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고구려벽화의 북극성 별자리

2014. 10. 12. 19:02들꽃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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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벽화의 북극성 별자리

    고구려의 고분벽화에 수많은 별자리가 그려져 있다는 것은 이미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직 고구려인들이 묘사한 북극성 별자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연구는 없었습니다. 고구려, 고려, 중국, 일본 등 여러 천문도를
비교연구한 결과 고구려인들은 3개의 별로 북극성자리를 표현한 듯합니다. 이는
중국의 경우 북극5성좌로 묘사하는 것과 다른 점입니다. 그외에도 중국의 별자리
방식과 같지 않은 점들이 적지 않습니다.
<고구려연구 5집(1998)>에 실린 논문입니다만, 우리의 별자리에 관심이 많으실
분들을 위하여 논문파일을 공개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림파일은 아래한글에
삽입하였습니다. 고구려의 별자리 동정에 대한 많은 논의가 개진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HITEL ID; POWERKIM /INTERNET ADD.; POWRMOON.NETIAN.COM>

{고구려연구} 5집 (고구려 연구회, 1998.6)
고구려 고분벽화의 북극성 별자리에 관한 연구

서울대 강사 金 一 權
{{{{
1. 고구려의 밤하늘과 북극의 세차 운동
2. 중국·일본의 북극성 별자리와 [天樞·四輔] 형식
3. 고구려와 고려의 [북극3성·북두칠성] 형식
4. 기토라고분 천문도와 고구려·중국과의 관계
5. 결론
}}}}

{{}}1. 고구려의 밤하늘과 북극의 세차 운동

   본 논문은 고구려의 고분벽화에 표현된 여러가지 별자리그림 중에서 북극성을 지칭하는
것은 과연 어떠한 그림인가를 검토하는 데 주된 목적이 있다. 이 문제 제기는 중국의 中宮
표현 방식에 보이는 것과 같은 형식이 고구려의 별자리그림에서는 찾기가 어렵다는 사실에
바탕한다. 이 문제는 또한 현전하는 고구려의 별자리그림이 나중 조선초의 천상열차분야지
도와 같은 全天 天文圖 형식을 취하지 않고 다만 무덤의 천정이나 벽면에 그려진 사정과도
관계 있다. 전천 천문도 형식에서는 북극성 또는 그 주변 별자리가 쉽게 파악되지만, 그렇
지 않은 고구려 고분벽화의 성수도 연구에서 아직까지 북극성을 지적한 논문은 없다.
{{ ) 단 진파리4호분에서 북극성 별자리로 천극4성을 말한 경우가 있지만, 이것은 전천 천문도 형식을 취
한 것이다. :리준걸, [28수를 다 그린 진파리 4호 무덤] ({역사과학} 1981-3, pp.46-48) ;김일권, [고구
려 고분벽화의 별자리그림 考定]({白山學報} 47호, 백산학회, 1996ㄱ, pp.51-106)}}

   이 문제는 고구려의 천문 이해 방식을 밝히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의 하나로 기능할 수
있으며, 나아가 고려, 조선과의 연계성 문제 또는 일본 다까마쓰 고분 및 기토라 고분 별자
리그림과의 비교 연구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 문제를 들여다보는 데에는 먼저 북극성이 고정된 별자리가 아니라 시대에 따라 변천
한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북극성의 이동 현상은 지구의 歲次 운동으로 설명된다.
{{ 그림 지구의 歲次 운동 (이태형, 1989)}}

   세차운동은 지구가 완전한 球形이 아니라 적도 부근이 약간 부풀은 회전타원체 운동을 
함으로써 일어나는 천문학적인 현상이다. 비유하자면 팽이를 돌릴 때 팽이의 중심축이 
흔들리면서 도는 것과 같이, 지구의 중심축도 그 흔들리는 정도가 23.5 기울어진 채 
회전하기 때문에, 지구의 자전축이 가리키는 천구상의 北極点도 不動의 고정된 점이 아니라 
25,800년을 주기로 1회전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따라 赤道와 黃道의 교점이 되는 春分點이 
1년에 약 50.3″씩 서쪽으로 이동하게 된다.(그림 1){{ )이태형, {재미있는 별자리 여행}(김영사, 1989), p.29}}


이같이 자리관측에서 去極度(북극점에서부터 어떤 별까지의 거리)의 원점이 되는 
북극점(North Point, 하늘의 북극, 지구 자전축이 가리키는 천구상의 지점)이 조금씩 천이한다.
北極이 恒常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한다는 사실, 곧 歲差라는 현상은 서양에서 그리이스
의 힙파르코스(Hipparchos, B.C.190-125)가 B.C. 140년경에, 중국에서는 4세기 전반의 사람
인 虞喜(東晋)에 의해 처음 지적된 것이다. 이 세차운동을 曆法에 비로소 도입한 것은 劉宋
의 조충지(祖庶之)에 의한 大明曆(510년 반포, 80년간 시행)이라고 한다.
{{ ) 이은성, {역법의 원리분석}(정음사, 1985) p.211 ;大崎正次, {中國の星座の歷史}(雄山閣출판주식회사,
東京, 1987), p.291}}

   그리고 북극점과 북극성은 비슷하지만 다른 개념이다. 북극성이란 북극점을 가리키는 것
이 아니라 북극점에 가장 가까운 별 하나를 지명하여 붙인 것이므로, 북극점이 변하게 되면
북극성에 해당하는 별이 달라진다. 예컨대, 현재의 北極星은 작은곰자리의 α별인데, 하늘의
북극에서 약 1도 정도 벗어나 있으며, 서기 2100년에는 0.5도 까지 가까워지게 된다. 그 후로는
점점 멀어져 가고, 약 12,000년 후에는 거문고자리(琴座)의 α星(織女星)이 북극성이 된다.
(그림 2)

   이상과 같이, 북극성은 고정된 별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변천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북극
성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북극점이 이동하는 것인데, 우리의 관찰자 기준으로 보아 북극
성이 변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마치 지구가 도는 데도 태양이 움직인다고 하는 것처럼. 불
교식으로 보자면, 주변 세상은 가만 있고 자신이 변하는 데도 우리는 흔히 세상이 변한다고
말들한다.

   이같은 천문학적 변화 때문에 고구려인들이 바라본 밤하늘의 모습은 우리가 보는 것과
완전히 똑같지가 않다. 그런데 하늘이 변한 것이 아니라 지구가 운동을 하였고 관찰자의 시
대가 변한 것임도 또한 알게 된다. 고구려의 전성기라 하는 광개토호태왕·장수왕 시절과
지금과는 대략 1500년간의 시차가 있다. 이 숫자가 인류 역사의 시간표에서 보면 작은 크기
이지만, 북극성의 변화를 보여주기에는 의미가 있는 값이다.

