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고분

2013. 5. 28. 21:49우리 역사 바로알기

 

 

 

고구려 고분 ( 高句麗 古墳 )

     압록강 대안인 통구 일대,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대동강 유역 일대, 황해도 안악 지방에 이르기까지 분포되어 있다. 이 무덤들은 대체로 돌을 쌓고 벽면에 곱게 회를 바른 다음 벽화를 그렸는데, 부분적으로는 화강석 혹은 대리석으로 벽을 만들고 돌로 된 벽면에 직접 그린 것들도 있다. 벽화는 무덤의 복도(연도), 문, 벽, 천장 등 여러 곳에 그려져 있는데 천장에는 주로 해, 달, 별, 성좌 등 천체에 대한 것이거나 혹은 연꽃무늬 등을 그리고 도리, 벽 부분에는 여러 가지 무늬, 생활 풍속과 가상적인 동물-방위신인 사신 등을 그렸으며 복도문 어귀에는 수호신 등을 그리기도 하였다. 고구려 지배층은 영혼 불멸을 믿었고 살아서의 영광을 죽어서도 지속하기를 바랬다. 그러나 이 그림들 속에는 고구려 지배층의 생활 외에도 민중의 삶의 모습이 배어 있는 경우가 많아 당시의 생활을 반영하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인물을 그릴 때에도 주인공 귀족은 매우 크게, 시종들은 매우 작게 그리는 등 신분상의 격차를 반영하고 있다.

 

    고구려 고분 벽화는 1. 생활 풍속을 주로 그린 것, 2. 생활 풍속과 사신도를 곁들인 것, 3. 사신도를 주로 그린 것으로 대별할 수 있다. 생활 풍속을 주로 그린 것으로 안악 2 3호분, 각저총, 무용총 등이 있고, 사신도를 함께 그린 것으로는 쌍영총, 대안리 1호분이 있다. 사신도를 함께 그린 것으로는 강서대 중 소묘를 들 수 있다. 4세기부터 7세기까지 그려진 고구려 고분 벽화는 대체로 생활 풍속 위주의 그림에서 사신도 위주의 그림으로 변천하여 갔다.

 

     고구려 영역 내의 모든 지역에 걸쳐 조성되었을 터이지만, 초기의 중심지인 압록강 유역과 후기의 중심지인 대동강 유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특히 5세기 초까지 고구려의 수도였던 중국 지안[集安] 일대에는 수만기의 고구려고분이 곳곳에 널려 있다. 고구려고분은 외형상의 특징에 의해 크게 2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돌로 쌓아 만든 돌무지무덤[積石塚]이고, 다른 하나는 흙으로 덮은 봉토무덤이다. 양자 중 전자가 먼저 나타난 무덤양식으로서 대략 BC 3∼2세기경부터 만들어졌다고 추정되며, 후자는 AD 4세기경에 비로소 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먼저 돌무지무덤에 대해 살펴보면, 주로 압록강과 그 지류인 혼강(渾江), 독로강(禿魯江) 유역에 밀집되어 있으며, 그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나왔으나 대체로 랴오둥[遼東]반도에 분포하는 고조선시기의 돌무지무덤에서 찾는 견해가 유력하다. 고구려 돌무지무덤은 축조방식이나 용재(用材)의 차이에 의해 다양한 세부 구분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기단(基壇)의 유무를 기준으로 삼아 무기단 돌무지무덤과 기단식 돌무지무덤으로 대별하고 있으며, 후자는 다시 외형상의 특징을 통해 단순기단식과 계단식으로 구분되고, 또 계단식의 경우 내부 매장주체시설의 차이에 따라 돌덧널무덤[石槨墓]과 돌방무덤[石室墓]으로 세분된다. 이러한 무덤양식들은 돌무지무덤의 시기적인 변화를 반영함과 동시에, 한편으로 같은 시기에 있어서는 신분에 따른 무덤양식의 차등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가장 이른 시기에 출현한 무기단 돌무지무덤은 강가의 모래바닥에 냇돌을 사각형으로 깐 뒤 그 위에 관을 놓고 다시 냇돌을 덮은 간단한 형식의 것으로, 고구려 국가의 성립 이전인 BC 3세기경부터 조성되었다고 여겨진다. 한편 땅을 고른 후 그 위에 넙적한 판석 등으로 기단을 마련한 것이 특징인 기단식 돌무지무덤은 AD 1∼2세기경에 출현한 것으로 파악되며, 강가뿐만 아니라 산기슭에도 만들어져 있고, 이에 따라 무덤축조의 재료로서 냇돌 외에 모난 산돌도 많이 이용되었다. 그리고 계단식 돌무지무덤은 3∼5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기단 위에 덧널의 구획을 잡고서 돌로 곽벽을 쌓아 올린 뒤, 그 벽이 허물어지지 않도록 덧널의 둘레에 다시 돌을 쌓아 마치 새로운 단을 만든 것처럼 해놓고, 덧널의 윗부분을 몇 겹의 돌로 덮은 것이다. 이로 인해 무덤의 테두리를 이루는 기단 즉 첫째단과 덧널의 벽체를 이루는 둘째단, 덧널의 상층부를 이루는 셋째단이 외형상 계단 모양을 취하게 된다. 장군총과 같은 초대형 계단식 돌무지무덤에서는 계단의 숫자가 3단이 아니라 7단까지 이르기도 하며, 이 경우 시체가 묻히는 장소는 둘째단이 아니라 정상부에 가까운 곳에 조성된다. 내부구조의 측면에서 볼 때, 고구려 돌무지무덤은 거의 대부분이 매장주체부를 지하나 지면에 바로 두지 않고 돌무지부 중에 마련하는 공통된 특징을 보인다. 그리고 매장주체시설로는 흔히 돌덧널[石槨]이 설치되는데, 원래는 시체를 위로부터 묻는 구덩식[穴式]이 기본이었으나, 계단식 돌무지무덤 단계에 이르면 굴식[橫穴式]에서 볼 수 있는 널길[羨道]의 흔적이 나타나기도 하며, 장군총이나 태왕묘(太王墓) 등의 대형 계단식 돌무지무덤에서는 실제로 연도가 딸린 굴식의 돌방이 조성되어 있다. 한편 축조 재료를 살펴보면, 초기에는 주로 냇돌이나 산돌 등의 막돌을 이용한 것이 많았지만, 계단식 돌무지무덤 단계에 이르면 정성들여 다듬은 절석(切石)을 사용한 것이 출현한다. 이러한 절석 계단식 돌무지무덤은 무덤축조에 들인 공력의 측면에서 다른 무덤양식을 압도하며 장군총의 예에서 보듯이 초대형인 경우가 많아, 대체로 왕이나 최고 귀족층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상에서 고구려 돌무지무덤의 다양한 무덤양식과 그 특징을 살펴보았는데, 결국 돌무지무덤 축조방식의 발전과 분화는 신분에 따른 차별이 무덤양식에도 엄격하게 가해지는 모습, 즉 고구려 사회내의 계층분화가 심화되는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다.

