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3. 27. 05:28ㆍ차 이야기
[박정진의 차맥] <36>불교와 차의 황금기 ③ 대각국사 의천, 뇌원차 수출
고려의 명품 뇌원차 송나라로 수출… 양국 문화교류 앞장
이차돈의 죽음과 함께 불교를 공인하는 데 성공한 신라 23대 법흥왕은 불교에 심취한 나머지 왕위를 미리 선양하고 승려가 되었다. 법흥왕은 이름을 법공(法空)이라고 하고 신라에서 창건된 첫 사찰인 흥륜사(興輪寺)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는 신라 역사상 처음으로 독자적인 연호인 건원(建元)을 사용하였다.
신라의 왕자들 가운데는 왕위를 얻지 못하면 승려가 되는 일이 많았다. 그만큼 승려는 왕족들의 신분에 걸맞은 귀족이었다. 신라 왕자 출신의 승려들은 중국에서도 특급대우를 받으며 대륙에서 명성을 드날렸다. 무상선사와 김지장 스님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밖에도 여럿이 있다.
선암사에 보존되어 있는 의천(義天) 대각국사(大覺國師) 진영. |
“너희들 중 누가 출가하여 도(道)를 닦겠는가.”
침묵이 흐른다.
“어째서 말이 없는가.”
이때 4번째 왕자인 후(煦)가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소자가 출가하여 스님이 되겠습니다. 오직 아바마마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문종은 놀랍고 기쁜 얼굴로 후를 바라보았다. 그때 의천의 나이 11살이었다. 의천은 경덕국사(景德國師)를 의지하여 구족계를 받고 출가한다. 출가한 뒤 송나라로 들어가 지자탑원에서 서원을 세운 바와 같이 고려에 들어와 천태종을 개창하고 법안종을 흡수하여 5대 선원을 세우고 선교쌍수의 정신을 이어 나간다. 대각국사가 열반하자 비석이 모두 3곳에 세워진다. 고려 인종 3년(1125) 개성 영통사(靈通寺)에 대각국사비가 세워지고, 고려 숙종 6년(1101)에 개성 흥왕사(興王寺)에 대각국사묘지명과 칠곡 선봉사(僊鳳寺)에도 대각국사비석이 세워진다.
최근 북한 정부는 개성 영통사 복원을 일본 대정(大正)대학에 의뢰하여 대대적인 발굴을 한 바 있다. 발굴 결과 대각국사 의천의 석함과 묘탑이 발견되었다.
또 개성 흥왕사에 세워졌던 ‘대각국사묘지명’(大覺國師 墓誌銘)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경기도 풍덕군 덕적산 흥왕사 터에서 발견되어 조선 총독부 시절에 박물관에 보관되었던 것이다.
해동 천태종의 시조로만 알려져 있는 의천을 통해 송과의 활발한 차문화 교류가 이루어졌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의천은 고려의 차 문화를 한 단계 올린 승려로도 유명하다. 의천은 고려의 뇌원차(腦原茶)를 송나라로 수출하고 그 대신 송의 용봉단차(龍鳳團茶)를 수입하여 양국 간의 문화교류에도 앞장섰다. ‘대각국사묘지명’은 그가 중국에서 얼마나 추앙받는 인물인지를 증명하고 있다.
“요나라 천우황제(天佑皇帝, 道宗·1055∼1100)가 재차 경적(經籍)과 차향(茶香) 금백(金帛)을 보내와 국사와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었다.”
천우황제가 의천을 차의 스승으로 받든 놀라운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당시 송 황실은 북쪽에 금나라의 세력이 왕성하던 시절이라 고려와의 친교가 절실하던 때였다. 어용차인 용봉단차는 당시 중국에서도 구하기 힘든 차였다. 용봉단차가 얼마나 귀한 물건이었던가를 송나라 휘종의 ‘대관다론’은 ‘천하의 으뜸가는 차’라고 칭송하고 있다.
송나라의 사신으로 고려에 왔다가 돌아가서 ‘고려도경(高麗圖經)’을 쓴 서긍(徐兢)은 고려의 토산차와 송나라 차를 비교하기도 했다. 고려의 토산차는 맛이 쓰고 떫어 입에 넣기가 어렵다고 하면서 당시 귀하게 여긴 것은 용봉사단(龍鳳賜團)이라고 하였다. 의천은 송 황실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으면 1년 7개월 동안의 구법유학을 마치고 귀국한다. 그때 스승은 그에게 차를 선물했는데 그 고마움을 표한 시가 있다.
“북쪽 동산에서 새로 말린 차/동림에 계신 스님께서 선물했네./한가히 차 달일 날을 미리 알고/찬 얼음 깨고 샘줄기 찾네.”(北苑移新焙 東林贈進僧 預知閑煮日 泉脈冷高永)
중국 절강성과 한국의 차 문화교류는 신라 흥덕왕 때 사신으로 갔던 대렴이 차씨를 가져와서 지리산에 심은 것에서 비롯된다. 그 뒤 의천 대각국사가 천태산과 인연을 맺으면서 교류는 더욱더 활발해진다.
