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진의 차맥] <62> 조선 후기 선비 차인들 ⑫ '다성' 초의 의순
2014. 10. 29. 14:33ㆍ차 이야기
[박정진의 차맥] <62> 조선 후기 선비 차인들
⑫ '다성' 초의 의순
15세 때 출가 … 불학에 정통한 인재
다산에게 차 배우고 유학·시문 익혀
시 잘 짓고·그림 잘 그려 총애받아
유교로 이끌려는 스승의 청 뿌리쳐
관련이슈 : 박정진의 차맥
언제부턴가 한국의 다성(茶聖)으로 일컬어지는 초의(草衣) 의순(意恂·1786∼1866). 그는 선사(禪師)로서 선비는 아니다. 그러나 그는 가장 선비적 사고에 도달한 선승이다. 그는 다산의 제자로서 비록 유학으로 이끌려는 다산의 뜻을 뿌리쳤지만 이미 유학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다산은 초의에게 주역과 논어 등 유가 경전을 가르쳤으며 시문학습을 강하게 시켰다. ‘동다송(東茶頌)’이라는 훌륭한 송(頌)이 나온 것은 이때의 시문학습에 크게 힘입었을 것이다. 초의에 대한 다산의 애정은 각별했다. 초의는 다산에게 오기 전에 시도 잘 짓고 그림도 잘 그려 일정한 수준에 올라와 있었으니 그 제자가 여간 탐나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다산은 이렇게 유혹한다.
“내가 불서를 보니, 예컨대 개는 불성이 없다거나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라거나, 뜰 앞의 잣나무라거나, 서강의 물을 다 마셔버렸다거나 등의 여러 가지 화두는 사람으로 하여금 의심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 구경의 법이란 온통 적멸로 들어가는 것뿐이다. 어찌 몸과 마음에 보탬이 있겠는가? 의심이 없는 곳에서 의문이 있고, 의심이 있는 데로부터 의문이 없기를 기필한 뒤라야 독서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유교와 불교가 갈라지는 까닭이다.”
(좌) 초의선사 영정. 아모레퍼시픽박물관에 소장 (우) 몽유가 그린 ‘일지암도’. 차의세계 제공 |
차인들은 초의를 다승으로 보지만 실은 그는 조선 후기 불교논쟁의 정점을 이룬 ‘선문사변만어(禪文四辨漫語)’를 낸 이론가이다. 이 논쟁은 당시 선불교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백파(白坡) 스님이 낸 ‘선문수경(禪文手鏡)’의 삼종선(三種禪), 예컨대 의리선(依理禪)-여래선(如來禪)-조사선(祖師禪)의 분류에 반기를 든 것이다.
초의는 조사선과 여래선은 물론이고 격외선(格外禪)과 의리선 등의 사변(四辨)을 중심으로 백파와 맞서면서 전선(專禪)으로 기울지 않고 지관(止觀)을 주장했다는 데에 그의 선사상의 특징이 있다. 수행의 방법을 두고 다름은 있지만 차등이나 우열이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 정도로 불학에 정통한 인재였으니 다산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을 것이다.
초의는 다산으로부터 차를 배우고 유학과 시문을 배움으로써 불문에 끊어지다시피 한 선차의 전통을 다시 잇고, 또 ‘동다송’이라는 한국 차문화 중흥의 대들보 같은 책을 저술할 수 있었다.
그는 결국 일지암으로 돌아가서 우리나라에 면면히 이어온 초암차의 정신을 실현했다. 다산의 초당과 초의의 일지암은 실은 같은 정신의 소산이다.
초의선사는 분명 조선 후기에 차문화를 중흥한 3인(다산·초의·추사) 중에 한 인물이지만, 과연 오늘의 한국 차가 그에게 목을 매달아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초의에 매달림으로써 선대의 차 문화를 등한시하고 연구를 하지 않는다면 초의를 팔아서 차 권력을 얻으려는 후세의 못남이라는 비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초의는 15세 때 운흥사의 벽봉(碧峯) 민성(珉聖)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몇 해 뒤에 완호(玩虎)에게 수계하였다. 의순은 머리를 깎을 때 벽봉에게서 받은 법명이다.