 

 

     봉토무덤은 대체로 4세기경 평양지역에서 먼저 출현하였으나,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5세기 전반 이후에는 지안지역과 평양지역을 가릴 것 없이 고구려 지배층의 주된 묘제가 된 고구려 후기의 대표적 무덤양식이다. 봉토무덤의 가장 큰 특징은 매장주체시설로서 지상이나 반지하에 연도가 딸린 돌방[石室]을 만들고 그 위에 돌이 아닌 흙을 덮었다는 점인데, 이러한 축조방식은 재래의 돌무지무덤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고구려에서 봉토무덤이 어떻게 출현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북한학계의 경우 돌무지무덤으로부터 자체 발전하였다는 주장이 정설처럼 되어 있으나, 자체 발전으로만 보기에는 묘제의 변화상이 너무 심해, 랴오둥지방의 중국 한(漢)나라 돌방무덤이나 낙랑의 벽돌무덤의 영향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특히 4세기 중엽 고구려의 장악하에 있던 평양 부근에서 안악(安岳) 3호분과 같이 중국적 색채가 강하게 나타나는 벽화무덤이 봉토돌방무덤으로 축조되고 있었던 사실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봉토무덤은 4세기 이후 1세기 이상 돌무지무덤과 공존하는 과정에서 상당히 다양한 무덤양식을 파생시키는데, 예컨대 재래의 돌무지무덤에서와 같이 돌로 기단을 두른 후 흙으로 덮은 봉토돌방무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봉토무덤처럼 돌방을 지상에 설치하고 돌을 덮은 돌무지무덤, 즉 소위 봉석돌방무덤[封石石室墓]이 나타나기도 하였고, 완전한 봉토가 아닌 토석혼봉(土石混封)의 돌방무덤도 생겨났다. 그러나 이러한 묘제상의 혼효는 봉토돌방무덤의 아이디어가 고구려 사회에서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과도기적으로 나타난 것이고, 고구려 후기에 이르러서는 거의 봉토돌방무덤 일색이 되고 만다. 봉토무덤은 규모의 대소, 널방[墓室]의 숫자, 널방의 축조재료, 널방천장의 조성방식, 벽화의 유무 등을 기준으로 다양하게 구분되고 있다. 여기에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봉토무덤의 발전과정도 나타나고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피장자의 신분에 따른 무덤양식의 차이가 반영되어 있다.

 

 

     서술의 편의상 소형분과 대형분으로 대별하여 양자의 특색을 살펴보면, 먼저 소형분의 경우 정사각형 혹은 직사각형 평면을 가진 외방[單室]을 반지하에 설치한 것이 대부분인데, 흔히 할석(割石)이나 괴석(塊石)을 여러 겹 포개쌓거나 다듬지 않은 거친 판석을 세워 벽면을 조성하였다. 천장조성방식으로는 널방 상부에 1장 또는 수 장의 큰 판석을 그냥 얹어놓는 평천장식이 많이 쓰였고, 벽화와 같은 내부장식은 거의 없다. 한편 대형분은 널방을 대규모의 외방으로 조성한 것이 많지만, 시기가 올라가는 것 중에는 전후 2방 구조 혹은 앞방[前室] 좌우에 옆방[側室]이 붙는 구조를 취하는 경우가 있고, 3방구조를 보이는 경우도 있다. 널방의 벽면은 할석 등을 쌓은 후 회를 발라 다듬거나, 곱게 간 장대석(長臺石)을 이용하였으며, 여기에 벽화를 그려 장식한 경우가 많다. 옆방의 천장은 평천장도 많지만, 벽면이 위로 올라가면서 안으로 기울어 천장의 폭이 좁혀지는 궁륭식 천장과 네 벽의 상부 중앙에서 이웃한 벽의 상부 중앙으로 연결되는 삼각형의 평면 공간을 커다란 판석 등으로 덮어 네 모서리를 계속 줄여나가는 모줄임[抹角藻井]천장 등도 유행하였다. 또 대형분에는 널방 내에 널받침[棺臺]이 갖추어진 것이 상당수 있고, 널방 바닥에 배수시설이 만들어진 것이 많으며, 왕릉급의 초대형분의 경우 무덤 둘레에 잘 다듬은 돌을 깔아 묘역을 조성한 것들도 있다. 이상에서 고구려고분의 변천과정을 개관하였는데, 총괄해 볼 때 고구려고분은 다음과 같은 특색을 지니고 있다. 우선, 돌무지무덤과 봉토무덤을 막론하고 외형상 사각방대형(四角方臺形) 혹은 절두방추형(截頭方錐形)을 취한다는 점인데, 이는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나 가야의 구덩식 돌덧널무덤[穴式石槨墳]이 대부분 원형의 봉분을 가지고 있는 것과는 크게 차이나는 것이다. 그리고 매장주체부가 대부분 지상에 위치한다는 것으로, 이 점은 돌덧널이나 돌방이 고분의 정상부에 가까운 곳에 위치하는 돌무지무덤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신라와 가야 고분에서는 대형 돌무지덧널무덤을 제외하고는 매장주체시설이 대부분 땅을 파고 지하에 마련된다. 이러한 특색과 함께 고구려고분에서 가장 큰 특징으로 지적될 수 있는 것은 벽화를 그린 무덤이 대단히 많다는 점이다.

 

 

     [지안현 지역 고구려 고분군] 현재까지 발견된 벽화분은 90여 기에 이르는데, 평양 일원에서 65기, 지안 일대에서 23기가 확인되었다. 이 중 돌무지무덤인 지안 우산하(禹山下) 41호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봉토돌방무덤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고구려에서의 벽화분의 출현은 대략 4세기 무렵임을 추측 할 수 있으며, 아울러 벽화의 아이디어는 봉토무덤의 아이디어와 함께 랴오둥 지방의 벽화가 그려진 중국 돌방무덤에서 취해 온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벽화의 내용은 시기별로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초기에는 묘주(墓主)의 초상화를 중심으로 행렬도·배례도(拜禮圖) 등 그의 생전의 생활상을 주제로 한 그림이 많이 그려졌다. 4세기 후반의 안악 3호분, 5세기 초의 덕흥리(德興里)고분 등이 그 대표적인 예로서, 여기에는 사후에도 생전에서와 같은 부귀와 영화를 계속 누리기를 염원하는 계세사상(繼世思想)이 반영되어 있다. 한편 5세기 이후 고구려 지배층에 불교가 파급됨에 따라서 불교적 내세관이 벽화에도 나타났는데, 극락왕생을 염원하는 연화화생도(蓮華化生圖)나 예불도(禮佛圖)가 인물풍속도와 함께 그려지거나 아예 인물풍속도 없이 연꽃무늬만이 사방에 그려지기도 하였다. 5세기 전반의 무용총, 5세기 중엽의 장천(長川) 1호분, 산연화총(散蓮華塚) 등이 대표적인 예들이다. 이어 6세기 이후에는 도교사상의 확산으로 청룡·백호·주작·현무가 그려진 사신도(四神圖)가 유행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경향은 고구려가 멸망하는 7세기 후반까지 계속되었다.

