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탈 놀이문화의 잔재

2014. 7. 13. 20:01여행 이야기




       수탈 놀이문화의 잔재




       고향인 경북 문경과 충북 괴산의 경계부에는 선유구곡(仙遊九谷)이 두군데에 있다.


하나는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 벌바위 마을 근처에 있는 문경 선유구곡이고,


다른 하나는 괴산군 청천면 송면마을 근처에 있는 괴산 선유구곡이다.



    이 두 선유구곡 중간에는 불란치재와 대야산이 있어서 대야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북쪽으로 흐르면 괴산 선유구곡을 거쳐서 괴강으로 흘러들어 남한강 지류로 달천으로


모여들게 되고 충주 인근에서 남한강과 합류하며, 남쪽으로 흐르면 문경 선유구곡을 거쳐서 


양산천, 영강으로 흘러들어 낙동강의 지류가 되어 영순면 송정에서 낙동강과 합류한다.



   이 두 선유구곡은 대일항쟁기에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지방행정구역이 개편되기 전까지


문경군에 속하였다. 그 이전까지는 괴산의 선유구곡도 문경시 농암면에 속하였다.


괴산 선유구곡에서 하류로 20리 쯤 떨어진 곳에 화양구곡이 있어 산자수명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이 화양동구곡에는 우암 송시열 선생님이 만드신 화양동 서원과 만동묘가 있어서 내륙지방인 


충북일대의 사설교육기관으로는 명성을 날리었고 근처의 유생들이 모여들어 학문을 배우고 


익히는 장소로 손색이 없는 역활과 기능을 다하고 있었다.  조선조 말로 들어와서 유림문화가 혼탁해 


지자 이 화양동서원에서 공부를 하였으나 과거급제에 실패한 지방유생들이 떼를 지어서 근방의 


정자들로 유산(遊山) 놀이를 자주 떠났었다고 한다. 


    이러한 유산놀이 문화는 평소에 향교나 서원에서 배우고 익힌 학문을 대자연 앞에서 다시 점검하고,  


또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른다는 의미에서 고조선부터 우리 한민족의 기층정서 함양 면에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아름답고 권장하여야 할 전통이다.



    이렇게 대자연을 유람하며 학문을 익히고 심신을 단련하던 청년집단을 


북경, 요하 지역의 고조선에서는 국자랑(國子郞) 또는 천지화랑(天指花郞), 삼랑(三郞)이라 불리우던 


선배(仙輩)집단, 북부여의 해모수가 소속되었던  천왕랑(天王郞) , 요하~만주지방의 고구려 발해에서는 


조의선인(皂衣仙人), 백제에서는 무절(武節), 신라에서는 화랑도(花郞道), 그리고 고려에서는 불교가 


국교였던 당시 시대상황의 영향으로 재가화상(在家和尙), 국선(國仙), 선랑(仙郞) 등으로 불리워지며, 


역사 시대는 달리 하여도 늘 이어져 내려와서 이를 통칭하여 선도(仙道) 또는 풍류도(風流道)라고 


부른다.


    이러한 청소년 수련단체인 선배집단은 처음에는 활쏘기, 기마훈련,또는 각 지방을 여행하면서 


군사요충지나 물산을 파악하는 군사경제적인 목적 즉 무술수련과 군사훈련을 겸한 무인수련단체로 


시작하였으나. 점차 역사의 진전에 따라 문인 중심의 선비집단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조선조에 나타난 선비라는 말은 선배(仙輩) 집단이 음운변화를 일으켜서 우리말로 정착된 것이다.


교통과 정보통신의 발달이 미약하였던 초창기에는 다분히 오늘날에 각 지방에서 개최되는 전당대회와 


같은 성격을 갖는 중앙집권층과 지방 지배세력권들 간에 소통과 교류의 장으로도 활용되었다.



  이러한 고유한 풍류사상이 여진족 출신들이 주축이 된 청나라의 등장으로 중화사상에 대한 개념상 


혼동으로 성리학이 뿌리를 찾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던 조선조 후기로 내려오면서 우리가 중화(中華)라는 


소중화(小中華) 기치를 드는 운동을 우암 송시열 선생님 등이 주도하면서 부터 풍류도 본래의 취지를 


잃고 표류하기 시작하였다.


