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4. 10. 12:31ㆍ들꽃다회
20. 아차산 들꽃다회 - 넷 / 完
/ 20140406 일요일 맑음
암사대교와 옛 한성백제의 도성인 하남 위례성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들꽃다회를 하다.
추정 왕궁지로 보이는 고골에서 산불이 나다.
대성사 가는 산길 모퉁이에 있는 바위 위에서 쉬는 등산객....
워커힐 호텔 뒷산의 산벚나무와 한강 건너편의 남한산성.....
남한산성 아래에 있는 강동구 일대.....
신축중인 잠실 롯데빌딩......
한창인 진달래
찻자리에서 마냥 물끄러미 바라보다.....
워커힐 호텔 뒷산의 봄 경치...... 그리고 한강 건너편의 강동구 일대와 남한산성의 전경
찻자리에 그늘을 만들어 주는 금강송 두그루.......
한강 북쪽에 예봉산, 운길산, 저 멀리 희미한 용문산.....
한강 남쪽으로 하남시와 검단산....... 한강 북쪽으로 구리시 일대
그리고 공사중인 아치형의 암사대교와
그 뒤로 서울외곽순환도로와 중부고속도로를 연결하는 구리대교.
휘어진 금강송 두그루를 창문을 받치고 있는 문설주로 여긴다면.....
창문 밖으로 보이는 경치가 그리 나쁜 편은 아니다.........
찻자리 처마밑 풍경........
금강송 아래에서 들꽃다회.....
가루차 중 엷은 박차(薄茶)는 이미 마셔버렸고.....
진하게 저은 농차(濃茶)를 마실 차례이다.
농차를 마시고 나면 가수 임주리의 < 맆스틱 짙게 바르고>라는 노래가 흥얼거려진다.......
작은 나무잔은 아차산 산신령이 된 백제 개로왕에 올리는 농차.......
한성백제세대를 마감한 개로왕은 비운의 주인공이다.
고구려 장수왕에게 투항한 부하 장수 2명에게 위례성 함락시
투항한 줄도 모르고 패전을 꾸짖다가 오히려 사로잡혀서
이 아차산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개로왕이 아차산 산신령이 되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는 일이나
공연히 차한잔 따르고 싶다.
그러니 평소에 중국과의 외교문서에서 고구려 선왕을 놀리지 않는 등
덕행을 쌓았어야 하지만........
이 위례성 함락 이후로 한성백제시대를 마감하고 웅진으로 천도하여
웅진백제시대를 열어간다.
명선(茗禪)이라고 갑골문으로 음각된 나무표주박........
농차까지 다 마신 후에 뜨거운 물을 부어
찻솔로 잘 저어 가루차 설거지와 아울러 백비탕(白沸湯)을 만들어
회운(廻韻)을 즐기다.....
명대에 만들어진 금상감동향로......
두 그루의 휘어진 금강송을 창문틀로 여기면.....
찻자리의 창문 밖의 풍경이 그리 싫지 아니하다........
소나무 줄기 갈래와 가지들 사이를 작은 창문으로 여기며.....
눈꼽재기 창문으로 내다본 풍경.....
도금된 포자(抱子)는 걸름망 겸용으로 한 표주박에서 두가지 기능을 한다
- 차를 거르고, 다완에서 찻물을 퍼내어서 찻잔에 따르더라도
위에 있는 걸름망은 회전하며 수평을 유지하여 속에 들어있는 찻잎이
쏟아지지 않는다.
야외차법에서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일본에서 만들었다.
짐승 머리형상을 닮은 지팡이 손잡이........
오동다관에는 김해 황차가.....
은다관에는 중국 광동성 특산의 봉황단총(鳳凰單叢)이 들어 있다.
단총이라는 용어는 차나무 한그루에서 딴 찻잎으로 만든 차에 쓰인다.
찻자리에 놀러온 박새
찻자리 주변 풍경.....
배 부르도록 차만 마셨다......
찻자리의 옆마당.......
한강 건너편 위례성 부근의 고골에서 산불로 연기가 피어 오른다.
주변 청소를 끝내고 찻자리를 다시 둘러보다.
혹시 마른 솔잎 쌓인 곳에서 찻자리로 눌렸던 자욱이나
다른 표시가 나지 않는가 해서......
산벚나무
진달래로 뒤덮힌 등산로.....
산복승아나무
고골에서는 연기가 계속 피어 오르고........
제5보루에서 바라본 고골의 산불 연기.....
