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온달장군 설화로만 볼 것인가?

2014. 11. 26. 00:36우리 역사 바로알기

 

 

 

 

 

       고구려 온달장군 설화로만 볼 것인가? |고구려 토론방

동명 | 조회 250 |추천 1 |2014.09.04. 13:51 http://cafe.daum.net/alhc/51q2/6336 

 

< 고구려 온달장군 설화로만 볼 것인가? >

 

   장수왕의 손자 문자명왕에게 두 아들 있었다. 맏아들 흥안과 차남인 보연이다. 흥안은 서기 519년에 문자명왕이 붕어하자 왕위를 이어받았다. 이가 바로 안장왕이다. 문자명왕이 붕어하기 직전의 상황을 삼국사기에 “서기 518년 3월, 폭풍이 몰아쳐서 나무가 뽑혔으며, 왕궁의 남문이 저절로 무너졌다.”라고 하였다. 쿠데타의 냄새가 진하게 난다. 쿠데타의 주체세력은 누구일까? 맏아들 흥안은 아니다. 이미 태자로 책봉된 흥안이 그 자리에서 물러날 정도로 잘못이 없었고, 그를 위협할 뚜렷한 세력도 없었다.

그렇다면 차남인 보연인가? 그럴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문자명왕이 붕어했을 때, 흥안이 왕위를 이었다. 어찌된 것일까? 이는 조선시대 태종이 형인 방과를 왕위에 올린 것과 같은 형태로 보아야 한다. “도량이 커서 안장왕이 그를 사랑하였다.”라는 삼국사기 보연(안원왕)의 즉위년 기록이다. 보연(안원왕)이 사물을 너그럽게 용납하여 처리할 수 있는 넓은 마음과 깊은 생각을 가졌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보연(안원왕)은 키가 7척 5촌이며, 안장왕은 아들이 없었다고 한다. 모든 조건으로 보면 보연(안원왕)이 왕위를 잇는 것은 천명임을 강조하고 있다. 기록에는 문자명왕 죽음과 두 아들과의 연관성이 있는지 여부는 자세하지 않다. 다만 문자명왕의 죽음이 정상적이지 않기에, 두 아들의 개입은 없었다고 치더라도 그 배후에 귀족집단이 있었다는 사실은 명확하다고 보여진다. 어째든 문자명왕의 죽음으로 왕권이 약화되었음은 자명하다. 서기 533년 안원왕은 맏아들인 평성 태자로 책봉하였다. 이가 바로 양원왕이다.

 

    양원왕이 즉위했을 때, 신라와 백제는 이미 나제동맹을 맺어 고구려를 견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기 550년 나제동맹에 위기가 찾아온다.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치열하게 공방을 벌일 때, 신라가 이틈을 노려 두 나라의 성(城)을 빼앗은 사건이 벌어졌다. 이듬해 신라는 고구려가 장악한 북한강 이북의 10개군을 장악하였다. 또한 백제에게도 임진강에서 밀리고 있는 상황이었고, 북방에서는 돌궐과 거란의 위협이 증가하고 있었다. 대외적으로 위기를 맞은 양원왕과 귀족집단은 별다른 대책을 내놓치도 못한 상황에서 “서기 557년 왕자 양성을 태자로 삼았다. 여러 신하들을 위하여 내전에서 연회를 베풀었다.”라는 기록처럼 태평한 시절을 보내고 있다.

