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0. 29. 16:19ㆍ우리 역사 바로알기
타락죽(駝酪粥) 낙죽(駱粥)
1565년 8월 14일 대사헌 이탁(李鐸)과 대사간 박순(朴淳) 등이 명종에게 봉서(封書)를 올리기를 “여마(輿馬)·구목(廐牧)을 관장하는 사복시(司僕寺)의 타락죽(駝酪粥)은 상공(上供)하는 것인데 임금께 올릴 때와 똑같이 우유를 짜는 낙부(酪夫)가 기구(器具)를 가지고 윤원형(尹元衡)의 집에 와서 조리하게 하여 자녀와 첩까지도 배불리 먹었습니다.”하였다. 1606년 1월 23일 선조가 이르기를 “이는 예부터 해온 일이다. 나의 뜻은 해서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남을 접대하는 데 지성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벗이나 하인을 대접하는 일에 있어서도 반드시 지성으로 하여야 하는데 더구나 중국인의 경우이겠는가. 내가 중국 장수를 접견할 때는 아무리 관질이 낮은 무장이더라도 감히 소홀히 하지 않았는데 더구나 천사(天使)이겠는가. 중국 사신(使臣)을 영접하는 원접사(遠接使)가 떠날 적에 내가 분부하여 보낼 일이 있다. 우리 나라는 인심이 교묘하게 남을 속이는 교사(巧詐)하여 진실한 뜻이 없으니 이는 매우 염려스러운 일이다. 나도 사신을 많이 상대해 보았기 때문에 지난 날 경험한 일을 아직도 기억할 수 있다. 중국 황제의 칙사인 천사(天使) 허국(許國)이 타락죽인 낙죽(駱粥)을 즐겨 먹어서 매 일 이른 아침이면 반드시 타락죽(駝酪粥)을 대접했다. 어느 곳에서인가 전대로 타락죽을 대접하니 사신이 조금만 먹고 곧 그만두었다. 나중에 괴이쩍어서 그 죽을 보았더니 이는 흰 죽 위에다 타락죽을 띄운 것이다.
1753년 7월 9일 영조가 하교하기를 “예전에는 자전(慈殿)과 대전(大殿)·세자궁(世子宮) 밖에 모두 타락죽(駝酪粥)인 낙죽(酪粥)이 없었는데, 중궁전(中宮殿)에 을해년 이후 명하여 바치게 하였고, 그 뒤에 효순 왕후(孝純王后)인 효장세자의 빈 현빈(賢嬪)이 옛 일을 슬퍼하므로 무신년에 동궁(東宮)에 들이던 것을 계속하여 진배(進排)하였다. 세손궁(世孫宮)으로 말하면 이미 책봉된 뒤에는 사체(事體)가 세자궁과 다를 것이 없으므로 진배하게 하였으나, 원손궁(元孫宮)으로 말하면 정례(定例) 가운데에서 이미 왕자(王子)와 같게 되어 있는데 내의원(內醫院)의 낙죽을 잘못 알고 진배하였다. 젖소인 낙우(酪牛)가 비록 짐승이기는 하나 예전부터 봄갈이를 위하여 봉진(封進)을 멈추었으므로 낙우가 이토록 많지 않았는데, 이제 책자(冊子)를 보니 열여덟 마리나 되어 그 송아지를 아울러 서른여섯 마리이다. 예기(禮記)에 말하지 않았는가? 봄에 왕자(王者)가 알과 둥지를 아끼어 주었는데, 이제 다섯 주발인 5완(椀)의 타락죽을 위하여 열여덟 마리의 송아지인 18독(犢)이 젖을 굶게 하는 것은 인정(仁政)이 아니다. 원손궁에는 책봉(冊封) 뒤에 거행하고 그 소는 내의원으로 하여금 수를 줄이게 하여, 한편으로는 예기를 따르는 뜻을 보이고 한편으로는 시민(市民)의 폐단을 덜라.”하였다. 1770년 1월 22일 봄갈이인 춘경(春耕)이 멀지 않았기 때문에 내의원(內醫院)및 기로소(耆老所)에서 봉진(封進)하는 타락죽(駝酪粥)을 정지하라 명하고, 그 어미소도 송아지와 함께 곧 놓아주게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나라는 백성을 의지하고 백성은 농사에 의지하는데 농사에 가장 긴요한 것은 소이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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