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동양 삼국의 ‘무경’, ‘조선세법’, ‘본국검법’ 출간 / 뉴스와이어 기사

2014. 9. 5. 23:14건강 이야기






       2013-09-02 10:06


도서출판 행복에너지, 한·중·일 동양 삼국의 ‘무경’, ‘조선세법’, ‘본국검법’ 출간
  • - 드디어 밝혀진 2000여 년 전 중원을 호령한 ‘고조선 실전검법의 비밀’
    - 이제 대한민국은 명실상부한 ‘동양무예의 종주국’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서울--(뉴스와이어) 2013년 09월 02일 -- ‘본국검예’는 검의 기법뿐만 아니라 검결 속에 한민족의 종교와 철학 사상이 담겨 있는 이 시대의 “무경”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이 심화되고 일본의 제국주의가 부활하는 이 시점에 ‘조선세법’과 ‘본국검법’은 민족자존과 상무호국정신을 일깨워줄 것이다. 또한 ‘본국검예’는 오늘날 정체성을 잃고 헤매는 우리에게 “나는 누구인가?”를 묻게 하고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하는 “철학서”이자 한민족의 얼과 선조들의 그 뜨거운 발자취를 철저히 고증한 “역사서”이다.

조선세법이 경지에 오른 장군將軍들의 무예였다면, 2권 <본국검법本國劍法> 저자 임성묵은 병사兵士들의 양성을 위해 조선세법 가운데서 ‘격법’을 모아 재구성한 것이다. 또한 일본 격법에 영향을 준 소중한 자료다. 전 세계의 도장에서 수련하고 있는 무인들에게 이 책은 동양무술의 원류를 새롭게 인식하고, 대한민국은 변방의 작은 나라가 아니라 중원을 호령했던 무예의 나라임을 알릴 것이다. 또한 한민족 역사와 민족혼을 일깨워 전국의 도장에서 청소년에게 민족의 실전무술과 민족혼을 지도한다면, 대한민국에서 잃어버린 위대한 선조들의 무인의 정신을 찾게 될 것이다.

   이렇듯 조선세법의 전모가 드러나면서 그동안 일제의 무예 말살로 전통무예사의 이론과 철학이 부재한 우리 체육계에 커다란 선물과 숙제가 함께 안겨졌다. 정체성을 잃고 헤매는 우리에게 ‘본국검예’는 대한민국이 21세기 일류국가로 도약할 수 있는 정신적 기둥이 되어주고, 미래를 밝히는 민족혼의 불길을 세울 것이다.



출판사 서평

   그동안 말살당했던 한민족의 검법을 복원하여 무혼과 민족혼을 살려야 한다. 일본의 오랜 압제와 해방 후 지금까지 정부의 차별로 ‘본국검법’의 명맥은 끊겼고, 많은 단체가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이해와 검리를 터득하지 못했다. 우왕좌왕하는 사이 본국검법의 복원은 요원해 보이기만 했다.

   무예도보통지의 모든 검법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스승에게 수련해 온 검리 덕분에 본국검법의 동작을 하나 둘씩 어려운 부분들을 깨우쳤다. 원문을 읽고 그간 수련해 온 검리와 비교하고 문헌을 찾고 다듬으면서, 다른 단체에서 복원한 것이 잘못된 점을 찾아내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에 사명감을 가지고 각고의 노력 끝에 본국검법과 조선세법의 기법을 찾게 된 것이다.

   국새 복원에 전통성 훼손으로 나라가 떠들썩한 적이 있었다. 현대기술로 만들면 더 좋을 것을 왜 전통방식으로 만들려고 하겠는가? 광화문도 다 헐고 삐뚤어진 방향을 바로잡아 일제를 청산하기 위해서 새롭게 복원했다. 전통성이란 국민과 민족의 자존심이고 정체성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우리 민족이 수많은 외침을 극복하고 지켜온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중심에는 당연히 우리를 지켜준 검법이 있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그간 발표된 검법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느끼게 되었다. 이 문제는 국내의 문제를 벗어나 작금에는 중국에서 동북공정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하루빨리 그 원형을 찾아 발표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무예도보통지라는 위대한 무경이 있어, 민족의식과 사명감을 가지신 분들이 분연히 전통무예를 살리는 데 희생을 하신 것이 고맙게도 오늘날 이만큼 전통무예를 이룩한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에는 자기 나라의 문화가 상품이 되고 콘텐츠를 풍성하게 하여 국민에게 자긍심과 희망을 주는 시대다. 본국검법의 비밀뿐만 아니라 조선세법의 비밀까지도 해독하여 세상에 밝히는 것은, 이 두 가지가 현존하는 동양삼국의 무경을 대한민국이 확보하는 중요한 일이다. 또한 본국검법이 중국과 일본에 전수되어 오늘날 검법이 만들어졌음을 전 세계에 알리기에 충분한 명분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검법의 원조(元祖)를 알리는 증거가 조선세법과 본국검법인 것이다. 1500년 전의 기록과 문헌이 존재하고 있으니 이처럼 자랑스러운 검법이 전 세계에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우리가 분명한 논리로 원형을 복원해야 중국의 동북공정을 막을 수 있다. 조선세법이든 본국검법이든 원문과 그림 속에 들어있는 원리를 분명히 이처럼 글로 써서 밝혀야 한다. 그것이 검법을 복원한 동작의 정당성을 담보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이유로 그렇게 했는지에 대한 질문이 나오고, 그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면 복원은 미완성인 것이다. 본국검법은 사방에서 몰려오는 적과 맞서 전장에서 전광석화처럼 혈혈단신으로 적진 속에서 싸웠던 실전기법으로,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검법임을 알려 세계에 빼앗긴 명예를 되찾아야 한다.

