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차산 팥죽다회 - 셋(끝)

2014. 1. 25. 00:46들꽃다회

 

 

 

 

 

       아차산 일대 보루군 안내도

 

 

 

 

 

아차산 일대 보루군 안내도

 

             - 한강변의 낮은 구릉지에도 구의동 보루와 자양동 보루가 있었다네.........

 

 

 

 

 

 

아차산, 용마산 고구려 보루 배치도

 

 

 

 

 

 

 

 

 

 

 

장수왕은 왜 백제 개로왕을 죽였을까?
   -  과거 자기 신하에게 붙잡혀 치욕적으로 죽어간 백제 개로왕
 
성훈 컬럼리스트 기사입력  2011/05/14 [14:59]
본 글은 아래와 같이 (2부)로 나뉘어 연재됩니다.
(1부) 장수대왕은 왜 백제 개로왕을 죽였을까?
(2부) 백제 개로왕이 쌓은 제방은 어디인가?


    역사상 수많은 왕들의 죽음이 있었지만 왕이 전장에서 전사(戰死)한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다. 고대사에 있어 왕이 전사한 경우는 동부여의 대소왕, 고구려의 고국원왕, 그리고 백제의 책계왕, 개로왕, 성왕 등이 있다. 이 중 왕이 적에게 생포되었다가 치욕적인 모욕을 당하고 처형당한 비운의 왕이 바로 백제 개로왕이다.

    475년 고구려 장수대왕이 군사 3만을 이끌고 백제의 수도 한성(漢城)을 포위하고 북성을 함락시키자 백제의 개로왕은 승산이 없음을 알고 변복을 하고 성을 빠져 나오다가 자신의 얼굴을 아는 고구려 장수에게 생포된다. 어떻게 고구려의 장수가 변복을 한 개로왕을 알아보았을까? 

    이유는 그 고구려 장수는 원래 백제인이었기 때문이다. 개로왕은 과거 자신의 신하였다가 죄를 짓고는 고구려로 도망간 걸루와 만년이란 장수에게 붙잡힌 것이었다. 걸루와 만년은 고구려 군대의 선봉에 서서 고국이었던 백제를 쳤다. 마치 연남생이 당나라 군대의 선봉에 서서 고구려를 멸망시키려고 온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걸루는 도망치는 개로왕을 알아보고는 말에서 내려 절하고는 왕의 면상을 향해 세 번 침을 뱉고 죄상을 말한 다음 꽁꽁 묶어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압송하여 죽였다. 태자 문주가 신라에서 원병 1만을 얻어 한성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고구려 군대가 돌아가고 난 뒤였다. 결국 백제는 고구려에게 한성 일대의 영토까지 빼앗겨 멸망 일보직전으로 몰리게 된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통상 왕이 생포되면 전쟁이 끝나고 나라도 멸망하는 법이다. 그리고 점령군 측에서는 대개 적국의 왕을 죽이지 않고 유민들을 회유하는데 이용하는 법이다. 그런데 장수왕은 개로왕을 즉석에서 죽이고 만다. 그리고 백제는 문주에 의해 이어져 간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약 1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백제 근초고대왕에게 전사당하는 고구려 고국원왕

    원래 고구려는 큰 집, 백제는 작은 집이었다. 백제의 시조 온조는 아버지인 고구려 시조 주몽의 곁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와 나라를 세웠다. 백제 초기의 모든 왕들은 동명왕(주몽)의 사당에 배알하곤 했다. 온조대왕이 동명사당을 세운 이래로 299년 9대 분서왕까지 배알한 기록이 <삼국사기>에 남아있다. 300년 넘게 지속된 전통이었다. 

    그러던 백제에 만고의 영웅인 12대 근초고대왕이 통치해 전성기를 누리고 있을 때, 고구려는 고국원왕 때였다. 드디어 고구려와 백제간에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서기 369년 고구려 고국원왕이 군사 2만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했으나 패하고, 2년 후 고국원왕은 다시 백제를 공격했으나 또 패하고 만다. 

