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곡원림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을 앞두고 그 아우라 조성을 위하여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문경문화원 주관으로 나서는 답사 길이다. 산림 생태의 관광자원화를 위해 뛰어난 산림문화 자산의 하나인 구곡 동천의 가치를 널리 인식시키고자하는 일이라고 했다. 이를 위해 먼저 상주와 문경 사이와 그 부근의 구곡 동천을 탐방하기로 하고, 그 첫 번째로 충북 괴산의 서선유동과 화양구곡을 찾아 나섰다. 2013년 가을의 들머리 9월13일 상주와 문경 지역의 탐방 희망자 40여 명이 문경시민운동장 주차장에 집결하여 대절 버스를 타고 답사 길에 올랐다. 경상북도 환경해양산림국 산림산업과 박정아, 도규명 담당관과 문경과 상주 문화원 사무국장 그리고 안내와 해설을 맡아줄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최석기 교수가 함께 나섰다. 최 교수는 옛사람들의 산림문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마성을 거처 문경의 섯밭재를 넘고 완장리를 지나 충북 괴산의 청천면 송면리에 이르렀다. 바로 서선유동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서선유동을 선유구곡이라고도 하는데 가은읍 완장리의 선유구곡과 구분하여 외선유구곡이라고도 하지만, 부르는 사람의 처한 곳에 따라 내·외가 바뀌기도 하여, 동·서로 갈라 서선유구곡이라 부르기도 한다고 했다. 서선유구곡은 정태진(丁泰鎭, 1876-1956)이 설정한 것과 홍치유(洪致裕 1879~1946)가 설정한 것이 다소 차이가 있는데, 지금은 홍치유가 설정한 것을 따르고 있다고 한다. 주차장에서 내려 선유동 물길을 거슬러 잠시 오르니 물과 작은 다리를 사이에 두고 두 바위가 갈라섰다. 한쪽은 제1곡 선유동문(仙遊洞門)이요, 한쪽은 제2곡 경천벽(擎天壁)이다. 선유동문은 잘록한 허리의 상체부 넓적한 평면에‘仙遊洞門’이라 커다랗게 각자를 해놓아 이곳이 선유동으로 들어가는 문임을 알리고 있고, 홍치유는 ‘선유구곡 사이 깊어 한 물 줄기 감아 도는데 검푸른 바위 중간이 뚫려 동구 문을 열었네.(九曲山深一水回 蒼巖中坼洞門開)“라고 노래하고 있다. 그 맞은편에 몇 개의 층을 이루어 우뚝 솟은 바위가 하늘을 떠받치고 있어, 도를 지키고 있음을 뜻한다는 경천벽이다. 홍치유는 이 바위를 일컬어 ‘푸른 절벽 허공을 받치고 높은 기상 자임하니, 높고 높아 거센 물결도 막을 수 있을 듯하네.(翠壁撑空任自高 巖巖如可抗狂濤)’라여 그 기상을 노래하고 있는데, ’높고 높아’라고 경탄할 만큼 높은 것 같지는 않았다. 다시 물길을 거슬러 잠시 걸어 오르니 계곡 건너 쪽 한 자리에 솔숲이 우거졌는데 그 숲에 층암절벽이 우뚝 솟아있다. 그 숲속 바위에 학이 깃들어 살았다는 제3곡 학소암(鶴巢巖)이다. 홍치유는 학소암을 지나면서 붉은 머리 흰 학(丹頂皓衣)이 살았다는 전설을 상기하며 선경을 그리고 있다. 멀찍이서 학소암을 조망하며 다시 오르니 작은 다리 하나가 나타나고, 시내 한 가운데에 위가 평평하고 가운데가 절구처럼 패여 있는 검붉은 빛이 감도는 바위 하나가 서있다.신선들이 이 바위에서 금단(金丹)을 만들어 먹고 장수하였다는 전설을 지닌 제4곡 연단로(煉丹爐)이다. 신선도 약이 있고서야 장수를 기약하였던가. 다시 잠시 다리품을 파니 기암괴석이 즐비한 계곡이 문득 눈길을 붙잡는데. 이곳에 바로 용이 물을 내뿜는 듯 물소리가 우렁찬 제5곡 와룡폭(臥龍瀑), 마치 큰 거북이 머리를 들고 큰 숨을 쉬는 듯한 제6곡 구암(龜巖), 바위가 바둑판처럼 평평하여 여기서 신선들이 바둑을 두었는데, 한 나무꾼이 구경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와 보니 5세손이 살고 있더라는 전설을 지닌 제7곡 기국암(碁局巖). 