   그러면 한자 문화권의 기준이 되는 중국 천문학사에서의 변화 과정을 살펴보자. 중국식
천문학에서 북극성에 해당하는 별의 명칭은 시대적으로 크게 세 번의 변화를 거친다.(帝星
→ 天樞星 → 鉤陳大星) 다음 도표 중에서 紫微垣의 左樞星과 右樞星은 고인돌 별자리그림
등 선사시대 성수도 연구에 참고가 되는 것들이며, 중국 문헌 전통에서는 북극좌의 帝星부
터 의미를 가진다.
{{{{
}}{{ 북극점에 최근접하는 당시의 별
}}{{밝기
}}{{북극거리
}}{{赤緯
}}{{최근접 시기
}}{{ 참고시기
}}{{1
}}{{紫微東垣의 左樞星
}}{{용자리Dra ι Eldsich
}}{{3.29
}}{{ 5.10
}}{{84.90
}}{{B.C. 4710년
}}{{선사시대
}}{{2
}}{{紫微西垣의 右樞星
}}{{용자리Dra α Thuban
}}{{3.65
}}{{ 0.10
}}{{89.90
}}{{B.C. 2800년
}}{{고대 이집트
}}{{3
}}{{ 北極座의 帝星
}}{{작은곰UMi β Kochab
}}{{2.08
}}{{ 6.53
}}{{83.47
}}{{B.C. 1060년
}}{{周代 初期
}}{{4
}}{{北極座의 天樞星
}}{{기린Cam GC17443
}}{{5.28
}}{{ 0.55
}}{{89.45
}}{{A.D. 800년
}}{{唐代 중엽
}}{{5
}}{{鉤陳座의 鉤陳大星
}}{{작은곰UMi α Polaris
}}{{2.02
}}{{ 0.46
}}{{89.54
}}{{A.D. 2102년
}}{{1500년대이후
}} 표 북극점에 최근접하는 당시의 북극성}}


   북극좌의 帝星(작은곰자리UMi의 β Kochab 2.08등급, 북극점의 최근접 시기 B.C.1060년
전후, 거극도 6.53 )은 중국 천문체계에서 처음 등장하는 북극성 명칭으로, 주나라때 인식된
별자리로 여겨진다. {史記·天官書(B.C.91년)}에서 말한 天極星 자리 중 太一이 거주한다는
"其明一者(그 중 밝은 별)"는 이를 지칭한다. 두번째 天樞星은 기린자리의 별(Cam GC17443
5.28등급, 최근접 거극도 0.55 800년경)에 해당하며 중국식 별자리로는 "북극5성좌"의 맨
끝에 있는 별이다. 마지막 鉤陳大星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현재 우리가 북극성으로 여기는
작음곰자리의 α별(UMi α Polaris 2.02등급, 최근접 거극도 0.5 2100년)을 뜻한다.
{{ )김일권, [北極星의 위치 변화 및 漢代의 天文 宇宙論 :元代 永樂宮 三淸殿 朝元圖의 해석과 관련하여]
(98년 5월 한국도교문화학회 춘계학술대회 발표문)에서 이 문제를 다룬 바 있다.}}


{{}}2. 중국·일본의 북극성 별자리와 [天樞·四輔] 형식


    이상과 같은 북극성의 변화 문제는 고대 별자리 그림을 다룰 때 매우 중요하다. 비록 고
구려의 고분벽화에 그려진 별자리그림에서 북극성의 세차 문제를 직접 확인할 자료가 아직
까지 발견되지 않지만, 이웃 일본의 다까마쓰(高松塚) 고분벽화에서는 잘 드러나 있다.(그림
3)
   1972년 발굴된 나라현(奈良縣)의 고송총은 고구려 고분벽화와 유사한 四神圖 및 해·달,
성수도(星宿圖) 표현이 발견되면서, 한반도에서 건너간 소위 귀화인에 의해 8C경 축조된 것
으로 추정하는 무덤이다.{{ ) 임세권, [고분벽화에 나타난 28수]({崔永禧선생화갑기념 한국사학논총}, 
탐구당, 1987) ;吉田光邦, [高松塚の星象ㆍ四神圖について] ({佛敎美術} 87, 1972, pp.52-64) ;
有光敎一, [高松塚古墳と高句麗壁畵墳-四神圖の比較] ({佛敎美術} 87, 1972, pp. 65-72) ;

有光敎一, [高句麗壁畵古墳の四神圖 -四神圖の變遷
をめぐって] ({高松塚古墳と飛鳥}, 中央公論社, 1972, pp. 281-294) ;
田村圓澄, [星宿劫と星宿圖 -高松塚고분の星宿圖によせて] ({九州歷史資料館 硏究論集} 7, 1981, pp.1-12)}}


    이 고송총의 천정 성수도에는 中宮 부분에 북극성좌 5성 및 四輔(ㄷ자 모양의 4성)라는
별자리와 주변 둘레에 28수 별자리{{ ) 이십팔수 순서
{{{{동방칠수(東方七宿)
}}{{북방칠수(北方七宿)
}}{{서방칠수(西方七宿)
}}{{남방칠수(南方七宿)
}}{{각 항 저 방 심 미 기
}}{{두 우 녀 허 위 실 벽
}}{{규 루 위 묘 필 자 삼
}}{{정 귀 류 성 장 익 진
}}{{角 亢 房 心 尾 箕
}}{{斗 牛 女 虛 危 室 壁
}}{{奎 婁 胃 昴 畢 參
}}{{井 鬼 柳 星 張 翼 軫
}}}}}}
가 그려져 있다. 그 구성이나 별의 갯수 등으로 보아 당시의 북극성(그림 3에서는 紐星)이 
포함된 별자리를 그린 것으로 확인된다. 여기서의 사보 4성과 북극 5성 별자리는 바로 
그 당시의 북극점 주변을 표현하던 방식이다.

