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진의 차맥] <26> 불교의 길, 차의길 ④ 김지장보살, 차농병행의 선구자

2014. 10. 29. 00:56차 이야기






       

[박정진의 차맥] <26> 불교의 길, 차의길 

④ 김지장보살, 차농병행의 선구자

무상선사와 더불어 신라 불교와 茶문화 자존심 세워
구화산현지 심은 ‘금지차’ 유명… 차농병행 선구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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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차의 역사에서 신라의 무상선사(685∼762)와 지장보살 김교각(金喬覺·696∼794)이 거의 동시대에 존재했다는 사실은 한국 차인의 자존심을 지켜 주는 보루이다. 더욱이 이 두 견당승려는 불교의 나라, 차의 나라인 중국에서 돌아오지 않고, 한 사람은 오백나한에 들고, 다른 한 사람은 지장보살로 추앙받는 한국 불교의 금자탑을 이루었다. 이들의 업적과 행적에서 신라불교와 신라 차의 융성을 읽는 것은 어렵지 않다. 신라는 불교와 차를 중국에서 수입만 했던 것이 아니라 다시 중국에 수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김교각 지장보살이 모셔진 구화산 육신전. 
                                       ‘차의 세계’ 제공



   김교각은 경덕왕의 넷째 왕자라는 설도 있지만, ‘신라국 임금의 지속(支屬)’(송고승전), ‘신라왕의 친척’(신승전) ‘국왕김씨의 가까운 친족’(구화산지) ‘신라국의 왕자로서 김씨 근속(近屬)’(구화산 창건 化城寺記) 등 왕족이긴 하지만 출신이 확실하지 않다.

   두 승려의 차 이야기는 성덕왕, 경덕왕 연간에 이미 신라의 차 문화는 융성할 대로 융성하여 차 문화가 예술과 예절의 경지에 이른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 주는 것 같다.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는 무력은 물론이거니와 통일 후 신라를 이끌 문력(文力)과 정신력도 당시 동아시아에서 최고의 수준이었을 것이다. 화랑과 승려들은 정치엘리트로서 왕에게 충성을 다하는 한편 문화적 풍요를 구가할 수 있는 사회적 기틀을 마련했다.

   차 문화의 성행 속에서 김지장이 중국 안후이(安徽)성 구화산으로 가면서 자신이 즐겨 마시던 차나무의 차씨를 가지고 갔다는 것은 그가 이미 차 마니아였음을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동시에 그는 이미 차가 수행음료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김지장의 전설도 무상선사에 못지않다. 어떻게 남의 나라에서 지장보살의 화신이라는 이름을 얻는가. 중국 구화산 사람들을 죽음이나 지옥에서 구출했다는 말이 아닌가. 김지장은 구화산 사람들의 굶주림을 해결했다고 한다. 무상선사가 선차의 효시라면 김지장은 차선병행(農禪竝行)의 원조이다. 무상과 지장은 한국 차 문화의 충분한 자존심이다. 

   차 연구가 최정간씨(하동 현암도예연구소장)는 농선병행, 차농여선(茶農如禪)의 원조를 백장회해(百丈懷海·749∼814)라고 하는데 실은 김지장이 그보다 70년은 앞선다고 말한다.

   김지장은 8세기 중엽 신라 성덕왕 때 당나라 안후이성 구화산에 입산하여 두타행을 통해 깨달음에 도달하는 한편 기근에 허덕이는 농민들에게 볍씨와 차씨를 제공하여 식량을 조달하는 데에 일조한다. 안사의 난 이후에 당의 재정은 바닥이 났고, 기민과 아사자가 속출하였다. 승려들은 백성의 가난을 구제할 생각도 하지 않고 군자금을 모금한다는 명목으로 도첩을 판매하는 향수전(香水錢) 제도를 운영하는 등 정치권력에 아부했다. 특히 당나라 선불교의 혁명가인 하택신회(河澤神會)도 이에 편승하여 자신의 권력과 영달에 빠져 있었다. 

