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0. 29. 14:09ㆍ차 이야기
박정진의 차맥] <64> 조선 후기 선비 차인들
⑭ 해거도인 홍현주, 귤산 이유원, 자하 신위
침체기 茶문화 복원 기여… ‘생활 속의 차인들’ 불려
한국의 ‘다경(茶經)’이라고 일컫는 ‘동다송(東茶頌)’은 해거도인(海居道人) 홍현주(洪顯周·1793∼1865)의 요청에 의해 쓰여졌다. 홍현주는 정조의 딸 숙선옹주의 남편으로 평생 차를 즐긴 차인이었다. 그가 남긴 차시는 무려 110여 수에 달한다. 홍현주가 초의선사에게 차에 대해 물은 것은 1837년이다. 초의의 차맛을 본 해거는 이후 차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는 초의차를 맛보기 전에 이미 중국의 보이차를 즐겼고, 중국 황실 납품차인 북원(北苑)의 연고차(硏膏茶)를 마셨다.
그는 차를 손수 달였으며 벗이나 친지들이 찾아오면 으레 차를 나누어 마셨던 것으로 보인다. 해거는 초의를 만난 뒤에 차에 부쩍 관심을 가졌다. 초의를 만난 뒤인 1838년 한 해 동안 무려 10수의 차시를 쓴다. 그는 차 마니아로서 차의 재배·법제·달이기 등 전반적인 지식에 관심을 가졌다. 이에 진주목사로 부임하는 변지화편에 넌지시 초의에게 물어보았고, 이러한 소식을 접한 초의는 그동안 경험과 차의 전문성을 총동원하여 시를 짓게 된다.
어쩌면 해거도인이 없었으면 ‘동다송’은 탄생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해거도인은 참으로 차를 사랑하는 생활 속의 차인이었다. 그가 겨울 눈물(雪水)로 보이차를 끓이는 정경을 읊은 시를 보자.
“계미년 겨울 섣달 12월에/ 중천에 해 뜨도록 남창에서 잤다네/ 대사립은 구름 잠겨 문 두드리는 사람 없고/ 눈 덮인 매화꽃 핀 오두막엔/ 세상 잡사가 없네/ (중략)/ 벽돌 화로에 수탄(獸炭) 피워 불기운 살자/ 돌냄비에 어안(魚眼) 일고 솔바람 불어온다/ 하인 아이 못 맡기고 직접 차를 달이네/ (중략)/ 통우물과 미천(尾泉) 물은 오리려 두 번째다/ 한영(寒英·雪水를 말한다)이 참으로 마른 목에 맞다.”
서울대 인문관 옆 자하연에 세워진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자하 신위의 동상과 차 시비. |
차는 당시에 음료보다는 약용으로 많이 사용한 듯하다. 다산도 약용으로 사용한 흔적이 곳곳에 드러나고 있지만, 홍현주도 마찬가지이다. 당시 한강 주변, 특히 두물머리(능내리) 부근은 차 문화가 한창 꽃피웠던 지역이었다. 북학파 경화사족(京華士族)들과 서학파 남인들은 차를 통해 문화적 교류와 깊이를 더했다.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 가기 전에도 차를 마셨고, 유배지에서 차 문화를 부흥시켰던 것은 실은 한강 주변에서 풍성했던 차 문화의 전통 덕분이었다. 그 때문인지 오늘날도 이 일대는 차 문화의 번성지이다. 시가 있는 곳에 차가 있었고, 차가 있는 곳에 시가 있었다. 다시일미(茶詩一味)의 전통은 다산의 아들 정학연이 들어있는 ‘두릉시사(斗陵詩社)’는 차문화가 꽃을 피운 증거이다. 해거도인은 정학연과 친구인 이만용이 밤중에 들르자 차를 대접한다.
“손님 붙들어 다구에서 어안(魚眼)이 일자/ 추위 막는 매벽(梅壁)에는 표범 무늬 얼룩졌네/ 당당한 빠른 세월 누가 잡으리오/ 살아생전 자주자주 왕래하길 바랄 뿐.”
해거도인은 술보다 차를 좋아했다. 그의 다른 시를 보면 산속에서 달빛을 벗 삼아 차를 끓이고 향을 피우는 도락을 즐겼던 듯하다. 그도 다산처럼 서울에 앉아서 차 생산지에 있는 친지들에게 차를 구걸하는 시를 지어 보냈다. 다음은 이상적에게 보낸 걸명시이다.
“도가(陶家)의 눈(雪) 가져다가 끓이게 할 뿐/ 번거로이 옥정(玉井) 얼음 어이 쓰겠는가/ 좋은 차를 보내주어 명하(茗?·차 먹고 싶은 병)를 씻어주되/ 일곡이두(一斛二斗) 헤아리고 다시 닷 되 보태주소.”