   앞으로 국내에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는 전통검법을 다시금 바로 세우고, 왜곡된 검의 역사를 바로잡아 민족정신과 민족혼을 반드시 후세에 전해야 한다. 이러한 책임은 우리 전통무예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 아픈 상처를 가슴에 묻고 극복하고 발전하는 현재와 미래 세대에게 민족의 자존심과 자긍심을 심어줘야 한다. 그리고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저자소개

편저자 임성묵林成默
충남 공주 출생(1961)
공주고등학교(53회)
단국대학교
해병대 1사단
(현)대한검법 총재

본국검예 <1편 조선세법>
본국검예 <2편 본국검법>

목차

추천의 말 07
머리말 12
Ⅰ 본국검법의 여명
1. 본국검법의 부활 30
2. 본국검법 복원의 필요성 32
본국검법의 창제와 황창랑 | 본국검법의 상징과 서사시
3. 어제무예도보통지서(御製武藝圖譜通志序) 40
4. 무예도보통지의 탄생 42
무예제보 | 무예신보와 본국검법 | 무예도보통지
5. 기예질의(技藝質疑)의 중요성 46
Ⅱ 동양무예의 특성과 역사적 교훈
1. 동양 삼국 검법의 시대적 배경과 특성 53
중국검법의 특성 | 중국의 조선세법과 본국검법 | 일본의 민족성과 검법 | 사무라이의 근본과 어원 | 일본검도의 유입 | 일본의 야욕 | 본국검법의 특성 | 전쟁의 교훈 | 도검(刀劍)의 의미 | 검도(劍刀)·검도(劍道) | 승단과 승품
Ⅲ 본국검법 왜곡
1. 본국검법의 여명 83
2. 대한검도회의 본국검법 84
3. 대한검도회의 본국검법 순서 86
4. 대한검도회와 본국검법의 논문 87
Ⅳ 본국검법의 분석과 복원
1. 본국검법의 기법 93
격법(擊法) | 자법(刺法) | 세법(洗法) | 검세(劍勢) | 내략(內掠)·외략(外掠) | 본국검법의 방향성 | 방향성과 회전 법칙
2. 본국검법의 구성 108
원문의 구성형식과 해석 | 본국검법 해석을 위한 원칙 | 본국검법의 원문과 그림의 선택 | 본국검보(本國劍譜)와 본국검총도(本國劍總圖)
Ⅴ 본국검보와 본국검총도 해설
1. 본국검보의 해설 131
지검대적세 | 내략 | 진전격적세 | 금계독립세 | 후일격세 | 금계독립세 | 진전격적세 | 일자세 | 맹호은림세 | 안자세 | 직부송서세 | 발초심사세 | 표두압정세 | 조천세 | 좌협수두세 | 향우방적세 | 후일격세 | 전기세 | 진전살적세 | 금계독립세 | 좌요격세 | 우요격세 | 후일자세 | 장교분수세 | 백원출동세 | 우찬격세 | 용약일자세 | 후일격세 | 후일자세 | 향우방적세 | 향전살적세 | 향전살적세 | 시우상전세 | 본국검보와 세의 일치
2. 본국검총도 해설 251
본국검총도의 행의 원칙 | 좌요격세와 우요격세
Ⅵ 검결 속에 감춰진 비밀
1. 본국검법의 검세와 검결 281
검결은 암호다 | 검결의 중요성 | 검결은 그림이며 행위예술이다 | 본국검법의 서사시와 동작의 의미
2. 검결(劍訣) 288
지검대적세(持劍對賊勢) (1) | 내략과 그림 (2) | 진전격적세(進前擊賊勢) (3)(7) | 금계독립세(金鷄獨立勢) (4)(6)(20) | 후일격세(後一擊勢) (5)(17)(28) | 일자세(一刺勢)와 후일자세(後一刺勢) (8)(23)(29) | 맹호은림세(猛虎隱林勢) (9) | 안자세(雁字勢) (10) | 직부송서세(直符送書勢) (11) | 발초심사세(撥艸尋蛇勢) (12) | 표두압정세(豹頭壓頂勢) (13) | 조천세(朝天勢) (14) | 좌협수두세(左挾獸頭勢) (15) | 향우방적세(向右防賊勢) (16) | 전기세(展旗勢) (18) | 진전살적세·향전살적세 (19)(31)(32) | 좌요격세(左腰擊勢) (21) | 우요격세(右腰擊勢) (22) | 장교분수세(長蛟噴水勢) (24) | 백원출동세(白猿出洞勢) (25) | 우찬격세(右鑽擊勢) (26) | 용약일자세(勇躍一刺勢) (27) | 외략(향우방적세) (30) | 시우상전세(兕牛相戰勢) (33)
Ⅶ 결어 335
편집후기 342
부록 (본국검보, 본국검총도, 쌍수도 해설) 345