옛날 나무꾼이 기국암에서 신선들이 바둑 두는 것을 구경하다가 세월이 흘러 도끼자루가 다 썩는 줄도 몰랐다고 하는 제8곡 난가대(欄柯臺), 옛날 신선이 이곳에서 퉁소를 불며 달을 완상하였다는 제9곡 은선암(隱仙巖)이 다 모여 있다. 이 기암 절경들이 굽이를 이루며 자리하고 있는 곳이 아니라 한 곳에 다 모여 있기로 ‘구곡(九曲)’이라 이르기엔 무리가 없지 않아 ‘선유동천’이라고만 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무어라 부른 들 어떤가, 선경이 거기 있음에야. 이 모든 것들은 바위의 생김새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요, 생겨난 전설이겠지만, 늘 신선과 함께하는 옛 사람들의 상상력이란 신비롭고도 풍성하다, 그 상상력은 이 계곡 곳곳을 신선이 깃드는 곳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그만큼 이 계곡의 풍경이 신비하고 그윽한 까닭일 것이다. 정태진은 그러나 이 선경, 신선들이 숨어 산 곳을 보면서 “선인은 이미 떠났지만 바위는 아직 남아있네. 한 번 바위 문을 들어서니 세속과 멀어지네. 하고 많은 세상 기미 어찌 가벼이 말하리.예로부터 말을 할 때 신중하라 경계하네.(은선대)”라고 하여 인간 세상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다. 말이 말을 만들어 거칠어져만 가는 세상인심을 돌아보며 선유동천을 나선다. 잠시나마 그 속진을 이 선계에서 씻을 수 있으면 좋겠다. 선계를 뒤로 하고 속계로 나와 차를 탄다. 선유동천이 있는 송면리에서 20여리 떨어진 화양리 화양계곡으로 간다. 화양구곡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화양구곡의 명칭은 권상하(權尙夏, 1641~1721)가 정하고, 전각 글씨는 민정중(閔鼎重, 1628~1692)이 썼다고 한다. ‘화양(華陽)’이라는 지명은 황양목(黃楊木)이 많이 나는 곳이라 황양(黃楊)에서 나왔다는 설과 ‘화산지양(華山之陽)’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다. 이(夷)를 배척하고 화(華)를 지키는 곳으로, 인조~숙종 연간의 대학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이곳에 은거하여 그의 대명의리(大明義理) 정신과 결합되어 상징성을 갖게 된 곳이라고 한다. 화양계곡에 이르려는데 비가 뿌렸다. 비가 내리는 탓이었을까. 점심 요기 길이 바쁜 탓이었을까, 화양제1교를 지나면서 계곡 건너 쪽에 있는 화양구곡 제1곡 경천벽(擎天壁)은 차창으로만 스치며 지나간다. 선유구곡의 제2곡과 같은 이름의 이 바위는 몇 줄기 층암의 형세가 하늘을 떠받치듯이 서 있는데, 옛 사람들은 이를 인륜의 기강을 부지하는 정신의 상징으로 보았다고 한다.제1곡을 한참 지나서야 주차장이 나타나고, 관리사무소가 있으니, 배치가 그렇게 된 걸 보면 제1곡 경천벽은 늘 가벼이 지나쳐 버리기가 쉬울 것 같다. 주차장에 내려 기약된 식당을 찾아 걷는 동안에 비는 계속 내리고 물 건너에 있는 제2곡 운영담(雲影潭)은 빗속의 경치로 완상해야 했다. 몇 줄기 우뚝 선 층암 아래로 푸른 계곡수가 못을 이루고 있는데, 물에 닿을 듯한 바위 한 자락에 전서로 각자한 ‘雲影潭’ 세 글자가 희미하게 보였다. ‘운영’은 주자(朱子)의 시 중에 ‘천광과 운영이 함께 배회하네.(天光雲影共徘徊)’라는 구절에서 나온 것으로, 이는 곳 천리(天理)의 유행을 뜻하는 것이라 한다. 하늘빛이며 구름 그림자 하나를 보고도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선현의 지혜를 경탄하며 걷는 걸음 속으로 허기진 속을 채울 객사가 다가왔다. 