숙선옹주와 함께 나란히 누워있는 해거도인 홍현주(경기 고양시 일산동구 석석동 861-2). 월간 ‘차의 세계’ 제공 |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1814∼1888)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대전회통(大典會通)’을 편찬할 때 책임자인 총재관을 지낼 정도로 덕망이 높았다. 흥선대원군과 사이가 좋지 않아 실각하기도 했으나 대원군이 물러간 후 영의정에 올랐다. 전권대신으로 일본의 요시타다와 제물포조약에 조인한 인물이다.
이유원은 46세 때인 1859년, 지금의 남양주시 화도읍 수동면 가곡리 가오곡(嘉梧谷)으로 주거를 옮긴다. 이곳에 장서각(藏書閣)과 다옥(茶屋)을 짓고, 사시향관(四時香館)과 오백간정(五百間亭) 등을 세워 은거하기로 작정한다. 그가 쓴 ‘가곡다옥기(嘉谷茶屋記)’에는 자신의 차 애호의 변을 기록하고, 자신이 손수 설계한 다옥에 대해서도 설명해 보인다.
‘문헌과 해석’(2008년 여름호)은 19세기 문화지도 귤산 이유원을 특집으로 하였으며, 여기서 정민 교수(한양대 국문학)는 ‘이유원의 차시와 차 생활’을 조명했다. 이는 잃어버린 조선후기 차 문화 복원의 전기를 마련했다. 월간 ‘차의 세계’는 ‘다옥 짓고 차 생활 즐겼던 이유원을 다시 본다’(2008년 11월호), ‘이유원 왜 잊고 있었나’(12월호)를 연이어 내보내면서 이유원은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차인들의 헌다(獻茶)의 발길이 이어졌다. ‘가곡다옥기(嘉谷茶屋記)’에 쓰인 차 애호의 변을 보자(정민 번역).
“내 성품이 평소에 차를 좋아한다. 사방의 이름난 차를 얻으면, 문득 산수가 좋은 곳으로 달려가 끓여 마신다. 한강 가에 살 때는 작은 집을 지어 ‘춘풍철명지대(春風啜茗之臺)’라고 하였다. 글씨는 수옹(遂翁) 섭동경(葉東卿)이 써서 주었다. 후에 가오곡(嘉梧谷)으로 이사해서는 퇴사담(退士潭)을 파서 좋은 물을 얻어, 호남의 보림차와 제주의 귤화차(橘花茶)를 끓여 마셨다. 근자에 연경에서 돌아온 주자암(周自菴)이 진짜 용정차와 우전차를 주므로 못물을 길어다가 함께 달였다. 솔 그늘과 대 그림자 사이에 솥과 사발을 늘어놓고 날이 저무는 줄도 몰랐다. 하지만 손을 대고서 찻물을 따라도 오히려 티끌이나 모래 등이 날려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에 나무를 세워 시렁을 만들고, 위에는 판자로 덮었다. 집 모서리에다 이를 세우니 간데없이 하나의 집이 되었다. 길이는 다섯 자 남짓 되고 너비는 두 자가 넘었다. 가운데에는 화로를 고일 틀이 있었다. 구리줄로 다관(茶罐)에 드리워 고리에 매달았다. 수탄(獸炭)을 화로 구덩이에 넣고 부채로 바람을 일으키면 바람이 스스스 불어 솔가지가 바람에 울부짖는 소리를 낸다. 해안(蟹眼)의 상태가 막 지나고 나면 어안(魚眼)이 또 생겨난다. 듣고 있노라면 정신이 아득해졌다가 차를 마시면 정신이 깨어나곤 했다. 소동파가 간직해두었다는 밀운룡(密雲龍) 차가 어찌 내가 얻은 용정차나 우전차가 아닌 줄 알겠는가? 다만 네 학사를 후대해 줄 기약이 없음이 안타깝다. 물건의 신품(神品)은 언제나 있지만,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내 다옥(茶屋)을 나 홀로 좋아할밖에.”
이유원은 수동으로 물러나기 전 서울 집에서도 ‘춘풍철명지대’라는 특별한 차 공간을 마련했었다. 좋은 차를 구해 차도락(茶道樂)을 구가했으며, 호남의 보림차, 밀양 황차, 제주 귤화차 등과 중국 용정차를 즐겼다. ‘임하필기(林下筆記)’에서는 차에 관한 그만의 노하우를 열거하기도 했다. 중국 다서를 참조했다고 하더라도 차에 대한 내공이 만만치 않다.
“차는 가는 것을 채취해야 하고, 차는 따뜻하게 보관해야 한다. 차는 뜨겁게 끓여야 한다. 가늘지 않은 것을 채취하면 맛이 쓰다. 따뜻하게 보관하지 않으면 곰팡이가 핀다. 뜨겁게 끓이지 않으면 맛이 줄어든다. 특히 깨끗한 것을 높게 친다. 햇볕을 쬐면 안 되니 맛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옥경고잉기(玉磬??記)’에서는 “차는 빛깔로 고르고 대나무는 그림자로 택한다(茶取其色·竹取其影)”고 하였다. 서울에서 벼슬할 때 술은 실컷 마셨으니, 시골에서는 차를 즐기기로 다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심지어 “이제부터는 차만 즐겨 다전(茶顚) 즉 차 미치광이로 불려도 괜찮겠다”고 했다.
