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 문경 구곡원림 탐방 길은 내가 안내를 맞게 되었다. 문경 사람이 된 지 햇수도 얕고 아는 것이 별로 있을 수도 없지만, 오늘 탐방로는 내가 살고 있는 곳과 가깝고, 그 길의 한 부분이 파괴되어 있는 모습을 내가 너무도 안타까워했던 연유 때문에 그 길의 안내가 나에게 맡겨졌다. 그 준비를 위해 김문기 교수가 쓴 <문경의 구곡원림> 중에 ‘화지구곡’을 읽고, 자료를 검색하고 몇 곳을 사전 답사하여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준비했다. 문경문화원에서 갖던 월례회를 이번 달만은 농협 이사이신 조성필 회원의 힘을 빌려 서문경농협 마성지점에서 갖기로 했다. 2013년4월15일 오전 11시 농협 회의실에 회원들이 모였다. 이만유 회장의 구곡원림 보존 활동의 긍지를 드높이자는 말씀과 함께 회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독려하는 인사 말씀을 거쳐 준비된 프레젠테이션으로 옥소(玉所) 권섭(權燮 1671~1759)이 경영했던 화지구곡(花枝九曲)의 대강을 소개하였다. 인현왕후 폐출 사건에 소두(疏頭)의 죄를 받아 창성으로 유배를 당한 이후 관계 진출의 뜻을 접고 오로지 탐승과 창작 활동의 길로 매진하던 옥소는 25세에 초취 이씨부인이 별세하자 중종의 4대손 중의대부 대원군 광윤의 따님을 부실로 얻어 60년을 함께 하였다. 30세 이후 경향 각처를 탐승으로 유전하던 옥소는 말년에 청풍, 황강, 제천 일대와 부인이 살고 있는 문경의 화지동(현 문경시 문경읍 당포리)을 내왕하며 생활하였으며, 만년에 화지구곡 원림을 경영하면서 화지구곡가를 지었다. 프레젠테이션을 마치고 회의장을 나와 일행과 함께 제1곡 마포(馬浦)부터 더듬어나갔다. 지금의 문경읍 마원리인 마포는 마성 소야교에서 3km 정도 떨어진 들판으로 신북천과 초곡천이 합류하여 넓은 시내를 형성하는 굽이에 자리 잡고 있는, 문경의 곡창으로 이름난 곳이다. 옥소는 관청의 누각에 올라 마원의 넓은 들을 바라보며 강물에 배를 띄우는 광경을 상상하며 시를 읊었는데, 지금은 들판 가운데를 도로가 가로지르고 강물도 예전 같지 않아 그 옛날의 운치는 상상으로서만 새겨볼 수 있을 뿐이었다. 이 회장은 김문기 교수가 지정한 위도 36°43′ 22.81″, 경도 128°07′ 00.97″의 위치를 찾아보고 싶어 하였지만, 누각에 기대앉아 안개 속에 덮인 들판과 마을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을 옥소를 상상하면 마원 들판의 특정한 지점이 큰 의의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옛일에 대한 상상을 더해가면서 마원교를 건너 벚꽃이 만발한 온천강변길을 달려 제2곡 문경향교로 향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문경초등학교 교사 시절 하숙집이었던 청운각 부근의 청운주막에서 대통령께서 즐겨 드셨다는 국밥으로 점심을 먹고 경북관광고 뒤쪽에 자리 잡고 있는 제2곡 문경향교에 이르렀다. 산자락 높직한 언덕 위에 자리 잡아 읍내 일원이 다 내려다보이는 향교는 1392년(태조1)에 창건되고 1620년에 중건되었다고 한다. 중국 주나라의 5성, 송나라의 4현 그리고 우리나라의 18현을 배향하고 있는데 옥소가 ‘성교(聲校)’라 한 것은 ‘시서예악지당(詩書禮樂之堂)’이라는 표지석이 말해주 듯 문풍(文風)의 명성이 자자한 곳이라 그렇게 일컬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향교를 화지구곡의 한 굽이로 설정한 까닭은 옛 성인을 봉안하여 윤리를 밝히는 모범이 되는 곳이기 때문일 것이겠지만, 도학을 드러내려 했다기보다는 향교의 풍속을 찬미하려함이었던 것 같다. 일행이 당도했을 때 마침 문이 열려 있어 대성전, 명륜당, 동재, 서재 등을 둘러보는데, 향교의 예도에 관해 잘 알고 있는 전홍석 회원의 친절한 해설로 향교의 미풍을 다시 새길 수 있었다. 향교를 나와 요성리를 거처 10여분을 달려 제3곡 광수원(廣水院)에 이르러 길가에 차를 세우고 옥소가 보았을 들판을 바라보았다. 