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암 박은식

2014. 12. 21. 01:05우리 역사 바로알기

 

 

 

 

 

      시사상식사전

박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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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한 말의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역사가
출생 - 사망

1859 ~ 1925

   한 말의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역사가다. <황성신문>의 창간 멤버이고 <대한매일신보>에서도 활동하였다. 3ㆍ1 운동 때는 애국노인단을 조직하는 한편, 민족의식을 곧추세우는 우리나라 고대사와 영웅들에 관한 역사서를 저술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2대 대통령에 취임하여 내각 책임제를 기초로 한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키고 자신은 자진하여 사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859년 9월 30일 황해도 황주에서 태어났다. 자는 성칠(), 호는 겸곡()ㆍ백암()ㆍ태백광노()다. 서당훈장이었던 아버지를 두어 정통 주자학 교육을 엄격하게 받았다. 그러나 이후 정약용의 제자인 신기영과 정관섭 등에게 학문을 사사하면서 실학을 접하게 되었다. 1885년 향시에서 특선()으로 뽑히고, 민씨일파와 가까워져 숭인전참본(殿)과 동명왕릉참봉()이 되기도 했다. 그러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과 갑오개혁이 일어나자 농민전쟁은 반란이고, 갑오개혁은 사설()이라는 극히 보수적인 시각으로 보아 벼슬을 그만두고 은거했다.

    그러다 아관파천이 일어나고 갑오개혁이 붕괴된 1896년, 박은식은 상경하여 접하게 된 독립협회의 사상과 운동에 충격을 받고 각국의 시세를 가늠하는 데 노력하였으며, 이후 주자학을 뒤로한 채 개화자강파 사상가로 전환하였다. 1898년에는 독립협회의 회원이 되었고 만민공동회에서도 활약했다. 그는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에서 일제의 침략정책을 비판하면서 독립정신과 애국사상을 고취시키고자 하였다.

    을사조약 이후에는 사상적으로 더욱 급격히 전환하여 위정척사사상을 비판하고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대한자강회, 서우학회 등에 가입하였고 비밀결사 집단인 신민회에도 가입하여 교육과 출판 부문에서 활동했다. 이런 활동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은 일본에 병합되었고 국사 관련 서적이 압수되고 독립적인 언론 기관들이 폐간조치 당하자 시베리아로 망명한다. 그 곳에서 대종교()의 신도가 되었고 직접 만주의 고대 유적지를 답사하면서 한국고대사와 관련된 <동명성왕실기>, <발해태조건국지>, <몽견금태조()>, <명림답부전>, <천개소문전>, <대동고대사론> 등을 저술했다. 상해 임시정부에서도 활약하여 <독립신문>을 경영하였으며 이승만 탄핵 이후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그의 역사관은 흔히 혼사관()이라고 불린다. 박은식은 민족이나 국가의 정수는 바로 '혼, 정신'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민족혼의 중심인 국사가 제대로 선다면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관념론적이며 영웅주의적인 면모도 보였지만 전근대의 중화주의적 역사관에서 탈피하여 민족 중심의 역사로 전환하는 동시에, 근대적인 역사서술 방식을 도입하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

역사관

    박은식의 역사관은 흔히 혼사관()이라고 불린다. 박은식은 민족이나 국가의 정수는 바로 '혼, 정신'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민족혼의 중심인 국사가 제대로 선다면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관념론적이며 영웅주의적인 면모도 보였지만 전근대의 중화주의적 역사관에서 탈피하여 민족 중심의 역사로 전환하는 동시에, 근대적인 역사서술 방식을 도입하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

    그는 <한국 통사>를 저술하여 근대 이후 일본의 한국 침략과정을 밝히고, <한국 독립운동 지혈사>에서는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투쟁한 독립운동을 서술하였다. <한국 통사>에서는 민족정신을 ‘혼()’으로 파악하여, 혼이 담겨 있는 민족사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일제에 의해 비록 구백()은 빼앗겼으나 국혼()만 잘 유지, 강화시켜 나가면 언젠가는 독립할 수 있음을 고취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한국 독립운동 지혈사>에서는 일제의 침략 죄상을 낱낱이 비판하고, 3ㆍ1 운동이 갑신정변 이래 민족 독립운동이 민족 내부에 축적되어 봉기한 것임을 설명하였다. 역사의 대세와 국내 정세는 일본 제국주의가 반드시 패망하도록 변화하고 있으며, 3ㆍ1 운동을 전환점으로 한 한국 민족의 불굴의 헌신적 독립운동이 반드시 독립을 쟁취하도록 전개되고 있다는 최후의 승리에 대한 낙관적 견해를 표명하여 독립운동 정신을 고취하였다. ‘통사’가 문제의식을 일으키는 책이라면, ‘혈사’는 실천과 행동을 고취하는 책으로서, 일본 제국주의의 죄상을 격렬한 필치로 고발ㆍ비판하는 한편, 역사의 대세와 국내외 정세가 일제의 패망을 재촉하고 있다고 낙관적으로 미래를 전망했다. 이 서적들은 일제의 온갖 탄압에도 불구하고 비밀리에 국내에 반입되어 널리 애독되었다.

   조선광문회( )를 조직하여 민족고전을 정리ㆍ간행하였고, 양명학에도 조예가 깊어 <유교구신론>을 통해 유학의 개혁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며,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의 주필을 역임하였다. 대동사상()을 주장하여 독립운동단체인 대동보국단을 조직하고, 대동교를 창시하기도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박은식 [朴殷植] (시사상식사전, 박문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