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에서 여자가 권력을 잡지 못한 이유

2014. 11. 26. 00:13우리 역사 바로알기

 

 

 

 

 

       고구려에서 여자가 권력을 잡지 말아야하는 이유|고구려 토론방

동명 | | 조회 91 |추천 0 | 2014.11.22. 21:45 http://cafe.daum.net/alhc/51q2/6346 

 

 

<고구려에서 여자가 권력을 잡지 말아야하는 이유>

 

 

<고구려 본기>

(서기 180년) 봄 2월에 왕비 우씨(于氏)를 세워 왕후로 삼았다. 왕후는 제나부(堤那部) 우소(于素)의 딸이다.

 

    서기 179년 백고(신대왕)가 붕어하고 그의 맏아들인 남무(고국천왕)가 왕위에 올랐다. 남무(고국천왕)는 서기 176년 왕태자가 되었다. 백고(신대왕)가 서기 165년 왕위에 올랐으니, 왕태자 책봉이 늦은 감이 없지않다. 더욱이 백고(신대왕)가 왕위에 올랐을 때, 나이가 77세로 맏아들인 남무(고국천왕)의 나이도 적지 않았을텐데 말이다.

 

   그러나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태조대왕의 동생인 백고(신대왕)는 차대왕이 왕권강화 정책의 일환으로 태조대왕의 아들들을 참수하였을 때, 산골로 숨어 있었다. 그후 연나부 조의인 명림답부와 환나부 어지류 등이 쿠데타로 차대왕을 죽이고 신대왕을 옹립하였다. 신대왕이 나이 77세로 왕위에 오른 만큼 태자책봉이 바로 이루어져야 했었다. 그러나 명림답부 세력들은 이를 이행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기록에 분명하지 않지만 두 가지로 추정 할수 있다. 하나는 쿠데타 세력들간에 신대왕의 왕자를 태자로 삼을지, 아니면 다른 방법을 강구할지에 대해 공론이 모아지지 않았을 수가 있다. 어찌보면 신대왕의 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차대왕의 태자인 추안을 양국군에 봉한 것이 이를 반증한다. 다른 하나는 신대왕이 왕자들의 자질을 놓고 저울질하지 않았나 싶다. 신대왕이 남무를 왕태자로 삼았을 때 그 방식을 보면, 정월에 여러 신하들이 태자 세우기를 청하였고 그로부터 2달 후인 3월에 책봉하였음이 이를 반증한다.

 

    쿠데타의 두 주축세력이 있었는데, 연나부와 환나부이다. 연나부의 명림답부는 국상에 임명되어 중앙과 지방의 군사를 맡아 명실공히 권력의 최고봉에 올랐으나, 환나부는 어떠한 보상을 받았는지 기록에 없다. 이때 재미있게도 연나부와 환나부는 서로 끈끈한 인맥으로 연결되었다는 것이다. 환나부의 어지류 세력은 바로 연나부 우소 가문의 외척이었다.

   물론 우소 가문을 기록에는 제나부로 명시하였지만, 여러 연나부 중에 하나로 범연나부가 아닐까 싶다. 연나부와 환나부는 권력을 오래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남무(고국천왕)에게 제나부 우소 가문의 딸인 우씨를 정략결혼시켰던 것이다. 서기 179년 백고(신대왕)가 붕어하고 그의 맏아들인 남무(고국천왕)가 왕위에 올랐을 때, 우씨는 왕후가 되었다. 이로써 연나부와 환나부 세력은 자신들의 세상이 도래한 것처럼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고국천왕은 “키가 9척이고 모습과 자태가 훌륭하며, 힘은 솥을 들어 올릴 만큼 세었다. 일에 임해서는 경청하여 결단하고 관대함과 예리함을 적당히 지켰다.”고 기록될 만큼 그리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또한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명림답부가 신대왕이 붕어하기 몇 달전에 사망하였다. 여기서 잠깐 명림답부가 속한 연나부에 대해 알아보자. 명림답부는 연나부 조의(皂衣)라고 하였다. 고구려는 삼국지에 의하면, 왕(王) 뿐만 아니라 모든 대가(大家)들도 조의, 사자, 선인을 두었고 이들의 직함을 왕에게 고(告)하였다고 한다. 대가(大家)의 가신들은 회동하여 좌기(坐起)할 때는 왕가의 조의, 사자, 선인과 동렬에 설 수 없었다. 이로 미루어 조의(皂衣)는 각 부족의 가신 집단에 속한 관리였을 것이다.

 

<삼국지(三國志)>

본래 다섯 부족(五族)이 있었으니, 연노부(涓奴部),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계루부(桂婁部)가 그것이다. 본래 연노부(涓奴部)에서 왕(王)이 나왔으나 점차 미약해져 지금은 계루부(桂婁部)가 이를 대신한다.