   이와 유사한 표현방식이 최근(1998년) 발견된 기토라 고분(7C-8C초)의 석실 천정 천문도
에서도 발견되었다. 고송총과 인접한 지역인 나라현 아스카(明日香) 지역의 기토라고분 천
문도는 세계 最古의 전천 천문도(1300여년전)로 추정되며, 약 600개의 별과 34종의 별자리
가 그려져 있다. 이 별자리를 컴퓨터로 분석할 결과 관측 지점이 평양 주변과 일치하는 북위
38-39도 지역으로 추정되어, 고구려의 천문지식이 일본으로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졌다. 이 기토라 천문도의 중앙에는 북두칠성과 역시 사보 4성과 북극 5성 별자리가 그려
져 있다.(그림 4) 다만 고송총의 중궁 표현에 없던 북두칠성이 그려진 점이 주목된다.
사보 별자리가 중요한 것은 앞서 말한 바 있는 세차운동에 따른 북극성의 변천 문제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 [北極星의 위치 변화 및 漢代의 天文 宇宙論 ](김일권, 1998)}}


   四輔 별자리는 바로 당시의 북극성인 天樞星과 관련하여 이해되는 별자리이다. 천추성은
기린자리의 별(Cam GC17443 5.28등급)에 해당하며 중국식 별자리로는 북극성좌 5성 중 맨
끝에 있는 별이다. 사보성좌는 천추성을 에워싸듯이 ㄷ자 모양으로 배열된 별자리로, {사
기·천관서}에 없던 내용이며 {진서·천문지}와 {수서·천문지} 또는 당나라의 {開元占經}
등에서 체계화된 것이다. 그런데 이 별들은 매우 어두우며(6등급 이하), 그 중 두 별은 현대
星表(Star Chart)에 해당되는 것조차 없다.{{ ) {中國の星座の歷史}(大崎正次, 1987), p.215}}

   이처럼 매우 미미한 별들임에도 불구하고 사보 별자리는 항상 강조되어 표현된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북극성으로 등장한 천추성의 권위를 드높이기 위해 창출된 별자리가 사보성
좌라고 생각된다. 이같은 현상은 엄밀한 관측 결과와 어긋나는 관념적 작업의 일환이다.
사실상 과거의 천문학은 순순 과학만으로 조망되지 않는 측면이 적지 않다. 특히 별자리
와 관련해서는 점성술적 맥락에서 많이 운용되기 때문에 그런 경향은 더욱 짙어진다. 하늘
과 인간의 세계가 서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고 방식을 우리는 天人感應 사상이라 하
는데, 동양 우주론이 지니는 커다란 특징 중의 하나이며, 중국 천문사상의 근저에 깔려있는
세계관의 하나이다.

   천추성이 북극점에 최근접하는 시기가 800년 정도이기 때문에 [天樞·四輔](=북극5성·
사보4성)라는 새로운 중궁 표현 방식이 형성되는 과정은 멀게는 후한(25-220) 무렵부터 가
깝게는 수(581-618)·당(618-907) 시대에 그 작업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 예종
이전(710년 이전)으로 추정되는 
敦煌星圖 甲本{{ ) 席澤宗, [敦煌星圖]({중국천문문물논집}, 문물출판사, 1989), pp.181-198}}
또는 8C초-11C 사이로 추정되는 敦煌星圖 乙本(일명 돈황 紫微垣 星圖){{ ) 
馬世長, [敦煌寫本紫微垣星圖]({중국천문문물논집}, 문물출판사, 1989), pp.199-210}}의

중궁에 그려진 천추-사보 별자리는 그러한 북극성 변천의 중간 단계를 보여주는 자료로 파악된다.
(그림 5, 6) 일본 고송총의 중앙 별자리는 이러한 배경에서 조망되며, 중국식 북극자리 표현 방식을 
충실히 계승한 것이라 하겠다.



{{}}3. 고구려와 고려의 [북극3성·북두칠성] 형식


   그런데, 한국의 고구려나 고려시대에 그려진 별자리 그림에는 그러한 사보 별자리가 확
인되지 않는다. 대신에 북두칠성과 함께 북극성좌로 생각되는 3성이 그려져 있다.
이런 [북극3성·북두칠성] 형식의 가장 전형적인 경우는 고구려 고분벽화 중 집안 오회
분 4호묘·5호묘 및 통구 사신총의 북쪽 별자리로 그려진 "북두칠성 - 대소 3성" 체제이다.
대소 3성은 가운데 별이 좌우별보다 더 크게 강조되어 있으며, 이 세 고분에 똑같은 구도로
북두칠성과 함께 그려져 있다. 또한 소위 사방위 표지 체제인 북두칠성·남두육성·일상·
월상과 같은 칸이 아니라 가운데 천정 막음돌의 북쪽 부분에 그려져 있어 북극성 별자리를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가운데 큰별이 아마 북극성일 것이다.(그림 7, 8, 9)
{{ ) 본고의 고구려 고분벽화 별그림들은 [고구려 고분벽화의 별자리그림 考定](김일권, 1996ㄱ)에 실린
것들이다.}}
{{ 그림 집안오회분4호묘 안칸 천정 성수도}} 
{{ 그림 집안오회분5호묘 안칸 천정 성수도}}

   이 집안 지역의 세 고분 별자리는 동쪽의 日象과 서쪽의 月象 및 북쪽의 北斗七星, 남쪽
의 南斗六星이라는 동일한 구도의 천문 방위 표지 형식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자료들이다.
여기서와 같이 南斗六星을 남방 지표로 삼는 체계는 중국이나 일본의 성수도에는 보이지
않는 고구려만의 특징적인 형식이다.
{{ ) 김일권, [고구려 고분벽화의 天文 관념 체계 연구]({진단학보} 82호, 진단학회, 1996ㄴ) ;김일권, [고
구려 고분벽화의 天文思想 특징]({고구려연구} 3집, 고구려연구회, 1997)}}이
日月과 南北斗 별자리 외에 북쪽 북두칠성 아래쪽에 그려진 三星 형식 또한 세 고분에 공통적인데, 
역시 고구려에만 보이는 형식이다.

   이 때 북극3성 배치 모양은 일직선 배열(집안오회분 4호묘, 통구사신총)이기도 하고, 삼
각형 배열(집안오회분 5호묘)이기도 하다. 이중 삼각형 배치의 3성은 이들 고분보다 앞선
시기의 약수리 고분(5C초) 북쪽 북두칠성 아래에 그려진 3성(연결선이 있는 고깔 모양)과
서로 통하는 구조이다.(그림 10) 약수리 고분의 이 ∧모양 3성을 직녀성이라고 한 연구가
있으나,{{ ) 리준걸, [고구려 벽화무덤의 별그림에 대한 연구]({고고민속논문집} 9, 1984), p.34}}
직녀성이 북두칠성과 함께 북쪽에 출현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에 본고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북극3성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듯하다.