전주 이씨가 1800년경 다른 동네보다 글방을 먼저 차려 강론하였다하여 강선(講先)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들판 가운데 서있는500년 수령의 느티나무가 마을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다. ‘광수원’이란 지명은 신북천과 산리천이 합수하는 곳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같은데, 이름처럼 시내가 별로 넓지는 못해 현실과 다르므로 옥소는 밭 매는 농부들에게 관심을 돌려 시상을 가다듬고 있다. 봄이 내려앉고 있는 들판을 바라보며 옥소의 시심을 헤아리다가 옥소의 발길을 따라 고요리로 향했다. 제4곡 고요리는 광수원과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마을이다. 커다란 마을 표지석과 함께 유서 깊은 마을 숲이 찾는 이를 먼저 맞는다. 느티나무가 성처럼 우거진 곳이라 하여 괴성(槐城)이라 하다가 변음되어 기성이 되고, 요순시대처럼 순박하게 하는 마을이라 하여 고요(古堯)라고 했다기도 하는데, 옥소는 이 마을에 들어 조용한 느낌 속에서 방아 찧는 소리를 들으며 정중동(靜中動)의 평화로운 정경을 그리고 있다. 숲을 지나 마을에 드니 400년 느티 노거수 아래에 게이트볼장과 함께 체육시설을 두고 있고, 앞에는 커다란 양옥 마을회관이 자리 잡고,회관 뒤쪽으로는 제5곡 화지동을 안고 있는 성주봉이 먼빛을 드러내고 있었다. 잠시 차를 달려 성주봉 아래 자리 잡고 있는 제5곡 화지동에 닿았다. 지금의 문경읍 당포리로 옥소가 초려를 짓고 거처하던 곳이다. 주자가 무이구곡 중의 제5곡에 무이정사를 건립했던 것처럼 옥소도 자신의 거처지를 제5곡으로 설정한 것이다. 마을 어귀에 서 있는 ‘玉所影閣’ 표지석을 보고 맑게 흐르는 개울을 따라 들어가니 느티나무 고목들이 서 있고 다리 건너로 옥소영각이 보였다. 옥소가 거처하던 초려는 없어졌으나. 영각 옆쯤에 거소를 두고 개울물 소리를 즐기며 살았을 것이라고 마을 사람들은 추정하였다. 관리인이 와서 언덕 위에 높직이 자리 잡은 영각의 문을 열어주어 옥소의 모습을 뵐 수 있었다. 진영(眞影)은 새재박물관에 보관 중이고 영각의 것은 사본이라 한다. 제5곡의 정경을 보며 ‘늙은이의 솟아나는 시심 다할 길 없네(不盡斯翁詠讀心)’라 노래한 옥소의 고아(高雅)한 삶의 모습을 기리며 전홍석 회원의 찬창(贊唱)으로 배례를 올리고. 영정이 바라보이는 뜰에 서서 옥소의 시심을 새기며 화지구곡 시를 낭송하기도 하였다. 당포리를 나와 갈평 쪽으로 달리면서 차를 멈추어 선 곳은 제6곡 산문계(山門溪)였다. 그 옛날에는 기묘한 층암절벽과 흰 바위가 시냇물과 더불어 절경을 이루는 계곡이 마치 산문(山門)처럼 보였다고 하나, 지금은 댐 조성으로 인하여 마구 파헤쳐져 옛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어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옥소가 이곳에 휘영각(輝映閣)을 짓고 석실에 암자를 만들어 화지동을 오고가며 은거하였다는 이곳은 댐에 수몰된 도로를 산 중턱으로 올려 축조하느라 층암절벽도 기암괴석도 모두 파괴되어 길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나온 바위 조각만 을씨년스럽게 서있을 뿐이었다. 댐의 둑 위에서 무참히 깨어지고 잘려나간 바위 절경을 상상으로 그리며, 구곡원림의 보존을 위해 뜻을 모아야 할 우리 회원들의 사명을 다시 돌아보기도 했다. 깨어진 산문계로 조각난 마음을 끌어안고 다시 길을 달려 제7곡 갈평(葛坪)에 이른다. 갈평은 옥소가 청풍에 기거하면서 하늘재를 넘어 부실 이씨부인이 살고 있는 화지동으로 올 때 늘 지나던 마을이다. 이 마을을 제7곡으로 설정한 것은 노래에서 ‘솔바람이 여울소리 같다(松風吼似灘)’고 한 것처럼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있기 때문이다. 마을 앞으로 시내가 흐르고 마을의 뒤편에는 야트막한 야산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산에는 소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고, 산 앞에는 용흥초등학교, 학교 옆에는 야산의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관음요(觀音窯)가 자리하고 있다. 