초의란 이름은 이백의 ‘태백호승가서(太白胡僧歌序)’에 나오는 초의(草衣)라는 호승의 이름을 따온 것인데 ‘풀잎으로 옷을 해 입고 능가경을 늘 외우는’ 삶을 흠모한 까닭이다. 의(衣)자는 스승 완호의 법제자(縞衣·草衣·荷衣)의 돌림자이기도 하다.
초의에서는 다산의 영향을 여러 면에서 볼 수 있다. 먼저 그의 자(子)는 중부(中孚)다. 중부란 주역의 중부 괘에서 온 말이다. 중부 괘는 주역의 60괘(‘風/澤=?/?’)로 가운데에 음이 둘이고, 아래위로 양이 감싼 모습이다. 중부는 ‘안에서 믿음이 나옴’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가장 안정된 균형 잡힌 인간의 모습이다. 초의는 또 ‘동다송’에서 차 정신을 말하면서 중정(中正)을 강조했다.
“체(體)와 신(神)이 비록 온전하더라도 중정이라는 것을 잃을까 두렵다. 중정이라는 것은 건(健)과 영(靈)을 아우르는 데 지나지 않는다(體神雖全猶恐過中正 中正不過健靈倂).”
중정은 실은 유학의 용어이다. 중부와 중정은 다산의 영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초의라는 법명은 분명 불가의 것이지만, 중부와 중정은 유가의 영향을 읽게 한다. 중부는 중정의 뜻과 통하고, 다산과 만난 이후에 얻은 이름(자)이고, 철학(차 정신)이다.
(좌) 초의 스님 부도. (우) 일지암을 찾은 필자. |
조선후기 국력의 쇠퇴와 함께 전통 차 문화도 점차 소멸해가던 시점에 다서 ‘동다송’을 지어 동다(東茶)가 있음을 포효한 그는 분명 한국 차문화사에서 특출한 인물임은 분명하지만 과연 국제적으로 내놓아도 손색없는 ‘다성’일까를 두고는 의문이다. 말하자면 중국의 다성 육우(陸羽)나 일본의 센노리큐(千の利休) 정도의 레벨에 오를 수 있는 인물인가가 문제이다. 이는 육우나 센노리큐를 높이자는 것이 아니라 만약 그만 한 비중의 인물이 아닌데 자화자찬으로 우리가 그렇게 했다면 그들로부터 비웃음을 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한국의 다성은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조선후기에 나타났으니 그 이전에는 그만 한 인물이 없다는 것을 자인하는 셈도 되기 때문에 한·중·일 삼국의 차문화를 비교할 때 여러 면에서 불리한 입장에 서게 된다.
특히 일제강점기 때 한국의 차 문화를 말살하고 자국의 ‘다도(茶道)’를 보급한 일본과 비교에서 볼 때 그들의 거만함을 누를 길이 없다. 한국의 차인들 가운데는 ‘다도’ 하면 으레 ‘일본 다도’이고, 일본의 다도가 차 문화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다. 일본의 초암차는 임진왜란 전에 매월당 초암차가 건너가서 일본식으로 변형정리된 것이라는 점을 알면, 한국 차 문화의 중심을 조선 후기에 머물게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다산·초의·추사는 분명 한국의 차 문화사에서 면면히 흐르는 물줄기 속에서 조선 후기에 드러난 불세출의 차인들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차 문화의 논의를 맡겨두는 것은 여말선초의 ‘두문동 차인’들이나 매월당의 ‘초암차’ 그리고 영남사림과 남인들에게 도도하게 흘렀던 ‘남인의 차’ 전통을 무시하는 것이 된다. 최근 차 연구가 최석환은 이렇게 말했다.
