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자(世子) 이지(李祬) 세자빈(世子嬪) 박씨

2014. 11. 1. 21:58우리 역사 바로알기

 

 

 

 

 

     

세자(世子) 이지(李祬) 세자빈(世子嬪) 박씨 조선국 대한제국 역사

2014/11/01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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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世子) 이지(李祬) 세자빈(世子嬪) 박씨

 

 

 http://blog.naver.com/msk7613     김민수 님의 글 중에서 ....

 

 

1598125일 예조가 선조에게 아뢰기를 광해군인 동궁(東宮)께서 춘추가 한창이신데도 오래도록 후사(後嗣)가 없어 뭇사람들이 걱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태평 시대의 국운이 돌아와 적을 소탕하고 강토를 깨끗이 회복한 때에 원손(元孫)이 탄생하셨으니 태묘의 경사가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인정이 있는 곳에 예가 따르는 법이니 의거할 만한 전례는 없으나 태묘에 고유하고 진하하는 일이 있어야 할 듯합니다. 대신들과 의논하여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선조가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16111025일 세자(世子) 이지(李祬)가 세자빈(世子嬪) 박씨를 맞이하는 예가 끝났다. 시민당(時敏堂)에서 동뢰연(同牢宴)을 행하였다. 광종(광해군 묘호 추상)이 교서를 반포하여 사면하였는데, 그 글에왕은 이르노라. 두 성이 배필이 되어 하늘이 마련한 새 삶을 시작한다. 육례를 마쳤으니 나라의 근본 경사가 더욱 융성하다. 이에 사면하는 은택을 내리는바 이를 알리는 교서를 널리 반포한다. 생각건대 적통(嫡統)을 세우는 마당에 배필을 정하는 일이 더욱 중하다. 관저(關雎)처럼 올바른 시작은 풍속을 교화하는 바탕이다. 순임금이 임금이 되기 전에 살던 규수(嬀水)의 굽이에서 행동을 관찰하고 드디어 혼인을 하게 되었다. 항상 안존한 몸가짐으로 세자를 옆에서 도와야 할 것이다. 이에 성균관(成均館) 정6품 전적(典籍) 박자흥(朴自興)의 딸 박씨를 세자빈(世子嬪)으로 삼아서 이 달 1024일에 이미 친영하는 예를 행하였다. 시례(詩禮)의 명문 가정에서 자라서 본래부터 유한한 숙덕이 있다. 점괘가 좋은 것은 선령(先靈)의 보살핌이리라. 대궐 안방이 경사스러움은 자전의 마음이 즐거우심이다. 이 것은 진실로 종사의 복록이다. 어찌 부자간의 정리뿐이겠는가. 마땅히 그대들 만백성과 함께 기뻐할 일이다. 이 나의 기쁨을 보이기 위하여, 사면을 반포하고 백관을 법식대로 가자한다.

 

 

    이 달 25일 새벽 이전에 죄를 범한 자 중 모반한 대역죄, 아들이나 손자가 부모나 조부모를 죽인 죄, 조부모나 부모를 때리거나 욕한 죄, 처첩이 지아비를 죽인 죄, 종이 주인을 죽인 죄, 독극물을 쓰거나 저주를 해서 계획적이고 의도적으로 사람을 죽인 죄, 국가의 강상에 관계되는 죄, 독직죄 및 강도·절도죄를 제외한 잡범으로 사죄(死罪도형(徒刑)과 유형(流刑)·부처(付處안치(安置충군(充軍)에 해당하는 죄는 이미 발각되었거나 아직 안 되었거나, 이미 결정났거나 아직 안 났거나, 이미 배소에 도착했거나 아직 안 했거나 모두 용서하여 면제한다. 감히 여기서 사면한 과거사를 떠들고 고자질하는 자는 바로 그 죄로 그 자신을 죄주리라. 벼슬에 있는 자는 각각 한 자급씩 가자하고 자궁(資窮)한 자는 대가(代加)한다. , 이 은택을 저들에게 베푸나니, 이제부터 다시 새로이 시작되리라. 맏아들이 대를 이어 다시 빛나고 윤택함을 송축하는 노래가 널리 퍼지리니 죄과를 용서하여 같은 울타리 안에서 함께 길러 같이 살아가게 하려는 어진 마음인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교시한다. 응당 모두 잘 알 것이다.” 하였다.