초등학교에 들러 급식소 직원에게 물 한 잔을 얻어 마시며, 갈평의 솔바람 속을 거닐면서 청빈한 삶의 행복을 생각했을 옥소를 그리며 제8곡 관음원을 향하여 나섰다. 동로와 하늘재의 갈림길에서 하늘재 가는 길을 따라 오르다가 약사여래석불입상 표지판 앞에서 차를 멈춘다. 관음1리다. 옛날에 관음사라는 절이 있어 관음리라 했다는데, 절집은 없어지고 석불만 남았다. 산자락 아래의 평지 위에 집들이 드문드문 보였는데, ‘관음원(觀音院)’이라 하듯 하늘재를 오고가는 나그네에게 숙식을 제공하며 살아가는 마을이었다고 한다. 옥소는 노래에서 오고가는 행인이 별로 없어 생계(生計)가 어려운 마을 사람들의 삶을 걱정하고 있다. 지금은 규모가 비교적 큰 요(窯)도 들어서고 별장 같은 주택도 들어서 있다. 2009년 농촌진흥청에서 전국 100대 ‘살고 싶고 가보고 싶은 마을’을 선정하면서 문경에는 마성의 못고개마을과 동로의 오미자마을과 더불어 이 마을을 100대 마을의 하나로 뽑기도 했다. 차창으로 마을을 곁눈질하며 드디어 화지구곡의 대미를 이루는 제9곡 대원(大院)에 이른다. 대원은 옥소가 ‘해와 달과 구름과 이내 이곳이 별천지(日月雲烟是別天)’라고 노래했던 곳으로 하늘재, 계립령, 지릅재라고도 이른다. 경북 문경시 관음리와 충북 충주시 미륵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이 재를 ‘하늘재’라 한 것은, 큰 원을 두고 있던 곳이어서 ‘대원’이라 한 것을 ‘한[大]’,울[院]을 합쳐 고유어로 부른 것에서 나온 말인 듯하다. 옥소는 청풍에서 화지동을 오가는 길에 빈번히 오르내렸을 이 재에서 세상을 한 눈에 내려다보며 화지구곡을 정리하고 있는데, 문경 쪽은 아스팔트로 말끔히 포장되어 있고 충주 쪽은 흙길을 그대로 남겨 놓고 있다. 옥소가 오늘날 이 재를 넘는다고 하면 어느 길에 더 마음을 둘까. 이 회장은 포장길을 못내 아쉬워하며 흙길로 되돌리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기도 했다. 길섶 언덕 위에 우뚝하게 서 있는 ‘백두대간 하늘재’ 표지석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며 화지구곡의 탐방을 마무리하였다. 답사를 끝내고 하늘재를 내려오다가 차를 멈추고 관음리 어느 마을 정자에 앉아 준비해 온 간식을 함께 나누며 오늘의 구곡원림 찾아 나서기를 돌아본다. 오늘 우리가 거쳐 온 길은 다른 구곡원림처럼 자연의 풍치가 아름답고, 도학의 풍모가 서려 있는 길이라기보다는 소박하게 살아가는 서민의 삶이 어려 있는 곳들이었다. 옥소는 화지구곡을 도(道)에 들어가는 공간으로 인식한 것이 아니라 이름난 고을이 자리하는 역사적 의미가 있는 굽이로 인식하였던 것 같다. 따라서 옥소의 노래들도 승경을 위주로 한 것이 아니라 서민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던, 산촌의 고요하고 평화로운 삶의 모습을 주로 읊고 있다. 옥소가 화지구곡을 통하여 사랑했던 풍경들은 오랜 세월을 두고도 변함이 없을 자연이라기보다 사람들의 삶이 담긴 마을이었다. 사람의 일이란 언제나 변화무상한 것이다. 옥소가 경영했던 풍경들은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변화를 거듭하여 오늘날은 옥소 당시의 모습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옥소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자연 풍경이라 할 수 있는 산문계마저도 사람 사는 세상에 가까이 있다가 보니,변해가는 사람살이와 더불어 엄청난 변화와 파괴를 겪어야 했다. 그래도 옥소의 풍경과 노래는 사람과 가까이 하고 있는 점에서 우리에게 더욱 정감 있게 다가올 수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옥소가 사랑했던 삶의 자리 화지구곡을 떠난다. 또 어떤 구곡원림이, 무슨 뜻이 담겨진 구곡원림이 우리를 다시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다음 달에는 선유구곡을 답사할 것이라는 회장의 안내를 들으며 관음리를 떠날 때, 포암산 마루 위에 앉은 해가 조용히 손을 흔들고 있었다. 봄 무르익을 5월에는 어느 풍광 속에서 저 해의 손짓을 받을 것인가.♣(2013.4.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