 케레루도 만났다. 밤에는 으스스한 부엉이 소리 그리고 뉴질랜드의 상징인 키위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렸다. 가끔 덤불에서 거대한 귀뚜라미도 만날 수 있었다.
장애물을 만나거든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건너라!
숲을 빠져 나온 후 온화한 초여름 날씨를 보이는 동쪽 해안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는 고지대의 양 목장과 소목장을 가로지르게 되었다. 우리는 가축 사이로 걸어가면서 가끔 지나치게 호기심을 보이거나 흥분해있는 망아지들을 등산지팡이로 때리면서 쫓았다. 지대가 낮아지자 아보카도 과수원과 올리브 과수원이 나왔고, 곧이어 활기찬 해안 마을인 케리케리(Keri Keri)에 들어갔다. 우리는 와이탕이(Waitangi), 파이히아(Paihia), 러셀(Russell) 등 아일랜즈 만 일대를 돌면서 해안을 걸었다.
와이탕이에 있는 트리티 하우스(Treaty House)는 뉴질랜드를 영국의 식민지 국가로 귀속시킨 '와이탕이 조약'이 서명된 역사적인 장소. 1840년 대영 제국 대표들과 뉴질랜드 전역에서 온 마오리족 추장들이 이 조약에 서명함으로써 영국의 뉴질랜드 총독이 임명되고, 마오리족에게 아직 팔지 않은 토지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영국민의 권리를 주었다. 트리티 하우스 주변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우리는 이 숲을 따라서 해변 도로에 있는 옛 정착촌과 건축역사박물관을 지나 만의 남쪽 끝에 있는 항구에 도달했다. 이곳은 당일치기 하이커와 관광객에게 매우 인기 있는 곳이어서, 무거운 배낭을 메고 더럽고 낡은 옷을 입은 우리의 모습이 많은 보통 관광객들로부터 관심을 끌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해변 길을 넓게 비켜주고 우리의 하이킹 장정을 격려하고 축하해주었다.
하지만 이 항구가 우리의 여정에 첫 번째 장애물이 될 줄이야. 이곳에서부터 내륙 깊숙한 곳까지 조수 습지를 형성하고 있어, 우리는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테아라로아 트레일의 규정에는 '수중 장애물(water-obstacle)을 돌아가지 말고,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횡단하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다른 하이커들과 비용을 공동 부담해 수상택시를 빌려 타고 10km의 바다를 넘어 다음 행선지에 도달했다.
테아라로아 트레일은 조성된 지 불과 2~3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인기가 급속히 늘고 있어 이번 시즌에 약 70~80명이 참여했고 그들 대부분은 완주할 계획이다. 우리 그룹은 9명인데, 호주인 2명, 독일인 2명, 프랑스인 2명, 미국인 1명, 벨기에인 1명 그리고 뉴질랜드인 1명이었다. 테아라로아 트레일 전체의 약 7%가 도로 걷기 구간인데, 이 구간은 특히 많은 부분을 도로에서 걸어야 한다. 지형과 사유지 문제로 다른 길을 만들 수 없기 때문. 많은 하이커들이 도로 걷기를 기피하지만, 우리 그룹은 순수파여서 모든 구간을 걷기로 결의했다.
가족과 함께 맞을 크리스마스를 기대하며
우정과 동지애로 도로 걷기가 빨리 지나가고, 오클랜드 시로 들어가는 긴 해안으로 들어섰다. 처음에는 높은 절벽을 따라가는 아름다운 길이고, 다음은 목가적인 해변을 바라보면서 숲, 농장 그리고 별장들이 많은 조용한 해안마을을 지났다. 그 마을에는 거대한 포후타카와 나무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크리스마스가 여름인 뉴질랜드에 때맞추어 화사한 붉은 꽃을 활짝 피우고 있었다.
