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산 신씨 역대인물

2014. 3. 24. 17:31나의 이야기

 

 

 

 

 

      

                                                                        신숭겸 장군과 왕건

 

 

평산신씨 역대인물

신보장(申甫藏)고려조에 원윤을 지냈다.


  (申晟)고려 때 원윤을 지냈다.


  (申勁)고려 때 태자 태보를 역임하였다.


신유비(申愈毗)고려에서 승지를 지냈다.


신응시(申應時)고려조에 전서를 역임하였다.


  ()고려 때 병부 낭중을 지냈다.


신자명(申自明)고려에서 봉익대부로 춘천 부사를 지냈다.


신헌주(申憲周)고려 때 상호군을 역임하였다,


  (申諿)고려조에 전리판서 수문전 대제학을 지냈다.


신군평(申君平)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고, 권신에 아부하여 벼슬하는 자의 고신을 대관으로서 서명하지 않아 미움을 사서 파직 당했다 1352(공민왕1)나주목사에 임명 되었으나 노환으로 누운 어머니를 위해 무임하지 않다가 1355년 좌대언이 되고, 뒤에 승직에 임명하려고 왕이 불렀으나 병으로 사퇴, 뒤에 어사대부가 되었다.


  (申賢)1298(충렬왕24)~1377 (우왕3)
자는 신경 시호는 문정 고려 개국공신 숭겸의 후손 우탁의 문인,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원나라에 가서 주공천,허겸,전당, 등 유명한 학자들과 교유하며 더욱 깊이 학문을 연구하고 당시의 대학자로 추앙되었다, 명나라에 자주 초빙되어 명제로부터 스승의 대우를 받고 불훤재라는 호를 받았다,


신중전(申仲全)고려 때 동지밀직사사 전라도 도순문사,등을 거쳐 감찰대부,상호군을 지내고 은산백에 봉해졌다,


신익지(申翼之)고려조에 이부상서,집현전 학사를 지냈다,


  (申彝))고려 때 판전농시사를 역임하였다,


  (申晏)고려 때 음보로 봉선고 판관을 거쳐 종부시령에 이르렀는데, 고려가 망하자 평산 황의산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조선개국 후 수차례 벼슬에 나올 것을 권유 하였으나,응하지 않고 1417(태종17)에 죽었으며, 시인들이 그의 절의를 높여 그가 살았던 곳을 배록동이라 하였다, 후에 좌의정에 추중되었다,


  (申珪)고령세 참판을 역임하였다,


  (申琿)고려 때 한림을 지냈다,


신용희(申用羲)고려조에 때 감차어사를 지냈다,


신윤공(申允恭)고려조에 예의판서를 역임하였다,


신윤안(申允安)고려에서 상장군을 지냈다,


  (申玹)고려 때 군수를 지냈다,


  (申玎)고려 때 현령을 지냈다,


  (申雅)자는 담수, 호는 한천자, 우왕의 국구로서 동지밀직사사에 이르렀으나 이성계일파에게 틴핵을 받아 전주에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나와 평산의 한천에 은거하였다,


신정도(申丁道)자는 유지, 조선에서 봉상시윤을 지냈다,


신정리(申丁理)자는 추지, 조선 때 사헌부 장령을 지냈다,


  (申鑑)조선조에 서흥 현령을 역임하였다,


  (申浩)자는 선오, 시호는 사간, 한림 혼의 맏아들로서 평산 출신, 공양왕 때 지신사로 왕명의 출납을 맡아보다가 고려의 국운이 쇠하여 이성계의 신하들이 옥새를 탈취하려하자 이에 불응하였고, 땅바닥에 던져 일각이 조각났다, 이를 본 공양왕과 태조는 그를 고려의 충신이라고 하였다,


신효창(申孝昌)자는 성대, 호는 화봉, 시호는 제정, 고려의 진사로 공양왕 때 형조좌랑, 지평 등을 역임하고, 1394(태조3)에 호조 전서에 올랐다, 이듬해 상장군이 되어 경상도 일대의 군비를 점검하고, 이어 대사헌, 한성윤을 거쳐 1402(태종2)승녕부윤,  동지중추부사, 충청도 관찰사, 제생원 재조, 좌군 도총제에 이르렀는데1418(태종18)무주로 유배되었다가 1427(세종9)에 풀려나왔다, 그는 풍수학에 능통하여 뒤에 풍수학 제조를 지냈으며, 원종훈에 책록되었고 좌의정에 추종되었다,


  (申商)1372(공민왕21)~(세종17)
자는 득지, 시호는 공도, 생원, 진사가 되고, 1390(공양왕2)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예조 정량, 경력, 연안부사를 역임하고, 1405(태종5)산호군으로 동북면에 파견되어 국경경비를 담당했다, 그 후 예조 참판에 올라 1419(세종1)진하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경상도 도 관찰사, 대사헌, 이조 참판, 우군 도총제 겸 평안도 도 관찰사 등을 지내고 1425년 형조 판서, 이듬해 예조 판서가 되어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申槩)1374(공민왕23)~(세종28)
자는 자격, 호는 인재. 시호는 문희, 대제학 집의 손자, 종부시령 안의 아들로서 1390(공양왕2)사마시를 거쳐 1393(태조2)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검열로 발탁되고,태종 때 이조 정랑, 예조와 병조의 참의, 충청도 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1417(태종17)공조 참판으로 천추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집현전 제학이 되었다, 세종 때 전라도, 황해도, 경상도, 경기도, 등의 도 관찰사로 외직을 맡았다가 형조 참판, 예문관 대제학, 대사헌, 도총제 등을 역임하였다, 1433(세종15)이조판서로서 북변에 침입이 잦은 야인의 정벌을 건의하여 이들을 토벌토하도록 했다, 1434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 형조판서를 거쳐 1436년 우참찬에 올라(고려사) 수찬에 참여했고, 좌찬성을 지낸 후 1439년 우의정이 되었다, 1444년 궤장을 하사받고 기로소에 들어갔으며,14447년 좌의정에 이르렀다, 그의 충성을 높이 사 세종은 세종의 묘정에 배향 되었다,


  (申曉)호는 효재, 효창, 만창, 서호산인, 안의 아들, 좌의정 개의 동생,1402(태종2)식년문과에 장원하였으며,1404년 우정언으로 노이, 이양명, 등과 궁중의 금사를 발설하여 탄핵을 받고 연안에 유배되었다, 1406년 풀려나와 은퇴하여 행주에 은거했으며, 1426(세종8)교수관이 되었고 81세에 죽었다,


신세림(申世霖)1384(우왕10)~1445(세종27)
일명 인림, 예빈시 별제 진석의 아들로서 도화서 별제, 영월 군수를 역임했고, 강희안 이후의 제일가는 화가로 일컬어지고 있다,


신자준(申自準)1445(세종27)장령에 올라 판종부시사를 거쳐1460(세조6)형조참의, 충청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신자승(申自繩)자는 장언, 호는 동호거사,1444(세종26) 문과에 급제 한 후 사간원 좌정언, 지평,지사간원사,장령을 거쳐 1469(예종1)대사성에 이르렀다,


신숙빈(申叔彬)호는 한천처사, 조선 때 문장과 행의가 당세에 고명한 학자이다, 문경의 한천 서원에 제향되었다,


  (申鏛)1480(성종11)~1530(중종25)
자는 대용, 호는 위암, 시호는 문절, 종친부 저첨 말평의 아들로서 1498(연산군4)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검열을 거쳐 주서로 춘추관 편수관을 겸하여(연산군일기)의 편찬에 참여했다,1506(중종1) 도총부 도사로서 사가독서를 하고,1508년 헌납, 이어교리, 지평, 응교,장령, 전한,사간, 부제학, 승지,를 거쳐 이조판서에 승진하고, 그 후 예조 판서로서 동지경연연춘추관성균관사를 겸했다, 기묘사화 이 후 외직을 자원, 경기도, 전라도, 경상도 관찰사를 지내다가1529(중종24)형조판서가 되었다,


