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공선사 ㅡ 조선왕조의 설계자

2013. 5. 25. 09:39우리 역사 바로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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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고려말에 고승이던 나옹선사와 무학대사에 관한 여러 설화들과

 

행적에 대하여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고려말의 비대해진 사찰 소유 토지증가에 따른 사원의 경제력과

 

신돈 등으로 대표되는  불도(佛道)를 져버린 일부 정치승려의 농단에 의해

 

타락한 불교의 정신을 개혁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산중 사찰의 눈 밝으신

 

선승(禪僧)들을 중심으로 서서히 일어났다.

 

 

    이러한 시기에 등장하신 분이 바로 인도 마가다국(摩竭提國: 지금의 네팔 남쪽)

 

왕자 출신인 지공선사(指空禪師)님이시다.

 

 

    우선 지공선사의 출가에 대한 설화를 소개하자면, 부왕(父王)이던 마가다국왕의

 

병세가 깊어지자 어느 고승이 조언을 한다.  " 아드님 삼형제분이 출가를 하면 병환이

 

나으실 것입니다."  이 말에 따라 삼형제 중에서 지공선사 홀로 머리를 깍는다.

 

지공선사의 지극한 효심(孝心)과  전생인연의 연의(緣意)를 짐작케 하는 설화이다.

 

 

   지공선사는 1300년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8세에 나란다 대학인 나라난타원에

 

동진출가하였다.  당시 인도대륙은 이슬람의 침공으로 불교가 점차 쇠퇴하고 있던 시기였으며,

 

지공선사는 스승 율현(律賢)에게서 스리랑카 길상산의 보명존자(普明尊者)를 찾아보라는 명을

 

받고, 19세의 나이로 불법을 배우려고 세일론섬으로 건너가 보명존자로부터 불법(佛法)을 익히고

 

의발(衣鉢)을 전해 받는다.이어 보명존자의 부탁에 따라 불법을 전파하기 위하여 먼저 해로를

 

이용하여 인도네시아,말레이지아 등 동남아의 여러 섬나라와 미얀마를 여행한다.

 

 

 

    그리고 다시 인도로 들어와 네팔을 거쳐 히말리아를 넘어 티벳트(1320년)에 도착한다.

 

 다시 길을 떠나 비단길의 중심지인 투르판을 거쳐 운남(雲南)지방과 대리국을 통하여

 

원나라의 수도인 연경(燕京 : 現 北京)에 도착한다. 

 

    이때가 스님의 나이 25세인 태정(泰正)초인 1324년에 해당된다.

 

 

   지공선사는 석가모니佛의 수제자인 가섭존자의 법맥(法脈)을 이은 분으로, 경기도 양주시

 

회암사에 있는 목은 이색이 지은 <지공화상부도명병서(指空和尙浮土+屠銘竝序>에 의하면

 

가섭존자의 108대 법손(法孫)라고 하며. 또한 석가모니佛의 부왕인 정반왕(正飯王)의

 

아우인 곡반왕(斛飯王)의 후손이라 적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가섭존자의 법통을 이은 정통파

 

선사임에 틀림이 없다.

 

 

 

 

   연경에 도착한 지공선사는 원의 황제 진종으로부터 적극적인 환영을 받고 "환생한 부처님"

 

으로 추앙을 받으며 지내다가, 고려 충숙왕 13년(1326년)애 27세의 나이로 고려에 불법을

 

전파하려 온다. 충숙왕 15년 금강산 법기도량(法起道場)에 예배하고, 그 해 7월에 연복정

 

(延福亭)에서 계를 설(說)하였다 한다.

 

   지공선사에 대한 우리나라 내에서의 행적은 양주 회암사, 여주 신륵사, 양산 통도사,

 

조계산 송광사, 광주 무등산 지공선사 수도굴과 너덜갱, 강화 교동면 화개사 등 당시

 

정치적인 승려가 머물던 수도 개경(開京 : 현 개성)을 벗어난 깊숙한 산중사찰에서

 

그의 발자취가 보인다.

 

 

   양주 회암사가 있는 천보산 일대를 둘려본 지공선사는 회암사 부근의 지형지세가

 

인도에서 공부를 하던 나라난타원과 비슷한 양강삼산(兩江三山)이라 하여 길지(吉地)로

 

여기고 이 절에서 잠시 머물다 그 후에 제자가 된 나옹대사에게 명하여 회암사를 크게

 

중창한다.  양강삼산이란 임진강과 한강 등 2개의 강과 삼각산, 천보산, 송악산 등 3개의

 

산이 서로 지맥(地脈)으로 소통하여 음양오행을 고루 갖춘 땅이고, 장차 불법이 크게

 

번성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불교 2500여년 역사에서 회암사가 소실된 조선조 순조     년 (      년)에서 지금까지의

 

약 200여년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다.  지금 회암사 앞의 너른 들에는 양주신도시의

 

개발이 한창이다. 이 신도시에 앞으로 살게되는 수 많은 불자(佛子)님들을 끌어안고,

 

불법을 전파하고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좋은 입지여건을 회암사가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양산 통도사는 삼성각(三聖閣)에 독성(獨聖), 칠성(七星),산신(山神)을 모시지 아니하고

 

유일하게 지공(指空), 나옹(懶翁), 무학(無學)대사 세분을 모시고 있는 절이다. 그만큼이나

 

이 세분의 대사님들과는 인연이 남다른 사찰이라 할 수 있다.