    그러자 이번에는 근초고대왕이 태자(근구수왕)와 함께 정병 3만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도읍인 평양성을 공격했는데, 그 전투에서 고국원왕이 화살에 맞아 전사한다. 굳이 비유적인 표현을 하자면 고구려가 먼저 레프트 잽 두 방을 던져 백제를 선제공격하자, 이번에는 근초고왕이 상대에게 바짝 다가가 강펀치를 휘둘러 고구려를 넉다운시킨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이때부터 고구려와 백제는 서로 원수가 되어 죽고 죽이는 전쟁을 계속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백제에는 불세출의 영웅인 근초고대왕/근구수대왕이 버티고 있어 고구려가 수세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392년 고구려에 광개토태왕이 등극하자 힘의 저울추는 급속도로 고구려로 기울게 된다. 

    우리 역사에 가장 위대한 정복군주였던 광개토태왕은 등극하자마자 백제의 요새인 관미성을 함락시켜 천하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 나중에 결국 백제 아신왕은 광개토태왕에게 ‘영원한 노예(永爲奴客)’가 되겠다는 맹세를 하며 항복할 정도로 백제가 일방적으로 밀렸다. 

    광개토태왕은 약 30년 전에 당한 국가의 치욕인 조부 고국원왕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와신상담(臥薪嘗膽) 별렀다. 그래서 태왕은 즉위하자마자 백제와 관미성전투를 치러 승리한다. 그런데 이 후 광개토태왕은 백제의 아신왕을 죽이지 않고 속국으로 삼고는 목숨을 살려줘 피를 부르는 복수의 사슬을 과감히 끊은 것이었다.

    즉 광개토태왕은 가슴 속에 피맺힌 원한을 관용으로 너그럽게 포용한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복군주였던 광개토태왕의 위대함이 이런데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장수대왕을 대노하게 만든 백제 개로왕

    그런 만고의 영웅 광개토태왕의 뒤를 이어 아들인 장수대왕이 등극했다. 장수대왕 때 백제는 전지왕(재위16년)-->구이신왕(재위8년)-->비유왕(재위29년)-->개로왕(재위21년)으로 왕통이 이어진다. 이 때 백제가 고구려를 선제공격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는 없다. 그런데 개로왕이 들어서자 고구려에게 시비를 걸기 시작한다. 

    469년 개로왕은 장수를 보내 고구려의 남변을 침범하고, 군사를 나누어 북방을 지키게 한다. 그리고는 472년(개로왕 18년) 사신을 위(魏)나라에 보내 국서를 전하고 고구려를 칠 군사적 지원을 요청한다. 그 국서의 내용 중에는 아래 내용이 들어 있으며, “군사를 보내주면 딸을 후궁으로 보내고 자제를 마굿간에서 말을 먹이게 한다."는 등 굴욕적인 내용도 들어있다.

    “백제는 고구려와 더불어 근원이 부여(夫餘)에서 나왔으므로 선대(先代)에는 잘 지냈었는데, 그 조부 쇠(釗:고국원왕)가 이웃 간의 우호를 저버리고 친히 군사를 이끌고 침략했으므로 선조(근초고대왕)께서 군사를 정비하여 번개같이 가 기회를 노려 공격해 화살과 돌이 잠시 부딪히는 동안에 쇠(釗)의 머리를 베어 효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로부터는 감히 남으로 침범하지 못하였는데 ... 그들이 차츰 번성해 드디어 능핍하는 꼴을 보게 되므로 (이하생략)....”