  (申抃)1470(성종1)~1521(중종16)
자는 낙천, 호는 귤우정, 시호는 정신, 정랑 수복의 손자, 감찰 영화의 아들,1501(연산군7)진사가 되고,1515(중종10)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학유를 거쳐1519년 지평, 집의에 이어 황해도 도사가 되었다. 이해 가묘사화가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지평에 은거, 1521년 신사무옥에 참형을 당했다, 추후 이조판서에 추증 되었다,


신명인(申命仁)자는 영중, 호는 귀봉, 풍류광객, 시호는 정청, 김식의 문인1519(중종14)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이약수 등과 성균관 유생 1천여 명을 이끌고 대궐에 돌입, 조광조 등의 구명을 상소했다, 이듬해 거창에 피난 갔던 스승 김식이 자결하자 그 시체를 충주에 모셔 장사지내고 그를 애도하는 (조송옥사)를 지었다, 그 뒤 벼슬에 나갈 것을 단념하고 시주로 세월을 보냈다, 이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신준미(申遵美)자는 사휴, 별제 원의 아들 조광조의 문인,1519(중종14)현량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검열이 되었으나 이해 기묘사화로 현량과가 폐지되자 은거,1545(인종1)현량과의 복구로 봉상시 주부가 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금강 상류에 한림정을 짓고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申瑛)1499(연산군5)~1559(명종14)
자는 윤보,시호는 이간, 정언 효의 아들, 김식의 문인,1516(중종11)진사시에 합격하고,1523년 알성문과에 장원한 후 홍문관에 발탁되어 수찬으로 있을 때 화를 입은 김식을 변화하다가 탄핵을 받았다, 뒤에 형조 좌랑, 함경도 도사를 거쳐 공조,형조,병조의 정랑과 지평을 역임하고, 권신에 아부하지 않아 수원 부사로 좌천되었으나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추앙을 받았다, 뒤에 한성부 서윤을 지내고, 10여년 동안 이조,호조,예조,병조의 참판을 역임하고 대사헌 대사간, 호조 판서를 거쳐 우참찬에 올랐다가 지중추부사에 이르러 사직했다,


신계성(申季誠)자는 자함, 호는 송계, 조선 때 석계 정사에서 제자 양성에 힘쓰는 한편 도학 연구에 전념한 학자로서 조식,김대유,와 더불어 친분을 두터이 하니 세인이 삼고라 하였다,


신효중(申孝仲)1536(중종31)~?
자는 군우, 김노의 사위 진사시에 합격한 후 도사 등을 거쳐 서윤에 이르렀다, 해서 초서에 뛰어났다,


신사임당(申師任堂)1504(연산군10~1551(명종6)
호는 사임당, 임사재, 진사, 명화의 딸, 감찰 이원수의 부인,율곡이이, 의 어머니, 강원도 강릉 출신, 효성이 지극하고 지조가 높았으며, 어려서부터 경문을 익히고 문장, 침공,자수,에 이르기까지 일가를 이루었다, 특히 시문과 그림이 뛰어났으며(유대관령망친정)(사친)등의 한시는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 것이고, 안견의 영향을 받은 화풍에 여성의 독특한 섬세, 정묘함을 더하여 우리나라 제일의 여류화가라는 평을 받았다, 그 중 산수, 포도,  , 벌레, 등을 잘 그렸으며, 자녀교육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현모양처의 귀감이 되었다,


신여종(申汝棕)자는 중온, 1543(중종38)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집의, 직제학, 조승지, 청홍도 관찰사 등을 거쳐 동지충추부사, 이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신의충(申義忠)조선 때 통례를 지냈다,


  (申經)자는 경회, 호는 옥산정,1474(성종5)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사헌부 정언, 보성 군수, 장령을 거쳐 1509(중종4) 순창 군수 등을 지냈으며, 파직되었다가 고주 목사에 이르렀다,


  (申翌)명인의 아들로서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선전관으로 있다가 1556(명종11)에 직권남용으로 파직되었다, 1559년 함평 현감으로 치적이 있어 4품직에 승진되었다, 1571(선조4)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1573년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어 제주 목사, 전라도 병마절도사, 1583년 순천 부사 등을 역임했다, 1592년 임진왜란에 충청도 지방의 방어를 맡았으나 패전했다, 문장 글씨에 뛰어났으며, 순천 부사로 있을 때 기묘사화에 희생 된 팔현을 추모하여(팔현전)을 간행했다.


  (申浩)1539(중종34)~선조30)
자는 언원, 시호는 무장, 고부출신 1567(명종22)무과에 급제 조산만호를 지내고, 도총부 도사, 경력을 역임했다, 뒤에 낙안군수로 있다가 1592(선조25)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을 도와 견내량, 안골포 등의 해전에서 공을 세워 통정대부에 올랐고, 1597년 정유재란 때 교룡산성 수어사로서 남원성이 포위되자 이를 지원하러 갔다가 전사했다, 원종공신 1등에 형조판서로 추종되었고, 남원의 충렬사에 제향 되었다,


  (申磼)1541(중종36)~1609(광해군1)
자는 백준, 호는 독송, 시호는 충헌, 화국의 아들, 명장 입의 형,1584(선조17)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정언, 지평, 우부승지 등을 거쳐 1592년 이조 참판, 형조 참판을 지내고 이해 임진왜란에 비변사 당상으로 활약했다, 이듬해 병조참판에 이어 평안도 병마부절도사로 부임하였으며, 1595년 관내 철산군에 탈옥사건이 일어나 그 책임으로 파직되었으나, 곧 형조참판으로 기용되고, 특진관이 되었다, 1604(선조37)호성공신 2등에 평천 부원군으로 봉해졌고, 후에 함경도 관찰사, 병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죽은 뒤 진천에 그의 사당이 세워지고 사액되었다,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543(중종38)~1592(선조25)
자는 중준. 입의 형,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 널리 경서를 통독했으며, 이 이, 성혼, 등이 탄핵을 받고 조정을 떠나자 유생을 이끌고 탄핵자의 처형을 요구, 박근원 등을 유배시켰다, 뒤에 선공감역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고, 임진왜란 때 모친과 함께 이천에 피난도중 적을 만나 모친 벼랑에서 투신하자 그도 따라 뛰어들어 모친을 구하고 자신은 죽었다,


  (申砬)1546(명종1~1592(선조25)
자는 입지, 시호는 충장, 생원 화국의 아들, 1567(명종22)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을 거쳐 도총부 도사, 경력을 지냈으며, 진주 판관이 되었다, 1583(선조16)온성부사가 되어 북변에 침입해온 니탕개를 격퇴하고 두만강을 건너가 야인들의 소굴을 소탕하고 개선,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에 올랐다, 1587년 홍양에 왜구가 침입하자 우방어사가 되어 군사를 인솔, 토벌에 나섰다가 이미 왜구들이 철수했으므로 돌아왔다, 1590년 평안도 병마절도사에 보직되고, 이듬해 한성부 판윤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 도순변사가 되어 빈약한 병력으로 출전, 충주의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적군과 대결했으나 참패, 부하장 김여물과 함께 강물에 투신자결 했다,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申佫)?~1592(선조25)
무과에 급제하고, 영흥부사 등을 거쳐 1587(선조20)경상도 방어사로서 왜구에 대비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중위대장이 되고, 도원수 휘하에 부원수로서 한강을 지키다 패전하여 유도대장을 따라 양주에 후퇴해 있었다, 이때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혼,의 원군을 만나 산병을 수습한 뒤 양주 해유령에서 왜구를 대파했다, 당시 한강 패전 후 임진강에 후퇴해 있던 도원수 김명원,이 명령불복 죄로써 그를 무고하는 장계를 올리자 우의정 유홍,의 장계 내용을 믿고 그의 참형을 청함으로서 양주에서 참형 당했다, 이날 오후 양주에서의 첩보가 도착하자 그의 형을 중지시키기 위해 선전관이 뒤따라갔으나 형을 집행한 후에야 현지에 도착했다, 연안의 현충사에 제향 되었다,