   또한 일직선 배열의 3성 형태는 각저총, 무용총에서 북두칠성 아래쪽에 그려진 북쪽의 3
성 별자리와 같은 구조로 생각된다.(그림 11, 12)
{{ ) 리준걸([고구려 벽화무덤의 별그림에 대한 연구], p.38)은 이 3성 별자리를 翼宿라고 동정하였지만,
무용총과 각저총의 남북 방위를 전도시킨 채 진행한 작업이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이 모사 방위 오
류문제에 관해서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별자리그림 考定](김일권, 1996ㄱ)에서 자세히 다룬 바 있다.}} 

   이때까지 이 점에 대해서 주목한 바가 없었으나, 위에서 제시한 6개 고분의 별자리 그림을 비교할 때 
북극3성으로 考定된다.
이렇게 되면, 각저총이나 무용총의 별자리 그림들의 의미가 대체적으로 밝혀지는 셈이다.
동남 방향의 日象 윗부분에 그려진 쌍삼성(각저총의 경우 퇴색이 심하여 현재 2성 정도만
보인다. 아마 원래는 3성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과 서남 방향의 月象 윗부분에 그려진 쌍
삼성에 대해서는 본인이 이미 동서 방위를 표지하는 방위 별자리일 것으로 천착한 바 있
다.
{{ ) 그 중 동쌍삼성은 전갈자리의 心宿와 房宿로 동정되었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天文 관념 체계 연
구](김일권, 1996ㄴ) 및 
[고구려 고분벽화의 天文思想 특징](김일권, 1997)}}

   그 다음 남쪽의 南斗六星(무용총의 경우 Γ자 모양이어서 국자(斗) 모양은 아니지만 각저총과의 
전체 별자리 구조가 동일하다는 점 또는 그외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南斗六星 관념이 매우 발달한 점 
등을 근거로 남두육성 별자리로 파악하였다.)과 북쪽의 北斗七星 역시 남북의 방위 별자리로 
기능하였을 것으로 천착하였었다.{
{ ) [고구려 고분벽화의 天文 관념 체계 연구](김일권, 1996ㄴ) ;[고구려 고분벽화의 天文思想 특징](김
일권, 1997) 참고}}

    여기에 덧붙여 북두칠성 윗쪽의 일직선 형태의 3성은 이제 북극3성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결국 아직 고정이 되지 않은 것은 북두칠성 자루 주변에 연결선이 없이 독립되어 있는
홑별들 3개(각저총은 2개, 무용총은 1개)이다. 이 중 각저총의 경우 북두칠성 자루 부분의
홑별 하나를 輔星(자루 부분의 2번째 별이 쌍성인데서 연유한 별)으로 간주할 수 있겠지만,
그외 각저총과 무용총에서 북두칠성 자루끝 바깥에 유사한 위치로 그려져 있는 홑별이 무
슨 별인지는 아직 알기 어렵다.

   이상과 같이 고구려 별자리에서 북쪽 북두칠성과 함께 표현된 3성을 북극성 별자리로 파
악하는 맥락은 고려시대 서삼동고분(12C초, 안동군 녹전면 서삼동)의 중궁 별자리 표현 방
식에서도 찾아진다.(그림 13)

   고려 서삼동 별자리그림은 청록색 고분천정 안쪽에 짙은 푸른 색으로 지름 80㎝의 원반
을 그리고 그 위에 별자리들을 그렸다. 그 원반 둘레 부분에 현재 165개로 확인되는 28수
별그림을 그렸으며, 별 각각은 지름 1㎝가량의 검은색 동그라미를 그리고 그 속을 붉게 칠
한 형태이다. 사벽면에는 고구려 고분벽화처럼 사신도와 인물도가 자리잡고 있다. 여기에
그려진 28수 그림은 고구려의 덕화리2호분이나 진파리4호분에 그려진 28수 이후 우리 역사
에 다시 등장한 것으로 주목된다. 특히 서삼동 28수는 그 별갯수(165개)나 모양 등에서 182
개의 28수로 구성된 조선초 천상열차분야지도로 전이되는 과정을 추적하는 데 중요한 실마
리를 담고 있는 자료이다.{{ ) 한국천문학회, {한국의 천문도}(천문우주기획, 1995), p.58}}

   본고에서 주목하는 부분은 그보다 28수 그림 안쪽 중궁에 9개로 구성된 별그림이다. 배
치 구조상으로 보아 "북두칠성 + 북극3성" 형식으로 분석된다. 다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별
갯수가 하나 모자라므로 확정적인 판단은 유보할 수 밖에 없지만, 모양상 중국식의 [천추·
사보] 방식은 아니며 고구려식의 중궁 표현 방식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그 중궁
9성 좌우에 해와 달로 생각되는 큰 별 2개가 함께 그려져 있어 고구려 별자리 표현 방식에
서 늘상 중시된 일상·월상 맥락과 서로 통한다. 더구나 사벽면의 사신도 그림 역시 고구려
벽화와의 연계성을 생각하게 한다. 이러한 점들에 근거하여 서삼동 중궁의 9성 표현이 고구
려 전통인 [북두칠성·북극3성] 형식일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중궁에 북두칠성을 그리는 형식은 서삼동 별그림 외에도 13세기 고려 神宗(1197-1204)의
능묘인 陽陵 천정 별그림에도 나타난다.(그림 14) 서삼동 별그림과 유사하게 주변에 28수
그림을 그렸으며 가운데에 북두칠성과 해 또는 달로 생각되는 큰 별이 하나 있다.
{{ ) [고구려 벽화무덤의 별그림에 대한 연구](리준걸, 1984), p.58 :리준걸의 그림에 현릉의 경우처럼 방
위 오류 문제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본문의 양릉성수도(그림 14)에서는 리준걸의 것을 좌우 대칭
하였다. 태양으로 보이는 큰점이 있으므로, 현릉에서와 같이 그 반대편에 달에 해당되는 그림이 있
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문제는 아직 사진 자료나 현지답사 자료를 구할 수 없으므로 정확한 결정은
유보한다.}}


   공민왕(1351-1374)의 능묘인 현릉 천정에도 그와 유사한 별그림이 발견된다. 태양 원반
(선홍색 큰 별)과 달 원반(누런색 큰 별)을 좌우에 두고 북쪽에 북두칠성이 그려져 있어,(그
림 15){{ ) [고구려 벽화무덤의 별그림에 대한 연구](리준걸, 1984), p.58 :리준걸의 현릉 그림 역시 방위 오류
문제를 안고 있다. 
{조선유적유물도감(고려편)} 11권 (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외국문종합출판
사, 평양, 1990), p.48의 도판 51·52 그림을 대조하면, 리준걸의 그림은 현릉 내부에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무덤 밖에서 투시한 그림이므로 좌우를 전도시켜야 한다. 이에 본문의 현릉 성수도(그림 15)
는 그것을 좌우대칭시킨 것이다. 또한 선홍색 태양 원반(북두칠성 자루부분의 아래쪽, 아마 동쪽?)의
반대편에 누런빛의 달 원반(斗魁의 아래쪽, 아마 서쪽?)이 도판 51에 보이므로 이를 추가하였다. 남
쪽에 보이는 三星 두 개는 아마 고구려 고분벽화에 매우 빈번한 남방 표지 별자리인 南斗六星이 변
형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북두칠성이 중요한 모티프로 작용함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고려 시대의 별그림이 비록 28수를 주변에 그리지만, 중궁 표현에서 중국식의
[천추·사보]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고구려와 공통적이다. 특히 일월을 묘사한
다는 점 역시 고구려와 상통하는 대목이다.


