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진의 차맥] <24> 불교의 길, 차의길 ② 무상선사, 선종의 중흥조, 선차의 중심
2014. 9. 5. 22:56ㆍ차 이야기
[박정진의 차맥] <24> 불교의 길, 차의길
② 무상선사, 선종의 중흥조, 선차의 중심
무상, 천곡산서 10여년간 수행하며 선차지법 터득
일찍이 차의 효험 정통하였고 선정에 도움준다는 사실 인지
중국으로 건너간지 1년 만에 쓰촨지방 선종 핵심으로 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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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 무상선사(無相禪師·684∼762)는 중국 선종(禪宗)의 중흥조였으나 법계 조작의 희생양이 되었다. 실로 돈황문서(敦煌文書)의 발굴에 의해 1200년 만에 가까스로 햇빛을 본 셈이다. 남종선의 법계가 조작되었다는 주장은 중국의 호적 선생이 처음 발설했다. 서여 민영규 선생은 미국 하버드대학에 교환교수로 가 있던 중 때마침 들른 중국의 호적 선생을 만났고, 호적 선생은 서여 선생에게 중국의 ‘보림전(寶林傳·801)’이 위서라는 경천동지할 얘기를 들려주었던 것이다.
중국 저장(浙江)성 닝보(寧波)에서 열린 제5차 세계선차문화교류대회에서 시연되고 있는 선차지법 퍼포먼스. 월간 ‘차의 세계’ 제공 |
호적 선생도 보림전의 위작을 확신하게 된 것은 1926년 대량으로 발견된 돈황문서가 계기가 되었다. 돈황문서를 비롯하여 ‘역대법보기(歷代法寶記·774)’, ‘원각경대소초(圓覺經大疏?·819)’,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713)’, ‘신회어록(神會語錄)’ 등에 힘입은 바 컸다. 특히 규봉종밀(圭峯宗密·780∼841)이 쓴 ‘원각경대소초’에는 “마조(馬祖)는 본래 무상의 제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마조와 종밀의 강호(江湖:장시성과 후난성)에서의 선종 주도권 쟁탈과정에서 이 사실이 불거지고 기록된 셈이다. 호적은 규봉종밀의 법통도 하택신회계(荷澤神會系:5대)가 아니라 정중신회계(淨衆神會系:4대)라는 놀라운 주장도 했다. 종밀은 마조와 같은 가문 출신이었기에 마조의 법통을 잘 알고 있었던 셈이다.
호적 선생과 서여 선생은 이 같은 사실을 밝힐 추가 자료를 한국에서 찾기 위해 공동조사를 하기로 약속했다. 호적 선생이 선종에 대한 연구를 한국과 공동으로 추진하는 까닭은 송광사를 비롯하여 보조지눌(普照知訥·1158∼1210)을 종조로 모시던 한국 사찰에 규봉종밀의 문서가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보조지눌은 규봉종밀의 돈오점수(頓悟漸修)를 따르는 경향이 있었다. 돈오와 점수는 깨달음과 관련하여 동아시아 선종사를 관통하는 논쟁인데, 중국의 화엄종 4조 징관(澄觀·738∼839), 신회(神會·685∼760), 종밀은 돈오점수의 편이었고, 마조계열은 돈오돈수(頓悟頓修)의 편이었다.
규봉종밀은 선(禪)과 교(敎)가 서로 팽팽히 맞서고 있던 시절, 양 사상을 두루 섭렵하고 화엄종의 입장에서 교선일치(敎禪一致)를 주장하여 불교를 회통시킨 인물로 고려의 지눌에게 많은 영향을 준 인물이다. 종밀은 당시 징관에게 사사하면서 화엄 5조이자 동시에 혜능-신회로 이어지는 하택종의 계승자로 불교이론에 가장 밝은 승려였는데, 당시 마조와 선종의 주도권을 놓고 치열한 돈오점수, 돈오돈수의 공방을 벌였다. 마조가 돈오돈수가 된 것은 종밀이 돈오점수를 주장하면서 자신과의 차별성을 위해 마조를 돈오돈수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규봉종밀의 돈오점수는 보조지눌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송광사에는 종밀의 문서가 많이 소장되어 있고, 그 속에 혹시 하택신회나 중국 초기 선종사와 신회의 종교혁명에 관한 정보나 단서를 찾을 길이 없을까 하여 호적은 한국과의 공동조사를 제안했던 것이다.
