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2015. 4. 27. 12:27우리 역사 바로알기

 

 

 

       가야 역사

2015/04/07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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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락기》 아마도 《가락국기(駕洛國記)》라는 책을 말하는 듯하다. 이 책에 설명이라고 할 수 있는 찬(贊) 부분에 관련 신화가 적혀 있다. 하늘에서 자줏빛 집이 내려온 것인지 배너가 드리워진 것인지 여하튼 자주빛과 관련된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소문을 들은 다섯 가야 사람들이 모두 모여 가보니 여섯 개의 둥근 알이 놓여 있었다. 이 가운데 다섯 개는 다섯 가야 나라가 각각 하나씩 도읍으로 가지고 돌아갔다. 나머지 한 개만 이 성에 남겨졌다. 나중에 부화가 되어 닭처럼 머리〔首〕부터 나온 것인지 노(露)출될 것인지 수로왕(首露王)이 되었다. 나머지 다섯 개 잘 부화되어 역시 다섯 가야의 왕이 되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외에도 가야(伽耶), 가야(伽倻), 가라(加羅), 가락(駕洛), 임나(任那)라는 나라가 있다. 서기전 1세기부터 서기 6세기 중엽까지 주로 경상남도 대부분과 경상북도 일부 지역에 있던 나라다. 오가야(五伽耶)라는 이름도 있다. 즉 ‘다섯 개의 가야’라는 말이다. 다섯 가야라고 하면 첫째, 아라가야(阿羅伽耶) 또는 아야가야(阿耶伽耶)가 있다. 가라를 가야라고도 하니 아라도 아야라고도 할 수 있나 보다. 고려시대의 함안(咸安)이다. 둘째, 고령가야(古寧伽倻)가 있으며 지금의 함녕(咸寧)에 해당한다. 셋째 대가야(大伽耶)는 지금의 고령(高靈)이다. 넷째, 성산가야(星山伽耶)는 지금의 경산(京山)으로 벽진가야(碧珍伽耶)라고도 한다. 다섯째 소가야(小伽耶)는 지금의 고성(固城)이다.


그런데

금관가야(金官伽耶)라는 나라가 하나 더 있다. 금관가야는 이 다섯 가야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런데도 《본조사략(本朝史略)》에는 금관가야를 넣고는 비화가야가 있었던 창녕(昌寧)에 있다고 기록했으니 잘못이다. 또 《본조사략(本朝史略)》을 잘 살펴보면, “고려 태조(太祖)때인 940년에 오가야(五伽耶)의 이름을 고쳤다. 첫째는 금관가야(金官伽耶)라고 하니 지금의 김해부(金海府)이다. 둘째는 고령가야(古寧伽耶)라고 하니 지금의 가리현(加利縣)이다. 셋째는 비화가야(非火伽耶)니 지금의 창녕(昌寧)이라고 하나 아무래도 고령(高靈)의 잘못인 듯하다. 나머지 둘 즉, 넷째 아라가야(阿羅伽耶)와 다섯째 성산가야(星山伽耶)이다”라고 되어 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성산가야(星山伽耶)는 벽진가야(碧珍伽耶)라고도 한다. 다만, 앞부분과 《본조사략》에 나온 다섯 나라의 이름과 순서가 다르다. 앞에서는 금관가야를 빠뜨리고 오가야라고 했고, 뒤에서는 소가야를 빠뜨리고 오가야라고 했으니 무엇이 옳은지 모르겠다.

   그런데 위의 밑줄 친 부분이 본문에는 적혀 있지 않고 생략되어 있다. 아마도 출판할 때 누락한 듯하다. 이렇게 《삼국유사》에는 누락된 부분이 적지 않다. 그래서 미완성본이니 저자가 한 명이 아니라고 하는 듯하다. 이 부분의 저자도 일연 스님이 아닐 수도 있다고 하니 한 번 염두에 두고 다음도 살펴보자.

고구려가 일어난 북부여(北扶餘)

‘옛 기록’이란 뜻을 가진 《고기(古記)》라는 책에는 《전한서(前漢書)》라고 되어 있으나, ‘전한’의 잘못인 듯하다. “전한(前漢)시대 선제(宣帝)때로 기원전 58년의 일이다. 부처님 탄생일과 같은 4월 8일에 하늘나라의 황제인 천제(天帝)가 흘승골성(訖升骨城)에 내려왔다. 고려 때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가 강성할 때는 거간을 높여서 대요(大遼)나라라고 했나 보다. 이 대요나라의 의주(醫州)로 비정되는 홀승골성에 천제는 다섯 용이 끄는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와서 도읍을 정하고는 왕이 되었다. 나라이름을 북부여(北扶餘)라고 하고, 스스로 해모수(解慕漱)라고 했다.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扶婁)라 하니 해(解)로 성씨를 삼은 것이다.

   그런데 하늘나라 황제라는 이름의 천제 위에 다시 상제가 있나 보다. 아니면 하늘이 아닌 땅의 왕이 된 다음에 강등이 된 것인지, 이 해부루왕은 상제(上帝)의 명령으로 도읍을 동부여(東扶餘)로 옮겨야 했다. 동명제(東明帝)인 주몽이 이 자리를 차지한 걸 보니 동명제 때문에 비키라고 했나 보다. 해부루왕이 동부여로 비키자마자 동명제는 북부여(北扶餘)가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서 졸본주(卒本州)에 도읍을 정하고 졸본부여(卒本扶餘)라고 했다. 이 왕이 고구려(高句麗)의 시조(始祖)이다. 고구려에 대한 내용은 다음 조목에 자세하니 여기서는 간략하게만 적는다.

* 이글은 일연스님이 그렇게 생각했었을 수 있다는 필자의 견해에 기반한 재해석이다. 《삼국유사》자체가 일연의 제자들을 포함한 후대인들에 의해서 재편되었을 것으로 보이므로 원문(진한 글자) 내용 일부를 조목 안에서 순서 등을 재배치하는 등 변경했음을 알린다.

하도겸 | 칼럼니스트 dogyeom.ha@gmail.com

 

[출처] 가야|작성자 임기영