   한편 이상과 같은 고구려식의 중궁 표현 방식을 보여주는 또하나의 자료가 있다. 고려시
대의 마지막 별그림으로 생각되는 14세기 서곡리 벽화묘(파주군 진동면 서곡리)의 천정 돌
판에 그려진 성수도가 그것이다.(그림 16) 이 무덤의 주인인 權準(1281-1352)은 세계에서
두번째로 오래된 석각 천문도인 天象列次分野之圖(조선 태조 4년, 1395)를 제작 책임한 陽
村 權近(1352-1409)의 큰할아버지이다. 천문 지식이 가문으로 이어짐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
이기도 하다.
   이 곳의 그림은 단순한데, 천정의 중앙 돌판에 흰색 테두리로 된 큰 원반 속에 북두칠성
및 일직선 형태의 3성이 그려져 있다. 별들은 검은 테두리를 하고 가운데를 흰색으로 채운
모양이다. 화강석으로 된 네 벽에는 十二支神像이 검은 선과 약간 붉은 색으로 그려져 있
다.{{ ) {한국의 천문도}(한국천문학회, 1995), p.16, 59}}

   여기에 북두칠성과 함께 그려진 3성을 흔히 삼태성이라 말하나, 중국 천문에서 삼태성(三態星)은 
紫微右垣 바깥 文昌星 뒤쪽에 3쌍으로 된 6개의 별자리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 ) "魁下六星, 兩兩比者, 名曰 三態. 三態色齊, 君臣和 ;不齊, 爲乖戾." :{사기·천관서}(중화서국 간행본), p.1293 ;
{수서·천문지}(중화서국 간행본), p.534에서는 "三台六星, 兩兩而居."로 표현하고 있어, 三態星 또는 三台星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또는 오리온 별자리(=중국명 參宿)의 가운데 3성을 삼태성이라 하기도 하나, 이는 參宿의 중앙 "삼대성(三大星)"
{{ ) "參中三大星爲中軍, 正中一星爲大將, 旁二星參謀也."({正義}) :陳遵 , {중국천문학사} 권2
(중화서국, 1985), p.124}}이 대에 와서 삼태성(三太星)으로 와전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 3대성은 {사기·천관서}에서 衡石으로,{{ ) {사기·천관서}, p.1306}}
{수서·천문지}에서는 三將軍으로 불리던 것이다.{{ ) "其中三星橫列, 三將也." :{수서·천문지}, p.547}}


서 이 三態星 또는 三太星을 뜻하는 것이든 간에 중궁으로 주목받을 만한 별자리는 아니다. 
북두칠성과 함께 가장 중시될 만한 별자리가 무엇일까를 생각하면, 북극성 이외에는 별달리 없다. 
이러한 해석이 고구려와 고려의 여러 중궁 표현 방식과 연관해서 좀더 타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의 고찰에서 [북극3성·북두칠성] 체제는 [북극5성·사보4성] 체제의 중국식 표현
방식과는 매우 다른 소위 고구려식 표현 방식이라 하겠으며, 아울러 고구려, 고려의 별자리
체계의 계승성을 내포한 것이라 하겠다.
   덧붙여 북극성 자리와 함께 북두칠성을 표현하는 형식은 일본 기토라 고분에서도 보여지
므로 기토라의 천문도가 그러한 고구려의 전통과 연관된다고 하겠으나, 반면에 기토라의 [
북극5성·사보4성] 형식은 중국류의 중궁 별자리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고구려의 것과는 다
른 맥락으로 이해된다. 앞으로 고구려와 일본간의 천문학 전래 문제를 다룰 때 이런 점들이
깊이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조선초에 그려진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중궁 표현은 그것이 全天 천문도이기 때문이
기도 하겠지만 [북극3성·북두칠성] 형식이 아니라 [북극5성·사보4성]이라는 전형적인 중
국식의 표현 형식을 따르고 있어, 고구려에서 고려로 이어지는 흐름에 이질적인 측면을 보
여준다.(그림 17) 이 대목은 조선초기에 와서 중국의 천문도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
루어졌음을 시사한다. 12次에 응하는 12분야 명칭이 鄭의 分野인 州, 宋의 분야인 豫州,
燕의 분야인 幽州 등 중국 입장에서의 분류된 12國 12州를 따르는 점 등은 그러한 작업의
반영이다.

   그런 반면에 권근의 제작 설명문에서 고구려의 천문도가 오래되어 별의 도수에 오차가
있으므로 서운관에서 새로 中星記를 만들어 천문도를 고쳐 그렸다고 하는 점{{ ) {한국의 천문도}
(한국천문학회, 1995), pp.60-65}} 등은 중국의 천문도를 모방하되 고구려의 전통을 이은 
연장선에서 그리고 새로운 관측 결과를 반영한 맥락에서 재창출한 측면을 보여준다.


{{}}4. 기토라고분 천문도와 고구려·중국과의 관계


   기토라고분의 천문도는 4개의 원이 그려져 있어 특히나 주목되는 고대 천문도의 하나가
된다. 가장 가운데의 內規는 主極星(일년 내내 관측되는 별)의 범위를 알려주는 것이며, 그
다음 교차되는 두 원들은 천구의 赤道와 黃道에 해당하며, 바깥쪽 外規는 관측 가능한 별자
리 범위를 지칭한다.

   현재 약 600개의 별과 34종의 별자리가 확인된다 하며, 위도에 따라 달라지는 적도와 내
규의 반경 비율을 계산한 결과 관측 지점이 북위 38-39 지역으로 산출되었는 데, 그 위도
중에서 고구려의 평양이 가장 유력한 후보지로 추정되었다. 관측 연대는 별의 위치 등으로
보아 B.C.3세기에서 A.D.3세기 정도로 추정되었다. 이같은 분석 결과와 기토라 고분 축조
연대가 고구려 패망 직후인 7세기말에서 8세기초로 추정되는 것 등에 바탕하여 기토라의
천문도를 그린 주세력으로 일본으로 망명한 고구려 도래인 또는 고구려의 천문 지식에 영
향을 받은 인물들로 상정하였다.
{{ ) 조선일보·세계일보 98년 6월 1일자 ;朝日新聞 98년 3월 7일자 신문}}