 

   북제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한 것 말고는 별다른 치적없이 서기 559년 양원왕이 붕어하고, 양성이 왕위에 올랐다. 이가 평원왕이다. 평원왕이 즉위했을 때, 대외적으로는 서북방은 돌궐과 거란족에게 남방은 신라에게 밀리는 상황이었고, 내부적으로는 왕권이 약화되고 5부 귀족들이 득세하고 있었다. 서기 560년 신라 거칠부 등이 고구려 남방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죽령이북 10개현을 공취하였다. 이런데도 평원왕은 신라에 대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이때 거칠부열전에 따르면 “정사가 어지러워져 멸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라고 고구려 승려인 혜량법사가 거칠부에게 말하였다. 기록에는 자세하지 않지만 이처럼 고구려 내부 사정은 여의치가 않았던 모양이다. 평원왕은 서기 565년 아들 대원(영양왕)을 태자로 삼는다. 대내외적으로 고구려 상황이 별로 좋지않은 데도 불구하고 평원왕은 서기 571년 궁실을 중수하는 공역을 벌였다. 한편 중원에서 서위의 후신인 북주는 북제를 밀어부쳐 서기 577년 멸망시킨다. 이때 고구려에서 온달이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삼국사기 온달열전>

   온달(溫達)은 고구려 평강왕(平岡王) 때 사람이다. 용모는 龍鐘(늙고 쇠약해서 행동이 불편한 모양)하고 우스꽝스럽게 생겼지만 마음씨는 빛이 났다.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떨어진 옷과 해진 신발을 걸치고 시정(市井) 사이를 왕래하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愚(어리석다. 우직하다) 온달이라고 불렀다.

 

   온달열전에 따르면 온달은 평원왕의 공주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온달을 온씨의 시조로 생각하고 있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가 있으므로 여러 가지 비약이 있을수 있다. 오히려 당나라 때 설인귀군을 횡산에서 격파한 온사문 장군이 온씨의 시조 보는 것이 합당하다. 기록에 등장하는 온씨들을 보면 신라 진덕여왕 때 김춘추를 살리고 대아찬에 추증된 온군해, 왕건고려조에 들어와서는 충목왕 때 회양부사를 지낸 온수 등이 있다. 온달은 단지 이름일뿐이다. 온달이 실존 인물인지 아닌지 아직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삼국사기 열전에 수록된 고구려 인물중에 본기에 없는 사람은 온달 이 사람뿐이다.

 

    먼저 온달의 신분을 살펴보자.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떨어진 옷과 해진 신발을 걸치고 시정(市井) 사이를 왕래하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우온달(愚溫達)이라고 불렀다.”라는 기록을 보면 평민이었음을 알수가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평원왕의 친딸인 평강공주가 직접 찾아가 결혼을 하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온달은 평민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평강공주가 미치지 않고서야 일개 평민과 결혼한다는 것은 그 당시에 도저히 있을수 없는 경우이다. 또한 온달의 존재는 평강공주가 성장하기 전부터 평원왕이 알고 있었다. 물론 평강공주가 온달에게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열전에서는 “너는 울기를 잘 해 내 귀를 시끄럽게만 하니, 사대부집 아내가 될 수 없으니 온달에게나 시집보내야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였다.”라고 말했다. “저를 온달에게 시집을 보낸다고 하더니 지금 와서는 어찌 말을 바꾸십니까? 한낱 필부도 식언을 하지 아니하거늘 임금으로서 어찌 희언을 농하십니까? 그러니 부왕의 뜻을 따를 수 없나이다.”라고 성장한 평강공주가 말하였다.

 

   평원왕이 평강공주가 어렸을 때,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고 농으로 하였던 말을 진심으로 받았들였다는 이야기이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그럴수도 있지 않나 싶다. 구중 궁궐에서 자라온 평강공주가 평원왕의 말을 그대로 믿을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아버지의 말을 믿고 온달에게 시집갈 생각을 하고있던 평강공주에게 갑자기 왕족인 고씨에게 시집가라 하였으니, 반발심으로 저런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 다음 벌어진 일이 의심스럽다. 평원왕이 평강공주의 말을 듣고 노하여 “네가 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면 진정 내 딸이 될 수 없다. 어찌 함께 살 수 있겠느냐? 너는 네 갈 데로 가거라.”라며 말하자, 평강공주가 보석을 지니고 궁궐을 떠나 온달을 찾으러 갔다는 기록이다.