  (申點) 자는 성여 호는 척재, 시호는 충경, 1564(명종19)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예조 정랑에 올라 길주목사, 진주목사, 강원 감사 등을 역임하고, 1592(선조25)사은사로 명나라에 갔을 때 본국의 병화소식을 듣고 명나라에 청원하여 출병케 한 공으로 평성 부원군에 봉해졌다,1593년에 형조,공조, 판서를 거쳐 예조 판서, 판중추부사에 이르렀으며,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申硈)자는 중견,1567(명종22)무과에 급제하고, 경상좌우병사 등을 거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기 수어사로서 임진에서 순절하였다,


신세준(申世俊)회령 출신으로 1529년 임진왜란 때 카토오의 왜군이 회령을 침범하자 아전인 국경인이 그 일족과 반역하자 부사를 비롯하여 당시 그곳에 와있던 임해군, 순화군, 및 그 종신들을 붙잡아 적에게 넘겨주고, 오윤적, 등과 의병을 일으켜 그 수령이 되고,국경인의 도당을 살해하여 그 목을 경성의 의병장 정문부에게 인도했다, 그 공으로 절충장군에 오르고, 숙종 때 현충사에 제향 되었으며,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신동현(申東顯)자는 회숙, 호는 매죽당, 조선 때 판관을 지냈다,


신길원(申吉元)조선에서 문경 현감으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시종 임지를 고수하다가 문경이 함락되자 왜병에게 붙잡혔으나 끝내 굴하지 않고 22세의 젊은 몸으로 산화 했다,그 후 좌승지에 추증되었고, 대구의 표충사에 제향 되었다,


신몽헌(申夢憲)자는 여식, 1618(광해군10)무과에 급제하고, 이해 후금과의 싸움에 장관으로 출정, 다음해 부차 싸움에서 많은 적을 죽인 뒤 19세로 산화했다,


신충일(申忠一)1554(명종9)~1622(광해군14)
자는 서보, 증참찬 묵의 아들,1583(선조16)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이 되고, 강진과 고산의 현감을 거쳐 1595년 남부주부가 되어 왕명으로 건주 누루하치성에 가서 누루하치족둘의 상황을 탐지, 그동안의 견문을97개조의 기사와 정밀한 지도로 제작하였으며, 산천,지명,군비,풍속, 등을 보고했다, 1596년 삼수 군수, 호남 독포사가 되었고, 이듬해 접반사로서 명나라 사신을 맞았으며,  1599년 김해부사를 거쳐 1602년 창성과 덕원의 부사를 역임하고,1617(광해군9)경상도 수군절도사에 승지, 부총관에 이르렀다, 앞서 선조 때 건주에 다녀온 뒤에 작성한{건주기정도기}는 한만관계사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죽화를 잘 그렸으며, 이정과 함께 양 대가로 이름을 날렸다, 그 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신경희(申景禧)1588(선조21)음보로 임관되어 이듬해 정여립의 모반이 일어나자 그 일당인 서흥복을 체포함으로서 육 품직에 올랐다,1593년 고산 현감으로 도원수 권율의 휘하의 종군, 이해 행주산성의 대첩보를 처음으로 왕에게 보고했으며, 면천 군수, 중화부사 등을 역임했다,


신의경(申義慶)자는 효직, 호는 서파,1620(광해군12)사마양시에 합격하고, 김장생과 교유하며 상례를 깊이 연구하였다, 후에 대사헌에 추증되었다,


  (申欽)1566(명종21)~1628(인조6)
자는 경숙, 호는 상촌, 현헌, 현옹, 방옹, 시호는 문정, 개성 도사 승서의 아들,1585(선조18)진사가 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학유, 경원 훈도, 감찰, 병조 좌랑을 역임했다, 1592(선조25)임진왜란 때 양재도 찰방으로 삼도 순변사 신입을 따라 조령 전투에 참가, 신입이 패하자 강화에 들어갔다가 체찰사 정철의 종사관이 되었다, 뒤에 지평, 사성, 대사간 부제학, 도승지, 병조 판서를 지내고,1608(선조41)대사헌으로 세자책봉주청사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했다, 선조부터 영창대군의 보필을 부탁받고 유교출신의 한 사람이므로1631(관해군5)계축옥사가 일어나자 파직,1617년 춘천에 유배되었다, 1621년 풀려나와 인조반정(1623)후 이조판서가 되어 대제학을 겸했으며, 노서의 중진으로 우의정 거쳐1627(인조5)좌의정이 되고 이해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세자를 모시고 전주에 피난, 돌아와서 영의정에 올랐다, 정주학자로 문명이 높았고, 장유,이식과 함께 조선 중기 한문학의 태두로 일컬어진다, 글시를 잘 썼다 인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申廷)임진왜란 때 백의로서 창의하여 순절했다, 승지 추증되었다,


  (申鑑)자는 명원, 호는 소선, 만옹, 1597(선조30)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1601년 정언이 되고, 다음해 예조, 병조의 정랑을 역임했다, 1603년 용양위 부사직 겸 춘추관 기주관으로서 앞서 임진왜란 때 불타서 없어진{왕조실록}의 재간에 참여했고,1605년 봉산 군수가 되었다, 광해군 때 원주목사를 지내고, 인조 초에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그 후 남원부사, 강화부유수 등을 역임했다,


신경진(申景珍)1605(선조38)무과에 급제하고, 삼가현감, 의주부윤, 부총관 등을 거쳐1641(인조19)충청병사를 지내고 도총관에 이르렀다,


  (申慄)1572(선조5)~1613(광해군5)
자는 구이. 순일의 아들,1595(선조28)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주서가 되고,1599년 병조 정랑에 올랐다 이어 공조 정랑, 직강,지평을 역임하였다,1604년 평안도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1605년 문학이 되어 춘추관 기주관을 겸하여 임진왜란 때 소실된 역대 실록의 중간에 참여했고,1609(광해군1)예조 정랑으로 다시{선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다, 이듬해 상례를 거쳐 1612년 봉산 군수가 되어 병조의 문서를 위조하여 사용하던 김경립을 체포한 뒤에 대북파의 사주로 그에게 강요하여 김직재, 김백함의 부자가 김제남과 함께 모반을 한 사실을 자백받아 이를 중앙에 보고했다, 이로써 일대 옥사가 일어나 김직재, 등 소북파가 숙청당했으며, 그 공으로 예조 참판에 발탁되고 영풍군에 봉해졌다,


신경진(申景稹)1575(선조8)~1643(인조21)
자는 군수, 시호는 충익, 도순변사 입의 아들, 김장생의 문인, 아버지의 전공으로 선전관이 되었고, 이어 경원부사, 벽동 군수를 지낸 후 사직하였다, 광해군의 정치가 점치 문란해지자 김유와 반정을 협의, 이어 이귀, 최명길, 등과 모의했다, 1622(광해군14) 박원종의 추천으로 효령성 별장이 됨을 기회로 이듬해 반정군을 인솔하여 선두에서 공을 세우고 정사공신 1등이 되어 공조 참의, 병조 참지, 병조참판을 역임했다, 1633(인조11)병조판서에 올라 훈련, 호위, 포도의 3대장을 겸하고 공서파의 영수가 되었다, 이해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을 수비했다, 뒤에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640년 평성 부원군에 봉해졌고,1642(인조20)영의정에 올랐다 인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신경유(申景裕)자는 자관, 시호는 경의 도순변사 입의 아들로서 1603(선조36) 무과에 장원하고, 벼슬은 돈령부 도정을 지냈으며, 1623년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 2등으로 동평군에 봉해졌다, 이어 경기도 수군절도사를 거쳐 황해도 병마절도사에서 한 때 파직되었다가 1629년 호위대장에 서용되고, 뒤에 공청도 병마절도사, 전라도 병마절도사 등을 지냈다, 순조 대 병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신익성(申翊聖)1588(선조21)~1644(인조22)
자는 군석, 호는 낙전당, 동회거사, 시호는 문충, 영의정 흠의 아들, 척화오신의 한 사람,12세 때 선조의 딸 정숙옹주와 혼인하여 동양위에 봉해졌고,1606(선조39)부총관이 되었다, 광해군 때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다가 전리에 방축 되었다, 인조반정 후 재 등용되어 이괄의 난 때는 왕명으로3궁을 호위했고,1627(인조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세자를 전주에 피난했다,1636(인조14)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에 왕을 호조하여 끝까지 청군과 싸워서 지킬 것을 주장, 주화파 대신들이 세자를 청나라에 불모로 보내어 화의를 맺자고 주장하자 칼을 뽑아 그들을 위협하기까지 했다, 화의의 성립 후 삼전도비사자관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거부, 척화를 계속 주장하다가 1643년 척화오신중의 한 사람으로 청나라 심양으로 붙잡혀 갔다, 후에 풀려나와 귀국, 시주로 세월을 보냈다, 효성과 충의가 지극했고, 문장과 글씨에도 능했다,


