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차의 전래시기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나, 삼한시대에 백산차(白山茶)라고 불리는 차가 있었음으로 보아 삼한시대부터 우리의 토착 차(茶)문화가 싹트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수로왕비(首露王妃)인 허황후(許王后)에 의해 인도로부터 차가 전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김해(金海) 백월산(白月山)에 죽로차(竹露茶)가 있었는데, 수로왕비 허씨가 인도로부터 가져온 차종이라고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전한다. ‘수로왕의 17대 손인 갱세(憾世)급간이 661년 조정의 명을 받들어 가락국의 거등왕(巨登王)이 선왕(先王)인 수로왕(首露王) 무덤에 제사를 올릴 때 차와 떡 그리고 과일, 밥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고, 또 『삼국사기』에 신라 흥덕왕 3년(서기828)의 기록에는 ‘대렴이 사신으로 중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차종을 가지고 옴에 왕이 그것을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성덕왕 때부터 있었지만 비로소 이 시기에 이르러 성행하게 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것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우리의 차 역사는 가락국을 거쳐 삼국시대 말기인 선덕여왕 때 정착되었다는 말이 된다. 또한『삼국유사』에 따르면 매년 삼월 삼짇날 삼화령(三花嶺)의 미륵 부처님께 차공양을 올렸던 역사적 사실이 있다. 그 일화를 살펴보면,
신라 35대 경덕왕(景德王, 742~765)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만월성 귀정문(歸正門) 누(樓)에 올라 말했다.
“누가 훌륭한 스님을 데려올 수 있겠는가.”
그때, 옷을 잘 입은 한 스님이 귀정문 앞을 지나가자 신하들이 그를 데리고 왔다.
경덕왕은 불려온 스님을 보고 자신이 찾는 스님이 아니라하며 물리쳤다.
얼마 후 한 승려가 장삼을 걸친 채로 앵통(櫻筒)을 메고 남쪽에서 걸어왔다.
왕은 그를 누 위로 맞이하고 물었다.
“그대는 누구요.”
“저는 충담입니다.”
“어디서 오는 길이요.”
“소승은 해마다 삼월 삼짇날과 종구일이면 삼화령의 미륵불께 차 공양을 합니다. 오늘도 차 공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내게 차를 나누어 줄 수 있겠소”
충담은 자리를 펴고 경덕왕에게 신비로운 향기로 가득한 차를 대접했다. 차를 나누어 마신 경덕왕이 충담에게 말하였다.
“내 들으니 스님이 지은 기파랑을 찬미한 산외가가 그 뜻이 놀랍다고 들었는데 과연 그러하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위하여 백성을 다스릴 편안한 노래를 지어줄 수 있겠소.”
충담은 경덕왕의 부탁에 노래를 한 수 읊어 내려갔다. 그것이 현대에까지 전해져오는 안민가(安民歌)였다.
안민가(安民歌)
君隱父也
臣隱愛賜尸母史也
民焉狂尸恨阿孩古爲賜尸知
民是愛尸知古如
窟理叱大 生以支所音物生
此惡支治良羅
此地 捨遺只於冬是去於丁 爲尸知
國惡支持以支知古如
後句 君如臣多支民隱如 爲內尸等焉
國惡太平恨音叱如
임금은 아비요
신하는 자애로운 어미요
백성은 어린아이라고 말하니
백성이 사랑을 알고 있도다.
중생을 구제할 수 있기에
이를 배불리하여 다스리라.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
이에 나라 보전할 것을 알리라.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한다면
나라가 대대로 태평하리라.
충담 선사가 올렸던 삼화령이 남산 남동쪽의 미륵불이 앞에 있던 대연화대좌(大蓮華臺座)인지 생의사(生義寺)에서 출토된 미륵삼존이 나온 자리인지는 아직까지 규명되지 않았지만, 남산동 남쪽에 있는 연화대자리를 삼화령 자리로 규정하였고 일반적으로 그렇게 알려져 있다. 그 뒤 해마다 삼월 삼짇날만 되면 차인들이 그 대좌 위에 헌다를 올린다. 이처럼 충담의 차 한 잔이 역사 속에서 걸어 나와 신라의 차향처럼 천년 동안 빛나고 있다.
당시 충담선사가 짊어 메고 차를 올린 끽다용 다구인 앵통(櫻筒)의 예로 보아, 한국 다도의 창립은 중국이나 일본의 영향을 받지 않고 한국의 독창적 창안이라고 볼 수 있다.
