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죽음 당한 개로왕이 4대강에게 주는 교훈 / 오마이 뉴스 기사
2014. 1. 25. 00:12ㆍ들꽃다회
개죽음 당한 백제 개로왕이 4대강에 주는 교훈
[사극이 못다 한 역사 이야기2] 개로왕의 토목사업과 MB의 4대강 사업13.01.25 10:24
최종 업데이트 13.01.25 10:24
이명박 정권은 국민적 반대를 무시하고 4대강 사업을 강행했다. 이것이 불필요하고 무모할 뿐만 아니라 유해한 사업이라는 점은 이미 널리 인식되고 있다. 이 사업으로 대한민국은 별로 얻은 것도 없이 생명 질서만 훼손하고 국민 혈세만 낭비했다.
물론 그렇게 되면 안 되겠지만, 이런 과오가 자칫 대한민국의 국운에 영향을 줄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백제 개로왕(재위 455~475년)의 실책이다.
서기 4세기부터 중국 대륙은 분열에 돌입했다. 이런 혼란을 활용해서 고구려는 만주를 지배하고 중국을 위협했다. 백제도 이런 기회를 활용했다. 중국측 역사서인 <송서>, <양서>, <남사>에 따르면, 백제는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후반의 어느 시점에 북경(베이징) 동북방의 요서 지방을 점령했다.
백제의 영토 확장과 주변 정세
이 시기에 백제가 해상을 통해서만 영토를 팽창한 것은 아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따르면, 백제는 근초고왕 때인 371년에 고구려 평양성을 점령했다. 중국 대륙이 혼란에 빠지고 동아시아 전체가 요동하는 틈을 타서 북쪽의 고구려를 압박하고 들어간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평양성 점령의 결과로 백제가 한성에서 한산(漢山)으로 천도했다고 말했고, '지리지'에서는 "근초고왕 때 고구려 남평양을 취하고 도읍을 한성으로 삼았다"고 말했다. '백제본기'의 '한산'은 한양의 산을 가리키므로 '지리지'의 '한성'과 같은 표현이다.
'백제본기'와 '지리지'를 종합하면, 백제가 평양성을 점령한 뒤 한성에서 '한성'으로 천도했다는 말이 된다. 한성에서 '한성'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삼국사기>의 한성은 지금의 서울 및 인근 지역을 가리킬 때도 있고 황해도 재령을 가리킬 때도 있다.
이 점을 근거로,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근초고왕이 평양성을 점령한 뒤 지금의 수도권에서 재령으로 천도했다고 정리했다. 고대 국가들은 도읍을 옮길 때 기존 지명을 그대로 갖고 가는 예가 많았기 때문에 '한성에서 한성으로 천도했다'는 표현이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이 그의 해설이다.
이렇게 중국 대륙이 혼란에 빠지고 동아시아가 요동치는 틈을 타서, 백제는 중국은 물론이고 고구려까지도 압박하는 전략을 취했다. 어수선한 시기에 매우 공격적으로 대외팽창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런데 5세기에 들어서면서 백제가 주춤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5세기 초반부터 중국대륙의 분열이 수습 국면에 접어들자, 고구려가 중국보다는 한반도 쪽으로 힘을 집중하면서 백제가 밀리기 시작한 것이다.
427년에 장수태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것은 한반도 쪽에 치중하겠다는 전략의 표현이었다. 참고로, 고구려 군주의 정식 명칭은 '왕'이 아니라 '태왕'이었다. 장수태왕의 전략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백제를 한강 유역에서 밀어냄으로써 한반도 남부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했다.
결과적으로 볼 때, 장수태왕의 남진정책을 도와준 인물이 있었다. 바로 백제 개로왕이다. 만약 개로왕이 중대한 실책을 범하지 않았다면, 장수태왕이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남진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때 평양성을 점령하고 황해도 재령으로 천도했던 백제가 고구려의 남진을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데는 개로왕의 실책이 크게 작용했다.