완만하던 길은 왕가레 시(city of Whangarei)에 접근할수록 점점 경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곳에는 인상적인 모양의 날카로운 바위산이 해면 위로 400m 이상 솟아, 도시 주위에 돌출부와 천연 항구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 암봉들과 동쪽 인근의 섬들은 약 2천만 년 전에 폭발한 화산의 결과물이다. 이 암봉들은 전체 트레일 중에서도 아주 스릴 있는 등반 코스가 된다. 우리는 마나이아산(Mt. Manaia) 옆 돌출부의 날카로운 능선에 올랐다. 옛날 추장들의 매장지였던 이 암봉들은 노슬랜드에서 가장 신성시 여겨지는 곳이기도 하다. 태평양의 따스한 물과 영양분이 풍부한 화산섬들, 그리고 돌출부가 만나는 이 일대는 뉴질랜드에서 가장 유명한 어장을 이루고 있다. 어부들은 근해에서 많은 왕어와 녹색치 등의 큰 물고기를 잡는다. 우리는 조용한 후미에서 야영을 하고 다음 날 아침 낚싯배를 전세 내어 타고 항구를 건너갔다. 항구에서는 낚시를 위한 대여선들이 많이 운영되고 있었다.
이제 우리는 며칠만 열심히 걸으면 오클랜드 시에 도착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더운 물 샤워, 국제적인 음식, 도시의 즐거움 등을 생각하면서 잠자리에 들고, 다음 날 열심히 걸었다. 체력 또한 더 강해져, 우리가 목표한 하루 평균 거리인 20km 정도는 가뿐하게 걸을 수 있었다. 흰 모래 해변을 한참 걸은 뒤 내륙으로 들어가 낮은 산길을 올랐다. 이 산길은 세계최고봉인 에베레스트(8848m)의 초등자이자 뉴질랜드의 영웅인 에드먼드 힐러리 경이 2001년에 개통시켰다. 테아라로아 트레일 중 가장 먼저 제안된 코스이지만, 공식적으로 트레일로 인정된 것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뒤였다. 여기서 우리는 이 트레일의 마지막 카우리 소나무 숲을 지나면서 거대한 나무들에게 작별 인사를 전하고, 농경지를 횡단하여 다시 해변으로 갔다.
우리는 오클랜드로 가기 위해 태평양 해안을 따라 하루에 30km씩 걸으면서 도시 북쪽 교외에 있는 15여개의 해변을 지나갔다. 우리가 이 부분을 하이킹한 날은 남반부 여름의 첫 일요일로,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었다. 덕분에 '돛의 도시(The city of Sails)'라고 불리는 오클랜드가 왜 세계에서 아주 살기 좋은 곳으로 손꼽히는지를 쉽게 알 수 있었다. 조용한 바다는 요트, 카약, 수상 스키어, 낚시꾼, 수영객 등으로 붐볐으며, 모래밭에서는 축구, 크리켓, 럭비 등의 운동이 펼쳐지고 있었고, 바비큐 냄새가 여기저기서 풍겨왔다. 해변을 지나 데본 항(Devon port)에서 배를 타고 항구를 건너 바다와 작별한 뒤, 우리는 오클랜드 시의 번화한 도심지에 도착했다.
다음 달에는 농경지가 있는 북섬의 내륙을 지나 높은 화산 고원지대에 가고, 내 고향에 가서 가족과 함께 여름 크리스마스를 보내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지금은 우선 편히 쉬면서 다소나마 도시 생활을 즐겨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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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질 무렵 썰물 때 90마일 비치를 걷고 있는 필자. 썰물 때에는 한 시간에 5km를 여유 있게 걸을 수 있지만, 밀물 때에는 연한 모래를 밟아야하기 때문에 2km 가기도 힘들다.
