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곡원림을 찾아서·3 -선유칠곡의 우정을 따라

2014. 7. 21. 22:44여행 이야기




구곡원림을 찾아서·3 <선유칠곡> view 발행 | 구곡원림답사기
이청산 2013.05.27 19:16



       

구곡원림을 찾아서·3
-선유칠곡의 우정을 따라

 

 세 번째 구곡원림 답사 길에 나선다이 번 행로는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에 있는 선유동 계곡이다선유동에는 선유칠곡과 선유구곡이 있다고 한다칠곡은 무엇이고구곡은 또 무엇인가.가득한 호기심을 안고 걸을 수 있는 길이 될 것 같았다.

몇 대의 차를 나누어 이강년기념관 앞에 집결한 것은 5월도 중순을 넘어선 20일 11시경이었다.십여 명의 회원들이 선유동천 나들길 안내판 앞에 섰다하늘이 흐리고 오월 날씨답지 않은 스산한 바람이 불기도 했지만호기 어린 답사의 발길을 막지는 못했다.

지난달의 화지구곡 답사에 대한 회고에 이어 오늘의 안내를 맡은 선유칠곡의 김영순 회원과 선유구곡의 손해붕 회원에게 사의를 표하는 이만유 회장의 인사 말씀과 함께,뜻 있는 답사의 결의를 다지면서 목적지를 향하여 출발한 것은 정오가 가까울 무렵이었다.

 

선유칠곡의 우정을 따라

차를 움직여 선유동교를 건너 선유동유스파크 앞에 닿았다차를 세우고 계곡 쪽으로 내려갔다물길 방향으로 도보 통로를 따라 잠시 내려가니 문득 담쟁이가 기어오르고 있는 깎아지른 바위 절벽이 앞을 가린다.

칠우대(七愚臺)’라는 글자와 함께 김종률(金鐘律), 정세헌(鄭世憲), 민순호(閔舜鎬), 김정익(金正翊), 김정진(金廷鎭), 김양한(金亮漢), 김종훈(金鍾勳등 일곱 사람의 이름이 나이순대로 새겨져 있다이들은 각기 우은(愚隱), 우석(愚石), 우초(愚樵),우송(愚松), 우전(愚田), 우포(愚圃), 우천(愚泉)이라는 호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 바위를 칠우대라 한 것 같다이곳이 바로 선유칠곡의 제1곡이다.

이 칠우(七愚七友)들은 대한제국 시절 망국(亡國)의 시기에 가은(加恩지방의 선비요, 유력한 인사들로 나이도 비슷하고 정도 두터워 자주 모임을 가지고 선유동의 산수를 즐기며선유구곡 아래에 칠곡(七曲)을 경영하면서 우정을 나누었다고 한다이러한 과정에서 서로의 만남을 위한 장소로 1910년대 칠우대 옆 산자락에 정자를 세우니,의친왕(義親王이강(李剛)이 이를 알고 칠우정(七愚亭)’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들이 국권을 빼앗기던 시절에 서로 만나 무엇에 마음과 뜻을 모았을까를 상상하며수풀 속에서 고즈넉한 물길을 가누는 칠우폭포를 지나 칠우정을 찾아 기슭을 올라가니 정자는 허물어지고 집터만 어지럽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담장이며 집 바닥에 콘크리트 흔적이 선연히 남은 걸 보니 정자가 서 있을 때도 지을 당시의 건축물이 아니라 후세인들에 의해 보수를 거듭했던 것으로 보인다누군지 모를 그 후세인은 칠우들이 모일 당시의 정서와 정경은 별로 고려하지 못했던 것 같다.

칠우정에 앉아 망국의 한을 안고 시회(詩會)를 열며 내려다보았을 선유동천의 제2곡 망화담은 칠우정의 부침을 아는 듯 모르는 듯 맑게 흐르는 물을 관조하며 옛 바위 그대로 網花潭’ 아름다운 글씨를 고이 품고 있었다. ‘망화담이라 한 것은 계곡을 떠내려 온 꽃잎들이 이곳에서 맴을 돌아 그 꽃잎 그물질하며 즐겼으리라 상상해 봄 직하지만지금 냇가에는 우거진 잡초가 바위를 가리고 큰물에 침수된 흔적이 상처처럼 얼룩져 있을 뿐이었다.