한국에서의 공동조사는 두 차례 계획되었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한 번은 한국에서 4·19혁명이 발생하여 차질을 빚었고, 다음에는 호적 선생이 갑자기 작고(1962년)하여 결국 실행하지 못했다. 이에 서여 선생이 학자적 회한이 되어 호적 선생의 주장을 쓰촨(四川)지방에서 확인하려고 제안했던 것이다. 세계일보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대망의 탐사가 시작됐다. 탐사의 기록은 ‘촉도장정(蜀道長征·1998)’과 ‘사천강단(四川講壇·1997)’으로 출간됐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몇 번 만난 점심 자리에서 서여 선생은 ‘보림전’은 물론 ‘육조단경(六祖壇經·781)’조차도 위서라고 주장했던 것 같다. 말하자면 흔히 알고 있는 조계혜능(曹溪慧能)-하택신회(荷澤神會)-남악회양(南岳懷讓)-마조도일(馬祖道一)로 이어지는 남종선(南宗禪)의 법통은 사실이 아니며 후대의 필요에 의해서 가공·날조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선차지법(禪茶之法)의 족자. |
그는 중국 장안(長安)에 이르러 신라 왕자의 예우를 받으며 당 현종과 첫 대면을 하고 선정사(禪定寺)에 머문다. 그 후 불법을 구하고 곧 바로 촉(蜀)땅으로 들어가서 쓰촨지방의 검남종을 이끌고 있던 지선(智詵)의 문하에 들어간다. 지선은 선종의 오조(五祖) 홍인(弘忍)의 직제자였다. 지선은 당시 고령으로 제자인 처적(處寂)에게 문중의 대권을 물려주고 있었다. 무상은 자주(資州)의 덕순사(德純寺)를 찾아 처적으로부터 인가를 받는다. 이때 그는 이미 삼구(三句)인 무억(無憶), 무념(無念), 막망(莫忘)을 설파했다. 삼구는 달마조사로부터 전해오는 총지문(總持門)이라고 선언할 정도였다.
무상은 그 길로 바로 천곡산(天谷山)으로 향한다. 인가를 받은 그가 바로 천곡산으로 향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천곡산은 본래 도교의 산이다. 차는 본래 불교 이전에 도교와 인연을 맺었다. 도교는 중국의 기층종교라고 할 수 있는데 노장철학을 기본으로 개인의 양생에 주력하는 종교이다. 중국의 도교는 샤머니즘의 중국판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도교 발상지 중 하나인 쓰촨성 성도 부근의 청성산(靑城山·해발 1600m)의 후산이 바로 천곡산(天谷山·고태안사 지역)이다. 천곡산은 지금도 야생차가 왕성하게 자라는 곳이다.
아마도 무상의 선차지법은 바로 천곡산의 10여년 수행 기간 중에 심안이 열려 터득한 것인 듯싶다. 말하자면 천곡산은 무상의 깨달음이 일상의 레벨, 차 생활에 도달한 것을 상징하는 도량이었다. 무상이 천곡산에서 수행할 때는 몰골이 거의 짐승에 가까웠다고 한다. 그래서 하마터면 사냥꾼의 총에 죽을 뻔도 하였고, 수많은 맹수들을 도력으로 제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의 두타행은 아무도 흉내낼 수 없을 경지에 도달하였다.
무상은 천곡산 바위굴에 은거하면서 차나무 잎을 말려 차를 마시며 선수행을 했다. 무상은 왜 그의 수도 장소로 천곡산을 택했을까. 무상이 선차지법을 외친 것은 아마도 일찍이 차의 효험에 대해 정통하였음은 물론이고, 차가 선정에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무상은 천곡산뿐만 아니라 자중현에서 뱃길로 1시간 가량 떨어진 금곡산(金谷山)에서도 수도를 했으며, 이곳에서 맹수를 물리친 얘기는 이 일대에 전설로 전해진다.