뉴질랜드 최북단 레잉가에서 오클랜드까지…약 600km
뉴질랜드 북섬에서도 제일 북쪽으로 뾰족하게 뻗은 레잉가 곶(Cape Reinga)에 도착했을 땐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이른 아침 버스로 오클랜드 시를 출발하여 아일랜즈 만(bay of Islands)에 도착한 뒤 지역 교통편을 이용하여 북쪽으로 200km를 더 갔다. 최북단 레잉가 곶으로 가는 마지막 지역은 모래 언덕과 울퉁불퉁한 화산암으로 되어있으며, 폭이 좁다. 그 서쪽으로는 태즈먼 해(Tasman Sea)가 그리고 동쪽으로는 태평양이 뻗어있고, 거대한 두 바다의 해류가 이 곶에서 부딪혀 흰 파도를 일으키며 북쪽으로 푸른 심연을 품은 망망대해가 펼쳐져있다.
우리의 가이드는 이 지역에 사는 마오리(Maori)족 부부인데, 그들에게는 이 땅이 매우 신성한 곳이다. 13세기 그들의 선조가 배를 타고 광활한 태평양을 남하하여 뉴질랜드에 왔을 때 처음으로 이곳을 보게 되었다. 그들 선조들의 이 대규모 이주 항해는 오늘날의 달 착륙에 비견될 수 있을 정도로 당시의 기술로는 엄청나게 큰 사건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죽은 마오리족 사람의 영혼은 이승을 떠날 때 이 북쪽으로 와서 바다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옛 고향인 하와이이키(Hawaiiki)로 돌아간다고 한다.
↑ 레잉가 곶에서 테아라로아 트레일의 남쪽을 바라본 광경. 레잉가 곶의 서쪽은 태즈먼 해(Tasman Sea)가, 동쪽으로는 태평양이 뻗어있다. 거대한 두 바다의 해류가 이 곶에서 부딪혀 흰 파도를 일으키며 북쪽으로 푸른 심연을 품은 망망대해가 펼쳐진다.
곶의 절벽 위에는 북섬의 현대적 상징인 레잉가 등대가 우뚝 서있고, 전 세계의 주요 지점의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있다. 런던, 밴쿠버, 뉴욕, 파리, 도쿄 등은 모두 북쪽 방향이고 남쪽을 향한 단 하나의 지명은 '블러프(Bluff)'다. 블러프는 뉴질랜드의 최남단으로, 레잉가에서부터의 직선거리는 1407km다. 하지만 하이킹 코스는 직선이 아니기 때문에, 테아라로아 트레일은 총 3000km에 달하며, 그것을 완주하는데 평균 5개월이 소요된다. 대개의 하이커들은 '긴 오솔길(the Long Pathway)'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는 이 트레일을 남반구의 여름이 시작되는 10월 하순에 출발하여 해를 등지고 걷는다. 그들이 남알프스(뉴질랜드 남섬의 남북으로 뻗은 높은 산맥. 1770년 쿡 선장 일행이 이곳을 발견했을 때부터 이렇게 불렀다. 3754m의 마운트 쿡(Mt.Cook) 등 해발 3천미터를 넘는 고봉이 18개나 있다)의 고봉들과 강들에 도달할 때쯤에는 남알프스 고지대의 눈이 녹고 없다.
우리는 뉴질랜드의 남쪽 끝, 즉 블러프에 가기 위해 이곳 레잉가에 온 것이다. 이번 도보 여행의 동반자는 미국의 애팔래치안 트레일 (미국 동부 애팔래치아 산맥을 따라가는 길이 3500km의 등산로)과 한국의 백두대간을 종주한 미국인 베테랑 하이커로, 강력한 체력의 소유자인 그는 먼 길의 자유로움을 즐기는 사람이다. 필자 또한 한국에서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의 장거리 산행에 심취하여 영남알프스와 강원도의 산들을 넘어 다니면서 다리를 튼튼하게 단련했으므로, 이번 뉴질랜드 종주 하이킹을 위해 잘 준비한 것으로 생각한다. 13년 동안 한국에서 살아온 나는 이번 하이킹을 통해 고향에도 가보게 되었다.
밀물 때는 모래 언덕, 썰물 때는 평평한 대로?