개로왕은 중국 쪽 진출이 막힌 고구려가 남진정책을 강화하는 시기에 백제왕으로 등장했다. 국력을 총동원해서 고구려를 막아도 시원찮을 판국에, 그는 불필요하고 무모할 뿐만 아니라 유해하기까지 한 사업에 국력을 낭비하는 우를 범했다. 이것이 결과적으로 고구려를 돕는 역할을 하고 말았다. 그가 벌인 사업에 관해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이렇게 말한다.
"백성들을 모두 동원해서 흙을 구워 성을 쌓고 그 안에 궁궐·누각·정자를 마련했다. 굉장하고 화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큰 돌을 욱리하(한강)에서 가져와 곽을 만들어 아버지의 뼈를 묻고, 강을 따라 제방을 쌓으니 사성(풍납토성) 동쪽에서 숭산(검단산) 북쪽까지 이어졌다. 이 때문에 창고가 텅 비고 백성이 곤궁해지니, 나라의 위기가 알을 쌓아 놓은 것보다 더 심했다."
백성들을 총동원했다고 하니, 이명박 정권의 4대강 사업을 연상케 하는 대규모 토목사업을 벌였음을 알 수 있다. 흙을 구워 성을 쌓았다는 것은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을 보수한 사실을 가리킨다. 토성을 보수하고 도시를 새로 정비하는 사업이 대대적으로 벌어진 것이다.
또 개로왕은 풍납토성에서 검단산까지의 한강변에 대규모 제방을 건설했다. 천호대교에서 시작해 동쪽으로 미사대교까지의 구간에서 '한강 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인 것이다. 이런 사업 자체가 나쁜 일은 아니지만, 국민적 동의가 없는 상태에서 국가 재정을 파탄 내면서까지 무리하게 사업을 벌였기 때문에 그는 욕을 먹지 않을 수 없었다.
개로왕의 비참한 죽음
재정이 파탄 난 국가에서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는, 병사들의 급료를 제때 지급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말기의 명나라도 그랬고, 구한말의 조선도 그랬다. 국고가 텅 빌 정도로 재정위기가 발생했으니, 개로왕 말년의 백제 역시 병사들을 제대로 대우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재정위기로 군사력이 약해졌다는 점은, 백제 수도가 고구려 3만 군대에 의해 7일 만에 함락된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패전의 결과로 개로왕은 풍납토성 건너편의 아차산에서 백제 출신의 고구려 장군들에 의해 즉결 처형을 당했다. 옛날 신하였던 고구려 장군들은 개로왕에게 절을 한 뒤 얼굴에 세 번이나 침을 뱉고 나서 처형을 집행했다. 대규모 토목사업을 벌이는 과정에서 그가 인심을 잃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개로왕의 실책은 그 자신의 비극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그의 실패로 인해 백제는 전통적인 도읍인 한성을 상실했다. 그래서 아들인 문주왕은 웅진(충남 공주)으로 천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제의 영광을 뒷받침했던 한성은 더 이상 백제의 수도가 아니었다.
이렇게 한강 유역에서 밀려난 백제는, 해상을 통해 중국으로 진출할 기회와 함께, 한강을 발판으로 북진할 수 있는 기회도 상실했다. 한때 서쪽의 중국과 북쪽의 평양성까지 점령했던 백제는 한강 유역도 지키지 못하고 충청·전라 지역의 왕국으로 축소되고 말았다.
이처럼 개로왕의 실책은 백제의 전성기를 끝장내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일시적인 중흥을 보인 기간을 빼면, 그 이후의 백제는 기본적으로 내리막길을 걸었다.
고구려가 중국 진출을 포기하고 남진 정책을 추진하던 때에, 백제 개로왕이 이렇게 실책을 범한 탓에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쉽게 확보할 수 있었다. 개로왕이 고구려의 일급 공신이 된 셈이다.
만약 개로왕이 실책을 범하지 않았다면, 고구려의 남진을 막을 수 있었음은 물론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고구려를 좀더 압박할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고구려는 중국과 백제 사이에 끼여 좀더 힘든 싸움을 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개로왕은 백제의 왕이 아니라 고구려의 신하였다.
불필요하고 무모할 뿐만 아니라 유해하기까지 한 대규모 토목사업으로 쇠퇴기에 접어든 백제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개로왕 뺨치는 이명박 정권의 4대강 사업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지 않으면 안된다.