아차산 제5보루
아차산 제5보루 안내판
고구려군 제5보루
진달래꽃 그림자 아래에 있는 벤치
숲속의 벤치
아차산에서 차를 마시며
茶 宗
오늘도 산에 올라 찻자리를 펴본다.
오르는 도중에 목이 말라와
남이 쌓아 놓은 하늘로 대문을 낸 돌담집에서
표일배에서 千兩茶를 따라
나무표주박으로 마셔 본다.
살아가면서 얻는 지식이란 것도 이처럼
남들이 힘들여 쌓은 것을 잠시 빌려 쓸 뿐이다.
봄햇살은 나무잎을 움트게 하고
가지에 꽃들을 피어나게 한다.
바람은 가늘게 불어와
멧비둘기나 박새가 날아 다니는 데
상승 기류를 만들어 준다.
눈앞에 펼쳐진 도시의 빌딩숲은
여기에 올라 보니 나무등걸보다 작다.
개로왕은 중국에 보낸 외교문서가
장수왕의 화를 돋구어 이 산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살아가며 늘 身口意를 조심하라는
태양족의 가르침에 소홀한 탓이다.
흘러간 세월을 뒤로 하고
한강은 그 흐름을 멈추지 않는다.
원효는 갈라진 민심을 다시 뭉치려고
높디 높은 법상에서 민중들 속으로 내려와
진하디 진한 무애차(無碍茶)로 쓴 맛을 보게하여
쓰디 쓴 전란의 회한들을 다독거렸다.
휘어진 금강송 등걸을 문설주 삼으니
봉황단총(鳳凰單叢)도 청수(淸水)와 다를 바 없고
눈꼽재기 창문으로 보이는 경치 그리 싫지 않다.
양지꽃
아차산 제1보루
해맞이 광장 포토 아일랜드
한강 위례성 부근 고골에서 산불이 아직 꺼지지 않았나 보다....
저 연기가 나는 산 아래가 고골로서 한성백제의 추정 왕궁지가
있다는 곳이다.
~~상략~~
추정 왕궁지(推定 王宮址)에 대하여
한종섭씨는 이성산성과 검단산 사이에 백제도성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덕풍천을 따라 조사하는 과정에서 1992년 4월12일에 교산동토성과 그 안에
위치한 추정왕궁지를 발견하였다. 이 사건은 5월14일에 KBS TV 9시뉴스에
방영하였다. 필자는 5월17일 씨와 함께 방문하여 방형의 토축으로 둘러쌓인
내부에 형태로 초석이 배치되어 있음을 밝혀내었고, 이는 5월18일에 재차
KBS에 방영하였다.
----------------------------------------------------------
8)梁柱東, 앞의 책, p.389.
9) 이것은 "해가 길게 걸려있는 산"이라는 뜻의
日長山으로 日門山인 黔丹山에서 해가 떠서 해가 질 때까지 이곳을 계속
비춘다는 뜻인데 한종섭씨가 찾은 하북위례성으로 추정되는 방학동토성에서
나타나고 있는 "해가는길 日嚴"자와 같은 뜻이다. 이것은 태양숭배사상을
가지고 있던 백제인들의 사상을 나타낸 것이다.왜냐하면 신시시대의 "배달",
고조선의 "아사달"과 "조선", 북부여의 "解慕漱(해머슴애)", 졸본부여의 "東明",
의자왕의 아들인 천지천황이 지은 일본의 국호인 "日本" 등이 光明사상과
관련있었음을 들 수 있기 때문이다.
10) ≪三國遺事≫, 卷第2, 南扶餘前百濟.)
11) 일본에서는 이것을 大和三山이라고 한다.
12) 오순제, 앞의 책, p.75.
筆者가 내성으로 추정하는 지역은 동서 55m, 남북 90m 장방형 토축으로
둘러쳐진 약 2000여평으로서, 가로와 세로로 각각 50m의 크기 안에 직경
1m 정도의 대형주초석 50여개가 객산의 정상방향으로 줄지어 배치되어 있었다.
오른쪽 석렬은 질서가 정연하나 나머지는 흐트러져 있다.
주위에는 고려 및 조선시대의 기와편이 산재하여 고려나 조선시대의
건물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다만 질서가 정연한 오른쪽 석렬은 주초석의 간격이 2.5∼3m 간격이었다.
이는 新井 宏이 3∼4세기에 한국에서 사용하였다고 추정한 古韓尺의 一尺
26.7cm의 10배인 2.67m에 근접하고 있다. 이로 보아 이 곳은 백제 시대기의
대형건물지였을 가능성이 높다.