 

     [진파리 1호분 청룡도] 중화군 진파리(眞坡里) 1호분, 지안 사신총(四神塚)을 비롯한 많은 고구려 후기의 봉토무덤이 사신도를 벽화의 주제로 하였다. 고구려의 고분벽화에는 이처럼 고구려 사회의 사상적 변화상이 잘 표현되어 있어, 문헌사료가 부족한 고구려사 연구에 귀중한 연구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한편, 고구려의 벽화무덤은 남쪽의 백제·신라·가야에도 직접간접으로 영향을 미쳐서 공주의 송산리(宋山里) 6호분이나 부여의 능산리(陵山里) 1호분, 순흥 어숙지술간묘(於宿知述干墓) 및 읍내리(邑內里) 벽화고분, 고령 고아동(古衙洞) 벽화고분 등에서도 연화문이 그려진 벽화가 발견되었다.

 

 


고구려 고분 벽화를 통해 본 사회생활의 변천

 

1). 문화의 변천
   삼국 중에서 특히 고구려에만 고분 벽화가 많다. 이것은 무덤의 형식에 의한 것이다. 고구려는 굴식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돌로 현실을 만들고 현실의 벽과 천장에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백제와 신라의 무덤은 거의 돌무지 무덤(적석총)으로 벽화를 그릴 곳이 없었다.
   전기와 중기의 벽화에는 가무와 수렵 장면이 많으며 특히 중기 벽화에서는 창고와 갑옷, 투구, 무기 그림을 많이 볼 수 있다. 이것은 4세기 이후 광개토대왕 시대 때 영토 확장으로 물자가 풍부해지고 잉여 생산물이 생겼기 떄문이다.
그러나 후기에는 수렵 장면이 드물다. 이것은 수렵이 농업 생산의 부족을 메울 필요가 없어졌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고구려 중기 이후 농업의 계속적 발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산수화의 발전 과정.
중기 무용총의 수렵도와 각저총의 씨름도에서는 손바닥 위에 주먹밥을 올려 놓은 듯한 나무와 굴곡의 파상선으로 산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으나,후기 진파리 1호 분묘의 산악도에서는 최초로 표현된 산의 주름을 볼 수 있으며 수목 현무도에서는 소나무 줄기와 가지의 곡선 등, 여태까지는 볼 수 없었던 가장 세련된 기법을 감상할 수 있다.


3). 사회 형태와 경제.

(1). 사회 형태
노예 사회 단계임을 알 수 있다. 주인의 옆에 남녀 하인들이 서 있고 때로는 무릎을 꿇고 있다. 또 주인과 하인의 크기를 다르게 해서 그렸다.

(2). 어로와 수렵.
수렵도가 많다. 집안(集安) 벽화 속의 36.8%가 수렵도이다. 이것으로 수렵이 고구려인의 생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었음을 알 수 있다.

(3). 농업.
각저총과 무용총에서 소가 마차를 끄는 장면이 있는데 우경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마선구 1호 분에는 높고 큰 창고(부경)가 있는데 당시 양식 저장량이 많았음을 알려준다. 동시에 이것은 귀족 소유의 창고임을 알려 주는데 일반 농가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크기 떄문이다.

(4). 수공업 : 농업 생산에서 발전 했음을 알 수 있다.
①. 건축: 고성, 궁전, 주택 그림이 많다. 대부분 귀족 주택이며 정자, 주방, 마굿간 등의 부속 건물이 딸려 있다.
②. 야금술: 야금 유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철촉, 금장식, 도금 마구 등으로 뛰어난 자치적 야금술과 금속 제조업 기술을 가졌었음을 알 수 있다.
③. 토기 제작: 각저총, 무용총, 삼실묘의 벽화에 그려진 그릇의 색깔과 조형으로 질그릇임이 알려졌다. 그러나 이것은 천민의 일이므로 벽화로는 남지 않았다.
④.목제품: 목가구가 많고 나무 침상과 나무 마차 바퀴도 있다.
⑤. 방직: 긴치마, 꽃무늬 저고리, 긴 바지 등이 있고 다채로운 문양이 있다.

 

 

덕흥리고분 견우와 직녀

    덕흥리 고분의 천정에 그려져 있는 그림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무덤을 죽어서 사는 공간으로 인식했다. 또 무덤의 벽과 평면은 땅으로, 천정은 하늘로 생각하여 벽에는 생전의 사는 모습을, 천정에는 천상세계를 그렸다. 그래서 죽어서 천상세계에 가려면 은하수를 건너야 하고 그러자면 견우와 직녀를 만난다고 생각했다. 이 신화는 농경사회의 일반적인 것으로 고구려의 특수한 것은 아니다.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고삐를 쥐고 소를 끄는 견우상, 그 뒤쪽에는 개를 데리고 서있는 직녀상이 그려져 있다. 견우지상, 직녀지상이라는 먹글이 씌여져 있다. 견우의 약간 일그러진 얼굴도 재미있고, 소의 얼굴이라든가 걸음걸이에 애교가 있어 해학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덕흥리고분 묘주도 및 13태수 하례도

    덕흥리 고분은 안악 3호분(동수묘) 다음으로 연대가 확실한 고분이다. 평양 서북방 대안시 덕흥리에 있다. 묵서명에 의해 오늘의 북경 지방인 신도현 출신으로 유주자사를 지냈고 불교신도이며 고구려에 와서 국소대형의 관작을 받고 호태왕(好太王) 영락(永樂) 18년(408)에 별세한 사람의 무덤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 고분의 경우도 벽화의 내용은 안악 3호분과 같으나 견우직녀, 수렵도 등이 있다. 이 사진은 주인공에게 그 예하의 13군 태수가 하례하는 장면이다. 주인공은 화려한 장방 안 평상 위에 평좌를 틀고 앉아 있다. 백라관(白羅冠)을 쓰고 갈색의 맞섶 겉옷에 넓은 검은 띠를 맸으며 오른손에는 검은 털 부채를 쥐고 왼손은 띠 앞까지 올리고 있다. 겉옷 밑에는 담녹색 옷을 입은 것이 보인다. 얼굴은 넓고 둥그스름하고 길고 진한 눈썹은 약간 높으며 가느다란 눈매에 약간 긴 콧등, 그리고 팔자형 수염을 잘 다듬고 턱수염을 길러 위풍당당한 풍모를 하고 있다.

 

 

수산리고분 교예도

    중앙에서 왼쪽에는 시종이 받쳐든 대가 굽은 박쥐 모양의 검은 양산 밑에 서서 교예를 구경하는 주인공이 있다. 주인공은 검은색 관을 쓰고 깃, 끝동, 단에 검은 선을 붙인 누런 겉옷을 입었으며 팔자 수염, 턱수염을 기른 둥근 얼굴에 미소를 짓고 교예를 구경하고 있다. 그런 주인공 바로 뒤에는 시종이 양산을 받쳐들고 있으며 그 뒤에는 검은 긴 저고리에 점무늬 바지를 입은 시녀가 뒤에서 받쳐든 검은 양산 밑에 서서 얼굴에 역시 미소를 지으면서 구경하는 주인공 부인이 그려있다. 부인은 큰 머리를 하고 풍만한 둥근 얼굴에 붉은 점을 찍어서 화장을 하였으며, 옷깃, 도련, 소매 끝에 무늬를 수놓은 붉은 선을 단 검은 긴 저고리를 입고 그 밑에 색동치마를 입고 있다.