역사 기록에는 견당사 대렴이 당으로부터 차종을 가져와 지리산에 심은 것이 문헌상 기록으로 전해져왔으며, 이를 한국 차문화의 정착으로 일반화하고 있다. 그러나 대렴보다 80년 전, 신라 왕손인 지장법사(地藏法師, 696~794)가 중국으로 건너갈 때 차(茶) 씨앗 외에 황립도(黃粒稻)와 오차송(五松)을 가지고 갔고, 명조 만력(萬曆, 1573~1613)에 편찬한 『구화산지(九華山志)』에 따르면, ‘梗空如相傳金地藏 携來種(속이 빈 대나무처럼 생긴 나무줄기가 김지장이 신라로부터 가져온 차씨)’라고 전하는 기록도 있다.
또한 전당시에 기록된 지장스님의 ‘송동자하산(送童子下山)’이라는 시에서도 절절히 차를 노래하고 있는 대목이 있다. 이렇듯 한국 차의 전래사를 밝힐 때 다양한 편련들이 전해오는데, 첫째는 중국으로부터 차종을 가져온 경우, 두 번째는 신라로부터 차종을 중국에 전한 경우, 세 번째는『동대사요록(東大寺要錄)』에 전하는 바와 같이 덴뽀우시대(天平時代) 교우끼(行基, 668~749) 스님이 말세 중생을 위해 차나무를 심었다는 설 등이 있다. 이를 보아 최초에는 차가 궁중에서 쓰여 오다가 점차 불교와 접목하면서 종교의식으로 발전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원류는 통일신라말기 구산선문(九山禪門) 조사들이 대거 당(唐)에 들어가 구법한 뒤, 귀국할 무렵 차와 선을 들여오면서 절정기를 맞는다. 금당다화(錦堂茶話) 석도륜(昔度輪)의 서문에 보면 “나말려초(羅末麗初)의 선종 구산문 다선의 전성기 때 해운거상 장보고에 의해 촉(蜀)의 몽정차를 무역 했었던 기억이 있다”고 밝혔듯이 구산선문의 조사들이 장보고 선단을 통해 속속 귀국하니 그들이 자연 다선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조주선사(趙州禪師)와 법형제 되는 철감도윤(徹鑑道允)선사가 장보고 선단을 통해 무주로 귀국하니 바야흐로 다선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차는 처음에는 약용으로 사용되다가 나중에 음료로 변화되었는데, 우리 차문화의 기원은 신라시대이후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발전되어 왔고, 이것은 곧 한국의 불교문화의 발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선종차의 전래
차(茶)가 중국을 거쳐 한국과 일본으로 동점되었다는 사실은 대체적 시각이다. 우리 차를 말할 때 1천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정작 차의 연원을 대려면 고작 신라 흥덕왕 때 대렴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차씨를 가져와 지리산 자락에 심은 이후 차문화가 크게 발전되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그밖에 차를 말할 때는 최치원의 「진감국사비명」의 ‘한명(漢茗)’ 정도를 언급한다.
일본 우라센케종의 선조 센노리큐가 차를 정립하기 이전 김해 지역의 도공들이 대거 사까이 지역으로 몰려왔는데, 그때 차가 도자기와 접촉하는데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오늘날의 일본차는 거의 500년간 차의 유파가 형성되면서 크게 발전되어 왔다. 그러나 대부분 중국으로부터 연원을 대고 있으며 중국으로부터 직접 차맥이 들어갔다고 말한다. 에이사이선사가 중국에 유학 갔을 때 나무를 가지고 와 일본차의 원조가 되었다고 전할뿐만 아니라 선다일미란 말이 일본 다도의 정신적 기반을 이룬 것은 원오극근 선사가 다선도량으로 개설한 벽암 협산사의 방장이란 편액과 원오극근 선사가 호구소륭에게 준 전다게송 등이 고스란히 일본으로 전해졌기 때문에 중국 선차가 일본 땅으로 전승되었다고 믿고 있다.