    즉 개로왕이 자신(장수대왕)의 증조부인 고국원왕의 이름을 들먹이며 잘못을 성토하고는 있지도 않은 사실을 허위로 조작해 타국에 유포했다는 것을 알고는 크게 노했다. 천하의 중심국(고구려)의 대왕인 자신을 조롱하고 능멸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특히 ‘쇠(釗)의 머리를 베어 효시하게’라는 문구는 장수대왕의 심기를 심하게 건드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광개토태왕과 장수대왕은 고국원왕의 전사를 국가의 수치를 알고 복수를 위해 절치부심(切齒腐心) 했었다. 그러나 태왕은 백제 아신왕의 목숨을 거둘 기회가 있었음에도 동족의 대단합을 위해 항복을 받음으로써 용서하는 등 은혜를 베풀었다. 그 이후 별 일이 없다가 개로왕이 나타나자 그 은공도 모르고 감히 고구려에 대든 것이었다. 게다가 외교문서에는 있지도 않았던 이상한 말까지 적은 것이다. 

    개로왕이 죽음으로서 백제는 거의 패망 직전으로 몰린다. <삼국사기>에는 아들 문주가 개로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고 도읍을 웅진으로 옮겼다고 간단히 기록되어 있으나, 남당 박창화선생의 <고구려사초.략>에는 당시 백제는 영토를 고구려에게 잃어 문주왕은 남(자비)의 땅을 빌어 간신히 나라의 명맥을 유지한 것으로 되어있다.

   위 고국원왕과 개로왕의 일화에서 보듯이 상호간에 신의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며, 국가뿐 아니라 기업이나 단체 개인 간에도 신의가 무척 중요하다. 그러한 신의를 먼저 깨뜨리는 사람의 말로는 결코 좋지 않음을 보여주는 교훈이라 하겠다. 개로왕의 경우는 혀를 가벼이 놀리다가(유언비어 날조) 죽음을 당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의문점이 하나 있다. 의문점은 다름이 아니라 백제도 고구려 못지않은 강국이라 군사력도 무척 강했을 텐데 고구려 3만 군사가 공격해오자 그렇게 쉽게 일국의 왕이 붙잡히고 나라가 휘청할 정도로 허무하게 무너질 수 있단 말인가!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질문에 대한 해답은 다음 (2부)를 참조해 주기 바랍니다.
(2부) 백제 개로왕이 쌓은 제방은 어디인가?

 

 

기사입력: 2011/05/14 [14:59]  최종편집: ⓒ 역사복원신문

 

 




 

 

                              

 

 

 

 

 

 

 

아차산 고구려 역사길 안내판

 

 

 

 

 

보루 출토유물

 

 

 

 

 

등산로 안내판

 

 

 

 

 

구리 둘레길 안내판

 

 

 

 

 

 

 

 

 

 

 

 

 

 

 

 

         평강공주와 온달장군에 얽힌 설화(說話)

    고구려 평강왕(平岡王, 平原王) 때에 이름을 온달이라고 하는 마음이 착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용모는 괴상했으나 속마음은 밝아 홀어머니를 걸식으로 봉양하며 살고 있었다.
그 때의 평강왕의 딸로서 평강공주가 있었는데 어려서 몹시 울어, 부왕이 자꾸 울면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는 농담을 하곤 하였다.
시집갈 나이 28세가가 되어 부왕이 귀족인 상부 고씨 집에 시집보내려 하자 공주는 부왕의 평소
말대로 온달에게 가겠노라고 우겼다.

    부왕은 노하여 공주를 궁궐에서 내쫓자 공주는 그 길로 온달을 찾아가 결혼을 했다.
공주는 자기가 궁궐에서 나올 때 가지고 온 패물로 의식을 해결하고,
왕실의 병약한 말을 사오게 하여 잘 먹이고 온달에게 무예와 학문을 닦게 하였다.
고구려는 매년 봄 3월 3일에 낙랑의 언덕에서 수렵대회를 열었는데, 여기서 온달이
실력을 발휘하여 이 소식이 왕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중국 후주의 무제가 쳐들어오자 온달이 선봉이 되어 무찌르니,
사위로 인정받아 그에게 대형(大兄)의 벼슬이 내려진다.
그러나 다음 왕 때에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해 출전했다가
아차산성에서 전사했는데,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
    평강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생사(生死)가 결정되었으니 한을 풀라 하니
관이 움직여 비로서 장사를 지냈다는 설이 있습니다..