칠우대를 출발점으로 하여 망화담을 지나 물길을 거슬러 올라간다아치형 교각으로 서 있는 선유동교를 가로 질러 오르니 서너 평은 족히 될 것 같은 평평한 반석이 교각을 바라보며 누워있다.3곡 백석탄(白石灘)으로 말 그대로 흰 바위다바위가 너른 만큼이나 글자도 큼지막하다이 너럭바위에 칠우들이 앉아 여울을 지우며 흘러가는 맑은 물을 바라보며 시로써 망국의 울분을 삭였을런가우리는 이 바위에 앉아 점심을 먹는다저마다 싸온 도시락을 펼쳐내어 서로 권하고 나누어 먹는 마음들이 흰 바위를 닮았을까맑은 물을 닮았을까정겹고 살갑기 그지없다.

선유동교로 올라 다리를 건너 계곡을 따라 오르다가 큼지막한 바윗돌 징검다리를 건넌다다시 계곡을 오르노라니 시내인가바위인가,온통 바위로 된 시내에 맑은 물이 흐르고 그 한 너럭바위에 살아 움직이고 있는 듯한 글자가 보인다4곡 와룡담(臥龍潭)이다보는 이들은 해서와 초서를 배분하고 조합한 절묘한 글씨체라 하는데마치 몸을 틀고 있는 용의 모습을 그린 것 같다글씨체만 그런 것이 아니라 계곡수도 이곳에 이르러 큰 못을 이루면서 넘실거려 마치 누운 용이 누워서 꿈틀거리는 형상 같으니글자와 물의 형세가 하나로 어우러진다이 바위 이 물이야 예 모습 그대로 일 터그 느낌 또한 예와 이제가 다르랴.

다시 물길을 거슬러 오르다가 저쪽 기슭으로 가기 위해 바위 사이로 흐르는 물길을 뛰어 건넌다아뿔싸이 걸 어쩌면 좋은가.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카메라가 뛰쳐나와 물가에 떨어진다얼른 주어 물기를 떨어내고 작동을 시켜보지만 오호통재라캄캄한 먹통이다이 좋은 경치를 담을 수 없음에야 오늘의 탐방 길이 무슨 의의가 있다 할 것인가눈으로만 가슴으로만 넣어 저 아름다운 정경들을 어찌 다 갈무리할 수 있을 것인가그 안타까움을 딛고 얼른 생각하니 폰카(핸드폰 카메라)가 떠오른다핸드폰을 꺼내어 들었지만 아프고 아린 마음은 쉽사리 가시지 않는다.

생채기진 가슴 안고 이른 곳이 제5곡 홍류천이다물가에 기다랗게 누운 너럭바위에 물 흐르듯 紅流川’ 세 글자가 물길 따라 새겨져 있다문득 깊어진 수심에 잠시 숨을 돌리듯 느려진 물살을 따라 붉은 꽃잎 둥둥 떠 있어 홍류천이라 했던가탐방 길 바쁘던 나그네 걸음도 잠시 멈추어 그 물에 마음 담그며 옛일을 그려본다맑고 깊은 물에 가슴 적시며 분주를 떨어내듯 그 옛날의 칠우들도 이 물로 시름을 거두어 내었을까.

물에 씻은 맑은 마음으로 계곡을 다시 거스르니 평평한 너럭바위로 빛 고운 물이 널따랗게 흐르는데건너 기슭 검은빛 커다란 장방형 바위에 내려 쓴 세 글자가 보인다6곡 월파대(月波臺)칠우의 우정 행로가 예까지 이르렀을 때 해는 이미 기울고 달이 이 물 속에 잠겼던가그 달빛 결을 이루며 이 물을 흐르는 정경이 하도 고와 이름조차 월파대라 한 것인가.

그 옛일 상상으로 담으며 몇 발자국을 다시 옮기니 칠우가 즐겼던 칠곡의 마지막 칠리계(七里溪)’에 이른다널따란 바위를 흐르는 물이 7리에 걸쳐 여울져 있어 칠리계라 일렀던가좌우에 무성하게 어우러진 푸른 숲에 안겨 길고도 맑게 흐르는 물이 한가롭고도 여유롭다이 한유(閑裕)로 칠우들은 칠리계에서 칠곡을 정리하며 세속에 허물진 마음을 씻어내며 새로운 정을 다졌을지도 모르겠다.

