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제목 : | 말씀의 초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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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사도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
쌍둥이’라고도 불렸다(요한 20,24 참조).
갈릴래아 출신의 어부였던 그는 매우 강직한 제자로 드러난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해치려고 했던 베타니아 마을로 가시려 하자
이를 만류하던 다른 제자들과 달리, 토마스는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 하고 큰 용기를 보였던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지 못한 토마스는 강한 불신도 보였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시자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하고 고백하였다.
이러한 토마스 사도는 인도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가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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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이 이제는 이방인이나
외국인이 아니라 성도들과 함께 하느님의 한 가족이라고 하며 격려한다.
그들은 모퉁잇돌이신 예수님 위에 사도들과 예언자들을
기초로 삼아 지어진 건물이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건설되고 있다(제1독서).
토마스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다는 다른 사도들의 증언에
예수님의 상처에 직접 손을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이러한 토마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인사를 건네시며
당신의 상처에 손을 대 본 뒤 의심을 버리라고 하신다.
토마스가 신앙을 고백하자 예수님께서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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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2,19-22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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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24-29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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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토마스의 불신’은
오히려 우리의 신앙을 굳건히 하는 데 더욱 유익하다고 말했습니다.
토마스의 모습을 잘 성찰하면서 신앙의 확신과 성숙의 계기가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오늘날 더욱 절실합니다.
계시 진리에 대한 믿음 앞에서 주저하고 입증된 것과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는 과학적 사고방식에 익숙한 오늘의 신앙인들은 토마스가
그들 자신의 숨은 생각을 대신 말해 준 것처럼 느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학자이자 철학자로서 체코의 종교 자유를 위한 투쟁으로
유명한 토마스 할리크 신부는 토마스 사도의 불신을 과학주의와
신앙의 대립으로 해석하는 것과는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자고 초대합니다.
평생을 무신론자들과의 대화에 노력하고 있는 그는,
예수님께서 토마스 사도에게 이미 죽은 라자로의 집으로
가자고 하셨을 때 토마스는 주님을 위해
죽을 각오를 했던 사람임을 기억합니다(요한 11,16 참조).
그러한 그에게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이후에 들려온 부활 소식은
‘너무 행복한 결말’처럼 느껴졌을 것이라고 할리크 신부는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토마스의 불신은 세상의 고통과 불의 속에 살아가는 이들이
어떻게 신앙의 문을 열 수 있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뇌하며
질문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상처에 손을 대는 것’만이,
토마스가 사로잡혀 있는 고통의 기억에서 부활의 확신으로,
의심의 태도에서 확신 어린 투신으로
변모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아십니다.
‘상처는 상처로 남아 있되’ 그 안에서 죽음마저도 넘어서는
사랑의 힘을 발견한 토마스는 부활하신 예수님께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주님의 상처를,
나의 상처를, 형제의 상처를, 그리고 세상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똑바로 바라볼 때 우리는 주님의 현존을 체험하게 됩니다.
상처를 만지며 더듬거리는 손길 속에서,
보지 않고도 주님을 믿는 우리 신앙의 확신은 조금씩 자라날 것입니다.
“주님이신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불타는 가시덤불 안에서
당신을 드러내셨다. 하느님의 외아드님, 우리의 주님이시며 하느님이신
그분께서는 십자가의 불타는 고통 안에서 당신을 드러내셨다.
오직 우리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다른 이의 십자가를 질 준비가
되어 있을 때, 바로 그분의 상처인 세상의 상처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던져진 요구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그분의 음성을 알아듣게 될 것이다”
(토마스 할리크, 『상처를 만져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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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매일 미사-
♬ Mysterium fidei 신앙의 신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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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사즐모(댄스스포츠 사교댄스모임 - 라틴, 모던, 사교, 리듬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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