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제목 : | 말씀의 초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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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스 예언자는 가난한 이를 착취하는 자들에게 경고한다.
그들은 온갖 술수와 횡포로 힘없고 빈곤한 이들을 못살게 군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의 이런 악행을 결코 잊지 않으실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세리 마태오를 부르셨다. 마태오는 곧바로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하시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자
예수님께서는 당신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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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땅에 굶주림을 보내리라. 양식이 없어서가 아니고,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
▥ 아모스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8,4-6.9-12
빈곤한 이를 짓밟고, 이 땅의 가난한 이를 망하게 하는 자들아,
이 말을 들어라! 너희는 말한다.
“언제면 초하룻날이 지나서 곡식을 내다 팔지?
언제면 안식일이 지나서 밀을 내놓지? 에파는 작게, 세켈은 크게 하고,
가짜 저울로 속이자. 힘없는 자를 돈으로 사들이고,
빈곤한 자를 신 한 켤레 값으로 사들이자. 지스러기 밀도 내다 팔자.”
주 하느님의 말씀이다. 그날에 나는 한낮에 해가 지게 하고,
대낮에 땅이 캄캄하게 하리라. 너희의 축제를 슬픔으로,
너희의 모든 노래를 애가로 바꾸리라.
나는 모든 사람이 허리에 자루옷을 두르고, 머리는 모두 대머리가 되어,
외아들을 잃은 것처럼 통곡하게 하고, 그 끝을 비통한 날로 만들리라.
보라, 그날이 온다. 주 하느님의 말씀이다. 내가 이 땅에 굶주림을 보내리라.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찾아, 이 바다에서 저 바다로 헤매고,
북쪽에서 동쪽으로 떠돌아다녀도 찾아내지 못하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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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9-13
그때에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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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는 마태오를 사도로 부르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언젠가 어느 책에서 17세기 이탈리아의 화가 카라바조의 명화
‘마태오의 소명’을 본 뒤로는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예수님의 목소리가
마태오에게는 어둠을 뚫는 한 줄기 강한 빛으로 느껴졌으리라 생각하게 됩니다.
화가는 마태오가 주님의 말씀에서 빛을 보는 순간을
무척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빛과 어둠의 날카로운 대조를 통하여
허무감에 가득 찬 한 인간이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을 너무나 절박하게
드러내고 있어서 수백 년 전의 그림이라고 믿기지 않습니다.
우울한 표정에 호사스러운 옷차림의 젊은 청년 마태오가 팔을 탁자에
괸 채 돈을 세다가 문득 고개를 드는 순간을 강렬하게 포착한 모습입니다.
이 그림에는 다음과 같은 경구가 너무나 잘 어울립니다.
“세상에 결정적 순간을 갖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세리로서 동포들을 가혹하게 착취해야 자신의 안락을
이어 갈 수 있는 삶의 방식을 마태오는 떨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이기심이나 습관성 때문이기도,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얘기를 들어 보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둡고 우울한 그의 표정에서 드러나듯이,
이러한 삶이 그에게 행복하지 않은 것은 분명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구원해 주실 분은 주님뿐이심을
카라바조의 그림은 잘 보여 줍니다.
오른쪽 구석에 서 계신 예수님의 손과 얼굴에서 뿜어 나오는 듯 한
빛은 마침내 마태오의 어둠을 비추어 주십니다.
그에게 ‘결정적 순간’이 찾아온 것입니다.
카라바조는 화가로서는 참으로 뛰어났지만, 인간적으로는
매우 격정적이었고 어두운 정열의 유혹에 자주 넘어진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그림이 보는 이에게 더욱 간절하게 다가오는 것은,
‘결정적 순간’을 여러 번 놓친 화가의 뉘우치고 한탄하는 마음이
그림에 서려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어느 평론에 공감한 적도 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우리의 일상 안에서 ‘결정적 순간’이 다양하게 선사됩니다.
그에 대한 진정한 응답은 우리의 삶을 참행복으로 이끕니다.
결정적 순간은 여러 번 주어지지만 우리는 그것을 놓치곤 합니다.
단 한 번도 그것을 붙잡지 못하였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허망할까요?
주님께서 우리의 일상에 깃든 어둠을 걷으시려고 던지시는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에 귀 기울이는 자세를 갖추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 -출처 매일 미사-
♬ I Will Follow Him(나 주님을 따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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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사즐모(댄스스포츠 사교댄스모임 - 라틴, 모던, 사교, 리듬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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