현재 경남 하동의 차는 천태산의 최고봉인 화정봉에서 발원된 귀운동(歸云洞)의 차나무와 DNA가 같은 것으로 밝혀져 주목을 받았다. 일본의 차 전래도 절강성 천태산과 인연을 맺고 있다. 가마쿠라(鎌倉) 시대에 송나라로 유학한 에이사이(榮西·1141∼1215) 선사는 중국 천태산 만년사에서 수행한 뒤 일본으로 돌아갈 때 차씨를 가져가서 세부리산(背振山) 소후쿠지(聖福寺)에 심었다. 에이사이는 천태산 만년사에서 일본다도의 전적(典籍)인 ‘끽다양생기’를 썼다.
일본 교토(京都)의 서북쪽 도가노산(梅尾山) 들머리에는 ‘일본최고의 다원’(日本最古之茶園)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가마쿠라 시대인 1206년 묘우에상인(明惠上人)이 에이사이 선사에게 받은 차 씨앗을 심은 곳이다. 그 차가 일본 우지(宇治)로 건너가 말차의 원조가 되었다.
대각국사 의천이 천태산의 차와 인연을 맺은 것은 에이사이보다 100여 년 앞선다. 이에 앞서 일본 천태종의 창시자인 사이초(最澄)는 천태산에서 지관법(止觀法)을 배워 806년에 일본 천태종을 개창했다. 천태종의 성립은 일본이 빠르다. 천태종(天台宗)은 6세기(수나라, 594년) 천태(天台) 지자대사(智者大師) 지의(智?·538∼597)가 고향인 형주(荊州)에서 옥천사(玉泉寺)를 열고, ‘법화현의(法華玄義)’ ‘법화문구(法華文句)’ ‘마하지관(摩訶止觀)’ 등 천태 3대부(天台三大部)를 강의함으로써 비롯된다. 천태종이라는 명칭은 천태산에서 유래한다. 이 종파의 기본경전은 ‘법화경(法華經)’으로 ‘법화종’이라 불리기도 한다. 천태종의 기본적인 교의는 ‘삼제원융’(三諸圓融)이다.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부터 천태종이 전해졌는데 백제의 현광(玄光)과 신라의 연광(緣光)이 중국에서 천태종을 배운 대표적 승려이다. 고려 광종 때 학승 제관(諦觀)은 입문서라고 할 수 있는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를 저술했다. 의천(義天)에 이르러 독립된 종파로서 천태종이 성립된다.
의천이 중국에 머무는 동안 개봉과 항저우(杭州)를 왕복하면서 만난 승려와 정치가들은 모두 53명에 달한다. 화엄, 천태, 법상, 율종, 선종 등 당대의 주요 인물들을 망라하였다. 각엄사의 유성 법사, 상국사의 운문종 종본, 금산사의 불인요원, 해인원의 정원 법사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는 교(敎)와 선(禪), 화엄과 천태의 융합을 시도했다.
의천과 정원 법사의 만남은 큰 의미를 갖는다. 의천은 불인요원 선사에게 향로와 가사 경질을 선물하였다. 요원선사는 의천에게 게송을 주었다.
“고려국 우세 스님이 향로를 주시니/범인, 성인, 용과 하늘이 모두 하나의 모범을 삼네./온 세계 태평하고 지극한 교화로 돌아갈 건데/ 불법공부는 다시 어디에 쓰시려나.”
의천이 항주에 머물 때 항주 태수로 있던 소동파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소동파는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렸는데 그중 ‘논고려진봉장’은 고려 승려나 관리들이 송나라에 드나드는 것이 고려에는 이익이 되나 송나라에는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의천이 주석한 고려사 뒤의 옥잠산을 깎아 소동파 제방을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혜인 고려사 절터에는 소동파 비석이 자리 잡고 있다. 혜원사는 의천이 고려에 돌아간 뒤에 화엄종과 금 2000냥을 시주해 중창한 후 고려사로 바뀌었다.
고려의 천태종은 중국에서 개창된 지 500여 년 뒤인 대각국사 의천에 의해 개경의 국청사를 주 사찰로 삼아 교관겸수(敎觀兼修)를 내걸고 교종을 중심으로 선종을 통합하는, 5교 9산을 융합하는 형태로 창시된다. 의천이 국청사에서 천태교관을 선포한 1097년이다. 한국·중국·일본 3국에 같은 이름의 종단이 있는 불교 종단은 천태종뿐이다.
의천이 고려의 천태종을 세울 것을 발원한 지자탑원은 천태종의 개조 천태 지의대사의 육신을 모신 곳이다. 이 육신탑 앞에서 의천은 출가하였다(1086년 4월). 의천이 발원한 지자탑 뒤에는 천태종을 일으킨 조사들이 모셔져 있는데 고려의 보운의통 조사도 천태종 15대 조사에 들어 있다.