   그러나 앞서 말한 바대로 기토라 천문도의 중궁 표현 방식은 고구려식이라기보다는 
중국식의 [천추·사보] 형식이다. 이 점에 기초하여 중국과의 관련성을 검토하여 보자.
발굴 당시 중국의 자료 중에서 기토라 천문도에 비견될 만한 것으로 南宋 淳祐 시기의 
[蘇州天文圖](1247)를 제시하였으나 이는 시대가 너무 뒤진다. 이보다 300년 가량 앞선 것
중 五代시기의 것인 吳越 文穆王 錢元瓘(전원관, 941년졸)의 석각천문도(M27)와 그의 次妃
인 吳漢月墓(952년졸)의 석각천문도(M26)가 주목된다.(그림 19, 20)
{{ ) 伊世同, [最古的石刻星圖 :杭州吳越墓石刻星圖評介]({고고} 75-3) ;절강성문물관리위원회, [杭州·臨
安 五代墓中的 天文圖和秘色瓷] ({고고} 75-3)}}


   이들 천문도는 南宋의 淳祐天文圖보다 더 오래된 석각천문도로 여겨지는 것이다. 이 중
전원관묘의 천문도에 그려진 별자리는 적도 주변의 28수 외에, 중궁에 북극5성과 북두7성
및 鉤陳6성, 華蓋7성, 9성 등으로, 중궁 표현에서 당시의 전형적인 [천추·사보] 형식과
달리 四輔 별자리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오월묘 시기 이전 또는 전
후로 편년되는 돈황성도 갑·을본에서의 중궁 표현은 [천추·사보] 형식을 취하였다.(그림
5, 6)

   그보다 주목되는 것은 3개의 동심원이 그려진 점이다. 가운데의 내규와 중간의 적도, 바

깥의 외규로 구성되어 있다. 이 반경 비율의 계산 결과 관측지점이 북위 약 37 인 것으로
추산되었다. 그런데 이 묘가 위치한 곳인 杭州는 북위 30 이며, 당시의 중심 도시들인 서안,
낙양, 개봉 등은 북위 34-35 사이에 있다. 이렇게 관측 지점상의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
았으나, 동심원의 중심인 북극성이 약 850년 즈음 북극점에 최근접하는 당시의 북극성인 天
樞星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 이 오월묘 천문도의 관측 연대는 唐玄宗의 개원 년간
(713-741)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 伊世同, [杭州吳越墓石刻星圖]({중국천문문물논집}, 문물출판사, 1989), pp.252-258}}

   그런데 이 오월묘 천문도보다 앞선 시기의 기토라고분 천문도에 이미 그보다 더 우수한
천문 체계 방식인 내외규, 적황도 등 4개의 동심원이 그려져 있으므로 중국과 일본과의 천
문학적 연계성을 상정하는 것이 쉽지 않다. 덧붙여 4개의 동심원으로된 천문도 형식은 남송
의 소주석각천문도(1247)에서 비로소 나타난다.
   물론 고구려와의 연계성 역시 쉽지가 않은데, 주된 이유는 현전하는 고구려 별자리그림
중에서 내외규나 적황도의 동심원을 이용한 전천 천문도가 없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기토라고분 천문도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이 문제를 접근하는 실마리는 이상에
서 기토라 천문도의 모델이 될 만한 것이 중국이나 고구려, 일본 삼국 모두에 없다는 결론
에서 시작된다. 천문도의 직접적인 비교가 어렵다면, 이미 발굴 조사 당시에 발표된 바 있
듯이 주변 정황을 참고로 할 수 밖에 없다.{{ ) 본 4장의 주된 관심사가 고대 한중일 
천문도간의 중궁 표현 방식 비교에 있기 때문에, 기토라 천문도의 그외 다른 별자리들의 
모양, 위치, 연결선 등에 대한 비교 연구는 다음 기회에 다루겠다.}}

   기토라고분에 그려진 四神圖는 비슷한 시기 인접 지역에 축조된 高松塚 벽화에서 발견된
것과 거의 똑같은 양식을 담고 있으며, 중국의 사신도와는 그 구도나 자세, 색채 등에서 확
연히 구분된다. 고송총의 것은 이미 고구려 도래인들의 작품일 것으로 연구된 바 있으므
로,{{ ) 앞의 각주 5 참고}}  결국 토라 고분벽화는 고구려 고분벽화 전통과 연관지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정황에다 일본 東海대학 정보기술센터의 별자리 분석 결과 그 관측지점이 
북위 38-39 의 평양 지역일 것으로 추정한 바 있으므로, 그러할 개연성은 더욱 커지는 것이다.


   사실 고분벽화 내부에 별자리를 그리는 전통은 중국 한대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고구려
의 것은 그 빈도수나 정교성 등으로 볼 때 매우 주목할 만한 것이다. 고구려 고분벽화 시기인 
4C-7C까지 300년간 중국쪽 자료를 조사하면,
{{ ) 남북조 이전 시기 벽화묘에 별자리를 그린 것으로는 전한시기와 新莽시기에 집중되어 있으며, 
畵像石 양식이 발달한 後漢이나 魏晋에서는 거의 없다. 前漢 벽화묘 중 별그림이 발견된 것은 낙양 
老城 서북 燒溝 61호 서한 벽화묘의 일월성신도, 섬서 서안 교통대학 서한 벽화묘의 일월 28수도 등이
며, 新莽시기의 것으로는 하남 낙양 金谷園 新莽 벽화묘의 일월성상도, 산서 平陸 棗園村 新莽 벽화
묘(A.D.9-23)의 일월성상도, 섬서 千陽 벽화묘의 일월성상도 등이다. 이들 5곳은 모두 北朝지역이다.}} 

遼寧 北票 西官營子 北燕 馮素弗 부부묘(415)의 일월성신도, 하남 낙양 北魏 江陽王 元乂墓(526)의 
300여개 星象圖, 산동 臨 海浮山 東魏 威烈장군 崔芬墓(550)의 일월성상도, 
하북 磁縣 大塚營 東魏 茹茹公主墓(550)의 天象圖(심한 훼손), 태원시 北齊 婁叡墓(570)의 天象圖, 
산동 濟南 馬家莊 北齊 道貴墓(571)의 일월성상도, 하북 磁縣 北齊 馮翊王 高潤墓(575)의 天象圖(추측?) 
등 일곱 군데의 별자리그림이 대략인데,
{{ ) 唐代의 벽화 별그림은 현재 懿德태자 李重潤墓(706)의 일월 은하수, 章懷태자 李賢墓(706-711?)의 일
월 은하수, 永泰공주 李仙蕙墓(706)의 일월 성상도 정도로 확인된다.}} 대부분 조 지역에 분포되어 
있음을 확인케 된다.


