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망 - 왕위를 찬탈하다

2014. 5. 21. 11:03우리 이웃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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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상하오천년사

왕망이 왕위를 찬탈하다

[ 王莽簒位 ]

   왕소군이 장안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원제는 세상을 떠났다. 아들 유오(劉鰲)가 황위를 계승했는데 그가 바로 성제(成帝)이다. 성제는 무도한 황제로서 나라 정사를 전혀 돌보지 않았다. 그리하여 조정의 대권을 그의 외척(태후나 황후의 본가 쪽 친척)이 서서히 장악하게 되었다. 성제의 어머니인 황태후 왕정군(王政君)한테는 여덟 동생이 있었는데, 그중 일찍 죽은 동생 하나만 빼놓고 일곱 모두 후작(侯爵)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왕봉(王鳳)의 지위가 제일 높았으며, 대사마(大司馬)에 대장군까지 겸했다. 왕봉이 조정 대권을 틀어쥐자 그의 형제와 조카들은 모두 교만해져서 가는 곳마다 위세를 부렸다. 그런데 오직 왕망(王莽)만은 그들과 달랐다. 그는 글만 읽는 선비처럼 매사에 조심하였으며 청렴한 생활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왕씨네 인간들 중에서 그래도 사람 같은 것은 왕망밖에 없다고 했다.

왕망

왕망

왕봉이 죽은 다음, 그의 직위는 다른 형제 둘이 이어받았다가 나중에 왕망한테로 넘어갔다. 대사마가 된 왕망은 인재들을 많이 도와주었으며, 그 소식을 들은 많은 선비들이 그를 찾아왔다. 성제가 죽은 다음 10여 년 동안 한나라 조정은 황제를 한제(哀帝), 평제(平帝) 이렇게 두 명이나 갈아치웠다. 평제는 9세에 즉위해서 나라 대사는 왕망이 모두 주관하게 되었다. 아첨을 일삼는 대신들이 왕망을 한나라를 안정시킨 대공신이라고 추켜세우며 그를 안한공(安漢公)으로 책봉해야 마땅하다는 상주서를 황태후에게 올렸다. 그러나 왕망은 봉읍지와 봉호(封號)를 받는 것을 사양했다. 후에 대신들이 여러 번 권해서야 왕망은 비로소 봉호를 받았다.

왕망이 책봉을 거절하면 할수록 새로운 봉호를 내려야 한다는 대신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왕망의 책봉을 높여야 한다는 상주서를 올린 이들이 조정 대신, 지방 관리, 일반 백성까지 합쳐 48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왕망을 칭송하는 시를 정리해 펴내기도 했다. 왕망의 위신은 구름같이 높아졌다. 평제는 철이 들면 들수록 왕망이 두렵고 미웠다. 그래서 이따금 왕망이 없는 곳에서 그에 대한 불평을 털어놓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제의 생일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렸다. 이때 왕망은 남몰래 독주를 부어 평제에게 권했다. 왕망이 그럴 줄은 꿈에도 몰랐던 평제는 독주를 그대로 받아 마셨다. 며칠 후에 평제는 중병에 걸려 숨을 거두었다. 왕망은 남들보다 더 애통한 척을 했다. 사망 당시 평제는 겨우 14세였기 때문에 자식이 없었다. 왕망은 유씨네 종실에서 두 살배기 아기를 데려다가 황태자로 삼았는데 그가 바로 유자영(孺子嬰)이다. 왕망은 스스로를 ‘가황제(假皇帝)’라 칭했다(여기서 ‘가’는 가짜라는 뜻이 아니라 ‘대리, 대행’의 뜻이다). 그렇게 되자 일부 대신들은 개국 공신이 되어 보려고 왕망더러 가황제니 뭐니 하는 것은 집어치우고 직접 황제가 되라고 권유했다. 줄곧 겸양하기로 이름이 났던 왕망이었지만 이때에 이르러서는 겸양이 없었다.

8년, 왕망은 정식으로 황위에 오르고 나라 이름을 ‘신(新)’으로 고쳤으며, 도읍은 그냥 장안으로 정했다. 고조가 세운 전한 왕조는 210년 동안 유지되다가 이렇게 종말을 고했다. 황제가 된 왕망은 탁고개제(托古改制), 즉 옛것에 의탁해서 제도를 개혁한다는 허울을 내걸고 변법을 실시했다. 변법의 주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전국의 토지를 모두 황제의 소유인 왕전(王田)으로 하며 따라서 개인의 토지 매매를 금한다.
2) 노예제는 폐지하지 않지만 매매는 금한다.
3) 물가를 평가해 가격을 정하고 화폐를 개혁한다.

듣기에는 그럴듯했지만 어느 하나도 실현될 가능성이 없었다. 왕망의 탁고개제는 농민들의 반대뿐만 아니라 많은 중소 지주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국내가 혼란스러워지자 왕망은 국민들의 주의를 밖으로 돌리기 위해 침략전쟁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자 흉노, 서역, 그리고 서남 각 부족들이 저항했다. 후에 왕망은 강제 노역을 시키고, 각종 가렴잡세(苛斂雜稅)를 징수했으며, 관리들이 백성들을 압박하고 착취하게끔 종용했다. 농민들은 참다 못해 결국 봉기를 일으켜 정부에 대항했다.

대사마 인장(左) [전한시대], 대사마 인장(右) [전한시대]

대사마 인장(左) [전한시대], 대사마 인장(右) [전한시대]

동전과 질거푸집 [왕망시대]

동전과 질거푸집 [왕망시대]

신망(新莽)시대의 동곡(銅斛)

신망(新莽)시대의 동곡(銅斛)쌀을 계량하는 용기인 ‘곡’이며 동으로 만들었다. 한 ‘곡’의 용량은 열 말이다. 이 곡에는 81개의 전서체가 새겨져 있는데 그 내용은 왕망이 기준 도량형을 전국에 반포한 일에 관한 것이다.

대천오십(大泉五十)을 제조하는 데 사용한 질거푸집(左), 대포황천(大布黃千)을 제조하는 데 사용한 구리거푸집(右)

대천오십(大泉五十)을 제조하는 데 사용한 질거푸집(左), 대포황천(大布黃千)을 제조하는 데 사용한 구리거푸집(右)대천오십은 왕망의 제1차 화폐개혁 때 주조한 화폐의 일종인데 왕망 통치시기에 가장 오랫동안 유통되었던 화폐이다.(左), 왕망의 제3차 화폐제도 개혁의 역사적 유물로서 한나라 화폐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右)

중국상하오천년사 이미지
출처
중국상하오천년사, 2008.4.25
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중국 상하이 오천년사> 제1권. 중국인민정치현상회 산하의 역사ㆍ문화학자들이 오천 년 중국사를 인물과 사건을 중심으로 풀어쓴 책이다. 허구와 ...자세히보기
저자
풍국초
전문 창작 집단으로서 중국인민정치협상회(中國人民政治協商會) 산하의 역사ㆍ문화학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지은 책으로는 『중국통사』, 『세계통사』, 『중화문명사』, 『세계문명사』, 『세계상하오천년』, 『중국고전명저감상』 등이 있다.
옮긴이
이원길 | 교수
중국 연변대를 졸업하고 중앙민족대 대학원과 북경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현재 중앙민족대 교수이자 조선한국학연구소 소장, 국가일급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설야』, 『춘정』, 『봉황새 난다』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자세히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