칠우들이 즐겼던 칠곡을 잇달아 올라보니선유칠곡은 주자를 비롯한 대개의 구곡 경영자들처럼 도학적인 뜻을 새기며 즐겼던 원림이 아니라아름다운 정경을 우정에 담아 즐겼던 것 같다그 정경그 우정으로 나라 잃은 아픔을 달래며 심신의 수양을 쌓아 나갔을 것 같다.

오늘 우리의 걸음도 도학의 심오한 이치를 따라 온 것이 아니라 물과 바위나무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경관을 따르고 그 우정의 자취를 따라 왔을 뿐이다아직은 남았다이제부터 또 하나의 시작이다.

칠리계는 곧 선유구곡의 시작이다이제 우리의 걸음이 절정을 향해 가고 선유동천 그 아름다움의 한가운데로 들고 있다.

다시 선유구곡으로 든다.(2013.5.26.)

                                                                 




                                                           - 다음 블로그 <이일배의 수필사랑> 이청산 님의 글 중에서.....







       

가은친구|조회 24|추천 0|2005.06.25. 05:21

선유칠곡 (메인) 

선유동(仙遊洞) 입구의 산기슭에 칠우정(七友亭)이 자리한다. 이 정자는 대한제국 시절 가은(加恩) 지방 7인의 벗들이 나이 서로
가깝고 정의도 도타워서
자주 모임을 가지고 선유동의 산수를 즐겼는데 선유구곡 아래에 칠곡(七曲)을 설정하고 경영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서로의 만남을 가지는 장소로 1910년대 망화담 위에 칠우정을 건립하였는데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剛)이 

‘칠우정(七友亭)’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의친왕이 이 정자의 이름을 ‘칠우정’이라
명명한 까닭은 7인의 벗들이 모두 어리석을 우(愚) 자를 호로 가졌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가은읍의 선비요 유력한 인사들이었는데 

나라를 빼앗기는 시절을 만나 이곳에 은거하며 수련한 것으로 보인다. 

우은(愚隱) 김종율(金鐘律) 우석(愚石) 정세헌(鄭世憲) 우초(愚樵) 민순호(閔舜鎬) 우송(愚松) 김정익(金正翊) 

우포(愚圃) 김양한(金亮漢) 우전(愚田) 김정진(金廷鎭) 

칠우들이 경영했던 선유칠곡(仙遊七曲)은 다음과 같다. 

   칠우대(七友臺) 망화담(網花潭) 백석담(白石灘) 와룡담(臥龍潭) 홍류천(紅流川) 월파대(月波臺) 칠리계(七里溪) 
이를 통해 볼 때 선유칠곡(仙遊七曲)은 도학적 의미를 가지고 경영된 원림은 아니다. 다만 아름다운 경관을 칠곡의 공간을 

통하여 경영하며 완상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나라를 잃은 울분을 산수 자연 속에서 삭이며 마음을 수양하였던 것이다. 

    이들 칠곡을 흔히 신선유구곡(新仙遊七曲)이라 말하지마는 금번 학술조사를 통하여 선유구곡 아래 신선유구곡이 새로 지정된 

것이 아니라 칠우정의 주인공인 칠우들이 칠곡을 새로 지정하여 경영했음이 밝혀졌고 또한 이 선유칠곡(仙遊七曲)의 각 굽이의 

명칭이 석각되어 있음이 고증되었다. 
   문경에는 원래 선유구곡(仙遊九曲)이 두 곳에 존재했다. 가은읍 완장리에 있는 내선유구곡(內仙遊九曲)과 지금은 충청북도 

괴산군에 있는 외선유구곡(外仙遊九曲)이 그것이다. 1963년 1월 1일 농암면 삼송리가 법률 제1172호에 의거 괴산군 청천면에 

편입되면서 외선유구곡은 문경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정태진이 유람할 당시에는 외선유구곡도 문경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이 굽이를 유람하고 구곡시(九曲詩)를 지었다. 정태진은 먼저 서시를 지어서 외선유구곡을 유람하는 자신의 감회를 피력하였다. 