   이런 경향은 우연이 아니다. 현재까지 남조 지역에서 발견된 별자리그림은 거의 없으며,
후일 하북지역의 요대 벽화묘들에서 하북 宣化 張文藻 遼墓(1093)의 28수도, 하북 宣化 張
世卿 遼墓(1116)의 일월 28수도, 하북 宣化 下八里 2호 張恭誘(1117)의 일월28수·황도12
궁·12생초 그림 등이 발견되었는데, 이들 역시 북조 지역이다. 이 중 장세경묘의 것은 서
양의 황도12궁이 그려진 최초의 벽화묘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그림 21)

   이렇게 고분벽화에 별자리그림을 그리는 전통은 북방 문화권과 밀접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배경에서 고구려 벽화고분이 현재 22곳 고분에서 별자리그림을 담고있다는 사실은 이
상의 중원 지역 사례들에 비해 매우 집중된 경향이라 하겠다. 더구나 고구려 고분벽화 중
가장 많은 별자리들을 그린 것 중의 하나인 덕흥리고분이 408년으로 편년되는 것에 비해,
前漢 이후 가장 빠른 시기에 별자리그림을 그린 北燕 馮素弗 부부묘의 경우는 415년으로
편년된다. 이것은 고구려의 벽화 전통이 오히려 남북조 시기 북방 문화권에서 주도적 위치
를 차지하였을 것임을 생각케 한다.

   이상과 같이 벽화고분에서의 한중 비교 연구를 통할 때도 일본의 기토라 고분에 천문도
를 그렸을 담당자로 고구려가 매우 유력해지는 것이다.
{{ ) 이상의 비교 방식은 외형적인 면이므로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 내용상으로 들어가 한중 별그림간의
비교 연구를 통한다면 한중일 3국간의 관계가 더욱 확연해질 전망이지만, 이에 대해서는 후일 별도
의 논문으로 발표하려고 한다.}}


{{}}5. 결 론


   고구려인들이 바라본 밤하늘의 모습이 어떠한 것이었을까를 생각할 때, 북극성이 고정된
별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움직인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한 실마리로 작용함을 살펴보았다.
   지구의 세차 운동에 의해 야기되는 북극성의 이동 현상으로 인해 중국 천문 전통에서는 한
대의 帝星에서 수당대의 天樞星으로 옮겨졌음을 알게 되었다. 새로운 시대의 북극성으로 등
장한 天樞星의 권위를 드높이기 위해 보좌격인 四輔라는 별자리가 창출되면서, 북극점 주변
의 별자리 표현 방식이 [북극5성·사보4성] 형식을 취하는데, 이것이 대표적인 중국식 중궁
표현 방식으로 파악되었다.

   고구려의 별자리가 중국의 것을 모방하였다면 그같은 형식이 나타나야 할 것으로 생각되
었지만, 실상은 그와 다른 [북극3성·북두칠성] 형식이 주류임을 확인케 되었다. 집안 오회
분 4호묘·5호묘 및 통구 사신총의 별그림에서 그 같은 해석의 단서를 찾을 수 있었으며,
약수리 고분이나 각저총, 무용총의 것에서도 이러한 형식이 표현되어 있음을 천착하였다.
이같은 형식을 대표적인 고구려식 중궁 표현 방식으로 설정하였다. 고려시대의 서삼동고
분이나 서곡리 벽화묘의 중궁 별자리 역시 그같은 형식으로 볼 수 있다는 견해를 제출하였
는 바, 이 유사성이 고구려와 고려시대의 연계성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대목으로 여겨졌다.
사실 이상하리만큼 고구려, 고려의 중궁에는 [북극5성·사보4성] 형식이 아직까지는 발견되
지 않으며, 조선초의 천상열차분야지도에 이르러서야 중국식 표현 방식이 등장한다.

   반면에 일본의 다까마쓰고분이나 기토라고분의 별자리그림에서는 중국식의 [북극5성·사
보4성] 형식을 채용하고 있어, 적어도 중궁 표현 양식에서는 중국류를 따름을 보인다. 그런
데 이 두 고분에 그려진 일월이나 사신도 표현이 고구려의 것에 충실한 점과 그 두 고분
축조 시기가 고구려 패망 직후인 8세기 전후로 편년된다는 점, 그리고 기토라 천문도의 관
측위치가 고구려의 평양으로 추정된다는 점 등으로 인해 중국보다는 고구려의 천문 지식에
기초하였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생각된다.

   이 문제를 고분벽화 내부에 별자리를 그리는 양식으로 고찰하였을 때도 역시 고구려적인
전통에서 조망되었다. 묘실 내부에 별자리그림을 묘사한 남북조시기나 요대의 벽화묘들이
대부분 중국 북방 지역에 분포하는 데다, 이들의 시기보다 오히려 고구려의 고분벽화 시기
가 앞서 있으므로, 비록 벽화 내부에 별자리그림을 그리는 한대 이래의 전통에 영향을 받은
것이기는 하지만, 이 시대 즈음에는 고구려가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였을 것으로 전망되었
다. 환언하면, 고구려가 당시 북방 문화의 주력의 하나로 기능하였을 것임을 보여주는 대목
인데, 중원지역이 후한 이후 분열과 쟁패를 400여년간 거듭한 반면 고구려는 그 시기가 가
장 왕성한 국력과 문화력을 발휘하던 때이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고분벽화는 바로 이 기간
동안에 조성된 것들이다.

   이같이 기토라고분의 천문도 작성 주체로 고구려인들이 강력하게 상정되지만, 아직 해결
되어야할 과제는 적지 않다. 무엇보다 내규, 외규, 적도, 황도의 동심원으로 그려진 기토라
천문도와 같은 수준을 담지할 만한 고구려의 천문도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중국에서도 10세기 후반 오월묘의 석각천문도에 가서야 그러한 형식이 보이므로, 중국
또한 기토라 천문도에 대해서 기득권을 주장할 근거는 미약하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조선의 천상열차분야지도를 제작 책임한 양촌 권근의 설명문을 다시
상기하게 된다. "오른쪽 천문도의 石本이 옛날 평양성에 있었으나, 병란으로 (대동)강에 침
몰되어 잃어버린 지 오랜 세월이며 그 印本을 가진 자 또한 없었다. 생각컨대 우리 전하가
受命한 처음에 一本을 바친 자가 있었으니 전하가 그를 중히 하였다. (이에) 書雲觀에 重刻
케 명하여 ...
"{{ ) "右天文圖石本 舊在平壤城, 因兵亂沈于江 而失之歲月旣久, 其印本之存者亦絶無矣. 
惟我殿下受命之初 有以一本投進者, 殿下寶重之. 命書雲觀重刻于外晏然 于太平 
卽堯舜之德差宜更推步 以定今四仲昏曉之中 勒成新圖以示于後. ..." :
{한국의 천문도} (한국천문학회, 1995), p.64}}라 하였듯이, 
우리는 고구려의 석각 천문도 존재를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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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성의 정체| 공부합시다

포말 | 조회 85 |추천 0 | 2001.01.12. 20:41

 

 

   북극성은 하늘을 날고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들에게 방향을 알려 주며, 사막이나 산과 들을 헤매는 사람들에게 길잡이 역할을 하는 별이다. 특히 밤하늘을 즐기는 아마추어 천문가들이 망원경을 설치할 때 북극성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작은곰자리의 α별인 북극성은 이름 그대로 거의 지구의 진북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북극성은 자시느이 구실을 앞으로 약 1000년 정도밖에는 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지구가 ‘세차 운동’을 하기 때문이다. 세차 운동이란, 지구의 자전축이 일정하게 유지되지 못하고 약 26000년 주기로 원운동을 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서기 4000년경이 되면 지구의 북극이 세페우스자리의 γ별을 가리키게 되어 이 별이 북ㄱ극성으로 불려질 것이다.



