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미르 종주기 : 16. 랑가르(Langar)의 불교 암각화

2014. 4. 7. 01:24파미르 이야기

 

 

 

 

 

      

16) 파미르종주기- 랑가르(Langar)의 불교암각화

 

* ‘비단의 성’, 아브라심 고성

 

 불교스투파가 있는 부랑에서 출발한 나그네들의 발걸음은 일반적으로 바로 랑가르로 직행하게 되지만, 해동의 나그네처럼 고적답사가 목적인 사람들은 랑가르를 4km 남긴1) 곳에 자리잡은 조그만 마을인 종(Zong)이라는 곳에서 내린다.

  ‘성(城)’ 또는 ‘요새’라는 뜻의 ‘종’이란 마을이름은 좀 이질적이다. 필자가 알기로는 ‘종’은 티베트어2)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 보면 가능성 있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티베트의 전성기인 토번(吐蕃)제국 시기에 인근 길깃트(Gilgit, Bolor, 小勃律國)3) 일대를 점령하고 실크로드를 호령했던 때가 있었기 때문이었으니까…

 또한 와칸에서 사용도가 잦은 단어인 ‘콸라’ 또한 아프간어로 ‘성’이란 뜻이어서 그런지, 이 마을에는 여러 개의 크고 작은 성터의 유지가 남아 있다. 그러니까 이런 지명들이 풍기는 분위기만으로도 이 마을은 실크로드 길목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의 성격을 풍기고 있다.

 그중에 ‘비단의 성‘이란 뜻을 가진 비쉼 콸라(Vishim Qala;와키어) 또는 아브라심 콸라(Abrashim Qala,타지크어)라고 부르는 옛 성터가 유명하다. 이 성터로 가기 위해서는 마을 중심지에서 사륜구동차를 교섭하여 디르지(Dirj)마을을 지나 북쪽 산기슭으로 한참을 올라가야 하는데, 그 고생을  충분히 보상받을 정도로 폐허의 성터에서 드넓은 와칸계곡을 내려다보는 경치는 시원하기 그지없다.

 

 ▼ 종 마을 길가에 서 있는 아브라심 성터의 이정표 현판

 

 

  ▲ 아부라심 성의 웅자

 

이 성에는 서로 상반된 두 종류의 전설이 전해오고 있는데, 그 하나는 이슬람교의 전파과정에 대한 관한 것이고 또 하나는 루비(Ruby)광산에 얽힌 것이다. 우선 전자부터 소개해보자.

 원래 이 비단성의 주인은 루손나(Rukhshona) 라는 아름다운 여왕이었는데, 그녀는 강력한 군대와 많은 하인과 노예를 거느리고 살면서 외부의 적들을 물리치며 와칸계곡을 통치하고 있었다. 특히 그녀의 왕국에는 보석이 생산되고 있었기에 이것들을 이웃나라에 수출하고 있었고 또한 성 아래 종 마을 근처에 바자르를 열어 다른 물건들과 거래를 하여 굉장한 재화를 축척하여 비단으로 성을 둘러쌓을 정도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힌두쿠시 산의 다른 쪽에서 무슬림세력이 점차로 와칸으로 밀려들어오자, 여왕은 그들 무슬림의 지도자들을 초빙하여 협상을 벌렸다. 이 때 양쪽의 대표들은 이쉬코리시(Ishkorish)라는 곳에서 만나 회담을 하였는데, 그 결과 여왕은 참된 신앙을 갖지 않은 것이 확실하게 드러났지만, 콰담그(Qadamgh)라는 곳에서 평화협정을 맺게 되었다. 그 후로 여왕은 힘을 유지하면서 살 수 있었고 이곳 콰담그라는 곳은 후대에 역사적인 성지로 추앙받는 곳이 되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이슬람이 전파되면서 토착세력과 평화적으로 융합해가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인 셈이다.  

 그러나 또 다른 전설은 루비처럼 붉은 색의 비극으로 마감된다. 루손나 여왕은 평범하게 생을 마감하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웠던지 인근의 많은 왕들의 짝사랑의 대상이 되는데, 그중 힌두쿠시 너머의 한 무슬림왕국의 왕은 그녀의 미모와 용기 그리고 재력에 반해 그녀를 차지를 욕심을 점차로 키워나갔다.