머리말

본국의 새로운 무예정신을 찾아서

   우리 모두는 단군의 자손이며 본국의 후예들이다. 본국은 시조 단군이 세우신 고조선을 지칭하는 한민족 동이족의 나라이다. 최근 중국 요녕성에서 홍산문화의 발굴과 1세기 전 동이문자인 갑골문의 발굴로, 상고시대의 전설이 역사의 속의 실존했던 시대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이것은 본국의 한민족에게 커다란 비전으로 큰 의미를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이 말달리고 큰 활 쏘며 호령했던 영토가, 동북아시아에서부터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거대한 대제국의 역사였음을 증명하는 것으로, 전설이 아닌 실체적인 강역으로 복원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껏 수많은 중국의 사서를 기준으로 배워왔던 역사와 사학계에서 정리하여 학교에서 가르친 왜소하고 나약한 역사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위대한 우리의 역사가 왜 사서에서 지워져 버렸단 말인가? 여기에는 필시 많은 곡절이 있었을 것이다.

   현재도 본국은 중국의 거대한 대륙에서 밀려나 반도의 땅덩어리 끝자락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다. 그 모습이 우리 한민족이 처한 현재의 지정학적 운명이다. 그럼에도 본국은 아직도 하나 되지 못하고 둘이 서로 대치하고 있다. 그리고 본국을 둘러싼 강대국들은 한반도의 상황을 호시탐탐 저울질하고 있다. 본국의 역사가 어떻게 변할지 예측할 수 없는 중요한 시점이다. 우리는 이러한 대내외의 위험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물질적 풍요에 빠져 있고, 정치권은 당리에 빠져 한민족이 처한 위험과 본국의 시대적 소명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본국의 영토가 축소되었다면, 다시 회복하여 확장될 수도 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 해답은 상고의 아픈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본국인은 남북통일 이후 본국을 둘러싼 강대국의 틈에서 미래의 자주적 역사를 세우고, 선조들의 원대한 꿈과 대륙을 호령했던 호연지기를 계승해 나아갈 만반의 준비를 하여야 할 때이다. 이를 위해선 본국의 역사를 찾는 노력을 각 분야에서 모아야 한다. 그러나 재야와 사학계는 양분되어 아직도 갑론을박을 하면서,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정론의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 본국의 미래인 청소년의 역사교육은 오히려 선택과목으로 밀려, 상급학교에서는 아예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본국검예>는 현재의 교육여건에서 할 수 없는 본국의 역사와 철학을 본국인들에게 일깨워 줄 것이다.

   본국은 수많은 외침에 의해 영토가 점차 좁혀졌다. 그리고 승자에 의해 역사는 왜곡 당해왔다. 북방과 중원에서 밀려난 본국은, 한반도에서 고구려·백제·신라·가야로 사국이 서로 대립하던 중 동남쪽에 위치한 신라가 외세를 끌어들여 통일을 이루었다. 그 결과 아쉽게도 고구려의 넓은 땅을 잃어버렸고, 한민족의 상고역사를 많은 부분 지워버렸으며, 불교를 국교로 삼아 불교적 시각에서 사서를 기록하였다.

   그 후 고려는 불교의 융성과 함께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으나 불교의 타락과 함께 막을 내렸다. 처음부터 중국에 사대하면서 출발한 조선은 고려왕실과 선조의 기록을 조작하고, 중화와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고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사대를 심화시켰다. 조선의 왕들은 유학을 국시로 하여 전국에 향교를 세워 본국의 신화와 북방의 역사를 등한시하고, 이미 토착화된 천 년 불교의 전통마저 철저히 배척한 결과, 본국의 신화와 역사가 말살되었다. 그 이후 역사는 또 어떠했는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병자호란에 이은 일제 침략 등 계속된 전란으로 본국의 역사는 분서당하고 마침내 일제에 와서 왜곡 조작된 교육이 강제되었으며, 마침내 우리의 머리에 식민의 뿌리를 심어 놓았다.

   이러한 역사의 질곡 속에 과연 본국의 역사가 정사에서 온전히 살아남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나마 쓰러져 가는 본국의 역사는 민담과 노래와 소리로 민초들이 지키고 있었고, 숨겨야 했던 한민족의 찬란한 역사는 은유적으로 신화와 문학에 담겨 전해졌다. 다행히 정체성 있는 가문에 숨겨져 내려온 상고사의 기록들이 세상에 나오다 보니, 일제에 의해 영향을 받은 사학자는 자신이 배운 논리로 재야의 사서들과 연구를 위서와 픽션으로 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 오늘날 사학계의 풍토이다.

