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진의 차맥] 〈48〉 조선의 선비 차인들 ⑥ 김종직의 제자들
2014. 9. 5. 22:36ㆍ차 이야기
[박정진의 차맥] 〈48〉 조선의 선비 차인들 ⑥ 김종직의 제자들
문화라는 것은 갑자기 사라지지 않는다. 고려 때 융성하던 차문화·음차문화가 조선에 들어오면서 갑자기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고려 때 말차가 조선에 들어오면서 잎차로 바뀌었을 뿐 차문화는 선비들에 의해 면면히 이어진다.
여말선초(麗末鮮初)의 두문동(杜門洞) 차인들을 새롭게 발굴하면서 이들이 조선의 차문화를 계승한 조선 초중기의 ‘차 마니아 그룹’이라는 사실을 부각한 것은 한국 차사의 단절을 메우는 귀중한 작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이들이 남긴 차시(茶詩)를 부분적으로 거론하면서 차의 명맥을 유지한 정도로 파악한 종래의 차사(茶史)를 이제 새롭게 일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두문동 차인들의 차정신은 매월당 김시습(金時習·1435∼1493)에 이어지고, 김종직과 한재 이목에게 연결되면서 사림(士林)에서 근세 한국 차철학과 차정신을 꽃피우게 된다.
선비들은 자연과 벗하며 차의 정신을 심화시켰다. |
이들에게 흐르는 공통점은 자의로 혹은 타의로 권력에서 배제되고 소외된 선비들이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청렴결백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삼으면서 한국의 차정신을 비권력적인 선비차 혹은 청담차·초암차로 성격을 굳혔다는 사실이다.
물론 부분적으로 출사한 선비들이 부유한 가운데 술과 차를 함께 마시면서 차를 숙취해소 수단으로 사용한 경우도 있지만, 주류는 바로 비권력적인 차정신의 확립이다. 이런 전통은 남인(南人)에게 전해진다.
조선 도학의 종조인 김종직이 이름난 차인이었기에 그 제자들로 차를 벗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러한 전통과 분위기 속에서 사화에 얽혀 참수당한 한재 이목과 같은 걸출한 차인이 솟아올랐다.
김종직(金宗直·1431∼1492)의 제자들 가운데 특히 유호인(兪好仁·1445∼1494), 남효온(南孝溫·1454∼1492), 조위(曺偉·1454∼1503), 정희량(鄭希良·1469∼?), 홍유손(洪裕孫·1431∼1592)은 이름난 차인이었다.
임계(林溪) 유호인은 가장 소박한 차인이었다.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지방관을 자청한 그에게 성종은 이를 만류하는 시를 내렸을 정도다.
“있으렴 부디 갈다 아니 가든 못 할소냐./ 무단히 싫더냐 남의 말을 들었느냐./ 그래도 아 애닯구나, 가는 뜻을 일러라.”
성종은 그에게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로 올라오라고 당부하지만 노모가 고향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면서 낙향을 고집한다. 시문서예에 모두 뛰어나 삼절이라고 불렀다. 자연과 함께하는 것을 가장 높은 벼슬이라고 노래하는 그에게 차는 선약(仙藥)이었다.
“밝은 창 아래 흰 고의 입고 차 끓는 소리 들으니/ 고요 속에 그 소리 한가롭기만 하네./ 3000권의 책 마른 창자처럼 흠뻑 들이켜니/ 객지 벼슬살이하던 이가 이제 청담(淸談)을 꿈꾸네.”(‘詠茶’)
“벼슬살이로 몇 년 서울에서 보냈네./ 어찌 알았으랴, 오늘 정자사(淨慈寺)에 올 줄을/ 원숭이와 학은 알아보는 듯 부르건만/ 구름 노을 속에 만나자는 약속 지키기 어렵네./ 솔바람 소리에 차가 막 익을 때에/ 흐뭇해라, 손님은 시(詩)를 이루었네./ 기이한 일일랑 호탕하게 거두어버리고/ 안개비 속에 도롱 입고 산야의 약속에 흡족하네.”