신경인(申景陻)1576(선조9)~1650(효종1)
자는 자정, 시호는 충도,도순변사 입의 아들로서 1615(광해군7)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과, 도총부 도사를 역임했다, 1623년 인조반정 때 공을 세워 경기도 수군절제사에 승진, 정사공신 2등으로 동성군에 봉해졌다, 이듬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호위대장이 되어 인조를 공주로 호종했고, 1625년 전라도와 충청도의 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으며, 이어 삼도 수군통제사에 올랐다, 그 후 형조, 공조 판서를 거쳐 총융사를 역임하였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신민일(신민일)1576(선조9)~1650(효종1)
자는 공보, 호는 화당, 사재감 첨정 암의 아들, 성혼의 문인, 1615(광해군7)사마시를 거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학유, 성현도 찰방, 감찰, 연서도 찰방, 은계도 찰방을 역임한 후 사퇴하여 인조반정 후 예조 정랑이 되고, 1627년 정묘호란 때 왕을 호종, 강화에 가서 화의를 반대했다, 장령, 사간, 등을 거쳐 인조의 아버지를 원종으로 추승하려는 의논이 일어나자 반대하자 강계로 유배되었으며, 강화 후 영남에 내려가 있다가 1640(인조18)동부승지가 되고 이어 우승지가 되었다, 1650(효종1)조익시에게 천거되어 대사성에 올랐다,
  (申冕)자는 시주, 호는 하관당, 1637(인조15)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이조 좌랑을 거쳐 부제학, 대사간, 등을 역임했다,


신석번(申碩蕃)1596(선조29)~숙종1)
자는 중연, 호는 백원, 선무랑 근의 아들, 상주 출신, 정경세의 문인,1633(인조11)사마시에 합격, 1641년에 왕자사부, 1644년 경기전 참봉을 역임하고, 효종 때 유일로서 천거를 받아 형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현종 때 사복시 주부, 공조 정랑, 상운도 찰방, 종부시 주부, 진선, 사업 등에 임명되었으나 79세로 병까지 들었으므로 역시 사퇴했다, 문장에 능하고 경학에 밝았다, 이조참의에 추증되었고, 상주의 운계서원에 제향 되었다,


  (申蕞)1619(광해군11)~1658(효종9)
자는 계량, 호는 춘소, 동양위 익성의 아들로서17세 때 진사가 되고,1648(인조26)정시문과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승문원에 등용되었다, 이어 검열, 주서, 1650(효종1)봉교로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여{인조실록}편찬에 참여했다, 그 후 전적, 낭천 현감을 지내고, 함경도 도사로 나갔다가 병사했다, 특히 문장에 능하였으며, 부에 뛰어났다,{해동사부}에 시부 약간이 전해진다.


  (申炅)자는 용희, 호는 화은,1635(인조13)사마시에 합격했으나 병자호란 이후 벼슬을 단념하고, 태안현 백화산에서 학문에 전념했다, 경사를 비롯하여 복술, 성력, 산수, 등에 능했다, 집의에 추증되었다,


신익전(申翊全)1605(선조38)~1660(현종1)
자는 여만, 호는 동강, 흠의 아들, 김상헌의 문인, 1636(인조14)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불모로 잡혀갔다가 돌아와 사인, 사간, 등을 거쳐 광주 목사를 지냈다, 효종 때 동지춘추관사로{인조실록} 편찬에 참여했고, 뒤에 한성 부좌 우윤을 거쳐 도승지에 이르렀다, 역학에 밝았고 문장에 뛰어났다,


신익륭(申翊隆)자는 군필, 호는 호량, 참판 감의 아들, 김상헌의 문인, 1635(인조13)익위사 세마를 거쳐 시직에 승진했다, 이듬해 병자호란에 빈궁을 모시고 강화로 피난 갔으나 성이 함락되고 화약이 성립되자 벼슬을 버리고 30년 동안 유랑하다 회덕에서 객사했다,


신명규(申命圭)1618(광해군10)~1688(숙종14)
자는 원서, 군서, 호는 묵재, 적안, 부사 상의 아들,1662(현종3)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사간, 부수찬, 집의를 역임했다,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진도의 봉암사에 제향 되었다,


신성립(申誠立)자는 자정, 시호는 충목, 무과에 급제한 후동지중추부사를 거쳐 1636( 인조14)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체부장으로 남한산성 북문에서 용감히 사우다 순절하였다, 승지에 추증되었다,


  (申擙)자는 사탁, 호는 극재,1637(인조15)병자호란 때 광주 험천에서 의병장으로 활약다가 순절하였다, 승지에 추증되었다,


  (申漫)1620(광해군12)1669(현종10)
자는 만청, 호는 주촌, 시호는 효의. 영의정 흠의 종손, 시직 익룡의 아들, 송시열의 문인,1636(인조14)에 일어난 병자호란이 굴욕적인 화의로 끝남을 보자 회덕의 송시열을 찾아가 학업을 닦았다, 효종 때 조정에 들어간 송시열의 요청으로 북벌에 관한 의견을 내놓아 반영시켰으나 효종이 죽어 그 계획이 와해되었다,1665(현종6)원자의 탄생으로 경과가 설치되자 송시열의 지시로 이를 비난하여 남인과 논쟁을 벌였으나 마침내 송시열이 우찬성에서 사직함으로써 낙향했다,


신의화(申義華)1637(인조15)~1662(현종3)
자는 서명, 호는 사아, 사치, 동양 위 익성의 손자, 도사 최의 아들,1654(효종5)진사가 되고,1662(현종3)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정언에 이르렀다, 시문이 뛰어났고, 글씨와 그림에도 능했다,


  (申晸)1628(인조6~1687(숙종13)
자는 백동, 호는 분애, 시호는 문숙, 영의정 흠의 손자, 참판 익전의 아들,1648(인조26)사마시에 합격하였고,1664(현종5)춘당대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1667년 문학, 검열, 겸설서 등을 역임했다, 이듬해 지평, 정언, 대교, 주서, 등을 거쳐1669년 문학 수찬 다음해 응교, 집의를 지내고,1672년 전라도 관찰사오 나갔다가 이듬해 대사간, 대사성을 지냈다,1674(현종15)평안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1675(숙종1)남인들이 집권하고 서인이 추방될 때 남인, 윤휴, 등의 탄핵으로 파직 당했다가,1678(숙종4)도승지로 등용되었다, 이듬해 한성부 좌윤이 되었으나 허적, 탄핵하다 도리어 삭직,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대사헌에 발탁, 사은 겸 진주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인경왕후가 죽자 빈전도감 제조를 겸직했다, 이듬해 우참찬이 되고,1685년 예조판서에 재임하였고, 다음해 한성부 판윤을 거쳐 강화부 유수로 죽었다 시문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썼다,