이에 비해 우리 차는 구산선문 조사들로부터 차(茶)와 선(禪)이 같이 들어왔으면서도 뚜렷하게 부각되지 않은 까닭에 신라 흥덕왕 대렴만 읊조리고 있다. 중국 사람들은 만나는 사람마다 “차나 한 잔 마시러 갑시다”가 인사이고, 그 원류는 조주의 끽다거로부터 시작된다. 중국 다도의 조정이 되어 버린 일본 다도는 사실 선차의 시작인 조주와는 별 관련이 없다. 반면 조주선사와의 법형제간인 신라의 철감 선사와는 깊은 인연이 있다. 그래서 일본보다는 한국 차가 더욱 전통성이 강한 것이다.
한국 선종과 중국 선차의 관계는 당대 중국 초기 선종사에 있어서 일가를 이룬 정중종의 개조 무상선사로부터 시작하여 철감도윤(徹鑑道允) ㆍ 범일(梵日) ㆍ 혜철(蕙哲) ㆍ 흥척 등 구산선문의 조사들이 선맥 뿐 아니라 차맥까지 이어 왔고 신라 왕자 출신의 고승 지장법사는 중국으로 건너가 지장불차의 명성을 이었다. 송대로 접어들면서 의천대각국사가 입송하여 송나라에서 유행했던 차풍은 고려로 들어온다. 이때 고려 때 유행했던 뇌원차를 송나라로 수출했고 송나라 왕실 어전차인 용봉단차를 고려로 수입하는 등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다. 이어 원대로 접어들면서 원대의 임제종을 크게 떨친 석옥청공 선사로부터 태고보우 선사가 들어가 임제의 선맥 뿐 아니라 차맥까지 이어 오기에 이른다.
당 ㆍ 송 ㆍ 원대에 이르는 동안 한국 선종은 중국 선종과의 독창적 차 정신을 온전히 이어 와 한국 선종에 차선일미의 정신으로 녹아들게 했다. 우리 차의 원류를 밝히는 첫 번째 시도는 중국 땅에서 만난 다선일미 정신을 세분화시켜 사천성 성도의 정중사 무상과 남전사의 남전보원과 마곡암의 무염 등 한국 선종사에 큰 자취를 남긴 선승들의 선차정신을 살펴보고 태고보우의 선차정신을 살펴봄으로써 한국 차정신이 중국 선승들에게 영향을 받았음을 밝히고자 하는 데에 있다.
선차지법 개창 신라 무상
중국에 선법이 신라로 흘러간다는 참설이 유행하던 시절, 사천성 성도를 중심으로 정중종(淨衆宗)을 일으킨 무상선사에 의해 선차는 전성기를 맞는다. 신라승 무상으로부터 시작된 차문화는 마조를 거쳐 선차문화를 이끌어 내며 중국 선차의 체계적인 발전을 가져오는 계기를 마련한다.
『역대법보기(歷代法寶記)』(774)에는 무주(無住)선사가 동선(董璿)을 시켜서 무상선사에게 차아(茶芽)를 올리니 너무나 기뻐했다는 구절이 보인다. 『역대법보기』에 무주선사가 차를 마시면서 대화하고 있는 내용을 살펴보면 무주(無住)화상이 차를 마시고 있을 때 그날 막부의 관료와 시랑(侍郞) 30여 명이 예배하고 좌정한 뒤 질문을 했다.
“화상께선 차를 좋아하십니까”
“그렇습니다.”
곧 차를 게송(偈頌)으로 지어 설하였다.
“깊은 골짜기에 신영(神靈)한 약초가 자라서 신기(神機)하게 수도(修道)의 성치를 도와 주었다. 나무꾼이 나뭇잎을 따면 좋은 맛이 흘러 들어 그릇에 넘친다. 정좌하여 망념(妄念)을 가라 앉히니 자기 본성이 마음의 거울에 비친다.”
선승들의 끽다거(喫茶去)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역대법보기』일 것이다. 무상과 무주ㆍ마조(馬祖)를 차로 연결 짓는 중요한 사실을 살펴볼 때 중국 선차문화의 연원 또한 무상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은 시사하는 바가 큰데다가 사천성은 차의 고장이다. 그뿐 아니라 티베트까지 차로 연결 짓고 있으니 사천은 차문화의 중심지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사천성의 중심은 성도이다. 성도는 바로 무상선사가 주석한 정중사 터가 있었던 곳이고 무상선사가 천곡산(天谷山)에 은거할 때 무주로부터 차를 맛본 곳이 천곡산이다. 지금은 천성산이 되고 도교유적이 되어 있지만, 그 옛날 무상선사가 활동했던 천곡사는 지금의 태안사(泰安寺)라는 설도 있다.