   이에 반해 중화와 일본은 야사일지라도 정체성과 관련성이 있으면 확대 재생산하여 자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는 것을 국가 정책으로 삼아 주변국의 비판을 무릅쓰고 지속적으로 왜곡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중화와 일본이 영토를 확장시킨 교묘한 술책이자 원동력이고, 본국 한민족의 영토가 점차 작은 땅덩어리로 축소된 중요한 요인이 된 것이다. 신화와 역사가 없는 민족은 위대한 족적을 남길 수 없고 새로운 역사를 창조할 수도 없으며, 종국에는 승자의 역사에 굴종하면서 나라를 잃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국가는 영토의 문제가 아니다. 바로 신화와 종교, 문화가 바로 그 나라 그 민족이며, 대외적으로 영향력을 확장시켜 나갈 수 있는 근본적 초석인 것이다. 돌이켜 보면 잃어버린 상고의 역사와 영토가 축소된 데에는 무인의 정신을 버린 문인들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 문인들은 중화사상을 숭상하고 계승하는 데 집착했을 뿐, 한민족의 홍익인간 정신에 입각한 본국의 철학과 배달문화를 발전적으로 계승해 나아가지 못했다. 그나마 한민족의 삶 속에서 민초들이 지켜온 본국의 역사와 철학을 제대로 지켜내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이러한 폐습이 과연 사라졌다고 보는가? 과연 한민족의 철학과 사상을 바탕으로 한 “선(仙)” 사상과 “풍류도”가 오늘날 토종철학으로 계승되고 있는가? 통일을 이루고 한민족을 이끌어 나갈 자생철학은 준비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는 지금까지 아무런 철학과 사상이 없이 살아온 것인가? 혹시 지금도 서구를 향한 신사대주의 에 매몰되어 있지는 않은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도 지성을 대표한다는 철학과 과학은 서구철학과 서양과학이 전부인 것으로 알고 있다.

   무인들과 문인들은 이 땅과 본국의 역사에 크나큰 잘못을 저질렀음을 스스로 반성하고 과오를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옥에도 흠결은 있다. 그러나 문인들은 옥의 가치보다, 흠을 들추어 종국에는 옥을 쪼개는 우를 범하곤 했다. 이로 인해 많은 사상가와 현인의 자질을 가진 인물들이 유성처럼 사라져 버렸다. 자신의 반대편에 있으면 옥석을 가리지 않고 인물과 그들의 사상을 무조건 말살시켜왔다. 이러한 풍토가 넓게 보면 한민족이 큰 인물을 길러내지 못한 원인이다. 상류층을 형성한 문인들이 사대를 추종한 결과, 자연히 그를 따르는 문도들도 사대를 하게 되었다. 그들은 어렵게 민초들이 지켜온 본국의 문화를 미신과 하층문화로 취급하면서 민중에 남아있던 정체성도 점차 사라져 갔다.

   이러한 풍조가 수백 년 뿌리 깊게 형성되었다. 선각자가 아무리 민족혼을 주장해도 기득권에 의해 반사회적 부류로 매도당하기 일쑤였다. 그 결과 한민족에게는 천지인의 자생철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인물과 종교를 이 땅에서 배출하지 못하고, 그 빈자리를 외래 종교와 사상이 차지하여 본국의 주체성은 약화되었다. 비록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한민족의 심성이 정체성으로 형성될 수 있도록 문인 지성인들은 그 방향을 제시해주길 진심으로 바란다. 이것이 수천 년 굴종의 왜곡된 역사를 지우고 미래의 후손들이 중심을 잡아 이 땅에서 본국이 다시금 영광된 역사를 만들어 가는 바탕을 세울 것이다.

   <조선세법>은 동양 삼국이 공히 무의 경전으로 받아들여 중국의 소림무술과 태극권, 무당무술 등에서도 수련하고 있다. 또한 <본국검법>은 일본의 격검술에 절대적 영향을 준 무예서이다. 무예의 한류는 이미 오랜 전통이 되어 있음을 이를 통해 알 수 있다. 특히 무술의 종주국을 자처하는 중화는 본국의 선조들이 창제한 <조선세법>과 <본국검법>을 중화의 검법으로 왜곡시키기 위해서 또 다른 동북공정을 하고 있다. 이들 두 무예서는 단순히 검의 기술만을 기록한 단순한 무예서가 아니다. 그 검법의 동작 속에는 한민족의 잃어버린 위대한 신화와 상고시대 역사가 검결(劍訣)과 더불어 숨겨져 있다. 이들 무예서는 선조들의 원대한 기상과 상무호국정신을 느낄 수 있는 역사의 보고이다.

   그러므로 두 무경은 그동안 한민족이 잃어버린 조상의 얼과 역사를 되찾는 본국인 모두의 나침판이다. 방향을 잃고 헤매는 본국인들에게 상고시대에 현재의 우리의 본 모습을 이야기처럼 들려주고 있다. 우리 본국인은 <조선세법>과 <본국검법>을 배우고 익혀, 이 땅의 잃어버린 본국의 역사와 민족정기의 무예정신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본인이 편저한 <본국검예>는 결코 개인의 것이 아니다. 본국의 영토와 얼을 지키고자 목숨을 초개처럼 버렸던 선조들과, 전통무예를 찾기 위해 온갖 차별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무인들과, 하나 된 조국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지금도 각 분야에서 애쓰고 있는 진정한 본국인들 모두의 것이다.

   <조선세법>과 <본국검법>을 연구한 것은 오로지 본국을 되찾고 정체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사명감으로 시작했다. 국내의 대표적인 무예단체인 대한검도회와 십팔기 그리고 24반 무예, 경당 등에서도 <조선세법>과 <본국검법>을 부분적으로 해석하여 지도하고 있다. 하지만 각 무예단체별로 검법의 동작이 다르고, 그 동작들 또한 <무예도보통지>와 <무비지>의 내용과 그림이 일치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차이를 고증하기 위해 <무예도보통지>의 원문과 그림을 비교해가며 세세히 살펴본 결과 모든 단체가 검증받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직시하고 원문에 가까운 해석을 통해 옥석을 가려보려는 취지에서 천학비재를 무릅쓰고 감히 연구를 시작하였다.