  (申懹)자는 자평, 호는 관곡1678(숙종4) 증광문과에 급제한 후 강원감사, 대사간, 대사성, 개성유수 등을 역임하고 형조 참참에 이르렀다,


신명전(申命全)자는 후오 무과에 급제한 후1673(현종14) 전라병사를 거쳐 통어사에 이르렀다,


신후명(申厚命)자는 천휴, 호는 임하당, 1666(현종7)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 강원도,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1698(숙종24)에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신후재(申厚載)1636(인조14)~1699(숙종25)
자는 덕부, 호는 규정, 서암 현감 항구의 아들로서 1660(현종1) 사마시를 거쳐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승문원 벼슬에 등용되었다가 지평, 부교리를 지내고,1679(숙종50강원관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제거될 때 삭직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우승지, 도승지등을 역임했다, 그 뒤 사은 겸 진주주청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강화부유수, 개성부유수, 한성부판윤을 지냈다,


  (申嬼)덕우의 아들, 장형광의 문인, 무과에 급제하고, 혜산진  첨절제사를 거쳐 1658(효종9)청나라의 원군 요청으로 나선정벌에 참가했고, 함경북도 우후로 영장이 되어 조총군 2백명을 인솔하고 흑룡강까지 원정, 러시아 스케파노프 선대 10여척을 불태우고 적장 스테파노프 이하 270여명을 살해한 뒤에 그 패잔병들도 전멸시켰다,1661(효종2)경상우도 병마절도사를 거쳐1667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1669년 경상좌도 병마절도사,1674년 황해도 병마절도사를 지내고, 이듬해 삼도 수군통제사에 올랐다가1681(숙종7)포도대장이 되었다,


신여석(申汝皙)자는 백이, 조선 때 부사를 지냈다,


신여철(申汝哲)1634(인조12)~1701(숙종27)
자는 계명, 시호는 장무 영의정 경진의 손자, 도정, 준의 아들, 효종 때 성균관에 입학했다가 효종이 북벌을 위해 훈척의 자제들에게 무예를 닦게 하자 유생을 이끌고 무예를 연마했다, 현종 초 선전관을 지낸 후 무과에 급제하였고,1669(현종10) 충청도 수군절도사를 거쳐1671년 삼도 수군통제사, 이듬해 평안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했다,1675(숙종1) 병조참판,1680년 총융사, 공조판서,1688년에 병조판서로 훈련대장을 겸직했다,


  (申恕)자는 사추, 호는 송호, 학로, 조선조에 서화가로 명성을 얻었다,


  (申銋)1642(인조20)~1725(영조1)
자는 화중, 호는 죽리, 한죽당, 시호는 충경, 집의 명규의 아들 박세체의 문인,1657(효종8)진사가 되고,1686(숙종12)정시문과 병과에 급제하였고, 여러 버슬을 거쳐 연안부사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고 돌아와 예조, 병조, 호조, 이조의 참의를 지냈다, 승지, 대사간, 대사헌, 지중추부사를 역임한 후 기로소에 들어가 참찬, 공조판서에 올랐고,1724(경종2)신임사화로 노론의 중진들이 제거되자 이를 항소하다가 제주도에 위리안치 되었다,1724 영조가 즉위한 후 풀려나와 돌아오다가 병으로 해남에서 객사했다, 시와 글씨에 뛰어났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申鍒)1646(인조24)~?
자는 유증 대사성 민일의 손자이며 집의 명규의 아들로 학문에 힘쓰다가 뜻을 바꿔서1673
(현종14)의 무과에 장원급제 하였으며 영암군수가 되어서 선정을 베풀었다, 이어 뒤에 전
라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했다


  (申琓)1652(효종3)~1689(숙종24)
자는 공헌, 호는 경암, 시호는 문장, 여정의 아들, 박세체의 문인,1672(현종13)별시문과
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정언이 되어 서인으로서1680(숙종6)경신대출척 때 남인인 권대운,
허목, 민희, 등의 죄과를 논박했고,1684년 가양도 관찰사를 거쳐 한성부 판윤, 대사헌, 이조
판서를 역임하였으며,1700(숙종26)우의정에 올랐다, 이때 서인의 소론에 속하여 희빈장씨
의 처벌에 대해 온건론을 주장했고, 북한산성의 축조를 건의하여 왕의 승낙을 얻었으나 일
부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1703년 영의정에 올라 평천군에 봉해졌다,


  (申瓁)1652(효종3~1689(숙종24)
자는 공미, 부사 여철의 아들,1669(현종10)사마시에 합격하고, 김수홍의 천거로 의금부도
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뒤에 김천도 찰방으로 나갔다가 예빈시 주부,
조좌랑, 통진현감,면천군수,형조정랑,연안부사를 거쳐1698(숙종24)사복시 첨정에 올랐다
큰 글씨를 잘썼다,


  (申奎)1659(효종10)~?
자는 문보, 호는 취은, 무공랑, 찬연의 아들, 정태화의 문인,20세 때 사마시에 합격,1683
에 노산군(단종)의 추승과 신비의 복위를 강력히 상소하여 이를 시행케 했으며, 뒤에 진주
목사를 지냈다,


신익황(申益愰) 자는 명중, 호는 극재, 수군절도사 명전의 아들, 일찍부터 학문에 전심하여
경전,자사,잡지 폐설에이르기까지 널리 통독했고, 만년에는 성리학에 뜻을 두고 이기설을 연
구했다,1708(숙종34)천거로 참봉,주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했다, 아들 염의 공으
로 대사헌에 추증되었다,


  (申球)자는 군미, 장령 급의 현손, 송시열의 문인,1689(숙종15)기사환국으로 제주에 안치 된 송시열을 위해 항소를 올렸고,1716(숙종42) 경기, 충청, 전라도의 유생 60명이 연소를 올릴 때 그 소두가 되어 윤선거와 그 아들 증을 논핵하여 그들의 관작을 추탈하고 윤선거의 문집을 훼판케 했다,1722(경종2)신임사화로 거제에 유배되었다가 영조가 즉위하자 방환, 영릉과 희릉의 참봉을 역임했으나,1727년 정미환국으로 다시 쫓겨나 고향으로 물러났다,


신필정(申弼貞)1656(효종7)~1729(영조5)
자는 원백, 호는 병옹,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역학과 주자학을 연구했다,1678(숙종4)천거로 참봉,찰방,주부,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했다,1728(영조4)이인좌의 난 때 병으로 앓아 누워 있었으므로 아들에게 기략을 알려주며 의병을 일으키게 하여 남침을 저지하였으며, 민심 동요를 막았다, 집의에 추증되었다,


신사철(申思喆)1671(현종12)~1759(영조35)
자는 명서, 단의 아들,1709(숙종35)공조좌랑 때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이듬해에 정언이 되고, 1713년 홍문관에 등용되었다가 다음해 이조좌랑을 거쳐 교리가 되었다, 그 후 대사간, 승지, 전라도 관찰사, 이조 참의, 함경도 관찰사, 도승지를 역임했다, 1721(경조1)신임사화로 노론이 숙청 될 때 파직되었고,1723년 기산현에 안치되었다,1724년 영조의 즉위로 노론이 집권하자 풀려나와 대사헌에 등용, 영접도감의 당상을 겸하고 이어 좌빈객, 호조,예조의 판서등을 지냈다,1727(영조3)지경연사,수어사를 역임하고, 이해정미환국으로 다시노론이 추방되자 파직되었다가 이듬해 강화부유수에 등용,1729년 예조,형조판서를 지냈다, 이로부터1740년까지 공조, 예조의 판서, 판의금부사를 수차 역임하고, 1745년 판중추부사로 기로소에 들어갔다,


신정하(申靖夏)1680(숙종6~1715(숙종41)
자는 정보, 호는 서암, 영의정 완의 아들, 김찬협의 문인,1705(숙종3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설서,부교리 등을 역임했다,