 그래서 우선 사자를 보내 우호의 손을 내밀며 청혼을 하였지만, 여지없이 거절을 당하자, 마침내 왕은 전쟁준비에 돌입하여 대규모병력을 동원하여 높은 설산을 넘어서 여왕의 궁전인 바단 같이 아름다운 아부라심 궁성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선혈이 낭자한 전투가 벌어지고 양쪽에 수많은 사상자가 생긴 뒤에 마침내 난공불락의 비단성도 함락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루손나 여왕은 전쟁터에서 언제나 남장(男裝)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치열한 전투 중에 그녀의 투구가 벗겨져서 신분이 노출되어 사로잡히게 되었다. 이에 왕은 그녀에게 간곡하게 백기항복하고 청혼을 받아드리도록 하였으나, 루흐손나 여왕은 말하기를,

“나는 평생 누구에게도 복종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차라리 명예롭게 죽게 해달라.” 라고 하면서 자기의 검으로 자결을 해 버렸다. 이렇게 비극으로 끝난 이야기는 다음으로 이어진다.

 원래 여욍에게는 랄(Lal)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여왕은 심복에게 전투가 벌어져 만약 궁성이 함락되면 왕자를 비밀통로로 피신을 시켜서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라고 안배를 해 두었다. 결국 성이 함락되기에 이르자 랄 왕자는 성을 빠져나와 정신없이 서쪽으로 도망을 치다가 가람(Gharan)4)이라는 곳에 도착해서 정신을 차려보니 그의 발아래 반짝이는 붉은 돌들이 수 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바로 그 유명한 ‘랄 루비광산’의 발견이었다.

 이로부터 파미르의 루비광산은 ‘쿠히랄(Kuh-i-Lal)’이라고 알려졌다는 것이다. 바로 마르코 폴로5)가『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에서 기록한 ‘발라스 루비의 산지’를  말한다.  

  

▼   동방견문록

[동방견문록]의 124장. 칸의 군대가 버마(미얀마) 지역에서 전투를 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마르코 폴로의 여행 상상도

 

 

 

 

 ▼  마르코 폴로의 여행

 

 

 

 

 

베네치아의 상인 마르코 폴로는 파미르고원을 넘어 중국으로 가려고 ‘바닥샨’6) 이란 곳에 도착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바닥샨의 주민들은 이슬람교도로 고유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 큰 왕국으로 왕위는 세습제이다. 왕족들은 알렉산더 대왕과 페르시아의 다리우스왕의 딸7)과의 사이에서 난 자손들로 사라센말로 ‘줄카넨’이라 부르고 있는데, 이는 알렉산더 대왕과 같은 호칭으로 그를 추모하여 그렇게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값진 ‘발라스 루비(Balas Ruby)가 발견되는 곳이 바로 이 곳으로 사람들은 땅에 갱도를 파서 루비를 캐낸다. 이 특별한 산의 이름은 슈그논(Shugnon) 8)산이다. [루비는] 왕의 이익을 위해 채굴될 뿐 아무도 국외로 반출하지를 못한다.

 왕은 이를 비장해 두었다가 주로 조공할 때 사용하지만 가끔은 팔기도 하여서 발라스 루비의 가격을 유지하고 있다. 또 이곳에는 품질이 좋은 유리의 광석이 생산되는 산도 있고 은이 생산되는 큰 산도 있어서 이 나라는 매우 부유하다.  

 

                                                                   ▼ 쿠히랄 광산의 지도  

 

 

 

 

 

 

 

 

 

 

 

 

 

▼ 옛날부터 유명한 발라스 루비 원석  

 

▼ 쿠히랄 원경

 

 

 

 * 랑가르의 ‘불교스투파’와 ‘만자(卍字)’ 암각화의 발견

 대개의 나그네들이 교통이 좋지 않는 이 랑가르를 오는 목적은 칼 마르크스산(Karl Marx, 6,723m)의 기슭에 해당되는 마을 뒷산 중턱에 넓게 퍼져있는, 6천 개 정도의 암각화[岩刻畵;petroglyphs] 군락지를 보기 위해서이다. 물론 파미르고원 전체에는 수많은 암각화들이 산재해 있지만, 그중에서 랑가르의 암각화는 질적, 양적으로 이 방면에서는 널리 알려진 세계적인 보고이다.