 

 

      이 밖에도 온달장군이 전사한 곳은 아단성(현 온달산성)이 있는

단양군 영춘면이라는 설도 있다...........

 

 

 

 

 

 

 

 

아차산성에서 출토된 유물

 

             - 철제삼족정은 요즘 등산장비로 치면 버너와 코펠을 합친 것 쯤으로........

                                 가정용품으로는 전기밥솥 쯤에 해당 되려나?? ..........

 

             - 대부완류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고구려군도 가루차나 연고차를 마셨던 것은 아닌가??

 

 

 

 

 

복원정비된 아차산성

 

 

 

 

 

굴참나무 줄기에 있는 세월의 흔적

 

 

 

 

백제 개로왕

 

 

개로왕(蓋鹵王, ? ~ 475년 9월)은, 백제의 제21대 국왕(재위: 455년~475년)이다.

 

근개루왕(近蓋婁王), 개도왕(蓋圖王)으로도 불린다.

 

 

생애[편집]

    이름은 경사(慶司) 또는 여경(餘慶)이며,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가수리군(加須利君)이라는 칭호도 있다.

비유왕의 아들로 부왕 사후 즉위하였다. 《삼국사기》는 455년에 즉위하였다고 했고, 《일본서기》는 《백제신찬》의 기사를 인용하여 기사년(429년)에 즉위하였다고 기록해 양자가 차이를 보이는데, 단순히 《일본서기》 기록의 오류로 보기도 하지만, 왕의 즉위가 다소 불안정한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아울러 《일본서기》는 429년에 왜에서 백제의 왕녀를 구하자 모니부인(慕尼夫人)의 딸을 꾸며 적계여랑(適稽女郞)이라 하여 왜왕에게 바쳤다고 한다.

 

   《삼국사기》는 비유왕이 죽은 지 한달만인 455년 10월에 고구려가 백제를 침공하였고 이때 신라의 눌지왕(訥智王)이 군사를 보내 구원하였다고 적고 있다.[1] 안정복(安鼎福)은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이를 나제동맹이 본격적으로 발휘되기 시작한 첫 사례임을 지적하였다.

    한편 중국의 《송서(宋書)》 이만열전에는, 개로왕 4년인 458년 8월에 (宋)에 사신을 보내, 행관군장군(行冠軍將軍) 우현왕(右賢王) 여기(餘紀) 등 11인의 「문무가 뛰어나고 충성스러우며 근면함을 말하면서 3품 관직의 제수를 청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때 관직을 제수받은 11인 가운데 8인은 여(餘)씨 즉 부여씨로 백제 왕족의 성씨를 지닌 자였으며, 이것은 개로왕이 추구했던 왕족 중심의 집권체제를 보여줌과 동시에, 귀족들의 반발과 지배층의 분열을 일으켜 후에 문주왕이 귀족인 해구에게 살해되는 복선이 되기도 하였다.

 

    개로왕이 관직 수여를 청한 왕족 가운데 행정로장군(行征虜將軍) 좌현왕(左賢王)이 된 여곤(餘昆)은 곤지(琨支)와 동일인물로 추정되고 있다. 부여곤지는 개로왕 5년인 461년에 왕명으로 왜로 파견되는데(《일본서기》) 대체로 곤지가 어떤 이유로 축출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곤지는 개로왕에게 왕의 부인을 줄 것을 청했고 개로왕은 그 말을 들어주면서 「부인이 지금 임신하여 산달이 가까웠으니, 가는 길에 해산하거든 어디에서든 본국으로 돌려보내라」고 명했고, 이는 부여사마(무령왕)의 탄생 복선이 된다.