신성하(申聖夏)자는 성보, 호는 화암, 영의정 완의 아들로서1704(숙종30)참봉이 되고, 이어 현감을 거쳐 연안부사가 되었다, 돈령부 도정에 이르러 평운군에 봉해졌다, 문장에 뛰어났고, 73세에 죽었다,


  (申晢)1681(숙종7)~?
자는 성여, 호는 남계, 부사 서화 아들로서1718(숙종44)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언이 되고, 이듬해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1720년 지평을 거쳐 정언에 재임되었다가 홍문관에 등용 되었다,1721년 헌납,응교,사간,필선,교리 등을 역임하다 이듬해 신임사화로 선산에 유배되었으며,1725(영조1)양이 되고 뒤에 풀려나왔고 글씨를 잘 썼다,


  (申肪)1685(숙종11)~1736(영조12)
자는 명원, 호는 둔암, 목사 성하의 아들로서1719(숙종45)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승문원, 3사의 여러 버슬을 거쳐 제학 대사간 이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신광하(申光夏)1688(숙종14)~?
자는 사회, 판중추부사 여철의 손자,1712(숙종38)무과에 급제, 춘천부사가 되고,1721(경종1)황해도 병마절도사,1723년 금군별장 이듬해병마절도사를 역임했다,1725(영조1)포도대장, 총융사,1727년 한성부 좌윤,1733년 포도대장 뒤에 판서가 되었다,


신익하(申翊夏)자는 숙보,1712(숙종38)별시문과에 급제한 후총관, 포도대장을 거쳐 통제사에 이르렀다,


  (신경)1696(숙종22)~?
자는 명윤, 호는 직암, 영의정 완의 손자,1739(영조15)학행으로 송인명의 천거를 받아 임관된 뒤1745년 종부시 주부, 이어서 장령, 집의, 시강원 서연관 등을 역임했다,1756년 호조 참의에 올라 외조부인 박세채의 문묘종사를 주장하여 벼슬에서 쫓겨났다가 1763년 찬선에 이르렀다,


신유한(申維翰)1681(숙종7)~?
자는 주백, 호는 청천,1713(숙종39)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1719년 제술관이 되어 통신사 홍치중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으며, 봉상시 첨정에 이르렀다, 문장에 탁월했고, 특히 시의 걸작품이 많다,


  (申晩)1703(숙종29)~1765(영조41)
자는 여성, 성백, 시호는 효정, 여중추부사 사철의 아들로서1726(영조2)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자가 되고, 이듬해 실록청 도청 낭청이 되었다가 이해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득세하자 파직당했다,1730년 헌납이 되고, 지평,정언,수찬,겸보덕 등을 거쳐1748(영조24)이조판서에 승진, 이어 예조와 호조의 판서를 역임하고,1755년 찬수당상으로{처의소감}을 편찬했다, 이듬해 우의정에 오르고 뒤에 영중추부사를 지냈다,


  (申鈗)자는 집경,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신명윤(申命尹)자는 은경,1691(숙종17)무과에 급제한 후1729(영조5)전라좌수사가 되었다,
신사운(申思運)자는 형증, 호는 낙운,1753(영조29)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승문원에 등용된 후 주서,전적,장령,사간,집의를 역임하고,1776(영조52)동지 겸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후 대사간, 승지, 대사헌, 형조, 공조,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했다, 또한 그는 문장 뛰어낫고 글씨는 해서를 잘 썼다,


신사적(申思迪)자는 혜이,1715(숙종41)에 진사가 되고,1725(영조1) 평강 현감을 거쳐 광주목사를 지냈다,


신사건(申思建)자는 여극, 호는 수재,1736(영조12)정시문과에 급제한 후교리 및 병,,,예조 참판을 거쳐1750년에 대사헌에 이르렀다,


  (申鏶)자는 계중,1723(경종3)진사가 되고,1760(영조36)에 첨정을 거쳐 동지중추부사에 특제 되었다,


신광리(申光履)자는 수숙, 시호는 정간, 1768(영조44)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필선, 승지, 대사간을 거쳐1796(정조20)공조판서에 이르렀으며, 기로소에 들어갔다 그 후 강화유수 한성부 판윤 등을 역임했다,


신치운(申致雲)자는 공망, 호는 삼지당,1721(경종1)중광문과에 급제한 후 교리 응교를 거쳐1735(영조11)대사간이 되고 1752(영조28)에 승지가 되었다,1755(영조31)송시열, 송준길, 권상하 등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려 홍해에 유배되었다가 이해 7월에 이거원등과 함께 처형당했다, 그 후1803(순조3)에 그의 원통함을 씻고 관직이 회복되었다,


신광익(申光翼)자는 자경,1744(영조20)무과에 급제한 후1763(영조39)경상좌병사에 이르렀다,


  (申晦)1706(숙종32)~?
자는 여근, 여중추부사 사철의 아들로서1741(영조17)진사가 되고,1743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수찬,교리,승지 등을 역임하고,1755년 병조판서와 예조판서를 지내고,1772(영조48)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어 기로소에 들어갔다,


  (申暐)자는 계명,1739(영조15)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대사간, 대사성 및 혀조,예조참판,도승지 등을거쳐 1764(영조40)대사헌에 이르렀다,


신대승(申大升)자는 일여,1770(영조46)정시문과에 장원 급제한 후 충청도 관찰사, 대사헌, 경연 등을 거쳐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申絅)자는 자강,1795(정조19)정시무과에 급제한 후 승지, 금위대장, 총융사, 등을 거쳐 형조참판에 이르렀다,


신대손(申大孫)자는 유후, 조선 때 목사를 역임했다,


신대우(申大羽)1735(영조11~1809(순조9)
자는 의부, 호는 완구, 직장 성의 아들, 정조 초에 음보로 등용되어 강동현감, 군수, 참판을 지냈으며, 시문과 서예가 능했다,


신대영(申大柍)자는 유정,1759(영조35)무과에 급제하고 항해수사, 포도대장, 평안병사 등을 거쳐 삼도통제사를 지냈다,


신대현(申大顯)자는 회경, 시호는 효의,1759(영조35)알성문과에 급제한 후 황해,경기수사,경상,황해병사 및 금위,어영,장용대장, 총융사, 포도대장, 한성부 판윤 등을 거쳐1810(순조10)형조판서에 이르렀다,


신홍주(申鴻周)자는 의지, 무과에 급제한 후1811(순조11)우포도대장을 지낼 때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자 반군에게 항복한 이근주를 대신하여 정주목사에 임명되고, 이어 영변부사가 되어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다, 다음해 평안도 병마절도사에 올랐으며, 그 후 어영대장, 훈련대장, 호군 등을 지냈다,


신대겸(申大謙)자는 계익,1765(영조41)무과에 급제한 후 길주목사 및 평안,함경병사, 삼도수군통제사, 포도대장 어영대장을 거쳐 공조참판을 역임했다,


신재명(申在明)자는 여고,1800(정조24)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자산부사, 대사성, 병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신헌조(申獻朝)자는 여가, 호는 죽취당,1789(정조13)알성문과에 급제한 후교리, 대사간을 거쳐1803(순조3)강원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申綽)1760(영조36)~1826(순조28)
초명은 경, 자는 재중, 호는 석천, 참판 대우의 아들로서 어려서부터 독서에만 전심하였으며, 장서가 4천여 권에 이르렀고,1813(순조13)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때 부친의 위독함을 듣고 급히 하양 했으나 임종을 보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벼슬을 단념하고 일생을 학문에 전념했다, 그동안 응교, 돈령부 도정, 예조참의 등의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사퇴, 향리에 묻혀 고금의 경서를 고증학적 방법으로 주해, 많은 저술을 남겼다, 문장이 청아하고 서예에도 일가를 이루어 예서, 전서에 능했다,


  (申絢)자는 수지, 호는 실재, 시호는 효헌,1794(정조18)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부제학, 지중추부사 등을 지냈다,