    화양동 소원에 모인 일부 잘못된 선민의식(選民意識)을 가진 유생들이 근처에  유산(遊山) 중 


경치가 수려한 곳에 여럿이 모여 가근방에서 중인이나 평민 출신 중에서 재력가들을 불러모아 놓고


충효가 어떠하다는 둥 삼강오륜을 어겼다는 둥 하는 일장광설을 늘어놓으면서 심지어는 린치 등 -


수행한 하인들을 시켜서 사형(私刑)을 가하기 까지 하였다.



   이러한 파렴치한 행동은 겉으로는 성리학의 주창(主彰)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재산가인 중인출신이나


평민출신들에게 놀이에 소요되는 비용이나 물품을 조달하는 방편인 크게 잘못된 폐단으로 활용되었던 


이다.


   이러한 유생들에 의한 놀이문화의 병폐는 비단 화양서원 한 곳만의 사례가 아니라 거의 전국에 걸쳐 


있는 여러 서원출신 유생들의 모임에서는 흔히 통용되는 폐악으로 번져나갔다.


    아마도 민족 형성의 갈래상 4촌형제 격인 여진족들이 중원을 제패하고 있었던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숭상하는 지식기반이 된 성리학과 주자학이 꽃피우고 있었던 사라진 명나라에 대한 


회억(懷憶)에 대한 문화적인 갈등이 엉뚱한 방향으로 표출되고 있는 한 예가 이러한 수탈 놀이문화의


폐단으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하는 추론이 가능하다.



   (***** 실제로 조선조를 건국한 태조 이성계 이단(李旦)은 원나라 쌍성총관부 소속 여진족 부족장인


다루가치를 대대로 역임하고 있던 집안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후손인 선조 대에는 명나라가  


임진왜란을 도우려고 파병하였던 은인국으로 생각하고서 명과 성리학에 기대려는 사대주의가


팽배하였다.명의 임란시 파병은 일본이 명을 치려고 대륙진출을 위한 길을 빌려달라고 하는 


명분으로 한반도를 침략하고 있었던 관계로 전장을 명의 영토인  요동~중원지방에서 이동하여 


한반도 내에다 국한시켜 자국내에서의 전란의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명의 전략상 선택에서 


조선파병이 결정되었다는 점을 간과하여서는 안된다..)





  이렇게 서원 출신들의 폐악을 여러번 접하고 있었던 대원군은 자신도 비록  왕손이지만 


시정에서 파락호 생활을 할 때에 이러한 권문세도가 출신의 유생들의 파렴치한 가렴주구에 몇번 


당한 경험이 있는지라, 아들인 고종의 왕위계승으로 정권을 잡았을 때에 과감하게 서원철폐령을 


내리게 된다.



   민주화된 오늘날에 와서도 이러한 잘못된 놀이문화의 병폐가 혹여 잔존하고 있지나 않고 있는지


세심하게 살펴 보아서 본래의 호연지기 함양이라는 정신을 구현하는 데 한치의 흐트러짐이 있어서는


않된다고 하는 점을 정밀하게 점검하고 만약에 마음 속 기저에서라도 이러한 폐해의 싹틈이 


한줌이라도 발견된다면, 한밤중에라도 맑은 개울이나 너럭바위에 나가서 목욕제계하고 천지신명에게 


자신의 잘못을 빌며 크게 반성하여야 할 것이다.





  ******* 오늘날 사소한 듯이 보이는 자신의 작은 잘못이 얼굴도 모르는 작고하신 조상들의 행태를 


       되돌아보게 하는 누를 끼쳐드리는 일이 있어서야 어찌 훌륭하고 보람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떳떳한 후손임을 자랑할 수 있겠는가??



          나이가 한두살 더 먹어갈 수록 매사에 조심하고 근신해야 할 일이다.


      조상들에까지 욕을 먹게 해드려서야 어찌 지하에 가서 그 분들의 존안을 다시 뵐 수 있겠는가??


      " 매사에 정성을 다하고 검덕(儉德)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