 

 

    15년(469년)부터 개로왕은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공격하게 하고, 쌍현성(雙峴城)을 수리하고 청목령(靑木嶺)에 목책을 쌓아 북한산성(北漢山城)의 군사를 보내 지키게 하는 등 고구려에 대한 견제책을 펼쳤다.

 

    18년(472년)에는 관군장군(冠軍將軍)ㆍ부마도위(駙馬都尉)ㆍ불사후(弗斯侯)ㆍ장사(長史) 여례(餘禮)와 용양장군(龍驤將軍)ㆍ대방태수(帶方太守)ㆍ사마(司馬)ㆍ장무(張茂)를 (魏)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그 목적은 고구려와 전쟁을 벌여달라고 요청하는 것이었다.

 

  《위서(魏書)》 백제전 및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당시 개로왕이 보낸 국서가 실려 있는데, 백제가 보낸 국서는 유교적인 수사와 경전의 글귀를 여기저기에서 활용하고 있어 당시 백제의 유교 수용상황과 수준을 짐작하게 하는 사례로 거론되며, 조선 초의 《동문선(東文選)》에도 「백제상위주청벌고구려표(百濟上魏主請伐高句麗表)」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다. 국서 속에서 개로왕은 고구려의 정세를 두고 「지금 연(璉, 장수왕)은 죄가 있어 나라가 어륙(魚肉)이 되어 대신과 힘센 귀척들을 마구 죽이기를 서슴치 않으니 죄가 차고 악이 쌓여 백성들은 무너지고 흩어졌다」, 「고려(고구려)는 의롭지 못하여 거스르고 속이는 짓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겉으로는 번국인 척 말을 낮추고 있지만 속으로는 흉악한 재앙과 저돌적인 행위를 품어, 남쪽으로 유씨(劉氏, 송)와 내통하고 혹은 북쪽으로 연연(蠕蠕)과 맹약하여 서로 입술과 이처럼 의지하면서 왕법(북위)을 능멸하려 한다」고 하여 당시 고구려의 내부 상황이 무척 혼란스러움을 전하고, 또한 경진년(440년) 무렵(경진년은 비유왕 14년으로 이 해 겨울 10월에 백제가 송에 사신을 보낸 일이 있다) 백제 서쪽 국경의 소석산북국(小石山北國) 바다에서 시체 10여 구를 발견한 사실과 함께 그 시체가 갖추고 있던 의복과 기물(器物)과 안장(鞍裝)과 굴레[勒] 등을 들어 위의 사신이 백제로 오던 길에 고려에 의해 살해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위의 현조(顯祖)는 소안(邵安)을 사신으로 백제에 답변을 전달했지만 그 내용은 "1) 백제에 보냈던 사신이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긴 하지만 백제에서 사신의 것이라며 보내온 기물들은 조사 결과 중국의 것이 아니며, 2) 고구려는 이미 위에 조공을 보내고 국교를 맺은 지가 오래되었고 위에 드러날 정도로 잘못한 것이 없으며, 3) 이번에 처음 사신을 보내면서 군사를 일으켜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점을 들어 백제의 요청을 거절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이 국서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던 소안은 고구려를 경유하여 백제로 가려 했지만 장수왕의 거절로 길이 막혀 백제로 가지 못했으며, 다시 바다를 통해 백제로 들어가려다 결국 도착하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다. 위에 대한 군사 지원 요청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자 개로왕은 위와의 국교를 아예 끊어버리고 말았다(《삼국사기》).

 

    무리한 토목 공사와 권위는 백성들의 원망을 사기에 충분하였으며, 이는 《삼국사기》의 도미 설화에도 잘 나타나 있다.