   안후이성 일대의 헐벗은 민중은 김지장의 빈민구제 소식을 듣고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김지장은 군중을 향하여 사자후를 토했다.

   “중생들이여, 우리도 저 넓은 땅에 농사를 지어 함께 먹읍시다. 당장 굶어 죽어가는 이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법문이 있으리요. 지장보살의 진정한 구원을 받기를 원한다면 과거, 미래, 정토, 타력이 아닌 현세에서 자기 자신의 노력과 함께 이웃과 협동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는 선과 정토 등 모든 불교를 통불교식으로 회통시키는 데에 남다른 재주를 가진 신라 불교의 승리였다. 김교각 스님이 얼마나 많은 민중을 구휼했으면 12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의 명성이 사라지지 않고 도리어 구화산 일대는 지장보살의 성지가 되고 있겠는가. 

김지장 스님이 수행한 구화산 노호동 동굴 바위 위에서 발견된 무성한 금지차 나무
                                      ‘차의 세계’ 제공


   김교각이 심은 차나무는 구화산 현지에서는 ‘금지차(金地茶)’라고 불리는데 지금도 무성한 잎을 자랑하고 있다. 지장 스님의 수행처인 노호동(老虎洞)의 바위 암벽 사이에서 발견되었다. 첫 발견자인 최석환씨는 “노호동 정상을 바라보는데 찻잎처럼 생긴 잎사귀가 태양을 받으면서 팔랑거리는 것을 보고 뛰어올라가 보니 차나무였다”고 한다. 당시 구화산 방장 인덕 스님은 “지금까지 김지장 스님이 남대에 거처하고 살았을 때 심었다는 남대공심차가 금지차로 알려졌는데, 이번에 발견된 노호동 차는 김지장 스님이 맨 먼저 구화산에 은거하면서 수행했던 동굴 정상에 남아 있어 금지차의 원조가 될 설득력이 강하다.”고 말했다. 노호동 금지차는 무려 높이가 230cm나 된다.

  비관경(費冠卿)이 쓴 구화산창건화성사기(九華山創建化城寺記)에는 “노호동은 김지장 신앙의 핵심체요 지장신앙의 발원지이다. 김지장은 구자산 구자암에서 일차적인 좌선수행을 접어두고 동굴수행의 단계로 접어들기 위해 은거할 수 있는 동굴을 찾아나선다. 여기서 귀한 인연을 만났으니 바로 청양고을의 거사 제갈절이라는 사람이다. 제갈절은 우연히 구화산에 올랐다가 지장스님이 혹독하게 수행하는 모습을 보고 그 모습에 감화, 뒷날 화성사를 창건하기에 이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금지차나무는 노호동 동굴에서 산능선을 타고 바위틈 사이에 자생하고 있다. 

   구화산지에는 “금지차는 줄기 속이 가는 대나무처럼 비어 있으며, 김지장이 신라에서 갖고 온 종자에서 싹튼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김지장 스님이 직접 쓴 차시 ‘동자를 보내며(送童子下山)’가 ‘전당시’(권 808)에 실려 있다.

‘절이 적적하니 너는 집 생각하는구나./ 나를 여의고 구화산을 내려가려나/ 나 혼자 대난간 아래 주막에 기대어 알뜰히 수행할거나/ 시냇가 늪에 달을 볼 생각이며/ 차 달이고 꽃도 꽂지 않으리/ 눈물을 거두고 내려가려무나/ 노승은 연하로 벗하려니’

   송대의 문장가 주필대는 “김지장 탑전에 조석으로 차 공양을 드리는 모습을 보고 참으로 신비로웠고 차의 맛은 천하일품이다”고 극찬하고 있다.

