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진의 차맥] 〈22〉 한국차 신화학 다시쓰기 - ⑩ 화랑의 차, 국제화

2014. 10. 29. 00:42차 이야기






       

[박정진의 차맥] 〈22〉 한국차 신화학 다시쓰기 

- ⑩ 화랑의 차, 국제화

신라 화랑의 茶, 中대륙 건너가 ‘선차지법’으로 세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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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단석산 신선사의 ‘화랑헌다공양상’은 신라의 전통문화가 선(仙)을 바탕으로 무불습합(巫佛褶合)을 이루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유적이다. 선차(仙茶)는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융성과 함께 선차(禪茶)가 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정중무상(淨衆無相·684∼762) 선사의 ‘선차지법’(禪茶之法)은 동아시아 선차문화의 맥락에서 가장 오래된 선차일여(禪茶一如)를 보여주는 법식이다.

   화랑의 차는 정중무상의 ‘선차지법’으로 이어진다. 무상 선사에 대해서는 아직 국내 학계에서 연구가 활발하지 못하고, 따라서 일반에게 무상 선사는 잘 알려진 인물이 아니다. 그러나 무상은 원효(元曉) 이후 한국문화가 배출한 가장 위대한 승려로 보인다. 

   원효는 유학을 가지 않고 국내파로서 당시 세계 지성사의 지평에 올랐던 승려였다면, 무상은 국내에서 완성된 깨달음을 중국 무대로 옮겨서 세계적인 선승이 된 인물이다. 그의 명성은 저 멀리 티베트까지 닿아 있다. 그래서 돈황석굴에서도 그의 문서가 발견될 정도였다. 원효와 무상은 둘 다 세계사적인 반열에 오른 승려였다.

   무상의 인물됨을 미리 알았던 일본 학계는 동아시아 선종사에서 무상의 위대함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그동안 쉬쉬하면서 소극적으로 연구해 왔는데, 불교연구가 최석환씨에 의해 2001년 무상공존자가 455번째 오백나한에 들어 있는 사실을 발견함으로써 새 국면을 맞았다. 일본의 국제선문화연구소장 오키모토 가쓰미 교수는 당시 “일본과 중국 선학계가 영원히 무상을 지하창고 속에 매몰시켜 버리기를 바랐습니다”라고 질투 섞인 말을 뱉곤 했다.

   중국 쓰촨(四川) 땅에 정중종(淨衆宗)의 성립을 비롯하여 무상의 일대기와 업적에 대해서 앞으로 본격적으로 논의하겠지만 선차지법은 신라와 당(唐)의 가장 위대한 문화융합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신라의 화랑의 차는 중국 대륙으로 건너가서 선차지법으로 세계화되었다.

   육우(陸羽·733∼804)가 ‘다경’(茶經)을 저술하고 차의 정신을 ‘정행검덕’(精行儉德)이라고 선언한 것이 780년경이다. 무상 선사가 ‘선차지법’(禪茶之法)을 내놓은 것은 육우보다 적어도(무상의 입적연대를 기준으로 잡더라도) 20여년 앞선다. 

   신라 성덕왕의 셋째아들인 무상은 신라 군남사(群南寺)에서 이미 득도(736년)를 하고 당(唐)으로 유학을 갔다. 이때 그의 나이 50을 넘었다. 따라서 그의 견당은 불교를 배우러 갔다기보다는 일종의 스스로의 법력을 확인할 겸 더욱 넓은 세계에서 자신의 불법을 펼치기 위한 순례의 여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무상은 입당 이듬해에 쓰촨성 성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검남종(劍南宗)의 지선(智詵)과 처적(處寂)으로부터 내려온 무명가사를 받고 법맥을 잇는다. 이방인에게 있을 수 없는 기적과도 같은 것이다. 그와 동시에 무억(無憶)·무념(無念)·막망(莫忘)의 삼구설법(三句說法)을 대중에게 펼친다. 마치 질풍노도와 같은 행보이다. 이는 마치 당나라에 불법을 한수 가르치러 간 형국이다. 

화랑도는 자연과 일치된 신선의 삶을 추구한다. 1942년 경주 단석산 신선사 상인암에 있는 신라화랑유적을 답사하는 고고학자, 금석학자, 민속학자들.                                                        ‘차의 세계’ 제공

   차나무의 발생지는 중국 쓰촨·윈난(雲南)성 지역이다. 중국으로부터 차나무를 전래받고 문화적 세례를 받았지만 ‘선차지법’은 차 문화의 수입국에서 수출국인 대륙으로 역으로 보답하는 첫 신호탄의 의미가 있다. 무상과 비슷한 연대의 김교각(金喬覺·696∼794)지장보살은 자신이 즐겨 마시던 차의 맛을 잊지 못해 차씨를 중국 안후이(安徽)성 구화산으로 직접 가져가 심었을 정도였다. 이런 일련의 일들을 보면 당시 통일 이후의 신라사회는 불교를 중심으로 문화적 대폭발을 하고 있었고, 이에 차가 동반하고 상승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상의 ‘선차지법’은 신라 화랑의 차와 중국 일상의 차 문화가 만나서 이룬 문화융합이고 통섭이다. 무상이 선차지법을 내놓은 것은 이미 그가 신라에서 선(禪)과 차(茶)를 일상화했을 뿐만 아니라 일상의 차(茶)가 바로 불법(佛法)이라는 것을 깨달았음을 의미한다. 선차지법이라는 네 글자에는 상상하지도 못할 문화적 비밀이 숨어 있다. 차나무는 물론 중국을 원산으로 하여 동아시아에 퍼졌지만 차 문화는 중국에 못지않게 일찍부터 한국에서도 성숙하였음을 알 수 있다. 