 

     

 

1623522일 세자(世子) 이지(李祬)가 위리안치된 상황에서 땅굴을 70여 척이나 파 울타리 밖으로 통로를 낸 뒤 밤중에 빠져 나가다가 나졸에게 붙잡힌 사실을 강화부사(江華府使) 이중로(李重老)가 치계하여 보고하였다. 이에 즉시 별장 권채(權綵)와 중사(中使) 박홍수(朴弘秀) 및 데리고 있던 나인 막덕(莫德)을 붙잡아 들여 국문하였다. 막덕이 공초하기를세자가 처음 위리 안치되었을 때 세자빈 박씨와 같이 죽기로 약속하고는 미리 멱목(幎目)과 악수(幄手)를 만들어 놓고 15일이 넘도록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은 적도 있었습니다. 어느날 세자빈 박씨와 함께 목을 맨 것을 여종이 바로 풀어 주어 구해낸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번에 가위와 인두가 한성에서 보내져 왔는데, 이 것을 보고는 마침내 굴을 뚫겠다는 생각을 낸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자기 손으로 직접 땅을 파서 빈으로 하여금 자루에 흙을 담게 하고는 방 안에 옮겨 두었는데, 시작한 지 26일만에야 일을 끝냈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도망쳐 나와 마니산(摩尼山)으로 가려다가 가야산(伽倻山)으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지니고 있던 서찰(書札)은 대개 재상(宰相)의 청탁 편지를 가탁한 것이었는데, 나루터를 통과할 때 엄중한 경계를 피하기 위한 계책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편지 내용 중에 이른바 전일 우러러 호소하였다.’는 것이나 서경병로(西坰病老)’등의 말은 모두가 거짓 지어낸 말들로서 실제로는 없었던 일이었습니다.”하였다.

 

 

    위리안치된 속에 있던 여종 향이(香伊)를 추후로 붙잡아 국문하였는데, 그 공초가 막덕의 것과 대략 비슷하였다. 권채와 박홍수 등은 모두 공초하기를마음을 다해 철저히 엄밀하게 수직(守直)해 왔습니다. 울타리 안에서 굴을 뚫어 탈출하다니 정말 뜻밖의 일입니다.”하였다. 그 때 마침 훈신(勳臣) 김경징(金慶徵) 등이 류희분(柳希奮)의 집 종 이말질수(李末叱水)라고 하는 자의 종적이 의심스럽다는 것을 듣고 포도청으로 하여금 수색하여 체포한 뒤 국문하게 하였다. 그가 공초하기를일찍이 권채와는 도감(都監)의 장졸로 같이 있었기 때문에 서로 친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번에 그의 노비를 보내 전언하기를 동궁(東宮)이 장차 굴을 뚫고 탈출하여 배를 타고 도주하려 한다. 부디 두모포(豆毛浦) 뱃사람 가팔리(加八里)라고 하는 자로 하여금 배를 가지고 갑곶(甲串)으로 내려오게 해주기 바란다.’ 하였습니다. 그의 말대로 배를 예약해 놓은 다음 먼저 권채가 있는 곳에 갔더니, 권채가 말하기를배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다가 동궁과 함께 배를 타고 도주하려 한다.’ 하였습니다.”하였다. 드디어 국청에 보내어 신문하였는데, 말을 바꾸긴 하였으나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았다. 권채는 처음에 얼굴를 서로 모른다고 잡아떼었으나 대질하자 상당히 굴복하는 기색이 있었다. 권채와 말질수는 모두 장하에서 죽었다. 막덕과 향이는 형신(刑訊)한 뒤에 잔사(殘司)의 전복(典僕)으로 정속시켰다. 중사 및 사련인(辭連人) 엄향남(嚴香男) 4인은 모두 놓아주었다. 황해 감사 이명(李溟)은 세자 이지(李祬)가 소지하고 있던 서찰의 겉봉에 황해 순영 서간(黃海 巡營 書簡)’이라고 기재되어 있었던 관계로 체포되었으나 국청에서 그 편지는 거짓 칭탁한 것으로 이명과는 관계가 없는 듯하니 선처하기를 청한다.’고 하자, 관작을 삭탈하여 놓아주라고 명하였다. 때는 65일이다.