3년 뒤인 475년, 고구려의 공격으로 백제의 위례성은 함락되고 개로왕도 피살되었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에서 첩자로 보낸 승려 도림의 진언에 따라 왕성의 성곽과 궁실, 누각, 활 쏘는 사대(射臺)를 짓고 선왕의 능묘를 수리하는 과정에서 무리한 토목공사로 인해 국고가 고갈되고 백성들이 곤궁에 빠졌고, 이를 틈타 쳐들어온 고구려군에 의해 수도가 함락되고 개로왕 자신도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고구려군이 처음 공격해오자 개로왕은 왕자 문주(文周)를 남쪽으로 도피시키고, 한성(漢城)이 함락되기 직전에 수십 기(騎)를 거느리고 성을 빠져나왔지만 고구려군의 재증걸루(再曾桀婁) · 고이만년(古尒萬年) 두 장수에게 붙잡혀 아차산 아래로 끌려가 피살되었는데[2] 두 사람에 대해 《삼국사기》는 원래 백제인으로 죄를 지어 고구려로 도망친 자라고 설명하고 있다.

《일본서기》 유랴쿠 5년조는 이때 백제가 고구려에 의해 아예 멸망당하였으며, 《백제기》의 「고니키시(國王) 및 오오키사키(大后)ㆍ고니세시무(王子) 등이 모조리 적의 손에 죽었다(國王及大后ㆍ王子等, 皆沒敵手)」라는 기록을 인용하고, 이때 멸망한 백제를 왜왕이 다시 일으켜 세워주었다는 뉘앙스로 서술하고 있다.

 

 

가계[편집]

 

                                                                                                    

                                                                                                      - <위키백과>에서 발췌

 

 

 

 ***** 고 송범 선생님의 창작무용극<도미부인>과 최인호 원작의 소설 <몽유도원도>를 뮤지컬로 만들어 공연되고 있는 도미부인의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개루왕(蓋婁王)과 도미부인의 설화로 도미열전에 수록되어 있는 데, 설화의 지명으로 보아 개로왕 후대에 개명된 지명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후대 왕의 시대에 일어난 일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도미의 활동지로 알려져 있는 경기도 하남시와 강동구,송파구, 그리고 도미부인인 아랑의 출생지로 알려진 충남 보령시에서 서로 도미부인의 설화와 관련된 문화유산에 대한 각종 행사들을 기획공연하거나 부인의 동상설치 등을 문화행사를 하고 있다.

 

 

 

 

도미부인 설화

 

 

<都彌>, <百濟>人也. 雖編戶小民, 而頗知義理. 其妻美麗, 亦有節行, 爲時人所稱. <蓋婁王>聞之,

召<都彌>與語曰: "凡婦人之德, 雖以貞潔爲先, 若在幽昏無人之處, 誘之以巧言,

則能不動心者, 鮮矣乎!" 對曰: "人之情, 不可測也, 而若臣之妻者, 雖死無貳者也.

" 王欲試之, 留<都彌>以事, 使一近臣, 假王衣服馬從, 夜抵其家, 使人先報王來. 謂其婦曰:

"我久聞爾好, 與<都彌>博得之. 來日入爾爲宮人, 自此後, 爾身吾所有也."

遂將亂之. 婦曰: "國王無妄語, 吾敢不順? 請大王先人{入} 室! 吾更衣乃進.

" 退而雜 一婢子薦之. 王後知見欺, 大怒, 誣<都彌>以罪,  

其兩眸子, 使人牽出之, 置小船泛之河上.

遂引其婦, 强欲淫之. 婦曰:

 "今良人已失, 單獨一身, 不能自持. 況爲王御, 豈敢相違? 今以月經, 渾身汚穢, 請俟他日, 薰浴而後來."

王信而許之. 婦便逃至江口, 不能渡, 呼天慟哭, 忽見孤舟, 隨波而至, 乘至<泉城島>,

 遇其夫未死掘草根以喫, 遂與同舟, 至<高句麗>< 山>之下. <麗>人哀之,  以衣食. 遂苟活, 終於羈旅.