   특히 <조선세법>은 동양 삼국이 해독하지 못한 무예계의 과제로서, 국내외 어느 단체도 정확히 그 기법을 해독하여 발표하지 못한 상태이다. 막상 처음 무경을 해독해보자고 도전했지만 사실 언제 완성이 될지, 과연 해낼 수는 있을지 무척 막막했다. 그러나 10년에 걸친 노력의 결과 <조선세법>과 <본국검법>의 숨겨진 비밀을 해독하여, 위대한 선조들의 무혼과 잃어버린 단군의 의미와 상고의 철학과 한민족의 종교와 사상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 이를 통하여 민족의 정체성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인지를 절실히 깨달았다. 그리고 <본국검예>는 <조선세법>과 <본국검법>을 바탕으로 하였다. 이러한 성과는 그동안 사명감을 가지고 함께 도움을 준 많은 분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다음은 이 책이 발간하기까지 그동안 수고와 협조를 아끼지 않은 분들께 감사를 드리는 자리이다.

   먼저 이운성 대한검법 부회장은 이 일이 역사적 가치가 있는 뜻깊은 일이라며 처음부터 함께하였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원고구성 작업을 수없이 정리하였으며, 그림 복원을 위해 손수 밤새워 작업하였다. 그리고 늘 곁에서 함께하였다. 또한 단체의 단결과 화합을 위해 낮은 곳에서 수고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첫발을 함께한 이운성 부회장에게 이 자리를 빌려 제일 먼저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부끄러운 사대주의와 식민잔재의 뿌리를 뽑기 위한 바탕으로 정신문화를 기록하고자 많은 책을 저술하고 마침내, 이 땅에 토종철학인 ‘소리철학’을 세우고 계신 도농(道農) 박정진(朴正鎭) 교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필자는 “소리철학” 덕분에 이 책의 전반부를 쓸 수 있었다. 또한 박정진 교수는 ‘무맥(武脈)’이 신문 연재의 계기로 한국과 중국의 무예계의 최고수를 만나 그들의 무예를 직접 보고 확인한 안목을 통해 동양무술의 전반적인 흐름과 우리 무예의 근원을 찾아 그 비밀이 바로 <조선세법>의 “검결”에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필자는 박교수의 “비결을 숨긴 칼의 노래, 검결”이란 글을 통해 <조선세법>의 무경을 해석하는 데 큰 가르침을 얻었다.

   또한 박정진 교수의 소개로 북경대학 출신 라석(羅石) 손병철(孫炳哲) 박사를 알게 되었다.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무경을 통해 원대한 본국인의 무예정신을 회복하여 세계만방에 전파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새로운 이름의 <본국검예>로 지어준 한편 이를 기념하여 <본국검예>라는 책 제호까지 지어 붓글씨로 기꺼이 써주신 깊은 뜻에 감사를 드린다. “지금은 창검을 들고 군웅할거하던 선천 상극시대를 지나 유리광명의 태평성대로 가는 ‘지천태’ 운의 상생시대로 검법과 검도 역시 무예의 일종인 ‘검예’로 방향을 바꾸어 시대조류에 맞게 혁신해야 한다”는 귀한 가르침을 주셨다.

   마치 중국의 ‘서법’과 일본의 ‘서도’와 달리 1945년 해방공간으로부터 남북이 공통으로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 한국의 ‘서예’의 경우(‘서예’라는 새로운 명칭은 그의 서예 스승 소전 손재형 선생에 의해 1945년 주창되었다)와 같이, 방법에 치우친 중국의 ‘검법’이나 신도적 의미가 강한 일본의 ‘검도’와는 차별화한 ‘검의 예술’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브랜드로서 ‘검예’로 할 것을 사례를 들어 적극 권유하였으며, “본국은 모든 나라, 이 세계의 뿌리이다”라는 ‘본국’에 대한 개념정립과 전반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정성껏 채워주셨다.

   특히 도농 선생과 라석 선생, 두 분의 학문에 얽힌 인연과 일화는 마치 신라 시대 불교계의 원효와 의상을 연상케 한다. 당나라 유학길에 함께 올랐던 것과 중도에 잠시 다른 길을 갔던 것과 같이, 두 분은 중년에 국교도 되지 않은 중공 대륙의 문을 두드려 북경대학에서 철학 공부를 하기로 약속하고 1991년 함께 수속을 밟았으나, 도중에 도농 선생은 국내에 남아 많은 저술활동과 신문에 “무맥”과 “차맥”을 연재하고 “예술인류학”과 “소리철학”의 초석을 마련하였다.