우리의 첫 달 하이킹 코스는 레잉가 곶을 출발해 노슬랜드(Northland)를 지나 국제적으로 유명한 도시인 오클랜드(Auckland city)에 도달하는 코스로, 약 600km에 이른다. 이 지역은 아름다운 흰 모래 사장과 오래된 숲으로 유명하다. 레잉가 곶에 도착한 다음 날, 우리는 아침 일찍 출발기점인 등대에서 시작하여 4일 동안 모래사막언덕과 '90마일비치(90miles beach)'로 알려진 넓은 모래밭을 지나갔다. 북섬의 서북 해안에 있는 뉴질랜드 최장의 이 해변은 명칭과는 달리, 실제 길이는 약 88km 밖에 되지 않는다. 이곳의 넓은 황금빛 모래밭은 휴식을 즐기는 관광객에게 인기 있는 명소다. 그리고 어부들은 거대한 도미를 잡기 위해 파도에 낚싯줄을 드리우고, 썰물 때 모래에 많이 있는 홍합, 전복, 가리비 등 조개류를 잡는다. 서퍼들은 태즈먼 해의 사나운 파도를 즐기며, 사구에서 말을 타고 달리는 사람도 있으며, 관광객들은 썰물 때 해변을 따라 차를 몰기도 한다. 해변이 공식적으로 도로로 인정되어 심지어 매일 대형 관광버스가 이곳을 달려 레잉가로 간다.
단단하고 평평한 모래밭을 걸어 트레킹을 시작하는 것이 우리에게 좋을 듯싶었다. 높은 산을 등산하지 않고 먼 거리를 갈 수 있으며, 그동안 우리는 큰 배낭의 무게에 익숙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그것이 쉬운 산책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썰물 때는 이 해변이 넓고 평평한 대로가 되지만, 조수가 점점 밀려와서 단단한 모래 위를 수백 미터 덮고 나중에 연한 모래 언덕들을 때리게 되면 태즈먼 해의 위력이 분명해진다.
첫날 의욕이 넘친 우리는 썰물 때만 걷지 않고, 일찍 일어나 오전 9시부터 5시까지 하이킹을 감행하면서 낮에 내내 걷는 과오를 범했다. 썰물 때에는 한 시간에 5km를 여유 있게 걸을 수 있지만, 밀물 때에는 연한 모래를 밟아야하기 때문에 2km 가기도 힘들었다. 가끔 큰 파도가 몰아쳐 피할 틈도 없이 물에 흠뻑 젖기도 했다. 우리는 오후 내내 파도를 피하려고 애쓰다가 옷이 흠뻑 젖고 지친 몸으로 모래밭 밖의 캠프장에 도착했다. 이후 계획을 변경해 나머지 날들에는 이른 오전과 이른 오후 두 차례의 썰물 때에만 걸었다.
조수와 기후가 완벽할 때 90마일비치를 하이킹하는 것은 매혹적이다. 저 멀리로 흰 파도 층들이 높이 보이며, 두 시간 간격으로 관광버스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옆을 달려간다. 모래가 끝없이 뻗어있는 남쪽 멀리에 신기루가 보이고, 젖은 모래는 거울이 되어 해안을 따라 뻗은 긴 흰 구름을 반사하고 있었다(뉴질랜드를 일컬어 '길고 흰 구름의 땅(the Land of the Long White Cloud)'이라고도 한다). 이 해변에는 많은 종류의 바닷새가 서식하고 있다. 가마우지들은 날기도 잘하지만 수영도 선수여서 파도 위로 높이 날았다가 어뢰처럼 물속으로 잠수해 물고기를 잡는다. 검은색과 오렌지색의 검은머리물새들은 모래언덕으로 돌아다니면서 하이커를 포함한 예상 침입자들로부터 둥지를 열심히 지킨다. 이 새들은 사람을 보면 신나는 춤과 관심을 끄는 소리로 유인하여 새끼들한테서 멀어지게 한다. 뿐만 아니라 해변에서는 물개들도 흔히 볼 수 있다. 그들은 끊임없이 요동치는 파도에 지친 듯, 사구에서 흘러내리는 담수에서 쉬고 있었다. 해변은 순수한 자연이며 인간의 영향은 안전한 사구 너머에서만 볼 수 있지만, 아주 드물게는 쓰레기가 바다를 넘어오기도 한다. 공해에서 조업하는 한국과 중국 어선에서 버려진 빈 소주병과 고량주병 등이 보이고, 부표들이 먼 항구에서 쓸려오기도 한다.