 

▼ 랑가르의 암각화 군락지 전경

 

 

 

 

지금까지 조사된 암각화 군락지의 주제는 대개 수렵화(狩獵畵), 예를 들면 뿔이 둥글게 말려있는 마르코 폴로양(羊)9) 같은 것을 말을 타고 사냥하는 광경이나 신석기 또는 청동기 시대의 생활상을 묘사한 간단한 풍속화 등이 주류를 이루지만, 잘 찾아보면 이외로 깜작 놀랄만한 특이한 것도 눈에 띄기도 한다.

 이번에 나그네가 찾아낸 암각화도 그런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이 눈에 들어온 순간 한눈에도 범상한 그림이 아니라고 직감하면서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우선 아래 자료사진을 보면서 그 의미를 음미해보도록 하자. 먼저 오른쪽에는 2기의 불교스투파가 새겨져 있고 왼쪽으로는 분명히 ‘절 만자(卍字)’가 보이고 있는데, 그것들은 모두 간단한 선각(線刻)기법으로 새겨져 있다.

 먼저 2기의 스투파를 살펴보면 기단 포함하여 모두 5층으로 보이는데, 특히 가운데 스투파에는 아래 탑신에 사리함 또는 불감(佛龕)을 넣을 수 있는 감실(龕室)10)이 그려져 있는 특징이 있다. 이는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렇잖아도 불교 이동로의 주된 루트이며 대승불교의 진원지에서 가깝고 더구나 기원전후의 쿠샨시대의 성터가 즐비한 이 와칸계곡에 불교적인 흔적이라고는 딸랑 부랑스투파 하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 불교암각화의 출현은 소중하기 그지없다.

 물론 이 단순한 그림 한 장을 확대 해석하자면 문제점은 많다. 우선 시대적인 문제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대략 6천 개 정도의 암각화가 널려 있는 군락지의 제작연대가 대개 선사시대이기에 유독 중세기 불교의 것이 한 두 점(?)11) 섞여 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이 불교스투파의 제작 연도를 대략 3~7세기 정도로 추정할만한 정황근거는 충분하다. 우선 상한선을, 중국 서부 타클라마칸의 오아시스 도시들과 교류가 빈번했던 쿠샨시대로 본다면, 하한선은 이슬람 세력이 이곳을 점령한 시기로 추정해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이후 적어도 1천수백 년 동안 이 와칸주랑에 불교도의 인적은 끊어졌을 것이라는 사실은 명백하기 때문이다.  

 

 

▼ 선각으로 새겨진, 좌만자(卍:左旋)와 2기의 스투파 암각화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이 2기의 선각 스투파가 해동의 나그네가 오색 깃발을 걸고 참배하고 온 그 브랑스투파의 원형을 묘사했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아직은 여기서 설득력 있는 증거자료나 논리를 제시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나그네의 머릿속에서 그려보았던 브랑스투파의 원형과 선각화의 이미지는 완전히 합치하고 있었다.

 혹시나 졸저 <실크로드 총서>의 주인공 중의 한분이 부랑스투파를 참배한 다음에 파미르를 넘으려고 랑가르를 지나가다가, 그 옛날부터 이상한 그림들이 많다는 산위에 올라 수많은 그림들을 흉내 내어 부랑스투파를 떠올리며 선각으로 그려본 것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부랑 스투파는 한 쌍이어야  마땅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 의문은 어찌 보면 필자에게 이번 생에 풀기 어려운 화두가 될 것이 분명하다. 정말 그럴 가능성이 있는 것일까?  

 

 각설하고 다음으로는 선각화에 나타나는 ‘卍’ 라는 기호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卍’ 또는 ‘卐’ 이란 기호 또는 문자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혼동되어 사용하는 사례가 많음으로 이를 정리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 기호는 그리스, 로마, 아시리아, 인도, 중국 등괴 같이 고대문명이 찬란하였던 곳에서 흔히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서 결론적으로 태양에너지를 상징한다는 것이 설이 지배적이다.  