 

   삼국지나 삼국사기 의하면 연나부가 초기 고구려의 왕부(王部)임은 자명하다. 그러나 추모왕의 직계인 모본왕이 시해되었을 때, 연나부는 왕부로서 그 기능을 잃어버리고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차대왕이 태조대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고 왕위에 올랐다. 서기 148년 차대왕이 태조대왕의 아들인 막근과 막덕을 죽임으로써 정치적으로 크나큰 파란을 몰고온다.

   이 사건으로 태조대왕의 친척인 백고(신대왕)는 어느 부족으로 의탁했는지 알수 없으나 은둔하게 되었고, 환나부의 어지류를 비롯한 다수의 공신들이 등을 돌리게 되었다. 이후 왕도에서 우보의 직책에 있었던 어지류는 차대왕 제거 계획을 추진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동안 왕부로서 그 기능을 잃어버리고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져 있었던 연나부와 접촉을 하였던 것이다. 그 전면에 명림답부가 있었다. 남무(고국천왕)가 제위에 올랐을 때,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명림답부는 이미 죽어 사라지고 없었다. 이렇게 되자 고국천왕의 왕후인 우씨의 외척인 환나부 세력들이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다. 연나부와 환나부로부터 권력을 되찾아오려고 노력하던 고국천왕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고구려 본기>

(서기 184) 한나라 요동 태수가 군사를 일으켜 우리나라를 쳤다. 임금이 왕자 계수(罽須)를 보내어 한나라를 막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임금이 직접 날쌔고 용감한 기병을 거느리고 가서 한나라 군사와 좌원(坐原)에서 싸워 물리쳤다. 베어진 적의 머리가 산처럼 쌓였다.

 

   공손씨가 고맙게도 고구려를 공격한다. 고국천왕은 왕권의 힘을 대내외에 과시하기 위해 왕자 계수와 함께 친정하여 좌원에서 크게 이겼다. 이때 왕자 발기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언뜻 보자면 발기가 싸울 수 있는 자질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투에 고국천왕과 왕자 계수가 참전하였으므로 왕도에 발기를 남겨 놓아 후일을 도모한 것으로 추정된다.

 

   좌원전투의 승리로 대내외적으로 왕실의 힘을 보여준 고국천왕은 그동안 권력을 농단하고 있던 우왕후의 외척인 환나부 세력들을 제거하기로 한다. 서기 190년 환나부 세력들의 자제들이 다른 사람의 자녀를 겁탈하고 토지와 주택을 빼앗아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처형하려 하였다. 권력을 잡고있는 환나부 세력들의 자제들이 이러한 위법행위를 했다고 해도 보통의 상황이라면 왕이 처형을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고국천왕은 이들을 처형하려 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고국천왕이 왕권을 되찾아 오려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이에 환나부 세력들은 연나부와 함께 반란을 도모하였다. 고국천왕은 기내(畿內)의 군사를 총동원하여 평정하였다. 반란을 평정한 고국천왕은 정치를 혁신하기 위해 4부에게 인재를 천거하라고 하였다. 4부는 동부의 안류를 천거하였으나, 그는 유리왕 때의 대신 을소의 손자인 을파소를 천거 하였다. 고국천왕은 을파소를 국상에 임명하여 정치와 민생을 안정화시킨다. 그러나 용의 머리인 우왕후를 제거하지 못하여 반쪽자리 개혁이 되었다. 우왕후와 고국천왕 사이에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우왕후가 아들을 낳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고국천왕의 나이가 연로하여 생식능력이 없었는지 자세하지 않다. 어째든 고국천왕의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는 것이 가문의 재건을 위해 노심초사하던 우왕후에게 크나큰 걱정거리였다.

 

    서기 197년 한나라에서 수많은 반란으로 고구려에 귀의하는 백성들이 많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국천왕은 후사도 없이 병사하고 말았다. 이때 왕후 우씨는 고국천왕의 죽음을 비밀로 하고, 자신과 뜻을 같이 할 수 있는 왕자를 물색한다. 우왕후는 처음에 왕자 발기를 찾아가 “왕은 아들이 없으니 당신이 마땅히 뒤를 이어야 합니다.”고 말하였다. 발기는 왕이 죽은 것을 알지 못하고 대답하였다. “하늘의 운수는 돌아가는 데가 있으므로 가볍게 의논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부인이 밤에 다니는 것을 어떻게 예(禮)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고국천왕이 병세가 깊다는 것과 후사가 없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발기는 가만히 있어도 다음 보위는 자기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우왕후가 보위 문제를 들고 나오자 발기는 서기 190년의 반란 사건을 떠올리며, 우왕후를 질책한다. 이에 우왕후는 왕자 연우(산상왕)를 찾아 가는데, 그는 최대한의 예를 갖추어 맞이하였다. 우왕후는 고국천왕의 부고를 알리면서 왕자 발기가 자신에게 연정을 품고 있다고 거짓을 말하였다. 이러한 우왕후의 속내를 알아차린 연우는 더욱 더 극진히 대접하였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떠한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모르겠지만, 우왕후와 연우가 왕궁으로 들어가 동침을 한 것으로 볼 때 연우를 왕위에 올리는 조건으로 왕후의 자리를 보장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날 새벽에 우왕후가 선왕의 명령이라고 사칭하고, 연우를 왕으로 세웠다.