물론 그렇게 되면 안 되겠지만, 이런 과오가 자칫 대한민국의 국운에 영향을 줄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백제 개로왕(재위 455~475년)의 실책이다.
서기 4세기부터 중국 대륙은 분열에 돌입했다. 이런 혼란을 활용해서 고구려는 만주를 지배하고 중국을 위협했다. 백제도 이런 기회를 활용했다. 중국측 역사서인 <송서>, <양서>, <남사>에 따르면, 백제는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후반의 어느 시점에 북경(베이징) 동북방의 요서 지방을 점령했다.
백제의 영토 확장과 주변 정세
이 시기에 백제가 해상을 통해서만 영토를 팽창한 것은 아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따르면, 백제는 근초고왕 때인 371년에 고구려 평양성을 점령했다. 중국 대륙이 혼란에 빠지고 동아시아 전체가 요동하는 틈을 타서 북쪽의 고구려를 압박하고 들어간 것이다.
▲ 백제가 한성에 도읍을 두고 있을 때에 세워진 풍납토성. 서울시 송파구 소재. | |
ⓒ 김종성 |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평양성 점령의 결과로 백제가 한성에서 한산(漢山)으로 천도했다고 말했고, '지리지'에서는 "근초고왕 때 고구려 남평양을 취하고 도읍을 한성으로 삼았다"고 말했다. '백제본기'의 '한산'은 한양의 산을 가리키므로 '지리지'의 '한성'과 같은 표현이다.
'백제본기'와 '지리지'를 종합하면, 백제가 평양성을 점령한 뒤 한성에서 '한성'으로 천도했다는 말이 된다. 한성에서 '한성'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삼국사기>의 한성은 지금의 서울 및 인근 지역을 가리킬 때도 있고 황해도 재령을 가리킬 때도 있다.
이 점을 근거로,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근초고왕이 평양성을 점령한 뒤 지금의 수도권에서 재령으로 천도했다고 정리했다. 고대 국가들은 도읍을 옮길 때 기존 지명을 그대로 갖고 가는 예가 많았기 때문에 '한성에서 한성으로 천도했다'는 표현이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이 그의 해설이다.
이렇게 중국 대륙이 혼란에 빠지고 동아시아가 요동치는 틈을 타서, 백제는 중국은 물론이고 고구려까지도 압박하는 전략을 취했다. 어수선한 시기에 매우 공격적으로 대외팽창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런데 5세기에 들어서면서 백제가 주춤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5세기 초반부터 중국대륙의 분열이 수습 국면에 접어들자, 고구려가 중국보다는 한반도 쪽으로 힘을 집중하면서 백제가 밀리기 시작한 것이다.
427년에 장수태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것은 한반도 쪽에 치중하겠다는 전략의 표현이었다. 참고로, 고구려 군주의 정식 명칭은 '왕'이 아니라 '태왕'이었다. 장수태왕의 전략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백제를 한강 유역에서 밀어냄으로써 한반도 남부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했다.
결과적으로 볼 때, 장수태왕의 남진정책을 도와준 인물이 있었다. 바로 백제 개로왕이다. 만약 개로왕이 중대한 실책을 범하지 않았다면, 장수태왕이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남진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때 평양성을 점령하고 황해도 재령으로 천도했던 백제가 고구려의 남진을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데는 개로왕의 실책이 크게 작용했다.
▲ 백제를 쇠퇴의 길로 몰아넣은 개로왕. 서울시 송파구 올림픽공원의 한성백제박물관에 전시된 그림. 고구려에 패배하고 충격에 휩싸여 있는 개로왕의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다. | |
ⓒ 김종성 |
개로왕은 중국 쪽 진출이 막힌 고구려가 남진정책을 강화하는 시기에 백제왕으로 등장했다. 국력을 총동원해서 고구려를 막아도 시원찮을 판국에, 그는 불필요하고 무모할 뿐만 아니라 유해하기까지 한 사업에 국력을 낭비하는 우를 범했다. 이것이 결과적으로 고구려를 돕는 역할을 하고 말았다. 그가 벌인 사업에 관해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이렇게 말한다.