 

 

수산리고분 주인과 하녀

    수산리 고분은 섬세하고 우수한 회화기법으로 유명하다. 평남 강서군 수산면 수산리에 위치하며 남으로 길게 뻗어내린 산줄기가 끝나는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현실 서벽 윗단에 주인공 부부가 시종, 시녀를 거느리고 교예를 구경하고 있다. 교예도는 제한된 화면에서 많은 장면을 보여주기 위하여 위에는 긴 나무에서 다리 재주를 부리는 사람을 그렸고 그 밑에 다섯개의 둥근 고리와 끝에 둥근 고리가 달린 3개의 막대기를 엇바꾸어 던지는 사람들을 그렸다. 주인공이 미소짓고 흥겹게 구경하는 장면이나 세 교예사가 열심히 곡예하는 자태 그 모두가 움직이는 듯이 표현되고 있다. 교예를 부리는 사람이 시종과 같은 크기로 그려진 것을 보니 그들의 신분을 알 만하다.

 

 

강서대묘 현무도

    우리 나라 고분 벽화에 사신도가 그려진 것이 여럿 있지만 그 중 가장 힘차고 생동감을 주며 세련된 것으로 강서대묘의 것을 꼽는다(평남 강서군 강서면 삼묘리 소재). 벽화는 돌벽에 직접 그렸는데, 현실의 남벽 입구 둘레에는 인동 초롱 무늬를 장식했고 좌우의 좁은 벽에는 봉황을 그려 주작을 나타냈다. 동벽에는 청룡, 서벽에는 백호, 북벽에는 현무를 그렸다. 사신 신앙은 대개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서 비롯되며, 한대에 와서는 군진의 방위와 기치에 이용했다가 점차 일상생활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한대의 거울과 기와류에 사신이 조각되었다. 그러나 사신사상이 가장 적극적으로 신앙된 것은 고구려에서이다. 특히 고구려 후기의 고분 벽화는 사신도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북쪽을 지키는 방위신 현무는 둥근 원으로 능숙하게 그렸는데 달리는 거북의 몸뚱이를 뱀이 미끄러질 듯이 가볍게 감고 있고 거북은 머리를 뒤로 돌려 등 위에서 뱀과 마주보고 서로 물려고 하고 있다. 부드럽고 율동적인 선조로 처리하였으나 오히려 힘차게 보이니 비록 야생동물적인 측면을 두드러지게 강조하지는 않았으나 몇 배나 더 용맹스러우며 신령스러워 보인다.

 

 

강서중묘 현무도

    주작(朱雀)은 두 날개를 부채 모양같이 펼치고 입에는 빨간 둥근 구슬(여의주)를 물었으며, 갈색, 붉은 색, 연한 갈색으로 채색된 긴 꼬리를 힘있게 위로 올렸다. 특히 힘있는 가는먹선으로 섬세하게 그린 몸털은 실물을 방불케 하며 돌벽에 그린 것이 아니라 원숙한 솜씨로 종이나 비단에 그린 것같은 착각마저 일으키게 한다.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혀 있고 살아 있는 듯하다.

 

 

사신총북벽 현무도

    고구려 전성기의 기운찬 모습의 현무도이다. 사신총은 통구에 있는 석실무덤으로 분구의 밑변 한변이 27m, 높이 8m의 고분이다. 이 현무도는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나는 현무도를 통틀어 가장 탁월한 것으로 평가되는 그림이다.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는 거북과 뱀의 모습을 섬세한 선으로 매우 실감 있게 그렸다. 색의 배합이 매우 뛰어나다.

 

 

덕흥리 고구려 고분 벽화의 일부

 

 

 

 

 

황해도 안악3호 고분

 

구려 고분벽화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화려한

황해도 안악 3호분.

 



   그러나, 이 무덤에는 발굴된 지 50여년이 지나도록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이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높이가 6미터에 달하고 길이가 무려 33미터에 이르는 안악 3호분. 안악 3호분은 고구려의 고분벽화가운데 가장 큰 무덤이다. 벽화의 내용도 고분벽화가운데 가장 다양하고 풍부해서 아마 다들 한번쯤은 본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크고 화려한 무덤에는 과연 누가 묻혔을까? 고대사 수수께끼중에 하나인 이 안악 3호분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그런데, 유독 이 안악 3호분만은 발굴 이후 50여년 동안 비단 우리나라학자뿐만 아니라 북한 나아가 일본, 중국의 학자들까지 무덤의 주인에 대한 논쟁을 계속하고 있다. 도대체, 학자들은 왜 이 무덤의 주인공에 그렇게 관심을 가지는 것일까? 안악 3호분을 둘러 싼 50년 논쟁의 진상은 무엇인지, 또 과연 진짜 무덤의 주인은 누구인지...

    안악 3호분의 발굴이 처음 이루어진 것은 1949년, 돌문을 열고 무덤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무덤의 주인공을 비롯하여 천정과 벽면 빼곡히 그려진 벽화들때문이었다. 부분적으로 훼손이 되긴 했지만 16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비교적 선명히 남아있는 벽화, 그것은 1600년전 고구려인들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 아궁이를 갖춘 전통적인 고구려식 부엌에서 시루를 얹고 음식을 만드는 여인의 모습,

부    엌옆에는 고기를 저장하는 창고가 있고 외양간 ,우물등 집구조를 비롯해 일상생활을 상세하게 묘사한 풍부한 그림들은 기록이 부족한 고구려의 생활상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로 학계의 대대적인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발굴 당시 학자들의 관심을 집중시킨 것은 또 있었다 . 보통의 고분벽화에서는 보이지 않는 글이 무덤의 한쪽 벽면에서 발견된 것이다 .

    모두 68자로 확인된 이 글은 동수라는 사람의 생애에 대해 적고 있었다 . 학자들이 주목한 것은 무엇보다 연호가 새겨진 첫 번째 구절, 영화 13년이라면 서기 357년, 고구려 고분벽화로는 드물게 무덤이 만들어진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연대가 나온 것이다 . 두 번째 구절은 동수라는 사람이 지낸 관직에 대해 열거하고 있었다 . 평동장군을 비롯해 여러지방의 태수를 지낸 인물이었다. 동수의 출신을 밝히고 있는 3번째 구절에서 동수는 고구려사람이 아니라 요동출신의 중국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이 묵서명은 주인공이 있는 방 입구를 지키는 장하독이라는 관직을 가진 인물의 머리위에 써 있었다 .

    이것은 과연 주인공을 위한 묘지명일까? 묵서명의 애매한 위치는 곧 무덤의 주인공 논쟁을 불러오게 했다. 묘지명이란 것은 주인공의 사회적 지위가 높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격식을 갖추게 돼 있다 . 안악 3호분의 묘지명의 경우 장하독 옆에 묵서로 세로로 편하게 써 둔 글. 죽은 자를 위한 묘지명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어렵다는 것.