  (申褘)1769(영조45)~1847(헌종13)
자는 한수, 호는 자하, 경수당 참판 연승의 아들,1799(정조23)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계속해서 한직과 외관직으로만 있다가,1813(순조13)주청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병조참지가 되었다, 곡산부사, 승지를 거쳐 춘천부사로 나가 횡포한 토호를 누르려다가 실패했고, 병조참판을 거쳐1828년 강화부유수가 되었으나, 그를 총애하던 효명세자가 1830년 병사하자 사임했다,1834년 헌종이 즉위하자 이조참판이 되었으나 인사관리를 공정히 처리하지 않아서 곧 면직되고 다시 임명된 대사간을 사퇴, 병조, 호조의 참판을 역임하고 서울에서 죽었다, 애국 애족적인 그의 시작품 속에는 국산품애용, 양반배척, 서열의 차병대우 철폐 당쟁의 배격 등이 제시되어 있다, 중국의 소식을 사숙하여 체와 형이 갖추어진 독특한 세계를 이루었던 그는 시로써 시를 논평한 평론가이기도 했다,{동인론시절구 삼십오수}는 신라의 최치원으로부터 고려를 거쳐 당시까지의 대가들 작품에 대한 대표적 시평이었다, 이 밖에 시조 40수를 한시로 번역하여{소악부}라 이름 했으며, 서화에도 일가를 이루어 시, , , 삼절로 이름이 높았다,


신대응(申大膺)자는 대유, 호는 화석,1818(순조18)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종부시령, 병조참판을 역임하였으며, 경연에 특진되었다.


신재식(申在植)1770(영조46)~?
자는 중립, 호는 취미, 시호는 문청, 판관 광온의 아들로서 1805(순조5)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홍문관의 벼슬을 거쳐1818년 대사간, 이어 강원도 관찰사, 이조참판을 거쳐 1826년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31(순조31)에 부제학으로 함경도 마천령 이북에서의 전화사용의 금지를 상소하여 실시되었다,1835(헌종1)대제학, 이듬해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 온 후 개성부 유수, 지경연사, 공조판서, 경기도 관찰사, 대사헌, 이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신명순(申命淳)1789(정조22)~1870(고종7)
자는 경명, 시호는 정무, 절도사서의 아들로서 어려서부터 경사에 능통하고 문예에 뛰어났다,1820(순조20)음보로 선전관이 되고, 같은 해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헌종 때 봉산군수를 거쳐1859(철종10)우변포도대장, 이듬해 좌변포도대장,1862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했다, 고종 때 대원군의 신임을 받아 형조판서, 총융사, 한성부 판윤, 좌포도대장 등을 지냈다, 판의금부사, 도총관을 거쳐 지돈령부사 겸 지삼군부사에 이르고1869(고종6)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신좌모(申袏模)1799(정조23)~1877(고종14)
자는 좌인, 호는 담인, 헌록의 아들로서1835(헌종1)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1849(헌종15)집의를 거쳐 사간 등을 지내고,1855년 진향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이조판서에 이르렀다, 과시에 능했다,


신명준(申命準)1803(순조3)~1842(헌종8)
초명은 명한, 자는 정평, 호는 소하, 위의 아들로서 헌종 때 음성현감을 지냈으며 그림에 뛰어나고 시에 능하여 동생 명연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신응조(申應朝)1804(순조4)~1899(광무3)
자는 유안, 호는 계전, 구암, 시호는 문경, 동지돈령부사 상현의 아들, 홍직필의 문인,1852(철종3)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 이조정랑,부제학 등을 역임하고,1866(고종3)이조참판, 대사헌,1871년 강원도 관찰사,1873년 형조, 이조의판서 이듬해 예조판서가 되었다,1882(고종19)임오군란 후 집권한 흥선대원군에 의해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뒤에 좌의정에 올라 봉조하가 되어 기로소에 들어갔다,


신석헌(申錫憲)1805(순조5)~?
자는 성여, 호는 해장, 시호는 문정, 재업의 아들,1834(순조34))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판서에 이르렀다,


신석우(申錫愚)1805(순조5)~1865(고종2)
자는 성여, 호는 해장, 시호는 문정, 교리 재업의 아들로서1828(순조28)진사가 되고,1834(순조34)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가주서에 보직되었다,1835(헌종1)검열,정언을 지냈으며,1838(헌종4)용강현감으로 부임, 그 후 교리, 병조참판, 우승지, 양주목사 등을 역임했다,1850(철종1)대사간에 올랐다가 이어 이조참의, 형조참판, 홍문관 제학, 이조참판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1857(철종8)불신의 죄로 파면되었다, 뒤에 등용되어1860년 동지사로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 당시 중국의 양이(서양인)에 대한 정책을 보고하여 우리나라의 정책 결정에 큰 참고가 되었다 뒤에 예조판서에 이르렀고 글씨와 문장에도 뛰어났다,


  (申檍)자는 경춘, 시호는 효정, 조선 때 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신태운(申泰運)자는 치형,1838(헌종4)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대사간, 부호군, 이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신철균(申哲均)자는 명여,1843(헌종9)무과에 급제한 후 진주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申桓)자는 주경,1846(헌종12)무과에 급제한 후 통제사, 병조참판, 지훈련원사 등을 역임했다,


신석희(申錫禧)1808(순조8)~1873(고종10)
자는 사수, 호는 위사, 시호는 효문 재업의 아들로서 석우의 아우 재정에게 입양 되었으며,1848(헌종14)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관을 지내고,1850(철종1)황해도 암행어사를 거쳐 도청응교, 순천부사를 지냈다, 부제학, 도승지를 거쳐1870(고종7)이조판서가 되었다, 그는 글씨에 능했다,


신명연(申命衍)1809(순조9)~?
자는 실부, 호는 애춘, 위의 아들 무과에 급제하였고, 벼슬은 부사에 이르렀다, , , 화에 능하고 특히 그림은 화조에 뛰어났으며,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의 화풍을 본떠다,


  (申櫶)1810(순조10)~1888(고종25)
자는 국빈, 호는 위당, 초명은 관호, 홍주의 손자, 의직의 아들,1862년 통제사가 되고,1864(고종1)에 형조, 병조의 판서를 거쳐 공조판서를 지냈다,1866년 총융사로 병인양요 때 강화의 염창을 수비하였고, 난이 끝난 후 좌참찬 겸 훈련대장을 지내고 수뢰포를 제작한 공으로 가자가 되었다,1868년 어영대장이 되고 행지삼군부사, 공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1874(고종11)진무사가 되어 강화 연안에 포대를 구축했다,1875년 운항호 사건이 일어나자 이듬해 판중추부사로서 전권대관이 되어 일본의 전권변리대신 구로다와 강화에서 병자수호조약을,1882년 경리통리기무아문사로 전권대관이 되어 미국의 슈벨트와 한미수호조약을 각각 체결하고 이해 판삼군부사가 되었다, 글씨에 능하여 예서를 잘 썼으며 문장에 뛰어났고, 목란을 잘 그렸다,


신재효(申在孝)1812(순조12)~1884(고종21)
자는 백원, 호는 동리, 호장 광흡의 아들 고창 출신,1850(고종13)기민을 구제한 공으로 통정대부가 되고, 이어 절충장군을 거쳐 가선대부에 승품되고 호조참판으로 동지중추부사를 겸직했다, 종래 계통 없이 불러오던 광대소리를 통일하여{춘향가}, {심청가}, {박타령},{가루지기타령},{토끼타령},{적벽가} 등 여섯 마당으로 체계를 세우고 그 대문과 어구도 실감에 맞도록 고쳐 독특한 창의로 판소리 사설 문학을 대성했다, 특히{춘향전},{박타령},{토끼타령},{심청전} 등을 창극화 했으며, 그의 전 작품은 서민적인 해학성과 사실성이 넘치고 있다, 문하에 김세종, 정춘풍, 채선, 허금, 등의 명창을 길렀다, 시문집이 전한다,