   한편 라석 선생은 중국 개방 후 제1호 유학생으로 ‘심물론철학’과 ‘위진미학’을 전공하고 <조론>과 <시중역>을 연구한 뒤 국내에 들어와 새로운 예술운동으로 ‘물파주의선언문’을 발표하였다. 공교롭게도 두 분이 각자 추구하는 기철학적 방향과 내용이 서로 공통됨을 확인하고, 지금은 원대한 철학적 이상을 성취하기 위해 변함없는 지기로 함께 손잡고 나아가고 있다. 두 분 모두 시집을 여러 권 낸 중진 시인이기도 하여 아름다운 모습을 대할 때마다 만년의 ‘한산과 습득’의 면모를 연상케 한다. 이 책은 두 분의 격려와 채찍으로 이루어졌다. 편저자에게는 더없는 행운이자 장차 <본국검예>의 새로운 가능성이기도 하다. 다시 한 번 두 분께 머리 숙여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조길현 수석제자는 평생을 전통검도를 일으켜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한국검도를 수련하였다. 편저자가 무경을 연구하면서 미완성의 무예 동작임에도 수차례 수정해 익히고 도장의 어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따라와 준 모범적인 제자이다. 그 누구보다도 나의 <본국검예>의 기예를 가장 많이 이해하고 잘 구사한다. 향후 많은 지도자를 배출하는 데 크게 힘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임수원 박사는 서울대에서 체육교육을 전공한 자로서 집필 시 문화의 중요성과 책의 가치를 제일 먼저 알아보았다. 무예의 정신과 이론이 부재한 한국의 무림과 체육사에 뿌리를 새로 세우는 일이라며, 앞장서서 수년간 직접 무예를 전수받고 첫 승당을 하여 승품을 받은 수제자이다. 책을 꼼꼼히 읽어가면서 문맥과 동작의 내용이 일치하는지 일일이 비교하면서 어려운 교정을 함께하였다. 누구보다도 큰 사명감과 정의감이 투철한 문무겸전의 무인이다.

   무예서의 내용과 동작을 터득하고 조선세법이 공수로 구성된 것을 알게 되어, 편저자가 <조선세법>에서 수수세를 찾고 완성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나에게는 외우(畏友)같이 소중한 사람이다. 앞으로 <본국검예>를 세계에 알리고, 국내외에 학술적 학술활동에 있어서 큰 역할을 기대하며, 그간 노고에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임정민 감사는 제3자의 시각에서 재현된 동작에 반론을 제기하여 <본국검예>를 꼼꼼히 정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청학동 김봉곤 훈장은 먼 길 마다 않고 문무겸전을 위해 전통검법수련에 열성과 열의를 보여준 데 감사를 드린다. 경당과 24반무예총연맹의 임종상 부총재는 전통무예계의 거물임에도 불구하고 <본국검예>의 기법을 보고 제일 먼저 수련을 청한 진정한 무인이다. 그리고 검법의 동작을 담기 위해 밤새 사진촬영을 해주셨다. 크게 감사한다.

   전통무예의 이름 하나에 매료되어 평생 무인의 길을 함께 걷다가 여러 사정으로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미래를 기약하며 아쉬운 마음으로 도장을 접어야 했던 김상호, 이양환, 김기훈, 이석숭, 목영자, 이상용, 박준성, 이자인, 박철성 등 제위의 관장과 디플로머시 임덕규 회장, 정진석 선배, 강준석 부총재, 정승원, 송영기, 임인홍, 이원식 협회 이사, 김수회, 김덕원, 박득승, 김주호, 서혜정, 임종덕, 임정표, 최훈, 심두환, 송암스님의 성원과 마무리 원고를 도와준 최승, 이호연께도 감사를 드린다.

   아울러 3년 전 미완의 책을 읽고도 선뜻 출판에 보태라며 도움을 준 ㈜상보의 김상근 대표께 감사의 마음과 출간이 늦어진 것에 송구함을 말씀 드린다. 또한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준 이정률 대표와 이대복, 김완중 변호사 그리고 원고를 보고 선뜻 출판에 응해주신 행복출판사 권선복 사장을 비롯하여 그간 수고해준 최새롬 팀장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끝으로 돌아가신 아버님과 무한한 애정과 신뢰를 주신 나의 사랑하는 어머님, 묵묵히 지켜봐주고 용기를 준 가족에게 이 책을 바친다.

   비록 미비한 점이 많지만 앞으로 보완해 나갈 것을 약속하며, 강호의 무사는 물론 심신을 단련하는 사람이라면 국내외 누구나 이 책을 읽고 그중 한 명이라도 우리 전통 무예정신을 깨달아 실천하는 데 있어 크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편저자로서 더없는 보람과 기쁨이 될 것이다. 아울러 머지않아 조국통일을 이룰 그 날을 대비하여 ‘본국’의 새로운 ‘검예’가 21세기 민족문화중흥에 일조할 수 있기를 독자들과 더불어 간절히 기대하고 희망하고 기대한다.

2013. 8. 15

임 성 묵 


추천사

미래 인류문화의 종주국을 향하여

   이 책에 추천의 말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보니, 몇 해 전에 세계일보에 연재를 마친 ‘무맥(武脈)’을 시작할 때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당시 어디서부터 말머리를 풀어갈까를 고심하던 중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라는 인류의 ‘무경(武經)’이 우리 선조에 의해 정리되어 있음을 알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전국 각지에 흩어진 무예의 줄기와 가지를 살펴볼 수 있었다.

   당시 연재를 시작할 때 기획의 취지를 나는 이렇게 말했다.