김종직의 제자 가운데 가장 매월당과 비슷한 사고를 가진 이가 남효온이다. 남효온은 금강산 산사(山寺)를 함께 여행하기도 한 인물이다. 추강(秋江) 남효온은 김종직·김시습의 문인임은 물론이고 조선 도학의 도통에 속하는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신(曺伸)·이윤종(李允宗)·주계정(朱溪正)·안응세(安應世) 등 쟁쟁한 인물들과 사귀었다.
그는 1478년(성종 9) 관리등용제도의 개선, 내수사(內需司)의 혁파, 불교의 배척 등 국정 및 궁중의 여러 문제를 지적하게 된다. 심지어 문종의 비(妃)이자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인 소릉(昭陵)을 복위할 것을 요구하는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그의 소릉 복위 주장은 세조 즉위와 정난공신(靖難功臣)의 명분을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것이어서 도승지 임사홍(任士洪)과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의 눈밖에 나게 된다. 그는 출세에 뜻을 두지 않고 명승지를 유랑하는 것으로 생을 마쳤다. 그의 삶은 매월당과 가장 닮았다.
그는 매월당에게 ‘어머니의 꾸중으로 다시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는 내용의 ‘지주부(止酒賦)’를 보냈는데, 매월당은 “나는 오직 제사 때와 병을 치료할 때는 술을 폐할 수가 없고, 그밖에 꽃을 볼 때나 달을 대하거나 손을 맞거나 명절을 즐길 때는 송명(松茗)으로 술을 대신하여 마신다”고 답했다.
“아이는 아비의 뜻을 알아 옷과 신발을 덥히고/ 벗은 친구의 마음을 알아 설차(雪茶)를 내어오네./ 한 곡조 맑은 거문고 별학조(別鶴操)소리를/ 하염없이 듣는 사이 서산에 해 기우네.”(‘눈 내리는 날 아이를 데리고 정중(正中)을 찾아가다’)
“일찍이 세상을 향해 동서로 내달았으나/ 십 년 굶주린 배엔 솔개소리 들리는구나!/ 아이 불러 차 달일 땐 저문 강물 차갑더니/ 나의 폐병 낫게 하여 심화(心火)가 가라앉네./ 온갖 생각 바로잡으니 마음이 밝아지니/ 날마다 안석에 기대여 눈과 귀를 거두어들이네./ 동쪽 성문 밖에서는 옳고 그름을 다투지만/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 귀에 들리지 않네.”(‘은솥에 차를 끓이며’)
남효온은 금강산 표훈사 주지 지희(智熙) 스님과도 가까웠으며, ‘지리산일과(智異山日課)’에서는 화엄사의 ‘연기조사’의 설화를 기록하여 후대에 지리산 화엄사의 차 재배와 차 공양, 옛 모습을 알아볼 수 있게 하였다.
“절의 옛 이름은 화엄이니 명승 연기가 창건했다. 절 양 옆은 모두 대숲이고 위에는 금당이 있으며, 금당 위에 탑이 있으니 아주 밝고 깨끗하다. 차꽃과 대나무, 석류, 감나무 등이 옆을 둘러싸고 있다. 내려다보면 넓은 들이 펼쳐졌고, 긴 냇물이 아래로 가로흘러 웅연을 이루었다. 뜰 가운데 석탑이 있는데 탑의 네 귀퉁이를 기둥으로 받치고, 그 가운데 남자가 머리에 이고 서서 부인께 바치는 모양을 하고 있으니 이가 연기이다. 원래 신라 사람으로 그 어머니를 따라 이 산에 들어와 절을 창건할 때 제자 1000여명을 데리고 와서 정성을 다해 불도에 정진했기에 불가에서 조사라고 칭한다.”
매개(梅溪) 조위는 점필재의 처남으로 스승을 잘 모시면서 신진 사류들의 지도적 위치에 있었으나 무오사화 때, 1498년 중국 성절사로 갔다 오는 도중에 의주에서 장류되어 유배지에서 임종했다.