"백성들을 모두 동원해서 흙을 구워 성을 쌓고 그 안에 궁궐·누각·정자를 마련했다. 굉장하고 화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큰 돌을 욱리하(한강)에서 가져와 곽을 만들어 아버지의 뼈를 묻고, 강을 따라 제방을 쌓으니 사성(풍납토성) 동쪽에서 숭산(검단산) 북쪽까지 이어졌다. 이 때문에 창고가 텅 비고 백성이 곤궁해지니, 나라의 위기가 알을 쌓아 놓은 것보다 더 심했다."
백성들을 총동원했다고 하니, 이명박 정권의 4대강 사업을 연상케 하는 대규모 토목사업을 벌였음을 알 수 있다. 흙을 구워 성을 쌓았다는 것은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을 보수한 사실을 가리킨다. 토성을 보수하고 도시를 새로 정비하는 사업이 대대적으로 벌어진 것이다.
또 개로왕은 풍납토성에서 검단산까지의 한강변에 대규모 제방을 건설했다. 천호대교에서 시작해 동쪽으로 미사대교까지의 구간에서 '한강 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인 것이다. 이런 사업 자체가 나쁜 일은 아니지만, 국민적 동의가 없는 상태에서 국가 재정을 파탄 내면서까지 무리하게 사업을 벌였기 때문에 그는 욕을 먹지 않을 수 없었다.
개로왕의 비참한 죽음
재정이 파탄 난 국가에서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는, 병사들의 급료를 제때 지급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말기의 명나라도 그랬고, 구한말의 조선도 그랬다. 국고가 텅 빌 정도로 재정위기가 발생했으니, 개로왕 말년의 백제 역시 병사들을 제대로 대우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재정위기로 군사력이 약해졌다는 점은, 백제 수도가 고구려 3만 군대에 의해 7일 만에 함락된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패전의 결과로 개로왕은 풍납토성 건너편의 아차산에서 백제 출신의 고구려 장군들에 의해 즉결 처형을 당했다. 옛날 신하였던 고구려 장군들은 개로왕에게 절을 한 뒤 얼굴에 세 번이나 침을 뱉고 나서 처형을 집행했다. 대규모 토목사업을 벌이는 과정에서 그가 인심을 잃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 토목공사에 동원된 백제 백성들의 모습. 한성백제박물관에 전시된 모형. | |
ⓒ 김종성 |
개로왕의 실책은 그 자신의 비극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그의 실패로 인해 백제는 전통적인 도읍인 한성을 상실했다. 그래서 아들인 문주왕은 웅진(충남 공주)으로 천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제의 영광을 뒷받침했던 한성은 더 이상 백제의 수도가 아니었다.
이렇게 한강 유역에서 밀려난 백제는, 해상을 통해 중국으로 진출할 기회와 함께, 한강을 발판으로 북진할 수 있는 기회도 상실했다. 한때 서쪽의 중국과 북쪽의 평양성까지 점령했던 백제는 한강 유역도 지키지 못하고 충청·전라 지역의 왕국으로 축소되고 말았다.
이처럼 개로왕의 실책은 백제의 전성기를 끝장내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일시적인 중흥을 보인 기간을 빼면, 그 이후의 백제는 기본적으로 내리막길을 걸었다.
고구려가 중국 진출을 포기하고 남진 정책을 추진하던 때에, 백제 개로왕이 이렇게 실책을 범한 탓에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쉽게 확보할 수 있었다. 개로왕이 고구려의 일급 공신이 된 셈이다.
만약 개로왕이 실책을 범하지 않았다면, 고구려의 남진을 막을 수 있었음은 물론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고구려를 좀더 압박할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고구려는 중국과 백제 사이에 끼여 좀더 힘든 싸움을 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개로왕은 백제의 왕이 아니라 고구려의 신하였다.
불필요하고 무모할 뿐만 아니라 유해하기까지 한 대규모 토목사업으로 쇠퇴기에 접어든 백제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개로왕 뺨치는 이명박 정권의 4대강 사업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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