“1866년 초의 선사가 열반에 이르자 그의 다도 정신은 잊혀져 갔다. 그러다가 1956년 신헌이 찬한 ‘초의대종사비’가 세상에 드러나면서 다시 부각되기 시작했고, 1980년 일지암 복원이 이루어지면서 초의 선사는 국제무대에서도 다성으로 높이 존경을 받게 되었다.”
말하자면 초의 사후 100여년간 초의의 차 문화에 대해서는 후손이나 제자들이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겨우 초의대종사비가 재조명되면서 다시 그의 이름이 재론되기 시작했고, 다시 사반세기를 지나 일지암(一枝菴)이 복원되면서 본격적으로 그를 기리기 시작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다소 급조된 감이 없지 않다.
초의선사가 ‘동다송’을 쓰게 된 동기도 해거도인(海居道人) 홍현주(洪顯周·1793∼1865)가 다도(茶道)에 대해 물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서였다. ‘동다송’은 정조의 사위인 해거도인에게 한껏 그의 시재를 뽐내는 기회도 되었을 것이다. ‘동다송’은 중국의 차에 비해 해동(海東)의 차, 즉 동차(東茶)를 찬양하는 한 편의 서사시이다. ‘동다송’은 차의 뜻과 차의 요체를 뽑아 종국에는 차의 원류에 소통하기 위한 송(頌)이다.
초의는 이에 앞서 홍현주에게 스승 완호의 탑명을 부탁할 때 봉례품으로 보림사 차를 선물하였다. 바로 이 선물이 초의로 하여금 한양의 사대부 및 선비들과 사귀는 계기가 된다.
“1830년에 스승 완호의 사리탑 기문을 받기 위해 예물로 가져간 것이 보림백모 떡차였다. 우연히 벗을 통해 이 차의 맛을 보게 된 박영보가 ‘남차병서’를 지어 사귐을 청하고, 초의가 이에 화답함으로써 초의차가 세상에 처음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그(박영보)의 스승 신위가 다시 ‘남차시’를 지어 그 차 맛을 격찬하며 전다박사로 치켜세우자, 초의의 명성은 경향 간에 드높게 퍼져나갔다.”
초의는 추사는 물론이고, 여러 선비들과 교제하게 되면서 한양의 선비 사회에 시를 잘 짓는 승려로 이름을 얻게 된다. 초의의 이런 모습은 척불숭유 정책으로 승려는 도성에도 출입을 하지 못하는 시대상으로 볼 때 불가에서는 부러움과 질투의 대상이 되거나 아니면 배반자로 낙인 찍혔을 수도 있다. 초의가 사후 불문에서 쉽게 잊어졌던 것은 바로 이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일지암은 초의선사가 중년에 건립하여 말년까지 기거했던 공간이다. 한국 차문화사의 성지이며 다선(茶禪)의 조정과도 같은 공간이다. 어쩌면 초의선사는 한국 초암차의 전통을 한눈에 보여주는 일지암으로 더 유명해졌을 수도 있다.
초의는 대둔사의 촉망받던 학승이었다. 그는 왜 갑자기 일지암을 짓고 더욱더 은둔해버렸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유불선을 관통해버렸던 것이다. 초의는 불가에 몸을 담았지만 불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유불선을 통섭한 인물로, 제2의 매월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신헌(申櫶·1810∼1884)의 ‘금당기주(琴堂記珠)’에는 초의의 학문적 성격을 통섭적으로 바라보는 글이 있다.
“사문 의순은 자가 중부다. 무안현 장씨 집안에서 태어나 운흥사 민성의 방에서 머리를 깎았다. 연담(蓮潭)을 사숙하여 불법을 얻었다. 다산에게 몸소 가르침을 받아 도를 전함을 들었다. 한산(寒山)과 습득(拾得)에게서 깨달음을 얻었다.”