사천성의 성도는 촉나라의 중심지이며, 중국 차문화의 발상지나 다름없다. 그뿐 아니라 선차문화의 발상지로까지 이야기하고 있다. 성도 사람들은 차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성도는 차의 고장이다. 그 연원은 무상으로 시작되어 마조로 이어졌고, 사천성의 차문화는 양자강(揚子江) 차문화로 변화하여 선차문화의 대명사가 되다시피 했다.
신라로 온 철감 도윤의 차
얼마전 건립된 중국의 조주선차비에는 신라 출신의 선승 무상선사의 심인을 받은 제자 마조도일 문하에서 배운 도의ㆍ홍척ㆍ혜철ㆍ무념ㆍ범일ㆍ현욱ㆍ도윤 등 7명의 선승이 총 망라되어 올라있다.
안휘성(安徽省)은 중국 최대의 차밭이 밀집되어 있을 뿐 아니라 한국 차문화사에 꼭 짚고 넘어갈 의미가 있는 곳이다. 차인들이 신주 모시듯 하고 있는 ‘끽다거(喫茶去)’라는 공안 또한 안휘성 남전사지에서 탄생되었으며, 전남 화순 쌍봉사의 철감도윤선사가 입당하여 안휘성 남전사로 남전보원선사를 참문한 뒤 깨달음을 얻고 법맥뿐 아니라 차맥까지 가지고 온 까닭으로 추앙받고 있는 신라의 지장법사 또한 안휘성의 구화산에 들어가 지장보살의 화신이 되었다. 오늘날 안휘성을 많이 찾는 연유 또한 차문화와 선의 접목에서 비롯된다.
중국 안휘성 귀지시 남전촌에 자리 잡고 있는 남전사지는 신라의 선승 철감도윤 선사가 남전보원선사를 참문하고 차맥까지 신라땅에 이어 온 까닭으로 차인들에게 매우 중요시되는 곳이다. 그뿐 아니라 끽다거 공안을 통해 차를 대중화시킨 조주종심과 법형제간인 까닭으로 남전사는 차인들의 고향과도 같다.
신라로부터 가져간 김지장 차가 오늘날 안휘성 구화불차로 명성을 얻고 있고, 중국인들이 신라인들을 매우 흠모했다는 사실로 볼 때 한ㆍ중 차문화의 맥락이 천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차향이 가득 피어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고려시대의 다풍
신라의 茶문화가 귀족과 승려들에 의해 계승 발전되었다면 고려시대의 음다풍은 귀족 및 일반 백성들까지 차를 즐겼다. 고려 때에는 차를 다루는 관청인 다방(茶房)과 차를 재배하는 다소촌(茶所村), 백성을 위한 다점(茶店)이 성행했었다.
그처럼 고려시대에는 차문화의 르네상스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때 진차(進茶)예식이 빠지지 않은 것도 그만큼 차가 고려 때 성행하였다는 증거다. 진차란 주과식선을 올리기 전에 임금께서 먼저 차를 명하시면 시신(侍臣)이 곧 차를 올리는 것을 말한다. 이때 접려관이 전(殿)을 향하여 잡수십사하고 국궁하여 권한다. 이때 임금께서는 반드시 태자(太子)이하 시신에게 차를 하사하심이 정례가 되었다.
차가 성행하면서 사원에서는 물〔水〕과 차(茶)에 밝은 승려도 있었다. 이규보의 시(詩)중에 이런 말이 나온다. “노승들 일도 많다오. 차와 물맛을 평하려 하니” 라는 구절이 이를 말해준다. 특히 고승이 입적하면 임금이 그 덕을 기리면서 차와 향을 내려 위로했다는 기록이 금석문 도처에 나온 것을 보면 당시 차문화가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준다.