   구화불차는 선승들이 음다했던 독특한 선종차로 순하고 부드러워 맛과 향이 뛰어나 1915년 파나마 박람회에서 금상을 받기도 했다. 구화산지에는 민원차(閔圓茶)가 있는데, 차나무의 뿌리가 크고 음곡지에서 자라며 봄과 여름 교체 시에는 연한 싹이 나고 창처럼 뾰족한 잎 한 개에 기(旗)처럼 퍼진 잎 한 개가 난다. 이들 차는 김지장차에서 파생된 차라고 한다. 금지차는 수많은 이름으로 변했는데 명대에는 선인장차로, 현재에는 쌍계조아차, 서축운무차, 구화불차 등으로 불리고 있다.

   구화산은 아시아 불교의 성지로 99개의 봉우리는 자랑하고 있다. 김교각 스님은 서기 794년 99세의 나이에 참선하던 중 입적하였다. 3년이 지나도록 시신이 부패하지 않아 제자들이 등신불로 만들었다. 지장보전에 지금도 등신불이 모셔져 있다.

   김교각의 어머니는 그가 돌아올 것을 기대해 숙부를 2명 보냈으나 이들마저 김교각 스님에 감화되어 현지에서 출가했다고 한다. 그의 도력이 어떠했느냐를 가늠할 수 있다. 

   삼국사기 기록을 토대로 흥덕왕 3년(828년) 대렴(大廉)이 당으로부터 차씨를 가져온 것을 공식적인 차의 출발로 보는 한국의 차인들은 대렵보다 무려 100여년 앞서 신라 성덕왕 17년(719년) 김지장이 신라에서 당으로 차씨를 가져간 것은 왜 무시할까. 

  노호동의 한 비구니 스님은 손수 차를 볶아 마셨는데 지장불차가 반발효차였다. 구화산의 불차들은 녹차류에 속한다. 그러나 지장스님이 마셨던 지장차는 우롱차 계통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녹차류는 많이 음용할 경우 수행에 장애가 된다. 그러나 반발효차인 우롱차는 몸을 보호하기 때문에 오래 복용하고 다선일미의 선정에 빠져드는 데에 도움이 된다.

   2002년에 한국의 차인들이 힘을 모아 구화산에 김지장차 시비를 세웠다. 이는 한국 차 문화를 되찾기 위한 동아시아적 순례의 한 좋은 예가 되었다.

   경덕왕 때 신라의 차는 대로에서 차 퍼포먼스가 성행할 정도였다. 충담사(忠談師) 이야기가 그것이다. 충담사가 경덕왕에게 안민가(安民歌)를 지어 바치는 이야기는 신라의 통일에 의한 불국토의 실현에 이어 멋과 흥에 겨워서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음을 뽐내는 대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충담사는 차를 바치고 노래를 함으로써 단순히 차만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차 퍼포먼스를 한 인물로 평가된다.

   삼국유사 ‘경덕왕 충담사’조에는 충담사가 삼월 삼짇날과 중구절에 경주 남산 삼화령(三花嶺) 미륵부처에게 차 공양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경덕왕 24년(765년) 삼월 삼짇날에 그는 왕을 만나 귀정문(歸正門)에서 즉석 차회를 열게 된다. 사연인즉 이렇다. 

   당시에 당(唐)나라에서 ‘도덕경(道德經)’ 등을 보내오자 대왕이 예를 갖추어 받았다. 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4년에 오악(五岳)과 삼산(三山)의 신들이 자주 나타나 대궐 뜰에서 왕을 모셨다. 3월 3일 왕이 귀정문 다락 위에 나가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누가 길거리에 나가 위의(威儀)를 갖춘 스님 한 분을 모셔올 수 있겠느냐?”

이때 마침 외양이 그럴듯한 고승(高僧)이 길을 배회하고 있었다. 신하들이 이 승려를 왕에게 모셔 왔다. 그러나 왕이 말하였다.

“내가 말한 위의를 갖춘 스님이 아니다.”