정민(한양대 국문과) 교수는 이 대목에서 한산과 습득에 주목한다.
“한산과 습득은 당나라 때 천태산에 살았다는 전설적 은자(隱者)다. 현재 남은 한산의 시는 그가 천태산의 나무와 바위에 써놓은 것을 국청사(國淸寺)의 승려가 수습해 편집했다는 것이다. 초의가 한산과 습득의 시를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은 다른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다.”
일지암의 일지(一枝)는 한산의 시 “언제나 저 뱁새를 생각하노니/ 한 가지만 있어도 몸 편하다네(安身在一枝)”에서 따온 말이다. 뱁새는 제 몸을 깃들이는 데 일지, 즉 하나의 나뭇가지면 충분하다는 뜻이다. 신헌의 ‘초의 대종사 탑비면’에는 “두륜산 우거진 숲속에 한 작은 암자를 지었으니 바로 일지암이다. 거기에 홀로 지관(止觀)하면서 초의는 사십여 년간 머물렀다”고 되어 있다. 초의가 일지암에서 입적한 것처럼 되어 있지만 초의의 법제자 범해각안(梵海覺岸·1820∼1869)이 저술한 ‘동사열전(東師列傳)’의 ‘초의선백전(草衣禪伯傳)’에는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동치(同治) 4년 을축(1865) 7월 초이튿날에 쾌년각(快年閣)에서 입적하였다. (중략) 처음에 몸을 은거할 둥지로 얽은 것은 일지암이었고, 나중에 겨우 몸 하나 들일 만한 굴을 엮은 것은 용마암(龍馬庵)이며, 다시 몸을 마칠 움막으로 세운 것이 쾌년각이었다.”
초의는 은둔하였지만 마지막에는 생을 쾌(快)하면서 저승으로 간 셈이다. 범해각안은 ‘초의차’라는 시를 지어 그를 흠모하였다.
“맑은 날 곡우 초에/ 아직 피지 않은 노란 싹/ 깨끗한 솥에 정성으로 덖어/ 밀실에 말리고/ 측백나무 그릇에 둥글게 묶어서/ 대나무 껍질로 포장하여/ 바깥기운을 막아서 잘 저장하니/ 찻잔에 가득히 향이 뜨는구나.”
그러나 초의선사가 차선일미 정신이 묻어난 일지암은 초의 사후 20년 만에 흔적 없이 사라졌다. 오늘날 초의의 다맥이라는 것은 사라진 일지암이 복원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초의다맥을 강조하는 것 자체가 이미 차의 본래 정신인 ‘초암의 정신’을 잃어버린 것일 것이다. 초의는 잃어버린 두문동 차정신이나 매월당의 차 정신인 ‘청담이나 초암의 정신’을 되살렸기 때문에 후세로부터 존경과 추앙을 받는다. 그가 ‘동다송’을 썼기 때문에 추앙받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근현대 불교계의 선지식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1870∼1948)은 차가 대중에서 멀어지면서 식후에 차를 마시던 풍습이 겨울철에 땀을 내는 약제로 쓰이면서 옥보대 아래 다도의 기풍(氣風)이 허물어졌다고 개탄했다. 이를 예견이나 한 듯 초의는 ‘동다송’에서 “세상에 좋은 차를 속된 사람들이 버려놓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동다송’은 다송자(茶松子) 금명보정(錦溟寶鼎) 선사(1861∼1930)에 의해 ‘백열록(柏悅錄)’에 옮겨 적음으로써 후세에 전해졌다. 두륜산인 학천(學泉)에 의해 처음 발견되며 세상에 드러났다. ‘동다송’은 여러 필사본들이 전해졌으나 번역으로 나온 것은 월간 ‘법륜’(1967)을 통해서다.
객원논설위원·문화평론가 pjjdisco@naver.com
- 세계일보 기사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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