또한 고려청자의 발달과 송의 천목다완 등장, 고려 문종의 아들인 대각국사 의천을 통해 송나라와 고려의 차문화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송은 용봉단차를 수입했고 고려는 뇌원차를 송나라로 수출하는데 그 산파역을 했던 의천 대각국사에게 요나라 황제가 제자의 인연을 맺었던 사실이 밝혀졌다. 경기도 풍덕군 덕적산 흥왕사 터에서 발견된 ‘대각국사 묘지명’에는 이런 말이 있다. “요나라(遼) 천우황제가 재차 경책과 차향과 급백 등을 보내와 국사와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었다”
송나라 휘종의 『대관다론』에서 용단용병은 천하에 으뜸간다고 칭송할 정도였다. 서긍의 『고려도경』에도 고려의 토산차(土産茶)와 중국의 납차를 비교했는데 토산차는 맛이 쓰고 떫어 입에 넣기가 어렵다고 했고 당시에 오직 귀하게 여긴 것이 용봉사단(龍鳳賜團)이라고 했다. 그 차가 의천을 통해 고려에 성행했으니 의천은 고려차문화 부흥에 산파역을 했음이 분명해진다.
그의 스승에게 차를 준 것에 대한 화답의 시가 다음과 같이 전한다.
북쪽동산에서 새로 말린 차 北苑移新焙
동림에 계신 스님에서 선물했네 東林贈進僧
한가히 차 달일 날을 미리 알고 預知閑煮日
찬 얼음 깨고 샘줄기 찾네 泉脈冷高永
의천은 송 황실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은 뒤 송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 고려에 천태종을 부활하고 선과 천태사상의 진리 속에 다선삼매의 정신세계를 연다. 이처럼 의천은 송나라와 차문화 교류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고려 인종원년(1123)에 송나라 사적단으로 교려에 왔던 서긍(徐兢,1091~1153)이 남긴 『선화봉사 고려도경(宣和奉使 高麗圖經)』이라는 책의 차조(茶組)편에 “토산차는 맛이 쓰고 떫어 입에 넣을 수 없다”고 고려차를 폄하한 글이 실려 있다. 또 그는 고려인은 오직 중국의 납차(臘茶)와 용봉사단을 귀하게 여겨 송나라에서 구입하는 사람이 많다고 기록했다. 그는 다시 나가다구를 적어 놓았는데 “근래에 고려인들은 차 마시기를 기뻐하며 더욱 다구를 다스려 금화오잔(황금의 검은 잔)과 비색소구(靑磁茶碗)와 은로(銀爐)와 물 끓이는 소부가 모두 중국제를 본떴다고 하였다. 이로보아 고려 때에 은 다음의 발달은 비색소구와 금화오잔과 고려자기 발달에 촉진제가 되었던 것 같다.
고려청자의 탄생은 고려차문화의 발달에 의해 기인되었음을 알 수가 있겠다.
조선과 근래의 차문화
조선의 차문화를 말할 때 초의 선사(艸衣禪師ㆍ1786~1866)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초의 선사는『동다송(東茶頌)』이란 책을 지어 고래(古來)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 차문화(茶文化)를 살리면서 그 정신을 중정청경(中正淸境)으로 정립, 중국이나 일본다도와 확연히 다른 새로운 세계를 개척했다.
한국 차문화를 중흥시킨 초의 선사가 오랫동안 주석하면서 다선불이(茶禪不二) 정신을 이끌어 냈던 한국다선의 조정(祖庭)인 해남 대흥사의 다풍(茶風)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다선을 지켜온 조정, 대흥사 선다일미 원류
13대 종사(宗師)와 13대 강사(講師)를 배출해 낸 대흥사는 서산문도(西山門徒) 중 가장 번창한 소요태능계(逍遙太能系)와 편양언기계(鞭羊彦機系)가 함께 살면서 서산문풍을 드높였던 곳이다.
청허휴정(淸虛休靜ㆍ1520~1604)의 법맥을 잇는 제자만도 천여 명에 이르고 있으니 한국불교계 모든 승도(僧徒)가 청허법손이라고 말하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청허의 적손은 사명유정(四冥惟政) - 편양언기(鞭羊彦機) - 소요태능(逍遙太能) - 정관일선(靜觀一禪)으로 이어졌다.
대흥사는 편양언기(鞭羊彦機ㆍ1581~1644)에서 연담유일(連潭有一)을 거쳐 한국 차문화의 중흥조인 초의의순(草衣意恂)과 아암혜장(兒菴惠藏), 범해각안(梵海覺岸) 등 유난히도 많은 다승을 배출했다.