    안악 3호분은 무덤 입구를 들어서면 앞뒤에 두 개의 방과 동서 양쪽에 하나씩의 방이 있다. 이중에 주인공이 그려져 있는 방은 서쪽방, 장하독과 묵서명은 주인공이 있는 방의 입구에 있다. 때문에 이 묵서명이 과연 방안의 주인공을 가리키는 것이냐 , 아니면 방입구에 수문장처럼 선 장하독을 가리키느냐가 논쟁의 출발점이 된 것이다 . 묵서명이 누구를 가리키느냐에 따라 무덤의 주인이 동수인지, 아닌지가 밝혀지기 때문이다 .

    무덤의 주인이 중요한 이유는 묵서명에 적혀 있는 연대 357년 때문이다. 안악 3호분의 곳곳에는 불교의 도입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으로 알려진 연꽃무늬가 그려져 있다 . 고구려에 불교가 처음 도입된 것은 소수림왕때인 372 년, 그런데, 그보다 15년이나 앞서 무덤안에 연꽃무늬가 그려져 있는 것이다 .

    고구려 고분벽화의 기원도 반세기 이상이나 빨라지게 된다 . 이제까지 고분에 벽화가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4세기말을 전후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 그러나, 이 무덤의 주인에 따라 그 기원이 반세기정도 앞당겨질 수도 있는 것이다 .



안악 3호분, 이 무덤의 주인은 과연 누구일까 ?


    먼저, 묵서명에 나타난 동수라는 인물부터 알아보기로 하자. 4세기초 고구려는 활발한 대외정책을 펼치면서 요동진출을 꾀하고 있었다 . 이때, 북중국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치열하게 패권을 다투던 나라는 선비족 모용씨가 세운 전연, 이 무렵, 전연의 수도 용성에서는 큰 사건이 일어난다. 왕위승계를 둘러싸고 선비족 모용씨 형제들 사이에 왕위쟁탈전이 벌어진 것이다 . 이 사건을 계기로 일단의 무리들이 고구려로 망명을 한다 . 고구려는 적대국인 선비족의 망명객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

   < 자치통감> 은 이 사건을 자세히 적고 있다. 모용유,모용치,곽충등이 동쪽으로 도망갔는데, 동수와 곽충만은 고구려로 도망갔다는 것이다. 자치통감에 나오는 동수와 안악 3호분의 동수는 동일인물일까 ?

    내란에서 패한 동수가 고구려로 망명했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는데 이것이 서기 336년이다. 그리고 이후에 어떠한 사서에서도 동수에 대한 기록은 없다. 21년이 지난 후에 357년에 안악에서 동수의 묘지명이 나온다. 즉, 묵서명에 나타난 동수와 자치통감의 동수는 동일인물로 선비족 출신의 망명객이라는 것이다 . 그렇다면 이 무덤은 망명객 동수의 무덤인가?

    안악 3호분의 전체구조도 중국식과 유사하다고 한다 . 좌우대칭으로 여러개의 방을 갖추고 기둥이 있고 벽화가 그려진 점들이 한나라 영향을 받은 전통적인 중국양식이라는 것이다. 안악 3호분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를 계속해 오고 있는 공석구 교수. 안악 3호분의 주인이 중국인 망명객 동수라는 근거로 또한 주인공 주변의 인물들을 든다. 안악 3호분의 각 인물들 옆에는 붉은 글씨로 관직명이 적혀 있다.

    주인공을 둘러싸고 있는 인물들에게도 일일이 관직명을 적어두고 있다 . 바로 이 관직을 중국의 관직체계를 적고있는 <진서직관지>를 기준으로 분석해보면 안악 3호분의 주인이 동수임이 더욱 확실히 드러난다고 남한학자들은 주장한다 .

    즉, 묵서명에 나타난 동수의 관직 태수는 장하독보다 더 높은 것으로 방안에 있는 주인공을 가리키는 것이고, 곧 이 무덤의 주인이 동수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주인공과 보좌하는 인물들과의 관직관계는 어떨까? 안악 3호분의 관직체계를 중심으로 분석을 해보면 이 화려한 무덤의 주인은 바로 묵서명에 나타난대로 중국인 망명객 동수라는 것이다.

    "이 무덤의 주인인 이 사람은 동수다." 이것이 중국, 일본을 비롯한 남한학계 대부분의 주장이다. 하지만, 북한학자들의 입장은 다르다. 북한 학자들은 일관되게 무덤의 주인이 동수가 아니라 고구려왕이라고 주장을 한다.

    북한 학자들이 무덤의 주인을 고구려왕이라고 주장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이 묵서명 때문이다. 우선 묵서명의 위치가 아무래도 묘지명으로 보기에는 뭔가 석연찮다는 것이다. 묵서명이 주인공의 묘지명이라면 무덤의 가장 반듯한 공간에 격식을 갖추어서 쓰는 것이 상식인데, 주인공 가까이에 이렇게 빈 공간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왜 하필 문밖에 장하독이라는 인물의 머리위에 써두었느냐는 것이다. 그것도 묵서명을 자세히 보면 애써 장하독이라는 인물에 맞추어 쓸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글자체도 이 크고 화려한 무덤의 주인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조잡하다는 것이 북한학자들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주인공의 묘지명이 아니라면 이건 대체 뭘까? 묘지명이 아니라 바로 밑에 있는 장하독이라는 사람에 대한 설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69세 훙관" 일반적으로는 이것을 "관리를 지내다 죽었다" 로 해석을 하는데, 이것은 한문 어법상 맞지 않는다고 한다. "69세 홍" 만으로 69세에 죽었다는 문장은 끝이 나는데, 이미 완결된 문장의 끝에 어법에 맞지 않게 형용사 "관"이 붙어있는 꼴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관"을 이 밑에 그려져 있는 인물 "장하독"을 꾸미는 말로 본다. 그러면, "69세에 죽은 관리 장하독" 이 돼서 이 묵서명의 동수는 바로 밑에 그려진 장하독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무덤의 주인은 따로 있다는 이야기다. 그것은 바로 고구려의 왕이라는 것이다.

    동수묘를 부인하는 새로운 증거로 두 차례 추가조사의 결과를 들고 있다. 이 조사에서 맞은 편에 있는 인물 위에서도 20여자의 글자가 확인됐다는 것이다. 주인공이 있는 방앞에 수문장격으로 서 있는 두 인물위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 글자, 그것은 각기 그 인물들을 설명하는 글일뿐 무덤 주인공의 묘지명은 아니라는 것이다. 왕릉설의 입장에서 본다면 관직체계도 달리 해석된다.

    즉, 안악 3호분의 관직과 진서 직관지의 관직은 엄격하게 보면 약간씩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이는 중국의 관직체계를 받아들여 고구려식으로 정비해가던 중간에 나타난 고구려식의 관직이라는 것이다. 무덤을 왕릉으로 보게 하는 또 다른 요소는 그 규모다. 지방장관에 불과한 태수의 것으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크다는 것이다. 널길을 따라 들어가면 주인공이 있는 서쪽방을 비롯해 동서양쪽으로 방이 있고 여러개의 큰 기둥이 서 있는 무덤안은 마치 지하궁전을 연상시키듯 화려하고 장엄하다.