신정희(申正熙)1833(순조33)~(고종32)
자는 중원, 호는 향농, 시호는 정익, 판중추부사 헌의 아들, 무과에 급제하고,1877(고종14) ,우포 대장을 역임, 이듬해 어영대장으로 인천에 새로이 보를 쌓고 포대로 축조했다,1880년 통리기무아문 당상 이듬해 형조판서,1882년 다시 어영대장, 이해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그 책임을 지고 전남 임자도에 위리안취 되었으며, 이듬해 향리에 방축되었다가 1884년 석방되어 친군후영사가 되었다,


신기선(申箕善)1851(철종2)~1909(융희3)
자는 언여, 호는 양원, 시호는 문헌, 희조의 아들,1877(고종14)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교리를 지내고,1882(고종19)관제개혁 때 참의경리내무아문사무, 참의군구가무를 역임하고, 이어 부호군이 되었다, 1894(고종31)갑오경장 후 김홍집 내각에서 공부대신을 거쳐 내부법부, 학부의 각 대신을 역임하고, 참정에 이르렀다, 후에 대동박회장, 장례원경, 수학원장 등을 역임했다,


신두선(申斗善)자는 증여, 호는 이산,1882(고종19)감역관, 주부를 거쳐 비서원승, 동지돈령원사 등을 역임했다,


신태관(申泰寬)자는 공오, 호는 유당,1878(고종15)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이조찬의를 거쳐 대사성을 지냈다,


  (申檀)자는 경여, 호는 낙원,1858(철종9)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한림, 이조참의, 이조참판을 거쳐 장례원경에 이르렀으며, 곧 기로소에 들어갔다,


신석희(申奭熙)자는 태중,1860(철종11)별군이 되어 이듬해 무과에 급제한 후 훈련원정, 한성판윤 등을 역임했다,


신태정(申泰鼎)1866(고종3)
평양부 서윤으로 재직 중 미국인 프레스톤이 상선 제너럴 셔오맨호를 이끌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자,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의 명으로 중군 이현익과 함께셔오맨호에 승선하여 선교사 토마스와 회견을 가져 허락 없이 입국한 것을 책하고 즉시 물러갈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인이 물러가지 않고 도리어 이현익을 잡아가두고 오만불손한 태도로 나오자 밤을 새워 이현익의 석방을 요구했으나 불응하므로 철산부사 백낙연과 함께 배를 포격하고 불태워 버렸다,


신돌석(申乭錫)경북 영덕 출신으로 을사조약(1905)이 맺어진 이듬해 울진군 평해면에서 의병을 일으켜 많은 일본군을 죽임으로써 당시 영남 지방의 의병장 중 가장 활약이 컸다, 이때 현상금을 탐낸 고종, 김자성의 집에 초청되어 독한 술을 먹고 도끼로 찍혀 살해되었다,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신태식(申泰植)1864(고종1)~1932
초명은 철회, 문경출신,1907년 단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으로 있다가 이강년의 의병 부대에 합세, 많은 활약을 하고, 이해 9월 영평 전투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고 체포되어 10년간 복역했다, 출옥 후 경북의용단을 조직하고 단장으로 활약 중 다시 체포되어 대구에서 3년간 옥고를 겪었다,


신팔균(申八均)?~1924
호는 동천, 충북 진천 출신, 구 한국말에 육군 정위를 지내다가 1907(융희1)군대가 해산당하게 되자 낙향하였다,1909년 대동청년당에 가담, 항일운동에 투신했다, 한일 합방 후 만주로 망명, 시베리아, 북경, 상해로 전전하면서 동지규합에 노력하고,1919년 서로군정서 교관, 신흥무관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여 독립군 양성에 전력하고, 이어 통의부 군사위원장 겸 총사령관으로 수 십차래 일본군과 교전하여 전과가 많았으나 홍경현, 이도구에서 사관들을 야외 훈련시키던 중 토비의 습격을 받고 전사했다,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신석구(申錫九)1875(고종12)~1950
호는 은재, 재기의 아들, 충북 청주 출신,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가 되어 서울, 개성, 춘천, 원산, 남포 등지에서 종교운동에 종사했다, 3.1운동 때는 민족대표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2년간 복역하였으며, 출옥 후에도 신사참배, 전승기원 예배 등을 거부하여 여러번 투옥되었다, 해방 후에는 북한에서 반공 운동을 전개,3.1절 기념방송 사건, 기독교민주당 비밀결사사건 등으로 다시 투옥,19494월 남포에서 반동비밀결사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는 혐의로 피체,10년형 선고를 받고 복역 중 6.25 사변 때 총살당했다,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신정백(申正栢)1877(고종14)~1909(융희3)
자는 정우, 호는 남강, 전남 곡성 출신,1908년 의병장 조서화의 휘하에 들어가 곡성, 구례 등지에서 일본군과 항쟁하다 체포되어 대구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신덕균(申德均)1878(고종15)~1908(융희2)
일명 덕순, 정희, 호는 몽암, 광주 출신,1907(융희1)가산을 팔아 무기를 구입, 수백명의 의병을 모아 고광순의 휘하에서 활약했다, 그 후 광순이 전사하자 정읍 내장사에서 김 준 등과 제기를 도모하다가 피체, 정읍에서 사형 당했다,


  (申肅)호는 하관,1919년 독립만세 사건으로 왜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뒤 중국으로 망명하였다가 귀국 후 입법의원을 지냈다,


신덕영(申德永)임시정부 군자금 조달로 환국하였다가 왜병에 체포되어 12년간 옥고생활을 치뤘으며, 해방 후 광복회 초대회장으로 활약했다,


신현구(申鉉九)1881(고종18)~1931
3.1운동 후 상해임시정부의 지령을 받고 서울에서 대한독립 애국단을 결성하였고, 그 대표자가 되어 강원도에서 연통제를 조직하는 한편 혈복단을 만들어 군사자금 모집에 힘썼다,1919년 임시정부의 초청으로 상해로 가려던 중 대동단, 애국단 등의 사건에 연루되어 피체, 4년간 복역하고 출옥 후 잡지{심경}을 발간하였으며,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재차 수감,36개월의 선고를 받고 복역 중 1931년 병보석되었으나 병사했다,


신우현(申禹鉉)1884(고종21)~1935
호는 자운, 평북 의주 출신으로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병준 등과 의병을 일으켰다,3.1운동 후에는 만주로 망명,1920년 관전현에서 독립단 단장, 평북독판부 내무사장 등으로 항일운동에 종사하면서 대종교에 입교했다, 이듬해 독립운동 단체에 내분이 일어난 후 수원성에서 조병준과 함께 의민부를 조직하여 활동을 계속하다가 병사했다,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신익희(申翼熙)1892(고종29)~1956
자는 여구, 호는 해공, 명장 입의 후손, 장례원경 단의 아들이며 경기도 광주 출신으로 1910년 한성외국어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고, 일본에 가서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했다, 재학 중 학우회를 조직, 총무, 평의회장,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학생운동을 벌이고, 기관지{학지광}을 발간했다,1917년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추임,19193.1운동이 일어나자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수립과 더불어 내무차장, 외무차장, 국무원비서장, 내무총장, 법무총장, 문교부장, 외교부장, 등을 역임했다, 해방 후 귀국하여 대한독립 촉성국민회 부위원장이 되고, 자유신문사 사장, 국민대학학장을 역임했다,1946년 남조선과도 입법의원 대의원에 당선, 이듬해 입법의원의장이 되었다,1948년 제헌국회 의원에 당선되어 부의장이 되었다가8월 의장인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자 의장이 되고, 2대 국회에서도 의장이 되었으며 이어 제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동안 민주국민당 최고의원, 민주당 대표최고의원으로 야당을 영도했으며,1956년 민주당 공천으로 대통령에 입후보, 호남지방에 유세하러 가던도중 차중에서 뇌일혈로 급사했다,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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