昔人已去我來今 옛 사람 이미 가고 나 지금 와서 
洞裏烟霞取次尋 안개 덮인 선유동을 차례로 찾아본다 
景仰先生當日蹟 선생의 당일 자취 사모하여 우러러니 
偏傷小子暮年心 이 몸의 모년 마음 슬프게만 하는도다 
懷玆山水塵釁外 이곳의 산수를 품으니 진흔의 밖이라 
疑有神仙窟宅深 깊은 곳엔 신선이 사는 듯도 하여라 
一路漸窮眞境界 한 길로 점차 나아가면 진경의 경계이니 
高臺徙倚一長吟 높은 대에 기대어서 한번 길게 노래하리35) 

    외선유구곡(外仙遊九曲) 각 굽이의 원래 지명이 어떠했는지 현재 잘 알 수 없다. 다만 지금 전하는 지명은 모두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명명한 지명이다. 외선유동에 구곡을 설정하고 각 굽이의 특징에 맞게 퇴계가 명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공간은 

이전의 단순히 경치가 좋은 공간이 아니라 천리(天理)가 유행하는 공간이 되었다. 이처럼 구곡원림(九曲園林)은 그 명칭에서부터 

새로운 이름을 붙여서 성리학적 세계를 만들었다. 

    선유동의 여러 절승지는 모두 퇴계 선생이 이름을 지었다. 

仙遊諸勝處皆退溪先生命名也36) 

    외선유구곡은 아홉 굽이의 절경이 자리하는 공간이다. 아홉 굽이는 제1곡이 석문(石門), 제2곡이 경천벽(擎天壁), 

제3곡이 학소대(鶴巢臺), 제4곡이 연단로(煉丹爐), 제5곡이 와룡폭(臥龍瀑), 제6곡이 귀암(龜巖), 제7곡이 기국암(碁局巖), 

제8곡이 난가대(爛柯臺), 제9곡이 은선대(隱仙臺)이다. 각 굽이의 명칭에서 이미선계(仙界)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데 특히 학소대, 

연단로, 기국암, 난가대, 은선대 등은 신선이 사는 장소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 이름이다. 퇴계가 이 굽이의 이름을 이렇게 

명명한 것은 이 공간이 신선이 노닌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퇴계가 신선의 세계를 추구한 것은 아니다. 그는 성리학자로서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이러한 퇴계가 신선의 세계에 빠지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가 선유동에서 신선의 세계에 노닌 것은 맑은 세계를 지향한 

것이다. 정태진이 지은 「외선유구곡시(外仙遊九曲詩)」는 다음과 같다. 



        石門

 
洞天寥廓石爲門      동천은 넓고도 쓸쓸해 돌이 문 되고 
常有雲霞白日昏      늘 구름 안개 끼어 밝은 해를 가린다 
吾輩仙遊從此始      이로부터 우리 무리 신선처럼 노니니 
世間何處有塵喧      세상의 어느 곳에 진훤이 있겠는가 



         擎天壁  

 

嘉名肇錫昔何年      아름다운 이름 옛날 어느 해에 시작됐나 
一壁岧嶢擎九天      한 벽이 높이 솟아 하늘에 닿는다 
矗立眞能成氣像      곧게 솟아올라 진실로 기상을 이루니 
幾經桑海獨蒼然      몇 번이나 강산이 변했지만 홀로 푸르도다 



         鶴巢臺 


丹頂皓衣昔此巢      붉은 산꼭대기 흰 학 옛부터 둥지 틀고 
巖罅惟見古松梢      바위 틈엔 소나무 가지 끝만 보인다 
秉渠直欲追仙路      이를 잡고 곧바로 선로를 좇고자 하지만 
壁斷雲悠不可交      벽이 끊어지고 구름이 가리어 만날 수 없도다 
 


        煉丹爐


成丹要訣奈今無      단약을 만드는 비결 지금 어찌 없는가 
巖上遊仙遺煉爐      바위 위에 노닌 신선 화로를 남겼도다 
堪歎世人多白髮      세상 사람 흰 머리 많다 하며 탄식하나 
只憑虛器浪傳呼      헛된 도구 의지하며 부질없이 전하도다 



      臥龍瀑 


瀑布長看臥白龍      긴 폭포는 흰 용이 누워 있는 모습이라 
轟雷噴雪日撞舂      큰 소리 내고 흰 눈 뿜으며 날마다 떨어진다 
全輸壯觀玆焉極      온전히 옮겨 놓은 장관이 이렇듯 지극하고 
心目冷然爽氣從      시원한 기운을 따르니 마음도 차갑도다 



         龜巖 


無人解占灼神龜      거북을 구워서 치는 점 해석할 이 없어서 
放置荒閒等怪奇      이를 방치하니 황한하여 기괴하게 되었다 
應與瀑龍長蟄伏      응당 폭포 용과 더불어 길이 칩거하여 
蓄他靈異待明時      신령한 기운 쌓아 밝은 때를 기다리리 
 