   구한말과 일제강점의 과정을 거치면서 먹고살기에도 급급했던 한국문화는 그들의 훌륭한 전통을 되살리기에는 힘겨웠다. 오늘날 차를 둘러싸고 차 문화의 부흥이 논의되는 것은 국력의 신장과 더불어 문화대국으로의 진입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문예부흥은 쉽지 않다. 전통의 맥을 알고 그것을 다시 시대에 맞게 법고창신(法古創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때에 가능하다. 

   간단히 말하면 한국 차도는 일본을 향하여는 매월당을 내세우고, 중국을 향하여는 무상을 내세우면 자긍심을 얻을 수 있다. 매월당은 초암차(草庵茶)의 원류이고, 무상은 선차(禪茶), 다선일미(茶禪一味)의 원류이기 때문이다. 매월당과 무상을 징검다리 삼아 차 문화를 제대로 정립할 때 한국의 차도와 불교는 세계적인 자긍심을 가질 수 있게 된다. 한국 차 문화는 다선일미에 놀라고 중국의 물량공세에 주눅들 필요가 없다. 선의의 경쟁을 통해 한국 차 문화를 부흥시키면 된다.

   ‘다선일미’는 송나라의 원오극근이 12세기 초(1128년)에 법제자 구큐조류(虎丘紹隆)에게 준 법어라고 한다. 그러나 그 묵적은 눈으로 확인된 바는 없다. 그럼에도 다선일미의 신화를 구축한 일본의 문화능력과 깊이에 감동할 따름이다. 우리에게는 선차지법이 있다. 무상의 ‘선차지법’이 적어도 8세기 중엽이니 400년 이상 앞선다. 이는 놀라운 사실이다. 한국에서는 다선일미가 등장하기 전에 이미 선차지법의 전통이 있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선차지법의 원류는 무엇일까. 신라의 풍류차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무상이 중국으로 건너가자마자 그렇게 선차를 부르짖었던 까닭은 신라에서부터 선차의 정신에 익숙했던 탓이다. 한국문화가 불교와 유교가 득세하는 가운데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문화적 주체성을 가질 수 있었고, 그들과 다른 나라를 유지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풍류도의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풍류도는 선(仙)을 바탕으로 유불을 통합하는 정신이다. ‘선’은 한국과 한국문화의 존재의 이유와 같은 것이라서 때로는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수려한 자연을 바탕으로 풍류를 즐기며 평화를 사랑하고 낙천하는 성격은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자연친화적이고 모성적인 문화를 낳았던 것이다.

   한국문화만큼 자연과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은 없다. 불교와 차의 융성이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신라사회에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한국문화가 세계에 내놓았던 첫 번째 꽃, 세계화(世界華)이다. 무상, 매월당, 초의를 관통하는 차의 정신과 법도는 바로 ‘풍류차’(風流茶)이다. 그 사이에 여러 승려와 선비들이 포진하여 한국의 차도를 징검다리처럼 잇고 있다. 앞으로 선차지법을 비롯하여 불교와 차에 대해서 자세하게 이야기할 것이다. 그에 앞서 왜 한국인이 이토록 불교와 차의 정신적 유대를 설정하는 데에 앞서갈 수 있었고, 중국과 대등한 교류를 할 수 있었느냐를 생각하면 역시 유불선 삼교를 융합하는 힘에서 찾을 수 있다. 

경주 단석산 신선사 암벽에 있는 ‘화랑헌다공양상’. 복건을 쓴 두 명의 화랑이 자루가 달린 다기와 버드나무 가지를 들고 있다.             
  ‘차의 세계’ 제공
우리 조상들은 유교와 불교를 도입할 때 이미 나름대로 전통적인 신선(神仙)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신선사상을 말할 때 양생법을 비롯하여 여러 해설이 있지만, 그것을 관통하는 사상은 역시 자연친화적인 삶이다. 자연은 오늘날도 인류문명의 새로운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 자연을 대신하는 여러 말들을 인류는 생산하였지만, 역시 자연 이상의 말은 없다. 신선사상은 인간(人=仙)과 신(神)이 하나가 되는, 자연(山)과 인간(人)이 하나가 되는 사상이다. 

   차를 가장 먼저 신이나 조상의 제례에 봉헌물로 올린 종교는 중국에서 불교가 아니라 도교이다. 한국에서 도교와 흡사한 것이 신선교 혹은 샤머니즘이다. 이원시종교들은 자연과 인간의 순환관계와 서로 몸을 주고받는 관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시작했다. 영육일원론(靈肉一元論)과 영육이원론이 있지만 일원론이 먼저이다. 풍류도는 바로 영육일원론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신라인에게는 산천이 바로 불국토였다.