궁터는 북쪽에 민가가 들어서면서 약 20m 정도가 훼손되었다.
강찬석씨는 이곳이 단일건물지로는 가장 큰 宗廟를 능가하는 최대였음을
주장하고 있다. 이곳에서 동남쪽에 위치한 두 개의 높은 봉우리 사이에
南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는데, 현재 남쪽으로 뚫린 차길이 원래는 높은
담이었다는 사실로 보아 타당성이 높다. 특히 한종섭은 남문 밖에는 덕풍천을
이용한 垓字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본회는 조사를 통하여 백제의 왕들은 배를 이용하여 한강에서 덕풍천을
運河로 이용하면서 이 곳 남문에 도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결론지었다.
광주문화원의 李勳宗 원장은 객산이라는 지명을 들어 광주객사였음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1993년 3월31일 貊夷民族會의 김성호씨가 이곳의
초석이 도난되었음을 서울신문에 보도하자 백제문화재 전문위원들이
이곳을 방문하였으며, 이들은 조선시대의 客舍 건물지로 추정하였다.
1995년 4월5일 百濟文化硏究會와 세종대학은 나무가 뽑혀나간 구
덩이를 정리하여 초석의 1/4을 70∼80cm 밑으로 시굴하였다. 주초석
밑에 지름이 160cm 정도의 적심석이 있고, 그 밑에서 황갈색, 흑갈색
2층의 판축을 발견하였다. 백제시대의 흑회색연질무문토기,
회백색연질타날문토기, 적색와편, 숯 등이 층을 이루고 있었다.
이것은 이 건물지가 백제시대에 만들어졌음을 추정하게 한다. 특히 숯이
채집된 사실은 한성백제시대에 왕궁이 화재가 났었다는 삼국사기 비류왕
30(330)년의 기록과 연관되어진다.
강찬석씨는 입구에서 오른쪽 건물지 끝의 벼랑부분 나무밑에서 초석을
찾았는데, 그 밑에는 10여개의 積心石들이 드러나 있었다. 본회는 1996년
10월27일 公山城를 공동으로 조사하여 공산성 궁궐터의 적심석이 같은
구조였음을 알아냈다.
김종규씨는 이 곳의 중앙에 돌로 사방을 돌린 연못이 있었으며, 이곳에서
수영을 하였는데 물이 마르지 않았다고 증언하였다. 이로보아 공산성에서
나타난 백제의 장방형연못과 비슷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는 회백색타날문연질토기편이 지표면에 산재하였으나 그동안
거쳐간 2000여명의 방문객들에 의해 현재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특이하게도
이 곳에서 나오는 타날문은 대부분 양면이다. 봉황문막새기와와 "田", "", "官"
등의 명문와편도 발견되었다. 이 중에서 王名을 나타내는 ""자가 나온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글자의 아래부분이 日자가 아니라 田자로
되어 있었다.1997년에 한종섭씨는 궁궐지의 동쪽 과수원부근에서 치미조각을
발견하였다. 이곳에서 많은 유물이 나온 장소로 궁지와 남문사이 평탄한 대지가
전개되고 있어 필자는 이곳 왕이 업무를 보던 南堂으로 추정하고 있다.
1999월 8월3일 KBS 일요스페셜에 방영되자 백제문화재 전문위원들이 2차
방문하여 통일신라까지 올라갈 수 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후 강찬석씨의
제보로 조익현 의원이 국회에 이 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하여 현재 경기도매장
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하고 있는 중이다.
이성산과 검단산 사이에 있는 한성백제의 추정 왕궁지
- 백제문화연구회 자료
~~ 하략~~
******* 각주(各註)에 백제의 유래와 기원에 대한 중요한 설명이 들어 있어서
원문은 상략(上略)하였으나 주(註)는 당초 원문대로 남겨 놓았습니다. *******
광진구, 성동구, 남산 일대......
7080 아차산 음악회
내려 올때에 <하얀 목련이 필 때면~~
다시 생각나는 사람~~ > 이라는
양희은의 <하얀목련> 노래가 흐르고......
웬지 이 노래를 들으면 목이 먼저 메어온다.......
'들꽃다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상봉역 ~ 김유정역 ~ 저수지 까지.......셋 (0) | 2014.04.16 |
---|---|
춘천 금병산록 저수지에서....... (0) | 2014.04.16 |
아차산의 봄날 ......셋 (0) | 2014.04.10 |
아차산의 봄날 ......... 둘 (0) | 2014.04.09 |
아차산의 봄날......... 하나 (0) | 2014.04.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