산채 비빔밥으로 속을 다스리고 나니, 오늘의 안내를 맡은 최 교수의 강의 자리가 마련된다.노천 식당의 의자에 모두 함께 앉아 구곡문화며 동천문화에 대하여, 그리고 옛사람들의 산수 인식에 관한 강의를 듣는다. 구곡문화는 주자(朱子)의 무이구곡(武夷九曲) 경영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과 명승은 명인을 통해 이름이 난다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옛 사람들의 산수관은 천리의 유행과 동화되는 삶을 가치롭게 여기기보다 천리의 유행을 만끽하고 즐기며 향유하는 것을 의미 있게 생각했다는 최 교수의 강론이 귀를 번쩍 뜨이게 한다. 자연은 자연 그 자체로서 마음껏 즐겨야 할 것이라는 말씀인 것 같아, 오늘 우리 걸음도 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품는 걸음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메우게 한다. 마무리 말씀으로 들려준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간수간산 간인간세(看水看山 看人看世)’라는 말씀도 머릿속 한쪽에 보듬어 넣었다. 제3곡으로 가기 전에 들른 곳이 만동묘(萬東廟)와 화양서원이다. 만동묘는 송시열의 제자 권상하가 스승의 유명을 받들어 민정중, 정호 등과 함께 명나라의 신종과 의종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으로 창건하였다고 한다. 만동묘는 명 황제 신종과 의종이 임란 때에 우리나라를 도와준 데 대해 의리를 지키기 위해 창건한 것이라고 하며, 화양서원은 이곳에 은거하며 학문을 연마하고 후진을 양성했던 송시열을 제향하기 위하여 그의 문인들이 세웠다고 한다. 그 후에 훼철과 왜곡, 파괴의 수난사를 겪으며 허물어진 것을2007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하였다고 한다. 만동묘를 나와 그 인근 계곡의 제3곡 읍궁암(泣弓巖)에 이른다. 읍궁암은 계곡 물가에 있는 반석으로 송시열이 효종대왕께서 북벌(北伐)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41세의 젊은 나이에 승하한 것을 슬퍼하여 새벽마다 한양을 향해 활[弓]처럼 엎드려 통곡한 곳이라고 한다.송시열의 대명의리와 함께 충효절의를 상기하게 하는 곳이라 하겠다. 잠시 물길을 거슬러 올라 계곡 건너로 보이는 제4곡 금사담(金沙潭)에 이른다. 금사담은 맑은 물과 깨끗한 모래가 있는 계곡 속의 못이라는 뜻으로 화양구곡의 중심이 되는 곳이라 한다. 물가 바위 위에 서 있는 암서재(巖捿齋)는 송시열이 은퇴 후에 지은 집으로 이곳에 은거하면서 학문을 연구하고 수양하였다는 곳이다. 이로 하여 송시열이 이곳 화양과 깊은 인연을 가지게 된다. 암벽에는 임금(효종)이 승하하고 주자의 도가 없어진 것을 한탄하는 ‘창오운단 무이산공(蒼梧雲斷 武夷山空)’이라는 송시열의 글씨와 명 태조 어필 인본(印本)인 충효절의(忠孝節義)‘가 새겨져 있다. 금사담과 암서재를 건너로 보며 화양제3교에 이르러 도명산 숲을 헤치고 산을 오르니 첩첩이 층을 이루고 있는 큰 바위가 나타난다. 제5곡 첨성대(瞻星臺)다. 그 위에서 천체를 관측할 수 있으며 대명(大明)을 생각하며 북극성을 우러러 볼 수 있는 곳이라 한다. 바위에는 선조 어필이라고 하는 ‘만절필동(萬折必東)’과 송시열이 쓴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이 새겨져 있는데 ‘萬折必東’은 『순자(荀子)』에 나오는 공자의 말로 모든 물줄기는 꺾여 반드시 동쪽으로 흐른다는 뜻으로 충신의 절개와 의리를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고 한다. 