   풍류는 그 상위(上位)에 있어서는 윤리·종교와 연결되고, 하위(下位)에 있어서는 본능·삶과 결부된다. 이것은 초월적 정관성(靜觀性)과 동시에 유락향수(遊樂享受)의 이중적 태도를 동시에 가질 수 있음을 말한다. 나아가서 풍류의 핵심은 양자를 중용적으로 취하는 것인데, 이것 자체가 이미 미적인 태도로 사물을 보는 우리 민족의 사고원형을 웅변하고 있다. 중국의 노장(老莊)이나 도가(道家)사상은 우리의 풍류정신과 맥을 닿는다. 

   중국의 도교는 특히 불교보다 먼저 차와 관련을 맺었으며, 이를 불교가 후에 도입한다. 중국 도교의 발상지의 하나는 쓰촨성 성도 부근의 청성산(靑城山·해발 1600m)이다. 청성산의 후산인 천곡산(天谷山·고태안사 지역)은 신라에서 건너간 정중무상이 선정을 닦고 암차열매를 달여 차를 마셨던 곳이다. 무상은 왜 그의 수도의 장소로 청성산을 택했을까. 무상이 선차지법을 외친 것은 아마도 일찍이 차의 효험에 대해 정통하였음은 물론이고, 차가 선정에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무상은 당으로 들어가자마자 융숭한 대접을 받으면서 입성한다. 무상이 입당하자마자 당의 측천무후와 현종은 물론 사천지방의 고승대덕들에게 승인을 받고, 대중교화에 앞장선 것은 실은 매우 혁명적인 사건이다. 무상은 또한 마조라는 출중한 제자를 두게 되고, 마조는 중국 불교 전체를 대표할 정도로 남종선의 중흥조가 된다. 이러한 과정을 보면 신라의 불교가 도리어 중국 불교에 한수 가르쳐 준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무상의 법력의 원천은 무엇일까. 이는 원효의 화쟁(和諍)과 무애(無碍)의 법, 회통불교의 전통과도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것의 정체는 바로 선(仙)의 자연주의 전통일 것이다. 한국인(한민족)은 ‘삼국지위지동이전(三國志魏志東夷傳)’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예부터 자연친화적인 삶을 영위하고, 가무를 좋아하는 민족으로 살아왔다. 자연친화적인 삶과 가무를 좋아했다는 것은 매우 낙천적인 민족이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성격은 약육강식과 전쟁과 국가·제국을 지향해온 인류문명과 역사로 볼 때 매우 불리한 요소이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수많은 외침에 시달렸고, 그것으로 인한 권력 자체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과 한(恨)의 역사를 기록해 왔다. 물론 한을 풀기 위한 신(神), 신명(神明), 신바람도 자기 보완으로 가지고 있었다. 

   한국의 오랜 문화전통 가운데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바로 유불선의 삼교의 회통이다. 말하자면 유교를 숭상하더라도, 불교를 숭상하더라도 항상 선교(仙敎)의 전통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앞으로도 어떠한 사상이나 철학과 문화가 들어오더라도 결국 선교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교란 오늘의 철학이나 사상으로 해석하면 다름 아닌 자연주의이고 존재적 삶을 영위함을 의미한다. 역사는 권력을 추구하는 소유와 존재자의 편이다. 이것이 가부장사회 이후의 역사이다. 이렇게 보면 한국인의 자연친화주의나 평화주의와 존재적 삶은 여성적 삶을 의미한다. 신선의 삶은 바로 자연과 일체가 되는 삶이고 여성적 삶에 가깝다.

   신선사상이 문화적으로 가장 활발하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 삼국통일의 원천적인 힘이 된 화랑도이고, 풍류도이고 풍월도이다. 풍류라는 말을 중국과 일본에도 있지만, 유불선의 삼교를 통섭하는 의미에서 풍류를 쓴 것은 한국문화의 특성이다. 한국의 차 문화도 이것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풍류도는 한국인의 문화적 DNA이다. 우리 민족에게는 융합하는 힘이 있다. 한국의 차도도 역시 이러한 문화적 바탕을 토대로 구축될 때보다 한국적인 것이 나올 것이다.

   한국의 미학은 자연친화이다. 자연에 마음을 열어놓고 될수록 자연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최소한의 인공을 가하려고 한다. 한국인은 항상 자연과 서로 침투하면서 통로를 두고 대화하기를 즐긴다. 그래서 사방에 벽이 없는 수많은 정자문화를 가지고 있다. 한국의 건축학에서 주위의 경관을 빌리는 것을 차경(借景)이라고 한다. 한국인은 자연과 인간이 항상 공동 거주하는 형국이다. 이러한 전통이 바로 ‘선’(仙)을 바탕으로 하는 자연주의이다. 바로 그 ‘선’이 정자(亭子), 초암(草庵), 일지암(一枝庵)의 전통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문화평론가〉

     -  세계일보 기사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