모래사장의 끝에는 아히파라(Ahipara) 마을에서 서쪽으로 뻗어 나온 갑(岬)이 있다. 아히파라 마을은 작은 어촌으로, 이곳 주민들은 90마일 해변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ATV 대여, 승마, 낚시 관광, 서핑 교습 등을 하는 것으로 돈벌이를 한다. 마을의 한 식당에서는 내가 먹어본 중에서 가장 맛있는 도미 버거(snapper burger)를 팔고 있었다. 이것은 뉴질랜드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큰 햄버거 빵 사이에 비트루트, 양파, 토마토, 양상추 등을 곁들이고 튀긴 생선 덩어리를 넣은 것이다. 시원한 맥주와 함께 버거를 먹으니, 다음 걷기를 위한 완벽한 영양이 채워지는 듯했다.
↑ 카우리 소나무는 대부분 직경 5m가 넘고 수명은 2천년을 넘는다. 뉴질랜드의 초기 식민지 시대에 이 나무가 많이 벌목되어 사라졌으나, 이곳에는 일부가 남아있다.
원시 자연림에 울려 퍼지는 새들의 지저귐
90마일 비치의 남쪽은 걷기가 매우 힘든 곳이다. 큰 강들이 태즈먼 해로 흘러들고 있고, 남쪽으로 가면서 높은 절벽들이 자주 나타났다. 그래서 테아라로아 트레일은 이제 해변을 떠나 내륙으로 들어가는데, 네 개의 산악 산림공원을 가로지른 뒤 아일랜즈 만의 동쪽 해변에 도착한다. 우리는 헤레키노(Herekino) 안부의 숲에 들어갔다. 숲에 들어서자 해변으로 내려가는 고개가 나왔는데, 이 고개는 마오리 족 망자의 넋이 저승으로 가기 전에 쉬어가는 곳이라고 전해진다. 고개에는 망자의 명복을 빌고 그들의 북행을 도와주는 13개의 토템 폴이 세워져있다.
노슬랜드의 자연림에는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 중의 하나인 거대한 카우리 소나무가 많이 있다. 이 소나무의 첫 조상은 쥐라기 때 진화한 것으로 여겨지며, 대부분 직경 5m가 넘고 수명은 2천년을 넘는다. 불행히도 뉴질랜드의 초기 식민지 시대에 사람들의 단견으로 이 나무가 많이 벌목되어 사라졌으나, 이곳에는 일부가 남아있다. 자연림 안에는 다른 나무들도 많았는데, 토착종인 포도카르프, 적송, 양질의 꿀로 유명한 마누카, 목생 고사리 등이 있다. 높이가 10m 이상 자라는 이 나무들은 커다란 양산이 되어 이끼와 곰팡이류가 가득 찬 덤불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 아일랜즈 만의 러셀 숲에서 길이 강과 합류하고 있다.