 

   현대의 모습으로 다시 바꾸면 대통령 아버지가 삼성그룹의 아들에게 시집가라고 하자, 딸이 어렸을 때 아버지가 이야기한 기초수급자에게 가겠다고 가출한 상황이다. 평원왕이 자신의 의견을 따르지 않는다고 평강공주를 내친 것이나, 평강공주가 진짜로 온달을 찾아서 떠난 것이나 모두 비정상적인 행동이다. 그러나 문장을 자세히 분석하면 이해할 수 없는 부녀지간의 행동이, 우리가 궁금해하는 온달의 신분을 짐작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평원왕은 수많은 도성 백성중에 온달의 존재를 어떻게 알았으며, 굳이 그에게 시집보낸다고 평강공주에게 말할 필요가 있었을까? 열전의 기록으로 보면 온달이 평원왕이 기억할만큼 특이한 행동을 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면 온달은 분명 평원왕이 태자 시절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평원왕이 태자가 된 시기는 서기 557년이었다. 이에 앞서 서기 551년 신라가 침공하여 10개의 군을 빼앗았다. 이때 온달은 신라와의 국경지역에 배치된 장수일 가능성이 크다. “지금 신라가 우리의 한수 이북의 땅을 차지하여 자기들의 군현으로 삼으니, 그곳의 백성들이 애통하고 한스럽게 여겨 한시도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사옵니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 저를 어리석고 불초하다 여기지 마시고 병사를 주신다면 한번 쳐들어가 반드시 우리 땅을 도로 찾아오겠나이다.”라고 온달이 영양왕에게 읍소하는 기록 이를 뒷받침 한다.

 

   신라에게 패배한 장수 온달은 죄를 받아 주둔지를 떠나 도성에서 장님인 노모를 봉양하며 살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고구려 조정은 하나의 성(城)이 아니라 10개군을 잃었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고, 이 사건을 왕자가 모를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평원왕이 평강공주를 진짜로 온달에게 시집보낼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이 당시 고구려는 왕권이 약화되고 5부 귀족들이 득세하고 있었다. 이들 귀족집단들은 저마다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평원왕과의 정략결혼을 원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왕족인 고씨 집안이 있었던 모양이다. 평원왕의 입장에서 평강공주를 5부 귀족가문 중에 시집보내게 되면 선택받지 못한 귀족가문의 불만을 사게됨은 자명한 일이기 때문에 차라리 온달에게 보내 후일을 도모하고자 했던 것이다. 평강공주가 온달에게 찾아가 사정이야기를 하자, “이는 여자로서 온당한 행실이 아니니 반드시 사람이 아니고 여우나 귀신일 것이다. 나에게 가까히 오지 말라”라며 거절 의사를 표현한다. 온달 입장에서 두려웠을 것이다. 허나 평강공주는 막무가내로 지니고 있던 귀금속을 팔아서 전답과 노비, 우마와 기물을 사들여 살림살이를 마련하였다.

 

   “부디 시장 사람의 말을 사지 마시고, 나라에서 키우던 말 중에서 병들고 파리해져 쫓겨난 말을 골라 사십시오.”라고 평강공주는 온달에게 말하였다. 평강공주는 왜 국마(國馬)를 사라고 하였을까? 고구려에서는 해마다 3월 3일이면 낙랑 언덕에 모여 사냥대회를 개최하는데, 이 대회에 참가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여기까지 상황을 놓고보면 평강공주와 온달은 신혼생활을 즐기려는 모습이 아닌 무언가 계획된 일을 진행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러하기에 온달은 평범한 백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평강공주가 온달을 찾아간 것은 모두 계획된 행동이었다는데 초첨을 맞추어야 한다.