 

 

    변이 처음 일어났을 때 인조가 하교하기를 어제 강화(江華)의 장계를 살펴보건대, 안과 밖에서 서로 일을 꾸민 것이 분명하니 그 계책이 어찌 흉칙하고 참혹하지 않은가. 경들은 좋은 계책을 깊이 생각하라.”하니 대신이 회계하기를안과 밖에서 서로 일을 꾸민 점에 대해서는 과연 성상께서 언급하신 것과 같은 점이 있습니다. 최근에 도하에서 유언비어가 날로 생겨나는데, 어떤 이들은 역적 집안의 노복들이 아직까지 소속되지 못해 모두들 반측(反側)할 생각을 품고 이런 일을 빚어냈다.’고 합니다. 해당 원()으로 하여금 속히 이 일을 처리하게 하소서. 광종(광해군 묘호 추상)의 외척이나 근속들로서 한성 안에 있거나 근도(近道)에 유배된 자들은 먼 변방으로 옮겨 보내야 합니다. 박승종(朴承宗)의 첩자(妾子) 3인이 현재 한성 안에 있으니 먼저 붙잡아 구속하고, 기타 근도에 있는 역적의 족속들은 모두 조사하여 유배지를 옮김으로써 밖에서 호응하는 음모의 씨앗을 근절토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도감의 대장(大將)에게 영을 내려 더욱 엄하게 호위(扈衛)하도록 하소서.”하자, 인조가 따랐는데 호위는 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박승종의 아들 박자전(朴自全) 3인이 모두 함께 수금되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박자응(朴自凝)의 예에 따라 나누어 정배되었다. 부사(府使) 이중로(李重老)는 대간의 논핵으로 말미암아 붙잡혀 왔다가 공초한 뒤에 풀려났다. 탈출하는 세자 이지(李祬)를 붙잡아 보고한 정병(正兵) 최득룡(崔得龍)은 통정대부로 승진하고, 충순위(忠順衛) 김준남(金俊男)은 상당한 직에 제수되었는데 이들 모두에게 종신토록 호역(戶役)을 면제해 주도록 하였다. 세자 이지(李祬)가 체포된 지 3일째에 세자빈 박씨가 스스로 유배지에서 목을 매어 목숨을 끊었는데 호조로 하여금 옷과 이불을 보내게 하여 염습하고 여가(閭家)에 옮겨 빈소(殯所)를 차리게 하였다.

 

 

625세자 이지(李祬)에게 임금이 독약을 내려 스스로 죽게 하는 사사(賜死)하였다. 의금부 도사 이유형(李惟馨)이 강화도에 가서 세자 이지(李祬)에게 전지를 유시하였다. 세자 이지(李祬)가 말하기를일찍 자결할 줄 몰랐던 것이 아니나 지금까지 구차히 살아 있었던 것은 부모의 안부를 알고 나서 조용히 처리하려고 해서였다. 지난 번 땅굴을 파고 탈출하려 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는가.”하고, 바로 방안에 들어가서 몸을 씻고 머리를 빗은 다음 관과 신발을 갖추었다. 이어 칼을 찾아 손톱과 발톱을 깎으려 하였는데 도사가 허락하지 않으니 세자 이지(李祬)가 말하기를죽은 뒤에 깎아 주면 좋겠다.”하고 곧장 일어나서 마루로 나왔다. 또 웃으면서 말하기를지금껏 죽지 않은 것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또 옛 사람이 죽음에 임하여 황천(皇天후토(后土)에 고한 경우가 많다.”하고, 그대로 자리를 펴고 촛불을 밝히게 하고는 북쪽을 향하여 두 차례 네 번 절했으며, 또 그의 광종(광해군 묘호 추상)와 문성군부인 류씨(文城郡夫人 柳氏)가 있는 곳을 물어서 곧 서쪽을 향하여 절하기를 전과 같이 하였다. 일어나서 말하기를문천상(文天祥)8년간 연경(燕京)의 원()나라 감옥인 연옥(燕獄)에 있을 적에 어떤 이가 죽지 않는다고 꾸짖었는데, 어찌 그의 마음을 알았겠는가. 그가 죽은 뒤에 뒷사람이 시를 지어 말하기를 원나라가 문 승상을 죽이지 않아 임금의 의리 신하의 충성 둘 다 이뤘네하였다.”하고, 도로 방안으로 들어가 세조대(細絛帶)로 목을 매어 스스로 당겼으나 세조대의 중간이 끊어지자, 또 스스로 숙주(熟紬)로 목을 매어 죽었다. 이유형이 보고하자 인조가 하교하기를·이불·관곽·예장(禮葬) 등의 일을 세자빈 박씨의 예에 따라 거행하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