숲에는 또한 뉴질랜드 특유의 독특한 새 울음소리가 요란하다. 뉴질랜드에는 박쥐를 제외하고는 토착 육식 포유류가 없었는데, 지난 2세기 동안 고양이, 족제비, 팔란저(쥐의 일종) 등이 들어오면서 토착 동물들이 수난을 당하여 개체수가 크게 줄었다. 그러나 이제 민감한 토착 새들은 이들 포식자들에게 선전포고를 발령하고, 느리지만 착실하게 개체수를 늘리고 있다. 노슬랜드의 숲 전역에서 우리는 노래를 잘 부르는 투이와 벌레를 먹는 팬테일드를 볼 수 있었고, 숲 비둘기인 녹색의 케레루도 만났다. 밤에는 으스스한 부엉이 소리 그리고 뉴질랜드의 상징인 키위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렸다. 가끔 덤불에서 거대한 귀뚜라미도 만날 수 있었다.
장애물을 만나거든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건너라!
숲을 빠져 나온 후 온화한 초여름 날씨를 보이는 동쪽 해안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는 고지대의 양 목장과 소목장을 가로지르게 되었다. 우리는 가축 사이로 걸어가면서 가끔 지나치게 호기심을 보이거나 흥분해있는 망아지들을 등산지팡이로 때리면서 쫓았다. 지대가 낮아지자 아보카도 과수원과 올리브 과수원이 나왔고, 곧이어 활기찬 해안 마을인 케리케리(Keri Keri)에 들어갔다. 우리는 와이탕이(Waitangi), 파이히아(Paihia), 러셀(Russell) 등 아일랜즈 만 일대를 돌면서 해안을 걸었다.
와이탕이에 있는 트리티 하우스(Treaty House)는 뉴질랜드를 영국의 식민지 국가로 귀속시킨 '와이탕이 조약'이 서명된 역사적인 장소. 1840년 대영 제국 대표들과 뉴질랜드 전역에서 온 마오리족 추장들이 이 조약에 서명함으로써 영국의 뉴질랜드 총독이 임명되고, 마오리족에게 아직 팔지 않은 토지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영국민의 권리를 주었다. 트리티 하우스 주변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우리는 이 숲을 따라서 해변 도로에 있는 옛 정착촌과 건축역사박물관을 지나 만의 남쪽 끝에 있는 항구에 도달했다. 이곳은 당일치기 하이커와 관광객에게 매우 인기 있는 곳이어서, 무거운 배낭을 메고 더럽고 낡은 옷을 입은 우리의 모습이 많은 보통 관광객들로부터 관심을 끌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해변 길을 넓게 비켜주고 우리의 하이킹 장정을 격려하고 축하해주었다.
하지만 이 항구가 우리의 여정에 첫 번째 장애물이 될 줄이야. 이곳에서부터 내륙 깊숙한 곳까지 조수 습지를 형성하고 있어, 우리는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테아라로아 트레일의 규정에는 '수중 장애물(water-obstacle)을 돌아가지 말고,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횡단하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다른 하이커들과 비용을 공동 부담해 수상택시를 빌려 타고 10km의 바다를 넘어 다음 행선지에 도달했다.
테아라로아 트레일은 조성된 지 불과 2~3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인기가 급속히 늘고 있어 이번 시즌에 약 70~80명이 참여했고 그들 대부분은 완주할 계획이다. 우리 그룹은 9명인데, 호주인 2명, 독일인 2명, 프랑스인 2명, 미국인 1명, 벨기에인 1명 그리고 뉴질랜드인 1명이었다. 테아라로아 트레일 전체의 약 7%가 도로 걷기 구간인데, 이 구간은 특히 많은 부분을 도로에서 걸어야 한다. 지형과 사유지 문제로 다른 길을 만들 수 없기 때문. 많은 하이커들이 도로 걷기를 기피하지만, 우리 그룹은 순수파여서 모든 구간을 걷기로 결의했다.
↑ 케리케리 근처에서 호기심 많은 소들이 길을 막고 있다. 가축 사이로 걸어가면서 가끔 지나치게 호기심을 보이거나 흥분해있는 망아지들을 등산지팡이로 때리면서 쫓아야 했다.