2010년 4월 27일, 제5차 세계선차문화교류대회(2010년 4월 23∼26일, 寧波)를 마친 뒤, 필자는 대각국사 의천의 부도와 가사, 진영을 보존하고 있는 선암사 승려 및 선차대회 참가자 일행들과 함께 지자탑원에 들러 영산재를 지낸 뒤 헌다를 하였다. 실로 의천 사후 910년 만의 일이었다.
의천과 관련하여서는 역시 뇌원차가 관심이 될 수밖에 없다. 고려시대에 유행했던 차는 유차(孺茶)와 뇌원차(腦原茶)이다. 뇌원차의 비밀을 밝히는 것이 학계의 과제가 되고 있다. 현재까지 뇌원차는 차의 수종이나 성분, 제조방법과 관련된 것이라기보다는 아마도 차가 생산된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뇌원차의 모양으로 짐작되는 단차(團茶)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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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뇌원차 수출을 문헌적으로 연구한 허흥식 박사는 뇌원차의 생산지로 전남 고흥군 두원면을 비정했다. 지금도 두원면 주변에는 야생차 군락지가 있어 이를 방증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뇌원차가 호남지역에만 생산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풍속자료에도 “뇌원이란 차의 일종인데 고려 시대 전남지방의 지명으로 그곳에서 생산되는 차를 말한다. 후에 뇌선차로 바뀌었다. 그것이 충선왕(忠宣王)의 휘(諱)가 원(願)과 같다고 하여 변경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무튼 고려의 뇌원차는 그 명성이 대단했던 것 같다. 임금은 공신들에게 부의(賻儀)로 차를 하사하기도 했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공신들의 면모가 화려하다. 최지몽(崔知夢), 최승로(崔承老), 최량(崔亮), 서희(徐熙), 한언공(韓彦恭), 황포영(皇甫潁) 등 쟁쟁한 인물들이다. 이들에게는 뇌원차가 200각에서 1000각까지 하사됐다. 뇌원차와 함께 대차(大茶)가 하사되기도 했다.
허 박사는 “차의 이름으로 뇌원차(腦原茶)와 대차(大茶)의 두 가지로만 나타난다. 이 두 가지 차의 모양이나 이름, 그리고 실물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거란의 기록에 쓰인 뇌환차(腦丸茶)는 뇌원차이고, 고려 후기에 충선왕의 이름을 피하여 뇌선차(腦先茶)로 실려 있다. 대차보다 고려차의 대명사처럼 쓰인 뇌원차는 고려의 최고급 차인가, 일반차인가 규명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는 또 “차의 생산지는 경남보다는 전남에 밀집되었고, 뇌원과 일치하지 않으나 가장 근접한 지명은 고흥군 두원면의 옛 지명인 두원현(荳原縣)이다. 두원현은 백제의 두힐현(豆?縣)이고 신라에서 회진현(會津顯)으로 고쳤다는 설과 경덕왕 시에 강원현(薑原顯)으로 고쳤다는 다른 설이 있다. 고려 대부분의 시기에 속현으로 머물렀으며, 이곳은 장보고가 활동한 청해진의 중요한 이웃이었다. (중략) 두원의 ‘두’는 콩을 의미하는 글자이지만 차와도 상통하며, 머리 두(頭)와 발음도 같으며 의미도 비슷하다. 머리는 뇌의 중요 부분이고 두원이라는 차밭의 의미와도 상통하기 때문이다. 두원은 최우 집권기 원오 국사 천영을 다비한 곳이고, 순천 송광산 수선사의 형지기는 “시납한 토지가 있었던 곳”이라고 말한다.
오늘날 고흥반도의 서북쪽에 위치한 두원면 계곡은 차밭으로 적격지이다. 정남으로 태풍을 맞는 정남의 해안보다 바닷바람을 막아주는 동향의 지형인 데다 보성만이 호수처럼 가까이 있어 밤이슬도 풍부하다.
오늘날 두원면에서 뇌원차의 유적을 찾기는 어렵지만 언어상으로 두원과 뇌원, 선승들이 왕래하면서 정착시킨 항구 이름, 차의 재배와 가공, 그리고 차의 재배조건과 같은 유자의 주도적인 생산, 보성차밭이 바라보이는 자연조건은 뇌원차의 기원을 말하기에 적합하다는 게 허 박사의 견해이다.
뇌원차는 벽돌모양의 전차(?茶)의 형태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부피를 재는 단위인 각(角)으로 표시되었기 때문이다.
뇌원차의 발상지 중 하나로 거론되는 것이 의천 대각국사가 머물렀던 전남 선암사로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대각국사가 가장 오래 머물렀던 절이라는 점이 유력하게 작용한 듯하다. 아마도 용봉단차를 즐겨 마셨던 고려의 대표적 차인 의천은 이곳에서 용봉단차에 필적하는 고려의 차를 만들기에 부심하였을 것이고, 끝내 고려의 최상품 차인 뇌원차를 만들어 수출하였을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선암사 응진전 뒤 삼탕수는 아직도 차의 명성을 잃지 않고 있다.
문화평론가(pjjdisc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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