 우선 동양권에서는 힌두교의 3신중의 하나인 비슈누(Vshnu)12)신의 가슴에 난 선모(旋毛)를 상징하여 스와스티카(Svastika)등 4가지13)로 불리면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초기불교의 판테온에 도입되어, 비슈누의 그것처럼 붓다의 53번째 신체적 특징으로 패러디되어 기원전후의 발생된 대승불교권에서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불교를 상징하는 기호로 굳어졌다. 14)

 한편 불교가 중국에서 정착되면서 ‘卍’ 또는 ‘卐’ 도 불교의 대표적인 엠블럼(emblem)으로 자리를 잡았고 당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624~705)시대부터 ‘완(W'an)’이라는 소리음으로 정해져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역시 ‘만’으로 불리고 있다.

 

 이 만자의 모양은 중심에서 오른쪽으로 도는 좌만자(卍:左旋)와 왼쪽으로 도는 우만자(卐:右旋)로 나누어지는데, 현재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등지에서는 구별하지 않고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우리 컴퓨터의 한문번역자판에서는 좌만자(左卍字)밖에 입력할 수 없어 이런 글을 쓸 때 아주 불편한 현실이다.

 한편 현재 티베트에서는 이들을 엄격히 구분하고 있다. 불교 전래이전의 고대종교인 융둥뵌교(gyung drung Bo"n)는 좌만자(卍)로 쓰고 불교쪽에서는 우만자(卐)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 이채롭다.  그 배경은 다음과 같다. 원래 우리의 샤머니즘을 비롯한 융둥뵌교를 같은 원시종교들은 천체가 왼쪽으로 회전하고 있다고 해석하여 모든 종교적 행위를 왼쪽으로 도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예를 들면, ‘탑돌이’ 또는 ‘성지순례[꼬라:Kora]’ 같은 행위도 불교도와 반대로 왼쪽으로 회전한다는 식이다. 그렇다면, 티베트식으로 본다면,  좌만자를 주로 사용하는 우리불교는 불교가 아닌 융둥뵌교에 속한다는 아이러니가 성립된다.

 

 ▼  티베트 융둥뵌교 사제

 

 

 

▼ 여라나라의 만자

 

 

 

 

 

▼ 고대 그리스의 만자- Svastika in a Minoan pottery piece from Crete

 


1) 이스카심을 기점으로 보면 113km 거리에 있는 조그만 마을이지만, 마을이 너무 작아서 그냥 지나치기 쉽다.

2) 티베트어는 <시나-티베트 어족>에 속하여  인도-아리안 어족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티베트어는 오히려 한글이나 일본어와 같이 주어 동사의 배열 순서가 같아서 친근감이 있어서 우리가 배우기가 쉽다. 수자의 경우는 우리와 달은 것이 아주 많다. 다만, 형용사가 명사의 다음에 온다는 점 등이 다를 뿐이다.

3)  토번 제33대 임금인 송쩬감뽀(643~645 재위) 때 양동, 즉 지금의 응아리 지구인 샹슝 지방으로부터 병합하기 시작하여 38대 티송데쩬 대에 이르러서는 호탄, 카슈가르 등 하서사진과 대, 소발율과 와칸게곡을 점량하기에 이른다. [졸저 『티베트의 역사산책』에 자세하다.] 이런 사실을 중국 쪽 자료에서 처음으로 밝힌 자료가 『왕오천축국전』이다. “또 카슈미르에서 동북쪽으로 산을 넘어 15일을 가면 곧 대발률국, 양동국, 사파자국인데 이들 세 나라는 모두 토번(吐蕃)의 관할 하에 있다.”
그러다가 8세기 중엽에 고선지의 원정이후 소발률은 당 세력권으로 들어오고 대발률만 토번에 예속되게 되었다.
티베트에서는 ‘종’이란 용어가 많이 사용된다. 또한 토번제국의 팽창기에 토번이 파미르 일대를 점령했던 적이 있기에 ‘티베트어의 어원’을 가진 지명이 현재까지 남아 있을 가능성은 아주 많다.

4) 호로그에서 이스카심 쪽으로 46km지점 좌회잔하면 가람차시마(Garam Chashma)라는 온천이 있고 직잔하여 앤더롭(Anderob) 인근에 지금도 루비광산이 있어서 채굴을 하고 있다.  