   “문화는 언제나 문무균형을 이상적인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우리민족은 무(武)를 천시하고, 무를 문화의 적으로 삼는 지경에 이르렀다. 무의 신의(信義)와 용기(勇氣)의 실천정신을 높여야 문화의 주체성과 현실성을 되찾을 수 있다. ‘문화능력=문력(文力)+무력(武力)’이기 때문이다. 상무정신을 높이기 위해 무맥(武脈) 시리즈를 기획했다. 무맥 시리즈는 우리의 무경(武經),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바탕으로 우리의 무술체계, 단체와 그 현황을 되돌아보면서 무문화(武文化)가 왜 중요하며, 한국문화가 어떤 허점과 약점을 가지고 있는지를 탐색하고자 했다. 결국 무(武)를 통해서 한국문화 전반을 재해석하는 장이 될 것이다. 무(武)가 문화(文化)의 하드웨어라는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한다.”

   그동안 필설로는 다 말 못할 사연들이 숨어 있다. 오늘에 이르러 <본국검예>가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은, 선배들과 선학들의 노력과 시행착오의 끝에 도달한 것이다.

   모든 문화는 시대에 따라 적응하고 진화하여야 하겠기에 무예를 닫힌 완성체계로 보아서는 안 된다. 문화의 복원에는 때로는 적으로부터 배울 수도 있고 옮겨올 수도 있다. 이 이치를 모르면 아직 무엇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이 말은 문화란 항상 이곳에서 저곳으로 흐르고 사람의 이동에 따라 이동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문화도 결국 생명체처럼 생멸하는 것이고, 종국에는 적이 없다는 말을 하고자 함이다. 문화는 인류를 위해서 사용되어야 한다. 무예문화도 예외는 아니다. 인류 무예문화의 최초의 종합경전, 무경(武經)이라고 말할 수 있는 《무예도보통지》를 집대성해낸 우리 선조의 정신이 바로 이러한 정신이다.

   역사는 참으로 아이러니컬하다.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민족, 남의 나라를 먼저 침략한 적이 없는 우리 민족이 수많은 외침의 역사 속에서 종국에 무경을 만들어냈다고 하는 것은 실로 ‘궁하면 통한다.’는 옛말을 떠올리게 한다.

   세계일보에 무맥을 연재하던 중 어느 날 갑자기 나의 뇌리를 친 것이 바로 검결(劍訣)부분이다. 검결은 마치 무예의 화룡점정과 같은 것으로 이것만 제대로 풀면 《무예도보통지》의 무예를 자연스럽게 복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속에 숨은 우리 문화의 스토리 같은 것도 새롭게 발굴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눈 밝은 후인(後人)을 기다리기로 하고 연재를 마쳤다. 그러던 어느 날 이러저러한 인연을 거쳐 임성묵(林成默)이라는 무인을 첫 대면하게 되었다. 오늘날 <본국검예>가 된 원고의 초고(初稿)를 받아들고 무슨 말을 해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열의와 눈빛을 바라보는 순간, ‘실로 ‘물건’이 될 수도 있겠구나!’라는 일말의 희망을 품게 됐다. 그로부터 3년여의 만남과 토론과 집필과 수정과 재수정의 수많은 반복 끝에 빛을 보게 됐다. 어느 날 임성묵과 이운성, 두 사람으로부터 조급함을 느낀 나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글도 오래 묵히다 보면 장(醬)이 된다.”

   결국 오늘날 <본국검예>는 그 장이 된 것이다. <조선세법>과 <본국검법>의 검결에서 글자와 무예의 동작이 같은 모양임을 발견하게 된 것과, 검결이 서사시로 쓰여진 것을 찾아낸 것은 실로 엄청난 성과이다. <조선세법>이 단순한 무예서가 아니라 상고시대 한민족의 신화와 정신문화가 기록된 당시 선진문화의 결정체임이 드러난 것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동안 알수 없었던 <조선세법>의 기법을 찾을 수 있는 발판이 된 것이다.

   지금에 와서 보면 서로 불완전한 형태로 흩어진 전통무예의 전모와 동양무예의 원류의 중심에는 대체로 조선세법(朝鮮勢法)이 있다. 말하자면 조선세법이 몸통이고, 나머지는 필요에 따라 그것을 요약하거나 재구성하고, 아니면 주변에 있었던 지체였음이 드러났다. 즉 우리의 무예인들은 전통무예의 일편(一片)을 붙들고 그것이 전부인 양 씨름해왔던 셈이다. 조선세법의 전모가 드러나면서 그동안 일제의 무예 말살로 전통무예사의 이론과 철학이 부재한 우리 체육계에 <본국검예>는 커다란 선물이면서 동시에 숙제이기도 하다.

  그동안 <조선세법>의 세법(洗法)의 의미를 무예계는 알지 못했다. “세법”은 ‘발이 먼저 나가면서 칼이 뒤를 따른다’는 뜻이다. 발이 먼저 가고 그 뒤를 몸과 칼이 물처럼 자연스럽게 흐름을 의미한다. 그래서 세(洗)자를 쓴 것 같다. 몸이 칼의 힘을 받아 움직이는 것이다. ‘격법(擊法)’은 칼을 내려치면서 멈춘다면 ‘세법’은 칼을 빗겨 치거나 수평으로 칠 때 그 칼의 흐름을 세우지(정지시키지) 않고 흐르게 한다.