캠벨의 분광측정

    1890년대에 미국의 릭(Lick)천문대의 캠벨(Cambell)은 91㎝ 굴절 망원경에 분광기를 달아 별의 ‘시선 속도’를 측정했다. 시선 속도란 천체가 관측자에게서 멀어지거나 가까워지면서 생기는 천체의 속도 변화를 의미한다. 시선 속도는 천체가 처음 위치에 있을 때 관측되어진 스펙트럼의 파장과 이동 후 관측된 스펙트럼 파장 사이의 차이를 측정해서 얻을 수 있다. 1896년 캠벨은 분광기를 이용해 북극성의 시선 속도를 측정하여 평균 -19.6㎞/세크(쳇...어딨는 고야....ㅡ“ㅡ::)의 값을 얻었다. 그후 1899년에 다시 북극성의 시선 속도를 관측했는데 이번에는 -13.0㎞/세크(.....ㅜ.ㅜ)로 3년 전과 상당히 다른 결과를 얻었다. 또한 다음날 밤에는 이 값이 -10.6㎞/세크까지 변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단순한 관측 오차의 가능성을 뛰어넘는 값이었으므로 캠벨은 북극서으이 시선 속도가 실제로 변하고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시선 속도가 변한다는 것은 북극성이 2개의 천체가 어울려 돌고 있는 상성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EMt한다. 캠벨을 북극성을 집중 관측하여 이 별이 시선 속도가 약 4일 주기로 6㎞/세크(n.n)의 폭으로 별화하고 있는 ‘공전주기 4일인 분광 쌍성’이라고 발표하였다.



북극성은 세페이드 변광성

   천체의 시선 속도가 변하는 이유는 관측 대상인 별이 쌍성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별 자체가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또한 별의 스펙트럼 변화도 실제로 천체의 밝기가 달라져서 생기는 경우도 있다. 캠벨이 북극성을 관측하기 40년 전에 이미 독일 뮌헨대학의 폰 자이델(Von Zeidel)은 북극성의 밝기가 이미 변하고 있을 가능성을 지적했다.

그러나 확실하게 북극서의 밝기가 변하는 모습을 관측한 사람은 H-R도 발견으로 유명한 덴마크의 헤르츠스프룽(Hertzsprung)이다. 그는 자이델의 지적을 토대로 북극성에 주목하여 이 별이 세페이드 변광성과 닮았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는 1910년 11월부터 1911년 5월까지 북극성의 사진 관측을 실시하였고 그 결과 북극성은 쌍성이 아니라 0.17등급만큼의 변광폭을 보이는 세페이드 변광성이라고 발표하였다.

계속되는 관측으로 북극성은 캠벨의 생각과는 달리 4일을 주기로 팽창, 수축을 반복하는 맥동 변광성임이 밝혀졌다. 북극성의 평균 반지름은 태양의 약 80배, 표면 온도는 588K로서 질량은 태양의 약 9배이다. 맥동 운동에 따르는 반지름의 변화폭은 1∼2%정도이며 온도의 변화폭은 약 200∼300K의 값을 갖는다.



세페이드(Cepheid)변광

   별 중에는 밝기가 변하는 것이 있는데 이런 별을 변광성이라고 한다. 밝기가 규칙적으로 변하는 별이 세페우스자리에서 처음 발견되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세페이드 변광성의 밝기가 규칙적으로 변하는 것은 이들이 규칙적으로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세페이드 변광성은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며 밝기가 변하는 초거성이다. 세페이드 변광성은 두 가지 종류로 나뉘는데, 즑은 세대에 속하는 종족Ⅱ(처녀자리W형 별)와 비교적 젊은 세대에 속하는 종족 Ⅰ(세페우스δ형 별)이다.

세페이드 변광성이 가진 중요한 성질은 그들의 절대 등급과 변광 주기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변과 주기가 길수록 별의 등급이 밝아지는 이른바 ‘주기.광도 곡선’관계를 이루고 있다. 이 곡선은 우리 은하와 가까운 외계은하와의 거리를 알아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먼저 외계 은하 속에서 세페이드 변광성을 찾아내어 그 변광 주기를 측정하고 이 주기에서 그 별의 절대 광도를 얻은 뒤‘거리 지수’식에 대입시키면 이 별이 속한 은하계의 거리를 알 수 있다.



북극성은 쌍성

   북극성의 스펙트럼 변화를 통해 이 별이 쌍성일 것이라고 추정했던 캠벨의 생각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북극성은 쌍성이기 때문이다. 캠벨은 1896년 10월과 3년 후인 1899년 8월의 관측결과를 비교하여 북극성의 스펙트럼 곡선에는 4일 주기 변화와는 별도로 스펙트럼 곡선 전체가 약6㎞/세크만큼 위로 이동했음을 발견했다. 이것을 본 캠벨은 아마도 어두운 별이 또 하나 있어서 그 인력 때문에 북극성의 움직임이 천천히 변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생각은 정확한 것이었으나 이 동반성의 존재가 실제로 증명된 것은 그로부터 약 3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후였다.


맥동 활동이 약해져 가는 북극성

   1980년대 초에 천문학자들은 북극성의 밝기 변화가 좀 덜해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헤르츠스프룽이 측정한 북극성의 변광폭은 0.17등급이었다. 그런데 최근 캐나다의 토론토 대학 소속이 페로우(Fellow)가 관측한 결과에 따르면 북극성의 변광폭이 0.05등급으로 떨어졌고 이에 따라 맥동 주기도 늦어져 지난 100년간 5분 16초나 증가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북극성의 밝기 변화의 폭이 적어지는 원인에 대해서 아직 확실한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이 현상을 단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별이 노화된 것이라고 보기에는 그 변화량이 너무도 크기 때문이다. 앞으로 계속해서 이에 대한 정확한 관측을 해 나가야 할 것이다.

   ㅡ 다음 카페 여우<cafe.daum.net/ahro/92v/8 >   포말 님의 글 중에서 전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