한국다선의 원류는 임제의현(臨濟義玄) 문하에서 양기방회(楊岐方會)가 나와 임제의현(臨濟義玄) - 황룡혜남(黃龍慧南) - 양기(楊岐) - 백운수단(百雲守端) - 원오극근(圓悟克勤) - 호구소륭(虎丘紹隆)을 거쳐 석옥청공(石屋淸珙) - 태고보우(太古普愚)로 이어져 왔고, 그 뒤 서산문도로 이어져 편양언기(鞭羊彦機) - 풍담의심(楓潭義諶) - 월담설재(月潭雪齋) - 환성지안(喚醒志安) - 호암체정(虎巖體淨) - 연담유일(蓮潭有一)을 거쳐 완호윤우(玩虎尹佑) - 초의의순(草衣意恂)으로 대흥사의 다풍이 면면히 이어져 왔다.
원오극근 선사가 일본인 제자에게 네 글자로 써 준 다선일미(茶禪一味)라는 진결(眞訣)이 일본 나라의 대덕사에 보존되면서 일본 다도의 전유물처럼 되어왔다. 그러나 양기방회(992~1049), 원오극근으로 이어지는 다선의 정통맥은 한국으로 이어졌다. 원오극근에서 호구소륭(1077~1136)으로 이어지는 다선의 정통맥을 청허 선사가 이어와 초의의순에 의해 활짝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한국다선의 조정 대흥사가 차지하는 위상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기 때문이었다.
추사ㆍ초의ㆍ다산 통해 차문화 부활
초의가 살았던 19세기는 혼란기였다. 조선의 음차(飮茶) 풍습 또한 자연 쇠퇴했으나 서산문도를 중심으로 차문화는 꺼지지 않았다. 그 시기 다신으로 불리는 초의 스님과 당대 금석학의 최고봉인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ㆍ1786~1856),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ㆍ1762~1836)이 만나면서 조선시대 차문화의 틀이 형성되어 갔다.
강진에 유배된 정약용은 만덕산 백련사(白蓮寺) 혜장(惠藏) 스님을 만나면서 차에 눈을 뜬다. 혜장은 다산에게 『주역(周易)』의 원리를 배웠고, 다산은 혜장에게서 다도(茶道)를 터득한다. 그 무렵 다산은 혜장 스님으로부터 대흥사에 기거하던 초의 스님을 소개받는다.
「초의대종사탑비(艸衣大宗師塔碑)」에는 이렇게 전한다. 다산승지(茶山承旨)로부터 유서(儒書)를 받고 시도(詩道)를 배워 교리에 정통하였고 크게 선경을 얻어 마침내 운유의 멋을 지었다.
초의는 다산의 아들 유산의 소개로 추사를 만난다. 초의는 제주도에 귀양 간 추사에게 해마다 차를 선물했는데 추사는 그 답례로 명선(茗禪)이라는 휘호를 선물한다. 원오극근이 쓴 茶禪一味에 견주어 추사는 茗禪을 쓴 것이다. 다선일미(茶禪一味)의 정신이 조선에 널리 퍼졌음을 말해 주는 대목이다.
초의와 교류했던 다산 정약용은 음차흥음주망(飮茶興飮酒亡)이라 했다. 차를 마시면 흥하고 술을 마시면 망한다는 이 말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한국 다도문화를 정립한 초의의 다풍은 일본 다도문화를 앞지르고 있다. 일본다도를 완성한 센노리큐(千利休)는 다도정신을 화경청적(和敬淸寂)으로 정립했는데 초의 선사는 중정청경(中正淸境)으로 정리하여 중국이나 일본다도와는 다른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초의 선사의 다도관을 정립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이가 정조대왕(正祖大王)의 사위인 홍현주(洪顯周ㆍ1793~1865)이다. 초의가 홍현주의 부탁을 받고 지은 것이 『동다행(東茶行)』이다. 그러나 오늘날 『동다행』은 전해 오지 않고 필사본인 『동다송(東茶頌)』만 전해 올 뿐이다.
또 초의 선사에게 영향을 받은 차인으로는 자하 신위(紫霞申緯ㆍ1769~1847)가 있다. 신위는 초의 선사의 부탁으로 선사의 스승인 완호윤우(玩虎尹佑ㆍ1758~1826)의 탑명과 서문을 써 준 인연으로 초의와 가까웠다. 『신위록』에는 초의 선사가 손수 만든 차를 받아 달여 마시면서 시흥(始興)의 자하 산 속 서재를 지키는 자하에게 그의 시를 받으러 오는 제자나 시화(詩畵)를 나누려고 찾아오는 선배들은 끊이지 않았다. 는 구절이 있다.