三國史記卷第四十八.

 

 

    도미는 백제인이다. 비록 소민에 편입되어 있었으나 의리에 아주 밝았다.

그의 아내는 예쁘기도 하고 행실에 절조가 있어 당시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개루왕이 이를 듣고 도미를 불러 말했다.

"대체로 부인의 덕은 정결을 으뜸으로 치지만 만일 어둡고 사람이 없는 곳에서

달콤한 말로 유혹하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드물 것이다."

도미가 대답하였다.

"사람의 정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지만 저의 아내와 같은 여자는 죽어도 변함이 없을 사람입니다."

 

    왕이 이를 시험해 보기 위하여 일을 핑계로 도미를 붙잡아 두고 가까운 신하 한 사람으로 하여금

왕의 의복과 말과 종자를 가장하여 밤에 도미의 집으로 가게 하고,

사람을 보내 미리 왕이 온다고 알리게 하였다. 가짜 왕이 부인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래전부터 네가 예쁘다는 말을 듣고 도미와 내기를 하여 이겼다.

내일 너를 데려다가 궁인으로 삼을 것이니 지금부터 너의 몸은 내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가 마침내 덤벼들려 하니 부인이 말하기를 "국왕은 망언을 하지 않을 것이니

제가 어찌 감히 순종하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대왕께서는 먼저 방으로 들어가소서! 제가 옷을 갈아 입고 들어가겠습니다"

하고 물러나와 어여쁜 여종 하나를 단장시켜 모시게 하였다.

 

   왕이 나중에 속은 것을 알고 크게 노하여 도미에게 죄를 씌워서 그의 두 눈을 뽑아 버리고

사람을 시켜 끌어내어 조그마한 배에 싣고 강 위에 띄워 보냈다.

그리고는 마침내 그 부인을 끌어 들여 억지로 간음하려 하니 부인이 말했다.

"이제 이미 남편을 잃어 혼자 몸으로는 스스로를 부지할 수 없사온데 더구나 왕을 모시게 되었으니

어찌 감히 어기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제가 월경으로 온 몸이 더러우니

다른 날 목욕을 깨끗이 한 뒤에 오겠습니다." 왕이 이를 믿고 허락하였다.

 

    그녀는 곧 도망하여 강 어구에 이르렀다.

그러나 건널 수가 없어서 하늘을 바라보며 통곡하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배 한 척이 물결을 따라 다가오자,

그녀는 그 배를 타고 천성도에 이르러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아직 죽지 않고 풀뿌리를 캐어 먹으며 살고 있었다.

그들은 마침내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의 산산 밑에 이르렀다.

고구려인들이 그들을 불쌍히 여겨 옷과 밥을 주었다.

그리하여 구차스럽게 살다가 객지에서 일생을 마쳤다.

 

                                                               -  < 삼국사기 > 도미열전에서 발췌

 

 

 

아차산성 복원 정비사업 안내판

 

 

 

 

 

하루 해는 어느새 서산에 저물고...........

 

 

 

 

 

뚝섬 일대의 노을

 

 

 

 

 

아차산 종합안내도

 

 

 

 

 

아차산의 역사 유적

 

 

 

 

 

아차산 종합 안내도

 

 

 

 

 

아차산 자생식물 관찰로

 

 

 

 

 광진구 관광안내도

 

 

 

 

아차산 생태공원 옆 공영주차장

 

 

 

 

 

아차산 생태공원의 연못

 

 

 

 

모정

 

 

 

 

지하철 5호선 광나루역 근처에서 산행 뒷풀이 겸 팥죽다회

 

           - 아차산에서는 흐린 날씨로 날씨가 추워져서 간식 후 팥죽다회를 할 예정이였으나,

             동남풍이 불어 산상 다회는 취소하고 뒷풀이 때에 식사를 마치고 차를 나누어 마심......

 

 

 

 

 

탁배기 효과 때문인지 사진이 많이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