    규모면에서 또 하나 시선을 끄는 것은 대행렬도. 동쪽은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 있는 반면, 북쪽은 낡아 흐려진 이 행렬도는 높이 2미터 길이 10미터에 달하는 벽면을 따라 빼곡이 그려져 있다. 안악 3호분의 회랑에는 250여명으로 확인된 행렬도가 확인되고 있다. 전반부의 것만 그런 것이고, 행렬도에 참가한 인원을 전부 고려하면 참가한 인원은 약 5백명정도, 그런데, 중국에서 행렬도가 나오는 경우가 많지만, 200명이 채 안되고 있다.

    행렬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 수 있게 하는 것중의 하나가 바로 취악대다. 행렬도의 제일 앞에서 장엄한 행렬의 흥을 돋우려는 듯 앞서가는 취악대에는 크고 작은 북과 뿔피리,나팔등 각종의 악기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연주자들의 규모가 무려 200여명에 달한다는 것이다 .

    삼국사기에 보면, 김유신이 죽었을 때 왕이 내린 고취악대의 기록이 나타나는데 그 인원이 100여명 정도였다고 적고 있는 걸보면 안악 3호분의 규모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 김유신은 왕에 버금가는 인물. 그의 장례때 동원된 고취악대의 수가 100명정도, 그런 면에서 이런 2백명이상의 고취악대를 거느리고 행진을 할 수 있는 인물은 고구려의 왕을 두고는 달리 생각할 수 없다는 게 북한측의 주장 왕릉임을 더욱 뒷받침하는 것은 수레를 타고 가는 주인공의 앞에서 한 인물이 들고 가는 깃발에 새겨진 세 글자. "성상번" 이라고 한다.

    성왕이나 성상은 왕을 표시하고 위대한 왕을 나타내는 것 집안에 모두루총 묘지에도 추모성왕, 호태성왕을 나타낸다. 태수라든지 지방장관에 성상은 붙힐 수가 없다. 옷도 문제가 있는 것이, 옷고름으로 처리를 하거나 깃과 소매 부분을 화려한 장식단추로 장식한 복식형태는 ~~~고분 벽화가 만들어진 시대의 중국의 양진남북조시대와 이전시대에서 거의 보이지 않는 복식형태이다.

    허리띠를 묶는 방법에서도 중국의 복식과는 차이가 난다. 이 주인공의 경우는 폭이 좁은 허리띠를 약간 오른편으로 묶어내린 반면 중국의 복식은 어느시대, 어느 계층을 막론하고 폭이 아주 넓은 허리띠를 사용했고, 항상 중앙부분에서 묶어내렸다고 한다.

    이같은 특색들은 같은 시대의 중국의 것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고구려 고유의 복식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주인공을 왕으로 보게 하는 결정적인 요소는 주인공이 머리에 쓰고 있는 하얀색의 덧관, 박선희교수는 이것이 수서고구려전에 등장하는 고구려왕만이 썼다는 백라관이라는 것이다.

    주인공이 쓴 관이 백라관일 것으로 추정 , 이마와 책에 부분이 금으로 테가 둘러있고 그 위에 흰색의 곱고 섬세하게 짜여진 라로 만든 덧관이 씌어져 있다. 관의 끈이 턱밑에서 묶어져서 가슴부분까지 내려와서 화려한 장식으로 마무리되고 있는데 ,중국은 황제의 경우도 턱에서 묶어내린 길이가 매우 짧다. 특히 무관의 경우 늘어뜨리는 길이를 5촌, 즉 약 11.5센치정도로 규정을 했다. 이런 것은 주인공이 쓴 관을 중국의 무관으로 볼 수 없게 하고 백라관으로 해석하게 한다. 결이 아주 고운 비단종류중의 하나인 "라"를 이용해 만들었다는 독특한 형태의 백라관,

    머리에는 바로 이 백라관을 쓰고 휘장이 쳐져있는 화려한 방에 위엄있는 자세로 앉아 있는 인물, 그는 바로 고구려의 왕이라는 것이다. 무덤의 주인공은 고구려 왕일까? 아니면 중국인 망명객 동수일까? 이 두 주장은 지금까지도 아주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안악 3호분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황해도 안악군 유순리, 이곳은 바로 미천왕이 점령하기전 낙랑, 대방세력의 중심지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민족출신으로 고구려로 망명한 동수가 어떻게 이곳에 이렇게 거대한 무덤을 가질 수 있었을까? 336년에 고구려로 망명해 온 동수는 고구려로 보면 아주 중국의 유력인물, 고구려에서는 동수를 낙랑, 대방군이 있었던 그 지역에 보냈다. 그 지역에는 313, 314 멸망이후 계속 중국인들이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미천왕의 점령이후에도 이곳에는 중국인 세력들이 여전히 남아있었기때문에 고구려는 동수라는 중국인을 내세워 이 지역을 간접통치했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이 오랫동안 남아있었다는 증거는 이곳 평안도, 황해도 일대에 중국의 전통적인 무덤양식인 전축분들이 상당히 많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전축분의 축조에 사용된 연호가 새겨진 벽돌을 분석해보면 상당히 늦은 5세기 초엽까지 전축분이 이 지역에 지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로 볼 때 미천왕이 이 지역을 점령한 4세기초반 이후 상당기간동안 고구려는 이 지역을 직접 지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구려가 이 지역을 직접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쯤일까 ? 고구려 고분가운데 유일하게 주인이 확실히 밝혀진 덕흥리고분, 안악 3호분보다 50년 정도 늦게 조성된 이 무덤의 묵서명이 그 단서를 제공한다. 주인공의 머리위에 반듯하게 써져있는 묵서명을 보면 중국연호대신 영락 18년이라는 광개토대왕의 연호가 나타나고 안악 3호분이 중국관직 일색인반면, 이곳에서는 '소대형'이라는 고구려 고유의 관직명도 나타난다. 50년동안에 일어난 이 변화를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안악 3호분과 덕흥리고분 약 50년 차이, 안악 3호분은 동진의 기년을 사용하고 있다. 거기에 나타난 관직들은 모두 중국의 관직 일색, 반면 덕흥리고분은 광개토왕이 제정한 영락이라고 연호를 사용, 관직을 보면 중국의 관직과 동시에 국소대형이라는 고구려관직이 나타난다. 이것은 상당한 차이... 그 배경은 50년동안에 낙랑대방지역을 어떻게 다스렸느냐,하는 지배방식의 차이에서 나타난다. 그것은 고구려가 동수라는 인물을 내세워 간접지배를 한 것에서 이제는 직접 지배로 전환하고 있다는 의미.

    그러나, 왕릉설에서 보면 이 지역에 대한 해석은 완전히 달라진다. 미천왕이 이 지역을 점령하자마자 곧바로 직접 통치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전축분에 대한 해석도 달리한다. 우선 전축분은 한족 고유의 무덤양식인 반면, 안악 3호분은 무덤의 양식이 다른 벽화고분으로 선비족 출신인 동수가 기존의 한족을 다스리는 인물로 나서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황해도에 있는 무덤들은 주로 전축분이다 . 그걸 기준으로 중국사람들이 거기 살고 있었다- 이런 말인데 동수묘라는 얘기는 안악 3호분은 벽화고분이다. 무덤양식이 다르다, 무덤양식이 다르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인데... 실제로 동수는 전연에서 왔으니까 선비족이고 낙랑대방지역사람들은 한족이다. 한족하고 선비족은 다르다. 다른 세력이 와서 한족을 대표하는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말이 안맞는다.