가족과 함께 맞을 크리스마스를 기대하며
우정과 동지애로 도로 걷기가 빨리 지나가고, 오클랜드 시로 들어가는 긴 해안으로 들어섰다. 처음에는 높은 절벽을 따라가는 아름다운 길이고, 다음은 목가적인 해변을 바라보면서 숲, 농장 그리고 별장들이 많은 조용한 해안마을을 지났다. 그 마을에는 거대한 포후타카와 나무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크리스마스가 여름인 뉴질랜드에 때맞추어 화사한 붉은 꽃을 활짝 피우고 있었다.
완만하던 길은 왕가레 시(city of Whangarei)에 접근할수록 점점 경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곳에는 인상적인 모양의 날카로운 바위산이 해면 위로 400m 이상 솟아, 도시 주위에 돌출부와 천연 항구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 암봉들과 동쪽 인근의 섬들은 약 2천만 년 전에 폭발한 화산의 결과물이다. 이 암봉들은 전체 트레일 중에서도 아주 스릴 있는 등반 코스가 된다. 우리는 마나이아산(Mt. Manaia) 옆 돌출부의 날카로운 능선에 올랐다. 옛날 추장들의 매장지였던 이 암봉들은 노슬랜드에서 가장 신성시 여겨지는 곳이기도 하다. 태평양의 따스한 물과 영양분이 풍부한 화산섬들, 그리고 돌출부가 만나는 이 일대는 뉴질랜드에서 가장 유명한 어장을 이루고 있다. 어부들은 근해에서 많은 왕어와 녹색치 등의 큰 물고기를 잡는다. 우리는 조용한 후미에서 야영을 하고 다음 날 아침 낚싯배를 전세 내어 타고 항구를 건너갔다. 항구에서는 낚시를 위한 대여선들이 많이 운영되고 있었다.
이제 우리는 며칠만 열심히 걸으면 오클랜드 시에 도착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더운 물 샤워, 국제적인 음식, 도시의 즐거움 등을 생각하면서 잠자리에 들고, 다음 날 열심히 걸었다. 체력 또한 더 강해져, 우리가 목표한 하루 평균 거리인 20km 정도는 가뿐하게 걸을 수 있었다. 흰 모래 해변을 한참 걸은 뒤 내륙으로 들어가 낮은 산길을 올랐다. 이 산길은 세계최고봉인 에베레스트(8848m)의 초등자이자 뉴질랜드의 영웅인 에드먼드 힐러리 경이 2001년에 개통시켰다. 테아라로아 트레일 중 가장 먼저 제안된 코스이지만, 공식적으로 트레일로 인정된 것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뒤였다. 여기서 우리는 이 트레일의 마지막 카우리 소나무 숲을 지나면서 거대한 나무들에게 작별 인사를 전하고, 농경지를 횡단하여 다시 해변으로 갔다.
우리는 오클랜드로 가기 위해 태평양 해안을 따라 하루에 30km씩 걸으면서 도시 북쪽 교외에 있는 15여개의 해변을 지나갔다. 우리가 이 부분을 하이킹한 날은 남반부 여름의 첫 일요일로,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었다. 덕분에 '돛의 도시(The city of Sails)'라고 불리는 오클랜드가 왜 세계에서 아주 살기 좋은 곳으로 손꼽히는지를 쉽게 알 수 있었다. 조용한 바다는 요트, 카약, 수상 스키어, 낚시꾼, 수영객 등으로 붐볐으며, 모래밭에서는 축구, 크리켓, 럭비 등의 운동이 펼쳐지고 있었고, 바비큐 냄새가 여기저기서 풍겨왔다. 해변을 지나 데본 항(Devon port)에서 배를 타고 항구를 건너 바다와 작별한 뒤, 우리는 오클랜드 시의 번화한 도심지에 도착했다.
↑ 동해안의 해변 농경지
다음 달에는 농경지가 있는 북섬의 내륙을 지나 높은 화산 고원지대에 가고, 내 고향에 가서 가족과 함께 여름 크리스마스를 보내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지금은 우선 편히 쉬면서 다소나마 도시 생활을 즐겨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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