 

   평원왕과 평강공주는 온달의 등장시기를 이 사냥대회에 맞춘 것이다. 결국 세상사람들에게 평강공주의 남편 더 나아가 평원왕의 사위라는 것을 공표한 셈이다. “후주(後周)의 무제가 군사를 내어 요동에 쳐들어오자, 왕은 군대를 거느리고 배산의 들에서 맞아 싸웠다. 온달이 선봉이 되어 날래게 싸워 수십여 명의 목을 베니,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떨쳐 공격하여 크게 이겼다.”라는 의문의 기록이 등장한다. 여기서 후주란 북주말하는 것이다. 북주 무제 우문옹은 서기 560년에 즉위하여 서기 578년까지 제위하였다. 그렇다면 무제가 고구려를 공격한 시기는 이때의 일인데, 북주가 하북 북방을 장악하고 있는 북제를 멸망한 것은 서기 577년이다. 따라서 북주가 고구려를 공격할려면 서기 577-578년 사이에나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북주 무제의 고구려 공격은 사실이 아니다.

 

    앞서 서기 553년 북제를 괴롭히던 거란족은 이때에 이르러 대패하고 북제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그후 돌궐이 강성하자 거란족은 다시 돌궐에 붙었다. 서기 577년 북제가 멸망하자 고보녕이 영주를 근거로 북주에 대항한다. 이때 고보녕은 인근 거란제부족들을 끌어들였을 것이다. 고구려 평원왕은 그동안 형제국처럼 지내던 북제가 멸망하자, 바로 북주와 화친을 맺는다. 따라서 북주가 고구려를 공격했다는 기록은 오류이며, 정황상 거란족이 맞다.

   평원왕의 사위로서 온달은 귀족들에게 무언가를 보여주어야 했었고, 그 결과물이 거란족과의 전투에서 승리 거둔 것이다. 이 공로로 온달은 대형(大兄)의 벼슬을 받았다. 온달은 이로부터 위엄과 권세가 날로 융성해졌다. 평원왕은 북주가 멸망하고 들어선 수나라와 진(陳)나라 사이에서 두길 보기를 하다가 서기 590년 수나라가 진나라를 멸망시키자, 병사를 훈련시키고, 군량미를 비축하여 국방을 강화할 대비책을 세웠다고 한다. 그 중심에 온달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그해 평원왕은 붕어하였다.

 

뒤를 이어 평원왕의 맏아들인 대원이 왕위에 올랐다. 그가 영양왕이다. 영양왕은 거란제부족들이 수나라에 접근하자, 표면적으로 사신을 보내 우호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때 온달이 영양왕에게 “지금 신라가 우리의 한수 이북의 땅을 차지하여 자기들의 군현으로 삼으니, 그곳의 백성들이 애통하고 한스럽게 여겨 한시도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사옵니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 저를 어리석고 불초하다 여기지 마시고 병사를 주신다면 한번 쳐들어가 반드시 우리 땅을 도로 찾아오겠나이다.”라고 읍소하였다. 영양왕의 입장에서 중원의 사정도 다급하지만, 신라 및 백제의 움직임을 좌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온달이 나라를 위해 나설 것을 주청한 것이다. 또한 온달의 또 다른 목적이 있었으니, 서기 551년 남쪽 변경의 장수로서 신라의 침공을 막지 못해 10개 군을 빼앗긴 한을 갚기 위함이었다.

 

   온달은 대규모의 군사를 동원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모든 군사력은 서쪽 수나라를 겨냥하였기 때문에 여력이 없었다. 온달은 은밀히 말갈군과 변방 군사들을 동원하였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사기 본기 어디에도 고구려의 공격 기록이 수록되지 않은 것이다. 온달은 지금의 한강 상류로 추정되는 아단성에서 신라군과 싸우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서 죽고 말았다.

온달 사후 영양왕은 서기 603년이 되어서야 신라 북한산성을 공격하였다. 온달이 본기에 없고 열전에만 수록된 이유로 인해 그의 실존성에 의문을 가질 필요는 없다. 또한 바보온달로 인식한 현대인들의 생각도 바뀌여야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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