5) 마르코 폴로(Marco Polo,1254~1324)는 17세 때 아버지와 함께 베네치아를 떠나 중국으로 떠나 1275년 원나라의 세조가 있던 카이펑에 도착하였다. 그들이 원나라에 간 이유는 칭기즈 칸의 손자 쿠빌라이 칸의 요청으로 예수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의 성유와 로마 가톨릭교회 선교사들을 데려가기 위해서였다.
《동방견문록》은 마르코가 여행한 지역의 방위와 거리, 주민의 언어, 종교, 산물, 동물과 식물 등을 하나씩 기록한 탐사 보고서의 성격을 갖고 있으며, 일본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내용의 진정성에 대한 비판도 있다.

6) 바로 현 아프간령 박각샨과 타지기스탄령 고르노바닥샨 자치주를 합한 지역을 말한다.

7) 짧은 생애 중에 알렉산더는 자신이 정복한 곳마다 현지여인과 결혼을 하여 융합을 시도하였다. 먼저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3세의 딸 스타티레(Stateira)와 또한 박트리아의 왕의 딸인 록사나와도 결혼하였다. 알렉산더는 록사나를 통해 알렉산더(알루)라는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바르시네라는 여자를 통해 헤라클레스(헤르쿨레스)라는 서자를 낳았다. 하지만 다니엘의 예언에서는 그의 제국이 “그의 후손에게 돌아가지도 않”을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알렉산더의 가족과 그의 상속자들이 오래지 않아 모두 죽임을 당함으로 그 예언은 성취되었다고 한다.

8) 그러나 슈그논은 산 이름이 아니라 현재의 호로그를 중심으로 한 지방의 이름이다. 바로 혜초가 식닉국이라 부렀던 곳이다.

9) 원명은 아르갈리양으로 중앙아시아에서 동부 몽골에 걸친 산악지대에 서식하는 몸집이 큰 양으로서 몸높이 120㎝에 이른다. 거대한 나선형의 뿔을 가지는데 파미르고원의 아종은 마르코 폴로양(파미르아르갈리양)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다.

10) 감실 또는 불감은 불상이나 경전 등을 안치하는 장치로써 일명 주자(廚子) 또는 두자(豆子)라고도 하는데 때로는 불감과 보각(寶閣) 그리고 주자를 구별해서 부르는 경우도 있다. 목재나 금속으로 집·통(筒)의 모습을 만들고 그 정면에다 여닫이문을 달아서 철이나 금박 등을 바르고 장식한 것인데 주로 나무로 된 것이 많지만, 분황사탑의 것과 같은 석조도 있다. 중국 양(梁)나라 간문제(簡文帝)가 쓴 《여승정교(與僧正敎)》에 의하면 양나라 때에 이미 불감제도가 있었다.

11)  암각화의 조사자들 중에 불교를 이해하는 학자가 있었다고는 보기 어렵기에 정밀조사를 한다면 더 많은 불교적인 자료들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12) 힌두교 최고의 3신중의 하나로 김시조라는 커다란 새를 타고 날아다니며 우주의 평화를 유지시킨다는 신으로 물고기 등 10가지 화신으로 화현하여 세상에 나타난다고 한다. 붓다도 그중 8번째 화신이라고 한다.  

13) 인도 힌두교에서는 ‘卍’자의 유형을 대략 4가지 형태로 구분하고 있는데, 첫째가 길상해운을 뜻하는 일반적인 슈리밧사(Shrivatsa), 둘째는 오른쪽으로 선회하는 머리카락 모양을 한 난디아바타라(Naady avatara), 셋째는 행복이 있음을 상징하는 스바스티카(Svastika), 넷째는 물병모양을 한 푸르나가타(Purnaghtata)로 각기 조금씩 의미를 달리하고 있다.

14) 그러나 이채로운 점은 남방불교권에서는 사용된 사례가 없고 대신 둥근 법륜(法輪)을 불교의 상징표시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현대의 서구의 불교학자들은 ‘원초적 에너지를 담은 신성(神性)’으로서 卍자를 풀이하고 있는데, 이 글자의 모양이 회오리바람을 닮아 있는 것으로 풀이하여 우주적 에너지의 운동 법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해석하여 시원적이고 창조적인 힘을 상징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