무상이 오늘날 햇빛을 본 데는 돈황석굴에서 발견된 오경전의 영향이 단초가 되었지만, 무엇보다도 오백나한에 들었기 때문이다. 무상이 오백나한에 든 것은 여러 설이 있지만, 무상의 선사상이 중국을 뒤덮고 있을 때에 오백나한신앙이 선종과 절묘하게 만나서 이룬 것으로 보인다.
쓰촨성 시방현의 나한사(羅漢寺·마조의 출가사찰), 윈난(雲南)성 쿤밍(昆明)의 공죽사, 항저우 영은사(靈隱寺), 베이징 벽운사(碧云寺), 장시성 노산 동림사(東林寺) 등 중국 나한당에는 455번째 조사로 무상선사를 모시고 있다. 오백나한에 선승으로는 유일하게 달마가 307위에 있어서 선종의 맥이 달마에서 무상으로 전해진 총지문을 증명하고 있다.
중국 항저우 영은사(靈隱寺) 오백나한전에 모셔진 무상공존자. 월간 ‘차의 세계’ 제공 |
한국에서도 조계종을 비롯하여 모든 종파가 공동으로 인정하는 조사전(祖師殿)의 조성이 절실하다. 필자는 최근 발표한 ‘역대 조사(祖師)의 아라한 승격은 당위적 과제’라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이 자리에서 “1700년의 역사를 가진 한국불교가 인도와 중국의 역대 조사는 섬기면서 한국 조사들의 아라한 승격에 인색한 것은 문화적 사대주의의 결과이다. 한국의 역대 여러 조사들을 아라한으로 추대해 나한전에 모시는 것은 한국불교의 정체성 확립과 단결을 위해서도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필자는 또 다른 어떤 외래종교보다 가장 토착화에 성공했음을 자부하는 불교가 실은 자주화에 가장 인색하다고 꼬집었다. “유교는 설총, 최치원, 정몽주, 이황, 이이 등 해동십팔현(海東十八賢)을 대성전에 모시고 있고, 천주교는 순교자 103위를 성인의 반열에 올려놓고 나름으로 섬김의 의식을 다하고 있다. 다른 외래종교에 비해 토착화와 민중화에 앞장섰다고 자부하는 불교가 역대 한국인 조사들을 소극적으로 섬기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에 비해 문화의 수용면에서 대국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중국은 선불교(禪佛敎)를 통해 인도에서 건너온 불교를 중국화하고 주체화했을 뿐만 아니라 자국의 역대 조사들을 나한에 올리고, 심지어 신라에서 건너간 무상선사를 오백나한 가운데 455번째 자리에 올려놓았다. 자국의 영토에서 구도행위를 했다 하여 무상선사를 나한에 넣는다거나, 신라의 왕자 출신 김교각(金喬覺·696∼794) 스님을 지장보살로 모시는 것 등은 중국의 문화적 자부심이 얼마나 높은지를 보여주었다.
한국불교의 최대 종단인 조계종은 육조혜능 선사의 법통이 아니라는 이유에서인지 무상선사가 중국에서 나한이 된 의미를 오히려 축소하고 부정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마조-백장회해(百丈懷海)-황벽희운(黃檗希運)-임제의현(臨濟義玄)으로 이어지는 마조의 증법손인 임제종을 따르는 세력이 주류이다. 조계종은 도의(道義 738∼821)와 보조지눌, 태고보우(太古普愚·1301∼1382)를 함께 섬기는 입장이다.
도의국사는 마조의 제자인 서당지장(西堂智藏)에게서 법을 얻고 도의라는 법호를 얻었으며, 다시 백장회해 선사를 찾아 법요를 받는다. 다시 말하면 마조의 손제자인 도의를 종조로 두면서도 마조의 스승인 무상에 대해서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는 육조혜능의 신화에 대한 절대신앙 때문이다. 태고보우는 마조의 증법손인 임제를 계승하였다. 임제의현에서 황룡파, 양기파로 갈라지고, 양기파는 또 대혜종고와 호구소룡으로 갈라진다. 태고는 호구소룡-고봉-금암-석옥에서 이어진다. 따라서 임제종의 계승자이다. 도의, 태고는 마조의 직계이고, 동시에 무상의 직계가 되는 셈이다.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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