      碁局巖 


巖上老仙愛看碁     바위 위의 늙은 신선 바둑 두기 사랑하여 
欗柯樵者也相隨     나무 하는 초동과 어울려 바둑을 잘 둔다 
閒情適處機心息     한가한 마음 좋은 처소에 기심이 사라지니 
局外輸贏㧾不知     바둑은 두지만 승부엔 관심 전혀 없다네 


       爛柯臺 


巖仙碁罷水聲多      바위 위 신선 바둑을 마치니 물소리 요란하고 
臺上何人昔爛柯      누대 위 그 누가 옛날에 도끼 자루 불살랐나 
眞境方知深處在      진경은 깊은 곳에 있다는 걸 알게 되니 
隔溪如聞紫芝歌      시내 너머에서 자지가 노래 들리는 듯하도다 


       隱仙臺


仙人己去尙餘巖      선인은 이미 가고 바위는 아직 남아 있어 
一入巖門謝俗凡      한번 바위 문을 들어서니 세속이 멀어진다 
紛拏世機那管說      세상의 욕심에 사로잡혀 어찌 가벼이 말하는가 
古來金口戒三緘      옛부터 말할 때는 신중히 하라고 하였네37) 




                   제1곡   칠우대(七友臺)

     선유칠곡은 제1곡인 칠우대(七友臺)에서 시작된다. 칠우대는 완장리 입구 시내 건너편 높다란 바위 위에 세워져 있는데 

바위에는 나이 순서대로 칠우(七愚)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계곡 사이로 난 길에 잡목이 우거져 이를 헤치고 어렵사리 올라가면 

숲 사이에 칠우정(七友亭)에 이른다. 아쉽게도 칠우정은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어지러운 상태로 남아 있었다. 

    칠우정에서 바라보는 정경은 앞으로는 망화담(網花潭)이 있는 시내가 보이고 멀리는 선유구곡이 자리하는 계곡이 한눈에 

들어온다. 옛날 칠우들이 이곳에 모여서 망국의 한을 달래고 시회(詩會)를 가지며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은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칠우대의 위치는 다음과 같다. ∙위도 : 36° 40′14.04″ ∙경도 : 127° 59′14.74″ ∙고도 : 250.2m 

               제2곡 망화담(網花潭)

     칠우대(七愚臺)에서 내려와 시내에 이르면 널따란 바위를 만나게 되는데 이 바위 사이로 선유칠곡의 맑은 시냇물이 흐르며 

작은 연못을 만든다. 이 못이 선유칠곡 제2곡인 망화담(網花潭)이다.널따란 바위 옆에 세워진 돌에 ‘망화담’이란 아름다운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끼가 많이 끼어 돌에 새겨진 글씨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이다. 물에 떠있는 꽃들이 많아서

그물질할 수 있는 못이란 의미의 망화담은 봄이면 선유칠곡에 각 굽이의 꽃잎들이 떠내려 와 이곳에 이르러 맴돌지 않았나 여기진다. 
망화담의 위치는 다음과 같다. ∙위도 : 36° 40′13.19″ ∙경도 : 127° 59′14.22″ ∙고도 : 227.5m 


               제3곡   백석탄(白石灘) 

     망화담(網花潭)에서 시내를 따라 200m 정도 거슬러 오르면 널따란 흰 바위를 만나게 되는데 이 굽이가 선유칠곡 제3곡인 

백석탄(白石灘)이다. 주위에는 나무가 없고 다만 흰 바위들 사이로 맑은시냇물만 흘러가고 있다. 여름이면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이 이 굽이를 찾을 만한데 주위에 그늘을 드리울 만한 나무가 없기 때문인지 많은 사람들이 찾지를 않았다. 흰 돌들 사이로 

흐르는 맑은 시냇물이 바위로 인하여 여울을 만들며 흘러가니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시원한 느낌을 가지게 한다. 그 옛날 칠우들은 

이 굽이에 이르러 망국으로 인하여 가졌던 울분을 삭이지 않았나 여겨진다. 
백석탄의 위치는 다음과 같이 측정된다. ∙위도 : 36° 40′14.02″ ∙경도 : 127° 59′00.27″ ∙고도 : 238.4m 


                제4곡 와룡담(臥龍潭)

    백석탄(白石灘)에서 300m 정도 물길을 따라서 거슬러 오르면 넓은 바위를 만나는데 이 굽이가 선유칠곡 제4곡인 와룡담(臥龍潭)