송시열의 글씨는‘큰 명나라 세상, 숭정 황제의 책력을 쓰는 세상’이라는 뜻으로 이 또한 송시열의 대명의리를 나타내는 말이라 하겠다. 바위 또 한 쪽에 ‘비례부동(非禮不動)’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민정중이 북경에 사신으로 갔다가 의종의 친필을 얻어 송시열에게 준 것을 모사하여 새긴 것이라 한다. 이 모든 것들이 송시열의 충정을 드러내는 말인 것 같아, 그의 정신세계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첨성대를 내려와 물가로 나와 작은 징검다리를 건너 제6곡 능운대(凌雲臺)에 이른다. 두 줄기 바위가 층을 이루어 우뚝 구름을 헤치고 솟았다고 하여 능운대라고 하며, 이 바위에 뿌리를 박고 있는 소나무의 모습이 빼어나 절의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다고 한다. 물길을 오른쪽으로 거슬러 한참을 걸으니 물가에 기다랗게 누워 있는 바위가 보인다. 제7곡 와룡암(臥龍巖)이다. 그 모습이 용처럼 서려있다 하여 와룡암이라 부르는 이 바위를 제갈량(諸葛亮)에 비유하여 드러나지 않는 덕을 간직하고 있는 뜻을 새겼다고 한다. 와룡암을 뒤로 하고 다시 동쪽으로 조금 오르니 물 건너로 소나무들이 틈새에 뿌리를 박고 서 있는 층층이 솟은 큰 바위가 보인다. 제8곡 학소대(鶴巢臺)다.옛날에는 백학이 이곳에 집을 짓고 새끼를 쳤다하여 학소대라 하였다는데, 옛사람들은 장송이 있는 우뚝 솟은 바위는 거의 학소대라 부른 것 같다.이 또한 현실을 초탈한 맑은 정신세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을 것이다. 드디어 마지막 굽이에 이른다. 길을 따라 한참 다리품을 팔고, 물가를 찾아 다시 한참 걸어 들어가니 제9곡 파곶(巴串)이 나타난다. 개울 가운데에 옥반과 같은 흰 반석이 펼쳐져 있는데, 맑은 시냇물이 파(巴)자 모양으로 흘러서 파곶이라 이른다고 옛사람들의 시에서 적고 있다. 그 물길과 함께 사방의 경관도 빼어나, 그 풍치를 바라보는 마음은 구곡에 이르기까지의 발품 피곤이 조금은 씻겨질 듯도 했다. 일행들은 비로소 마음의 여유를 얻은 듯 삼삼오오 모여 기념사진을 찍기도 하고, 모두 모여 단체 사진을 찍자고도 한다. 선인들이 구곡을 경영했던 속내도 이와 같을까. 아름다운 경치는 사람의 마음을 이리 여유롭고도 너그럽게 하는 모양이다. 하루 잠시 더듬은 길이나마 그간은 마치 구곡의 경영자가 되었기라도 한 듯하다. 이 느낌을 위하여 구곡의 답사 길을 나선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화양구곡의 산수를 두고 박윤원(朴胤源, 1734~1799), 하익범(河益範, 1767~1813), 송달수(宋達洙, 1808~1858) 등이 예찬의 시문을 남기고, 강정환(姜鼎煥, 1741~1816)이 ‘유화양동기(遊華陽洞記)를 남겼으니, 이제 오늘 걸어온 구곡을 상기하며 옛사람들의 화양구곡 정서를 다시 새겨 볼일이다. 이 화양동에서 그들은 무엇을 느꼈고 나는 오늘 무엇을 보았던가. 조금은 가벼워진 걸음으로 다시 한참을 걸어 귀로를 달릴 차가 기다리고 있는 화양 주차장에 이른다. 화양구곡이 7Km에 걸쳐 자리 잡고 있다 하니 근 이십 리 길은 걸은 셈이다. 주차장에 이르니 오늘의 행사를 주관했던 문경문화원 고성환 사무국장이 기다리고 있다가, 모두들 매점에 가서 간식 한 가지씩 들며 피로와 허기를 달래라고 한다. 누구는 다과를 들고, 누구는 얼음과자를 들고 나오는데, 마침 어느 회원이 막걸리 한 병을 들고 나온다. 좋은 경치 끝에 어찌 술이 없으랴, 반가운 마음으로 한데 어울려 살짝 목을 축인다. 다음은 9월 말경에 다시 오늘 같은 답사 길을 나설 것이라 한다. 자못 기대를 안고 귀로에 오른다. 비에 씻긴 초가을 하늘이 시리도록 푸르다.♣(2013.9.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