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3. 23. 13:21ㆍ나의 이야기
세종 111권, 28년(1446 병인 / 명 정통(正統) 11년) 1월 5일(계유) 의정부 좌의정 신개(申槪)가 졸(卒)하였다.
개(槪)의 자는 자격(子格)이요, 본관은 평산(平山)이었다. 고려의 태사(太師)인 신숭겸(申崇謙)의 후손이었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글을 잘 지었다. 계유년에 과거에 올라 사관(史官)에 보직되고, 여러 번 옮겨 사간원 우헌납(司諫院右獻納)이 되었으며,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전직(轉職)되어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을 겸임하고 사인(舍人)에 승진되었다. 계사년에 우사간(右司諫)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에 언사(言事)로써 파면되었다가 얼마 아니되어 예조 우참의(禮曹右參議)에 임명되고, 충청·황해·경상·전라도의 감사와 형조 참판을 지냈다.
신해년에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고, 임자년에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가 되고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에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병진년에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에 승진되어, 왕명(王命)을 받아 《고려사(高麗史)》를 찬수(撰修)하고 조금 뒤에 찬성(贊成)에 승진되어, 모든 의논할 일이 있으면 번번이 내전(內殿)에 불러 들어와서 일을 의논하였다. 정사년에 글을 올려 염법(鹽法)을 시행할 것을 청하였다.
기미년에 우의정에 임명되매 전문(箋文)을 올려 사퇴(謝退)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이 내 뜻이 아니라, 곧 태종(太宗)의 유교(遺敎)이다.’ 하였다. 갑자년에 안석[几]과 지팡이[杖]를 내려 주고, 을축년에 좌의정에 승진되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 73세이었다. 임금이 매우 슬퍼하여 3일 동안 조회를 폐하고, 조문(弔問)과 부의(賻儀)를 의식대로 하고 관(官)에서 장사를 치렀다. 문희(文僖)란 시호(諡號)를 내리니, 학문에 부지런하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을 문(文)이라 하고, 조심하여 두려워하는 것을 희(僖)라 하였다.
신개는 타고난 천성이 단정하고 엄숙하며, 일을 처리함이 근면하고 근신하였다. 계축년에 야인(野人)이 변방을 침범하여 사람과 가축을 죽이고 사로잡아 가므로, 임금이 마음을 단단히 차려 이를 토벌하려 하니, 대신(大臣)들이 옳지 않다고 하는 사람이 많았다. 신개는 임금의 뜻을 헤아려 알고 글을 올려 토벌하기를 청하였으되, 정토(征討)하는 방략(方略)과 길을 나누어 가서 치는 데 있어, 지나는 도로(道路)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다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말이 자못 상세하여 임금의 뜻에 매우 합하였으므로, 임금이 이를 보고 크게 기뻐하였다. 이로부터 갑자기 발탁하여 써서, 신개를 얻음이 늦었다고 말하였다. 일찍이 좌우(左右)에게 이르기를, “신개는 직위가 그 재주와 맞지 않는다.” 하더니, 몇 해가 되지 아니하여 마침내 수상(首相)이 되어 사랑이 비할 데가 없었다.
사람됨이 자못 지나치게 살피더니, 재상의 직위에 있게 된 뒤에는 무릇 일을 의논할 적엔 오로지 남의 마음에 맞기만을 힘썼으니, 그 각염(搉鹽 소금의 전매) ·입거(入居)·공법(貢法)·행성(行城) 등 모든 백성에게 불편한 것은 모두 신개가 건의(建議)하여 수창(首唱)한 것이므로, 당시의 세론(世論)이 그를 비난하였다. 뒤에 세종(世宗)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아들은 신자준(申自準)·신자승(申自繩)·신자형(申自衡)이었다.
- 다음 카페 <한국사사료모임> 빈구름 님의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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