이다. 바위 위에 새겨진 ‘와룡담’ 글씨는 해서와 초서를 배분하고 조합하여 절묘한 느낌을 준다. 위로부터 흘러내려 

오던 시냇물이 이곳에 이르러 큰 못을 이루면서 넘실거려 마치 용이 누워서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이 굽이의 이름을 

용이 누워 있는 못이라고 명명한 것으로 보인다. 이 공간은 현재 접근이 쉽지 않아 아름다운 경관을 가지고 있지만 사람들이 

잘 찾지를 않는다. 접근성을 보장할 수 있는 약간의 공사를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이 굽이에 이르러 와룡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와룡담의 위치는 다음과 같다.∙위도 : 36° 40′16.68″ ∙경도 : 127° 58′51.05″ ∙고도 : 245.2m 



                   제5곡  홍류천(紅流川)
    백석탄(白石灘)에서 50m 정도 물길을 따라서 거슬러 오르면 시내가 굽어도는 지점에 시내를 가로지르는 바위가 나타나는 데 

이 바위 위에 홍류천(紅流川)이라 새겨져 있어 이 굽이가 선유칠곡의 제5곡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세차게 흘러오던 시냇물이 

이 굽이에 이르면 다소 완만하게 흐르게 되는데 이 때문에 흘러가는 물을 시간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다. 홍류는 붉은 물인데 

물이 붉을 수는 없으니 이것은 물 위에 붉은 꽃이 떨어져 흘러갔기 때문이다. 물살이 세차게 흘러가면 붉은 꽃잎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그런데 이 공간은 물살이 천천히 흘러가기 때문에 붉은 꽃잎들이 물을 가득 메우고 가기 때문에 시내가 온통 붉은 빛을 

띨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굽이의 이름을 홍류천이라 하지 않았나 여겨진다.홍류천의 위치는 다음과 같이 측정된다. 

∙위도 : 36° 40′76.30″ ∙경도 : 127° 58′47.92″ ∙고도 : 245.9m 




                    제6곡  월파대(月波臺)

    홍류천(紅流川)을 굽어돌아 약 50m 정도 오르면 시내 전체를 덮은 넓은 바위에 이르는데 이 굽이가 선유칠곡 제6곡인 

월파대(月波臺)이다. 이 굽이는 선유칠곡의 다른 굽이와 달리 바위가 넓게 자리하고 그 옆으로 시내가 흘러가 대(臺)라는 명칭이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비스듬히 자리하는 바위 때문에 이 굽이를 흐르는 시냇물이 완만히 흐르고 있었는데 달이 뜬 밤이면 달빛이 

이 물살 위에 비치면서 하얀 물결을 이루고 흘러가기 때문에 월파대라고 이름한 것으로 보인다. 월파대 바위 위에 앉으니 

선유칠곡의 경영했던 칠우들이 달밤에 이 굽이에 이르러 하얀 물결을 이루며 흘러가는 시냇물을 바라보며 흥에 겨워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월파대의 위치는 다음과 같다. ∙위도 : 36° 40′13.08″ ∙경도 : 127° 58′47.62″ ∙고도 : 246.3m 




                     제7곡 칠리계(七里溪)

    선유칠곡의 극처인 제7곡은 칠리계(七里溪)이다. 여울이 7리에 걸쳐 있다하여 이름이 붙여진 이 굽이는 선유구곡의 제1곡인 

옥하대(玉霞臺)와 인접하여 있다. 옥하대의 위치가 명확하지 않지만 선유칠곡을 경영했던 칠우들은 이곳이 선유구곡의 제1곡이라는 

사실을 알았던지 옥하대 아랫부분에 선유칠곡의 극처를 설정하였다. 널따란 바위가 약간의 격차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선유구곡에서 

흘러오는 물이 이 굽이에 이르면 작은 폭포를 이루며 흘러가니 7리를 걸쳐 흐르는 여울 같은 느낌을 가지게 한다. 
아쉽게도 이 굽이는 접근이 쉽지 않아 아름다운 경관에 비하여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선유구곡에 이른 사람들이 물길을 

따라서 내려오다 이곳에 이르러 아름다운 경관에 매료되어 오랫동안 머물기도 한다. 칠리계의 위치는 다음과 같다. ∙

위도 : 36° 40′09.06″ ∙경도 : 127° 57′36.03″ ∙고도 : 246.5m 


 



                                                  - 다음 카페 <가은친구> 가은친구 님의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