   “세법은 두 손으로 칼자루를 잡고 힘껏 치면 당연히 칼의 무게와 원심력으로 몸이 팽이처럼 돌게 된다. 조선세법을 보면 이처럼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허리에서 허리로 칼을 자유자재로 사용한다.”

   이때 일정한 보법(步法)과 수법(手法)과 신법(身法)을 사용하지 않으면 빗각과 수평 베기로 인하여 정확한 칼의 각이 잡히지 않아 칼 면으로 치게 되거나 몸의 균형을 잃게 된다. 이는 총체적으로 몸의 이동과 균형의 실패가 된다. 쌍수도의 어려움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조선세법의 검결에 또 하나의 멋진 장치가 숨겨 있었다. 검결 30개가 앞뒤로 짝을 이루어 서로 공격과 방어를 주고받는 수수세(授受勢)의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조선세법은 무예의 경지에 오른 장군(將軍)들의 무예였다고 말할 수 있고, 본국검(本國劍)은 병사(兵士)들의 양성을 위해 조선세법 가운데서 “격법”을 모아 재구성한 것 같다. 예도(銳刀, 禮刀)는 조선세법의 파편을 모은 것이며, 조선세법은 무기를 들면 검법이었고, 맨손으로 하면 권법이었다. 맨손무예인 수벽도는 조선세법이 권법의 형태로 전승되었던 흔적이다. 그러나 63세를 소실하고 8법만이 전수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전하는 중국의 소림무술, 태극권류와 무당류도 조선세법의 일부를 편성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조선세법의 맨손 동작은 아리랑을 비롯해서 탈춤 등의 동작에 스며든 것 같다. 검무(劍武)는 검무(劍舞)이다. 물 흐르듯이 흐르는 무예의 동작, 힘의 강약과 호흡, 동작의 느림과 빠름 등은 무예가 한 편의 몸과 마음의 예술임을 느끼게 한다.

   검을 쥐는 형태를 보면 조선세법은 쌍수검(雙手劍)이고 전후좌우(前後左右) 회전을 하는 반면, 중국은 편수검(片手劍)이다. 일본은 쌍수검이지만 회전이 없이 전후(前後)로만 이동하고 내려치는 격법(擊法)위주의 기법이다. 일본의 검도조차도 실은 본국검법에서 일본인의 왜소한 신체에 유리한 격법을 일본화한 것 같다.

   조선이 세법(洗法) 위주라면 일본은 격법(擊法) 위주, 중국은 자법(刺法) 위주이다. 중국이 자법인 것은 역시 창(槍)의 나라인 까닭이다. 이처럼 한국과 일본과 중국이 각각 자기 신체와 자국의 실정에 맞게 검법을 독창적으로 발전시킨 것으로 보인다.

   문인은 실천을 잘하지 못하는 문약(文弱)의 약점이 있는 반면 무인은 자신의 무예만 최고 최종이라고 주장하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무문겸전을 말하고 둘은 상호 보완하는 미덕을 가지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무예도 자연이 아니다. 분명 인위이다. 인위는 항상 자연스러울 때 그 절정을 맞는다. 임성묵의 무예는 이제 자연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동양무예의 무경인 조선세법에서 이처럼 감춰진 비밀을 찾게 되어 보다 원형에 가깝게 다가갔음을 알고, 감히 추천의 글을 쓰기로 하였다.

  지금은 세계사적으로, 지구적으로 ‘지천(地天)의 시대’를 맞고 있다. 지천의 시대라는 것은 모든 것이 종래와는 다르게 거꾸로 돌아감을 말한다. 그런데 정작 지천(地天)이야말로 주역(周易) 태(泰)괘의 말처럼 막힘이 없이 통(通)하는 것이다. 지천의 시대를 무예에 적용하면 지금까지 상위에 있던 문(文)이 아래로 내려가고 하위에 있던 무(武)가 위로 올라가는 것이다. 이제 문의 시대가 아니라 문무의 평형시대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때 무(武)라는 것은 단순히 무예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으로 말하면 일반 백성과 여성이 위로 올라가고, 물질문화와 함께 몸으로 하는 모든 예술이 위로 올라감을 말한다. 이를 집약하면 예술시대로 옮아감을 말한다. 그래서 무술도 무예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세계는 본래 정체성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항상 정체성을 만들면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본래 세계가 처음일 때는 국가는 없었다. 그래서 인간은 국가를 만들었을 것이다.

   본국이라는 것은 그 옛날 우리민족, 동이족이 만들었던 최초의 국가를 말한다. 흔히 고조선을 말하지만, 그보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 라갈 수도 있다. 문명은 원시반본(原始返本)을 한다. 지금이 바로 원시반본을 하는 때이다. 이러한 때에 발맞추어 우리의 전통무예가 제대로 복원되는 것이리라!

   생각 같아서는 무예정신으로 똘똘 뭉친 우리 시대의 화랑도와 같은 것이 우리나라에도 형성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국은 미래 인류문명의 종주국이 될 것이다. 그러한 준비가 현재 곳곳에서 저마다 이루어지고 있다. 그 소리를 듣고 있다.

도농(道農) 박정진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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