다시 신하들이 거리에서 살피고 있는데 남루한 차림의 승려가 앵통(櫻筒)을 진 채 남쪽에서 오고 있었다. 

왕이 보더니 기뻐하며 다락 위로 영접하도록 하였다. 통 속을 보니 다구(茶具)가 들어 있었다. 왕이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충담(忠談)이라 합니다.”

“어디서 오는 길인가?”

“소승(小僧)은 해마다 3월 3일과 9월 9일이면 차를 달여 남산(南山) 삼화령(三花嶺)의 미륵세존(彌勒世尊)께 올리는데, 오늘도 올리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내게도 차를 한 잔 나누어 주겠는가?”

충담이 차를 달여 올리니 차 맛이 이상하고 찻잔 속에서는 기이한 향기가 났다. 왕이 다시 물었다.

“내가 일찍이 들으니 스님이 기파랑(耆婆郞)을 찬미한 사뇌가(詞腦歌)가 뜻이 무척 고상(高尙)하다고 하던데, 과연 그러하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위해 ‘안민가(安民歌)’를 지어 주구려.”

   충담은 곧 왕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쳤다. 왕은 아름답게 여기고 왕사(王師)로 봉했지만 충담은 두 번 절하고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신라에는 화랑의 용기를 찬탄하는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가 지어졌으며, 백성의 평화를 찬미하는 ‘안민가’가 지어졌다. 문무가 겸전하는 태평세월이 아닐 수 없다. 차는 평화와 풍요와 멋을 구가하는 한복판에 향가라는 노래와 함께 정신적 물질로서 자리하고 있었다.

   신라의 차는 이미 흥덕왕 이전에 헌공차도와 수행차도를 완성하고 평화의 물질로 자리하고 있었다. 이를 두고 국내 차학(茶學)의 권위자들이 ‘대렴의 차’를 신라 차의 공식적인 출발로 보는 것은 역사를 잘라내는 어리석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한국 차의 신화학의 실패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무상선사의 ‘선차지법’은 특히 선차는 신라에서 출발하였음을 웅변하고 있다. 중국은 오늘날도 차가 음료이고 차도는 생활차도이다. 그래서 차 퍼포먼스를 할 경우 ‘다예(茶藝)’라고 특별히 부르게 된다. 중국에서는 차예가 맞는 말이다. 일본은 근세에 들어 임진왜란을 전후로 하여 자신들의 ‘다도(茶道)’와 ‘젠(Zen)’을 정립하였을 뿐이다. 그 이전에는 불교와 함께 전해진 차를 중국 혹은 한국에서 배워 갔을 뿐이다.

   중세까지 중국과 한국에서 선진문화를 배워간 일본은 근대에 이르러 서양문화의 도입과 함께 동시에 동양문화의 정수인 유불선과 차도를 자신의 문화적 토대를 통해 근대적으로 재해석하는 데에 성공하여 동아시아 문화를 주도하게 된다. 그 결정이 바로 일본의 근현대문명이다. 여기에 ‘다선일미’ ‘화경청적’으로 요약되는 ‘다도’와 ‘젠’이 포함된다. 

   한국의 차도가 한국문화를 토대로 새롭게 정립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의 차는 한·중·일 삼국 가운데 도입 시기도 늦지 않았으며, 그것의 선차문화로의 승화에서는 도리어 빨랐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선종과 차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강호(江湖)에서 발원한 남종선은 서서히 북상하여 종래 북종선의 지역인 북경과 석가장 일대까지 범위를 넓혔다. 불교와 함께 차도 북상했던 것이다. 조주와 임제는 하북성 조주와 정정현에서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하고 있다. 조주는 ‘츠차취(喫茶去)’ 공안으로 무상이 이룩한 선차일미의 중흥을 이루었으며, 임제는 임제종(臨濟宗)을 일으켜 선종의 뿌리를 더욱 단단하게 하였다.

문화평론가 pjjdisco@naver.com

    - 세계일보 기사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