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말- photo by 느티나무신부님
저는 신학생 때, 성경을 열심히 읽고 외우니 참 재미있었어요.
여성적이고 아름다운 루가복음부터~ 사도행전을 읽고......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신약과 구약을 읽다가
원문으로 쓰인 히브리어, 라틴어성경을 읽으면서 색다른 맛을 느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부터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왜 예수님은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셨을까?’
누구나 제자를 선택할 때 똘똘하고 능력 있는 놈을 선택할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에서 제일 밑바닥 생활을 하던, 무식쟁이 어부들.....
왜 그들을 선택하셨을까?
그것도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버와 요한!
이렇게 형제들을 선택하신 이유가 무얼까?
유명한 성경의 주석서를 봐도 어부를 선택한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지만
산전수전 겪으면서 사제생활 20여년이 되니까
어느 순간 그 이유가 정리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세 가지 이유 때문에 어부를 불렀기에 주님께 선택받은 이는
이 세 가지의 이유에 대해 늘 의식하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부를 부른 이유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 이유는 무소유의 삶입니다.
어부들에게는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갈리리호수는 내 것이 아닙니다.
건강한 몸 하나가 어부가 가진 전재산이었지요.
어부들은 애초부터 많이 가지고 살지 않았기 때문에 버리는 것도 쉬웠습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농부를 부르셨다면
“예수님, 저를 제자로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진천에도 땅이 좀 있고,
감곡에도 땅이 좀 있는데 내년에 경기가 좀 좋아져서 땅이라도 팔리면 따라갈테니
예수님 휴대폰 번호 좀 찍어주세요.”
인간은 나이를 먹고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나를 지배하던 세상 것이 줄어들수록~
놀랍게도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은 점점 더 커지십니다.
신앙은 비우는 작업입니다.
저에게도 작은 소망이 하나 있다면 장례미사하고 나서 돌아가는 신자들 입에서
이런 말을 듣고 싶습니다.
“글쎄, 돌아가신 김신부님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으시대~”
나이가 들수록 세월은 가속도가 붙습니다.
그러나 하나뿐인 이 몸도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어쨌든 많이 가진 자일수록 비우는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그러나 물질을 버렸다고 해서 무소유의 삶이 아닙니다.
영적 교만이나 탐욕도 소유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무소유는 내적, 외적인 무소유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부를 부르신 두 번째 이유는 공동체성입니다.
그물을 끌어올리려면 힘이 부족한 사람은 더 힘을 내어야 하고,
힘이 센 사람은 그 힘을 조금 줄여야 합니다.
한 사람만 힘을 많이 쓰면 그물은 그냥 뒤집어집니다.
교회공동체 안에서도 나를 죽이고 공동체를 살려야 합니다.
통계적으로 혼자 작업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이기적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같이 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공동체성이 있으니까 내 것을 버릴 수 있습니다.
크리스트교는 시초부터 공동체로 출발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다양한 인간들이 모인 공동체지만 크리스트교가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은
예수그리스도가 그 중심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잘난 척하지 맙시다.
예수님이 큰 바보였듯이 우리도 작은 바보가 되어 공동체를 살리는 사람이 됩시다.
물의 성질을 보면 나뭇조각을 띄우는 부력의 성질과
물속으로 끌어내리는 침력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을 들어 올리는 부력을 가지고 삽니까~
험담을 하든, 모함을 하든... 물귀신처럼,
물속으로 끌어들이는 침력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들의 삶의 목표는 다른 사람을 들어올리는 부력의 삶이어야 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끌어올리면 하느님도 나를 들어올려 주십니다.
아멘
다른 이를 험담하고 끌어내리면 실제로 나도
하느님과 점점 멀어져 있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공동체 안에서 나를 죽이고 겸손하다면, 그것이 곧 부력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부를 부른 세 번째 이유는 종말론성입니다.
어부는 늘 죽음을 가까이 하는 직업이기에 저절로 하느님을 가까이합니다.
바다 한가운데 태풍이 불면 작은 배는 나뭇잎처럼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매일같이 바다로 나갈 때마다 어부들은 죽음과 직면합니다.
죽음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본 사람은 하느님을 체험합니다.
진천본당에서 냉담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교통사고로 차가 깡통처럼 찌그러졌어요.
더욱 놀란 것은 그 사람이 머리카락 하나 다치지 않고 살아난 겁니다.
죽음의 밑바닥까지 체험한 그 사람은 당연히 성당 찾아옵니다.
‘내가 살아난 것은 참 기적이야!’
지가 잘 나서 살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옛날 군종신부시절에 여러 부대를 다녔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특전사입니다.
일명 공수부대라고, 베레모를 쓴 모습을 보면 참 멋지지요.
그들이 훈련 할 때, 백사장에서 찝차가 몸을 이리저리 끌고 다닙니다.
낙하산을 타기 전에 비행기 밑에서 미사를 드리는데 숨소리 하나 나지 않습니다.
그때, 신자대원들은 하나도 예외 없이 총고백을 합니다.
주낙하산이 펴지지 않으면 보조낙하산을 펴면 되는데
그때는 당황하여 미처 그렇게 대처를 하지 못하지요.
떨어진 모습을 보면 뼈하나 없이 흐물흐물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강한 믿음이 없을 수가 없었습니다.
비행기에서 제가 먼저 뛰어내립니다.
‘나를 따라 내려라~’
‘야, 신부님도 내렸다..... 우리가 못 내리겠니?’
특전사들에게는 10명 이상을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체력과
마음의 어둠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신앙도 있습니다.
방위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서 미사를 드리면 군기만 빠진 게 아니라
심기마저 빠져 있습니다.
죽음을 가까이 체험하는 사람들은 저절로 내세를 압니다.
하느님을 저절로 깨닫게 됩니다.
신앙인은 늘 죽음을 묵상해야 합니다.
오늘 드리는 미사가 마지막 미사로 알고
오늘 내가 하는 영성체가 마지막 영성체로 알면
그것이 바로 성인이 되는 지름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부를 부른 세 가지 이유!
첫 번째, 무소유의 삶
두 번째, 공동체성
세 번째, 종말론적인 삶
이 세 가지의 삶을 살지 못하면 신앙인들은 손가락질을 당하게 됩니다.
어떤 자매님이 실수로 저에게 카톡을 이렇게 보냈습니다.
‘신부님께~’ 한다는 것이 ‘신부놈께’ 가 된 겁니다.
자매는 그 다음 날, 자기가 보낸 글을 보고 얼마나 놀랐던지~
하늘이 노~랬을 겁니다.
‘쓰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신부놈’과 ‘신부님’ 은 간발의 차이입니다.
하늘을 향해서 서 있을 때는 ‘님’
땅을 향하여 있을 때는 ‘놈’
‘놈’은 자빠져 있습니다.
위 세 가지 삶을 성실히 사느냐에 따라 놈이 될 수도 있고
님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