그가 노래한 ‘철다음(啜茶吟)’에는 다음의 구절이 보인다. 차벽(茶癖)을 노래한 것이다.
“절집 같은 거처라 터럭 있음 의아하고/ 처녀 같이 숨어 사니 연지 없음 부끄럽다/ 술병의 차고 더운 맛은 이미 보았거니/ 늙은 나이 다전(茶顚)으로 불려도 괜찮으리.”
그가 지적한 강진 보림사의 죽로차(竹露茶)에 대한 장시(長詩)는 사료적 가치가 크다. 잃어버린 한국의 차사를 복원하는 데에 결정적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보림사의 차가 매우 맛이 좋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보림사는 강진에 자리 잡고 있네/ 호남의 고을이라 싸릿대가 공물이네/ 절 옆에는 밭이 있고 밭에는 대가 있어/ 대숲에서 자란 차는 이슬에 젖네/ 세상사람 안목 없어 심드렁하지만/ 해마다 봄이 오면 제멋대로 우거지네/ 어쩌다 차에 해박한 정열수(丁洌水·다산을 말함) 선생께서/ 중에게 가르쳐서 바늘 싹을 골랐다네.”
그는 보림사 죽로차를 자하(紫霞) 신위(申緯·1769∼1845)의 집에서 맛보았다. 초의가 스승인 완호대사의 삼여탑(三如塔)의 비문을 받기 위해 폐백으로 드린 게 바로 선물 차였다. 자하 신위는 초의에게 전다박사(煎茶博士)라는 칭호를 내린 인물이다.
자하도인이라 불린 신위는 초의와 1830, 31년쯤에 처음 만난다. 물론 초의가 스승 완호의 탑명(塔銘)을 받으려고 상경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당시 도성 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던 초의는 두릉으로 정약용을 찾은 다음 용호(蓉湖)로 추사의 집을 예방하였다. 그러나 당시 추사의 아버지 김노경이 고금도로 위리 안치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부탁도 못하였다.
‘동다송’이 홍현주의 명에 의해 쓰여졌음을 전하는 서문. |
“차 맛이 진수를 드러낼 때 속됨을 고치고/ 좋은 시 아름다운 경치는 참선에 들게 하네/ 비명을 청하니 두 분 스승이 꿈 속에 있는 것 같네/ 삼생(三生)은 잠시일 뿐 본성은 원만하다/ 제자들이 성에 가득해서 돌아가지 못하네/ 정을 잊으려 할 때 정에 끌림이 있네.”
자하가 특히 차에 관심이 많은 이면에는 그의 불교에 대한 심취가 작용한 것 같다. 신위는 당시 강력한 문예정신의 소유자였으며 국제적인 안목을 가진 차인이었다.
신위는 조선 후기 문예전반의 최고 상징적 인물인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1713∼1791)의 만년 제자였다. 강세황은 “향은 오래 머물고, 차는 쉬 익는다. 이들이 문방(文房) 친구로 있으니 혜강(?康)의 차벽(茶癖)을 비웃지 마라”라고 할 만큼 차의 마니아였다. 강세황의 제자였던 신위는 스승을 통해 차에 눈을 떴고, 중국 사절로 갔을 때 옹방강을 만나 차에 대한 감식안을 높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위가 초의차를 맛보고 지은 ‘남다시병서’는 앞에서 소개하였지만, 그는 한국 차의 연원에 대해서도 관심이 커서 중국(中州라고 함)에서 차시를 가져와서 지리산(山谷이라 함)에 파종했다는 사실을 적시했다. 그는 자신의 다벽을 시에 이렇게 읊었다.
“내 삶은 담박하지만 차벽이 있네/ 차를 마시면 신기(神氣)가 꽃피네/ 용봉단차는 모두 훌륭한 차라네/ 화려한 그릇에 맛있는 음식/ 기름진 고기는 사치스럽다/ 한 잔의 차로 기름기를 씻어내리/ 겨드랑이에 바람이 이는 것은 노동(盧仝)의 노래라네.”
그의 청빈하고 담박한 삶과 차 정신을 엿볼 수 있다. 그가 홍현주에게 보낸 시에서도 청담 차인으로서의 기품을 여실히 드러냈다. 그는 차를 부처님 공양물이면서 문화의 품격을 높이는 음료로 보았다.
“부처님에게 공양하고 남은 차는 시인의 벗이요/ 묵객의 품격을 높이네.” 신위는 차를 깨달음과 문화예술의 음료로 격상시키는 데 일조하였다.
박정진 객원논설위원·문화평론가 pjjdisc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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