    직접통치를 추측하게 하는 또 하나의 증거는 고구려가 일찍부터 남진을 모색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낙랑, 대방을 공격하기 앞서 미천왕은 311년, 서안평을 공격한다. 서안평은 중국 본토와 낙랑 대방의 연결통로로 낙랑의 세력들을 먼저 중국과 단절시키기 위해서였다.

    서안평 공격에 이어 313년에는 낙랑을 공격한다. 기록에는 남녀 이천여명을 사로잡았다는 내용이 보이는데, 상당히 많은 중국세력들이 희생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같은 해 자치통감의 기록을 보면 요동 출신의 장통이 낙랑의 왕준을 설득하여 천여가를 이끌고 중국으로 갔다고 적혀 있다. 이런 기록들로 볼 때 미천왕의 낙랑대방 점령이후 이곳에 남은 중국세력들은 아주 미미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일반 백성 천가를 끌고가. 4~5명으로 본다면 4,5천명이 되는 것. 그것은 협력한 조선족도 있을지 모르지만, 대체로 중국사람. 두차례의 이동으로 봐서 재지세력중에 중국계는 거의 없지 않았는가, 간접통치를 했다고 볼 수 없는 또 하나의 기록은 삼국사기에 나타난 천도기록이다. 343년, 고국원왕은 수도를 평양 동황성으로 옮긴 것으로 나타난다.

     평양천도와 함께 369년, 고구려후방 깊숙이 황해도 백천 일대에서 백제와의 사이에 벌어졌던 첫 전투는 이미 낙랑대방고지가 고구려의 완전지배하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왕릉설을 따르게 된다면 바로 이 지역 황해도, 평안도 일대를 고구려가 313년 미천왕의 점령 이후 곧바로 강력하게 직접 통치를 했다는 얘기가 되고, 동수설을 따르게 된다면 오랫동안 중국인 세력집단이 그대로 이 땅에 남아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80년대까지만해도 남한은 동수설을, 북한은 왕릉설을 주장하는 것으로 뚜렷이 나뉘어졌다는 것이다. 북한의 일관된 주장에 대해 남한에서는 고구려의 정통성을 계승한 것으로 자처하는 북한이 일찍부터 고구려의 힘이 강력했었다는 것을 내세우기위해 확대 해석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받아들였던 것이 사실이다.

    역사에 대한 해석이 일종의 이데올르기의 대립으로 비쳐지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자료에 대한 접근이 수월해지면서 이제는 남한 학자들 가운데서도 왕릉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안악 3호분이 왕릉이라면 또 하나 궁금한 것이 있다. 그것은 과연 어느 왕이냐, 하는 것이다. 이 의문을 푼다면 주인공의 실체를 밝히는데 좀 더 다가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미천왕 ( 300 ~ 331 ) 동수 묘지명 357년 . 고국원왕 ( 331 ~ 371 ) 일단 기준이 되는 것은 동수의 묘지명으로 연대는 357년이다. 이 해를 전후하여 죽은 왕은 미천왕과 고국원왕 두사람 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둘 중의 누구를 안악 3호분의 주인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일까? 먼저 미천왕부터 알아보자.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기전 4백여년간 도읍지였던 중국 길림성 집안시. -가로수길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면 수많은 고구려 고분들을 만날 수 있다. 12000여기의 무덤이 모여있는 통구고분. 전통적으로 왕의 무덤을 수도 주변에 조성한 관례에 따르면 이 일대에는 왕의 무덤도 상당수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무덤들은 대부분 도굴이 돼 주인을 알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 다만 광개토대왕의 무덤으로 알려진 태왕릉과 장수왕의 무덤으로 알려진 장군총 정도가 주인이 알려진 무덤들일 뿐이다.

    그렇다면 미천왕의 무덤도 당연히 수도인 집안현 근처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왜 황해도에 있는 안악 3호분이 미천왕의 능이라고 주장하는 것일까?

    4세기초 북중국의 사정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요동과 요서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 온 전연은 중원으로의 진출을 꿈꾼다. 그러나, 그러기위해서는 먼저 배후에 있는 고구려를 쳐야했다. 342년, 전연은 드디어 고구려 요동진출의 전통적 통로였던 남북로를 통해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한다.

    이때 고구려 군사 전략상 최대의 실수가 벌어진다. 북로는 널찍하고 쳐들어오기가 좋은 곳이고 남로는 계곡이 좁고 힘든 곳 그러기 때문에 힘든 곳에 배치를 많이 않고 쉬운 데다 많은 군사를 배치할것이다. 대부분 그렇게 했다. 적들이 거꾸로 이용을 해 가지고 남로로 쳐들어 온 것이다. 고구려측에서는 쉬운 걸로 올 걸로 생각하고 북쪽에 대군을 배치하고 왕이 아주 약한 군사를 데리고 험악한 남로를 막았다. 그런데 대군이 그쪽으로 와 뚫려버리는 바람에 왕도까지 파죽지세로 몰려드는. 고구려의 전략을 역으로 이용한 전연은 단숨에 고구려의 수도를 장악했다. 그리고, 전대미문의 치욕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왕이 도망을 가니까 거기에서 사람을 5만명을 잡아간다. 금은보화 전부 가져가고, 왕의 어머니를 잡아가고 ..... 전대미문이고 역사에 없는 사건이 뭐냐면 왕의 아버지인 미천왕릉을 파가지고 시체를 파가지고 갑니다. 바로 이만큼 고구려로서는 치욕적인 전쟁이었죠. 아버지의 시신을 빼앗기는 수모를 당한 고국원왕은 이때부터 전략상 대결보다 화해를 모색한다.

    결국 이듬해인 343년 2월, 고국원왕은 동생을 전연에 보내 진귀한 물건을 바친 뒤 드디어 아버지 미천왕의 시신을 찾아온다. 그리고 바로 그해 7월, 고국원왕은 수도를 평양 동황성으로 옮긴다. 시신반환과 평양천도, 이 두가지 사건이 미천왕설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거처를 평양으로 옮긴다 . 여기에서 두개의 의견이 나온다 . 그 자리에서 묻힐수도 있는데, 일부 북한학자들은 그때 동황성으로 옮길 때 같이 시신을 옮겨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즉, 342년 전연에게 잡혀갔던 왕의 시신을 이듬해 2월 돌려받았고 7월에 평양으로 천도를 하게 되는데, 바로 새로운 수도 평양에서 가까운 안악지방에 왕의 무덤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미천왕이라면 한가지 의문이 있다. 동수는 분명히 미천왕이 죽고 난 뒤에 망명을 해 온 인물인데 왜 이 무덤 입구에 서 있는 것일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을 한다. 동수가 망명을 온 2년뒤 전연으로부터 미천왕의 시신을 돌려받게 된다. 바로 이때 동수가 많은 공을 세웠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12년뒤 전연에게 잡혀갔던 왕모가 돌아올 때도 역시 큰 기여를 했기 때문에 이를 기리기 위해서 동수의 묵서명을 왕의 무덤에 써둔 것이라고 한다. 그럴듯한 해석이다.