그처럼 초의 선사가 이룩한 차문화 공간에서 초의가 추사와 다산을 만났고, 남종화(南宗畵)를 개척한 소치는 초의를 만나면서 새로운 그림세계를 개척한다. 또한 정조대왕의 사위인 홍현주는 초의가 새로운 차의 세계를 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세기 초의가 차문화를 중흥시키지 못했다면 오늘날 우리 차문화는 소멸되고 말았을 것이다. 대흥사는 초의의 다풍을 이어 범해각안(梵海覺岸)과 금명보정(錦溟寶鼎) 선사가 배출했다. 그 중 범해각안 선사는 초의의 다도를 계승했다. 범해는 초의가 돌아간 지 12년이 되던 해 「초의차(艸衣茶)」란 시를 지었다.
穀雨初晴日 곡우절 맑은 날
黃芽葉未開 노란 싹잎은 아직 피지 않았네
空精炒出 솥에서 데쳐 내어
密室好乾來 밀실에서 말린다
栢斗方圓印 모나거나 둥근차 찍어내고
竹皮苞裏裁 죽순 껍질로 포장하여
嚴藏防外氣 바깥바람 들지 않게 간수하니
一椀滿香回 찻잔에 향기 가득하네.
그는 대흥사의 13대 강사의 한 분으로 추앙될 만큼 학문적 명성을 드날리기도 했다. 또 초의 선사의 다풍을 이어간 선사로 다송자 금명보정(錦溟寶鼎) 선사를 들 수 있다. 그는 다송자(茶松子)로 알려졌는데 차시 80여 수를 남겼고 초의 선사가 쓴 『동다송』을 필사해 냈다. 금명 스님은 범해 스님으로부터 감화받아 초의 선사 다풍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그가 편찬한 『백열록(栢悅錄)』에 초의 선사의 『동다송』과 범해(梵海)의 『다약설(茶藥說)』을 직접 수사(手寫)하여 넣었던 것이다. 그의 전차(煎茶)라는 차시를 보자.
차를 달이다[煎茶]
有僧來叩趙州 스님네가 찾아와서 조주문을 두드리면
自愧茶名就後庭 다송자 이름값에 후원으로 나간다
曾觀海外草翁頌 해남의 초의 선사 『동다송』을 진작 읽고
更考唐中陸子經 당나라 육우의 『다경』도 살피었네
養精宜點驚雷笑 정신을 깨우려면 경뢰소驚雷笑가 알맞겠고
待客須傾紫茸馨 손님을 맞을 때는 자용형姿茸馨이 제격이니
土銅甁松雨寂 질화로 동병 속에 솔바람 멎고 나면
一鍾舌勝醍靈 한 잔의 작설차는 제호보다 신령하다.
이렇듯 대흥사의 다풍은 면면히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근세 대흥사의 다풍
해방 이후 대흥사의 다풍은 누가 이어왔는가 응송 스님은 1893년 전남 완도에서 태어나 18세에 연파계의 취운화상을 은사로 득도, 대흥사에 머물면서 초의의 차정신을 이었고, 또 초의 선사의 법손으로 초의가 살았던 대광명전을 지키며 그의 선다일미 정신을 이어간 화중스님이 있다. 화중스님은 응송스님의 그늘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으나 초의 선사의 정통맥을 이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대흥사의 가풍 중 차의 11덕이 전해왔는데 노동(盧仝ㆍ775~835)의 칠완다가(七碗茶歌)를 뛰어 넘은 인상이 짙다.
우리의 차문화 속에 초의 선사가 말한 중정의 정신이 이어져 온다. 우리 생활 깊숙이 파고든 차문화는 신라 때 사천성에서 활약한 정중무상 선사 이후 이 땅으로 이어졌다. 선다일미의 정신 속에 조주선풍인 끽다거가 되살아나고 선차의 은은한 향기가 한반도 곳곳에 퍼졌다.
초의 선사는 『동다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나라 차나무는 원래 중국과 같지만 색과 향기와 효능과 맛에 일등공적이 있다. 육안차(陸安茶)는 맛이 좋고 몽산차(蒙山茶)는 약효가 좋은데 동차(東茶)는 두 가지를 겸비했다고 고인은 높이 평가했다.
19세기 초의가 말한 동다의 정신이 한국 다도의 천년 역사 속에 도도히 흘러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