“북쪽에서 돌아오니 한식이 가깝네./ 아름다운 계절이 절반 넘어 지났네./ 물 위론 뾰쪽뾰쪽 모가 돋았고/ 빈 하늘엔 가랑비만 비켜 날리네./ 맑은 창가에서 좋은 시구를 찾고/ 박주(薄酒) 마신 뒤엔 차를 끓이네./ 비스듬히 누워 있자니 서산에 해지 지는데/ 손님들 흩어지자 석양에 까마귀 바라보네.”(‘점필재 선생의 시운을 받들어 화답하다’)
“아름다운 산 벼랑길 따라/ 숲 사이 폭포소리 요란하네./ 땅이 평평하여 단청 고운 절을 지으니/ 대웅전 고불도 금부처가 늙었도다./ 찻 사발에 꽃잎이 눈처럼 날리고/ 감실 등불에는 불꽃이 연기를 토하네./ 속진에 묻힌 십 년 세월이 꿈처럼/ 하룻밤 묵고 나니 돌연히 사라졌네.”(‘낙안군 관운산 동화사에서’)
조선의 선비차 정신인 청담(淸談)은 계유정난, 무오사화를 거치면서 완성된다. ‘차의 세계’ 제공 |
낙안군 관운산 동화사는 오늘날도 전남 보성과 순천 사이에 있는 차의 산지이다. 조위는 1484년 8월에 경남 함양군수로 부임하게 된다. 그때 쓴 시인 듯한 차시가 한 수 보인다. 함양도 차의 산지이다. 아무래도 차의 산지에서는 차를 많이 마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느새 한 해가 저물어가고/ 쓸쓸한 바람에 날씨가 차네./ 황당(黃堂·관아)에 화필(花筆·문학)을 버려두고/ 오궤(烏?·염소 가죽 궤안)에서 용단차를 마시네./ 버들가지 싹에는 봄기운이 아직 옅고/ 매화나무 끝에는 눈이 마르지 않았네./ 내일 아침 관아에 술이 잘 익어서/ 손님들 찾아오면 실컷 즐기리.”(‘관아에서 우연히 쓰다’)
조위는 차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유배가사의 효시를 이루었다. “천상 백옥경이 어디멘고, 오색운 깊은 곳에 자정천이 가렸으니 구만리 먼 하늘을 꿈에라도 갈똥말똥. 차라리 죽어서 억만 번 변하여 남산 늦은 봄에 두견의 넋이 되어….” 그의 ‘만분가(萬憤歌)’의 시작이다.
조위는 김천을 대표하는 선비이다. 성종은 “문예에는 조위가 제일이고, 무예에는 임득창이 제일이다”고 극찬했을 정도다. 그는 ‘분류두시언해(杜詩諺解)’ 25권 17책을 완성하기도 했다.
허암(虛庵) 정희량은 매월당의 도교적 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았는데 단학(丹學)에도 통달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후탕(候湯)의 모든 정황이 들어 있는 ‘야좌전다(夜坐煎茶)’라는 시를 남겨서 자주 인용되고 있다.
“ 밤은 얼마나 깊었는지 하늘엔 눈이 오려 하네./ 등불 밝힌 옛집은 추위에 잠들기 힘드네./ 상머리 이끼 말끔히 닦아내고/ 바닷물처럼 차디찬 물 부어 화력의 강약을 맞추니/ 벽 위에 달 비치고 맑은 연기 피어나네./ 솔바람처럼 끓는 소리 온 골짜기 울리고/ 세차게 끓어올라 긴 시내에 다 울리네./ 우레 번개 세찬 기세 끝나기도 전에/ 급히 달리는 수레가 험한 산꼭대기를 넘더니/ 잠깐 사이 다시 구름이 걷히고 바람 멀어/ 파도 일지 않고 맑은 물결 지네./ 표주박 기울이니 빙설처럼 희어서/ 마음이 확 트여 신선과 통한다네./ 천천히 혼돈의 구멍 깨어 뚫어/ 홀로 신마 타고 선계에 노닌다네./ 돌아보니 지나온 길 자갈밭이네./ 요사스러운 속된 생각 모두 사라지고/ 마음 바탕 드넓음을 깨달아서/ 속사를 뛰어넘어 소요세계 노니는 듯/ 좋은 곳 향해 나아가 오묘한 곳 이르면/ 손뼉치며 즐겁게 이소경을 읊으리./ 듣자니 선계의 진인들은 깨끗함을 좋아하여/ 이슬을 마시면서 배설도 하지 않고/ 노을과 옥을 먹어 오래 살면서/ 마음 씻고 터럭 베어 동안처럼 곱다네./ 나도 세상 대함 이와 같거늘/ 어찌 말라버린 나무들과 오래 살기 다투리./ 그대는 알지 못하는가./ 노동이 배고플 때 차 삼백 편 즐겼고/ 도덕경 오천자는 부질없는 문자임을.”