 

   보물로 지정된 지공선사 역(譯)의 <문수사리보살최상승무생계경(文殊舍利菩薩最上乘

 

無生戒經)>이 통도사에 보관되고 있고, <서천지공화상위사리가사계단법회기(西天指空和尙

 

爲舍利袈娑戒壇法會記)>를 통해서 지공선사가 주관하여 부처님 진신사리와 가사를 모시고

 

금강계단에서 법회를 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통도사 인근에 있는 천성산 운흥사(雲興寺) 사적기를 보면, 신라 원효대사 창건 후

 

폐사지로 남아 있던 운흥사를 지공화상이 통도사에 계실 때, 꿈에 계시를 받아 이를 알려주자

 

다시 중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말의 고승 나옹선사(懶翁禪師)가 원나라로 유학가서 지공선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정통 선종(禪宗)을 공부하고, 스승 지공선사와 함께 귀국하여 회암사 등지에서 불법을

 

펼친다.  그 후에 제자인 나옹선사가 먼저 입적(入寂)하자 전국을 유랑하며, 양산 통도사,

 

조계산 송광사 등지에서  선종을 가르친다.

 

   송광사에서 머물던 어느날 송광사의 터가 불법을 크게 융성할 길지임을 보고서,

 

"어느 분께서 처음으로 이 송광사 터를 잡으신 것인가?" 하고 물어 본다.

 

지눌 보조국사가 무등산 규봉암 의신대에 앉아서 산맥의 흐름을 되짚어 송광사 터를

 

잡았다라는 대답을 듣고 발걸음을 광주 무등산으로 향한다.

 

 

     무등산 규봉암의 빼어난 경관이 마음에 흡족하던 지공선사는 여기서 오래동안

 

머물고자 하였으나, 선사의 명성을 듣고서 설법을 듣고자 신도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자 규봉암 경내가 협소하여 불자들을 다 수용할 수 없게 되어, 너덜갱으로

 

설법 장소를 옮겨가게 된다. 신자들은 자연 그대로인 너덜겅을 의자로 삼아 앉고

 

지공선사는 조금 너른 바위에 앉아서 위의 신도들을 쳐다보며 명설법(名說法)을

 

하게 된다.  그야말로 발 아래 광대무변하게 펼쳐지는 한빛고을을 내려다 보면서

 

선사의 설법을 듣는 모습을  상상하여 그려 보아도 이름 그대로인 산상설법(山上

 

說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신도들이 더욱 몰려들자 지공선사는 너덜겅 한편에

 

있는 자연 석실(石室)에 거쳐를 마련하고, 이곳을 좌선수도원(座禪修道院)으로

 

삼았다.  그 이후로 이 규봉암 근처에 있는 너덜겅을 지공너덜겅으로, 석실은

 

지공대사 좌선수도원으로 불리워 지게 된다.

 

 

 

   강화군 교동면 화개사는 고려 때 창건된 절로써 목조단청 건물 1동이 있는 조그만

 

사찰이다. 절 인근에 있는 갈공사에 묵고 있던 지공,나옹, 무학선사가 이곳 화개사로

 

불법을 공부하러 다녔다는 설화가 있는 절이다.  고려 삼은 중의 한 사람인 목은 이색

 

선생님도 교동도 섬을 아름답게 여기고 화개사에 머물며 수편의 글을 지었으며, 절이

 

깃들어 있는 화개산을 전국 8대 명산 중의 하나이라고 할 만큼 경관을 사랑하였다고

 

한다.

     

 

 

    

   지공선사는 여러나라를 여행하면서 보고들은 각국의 정치적 상황변화에 익숙해져

 

있었고 그의 사상은 개혁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고려에 온지 2년후인 1328년에 연경으로

 

되돌아가 고려사람이 세운 절인 법원사(法源寺)에 머문다.  이때에 나옹,백운,무학대사가

 

연경으로 들어가 지공선사에게 불법을 배우고 익혀 스승으로 모신다. 

 

     그리고 지정 2년(1361년 11월)에 연경 귀화방장(貴化方丈)에서 속납(俗納) 62세에

 

입적(入寂)한다.

 

 

   그 후 1368년 원나라가 멸망하자, 같은 해 다비(茶毘)를 하고 유골을 네사람이 나누어

 

보관하게 되는 데, 그 중에 두사람이 고려인이다. 대사도 달예(大司徒 達叡)가 유골을

 

가지고 귀국하자 공민왕 21년( 1372년)에 부도탑과 탑비를 양주 회암사에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