    그런데, 그렇게 봐도 풀리지 않는 것이 있다. 과연 동수가 이 무덤안에 그려진 시기가 언제인가 하는 것이다. 미천왕의 시신을 찾아온 것이 343년. 동수가 죽은 것은 357년이다. 뭔가 이상하지 않는가? 미천왕의 시신을 찾아온 것이 343년이라면 무덤을 다시 만든 것도 그 무렵일 건데, 그런데, 동수가 죽은 것은 그로부터 무려 15년이나 뒤다.

    그렇다면, 동수는 언제 무덤안에 그려진 것일까? 이건 처음 왕의 무덤을 만들때 동수의 그림을 미리 그려놓고 그 15년뒤 동수가 죽었을 때 무덤을 다시 열고 동수의 묵서명을 적었다는 것인데... 글쎄, 신하의 묵서명을 기록하기위해 왕의 무덤을 다시 연다. 이게 가능한 일일까? 미천왕설은 바로 이 부분에 대해 시원스런 답변을 못해 준다. 그렇다면, 이 무덤의 주인공은 한사람밖에 없다. 바로 고국원왕이다. 동수가 고구려로 망명을 온 것도 고국원왕때이고, 세상을 떠날때도 고국원왕 재위중이었다. 즉, 동수는 고국원왕의 재위기간중 22년동안 고구려에 살았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발굴 초창기에도 잠시 제기됐던 고국원왕설, 지금껏 묻혀 있다가 최근에 다시 강력하게 부활하고 있는 고국원왕설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2000년, 11월 일본에서는 남북의 고대사 역사학자들이 함께 참여한 심포지엄이 열렸다 . 이 자리에서 북한 사회과학원 소속 석광준교수는 황해도 신원군 장수산 일대에서 고구려 제 2의 수도였던 남평양 유적지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북한이 발표한 남평양 유적지는 안악지방보다 더 후방인 황해남도 신원군 장수산 일대, 약 10.5km에 달하는 험준한 산의 능선을 따라 쌓은 장수산성은 전형적인 고구려식 산성이다. 장수산성의 앞쪽에서는 경주나 부여에 맞먹는 거대한 도시유적과 함께 313년이라는 제작연대가 새겨진 벽돌 왕궁의 건설때만 사용하는 암치와 막새,회랑, 행궁터등 대규모의 도시유적과 유물이 발견됐다고 한다. 이 유적을 북한은 고구려가 남방정책의 기지로 사용키위해 건설한 남평양이라고 주장한다. 장수산성 근방에 이미 4세기에 남평양이라는 거점을 마련했다는 것은 한반도에서 고구려가 일찍이 세력을 다투고 있었고 백제와 겨루고 있었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고고학적으로 증명해 주는 것.

    남평양은 고국원왕의 죽음과도 관련이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371년, 백제와의 전투에서 고국원왕이 사망한 지역을 평양성이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북한학자들은 이 평양이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남평양이라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들고 있는 것이 삼국사기 지리지 잡지의 기사, 이곳에 보면, 근초고왕은 고구려의 남평양을 빼앗아 도읍으로 삼았다고 적고 있다. 북한학자들은 이 두 기록이 바로 역사적으로 일찍이 남평양이 존재했음을 알려주는 것이고, 그 남평양이 최근에 대규모 도시유적이 발굴된 장수산성일대라는 것이다.

    상당히 근거가 있다. 고국원왕이 전사한 전투는 남평양에서 이루어졌다. 지리지에 근초고왕이 남평양을 점령했다는 기사 나온다. 기본적인 뒷받침도 되고 그래서 꼭 들어맞는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얘기하는 대동강유역의 평양까지 밀려 올라가서 거기서 전사한게 아니고 황해도의 남부지방인 장수산성 쪽에서 전사한 거다. 그건 본래의 백제하고 대방이나 고구려의 근거가 됐던 것은 예성강쯤으로 생각하는데, 예성강쪽에서 장수산성이 있는 곳까지 밀려서 올라간 거다.

    북한의 주장대로 고구려와 백제의 전투지가 평양이 아니라 남평양이라면, 이것은 그동안 고국원왕설의 최대 약점이었던 부분을 해결해주는 중요한 사실이다. 371년에 고국원왕이 평양에서 죽었다. 그러면 반드시 평양보다 후방인 뒤에 무덤이 있어야지 ,평양의 앞에는 전선인데 여기는 무덤이 있을수 없다. 남한학자들이 생각하는 논리였다.

    장수산성은 평양보다 훨씬 남쪽인 황해도다. 황해도에 장수산성이 바로 남평야이다,이게 밝혀짐으로 해서 만약 남평양에서 죽었다면 거기보다 약 100리쯤 후방인 안악에 묻힌다는 것이 당위성있는 얘기다. 때문에 장수산성유적이 왕릉설을 뒷받침해주는 중요한 근거다.

    만약 북한의 주장대로 안악 3호분이 고국원왕의 무덤이 맞다면 그동안 무덤에 대해 가졌던 의문들도 상당부분 풀리게 된다. 불교의 도입연대와 맞지 않았던 연꽃무늬도 해석이 가능하다 . 왕이 사망한 371년이후 무덤이 조성되었을 것임으로 불교의 도입연대와 맞아지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묵서명 가운데 동수의 출신지를 밝히고 있는 부분을 분석해보면 무덤이 만들어진 시기를 추측할 수 있다. 묵서명에서 동수는 유주군 소속의 요동 평곽 출신이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무덤이 조영될 시기를 전후해 요동군은 대부분 평주에 속해 있었고, 유주에 속했던 기간은 370년에서 380년사이였다. 바로 고국원왕의 사망연대와 일치하는 시기다.

    불교가 들어온 뒤 연꽃무늬가 그려질 수 있고, 또 묵서명중에 요동이 유주에 속했을때를 보면..고국원왕이다 . 고구려 벽화고분중에 최대규모인 안악 3호분. 이것은 본격적인 남진정책을 시도하면서 평양으로 천도를 하고 백제와의 평양성 전투에서 사망한 고구려의 제 16대왕, 고국원왕의 무덤이라는 것이다. 북한이 일관되게 주장하는 왕릉설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북한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동수설이 아직까지는 우세한 편이다.

    그러나, 황해도 신원군 일대에 고구려가 일찍부터 제 2의 수도를 건설했다....는 북한의 이 주장이 맞다면 , 이것은 아주 대단한 것이다. 50여년을 끌어오던 숙제인 안악 3호분의 주인공 문제가 풀릴 뿐만 아니라 고구려 역사해석에 있어서도 아주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의 이 주장은 아직까지 객관적 타당성을 확보하고 있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어떠한 역사 해석이 객관적 타당성을 확보하고 나아가 세계적인 보편성을 가지려면 그 판단 근거가 되는 정보들이 충분히 공개가 돼야한다. 뿐만 아니라 현장답사도 함께 이루어져야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