 

   뒤늦게 이러한 사실을 알아챈 발기는 군사를 동원하여 왕궁을 포위하고, 연우군과 대치하였다. 그러나 우왕후와 연합한 연우군을 당해낼 수 없어 처자를 거느리고 요동으로 도망가서 공손도에게 귀복하고 연우를 함께 치기로 합의하였다. 공손도군과 발기군이 고구려로 진군하자, 연우는 동생 계수를 보내 막게 하니, 공손도군과 발기군이 크게 패하였다. 연우(산상왕)는 백고(신대왕)의 삼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자 노력했던 큰형인 고국천왕의 뜻을 져버리고, 우왕후의 간괴와 자신의 권력욕으로 인해 고구려를 망쳐 놓고 말았다.

 

   “왕후가 비록 선왕의 유명으로 대왕을 세웠더라도, 대왕께서는 예로써 사양하지 않은 것은 일찍이 형제의 우애와 공경의 의리가 없어진 것입니다.”라고 막내인 계수가 말하였다. 왕자 계수 또한 우왕후의 간괴를 모르고 있었다. 연우(산상왕)는 다시 장가들지 않고 우왕후와 약속한 대로 자신의 왕후로 삼았다. 드디어 권력이 우왕후의 손에 들어왔다. 고국천왕의 왕비로서 절개를 지키지 못하고 산상왕의 왕비가 된 것이 자신도 창피하였는지 환도성을 수축하였다. 우왕후의 허수아비 왕인 산상왕은 어쩔 수 없이 우왕후를 자신의 왕후로 삼았지만, 점차 자신의 후사를 잇고 싶었던 모양이다. 서기 208년 11월 산상왕은 은밀히 주통촌에 살고있는 여자와 동침하게 되었다. 이듬해 3월 우왕후는 이러한 사실을 알고 병사를 보내 주통촌 여자를 죽일려고 하였다. 그러나 병사들은 주통촌 여자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죽이지 못했다. 주통촌 여자가 산상왕의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을 접하고도 우왕후는 계속 죽일려고 시도했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산상왕은 주통촌 여자의 아이가 자신의 혈육인지를 확인한 후 우왕후에게 말하자, 우왕후도 어쩔수 없이 승인하였다.

 

   이해 9월 아이가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동천왕이다. 기뻐한 산상왕은 10월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한나라가 망하고 중국내 사정이 혼란한 가운데 산상왕과 우왕후는 국내를 떠나 자신들만의 왕도인 환도성에 틀어박혀 겨우 한다는 짓이 5살이 된 동천왕을 왕태자로 세우는 일과 16살이 된 동천왕이 산상왕에게 손자인 연불(然弗)을 안겨준 게 전부였다. 교체(동천왕)의 어머니인 소후는 분명 환도성에 올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동천왕은 우왕후의 손에서 죽은 듯이 성장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우왕후가 권력을 잡고도 가문의 재건을 위해 노력한 결과물이 기록에 없다.

 

   서기 230년 국상 고우루가 죽자 연나부의 명림어수를 국상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아마도 우왕후가 권력을 잡았지만 산상왕 초기, 다시말하면 계수 왕자가 아직 건재하였고 국정은 을파소가 이끌었기 때문에 권력을 행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서기 203년 국상 을파소가 죽은 이후에 환나부 출신으로 추정되는 고우루를 국상에 연나부의 명림어수를 중앙조정에 임명한 것을 계기로 우왕후가 본격적으로 가문의 재건을 도모한 것으로 보인다. 서기 227년 산상왕이 붕어하였다. 왕태자인 교체가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동천왕이다. 우왕후는 동천왕의 마음이 자신에게 있는지 알고싶어 여러 차례 시험을 하였다. 어려을때부터 우왕후의 손에서 자라온 동천왕이기에, 우왕후를 왕태후로 삼아 충성을 표시하였다.

 

   서기 234년 9월에 “내가 행실이 바르지 않았으니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고국천왕을 보겠는가? 만약 여러 신하들이 차마 내 시신을 도랑이나 구덩이에 버리지 못하겠거든, 나를 산상왕릉 곁에 묻어 달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우태후는 죽었다. 그래도 죽을 때 조금의 양심은 있었나 보다. 그러나 우태후가 남긴 권력의 그림자는 환나부와 연나부에게 이미 넘어간 상태이었다. 우태후는 죽었지만 그가 고구려에게 끼친 가장 큰 해악은 개인의 권력욕 때문에 왕권을 약화시켰고, 이것이 내부의 문제로 끝난 것이 아니라 위나라와 오랑캐의 침입으로 이어져 국가가 파멸 일보 직전까지 가게되었다는 것이다.

 

댓글

노하라신노스케 14.11.23. 06:40

 

이건 남녀문제가 아니라 그냥 권력욕 그 자체 문제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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