이 시에는 활화 위에 솥은 얹고 차를 끓일 때 시간의 추이에 소리의 변화를 눈을 감고 감지하는 모습이다. 초성(初聲)·전성(轉聲)·진성(振聲)·취성(驟聲)·직지무성(直至無聲)에 이르는 전 과정을 볼 수 있다.
차를 끓이는 과정과 내단(內丹)에서의 문무화력(文武火力)을 동시에 은유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차시에서 자주 중국 초나라의 대표적인 문학인 초사(楚詞)의 대시인 굴원(屈原)의 ‘이소(離騷)’를 즐겨 다루는데 이는 그가 무위자연을 좋아함을 말한다.
광진자(狂眞子) 홍유손도 무오사화 때 제주에 유배되어 노예가 되었다가 중종반정 이후 풀려나왔다. 세조 찬위 후 세속의 영화를 버리고, 1482년(성종 13)부터 남효온·이총·이정은·조자지 등과 모임을 갖고 ‘죽림 7현’을 자처했다. 노자와 장자를 논하며 술과 시로 세월을 보내 ‘청담파’로 불렸다. 특히 김수온·남효온·김시습 등과는 자주 어울렸다고 한다. 매월당이 “홍유손만큼 시를 지을 수 있느냐”며 서거정에게 비아냥거렸다는 말도 전하는 것을 보면 대 시인이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깊고 깊은 산속에 주인 없는 꽃이 피었네./ 벌 나비도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가지 않는구나./ 꽃피우는 봄바람도 종일 불다 이제 그치려는 데/ 녹음이 곱게 이루어지니 이 일을 어찌 할까나.”(‘無主花’)
그는 76세에 처음으로 장가를 들어 아들을 하나 둔 뒤 명산을 편력했다고 한다. 김종직의 문하에는 무오사화 이후 특히 도가적(道家的) 풍모를 가진 제자들이 많았다. 도가는 주자학적 ‘도학(道學)’과는 다르다. 그러나 송(宋)대에 신유학의 선구자들은 노장과 불교사상에 깊이 심취하였다. 도학은 불교와 노장을 바탕으로 새롭게 원시유교를 해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도학이 자연으로 물러나면 도가와 통한다.
여말선초의 ‘두문동 차 정신’인 청담(淸談)은 조선 개국과 계유정난과 무오사화를 거치면서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된다. 매월당·점필재·한재를 거치면서 부동의 자리를 잡게 된다. 여기에 점필재 김종직 제자들의 역할이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박정진 문화평론가 pjjdisco@naver.com
ⓒ 세상을 보는 눈, 글로벌 미디어 세계일보 & Segye.com
'차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정진의 차맥]〈23〉 불교의 길, 차의 길 ① 한국 문화영웅 해외수출 1호, 정중무상선사 (0) | 2014.09.05 |
---|---|
[박정진의 차맥] <24> 불교의 길, 차의길 ② 무상선사, 선종의 중흥조, 선차의 중심 (0) | 2014.09.05 |
[박정진의 차맥] 〈49〉 조선의 선비 차인들 ⑦ 퇴계·화담·율곡 (0) | 2014.09.05 |
[박정진의 차맥] 〈50〉 조선 전기의 승려 차인들 - 서산대사·사명당 선차 정신 (0) | 2014.09.05 |
[박정진의 차맥] 〈51〉 조선후기 선비 차인들 ① 허균·허난설헌 (0) | 2014.09.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